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눗방울 퐁」 -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 작성자 Marllin Zero
- 작성일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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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작가의 작품세계
1.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사랑했던 순간들이 ‘나’의 기억 속에서 재생되고, 타인을 사랑할 때 인간의 행동과 생각들이 감각적으로 서술됨
2.초월적, 비인간 존재와의 상호작용
3.동거 후 이별로 시작되는 구조가 여러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남. 첫 만남부터 시작하는 타 소설과의 차별점으로, 인물이 이별 전 이야기를 회상하고 변화할 계기를 마련하는 서사적 기능을 함. 독자로 하여금 동거 커플의 역사를 궁금해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음. → 다른 소설집에 수록된 ‘이구아나와 나’도 비슷한 구조.
4.‘우리 집’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작품들의 공통된 특징임.
5.SF 요소가 가미된 작품들에서는 공통적으로 감정이나 기억을 다루는 상용화된 기술(크로노스, 감정전이, 기억-담금주)을 상상하고, 상실과 이별의 고통을 기술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크로노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에서는 이러한 기술들을 적극 지지하는 인물들이 나오는데, 각각 의사와 변호사로 경제성과 효율성에 기초한 사고관을 가지면서 주인공과 결혼 또는 연애 직전 단계에 있는 남성들이다. 그리움을 다루는 과학기술적 방편에 대한 주인공과 남성들의 견해 차이는 주인공이 남성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될 때 중요한 문제가 되므로 깊은 관계를 맺기 전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
이어지는 작품 속 ‘기억-담금주’는 ‘나’가 취하고자 하는 그리운 상대의 시절만을 재현하거나 감정을 제거하거나 이식하는 것을 넘어, 혀 끝에도 댈 수 없던 씁쓸한 기억과 감정을 우리고 발효시키면 달큼한 술이 됨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헐벗은 상태’의 아픈 기억을 오래도록 재구성하다가, 그것이 담긴 술을 버리지 않고 집 한편에 놓아두었다. 문득 술이 담긴 커다란 유리병을 돌이켜보고 들이켜보니 달콤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칠맛이 느껴지는 것은 인간 삶의 미묘한 성질이다.
*이는 김초엽 작가의 <관내분실>, <감정의 물성>과 연결되는 주제의식이다. 급속한 기술 발전 이전과 이후를 모두 겪어본 2030 작가들이 포스트 휴먼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영원하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인간을 원했잖아 이제 어떻게 할래?’라는 질문을 탐구한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슬픔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소셜미디어와 항우울제 등 행복이 판매되고 소비되는 현재,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온 문학계의 시선은 웃음소리 가득한 세계를 새로운 고통으로 비춘다.
표제작 「 비눗방울 퐁」-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그다음 순간이었다, 옆에서 퐁 하는 소리가 난 것은. _278p.
집에서 그것을 유현의 오른 팔목에 감고 시험 삼아 몇 걸음 걸어 보니 과연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고 있는 우리 모습이 슬프고 또 동시에 우스워서 울다 웃다 했음은 물론이었다. _249p.
삶의 덧없음은 조선시대 때부터 가사를 통해 노래되었던 유서 깊은 모티프다. 21세기의 이 소설은 어려운 한시를 인용하는 대신 그 덧없음을 ‘퐁’ 하고 터지는 인간 비눗방울로 형상화했다. 유현의 현재 연인인 ‘나’와 전여친 혜령은 죽기 직전에도 농담을 건네는 사이다. 덧없지만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어깨를 감싸쥔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무겁고 두려운 것임에도 가볍고 맑게 보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생명의 덧없음은 여전히 슬픈 것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랑하는 비눗방울의 끝까지, 먹고 싶다는 것을 주섬주섬 챙겨오는 수밖에.
남겨진 이들은 어떻게 다음 밥을 먹을까. 예상치 못하게 형성된 공동체는 새참을 먹으면서 애도한다. 대단히 감동적인 말을 하거나 규정하는 대신 그냥 옆에서 감자를 캐고 새참을 먹는다. ‘마을 사람들’은 시골에 내려온 죽은 이웃의 딸이 일궈 놓은 감자를 캐고, 그 딸의 전남친의 현여친이 자외선에 과도히 노출됨을 염려하여 감자팩 팁을 알려준다.
이 소설집에는 이별 직후 출근하는 인물도 있지만,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직장에 나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작품은 그들을 나약하다고 규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물들이 특정한 계기로 이별을 훌훌 털어버리는, 매끈한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성장 서사를 구축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상이라 불리는 무엇으로 전진하게 된 미래에도 가끔 안고 싶어질 것임을 인정한다. 이제는 만지고 껴안을 수 없는 사람의 볼을 만져야겠고, 포근한 이불 속에서 ‘쓰레기’와 뒹굴고 싶어질 것임을 인정한다.
나와 시대에게는 이별을 그대로 지켜보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특히 2학년의 내가 이 책을 읽어봤다면 좋았을 텐데. 과거의 나에게 이 책과 깨달음을 선물할 수 있다면 편안했겠다.) 이별 후 ‘회복탄력성’이나 ‘멘탈 관리’ 정보들은 빨리 이별할 것을 요구하고, ‘재회 상담’, ‘데이터 기반 죽은 자 재현 서비스’ 같은 상품들은 이별을 못 하게 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에 봉사하는 문화적 장치와 감정을 구매의 대상으로 상정한 상품들은 개인이 이별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 비눗방울 퐁」은 다정한 언어로 반박한다. 이별을 노동으로 승화한 커리어우먼 신화와 그걸 내면화하여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더 바쁘게 일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숱한 사람들의 중얼거림을.
죽음과 그 고통, 그것을 방불케 하는 이별의 아픔 이후에도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아픔을 경유한 후 우리는 새로운 것이 된다. 그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_ 발문, 330p.
크로노스
처음 크로노스를 만나면 누구나 그렇듯이, 양미 역시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엄마에게 사소한 질문들을 던졌다고 했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교문 앞에서 사 왔던 병아리의 이름이며 오래전에 한번 가 본 뒤 다신 가지 말자고 했었던 막국숫집의 상호명, 양미의 이혼 절차가 모두 끝난 날 엄마가 사 왔던 꽃다발의 색깔 같은 것들을. _28p.
그때는 그때 가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꼭 갖춰야 할, 피부 위에 두텁게 두르고 살아가야 할 그것이 내게는 전무하구나. _77p.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사진첩을 하나 하나 넘기며 성재의 사진들을 모두 삭제했다. 웃는 성재, 누운 성재, 밥을 먹는 성재, 농구하는 성재, 책을 읽는 성재의 모습들이 차례차례 지워졌다. 이 일을 울지 않고 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슬프지도 아련하지도 않은 채 다만 그 사실을 신기해하기만 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것들이 너무 소중하고 아파서 차마 들여다볼 수도 없었던 시간이 내게 있었다니, 고작 이런 것들을. _114p.
담금주의 맛
(…)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갈피갈피마다 세심하게 살피고 뒤져 가며 되짚었다. 지난 오 년 동안의 하루하루 매분 매초가 모래알이 되어 쌓인 그곳,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해변에서 아름다운 조약돌을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그날 날씨는 어땠고 우리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어떤 얼굴로 얼마나 웃었는지를.
보험과 야쿠르트
돈이라도 쥐고 있어야지, 늘그막에 기댈 남편 자식도 없으면서, 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었고 분하게도 그 말에 담긴 악의를 감각하기도 전에 먼저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구나.
기댈 곳이 없구나.
참으로 그렇구나. _181p.
달리는 무릎
시스템이 옳았다면 어떡하지. 외계인이 돌아간 그곳이 지금 아름답고 완전하다면, 불필요한 존재들이 사라진 자리에 필요롭고 쓸모 있는 것만 남아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면. _234p.
퀸크랩
여기서 고기가 아닌 것은 나와 성준뿐이고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이중에서 제일 힘이 세고 똑똑하기 때문에? _306p.
→ 소설집의 순서 배치: 인공 → 인간 → 생명(비인간 존재)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 이유리 소설의 이별 문법 읽기 (박서련)
이별 후유증보다 급한 불들이 산적해 있었고, 그것들을 해결하는 동안에 결핍은 어느새 멀리, 지나온 자리 어디쯤 남아 하나의 점으로 수렴해 가는 듯했다. _322p.
그 사건, ‘나’가 온 마음을 아낌없이 쏟아 사랑했던 무언가를 떠나보낸 경험은 분명 갈갈이 찢기는 아픔과 그것이 떨어져 나간 공허를 남겼지만, 이제 ‘나’는 더 아프지도 않고 빈자리에는 새살이 차올랐다. 하여 그 사건은 있었고, ‘나’는 있다. 이 덤덤한 자기 고백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별이라는 재난을 축소할 수 없다. 재난이 축소되는 동시에 그것을 경유한 이의 생존과, 생존을 위해 그가 동원한 모든 자원도 초라해지기에. _323p.
이들(비눗방울 퐁, 담금주의 맛 서술자)의 물음표에서 ‘나’가 주어가 될 때 이들이 진정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떠나는 이와 공유하던 감정이 진짜였는지, 나는 당신을 이토록 사랑했는데 당신은 그게 아니었는지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동안 인물들은 서서히, 물론 그 생생한 사랑과 행복들 모두 가짜가 아니었으며 이어지는 이 고통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진짜라는 것을 깨달아 간다. 그리하여「 비눗방울 퐁」의 이별은 급습된 사건, 피치 못할 재난 즉 ‘당하는’ 것에 다름 아닌 동시에, 사랑에 내주었던 나의 모든 감각과 의견들을 ‘나’의 영역으로 되찾아오는 주체성 회복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_3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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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크로노스가 가장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