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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속에서 타인과 춤추는 것

  • 작성자 금안백
  • 작성일 2026-07-30
  • 조회수 315

1. 삶은 부조리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할 겨를없이 내던져진 삶은 애초에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고통과 쾌락을 둘 다 얻을 수 있고 어찌 보면 고통보다 쾌락을 더 많이 누리는 삶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도박에 불참할 기회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이듬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1부 중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누군가가 난데없이 맡긴 짐을 떠안게 되고 이 때문에 버스를 놓칠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 또한 이 짐처럼 누군가 세상에 맡겨 두고 찾아가지 않은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이런 생각은 선택의 기회 없이 탄생함을 인식한 것이다. 또한 짐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건 사실상 짐을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자가 삶이란 부조리 속에서 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미 태어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텐데, 그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부조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타인이다. 다른 이가 한 사람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김이듬은 타인을 내면화하는 걸 그 의미로 봤다.

  김이듬에게 타인은 내면화가 가능한 존재다. 2부의 <나의 이방인 2>에서, ‘는 화자인 와 대화할 수 있지만, ‘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 ‘내게도 절친이 있다고/텅 빈 의자 위의 네가/나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같은 문장들은 에게 타자이면서도 내면화되는 대상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대신 분노하기도 하는 타인이지만, ‘안에서 내면 안에서 나를 감시하기도 한다. 이는 , ‘우리는 불화한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와의 틈을 인식하고 갈등하는데, (내면 속 나를 감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기검열의 주체로 를 삼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다른 사람이 맡긴 짐 때문에 환승 버스를 타지 못하고 터미널에 계속 남는다. 시 속에서 화자가 누군가 맡긴 짐으로 스스로 생각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세상에 맡겨진 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화자에게 짐을 맡긴 건 화자가 그 사람을 내면화했다는 은유이다. 한 사람에게 원했든 아니든, 내면화된 타인은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할 의미라는 것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그러나 타인은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타인에게 의미라고 해도 타인의 삶은 당신이 의미가 아닌 부분에서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이 의미인 부분을 포함하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1부의 <공용어 통신>에서 우리는 서로 간의 소통을 위해 다양하게 노력한다. 서로의 속셈을 알기 위한 셈여림은 이탈리아어로한다거나, 부연은 에스키모어로 공용어를 정해 소통을 시도한다. 이는 개개인의 고유한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은 이유로 공용어를 활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서로 간의 간극으로 인해 좌절된다. ‘우리사이에는 커다란 어항밤의 지하철 선로가 놓여 있어 제대로 상대의 모습을 볼 수조차 없고, 서로가 가까울수록 안 들리는 문제도 있다. 이는 타인과 본인이라는 극복할 수 없는 위치상 각자 상대의 본심을 고스란히 볼 수가 없고, 소통을 시도할수록 이런 문제는 심화된다는 시인의 생각이다. 소통에 애쓰는, 그러나 애썼기 때문에 오히려 어색함은 시의 첫 연에서 도치법을 활용해 독자가 읽기에 부자연스럽게 느끼도록 쓰인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래도 사람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김이듬도 이를 긍정한다. <공용어 통신>에서도 타인은 소통해야 하는 대상이다. 또한 <그때보다 지금이 나은지>에서는 타인과의 소통이 실패한 경우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화자와 대화하는 상대는 화자가 애를 맡길 데가 없고, 심리적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일어난 실수를 갖고 화자를 꾸중하는 그릇된 반응을 보인다.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애 엄마가 무책임하게 혼자 어딜 나다녀!’하며, 자식 때문에 심리적으로 힘든 상황인 화자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앞선 인용문이 시의 마지막을 장식함으로써 독자가 부정적인 감정을 여운으로 느끼게 하는데, 이는 시인이 이런 상황을 옳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단서이다.

  그러면 김이듬은 타인과 어떻게 해야 잘 함께하는 거라 여길까? <쪽에서 쪽빛을 얻기까지>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같이 번거롭게 색깔을 만드는 것과 상대의 속뜻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색깔은 타인과 함께함으로써 만들 수 있는, 자신과 그 타인과의 관계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이기도 하고, 타인과 자신 각각의 색이자, 관계를 감싸는 색깔의 원료이다. 그것은 볼 수 없는 색이고, 일부일 뿐이지만, 그 색에 따라서 그 관계를 부르는 이름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색깔을 만들기 위해선 그 과정에 있어 상대의 속뜻을 신경 쓰는 것 없이, ‘친구의 삶을 구하려 들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쪽풀을 뜯는친구에게 개입하지 않고(’친구항아리를 씻는‘ ’에게 개입하지 않은 것처럼) 그저 묵묵하면 될 뿐이겠다. 그러면 분명히 친구의 고유한 색깔색깔을 물들일 것이다. 아마 그 결과는 관계의 색깔, ‘친구에게 물들인 결과 색깔과 똑같지 않지만 비슷할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의 삶에 억지로 깊이 개입하고, 상대의 속뜻을 알고자 하는 게 아닌 그저 곁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색이 각자의 색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시인의 뜻이다.

 

3. 비극을 같이 하는 것

 

  그러나 시인은 모순을 보인다. 3부는 시인의 집과 마을이 불탄 경험을 제시하는데, 이 같은 비극이 일어났을 때, 시인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모습과 맞지 않게 행동한다. <봄날 정경>에서, 화자는 화재에 대한 트라우마와 할머니를 잃은 슬픔에 빠져있다. 이때 이웃이 머리맡에 화자 대신 이재민 지원 의류를 가져다 놔주고, 앞선 시 <초봄 대피소>에서는 이웃들이 비극을 당했음에도 삶을 사랑하는 모습을 봤으면서, 막상 미래에 자신이 노령의 이웃들을 돌봐야 한다는 걸 깨닫고는 그들을 회피한다. 이는 위기의 상황에서 남과 잘 지내기보다는 이기적이게 되는 인간의 나약함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결국 시인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도 있다. <초봄 대피소>의 마지막 연, ‘속절없이 사랑한다의 주체는 모호하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이웃들일 수도 있지만, 그 이웃들을 사랑하는 화자, 시인일 수도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에서도 시인은 자연은 원망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남자로 오해받는 동생과 여자 화장실로 들어온 동생을 보고 소리친 아주머니를 보면서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상황 자체만 원망할 뿐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애시당초 시인은 비극적인 상황의 타인에게 매우 호의적이다. <동경 게스트하우스>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자와 노인 모두 갈데없이 떠도는 존재인데, 화자는 노인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준다. 특히 <첫눈은 매년 첫눈이 된다>를 생각하면, 시인의 이런 태도는 흥미롭다. 시에서 비극은 눈이 오는 것과 같은 흔하고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아무런 악의가 없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버스에서 화자가 마스크를 누추하게 젖은 사람에게 주지 않아 그가 추운 날씨에 승차 거부를 당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쉽게, 심지어 아무도 잘못하지 않아도 자연 현상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게 비극이지만, 그래도 서로 돕고 더불어 살자는 시인의 은연중 태도가 보였다. 김이듬이 막상 자신에게 아주 큰 비극이 다가왔을 때, 모순적인 면을 보였던 건 그의 태도가 잘못됐다거나 거짓됐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4. 저녁에 같이 춤추는 것


  비록 타인이 삶의 이유가 되지만 이해할 수는 없고, 비극이 눈처럼 만연한 세계지만, 시인은 편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원한다. <소비뇽>에서 야생은 천성의 다른 이름이다. 친구와 야생하자는 것은 어떠한 허물도 없이 서로의 본모습을 보여주며 함께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친구가 출판사를 이전한 걸 무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축하해주려 소비뇽을 사들고 가는 것은 친구를 존중하며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는 태도이다.

    <애프터눈 티>에서 그러한 시인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화자는 친구들을 만나 함께 춤을 추는 상상을 하며, 그 옷차림은 느슨한 순면 원피스처럼 편하고누구나 쉽게 벗길 수 있는 것으로 그린다누구나 쉽게 벗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친구들에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지무지 평범한 오후, 흐리고 서늘한 날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끝맺음은 이러한 일상을 무척 가치 있게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김이듬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는 타인은 이해할 수 없고, 비극이 만연한 세계에서도 서로 일상을 함께 하고, 삶의 의미가 되자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금안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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