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묻힌 상문을 사무치며 나아가기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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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냥 살아가기
2022년의 가을이었다. 내가 건강했던 그때. 나에게 노랗고 작은 한 마리의 생명이 길거리에서 내 삶으로 따라 들어 왔다. 이름은 토리, 길거리를 떠돌던 노란색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를 따라왔다. 하지만 그가 온 뒤로 내 삶은 여러 잡음을 쉬지 않고 내고, 잡음이 쉬지 않게 들려왔다. 그렇다. 기침 틱 혹은 고양이 알레르기 아니면, 기관지염 천식 등이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카센터를 운영하고 자신의 일터에서 사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에게 그를 두었다. 그러던 2024년과 2025년을 통과하던 어느 날 토리는 카센터와 집에서 나오는 대범한 가출을 했고, 그날 이후로 우리 가족은 작고 노란 천사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가 마치 세상을 떠나 무지개다리로 건너간 것 같아서.
그가 떠나고 나는 그와 나에 관한 생각을 여럿 했다. 나는 그에게 좋은 주인이었을까. 우리 집에서 산 몇 달이 행복했을까. 애써 이런 질문에 “그래, 괜찮았을 거야.”라고 답하며 삶을 나아가고 합리화했다. 하지만, 때때로 꿈에서라도 그를 만나면 그에게 괜찮아 보일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수없이 상상한다. 죽은 존재가 나를 다시 만나러 오지 않기를. 나를 기다리지 않기를. 그러면서도 죽은 자의 세계인 사후 세계에서 편히 살기를. 상상하며 그린다. 그때 상상과 희망 그리고 그림을 연결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무지개다리다.
2:무지개다리
무지개다리는 말 그대로 무지개로 이루어진 다리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무지개는 대기 중 수증기 [물방울 입자]가 프리즘처럼 작용하여 태양광의 가시광선을 굴절시키고 분산시키며 만들어진 빛의 현상이다. 그렇기에 무지개는 누군가가 건널 수 있을 만큼의 단단한 존재가 아니다. 반면 다리{橋}는 차량과 같은 사물 혹은 동물을 받쳐서 이동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물이다. 그렇기에 다리는 단단함을 기본값으로 가지는 사물이다. 이런 점을 종합해서 볼 때, 무지개다리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무지개다리는 사람마다 생각하고 그려내는 것이 다르며 구체화 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다리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비슷한 의미를 지닌 채로 일상생활에서 이 단어를 쓰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공유된 부분 중 비슷하게 겹친 부분을 모아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를 볼 때 무지개다리의 의미는 죽은 반려동물이 사후 세계에서 주인을 만나러 오는 장소 혹은 기다리는 장소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 세계의 모습은 각각 다르게 묘사되고 그려낸다. 그러면서 떠난 이들을 마음속에서 그려낸다. 그런 점에서 상상은 하나의 힘을 만들어 낸다,
상상을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시간으로 치환함으로써 슬픔과 아픔을 사무칠 수 있게 하는 시간과 공간의 배경을 준다. 상상 속에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자유로워질 수도 있고 솔직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받은 여러 아픔을 그 속에서는 치료하고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이런 상상을 가지고 현실에 목소리를 외친다.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 다른 개개인의 아픔 중 일부에서 공유되는 상처를 나로 마주 보며.
3: 레이어로 겹겹이 쌓인 삶을 보다-김리윤론
우리가 상상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세상과 나 자신을 마주하고 세상과 나 사이에 생긴 간극을 사유해 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몸에 있는 오감. 즉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을 사용하게 된다. 이들을 토대로 기억과 추억이 나오고, 삶이 나오고, 하루가 남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끝없이 사유하고 사회를 살아 나간다. 이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미쳐 바라보지 못한 나 자신의 일부 그리고 현실에서 채워지지 못한 욕망은 상상과 꿈같이 비현실 속 이미지를 통해서 실현되거나 기억 속에서 변형된다. 그 과정을 거칠 때, 다른 감각보다 시각이라는 ‘보다’의 감각에 좀 더 의존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뭔가를 상상해 내고, 어떤 순간을 기억해 낼 때 시각이 만든 이미지를 주로 사용한다. 그것이 나의 욕망과 꿈 그리고 사회와 삶이 쌓여있는 일종의 생의 레이어를 투과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상상의 과정에서 우리는 삶을 나아가고,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이런 방식 중 하나가 바로 ‘나’와 세상을 향해 마음을 쓰면서 세상을 마주 보는 글쓰기다. 이는 임선우의 단편 「유령 개 산책하기」에서 나오는 강아지 ‘하지’가 “마음을 써야 보이는”[***, 247p.] 방식과도 유사하다. 이렇게 ‘보다’라는 감각을 가지고 자신의 삶이 품은 레이어를 뚫고 글을 쓰며 살아가는 작가들이 몇몇 있다. 그들 중 ‘보다’라는 이미지에 충실한 시인 중에 한명이 바로 시인 김리윤이다.
3-1: 현재를 이루는 과거, 미래를 이루는 수많은 현재 보기
너는 일단 개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눈 쌓인 비탈길에서 미끄러지듯 사랑한다
기우뚱한 눈길에서 미끄러져 도착한 장소
네가 보는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면
볼 수 없는 것과 보이는 것이 없음을 구분할 수 없다면
그래도 일단 개라고 불러봐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둠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개가 깨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잘 깨지는 개 앞에서 어둠은 부드럽게 우글거리기 때문이다
네가 부른 개
허공이 정면을 만들며
만든 정면을 쿵쿵대며 걷는다
바닥 냄새가 나는 것처럼 바닥을 디디며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투명하지 않아도 안전할 수 있다는 듯이
너는 일단 개를 부른다
개, 이리 와.
돌아오는 개의 얼굴에 시간이 잠시 맺힌다
「전망들—한 마리 하나 한 개」 中 [**, 13~14 pp.]
곤히 잠들었을 때 가장 어여쁜 법이지, 누구라도, 천사 같이. 그 말이 무서워서 울었던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어요,
선생님.
잠에 잡아먹히면 약도 없다는데요.
호랑이가 물어 가도 잠만 쿨쿨 잔다는데요.
어여쁜 얼굴로 곤하고 막연하게.
잠 다음만 생각해
꿈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꿈은 거울도 아니고 예언도 아니고 끄는 것을 깜빡한 전등 같은 거다, 알지?
어깨를 두드리며 말해주는 내 친구들
뜬 눈으로 오는 하루에도
눈이 마주치면 재채기 같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유리알 여물 듯 맑게 웃는 친구들
굴러다니고 굴러떨어지고
닿는 사물마다 다른 소리를 내며 기뻐하는
아름답게 깨지는 웃음을
{중략}
무엇으로든 살아볼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저는 늘 이 모든 게 꿈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선생님. 꿈이라면 무엇이든 아름다운 정물처럼 바라볼 수 있잖아요. 깨진 유리 항아리에서 흐르는 액체 한적한 시골길의 뒤집힌 자동차, 촛불을 든 여자들, 덤불 속에 잠든 것처럼 누운 개......
잠에 진 사람들의
곱게 뒤집혀 노곤하게 쪼개진
이 예쁜 얼굴들을.
[중략]
여기서 꾸는 꿈은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거 있지.
거기서 내가 본 것이 어떻게 아름다웠는지
눈을 감고도 눈앞에 환하도록 보여주려고
긴긴밤 내내 쓴 엽서를 보내면
엽서 앞장의 사진이 정말 아름답더라, 정말 아름다운 곳에 있구나
답장하는
눈 밝은 내 친구
피로를 모르듯이
깨끗하고 바스락거리는 눈꺼풀을 덮고
곤히 잠들어 아름다운
「전망들」 [*, 24~28 pp.]
김리윤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시는 당연코 「전망들」 연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김리윤의 전체 시집 두 편 모두에서 「전망들」이 끝없이 이어져 등장하기 때문이다. 먼저 후에 본 시는 2022년도에 출간된 『투명도 혼합 공간』의 작품이고 전에 본 시는 2026년도에 출간된 『야생의 눈과 눈 안쪽의 야생』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연작과 김리윤 역대 시집의 제목들을 함께 바라볼 때, 우리는 한 가지 발견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는 바라봄이 끝이 없다는 것을. 늘 ‘눈’, ‘투명도’, ‘보다’라는 키워드로 시의 세계를 확장하며 유지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특히 그 중심에는 ‘전망’이라는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를 품은 단어가 있다는 것을.
‘전망’이란 쉽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높은 곳 혹은 현재 이 공간에서 바로 보는 탁 트인 경치로서의 전망과 앞날을 예측하고 내다보이는 장래 상황으로서의 전망의 뜻을 가진다. 하지만, 이를 단어 그 자체로만 바라보면 ‘전망’이 가지는 의미를 하나의 겹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시에서는 이런 명사 ‘전망’에다 복수형을 나타내는 접사인 ‘들’을 붙여 사용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망’에 대하여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사용하며 시를 읽어내야 하며. 이 ‘전망’이 단순 언어의 발화로 끝나고 있지 않다는 것 역시 읽어내야 한다.
우선 ‘전망’을 경치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경치를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기본적인 행위는 바로 등산,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다. 높은 곳으로 이동하며 밟아온 수많은 길. 그리고 그렇게 올라온 길 위에서 지나온 길을 현재 자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경치며, 정경이다. 이때 지금 내딛고 있는 이 순간을 현재라고 둘 수 있으며, 경치와 전망을 이루는 지나온 길 그리고 풍경을 우린 과거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단어로서의 ‘전망’ 중 하나의 탁 트인 경치로서의 전망과 겹치는 부분이다. 또한 이런 첫 번째 해석을 두 번째 ‘전망’의 해석과 겹쳐 볼 때 우리는 ‘전망들’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시간, 하나의 풍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수 겹으로 쌓인, 수많은 내일과 오늘, 과거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에서 바라보고 마주한 것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듯 시 연작에서 화자는 끝없이 나아간다. 그러면서 계속 타인과 나 그리고 다른 존재들과 스스로를 끊임없이 보고, 같은 시간 속에서 같이 나아가고 삶에 스며드는 방식을 층층이 레이어를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야생의 눈과 눈 안쪽의 야생』의 「전망들—한 마리 하나 한 개」는 현실에서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고 있는 지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시의 마지막 구절인 “돌아오는 개의 얼굴에 시간이 맺힌다”라는 표현은 이의 정점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이를 이미지로만 보면, 개가 나에게 그저 달려 돌아오는 모습이다. 하지만, 얼굴에 “시간이 맺힌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개가 “허공이 만든 정면” 즉 앞을 ”보“며 ”킁킁거리며“ 지나오고 달려온 모든 순간들과 달려온 현재의 상태까지 활자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독자는 그 모습과 이미지를 생각해 내고 자신의 현실과 맞닿아 보고, 공유점이 있으면 현실에서 직접 마주하며 같이 뛰고 살아온 것 같은 체험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보기’ 그중에서도 세상을 마주 보고 사유하는 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투명도 혼합 공간』의 「전망들」에서 보여주는 ‘보기’의 방식은 앞에서 본 결과 다소 다른 겹으로 존재한다. 앞은 현실이라는 하나의 레이어 속에서 ‘보기’가 작동되었다면, 위 시는 현실과 꿈, 상상의 경계가 다소 허물어져 있으며 ‘보기’의 방식 역시 현실에 치중되어 있던 앞 시와 다른 결을 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장이 바로 결미의 문장 “여기서 꾸는 꿈은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거 있지.”다.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꿈. 해석하기 참 어려운 표현이다. 시에서는 계속 ‘잠’이라는 시어를 끝없이 이야기하고, 잠에서 오는 공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잠’이 현실보다 무서운 존재이며 그 존재가 때때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 ‘생생하게’ 화자에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화자는 끝없이 꿈속 세계를 현실처럼 감각적이고 세세하게 묘사한다. 가령 “한적한 시골길의 뒤집힌 자동차, 촛불을 든 여자들, 덤불 속에 잠든 것처럼 누운 개......”라는 표현에 마침표나 쉼표 그리고 휴지가 아니라. 말 줄임표를 넣은 점을 볼 때, 꿈도 현실처럼 세세하고 정교하여 온전히 다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정교하게 꾸며져 현실 같은 꿈이라는 소리이자, 현실이 아닌 가짜인 꿈과 같거나 그보다 더 못한 현실이라는 소리 역시 성립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하게 된다.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꿈 역시 하나의 세계로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이 질문에 김리윤은 이렇게 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 역시 삶과 세상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겹의 세계이자 레이어라고. 마치 현재-미래-과거가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꿈 역시 현실의 과거-현재-미래와 같이 연결되어있는 하나의 시스템이자 세계라고. 이는 그녀의 시가 계속 서로 다른 세계와 함께 포개지는 와중에도 김리윤은 그런 세계를 꿰뚫으며 연결 지어 자신과 사회 그리고 삶을 바라본다. 그러한 과정에서 가끔은 다른 레이어들과 연결하면서 생긴 추상적인 개념[대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들을 보여주는 것]과 감정이, 분량적인 부분에서 자칫하면 위험해지는 긴 분량을 보이는 분량을 끝까지 집중력 있게 지탱하게 해준다. 그 중 대표적인 단어들이 ‘미래’, ‘불안’, ‘그리움’ ‘소외감’이다.
3-2: 구체성 보이지 않는 것들 미래, 불안, 그리움의 시각화 발현
우리도 다 늙었나 봐
꽃 사진을 찍으며 함께 웃던 친구들아
우리는 열심히 웃느라 늙는 일도 깜빡한 것 같았네
그런데 다 늙는다는 건 뭐지?
우리가 자라온 시간
늙어갈 시간보다 오래된 꽃나무 밑에서
우리는 여전히 질문으로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을 가진 사람들
친구의 품에 안긴 작은 사람의 이마에서 꽃잎은 얼마나 거대했는지
손바닥에 떨어진 꽃잎은 얼마나 작고
얼마나 쉽게
두 손가락 사이에서 형태를 잃어버리게 되는지
나는 발이 없는 것만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우리와 세계가 서로 단단하게 묶인 레이어라면
같은 비율로 커지다 먼저 멈출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작은 손으로는 나뭇잎 하나 망가뜨리기 어려울 텐데
우리는 참 쉽게 깨질 텐데
매일 2만마리의 새가 유리 벽을 통과하려다 죽는대
자그마한 발을 가진 작은 새들
다 큰 새들은
다 자란 다음에도 새롭게 거대해지는 풍경이 의아해
이 세계는 형태가 결정하는 물질로 이루어진 레이어다
{중략}
유리문은 가볍게 회전하고 우리는 문 안으로 미끄러진다
우리는 너무 많은 영화를 너무 많은 스크린을 봤다
프레임 안으로 쉽게 미끄러진 다음
화면 바깥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강화유리는 안전하게 깨지는 유리이기도 하지
설탕 결정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유리 파편 아래의 새를 본다
가느다란 뼈와 연약한 살 부드러운 깃털
굳어가는 새는 새의 형태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창문 안쪽에 서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커다란 나무를 보고 있다
{중략}
열매들이 나무에 매달린 채로 썩어갈 때
우리는 꽃의 모양을 본다
「영원에서 나가기」[*, 38~41 pp.]
S#5. 분실물 또는 분실종 보관소의 조언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고장 나거나 분실된 순간입니다.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듯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면 일단 마지막으로 함께 속했던 장면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지요.
그래서 너는 장면을 더듬어본다. 촘촘하게 들러붙은 시간을 때어내며. 눈을 돌아본다. 눈을 감고 눈의 안쪽을 더듬는다. 장면에는 프레임과 깊이가 동시에 있어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는 대신 깊이를 헤치며 앞뒤로 걸어갈 수 있다.
S#1. 분실 이전의 꿈
눈을 떴을 때 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어둠으로 꽉 채워진 방에 희부옇게 떠 있는 너의 손목이었다. 처음 보는 운동, 네가 껶어본 적 없는 방식으로 가벼운 반동을 받으며 당겨지는, 낯설고 기분 좋은 탄성 속에 놓인 손목.
나에게 뭔가 있다. 너는 문득 생각했다. 나에겐 개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사적인 부분 중에서 현관문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 가장 쉬운 것인 개. 꿈에서 너는 이렇다 할 목적지 없이 매일 걷는 사람이었다.
{중략}
S#1-1. 이해하기
흰머리 유지박새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간다. 저렇게 부지런히 옮겨 다니는데도 기껏해야 한 사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정도의 범위에 머문다는 것이. 저 나무의 안쪽만이 세계인 것처럼 나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개는 이런 일을 참지 못한다. 개는 네 손에 쥐어진 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단숨에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프레임을 넓히며 걷는다.
S# 1-2. 꿈 이전의 분실
너와 개는 낯선 길을 아주 오랫동안 매일매일 걷고 있었다. 낯익은 풍경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너는 그곳이 매일 걷는 길이라는 걸 알았을까. 냄새로? 냄새를 볼 수 있는 눈으로
냄새를 보다니, 어쩌면 개는 너였을지도 모르지만. 너에게 개가 있었거나, 네가 개인 채로 있었거나, 둘 중 무엇이 거짓인지보다 꿈의 눈이 냄새를 본다는 사실이더 중요한 문제였지. 줄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방향으로 걷는 둘이 있다는 것. 줄 양 끝의 두 얼굴, 오직 돌아보는 순간 마주 보지 않는 눈동자들이 있다는 것, 교환되지 않는 시선이 있다는 것. 정확한 거짓은 참을 결정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
『전망들-꿈에서 가져온 눈』 中 [**, 164~167]
김리윤의 시들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분량이 긴 시들이 상당수다. 더불어 하나의 시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확장되어 나아가는 연작시 역시 많다. 앞에 있는 시 네 편도 그렇고 다른 시들 역시 이런 분량적인 부분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전망들」 같은 경우에도 다섯 쪽, 「전망들—한 마리 하나 한 개」 같은 경우에는 6쪽, 『전망들-꿈에서 가져온 눈』 같은 경우에는 10쪽. ‘전망들’ 연작 외에도 「영원에서 나가기」 4쪽, 「근미래」[*, 16~19 pp.]도 4쪽으로 짧으며 가벼운 여운을 주는 시편들이 아니다. 역으로 적지 않은 분량에 묵직한 여운 그리고 생각을 남기게 하는 작품들이 대다수다. 보통, 이렇게 긴 시를 쓰고, 그런 시로 연작을 쓸 때 쉽게 시의 집중력과 응집력이 다소 약해지게 된다. 또한 이 때문에 독자가 중간에 이탈할 가능성 역시 커지게 만든다. 더불어 김리윤의 시처럼 시각에 초점화된 장시들은 독자가 이미지 변화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 역시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리윤의 시편들은 결코, 그러하지 않다. 그녀의 시는 여러 겹의 세계를 오고 가고 있지만, 결국 미래, 불안과 같은 추상적인 존재가 시적 상상력과 상징 그리고 시각화로 구체화 되며 보여지는 존재로 계속 변주되고 확장해 나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영원에서 나가기」이다.
위 시는 제목에서도 보이듯 ‘영원’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영원’할 것 같은 과거로서의 현재에서 ‘영원’하지 못한 미래와 현재의 세계로 확장하며 시상이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것이 바로 나이를 먹음이라는 뜻의 ‘늙음’이다. 시에서 화자는 첫 도입부터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다 늙었나 봐/ 꽃 사진을 찍으며 함께 웃던 친구들아/ 우리는 열심히 웃느라 늙는 일도 깜빡한 것 같았네// 그런데 늙는다는 건 뭐지?/우리가 자라온 시간/늙어갈 시간보다 오래된 꽃나무 밑에서/ 우리는 여전히 질문으로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첫 두 연부터 쉽지 않다. 늙음과 영원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직관적인 이미지나 서술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꽃 사진을 찍으며 함께 웃던 친구들’이라든지 ‘늙어갈 시간보다 오래된 꽃나무 밑’이라든지 ‘질문으로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을 가진 사람’처럼 전체적인 그림의 풍경을 파편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그 파편들 안에서도 ‘늙음’ ‘질문’ ‘웃느라 늙는 일도 깜빡하는 일’이라는 구체적이지 않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지며 여러 개의 추상의 뭉텅이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이런 파편들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추상의 것들을 시가 어떻게 풀어나갈지 기대하며 시를 읽게 된다. 그리고 김리윤은 시속에서 한 번에 다 그것을 쏟아 놓지 않고 중간중간 조금씩 구체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그 모습을 또 변주시킨다. 대표적인 예시가 삶 그 자체인 영원과 늙음.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이다.
현재를 통과하는 미래, 그리고 과거를 통과하는 현재 그 속에서 존재하는 ‘나’의 삶과 관계. 그리고 이런 삶을 이어 나가면서 결국 도달하는 ‘영원’의 밖 죽음까지 그녀는 다양한 사물들을 통해 이 일련의 과정을 변모시킨다. 처음에는 그저 ‘늙어갈 시간보다 오래된 꽃나무 밑’에사 ‘질문으로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을 품고 사는’ 우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스크린 영화’를 보게 되고 그 영화와 우리가 밑에 있었던 꽃나무가 겹쳐 보이고, 그 꽃나무가 맺은 꽃들을 다시 우리와 겹쳐 본다. 그러면서 추상적이었던 나이의 듦, 영원함 잃는 상실을 시적 도약, 비약 상상들을 이용하여 구체적이게 만들어 보여준다. 이는 삶을 수 겹으로 쌓인 ‘레이어’로 바라보는 김리윤의 시선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힘이다. 세상과 나를 겹치고, 나를 이루는 수많은 레이어를 짜고 겹치고 통과하며. 언어로 완벽히 구연해 낼 수 없는 것들을 천천히 그러나 늘어지지 않게 독자에게 보여주며 동시에 독자들에게 수 겹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체험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상상하기 위해 노력’[*, 18p.]하여 만들어낸 김리윤 시인의 시각이자 삶을 통과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보다’의 한 겹이다.
또한 이런 ‘보다’의 감각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만 끝나지 않고, 현실과 무의식이 만들어낸 세계인 꿈에서 또한 나타난다. 다만 현실에서는 추상적인 개념과 순간을 이미지와 유려한 언어로 풀어냈다면, 꿈이 등장하는 시에서는 그저 추상적인 개념에서만 그치지 않고, 그것이 화자 혹은 화자가 슬픔에 젖은 타자를 이해하려고 자신의 마음과 시간을 쓰며 타자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세계를 보는 시인과 화자의 시선까지 표출하게 만든다. 이는 앞에서 본 『전망들-꿈에서 가져온 눈』에서 잘 나타난다.
그 전에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꿈이라는 세계다. 꿈은 뇌가 잠을 자는 동안 살아온 하루, 그리고 하루까지 오기 전의 순간들 속 상황과 감정을 정리하면서 생겨나는 수면의 세계다. 이때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은 감정이다. 평소에 우리는 그저 “늙어가는지도 모르”[「영원에서 나가기」 中]며 생활을 살아가고 있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열심히 웃”[「영원에서 나가기」 中]으며 나아가고 있다. 그러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사회와 나 사이에 간 극이 생기고. 그 간 극 속에서 진정한 나, 혹은 나의 욕망을 잃어버리기 쉬어 진다. 그런 모습들 중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의 욕망을 꿈과 언어로 그려낸 시가 바로 위 시다.
『전망들-꿈에서 가져온 눈』은 다섯 장. 총 열 쪽 분량의 장시지만, 여덟 게의 S#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의 제목을 하나씩 읊어보면, ‘S#5. 분실물 또는 분실증 보관소의 조언’, ‘S#1.분실 이전의 꿈’ ‘S#1-1. 이해하기’, ‘S#1-2. 꿈 이전의 분실’, ‘S#0. 꿈에서 쓴 눈에 대한 몇 가지 기록’, ‘S#2. 분실되기’, ‘S#3. 환송대’, ‘S#4. 눈과 빛’ 이렇게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제목 그리고 S#에서 반복되고 변주되고 있는 것을 중점으로 시를 해석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바라봐야 하는 중심 단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목에서 나오는 ‘꿈’과 ‘눈’ 그리고 ‘분실’이다.
3-3:꿈
꿈은 영어에서도 한국어에서도 두 가지의 뜻을 지닌다. 하나는 소망으로서의 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면서 뇌가 만들어낸 환상적인 이미지의 세계. 이 두 의미는 비슷한 의미의 관계망으로 읽힐 정도로 서로의 상호 관계성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평소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숨겨둔 내재 되어 있는 욕망[소망으로 불리는 꿈]이 잠을 잠으로써 수면의 세계인 꿈에서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는 점에서 볼 때, 꿈이라는 언어는 다의 관계를 띠는 언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시에 그대로 적용해 보면 화자는 타자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꿈을 꾸고 그와 순간순간의 일상적인 ‘장면’을 바라보면서 타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타자의 생활을 관찰하고 그의 생활을 따라 하는 일종의 꿈을 마음속에 가지고 이런 꿈을 꾸며 품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화자는 ‘낯선 길을 매일매일 걷’고 타자에게 ‘개’와 같은 존재로 ‘손에 쥐어진 목줄’을 ‘팽팽하게 당’기며 그와 ‘같은 크기를 유지’하며 ‘조그마하고 위태롭게’ 같이 보며 그와 화자 자신을 꿈속에서 마주한다. 그 관계가 마치 분실되기 전의 관계인 것처럼. 서로의 꿈을 마주 본다. 마주 봄으로 마음을 다하며. 그 과정에서 수 겹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나타난다.
3-4:어둠 분실
보통 안구를 뜻하는 눈은 사물이나 사람 그리고 세상을 바라볼 때 쓰인다. 그 과정에서 안구는 빛을 이용한다. 시에서도 눈이라는 단어와 함께 빛이라는 단어 역시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그러나 초반부에서 나타나는 이미지는 빛과 다소 먼 존재처럼 느껴지는 어둠이 강하게 나타난다. ‘S#1-2. 꿈 이전의 분실’ 장면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눈을 떴을 때, 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어둠으로 꽉 채워진 방에 희뿌옇게 떠 있는 너의 손목이었다” 너라는 타자가 눈을 떴을 때 바라본 풍경은 빛이 존재하지 않고 ‘어둠으로’만 ‘꽉 채워진’ 공간이라고 나온다. 이때 눈을 뜬다는 것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첫째 꿈에서 현실로 깨어난 것. 혹은 둘째 현실에서 꿈으로 회귀한 것. 그러나 둘 중 무엇이 진짜인지는 김리윤의 시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디더라도 현실과 꿈은 포개져 있기에.
이 관점을 통해서 이 구절을 바라보면 현실이든 꿈이든. 타자가 화자와 공유하고, 화자가 타자를 통해서 투영한 모습은 살아가고 있는 그 공간과 그 순간은 무의식과 의식 속에서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시 초반에 등장하는 ‘분실물’이라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계속 언급하는 모습으로 볼 때, 그 어둠은 잃어버리고 없어진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은 마치 어두워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공간이 “어둠으로 꽉 채워”져 있다고 화자를 통해서 혹은 타자의 입을 빌려서 화자와 타자가 이야기를 건네지만, 그 공간 안에서도 결국 타자는 자신의 ‘희뿌옇게 떠’ 있는 ‘손목’을 발견한다. 여기서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손목을 봤다는 것. 그리고 인지했다는 것이다. 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미세하게라도 빛이 있어야 한다. 즉 이 말은 화자와 타자 사이에는 여전히 빛이 존재한다는 것. 더 나아가 그 빛이 눈과 안구 그리고 그런 보는 것을 감각하는 감각기관들을 통해서 뇌를 향해 뻗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뇌는 기억을 만들고, 더듬고, 순간들을 인지하며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자가 타자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화자가 타자를 자신에게 투영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분실물의 자리가 생긴 관계 속에서 따뜻한 일종의 온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타인과 나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간극이 가지는 아픔을 조금씩 품고 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이까지 봤을 때, 다시 돌아봐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위 시의 부재인 ‘꿈에서 가져온 눈’이다. 보통 안구라는 의미를 지닌 눈이라는 존재는 일상에서 쉽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며 동시에 전달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그렇다면 이때의 눈을 그저 평범한 안구의 눈으로만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존재하며, 표현의 과함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랬을 때 위 눈을 안구의 눈과 수 겹의 삶 속에서 본 경험을 雪이라는 뜻을 가진 동음이의어 눈처럼 추상화된 욕망, 혹은 그와 유사한 추상적이고 파편화된 기억 조각들을 마음과 기억 그리고 시선 속에 사무치고 기억하는 그 자체이자 구체화 시키는 방법으로서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삶을 뒤 덮은 수 겹의 레이어를 뚫어 보며 춥고 빈 곳을 메우는 김리윤의 시선과 매우 닮아있고 포개져 있으다. 그렇기에 김리윤의 시에서 ‘보다’라는 감각은 상처와 상실 그리고 아픔 불안 같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감정까지 보이게 수 겹의 삶이라는 은유를 통해 구체화하고 언어로 구연해 내며, 수많은 삶의 어둠을 빛과 같은 온기와 함께 다정하게 바라보며, 언어를 통해서 독자에게 보여준다. 차가운 손으로 다독이면서.
4: 그냥 그렇개 반려되었습니다-키크니 특별전 ‘그렸고 그런 사이’
김리윤처럼 ‘보다’라는 감각으로 언어의 손길을 만들어 빈자리, 상실 그리고 아픔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예술인이 있다. 반면 그 바라봄을 실제로 구현해 내는 예술인 역시 존재한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일러스트레이터 키크니다.
2026년 일러스트레이터 키크니는 지난 4월 25일부터 9월 6일까지 동대문프라자에서 ‘그렸고 그런 사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다. 그가 연 이번 특별전 작품들은 대게 일상적인 곳에서 누구라도 삶에서 한 번은 보고, 한 번은 느끼고, 한 번은 겪었을 수많은 사람의 삶을 DDP라는 전시관 안에 꽉 채운다. 대표적으로 미디어아트 속에 뽀로로와 수많은 직장인이 회사로 끌려가는 모습을 표현한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회사 끌려가는 제 모습 그려주세요]라는 작품과 직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커피로 된 링거를 맞고 집에 가고 놀고 싶은 생각을 하며 일하는 모습을 표현한 [회사에 아픈 몸을 끌고 나갔는대 알고 보니 저 말고도 일하는 직원들이 모두 중환자인 상황을 그랴주세요]라는 작품들이 있다. 대게 이런 작품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웃음은 나오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웃픈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런 감정을 따라 쭉 전시를 돌아보면, 하나의 문구를 만나게 된다.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회사 끌려가는 제 모습을 그려주세요 *회사에 아픈 몸을 끌고 나갔는데 알고 보니 저 말고도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그려주세요
‘그냥[cat] 그렇개[dog]’
그리고 그 문구 이후의 작품부터, 키크니의 작품은 일상적인 공간 속에 존재했던 것들이 일상과 세상 속에서 반려된 모습을 보여준다. 동물을 의인화 시키고, 사후 세계의 존재들이 있는 장소와 현실의 장소를 상상하고 겹치면서.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 바로 반려동물이 ‘나’라는 존재에게 오기까지의 과정부터 ‘나’를 떠나고 사후 세계에서 살아가며 ‘나’를 기다리고 나아가는 모습을 담은 영상 미디어아트와 무지개를 이용하여 죽은 동물들을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무지개다리를 모티브로 삼은 [무지개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이들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되서 상상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일부 관객들을 그 조형물과 영상 속에 자신과 자신의 반려동물 혹은 이에 준하는 소중한 동시에 내 삶에서 반려되었던 삶이 반려된[거부] 존재들을 투영하게 만든다. 실제 있는 작품에, 사물에. 그러면서 자신의 삶 그리고 하루하루 반려되고 반려되었던 순간들을 기억 속에서 무너트리고 다시 설치하는 일련의 과정을 진행한다. 그렇기에 키크니 혹은 작품들과 비슷한 경험을 겪은 관객들은 이 ‘그냥 그렇개’ 전시에서부터 눈물을 조금씩 보이며 스쳐 지나가는 하루 속 눈물을 통해 마음 안에 묻어 놓고 사무쳐놓아서 삶 주변에서 제대로 보지 못한 빈자리를 바라볼 수 있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내 삶에 반려된 존재들이 삶이 반려{거부}되어 떠난 뒤, 나 혼자 나에게 반려된 내 반려된{거부} 삶의 순간들을. 상상을 통한 만남으로. 그 존재가 내 곁에 있었던 순간들을 스쳐 지나가며 관객들은 반려되고 잊혔던 순간들을 다시 들척이게 하면서. 떠나간 일상의 순간들을 다시금 상상하게 하여 생생하게 만든다.
5: 상실 다루기-임선우론
가끔은 상상으로라도 토리의 체온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를 품에 안고, 만지며 살았을 때는 몰랐던 고양이의 털이 가진 그 온도를.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검정고시, 대학 입학 등을 치르며 살아가는 동안 그 온도를 잊었다. 손에는 삶을 살아오면서 생긴 굳은살과 변형되는 손금들 때문에, 그를 만졌던 기억과 몸이 기억하는 온도 역시 몸 어딘가에 사무쳐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꿈과 상상 속에서 그와 함께 놀고, 그를 쓰다듬고, 나 때문에 할머니 집으로 보내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지만.
뭔가로도 붙잡으며 기억하고 싶어서. 상상력을 매개로 그와 나를 이어본다. 더불어 너를 쓰고, 읽는다. 반려된 슬픔을 붙잡으며.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임선우의 소설처럼 걸으며.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단편 세계로 들어가 본다. 그것이 비록 생에 대한 집착과 너에 대한 집착이어도. 나는 상상을 빌려 너와 같지만, 다른 너의 세계관을 뚫어 보고 구경하는 상상을 하며 기록하고 기대어 본다. 너를 온전히 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5-1: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기-「지상의 밤」
임선우의 소설들은 대다수 환상성을 띠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소설들은 탄탄한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해있고 더 나아가 그 세계를 이루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 가지의 이상의 단편을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보여주는 작품이 임선우 소설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을 해파리로 만드는 해파리’가 존재하는 세계인 「지상의 밤」과 「빛이 나지 않아요」[****, 35~72 pp.]의 세계관이다. 그 중 「지상의 밤」은 「빛이 나지 않아요」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해파리로 만들어 주는’ 첫 창업자들로 보이는 ‘희조’와 ‘강’ 그리고 그들의 첫 손님으로 온 수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이다. 이는 「빛이 나지 않아요」의 세계관을 좀 더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단편이 또 다른 단편으로 확장되었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핵심 소재인 해파리에 대한 해답은 명쾌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이 각자의 해석을 부여할 수 있는 상징으로 남겨둘 뿐. 그렇기에 이 해파리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설과 세계관 전반에 흩어져 있는 해파리의 특징과 현실 세계 해파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선 현실에서의 해파리다. 해파리의 생김은 투명하며, 몸의 95%가 물로 이루어진 생명체다. 그렇기에 물 밖으로 나가면 이 물이 말라버리기에 육지에서 살아가는 일은 상당히 힘든 존재다. 그러나 그런 해파리 특히 불멸 해파리로 잘 알려진 투리토프시스는 물속에서 포식자 없이 살아간다면 불멸의 존재에 가까워진다. 특히 이들은 성체에서 아기 폴립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단계 역시 가진다. 이런 특징을 소설 속 특히 「지상의 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대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해파리로 살아가고 싶어 했던, 수를 먼저 보자. 수는 직장 내 폭력으로 사회를 떠났던 존재이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그리고 회사를 나왔을 때, 자신의 방에 문을 닫고 생활했다. 일상을 붙잡고 있던 리듬을 폭력을 받아 일상을 유지하던 순간들을 상실함으로써. 마치 사회라는 물에서 사회 밖 방이라는 육지로 떠밀려온 해파리처럼. 육지로 떠밀려온 해파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말라 죽었다. 수 역시 아버지가 떠난 이후에 배고픔을 참고, 설거지, 청소 등등을 하지 않음으로 방 안쪽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하지만, 그는 온전한 해파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사람으로서의 허기를 느끼게 된다. 이 허기를 느끼던 어느 날. 수는 방에서 나와 편의점에 가고,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훔쳤다. 한 번, 두 번. 이 도둑질이 계속되고 그는 대범해지면서 대형 마트에서 옷을 훔치는 행위 역시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도난 방지 스티커가 반응하게 되며 수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쏠린다. 수는 또다시 이를 피하려고,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때 화장실 문에 걸린 바다 여행 포스터. 즉 해파리로 변화하는 것을 도와주는 업체의 광고 포스터를 보게 된다. 이를 보고 그는 해파리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따라서 그는 해파리가 되기 위해 사람들의 눈이 많은 대중교통[버스]을 타고, 강과 희조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는 해파리가 되기 위한 돈이 부족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반지뿐. 이와 더불어 세계관에는 비가 내렸고, 이런 상황들이 겹쳐 주인공이 해파리가 되는 상황은 밀어졌다. 그 속에서 갈 곳이 없던, 수는 희조와 강과 함께 비가 그치기 전까지. 해파리가 되기 전까지 지내게 된다. 그러면서 수는 해파리가 되기 위한 돈을 노동력으로 서서히 갚았다.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잡초를 뽑으면서. 피도 나고, 사람들의 눈도 보고, 같이 밥을 먹으며.
이런 일련의 노동의 과정을 통하며 수는 마지막 날 생각한다. 사람들과 함께 있던 순간을. 사람의 눈을 보고 소통했던 순간을. 그럼에도 자신을 파도 밖으로 밀어버린 침묵과 폭력으로 물든 잃어버린 일상과 잃어버리기 전 일상을. 그리고 결국 그는 대형 마트에서 훔쳤던 옷을 두고 강과 희조의 공간을 떠났다. 다시 현실 속으로 살아갈 것처럼.
그는 한 마리의 해파리가 되지는 못했지만, 육지에 떠밀려와 죽은 해파리 그러니까 사회에서 밀려나고 일상이 반려된 ‘나’라는 존재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가는 형태로 행복했던 순간과 고통을 받았던 순간을 품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된 마음을 가지고 해파리처럼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든다. 그렇다는 것은 해파리라는 상징은 삶을 살아가면서 반려되고 상실되던 존재들의 변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겨진 것들이자 새로운 삶 그리고 살아내고 싶어 하는 욕망이자 삶을 향한 집착 어린 애착이다.
그 모습이 투명한 몸에 스며든 영혼으로 마치 사람을 유혹하고 매혹 시키는 반짝이는 빛을 내뿜는 한 마리의 해파리는 이런 애착을 더욱 아련하고 어른거리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이를 향해 나아가고 애착하고 집착하는 인간을 지금의 인간이 아닌 해파리나 또 다른 인간으로 변형시킨다.
5-2: 지상을 떠도는 미련과 욕망들 가려지고 사무친다-「사랑 접인 병원」
『지상의 밤』의 두 번째 소설인 「사랑 접인 병원」에서 역시 「지상의 밤」처럼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다만, 「지상의 밤」이 환상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계였다면, 「사랑 접인 병원」은 현대 의학에서 간혹 나타나는 장기 이식 후 신체 기억 현상을 바탕으로 더 확장된 기술을 가진 근미래를 상상한 SF소설이다. 그렇기에 「지상의 밤」보다는 현실에 더 가까운 상상이자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랑 접인 병원」은 연인들이 서로의 기억, 아픔, 취향 등을 좀 더 쉽게 그리고 빨리 알아가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과 연인의 손가락을 교환하여 빈자리에 심는 수술인 접인 수술이 행해지는 세계관이다. 주인공은 이 수술을 행하는 ‘사랑 접인 병원’의 에이스 의사다. 그는 매주 쉬는 날이면 등산을 가고, 새천년 체조 시간에 남들 다 하지 않는 체조를 후배 은금과 함께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틀에 박혀 사는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그의 세계에 한 가지 변화가 들이닥쳤다. 바로, 지난겨울 하산하다가 발목을 삐끗한 것이다.
발목을 삐끗했기 때문에, 토요일마다 행했던 등산을 하는 일상을 상실하게 됐고, 그 빈 순간을 은금과 함께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만화카페에서 인조가죽 소파에 앉아 무협지를 보고 짜파게티를 먹는 등의 행위를 하며 책 속에 그려진 수많은 세상을 여행하는 것으로 그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동시에 매주 토요일 별일 없으면 그 카페에 가는 등 집착적이면서 루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책의 후반부에 들어서 이 만화카페 사장님은 가게 문을 닫고 강원도에서 새로운 장사를 시작한다고 주인공과 은금에게 이야기해준다. 그러면서 주인공에게 그가 매번 시켰던, 짜장라면의 레시피를 건네주고, 그가 매번 앉았던, 인조가죽 소파를 줬다. 그는 또다시 집착적으로 했던, 루틴이 깨지고 만다. 하지만, 그는 그 빈 자리를 다시 다른 무언가로 채웠다. 바로 후배 은금과의 만남으로. 과거 자신이 받았던, 접인 수술 자국을 반지와 같은 물건으로 가리면서 과거의 있었던, 상실을 묻고 받아들이고 그 위에 새로운 사람, 새로운 만남 그리고 새로운 장소로 채워가며 없어짐에 미련과 아쉬움을 지상을 걷는 자신에게로 사무쳐 나아간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주인공과 비슷한 존재가 한 명 더 나온다. 그 사람은 바로 진상 환자인 김애주 씨다. 김애주 씨는 박민철 씨와 접인 수술을 받았던 환자다. 그녀는 42세 박민철 씨와 이혼 후 지난주 토요일에 갑자기 자신에게 접인된 37세의 박민철 씨가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좋아했던 것, 그가 했던 행위, 그의 성격이 마음에서 텅 비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전화 통화로 만난 김애주 씨는 박민철이 “끝은 끝”이라는 말을 끝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끝은 끝. 이별은 이별이라는 것.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자신에게 반려되었던 박민철을 그저 자신의 일부 중 가장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난 것이라고 그럼에도 자신에 일부라는 것을. 끝이라는 감각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는 듯 그녀는 박민철과 추억이 많았던 장소를 떠나 충주에 있는 언니 집으로 내려가 당분간 생활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접인 된 37세의 박민철의 손가락을 가지고 가며. 마음속 깊은 곳에 묻으며.
이는 마치 주인공이 떠나간 존재들, 접인을 받은 연인과 만화카페 사장님이 준 짜장라면 레시피를 품고 새로운 존재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반려된 삶이 반려되지 않은 삶들과 함께 살아나가는 것처럼. 몸 안에 묻힌 그 감각들이 생생하지 않게 상상되는 추억을 품으며 살아 나가고 삶을 만나며, 그런 삶들이 모여 일생을 만든다.
5-3: 궁극의 상실 요리 레시피-「프랑스식 냄비 요리」
『지상의 밤』을 여는 소설인 「프랑스식 냄비 요리」는 최진영의 소설 『구의 증명』처럼 그로데스크한 상황을 보여준다. 마치 『구의 증명』에서 담이 죽은 구의 시체인 인육을 섭취하는 모습을 그려내듯 「프랑스식 냄비 요리」에서도 물, 순무 등으로 변한 연인을 먹는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표현하는 ‘섭취’와 ‘먹는다’는 다소 다르다. 『구의 증명』에서는 죽은 연인인 구를 처절하게 사랑하고, 그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인육 섭취라는 비교적 현실적인 배경 논리를 바탕으로 사람을 먹는다의 행위를 보여준다. 반면, 임선우의 소설에서 나오는 ‘섭취’는 비현실적인 환상 같은 세계관 속에서 발생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남자친구였던, 단과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권태기를 지나던 때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단과 주인공은 수영을 배우며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무언가를 함께 배우고,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공통된 관심사가 생기는 것임으로 그들의 권태기는 점차 호전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영장에서 단이 물로 변해버렸다, 주인공은 물이 된 그를 텀블러에 온전한 모습이 아닌, 몇 방울들 떨어지고 흩어진 모습의 그를 담았다. 그의 그런 모습을 작은 텀블러에 담아두고 집에 들고 와 생활해 나갔다. 그 속에서 단은 점차 기화되고 텀블러 안쪽에서 썩어 나가고 있었다. 그때 단이 한 말은 자신을 먹으라는 말. 제과 제빵사였던 주인공은 결국 단의 부탁에 할 수 없이 그를 슈톨렌으로 만들었다.
슈톨렌은 독일의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빵으로 한 달 이상 보관하고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빵이다. 그 이유는 빵을 절인 럼주 때문으로. 그 덕분에 상온에서도 한 달 이상 두고 먹을 수 있는 빵이다. 따라서 주인공은 최대한 오랫동안 단을 기억하고, 품어놓기 위해서 슈톨렌으로 만들어 먹어뒀다. 이는 묘사된 것으로만 봤을 때, 사람을 먹은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런 행위는 큰 거부감으로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인공이 이 경험을 털어내고 말했던, 노아랑 나나는 딱히 그녀의 말을 거부감 있게 듣지 않는다. 심지어 현재 나의 연인인 노아는 자신의 연인이 옛날에 ‘순무’로 변해서 그녀를 가지고 프랑스식 냄비 요리인 포트푀를 만들어 먹었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즉 사람이 물 혹은 사물로 바뀌는 것은 이 소설 세상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런 일을 처음 겪는 듯 행동한다. 마치, 주인공만 현실 세계에서 온 것처럼. 그렇기에 위 소설도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환상과 상상이 같이 공존함으로 다소 모호한 지점들이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왜 사람마다 변화하는 방식이 다른지, 어떤 부분에서 그 사람들이 변화하는지, 사물 혹은 다른 존재로 변환된 연인들을 담은 텀블러, 냄비는 과연 무슨 의미이며 왜 사용되었는지, 그런 존재들을 먹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소설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게 답한다. 그러나 이를 해석하려면 각 변화된 존재들의 특징과 그것을 어떻게 조리하고, 어떻게 먹었으며 이후 몸에 반응 그리고 뭐를 하기 전에 그 상황이 발생했는지를 모두 파악해야 한다.
우선 노아와 주인공의 사례에서 볼 때. 주인공은 단과 권태기였고, 노아와 연인은 이별을 약속했을 때였다. 단은 물이 되었고, 노아의 연인은 순무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진짜 단과 노아의 연인이 사람에서 사물로 바뀌어 만들어졌더라도 현실에서 이별한 마음의 짐을 표현해낸 하나의 비유이자 수단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별 혹은 상실을 겪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이를 볼 때 주인공이 만든 슈틀렌의 특징과 노아가 만든 포트푀의 특징을 자세하게 보면 그들의 연애 방법과 관계, 그리고 잃어버림 속 삶을 대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먼저 앞에서 말했듯 슈틀렌을 만든 주인공과 단은 권태기를 통과하고 있던 나름 오래된 연인이다. 더불어 권태기 속에서 갑작스런 이별을 겪은 연인들이다. 그런 연인이기에 단을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럼에 빵을 적신 것처럼 축축하게 젖은 눈물들과 한숨들이 끝없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 존재를 마음속에 묻으며, 소화 시키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별을 받아드리는데 오랜 시간이 소비된다. 그렇기에 단을 조금씩 간격을 두고 먹을 수 있는 슈틀렌을 만든 것이며, 이는 단이 물이 되는 과정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불면증, 노아와의 관계가 지속될 때마다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감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이별을 먹고, 소화 시키며 그의 흔적을 묻어낸다.
반면, 노아와 그의 연인 같은 경우에는 이별하자는 약속을 전제로 그의 연인을 떠나보냈다. 그래서인지 노아는 순무를 가지고 포트푀를 만든다. 포트푀라는 음식은 냄비 요리답게 따뜻한 온기를 뿜어준다. 약속으로 이별이 결정된 그들이 어떤 사랑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순무가 가열되면서 매운맛과 단단함 그 이상의 딱딱함이 달아지고 무너지며 결국 몸속에 편안하게 묻어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따뜻하고 온화하고 부드럽게 이별을 받아들인 노아는 이별 속에서 흐느끼고 단의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주인공을 위로하며 그가 아픔을 소화하고 묻어낼 수 있게 옆에 있으면서. 더 나아가 포트푀를 만들어 줌으로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이별을 같이 묻어내고 아파하며 개인과 개인으로 상실에서 반려를 향해 나아간다. 그들이 사랑하는 이가 남긴 흔적들을 먹음으로써 더 단단해진 에너지 체계를 가질 수 있게.
5-4: 삶이 우려진 몸-「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
「프랑스식 냄비 요리」에서 몸속에 삼킨 상실이 남긴 것들은 여섯 번째 소설인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 몸이 내뿜는 굴곡들로 표현된다. 소설의 주요 내용은 「유령 개 산책하기」에서처럼 죽은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다음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다른 부분이 있다면, 「유령 개 산책하기」의 화자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인 동시에 유령 개 ‘하지’가 적극적으로 소설 내에서 등장하는 반면,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는 유령과 같은 환상성 그리고 죽은 반려동물에 집중되기보다 현실의 온기와 냉기 그리고 연대와 삶이 연배 있는 주인공 희재를 통해서 나타난다. 소설은 세 여자가 중심축을 이룬다. 주인공이자 3년 전 묵을 잃은 희재, 희재네의 가사도우미 해영, 죽 가게를 운영하는 유자로.
희재는 묵이 시력을 잃고 아파하던 그 날부터 묵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했고, 그 생각 속에는 늘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해영을 만나고, 해영이 그린 누드크로키를 본 이후로, 묵이 아프고, 묵이 떠난 뒤 처음으로 매일 그 그림들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해영에게 자신의 누드크로키를 그려달라 부탁하며, 그림으로 그녀가 그려진다. 위 소설은 이 지점에서부터 본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해영이 누드크로키 모델을 했었고, 희재가 누드크로키 모델로 직접 서서 해영에게 그려지고. 이 상황을 희재의 입으로 들어 알게 된 유자. 그런 그들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화해가 생기는 과정 그리고 그 삶 안팎에서 느껴지는 온도들을 그린 소설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누드크로키와 온도.
5-5:누드크로키 속 나 자신. 킨츠키식 마주보기
우선 누드크로키란, 옷을 입지 않은 신체를 모델로 삼아 약 10분에서 20분 사이로 대상의 형태와 동작을 빠르게 포착하여 그려내는 미술 장르의 기법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신체를 가장 순수하고 왜곡적이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몸은 사람의 삶을 모두 받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태도와 어떤 표정을 자주 쓰는지에 따라 사람에 인상이 바뀌기도 하며, 굳은살 같은 것으로 족상과 손금 역시 쉽게 쉽게 삶에 따라 바뀌어진다. 그렇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몸 자체를 삶의 표식이라고 이야기해도 무방하다. 이를 소설에 대입해 보면, 해영이 그린 희재의 누드크로키에는 희재의 삶이 그려져 있다는 소리다. 이는 즉 희재는 해영이 그린 그림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 볼 수 있다는 소리다. 그 안에 있는 묵과의 생활, 묵이 아팠을 때 불안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 불안과 묵이에 대한 그리움에 묵혀지고 묻어졌던 그녀의 세월이 그어져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절을 통과한 그녀의 몸은 상처투성이, 그러니까 여러 겹으로 갈라져 버린 피부층이 연필과 볼펜과 같은 그리기 도구에 덧칠되어 나타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희재는 그것을 보고 피하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다. 역으로 해영에게 자신의 누드크로키를 또 요구하고, 유자와 이 경험을 공유한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상처를 숨기려 하지 않고, 상처와 상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간 자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금이 간 부분을 숨기지 않고 역으로 강조하거나 있는 그대로 둬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기법인 킨츠키와 닮아있다. 그리고 이는 희재가 자신을 마주하며 세상을 다시 용기 있게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다가온다.
5-6:사람과 사람, 상길과 만남 속의 온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상실의 아픔, 세월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고, 그를 통해 위로받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이를 선호하지 않는 경우 선호하는 사람들 만큼 많다. 소설에서도 유자는 희재와 해영이 누드크로키 모델을 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했으며 날이 선 말과 행동을 희재 앞에서 보였다. 이는 유자뿐 아니라, 유자네 가게에서 죽을 먹고 있던 노부부 역시 그랬다.
즉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존재가 모르는 존재, 친한 친구, 가족이라는 존재여도. 더불어 그 존재 안에는 ‘나’ 자신까지도 포함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관계는 때론 추워지고 멀어져 반려되었던 존재가 상실되기도, 우리 관계 속의 온도가 따뜻해져 상실이었던 존재가 만남으로도 변한다.
해영 같은 경우에는 희재에게 묵이 상실된 뒤 나타난 따뜻한 만남의 존재이며, 유자 같은 경우에는 친한 친구로서의 따뜻한 존재였지만, 누드크로키를 만난 뒤에 상실될 뻔했던 미지근한 관계로 되었었다. 하지만 유자 같은 경우에는 희재와 해영과 화해를 하며 다시 따뜻한 존재로 품어졌다. 이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상실이 끝나고 만남이 오고, 따뜻함과 미지근함 차가움을 오가며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이를 볼 때 재밌는 점이 한 부분이 있다. 결국 사람으로 차가워진 온도, 존재 때문에 반려된 삶은 결국 사람과 존재로 인해 다시 따뜻해지고, 반려된다. 그런 점에서 임선우의 단편들을 보면 대체로 상실 이후 사람의 온기로 많은 이들이 나아가고 살아가게 만든다. 「프랑스식 냄비 요리」에서 단에 대한 아픔을 품고 사는 주인공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곁에 있어주는 노아와 나나. 「사랑 접인 병원」의 주인공과 은금과 만화카페. 「지상의 밤」에 수와 강, 희조의 관계, 「유령 개 산책하기」의 주인공과 쿠키 보호자, 카페 주인. 그리고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의 희재, 해영, 유자, 목의 관계처럼.
6: 마음에 묻힌 상문을 마주 보며 추위 길들이기
한국 무속 신앙에서는 이런 표현이 있다. ‘상문’ 일명 죽음의 기운이다. 상문살이 들어왔다는 것은, 집안의 초상이 일어나거나 가까이 있는 누군가 혹은 나 자신이 근미래에 죽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죽음은 기운으로 들어오는 것이라 집안 혹은 주변의 줄초상을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죽음의 기운이라는 뭘까. 이를 죽음의 기운을 통과하고 있는 혹은 통과한 상실 이후의 사람들에게 적용한다면 이 상문 자체를 잃음에서부터 나온 한기, 상실감, 함께 못했던 순간들의 미련의 결합체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상문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그저 이런 것들을 마음속에 깊게 파묻으며 사무치듯 현실을 살아갈 뿐. 그러나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분다. 내가 토리를 보지 못하고 잊은 것처럼, 살아가던 순간 속에서도. 꿈속에서 그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천천히 다가왔던 것처럼. 나는 마음의 일부를 아직도 그에게 썼다. 그의 순간들을 마음을 쓰며 끝까지 바라볼 자격이 없는 내가 완전히 몸속에 사무치기 위해 그 꿈을 꾸지 않기까지 그에 관한 상상하고,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그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글을 쓴다. 세상을 본다. 세상을 다해 마음을 쓴다. 그리고 하루씩 나아가 본다.이런 게 예술의 힘이 아닐까 믿으며.
어떤 사람은 슬픔과 차가움의 온도를 마주보며 시를 쓰고, 다른 사람은 이를 시각적인 예술과 유머로 조립시켜 보여주며, 또 다른 사람은 상상력을 사용하여 이 상실의 온도를 천천히 바라보며 나아간다. 활자로 조형물로 그림으로. 각각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예술로서 살아진 상실 보여준다. 비록 모호하게 보일지라도. 모호함 자체가 삶과 상실이라 믿으며.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잃어가며 한 생을 펼쳐 보인다.
7:각주
*『투명도 혼합 공간』, 김리윤, 문학과지성사, 2022.
**『야생의 눈과 눈 안쪽의 야생』, 김리윤, 문학과지성사, 2026.
***『지상의 밤』, 임선우, 민음사, 2026.
****『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민음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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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믿어왔다. 삶과 문학. 삶과 시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시는 삶의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삶은 시를 지탱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기에 나는 늘 내 삶을 바탕으로 문학을 써왔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에는 나의 순간순간을 이룬 ‘학교’,‘기침’,‘소리’,‘가족’,‘친구’,‘그리움’,‘이방인’,‘유령’과 같은 단어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내 문학 세계를 이끌어왔다. 내 내면의 세계에서부터 외면의 타자에게까지 한 사람의 삶이 다른 한 사람에게 닿기를 바라며. 나는 끝없이 순간들을 마주하며 활자를 컴퓨터 화면에 새겼다. 그러면서 하나의 생을 담은 문학을 추구해 왔고 꿈꿔 왔다.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내 경험과 삶을 텍스트 안에 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행위들을 했다. 하루를 끝까지 살아내는 것. 감정과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글을 쓸 수 있는 물건 앞에 가서 글을 쓰는 것. 이를 실천하기 위해 나는 글과 삶에 전념한다는 태도로 살아왔고 문학을 해왔다. 하지만 일상과 삶을 텍스트로 환원할 때 늘 빈틈이 생겼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문학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자 기본적인 수단이 문자라는 상징체계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의미론적 특징을 나타내는 기호 삼각형{Semiotic Triangle}은 기호[문자], 지시물, 개념 사이의 관계를 그려낸 것이다. 이 개념 안에서 기호와 지시물의 관계는 간접적인 영향을 가진다. 대표적인 예시로 ‘나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 실제 있는 나무를 가지고 수필을 쓰거나 소설과 시를 쓴다 할 때, 텍스트 안에 적힌 문자 ‘나무’는 실제 필자가 바라보고 쓴 나무가 아닌 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문자가 함유하는 것은 단순 개념이지 지시물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삶 전체를 온전히 텍스트 안에 문자로 전환하여 넣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이런 문자의 특성은 필자가 생각하는 것을, 독자가 온전하고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그렇기에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은 자신과 독자들이 생각하는 사물의 심리 영상의 간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묘사하고 서술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이런 식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이는 문자의 빈틈을 메우는 과정이며 타자와 세상과 소통하는 글쓰기에서 가장 기초적이면서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하지만 때때로 이렇게 구체적으로 쓰는 과정 안에서, 한 글 안에 많은 정보를 풀고, 많은 언어를 쓰며 과한 감정을 표출하게 되기도 한다. 실제로도 글을 쓰다 보면, 많은 습작생, 일반 초고를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중간중간에 보이기도 한다. 이런 과잉은 문학. 특히 함축성을 중요시하는 시에서는 문제가 되는 부분이 된다.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서 시에서 함축의 방식이 조금씩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 가고 있다. 고전적인 운문의 함축 방식보다는 서술하는 호흡으로 삶의 단면을 함축하는 산문시가 지금 한국 시단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진다. 대표적으로 2026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자인 임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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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 고전 산문들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띄고 있다. 당장 ‘홍길동전’과 ‘장화홍련전’의 결말을 두고 비교해봐도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는 결말이다. 이러한 구성 방식과 결말은 한국 근대 이전의 소설들 속에서 주를 이뤘다. 그러나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한국 고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도 상업 소설인 웹소설, 상업 드라마, 상업 영화 등 대중적인 이야기 플롯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모티프다. 이런 모티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한다. 그중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라는 모티프는 전 세대에 걸쳐 과거에서 현재까지 매체와 서술 방식을 변주하며 계속 나타난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상업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권선징악과 관련된 모티프가 자주 나타난다. 상업 드라마에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보여주는 드라마 중 일부는 복수라는 장르를 내세우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 ‘펜트하우스’, sbs 시리즈 드라마 ‘모범택시’, ‘열혈사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복수극도 개인에 이야기만을 하는 드라마와 개인을 넘어 사회까지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 이로 볼 때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복수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모범택시’ 시리즈, ‘열혈사제’ 시리즈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 현실 사회 문제도 건드리는 복수극이다. 따라서 ‘열혈사제’와 ‘모범택시’ 시리즈는 각종 사회 문제를 시리즈별로 이야기하여 그려낸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구은재와 신애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각각 드라마의 결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악역인 신애리와 정교빈이 죽음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극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주인공인 구은재는 그들이 받은 벌을 보고도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구은재는 신애리에게 피해를 받은 피해자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신애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수의 성공이 결코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역으로 한때 악역이었던 애리를 용서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결말을 맺는다. 반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실현으로 복수를 진행하는 ‘모범택시’ 시리즈와 같은 드라마는 무지개 운수라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이 사회 문제를 대표하는 사건을 해결하는 식으로 에피소드별 결말을 맺는다. 그 과정은 복수극과 복수 대행 서비스 안에 맞춰서 폭력적이고, 역지사지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해결된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악인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벌하는 모습을 보며 고양된 감정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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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희찬
- 2026-04-3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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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드뎌 완성했어요!!! (며칠 붙잡았으니 이제 놓아줘야 할 것 같네요...(물론 추가로 퇴고할 것 같아요. 일단 잔 뒤에...)이제 자야지~^.^~(+키크니 특별전 사진은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이며 키크니 특별전은 영상 촬영만 불가하기에 영상 촬영은 하지 않았습니닷(오해 있을까...) ) 더불어 표지 사진은 토리 사진입니다...(그리고 의도는 아니었지만, 임선우와 김리윤 시인의 작품이 동해 출간 되었네요. 두 편 다. 그리고 이 두 작가님은 2025 대산 창작기금을 받으셨어요...)
최대한 오늘밤 늦어도 내일 새벽까지 완성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진짜 죄송합니다... 지금 눈 앞이 핑핑 돌아서 새벽 글쓰기는 멈춰야 할 것 같아요 ㅠㅠ} 내일 오전 중으로 진짜 완성하겠습니다 ㅠㅠ 멘토님, 글틴지기님, 그리고 여름방학 독서 활동을 신청한 수많은 글티너들에게 진짜 죄송합니다 ㅠㅠ (약 3,4일동안 1시 이후에 자면서 했는데 몸이 버텨주지 않네요...) 평소에 늦어도 12시 전에는 자는 사람입니다.) 그전에는 임선우 비평 때 같이 쓰면 좋을 것 같은 책 재독하고 (내에 있는 책 ) 현 작품 내에 있는 전시까지 보고 와서 그 전에 쓸 수 없었어요 ㅠㅠ} 진짜 너무 죄송합니다 ㅠㅠ
@송희찬 이정도면 글틴이 사과해야겠는데
5월에 밥 굶으면서 소설 썼을 때보다 더 힘들다...ㅠ.ㅠ 그래도 글틴은 잘못 없어... 이렇게 쓰고 있는 내 잘못이지 뭐 ㅠㅠ
@송희찬 죄송 금지 미안 금지... 문학이 사람을 살려야지, 죽여서는 안 되잖아요...? 무엇보다 건강 챙기시면서 무리하지 말고 글 쓰셔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