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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 대상을 환원하지 않는 시선에 대하여

  • 작성자 미빈
  • 작성일 2026-07-30
  • 조회수 315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 오래도록 어둡고

>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 올해 봄날은 잿더미

> 암흑세계였다


>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 더듬어 시를 켰다

> 절벽이 보였다


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


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


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급하게 정리하기보다, 상실이라는 감정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과정처럼 읽혔다.


그러나 1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현기증」이었다. 이 시를 읽으며 처음으로 이 시집이 단순히 개인의 상실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비 색깔은 나비가 지닌 난각막처럼 얇은 날개 색깔로 판명된다

> 마치 날개가 나비의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이 구절은 나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누군가를 볼 때 그 사람의 일부만을 보고도 전부를 안다고 쉽게 생각한다. 눈에 가장 잘 보이는 특징 하나를 그 사람 전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규정한다. 마치 나비의 날개만 보고 그것이 나비의 전부라고 단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구절은 시집을 읽으며 처음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문제의식을 발견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물론 이때만 해도 그것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이라고까지는 여기지 않았다. 그저 한 편의 시가 던지는 인상 깊은 질문 정도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이후의 작품들을 읽는 동안 계속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결국 이 시집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2부 ― 안으로 접히는 시선과 더 선명해지는 질문


2부에 들어서면 시집의 시선은 1부와 달리 바깥에서 안쪽으로 조금 더 깊게 들어간다. 1부가 사람과 풍경을 오래 바라보며 세계를 관찰하는 장이었다면, 2부는 그 시선이 결국 화자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처럼 읽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부분이 곧바로 화재를 정면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인은 여전히 사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과거와 현재를 차분히 놓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더 오래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지점을 읽으며, 2부가 화재를 말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자, 무너진 뒤의 삶을 바로 설명하지 않고 천천히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 흐름 속에서 「시험 범위」는 1부의 「현기증」에서 처음 감지되었던 문제의식을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시로 읽혔다. 이 시가 보여 주는 핵심은 결국 사회가 한 사람을 얼마나 쉽게 판단하고, 그 판단을 마치 당연한 사실처럼 소비하는가에 있다. 한 개인이 처한 복잡한 상황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늘 이해하기 편한 표면뿐이다. 그래서 이 시는 단순히 한 사람의 사정을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을 빠르게 결론 내리는 사회적 시선 자체를 겨냥한다. 나는 여기서 1부의 「현기증」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1부에서 나비의 날개를 보고 나비 전체를 판명해 버리는 시선이 문제로 제기되었다면, 2부의 「시험 범위」는 그 판단의 방식이 사회 전체로 어떻게 확대되는지를 더 분명하게 보여 주는 셈이다. 두 시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단면으로 환원하는 시선에 대한 문제의식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밀어 올리고 있다.


그리고 2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시는 「풀은 노래한다」였다. 처음 이 시를 읽을 때에는 공공기관 정원의 풍경을 차분하게 그려 낸 작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여러 번 다시 읽으면서 이 시는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가, 그리고 안에 있는 존재들 가운데서도 누가 끝내 남고 누가 밀려나는가’를 묻는 시처럼 읽히기 시작했다.


시의 첫 장면에서 ‘너’는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공공기관 정원 안에 있다. 그 공간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경계가 존재하는 장소다. 시는 그 경계를 특별히 설명하지 않지만, ‘관문을 통과한 자’, ‘벽을 넘은 자’라는 표현을 통해 안과 밖을 구분하는 질서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때 시인은 그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있는 것이 자격인지, 우연인지, 혹은 누군가를 배제한 결과인지를 계속 질문한다.


이어 등장하는 능소화 역시 이러한 질문을 더욱 확장한다. 능소화는 담을 넘어온 존재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단순히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담을 넘는 건 능소화의 실력이었나, 실수였는가, 자질이자 과시였던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경계를 넘어온 존재를 사회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질문은 단순히 능소화만을 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공간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노력과 자격으로 받아들이는지, 혹은 주제넘은 월경으로 바라보는지 끊임없이 판단한다. 시는 그 익숙한 판단의 방식을 조용히 드러내며, 독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돌려준다.


그러나 이 시의 질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설령 같은 공간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존재는 끝까지 남고 보호받지만, 어떤 존재는 제거의 대상이 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꽃과 풀의 대비였다. 능소화가 담을 넘어와 피었다가 추락하는 장면 이후, 정원 안에서는 상사화와 메리골드, 귀한 야생화들이 보호받는다. 같은 식물이라도 어떤 존재는 보호받고 어떤 존재는 잘려 나간다. 이 차이는 곧 이 시집 전체에서 반복되는 질문, 즉 ‘무엇이 보호받고 무엇이 지워지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자연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는 너와 공공기관이라는 높은 시점에서부터 점점 더 낮은 곳으로, 잘려 나가는 풀과 흙 속의 벌레와 지렁이까지 시선을 내린다. 처음에는 넓은 정원에서 시작한 시선이 점차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존재들 쪽으로 이동하는데, 이 과정이야말로 「풀은 노래한다」가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하찮다고 여겨지는 존재들까지 시선이 닿는다는 점에서, 이 시는 단순한 풍경시가 아니라 시선의 윤리를 묻는 시였다.


무엇보다 이 시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결국 그 시선이 사람에게까지 확장된다는 데 있다. 


>너는 잡초 같다는 얘길 듣곤 했다


라는 구절은 자연의 언어가 사회의 언어와 겹쳐지는 순간을 만든다. 누군가는 화초처럼 보호받고, 누군가는 잡초처럼 제거해야 할 존재로 취급된다. 이 문장을 지나면서 나는 이 시가 더 이상 정원 안의 풍경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느꼈다. 정원은 곧 사회가 되고, 식물의 분류는 사람을 분류하는 방식과 겹쳐진다. 그래서 이 시가 좋았던 이유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처음부터 직접 선언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을 끝까지 바라본 결과 독자가 스스로 사회를 발견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시인은 “사회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정원과 꽃과 풀과 벌레를 오래 바라보게 하고, 그 끝에서 독자가 경계와 배제, 보호와 제거의 구조를 스스로 읽어 내게 만든다.


1부와 2부를 읽으며 나는 이 시집이 단순히 화재라는 사건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현기증」과 「시험 범위」는 사람을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쉽게 판단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고, 「풀은 노래한다」는 하나의 풍경을 끝까지 응시함으로써 보호와 배제, 안과 밖의 경계를 스스로 발견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시집은 화재보다도 사람과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더 오래 머물러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생각을 확신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남아 있었다. 시인은 사람을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시집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사람을 하나의 이미지로 소비하는 방식을 비판한다면, 왜 시인은 자신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계속 시 속으로 가져오는 것일까. 처음에는 이 지점이 시집의 모순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쉽게 결론짓는 태도를 경계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방식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의문은 1부와 2부를 읽는 동안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를 한 편씩 읽을수록 더 커져 갔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이 시집을 ‘화재를 겪은 시인의 시집’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고, 시인은 그런 내 예상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3부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부 ― 모순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의미


3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1부와 2부를 읽으며 생겼던 의문을 다시 불러오고 싶다. 이 시집은 분명 화재라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읽는 동안 계속 더 강하게 남았던 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시인은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반복해서 드러내는 한편, 동시에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매우 사적인 방식으로 밀어 넣는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다른 시들에서는 타인을 오래 관찰하고 때로는 꽤 선명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이 시집이 스스로의 태도와 충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즉 타인을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시 속에서는 타인을 다시 자기 시선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졌다. 처음에는 이 지점이 모순처럼 느껴졌다. 사회가 타인을 단순한 이미지로 소비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시인이 왜 자신의 이야기는 이렇게까지 계속 들려주는지, 그리고 왜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게 또렷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지 그 이유를 2부까지는 끝내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3부는 단순히 화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구간이라기보다, 그동안 쌓여 있던 질문들이 비로소 더 분명한 형태를 갖추는 구간처럼 읽혔다.


이 전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부에서 가장 강하게 불편했던 시, 「그때보다 지금이 나은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작품의 설득력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사회가 한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는 구조, 그리고 여성의 돌봄과 부재, 고립을 드러내려는 의도는 분명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시는 너무 많은 것을 한 편 안에 밀어 넣고 있고, 설명이 더해질 부분은 오히려 빠져있진 않은가 하는 인상도 남겼다. 아이를 방치한 엄마, 피씨방과 친구, 절도범인 남편, 남편의 아동학대 시도, 혼자 출산한 기록, 그리고 그 모든 상황 위에 덮이는 사회의 비난까지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정작 무엇을 가장 말하고 싶은지 흐려지는 듯했다. 읽는 동안 가장 크게 걸렸던 것은 친구의 존재였다. 시 안에 친구가 등장하는데도 왜 아이를 맡길 사람은 전혀 없는지, 왜 그 가능성은 끝내 열리지 않는지 의문이 남았다. 개인적으로는 설령 그 친구라는 사람이 영 믿음직하지 못한 존재더라도, 2살의 아이를 혼자 두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시인이 모든 빈칸을 메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생략이 이 시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는 끝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시가 독자를 일부러 불편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쉽게 비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쉽게 이해할 수도 없는 자리에 독자를 세워 두는 방식으로. 나는 이 시가 혹시 엄마를 용서하라는 뜻인지, 혹은 독자를 천칭 위에 올려 두고 흔들어 보려는 것인지 끝까지 헷갈렸다. 그러나 그 헷갈림은 단순히 한 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불편함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는 내가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들키게 만들었다. 한 사람의 사정을 들으면 곧바로 동정하거나 비난하거나, 최소한 어느 한쪽으로 기울고 싶어지는 것이 독자의 습관이라면, 이 시는 그 습관을 편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 불편함은 결국 3부의 끝으로 이어진다. 왜 시인은 이렇게까지 독자가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자리에 머물게 하는 걸까. 왜 어떤 시는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오히려 더 많은 빈칸을 남겨 두는 걸까. 나는 이 질문을 붙든 채, 앞선 1부와 2부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1부에서 시인은 바깥을 오래 바라보며 사람과 풍경을 관찰했고, 2부에서는 그 시선이 안쪽으로 접히며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3부에서 독자를 흔들어 놓는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난해함이 아니라, 시집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태도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을 쉽게 결론짓지 않겠다는 태도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표제작이 등장한다. 나는 이 배치가 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앞선 시들이 계속해서 사람을 단면으로 판단하는 시선에 의문을 던지고 난 뒤에야 표제작이 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는 단순히 화재 이후의 감정을 고백하는 시가 아니라, 그동안 쌓여 온 의문들을 한 번에 불러오는 시처럼 읽혔다. 처음에는 내가 이 시집을 화재를 겪은 시인의 기록으로만 이해하려 했지만, 이 시에 이르러 그 해석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집이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화재 그 자체가 아니라, 화재를 지나온 뒤 타인을 함부로 결론짓지 않으려는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표제작은 앞선 시들에서 축적된 질문들을 단숨에 해소하는 대신, 그 질문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쌓였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때보다 지금이 나은지」를 읽으며 남아 있던 불편함도 이 지점에서 다시 다른 의미를 얻는다. 그 시가 끝내 독자를 불편한 자리에 세워 두었던 이유는, 특정 인물을 옹호하거나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처지를 쉽사리 정리해 버리려는 독자의 반응 자체를 흔들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보인다. 표제작을 지나고 나면 그 불편함은 더 이상 단순한 서사의 부족이나 생략의 문제로 남지 않는다. 오히려 시집 전체가 독자에게 요구한 하나의 태도, 즉 누군가의 삶을 곧바로 결론으로 바꾸지 않으려는 태도와 연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는 앞선 시들을 다시 읽게 만드는 중심에 가깝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단순한 온건함이나 낭만적인 용서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는 화재 이후의 상실을 말하면서도 그 상실을 누구의 잘못인지로 곧장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움’으로 정리되는 감정의 방향보다, 그런 정리가 얼마나 쉽게 이루어지는지를 되묻는다.


>자연은 좋겠다 폭풍이든 초대형 산불이든 지진이든 일으켜도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 대부분 인재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니까


라는 대목은 바로 그 지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는 재난의 원인을 추적하는 사회의 습성을 보여 주면서도, 그 원인 규명이 곧바로 사람에 대한 총체적 판단으로 이어지는 방식을 경계한다. 즉, 이 시가 멈추고 있는 곳은 책임의 유무가 아니라 책임을 사람 전체의 본질처럼 다루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시의 후반부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가족의 일화를 덧붙인 장면이 아니라, 표면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실제 존재 사이의 간극을 다시 보여 주는 대목이다.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다”라는 설명은 누군가를 본다는 일이 얼마나 쉽게 외형의 판정으로 굳어지는지 드러낸다. 그러나 시는 그 판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판정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를 보여 주며, 사람을 보이는 대로 결론짓는 방식 자체를 비틀어 놓는다. 이 부분은 1부의 「현기증」에서 이미 예고되었던 문제의식과 이어진다. 날개의 색만으로 나비를 전부 설명하려는 시선이 문제였다면, 표제작에서는 성별과 외형, 말해지는 정보와 실제 존재가 어긋나는 순간을 통해 그 문제가 한층 더 복합적인 차원으로 확장된다. 시집은 결국 사람을 하나의 기준으로 분류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그리고 그 쉬운 분류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 준다.


그래서 표제작을 읽고 나면 시인의 태도도 새롭게 보인다. 이 시집은 타인을 오래 바라보며 쉽게 결론내리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출발하지만, 3부에 이르러 그 태도는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시인은 화재를 겪은 자신을 하나의 사건으로만 남겨 두지 않으려 하며, 동시에 그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타인을 함부로 정리하는 일도 피한다. 결국 이 시집에서 반복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라는 문장은 미움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하나의 감정이나 하나의 사건으로 환원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가깝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시인이 화재 이후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달라진다. 예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지고, 더 오래 머물고, 더 쉽게 결론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변화는 시인의 처음 태도를 부정한다기보다, 태도를 더 넓고 깊은 윤리로 확장한 결과로 읽힌다.


따라서 3부는 화재를 통과한 뒤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 주는 장이라고 생각한다. 1부와 2부에서 이미 드러났던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이 지점에서 더욱 깊어진다. 이제 시인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같은 시선을 적용한다. 화재를 겪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자신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일 수는 있지만, 그 사건 하나만으로 자신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타인의 삶 역시 하나의 사건이나 하나의 장면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결국 표제작은 앞선 시들에서 흩어져 있던 문제의식을 하나의 방향으로 모아 준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론을 내리는 일이 아니라, 끝내 하나의 결론으로 남겨 두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4부에 이르러 더욱 조용하고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다시 한번 이어진다.


4부 ― 끝내 결론짓지 않는 시선


4부에 들어서면 시집은 다시 한 번 시선의 방향을 바꾼다. 3부에서 화재를 통과한 뒤 사람을 하나의 사건으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분명해졌다면, 4부는 그 태도가 일상적인 관계와 감정 속에서도 계속 유지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듯하다. 이 부분의 시들은 앞선 부들보다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을 바라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쉽게 이해하거나 규정하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끝까지 남는 것은 판단보다 관찰에 가까운 태도, 그리고 결론을 유보하는 시선이다.


그 점에서 「넌 아직 재밌니」는 4부의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시로 읽혔다. 이 시에서 시인은 ‘너’를 향해 질문하지만, 그 질문은 비난이나 단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상대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잘못된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고, 부럽다고 느끼는 순간조차 미움으로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그대로 남겨 두고, 그 불완전함까지 포함해 타인을 바라본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이 끝내 상대를 자신의 기준 안에 가두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느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판단의 이유가 되지 않으며, 부럽다는 감정 역시 곧바로 미움으로 번지지 않는다. 이 시는 바로 그 미세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타인을 대하고 있다.


이 점은 표제작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히 용서하거나 모든 것을 긍정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사람을 하나의 사건이나 하나의 이미지로 결론짓지 않겠다는 태도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4부에 이르러 하나의 관계 속에서 실제로 실천된다. 화자는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끝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하나의 결론으로 정리하거나,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하거나, 미워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4부에서 또 한가지 주목한 시가 있다. 「빌러비드」는 처음 읽었을 때 왜 4부에 배치되어 있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시였다. 앞선 시들처럼 바로 일상의 관계를 다루는 작품도 아니고, 표제작처럼 시집 전체의 문제의식을 직접 묶어 주는 시도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이 시 역시 4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러비드」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소유와 강요로 바뀌는지를 보여 주며, 가까운 관계일수록 오히려 상대를 자기 뜻대로 붙잡으려는 욕망이 쉽게 개입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4부가 끝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 준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를 내 방식대로 고치거나 붙들어 두는 일이 아니라, 끝내 그 사람의 자리를 남겨 두는 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4부에서도 시인은 앞선 부들에서 보여 주었던 시선을 놓지 않는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부럽다고 해서 미워하지 않으며, 사랑조차 상대를 소유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끝까지 밀고 간다. 그렇기에 4부는 1부에서부터 시작된 관찰의 태도와 3부에서 도달한 윤리가 일상과 관계의 층위에서 다시 확인되는 자리로 읽혔다.


처음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단 하나였다. 시인의 집이 불에 탔다는 사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를 기록하고, 그 상실을 견뎌 내는 과정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시집을 덮고 난 지금, 내가 가장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은 화재라는 사건이 아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사람을 하나의 결론으로 남겨 두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이 시집은 사회가 타인을 단순한 이미지로 소비하는 방식을 비판한다. 동시에 시인은 자신의 가장 사적인 경험을 숨기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두 태도가 서로 충돌한다고 생각했다. 타인을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왜 자신의 이야기는 이렇게까지 드러내는지, 왜 타인을 관찰하고 해석하면서도 그들을 판단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 나니 그것은 모순이 아니었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어떤 결론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도 하나의 사건이나 하나의 장면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비평 역시 내가 주목한 몇 편의 시를 중심으로 읽어 낸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시집에는 내가 충분히 다루지 못한 문제들도 많다. 여성의 삶과 돌봄, 사회적 폭력, 재난 이후의 상실, 가족, 자연과 인간의 관계, 기억 등 한 번의 읽기로는 모두 붙잡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이 겹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비평이라기보다 내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질문의 감상에 가깝다. 여전히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 시집의 깊이를 보여 주는 증거일까 싶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다시 자서를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더듬어 시를 켰다”라는 구절을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서 불을 켠다는 의미로 읽었다. 그러나 시집을 읽어나갈수록 ‘켰다’라는 동사가 자꾸 마음에 남았다. 시를 ‘썼다’도, ‘읽었다’도 아닌 ‘켰다’라는 표현은 의도적인 선택처럼 느껴졌다. 그때 문득 ‘악기를 켜다’라는 의미가 함께 떠올랐다. 현악기를 켠다는 것은 단숨에 끝나는 행위가 아니라 손끝으로 현을 더듬으며 몸과 시간을 들여 소리를 이어 가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더듬어’라는 말도 새롭게 읽혔다. 앞이 보이지 않아 길을 찾는 모습인 동시에, 현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소리를 만들어 내는 손의 감각처럼 느껴졌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그 점이 자체발광과도 이어지는 듯 했다.


이러한 해석은 시집을 끝까지 읽은 뒤 더욱 분명해졌다. 김이듬의 시는 하나의 장면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일상이든 비일상이든, 그 장면 속에서 사람들이 보지 못한 부분을 끝까지 밀고 들어간다. 그렇게 사유를 이어 간 끝에서 자서의 마지막 구절인 “절벽이 보였다” 역시 새롭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막연한 절망이나 추락의 이미지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사유의 끝에서 마주하는 경계처럼 읽힌다. 더 이상 밀고 나갈 수 없는 자리, 그러나 끝내 눈을 돌리지 않고 바라본 끝에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자리 말이다. 무엇보다 시인은 절벽에 섰다고도, 떨어졌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보였다”고 말할 뿐이다.


어쩌면 이 시집 역시 그런 방식으로 끝난다. 답을 내리기보다 질문을 남기고, 사람을 설명하기보다 오래 바라보고, 이해했다고 말하기보다 함부로 결론짓지 않는 일. 나는 처음에 이 시집을 화재를 겪은 시인의 기록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한 사람을 끝내 하나의 결론으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윤리를 기록한 시집으로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작품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확신보다, 앞으로도 다시 읽고 싶다는 마음을 남겼다. 아마 이 시집은 다시 읽을 때마다 또 다른 절벽을 보여 줄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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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안백
  • 2026-07-30
살아내기 위한 언어-김이듬의 시 세계를 통과하며 보는 살아내는 언어

나는 늘 믿어왔다. 삶과 문학. 삶과 시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시는 삶의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삶은 시를 지탱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기에 나는 늘 내 삶을 바탕으로 문학을 써왔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에는 나의 순간순간을 이룬 ‘학교’,‘기침’,‘소리’,‘가족’,‘친구’,‘그리움’,‘이방인’,‘유령’과 같은 단어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내 문학 세계를 이끌어왔다. 내 내면의 세계에서부터 외면의 타자에게까지 한 사람의 삶이 다른 한 사람에게 닿기를 바라며. 나는 끝없이 순간들을 마주하며 활자를 컴퓨터 화면에 새겼다. 그러면서 하나의 생을 담은 문학을 추구해 왔고 꿈꿔 왔다.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내 경험과 삶을 텍스트 안에 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행위들을 했다. 하루를 끝까지 살아내는 것. 감정과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글을 쓸 수 있는 물건 앞에 가서 글을 쓰는 것. 이를 실천하기 위해 나는 글과 삶에 전념한다는 태도로 살아왔고 문학을 해왔다. 하지만 일상과 삶을 텍스트로 환원할 때 늘 빈틈이 생겼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문학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자 기본적인 수단이 문자라는 상징체계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의미론적 특징을 나타내는 기호 삼각형{Semiotic Triangle}은 기호[문자], 지시물, 개념 사이의 관계를 그려낸 것이다. 이 개념 안에서 기호와 지시물의 관계는 간접적인 영향을 가진다. 대표적인 예시로 ‘나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 실제 있는 나무를 가지고 수필을 쓰거나 소설과 시를 쓴다 할 때, 텍스트 안에 적힌 문자 ‘나무’는 실제 필자가 바라보고 쓴 나무가 아닌 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문자가 함유하는 것은 단순 개념이지 지시물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삶 전체를 온전히 텍스트 안에 문자로 전환하여 넣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이런 문자의 특성은 필자가 생각하는 것을, 독자가 온전하고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그렇기에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은 자신과 독자들이 생각하는 사물의 심리 영상의 간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묘사하고 서술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이런 식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이는 문자의 빈틈을 메우는 과정이며 타자와 세상과 소통하는 글쓰기에서 가장 기초적이면서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하지만 때때로 이렇게 구체적으로 쓰는 과정 안에서, 한 글 안에 많은 정보를 풀고, 많은 언어를 쓰며 과한 감정을 표출하게 되기도 한다. 실제로도 글을 쓰다 보면, 많은 습작생, 일반 초고를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중간중간에 보이기도 한다. 이런 과잉은 문학. 특히 함축성을 중요시하는 시에서는 문제가 되는 부분이 된다.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서 시에서 함축의 방식이 조금씩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 가고 있다. 고전적인 운문의 함축 방식보다는 서술하는 호흡으로 삶의 단면을 함축하는 산문시가 지금 한국 시단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진다. 대표적으로 2026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자인 임유영

  • 송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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