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시를 킨다는 것
- 작성자 신기루
- 작성일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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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337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서문에 시가 하나 있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수 있을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
화자는 차가운 빛을 만들고 싶어 한다. ‘차가운‘은 불에 반대되는 빛의 속성이다. 이 빛은 불이 만든 암흑세계를 비추는 역할을 한다. 화자는 스스로 이 빛을 내는 대신 시를 켜서 빛을 낸다.
다음은 시 ‘봄날 정경’ 의 일부다.
…
불타는 숲
연기가 치솟는 마을
재가 된 구름은 엉겨 붙지 않는다
사람들의 불 연관 비유에
나는 문제를 느끼지만
체액이 끓어오르거나 그러진 않는다
체험하지 않은 자들의 가소로운 엄살
아름다운 무신경
불타는 숲
연기가 치솟는 마을
타죽은 사람들
…
화자의 마을이 불에 탔다. 인명 피해도 있다. 불길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대피소에 모여 있다.
화재를 겪고 나서 담담한 모습을 보인다. 불가항력의 일 앞에서 무기력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바로 그 담담해 보이는 모습조차 ’시로 표현’하는 데에서 알 수 있다.
’시를 키는‘ 것이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쓰는 시도가 시 안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비춘다. 문제를 느끼지만, 체액이 끓어오르거나 그러진 않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느껴지지만, 핵심은 화자가 체액이 끓어오르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걸 시로 담아낸다는 것에 있다.
<여름 야유회 준비>에서 확연하게 볼 수 있다.
…
가자지구에 억류 중인 인질이나 초강진 쓰나미에 침수된 항구도시나 거대한 화산재 기둥에 관해 쓰지 않는다
…
시인은 ‘쓰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생각의 물꼬를 터 준다. 이 방법은 인질이나 항구도시, 화산재 기둥에 대해 쓰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가져온다.
인질에 대해 쓰는 것은 인질에 주목하게 한다. 항구도시나 화산재 기둥에 대해 쓰는 것도 각각에 주목하게 한다. 그러나 ‘쓰지 않음’ 에 대해 쓰는 것은 심리적 거리를 현저히 좁혀 ‘나’에게까지 주목하게 한다. 재해뿐 아니라 재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들이 재해를 대하는 모습, ’쓰지 않는’ 모습을 보며 독자는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또한 화자는 과격한 감정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몇 걸음 떨어져서 재해를 이야기한다. 독자는 화자를 가깝게 느끼며 자신과 겹쳐 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본인과 관련지어 생각하기에, 직접적으로 쓸 때보다 독자가 현실감 있게 재해를 의식할 수 있다.
시인이 이런 방식으로 시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화재의 영향이라고 짐작해 본다. 어떤 문제 앞에선 미움의 힘이 강하다. 왜 미운지를 말하면서 대상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고, 얼마나 미운지를 말하면서 나의 생각을 보여줄 수 있다. 독자에게도 힘을 가져다준다. 독자는 시를 따라가면서 화자의 감정에 이입하려고 한다. 동시에 화자가 지닌 문제의식을 살펴볼 의욕을 준다.
그러나 미움으로는 불을 이길 수 없다. 불은 미움을 받지조차 못한다. 애석하지만 그런 불을 탓할 수 없다. 대항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사실을 실감했기에, 시인은 대항과, 대항을 지탱하던 미움이 허무해짐을 느꼈을 것 같다. 시인은 미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다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시인은 과격한 표현으로 독자를 설득시키는 대신, 본인의 상황을 담백하게 보여 준다. 생체발광을 위해 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켜졌’기에 시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화자는 특정 인물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도 하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있었던 일을 얘기할 때 화자는, 상황 묘사를 통해 본인의 감정을 헤아리도록 한다. 그러나 은정‘이라는 인물에게 쓴 시에서 화자는 본인의 생각을 구어체로, 보다 허물없이 말한다. ‘너’가 등장하는 시들에서도 다른 시에 비해 감정과 서정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대표적으로 <쪽에서 쪽빛을 얻기까지>에는 ‘네가 사랑하는 세상이 풀덤풀 가시투성이라서, 나는 두 발로 뛰어다니네’ 라는 정서가 잘 느껴지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그러나 독자는 너가 화자와 친분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기에 그러한 표현을 거리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자기가 원하는 대상에게 자기의 말을 할 뿐인 이 솔직함이 독자에게 직접 말하는 것보다 큰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인위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잘’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말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줌’으로 독자를 이입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시로 비추는’ 방법은 독자를 화자-너의 관계에 가까이 데려다 놓지만 그 관계에 포함시키려고 하지는 않는다. 독자가 화자(또는 너)와 같은 감정을 느끼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이것이 ’미움‘을 강하게 말하는 시와 가장 다른 모습일 것이다. 독자는 화자(또는 너)의 감정에 성급히 따라가려고 할 필요가 없다. 화자와 너의 관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어디에 주목할 것인지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지 주체적으로 선택하며 시를 읽을 수 있다.
왜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만 지나갔을까. 한 계절 안에서는 비교적 비슷한 온도가 지속된다. 한 계절이 지나갔다는 것은, 비슷한 온기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았다는 뜻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 온도가 바뀌고서야 봄이었음을 알게 된 것 같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온다. 잿더미 봄이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던 계절이라면, 여름은 어떤 계절이 될까.
시를 켜서 어디를 비출 것인지는 시인 고유의 몫이지만, 비춰진 곳에서 무엇을 바라볼지는 독자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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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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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은 부조리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할 겨를없이 내던져진 삶은 애초에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고통과 쾌락을 둘 다 얻을 수 있고 어찌 보면 고통보다 쾌락을 더 많이 누리는 삶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도박에 불참할 기회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이듬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의 1부 중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누군가가 난데없이 맡긴 짐을 떠안게 되고 이 때문에 버스를 놓칠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 또한 이 짐처럼 누군가 ‘세상에 맡겨 두고 찾아가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이런 생각은 선택의 기회 없이 탄생함을 인식한 것이다. 또한 짐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건 사실상 짐을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자가 삶이란 부조리 속에서 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미 태어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텐데, 그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부조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타인이다. 다른 이가 한 사람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김이듬은 타인을 내면화하는 걸 그 의미로 봤다. 김이듬에게 타인은 내면화가 가능한 존재다. 2부의 <나의 이방인 2>에서, ‘너’는 화자인 ‘나’와 대화할 수 있지만, ‘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 ‘내게도 절친이 있다고/텅 빈 의자 위의 네가/나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같은 문장들은 ‘너’가 ‘나’에게 타자이면서도 내면화되는 대상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나’ 대신 분노하기도 하는 타인이지만, ‘나’ 안에서 내면 안에서 ‘나를 감시’하기도 한다. 이는 ‘나’는, ‘우리는 불화한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너’와의 틈을 인식하고 갈등하는데, (내면 속 ‘너’가 ‘나를 감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기검열의 주체로 ‘너’를 삼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다른 사람이 맡긴 짐 때문에 환승 버스를 타지 못하고 터미널에 계속 남는다. 시 속에서 화자가 누군가 맡긴 짐으로 스스로 생각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세상에 맡겨진 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화자에게 짐을 맡긴 건 화자가 그 사람을 내면화했다는 은유이다. 한 사람에게 원했든 아니든, 내면화된 타인은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할 의미라는 것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그러나 타인은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타인에게 의미라고 해도 타인의 삶은 당신이 의미가 아닌 부분에서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이 의미인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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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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