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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남은 것 (소설 『지상의 밤』 비평문)

  • 작성자 시유레
  • 작성일 2026-08-19
  • 조회수 235

서론



 소설을 읽고 나면 늘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지만,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 이번처럼 소설 한 권을 읽고 나의 감상과 생각을 바탕으로 비평문을 쓰는 것은 처음이기에, 보통의 독서를 할 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상의 밤』을 두세 번 읽으며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은 단순히 소설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했다.


 임선우 작가의 소설집 『지상의 밤』에는 서로 다른 일곱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은 「프랑스식 냄비 요리」와 표제작인 「지상의 밤」이었다. 두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등장하며, 이를 통해 상실 이후에도 사랑과 존재가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두 작품에 나타난 인간의 변형과 물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상실한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치유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1. 「프랑스식 냄비 요리」 - 먹을 수 있는 존재가 된 사랑


 「프랑스식 냄비 요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인공들의 연인이 물, 순무, 도토리와 같은 먹을 것으로 변한다는 설정이었다. 물과 순무, 도토리는 모두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번쯤 접해 보았고, 실제로 먹어 본 적이 있는 것들이다. 소설은 이러한 평범한 것들에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를 겹쳐 놓음으로써, 익숙한 일상 속에 낯선 상실을 끌어들인다. 특히 연인들이 먹을 것으로 변한 뒤 바로 먹는 것이 아니라 요리를 해서 먹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요리는 재료를 고르고, 손질하고, 익히는 과정을 거치는 행위이기에, 변해버린 연인을 요리하는 것은 그 존재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또한 연인들의 변화가 애정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랑이 끝나는 것과 그 사람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사랑이 사라져도 함께했던 시간과 그 사람의 흔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문장은


“타인은 누구나 미지의 영역으로부터 들어온 이방인이다” (소설 『지상의 밤』 中)


라는 문장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까운 존재이지만 끝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연인이 물이나 순무, 도토리로 변하는 설정은 타인이 지닌 알 수 없는 영역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존재가 다른 형태로 나의 삶에 스며드는 과정처럼 느껴졌고, 그것을 요리해 먹는 행위는 변해버린 존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읽혔다. 사랑했던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형태로 나의 삶에 스며들어 남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사랑하는 존재의 변형은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존재가 되는 과정이며, 남겨진 사람은 그 존재를 자신의 삶 속에 품은 채 살아가게 된다.



  2. 「지상의 밤」 - 왜 하필 해파리였을까


 표제작 「지상의 밤」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왜 하필 해파리였을까?’라는 질문이었다. 해파리는 물 밖에서는 살아갈 수 없고, 바닷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바닷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떠다닌다. 이러한 특성은 작품 속 인물의 상태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삶에서 큰 상실을 경험한 사람 역시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정하지 못한 채, 주변의 흐름에 몸을 맡기듯 살아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파리는 인간과 달리 심장이나 뇌, 폐와 같은 기관이 없다. 물론 해파리 역시 하나의 생명체이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생명의 기준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특히 인간에게 심장은 생명을 유지하는 기관인 동시에 사랑이나 감정을 상징하는 신체 부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심장이 없는 해파리라는 존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의 공허함과,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느끼기 어려운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파리가 ‘죽은 존재’인 것은 아니다. 해파리는 인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지상의 밤」은 인간의 모습을 잃는 것과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같은 의미인지 질문하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작품 속 인물들의 이름 역시 이러한 물의 이미지와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수’와 ‘강’이라는 이름은 각각 물을 뜻하는 한자 水와 江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바다는 단순히 해파리가 살아가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기존의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3. 두 작품이 만나는 곳 - 변형된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식


 「프랑스식 냄비 요리」와 「지상의 밤」은 모두 사랑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음식이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이 해파리가 된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변했는가보다, 변한 뒤에도 그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있다. 특히 두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물은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 물은 인간의 삶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몸 대부분은 물로 이루어져 있고, 태어나기 전에는 양수라는 물속에서 존재한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중 하나도 물이다. 또 물은 형태를 바꾸며 흐르지만 그 본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처럼 두 작품 속 인물들 역시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두 작품의 상실은 완전한 소멸이라기보다 새로운 형태로의 변화에 가깝다. 남겨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라진 존재를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형태의 존재를 자신의 삶 속에서 받아들이는 일이다. 따라서 이 작품들에서 치유는 슬픔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품은 채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눈에 띄었던 것은 작품 속 대화에서 큰따옴표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소설에서 큰따옴표는 인물의 말과 서술을 구분하지만, 『지상의 밤』에서는 이러한 경계가 흐릿하게 이어진다. 이는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환상처럼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경계와도 닮아 있다.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임선우는 우리가 당연하게 구분해 온 존재의 경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결론



 『지상의 밤』을 읽으며 처음에는 낯설고 기묘하게 느껴졌던 장면들이 오히려 사랑과 상실을 이야기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식 냄비 요리」에서 연인은 물과 음식이 되고, 「지상의 밤」에서는 인간이 해파리가 된다. 겉으로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두 작품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존재는 반드시 하나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특히 두 작품에서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는 이러한 생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물은 형태를 바꾸며 흐르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 역시 우리가 기억하는 모습에서 벗어나더라도 우리의 삶과 기억 속에 다른 형태로 남을 수 있다. 결국 상실은 사랑했던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그 존재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달라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상의 밤』을 통해 치유 역시 슬픔을 지워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했던 존재를 잊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남긴 흔적과 슬픔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다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이 작품들이 보여주는 치유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왜 사람을 음식이나 해파리로 만들었을까?’라는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했지만, 작품을 여러번 읽고 나니 그 질문은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여전히 그 사람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존재가 반드시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물이 되고, 음식이 되고, 해파리가 되더라도 사랑했던 사람의 흔적은 다른 형태로 우리의 삶에 남을 수 있다. 처음에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고민했지만, 작품 속 낯선 장면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나만의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번 비평문을 쓰는 의미였던 것 같다. 임선우 소설가의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은 익숙한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했고, 나는 그 낯섦 속에서 상실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남겨진 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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