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대상이 변화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 — 『지상의 밤』의 상실과 위로
- 작성자 미빈
- 작성일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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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은 어떤 조건에서 성립되는가?
상실의 뜻을 찾아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상실(喪失)
1.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됨.
2.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
그렇다면 상실은 정말 무언가가 없어지거나 관계가 끊어지는 것만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음에도 무언가를 잃었다고 느끼곤 한다. 관계가 이전과 다른 형태로 변화하는 것만으로도, 이전에 존재하던 무언가가 사라졌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실과 상실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상실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상실감(喪失感)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후의 느낌이나 감정 상태.
즉 상실이 어떠한 대상이나 관계의 소실을 가리킨다면, 상실감은 그 소실을 경험하는 주체에게 발생하는 감정이다. 그러나 이 정의 역시 상실감이 어떠한 조건에서 발생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가 실제로 사라졌는가와 무엇인가가 사라졌다고 느끼는가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을 수 있고, 대상 역시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전의 관계나 이전의 상태를 잃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상실감은 단순히 ‘무엇인가가 없어졌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잃었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때 우리가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상의 밤』에서 상실은 대상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에만 발생하지 않는다. 작품 속 인물들은 대상이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을 때도, 그 변화 자체를 상실로 받아들인다.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도 아니고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잃었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이는 현실의 관계에서도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사람의 마음과 관계의 형태는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는 때때로 그 변화만으로도 이전에 존재하던 무언가가 사라졌다고 느낀다.
그러나 여기서 변화와 소멸을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는 의문이다. 관계의 형태가 달라졌다는 것은 이전의 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상대방이라는 존재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상의 밤』의 인물들은 변화한 대상을 이전의 대상과 연속된 존재로 받아들이기보다, 변화가 일어난 순간을 하나의 단절로 인식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경험하는 것은 대상의 소멸에서 비롯된 상실이라기보다, 자신이 알고 있던 대상의 모습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데서 비롯된 상실감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내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어쩌면 인물들이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타자 그 자체가 아니라, 타자에게서 자신이 발견하고 사랑했던 특정한 모습일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통해 이해한다. 오랜 시간 관계를 맺은 사람에게는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는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그것은 어느 순간 상대방의 본질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타인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 달라질 수도 있고, 내가 이해하지 못할 만한 모습을 새롭게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대방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알던 네가 아니야’라는 말에는 단순한 슬픔만이 아니라 당혹감과 배신감이 섞여 있다. 상대가 변했다는 사실이 마치 자신을 배신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처음부터 내가 알고 있던 모습만으로 존재했던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은 수많은 모습 중 내가 경험하고 해석한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너’인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너의 모습’인가.
이 지점에서 타인을 향한 소유욕의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서 소유욕은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어 하는 직접적인 욕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가 내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계속 존재해주기를 바라는 것, 내가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관계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역시 타인을 자신의 인식 속에 붙잡아 두려는 욕망일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자신이 아는 모습으로 존재해주기를 기대한다.
물론 이러한 욕망을 사랑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며, 상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해서 그동안의 사랑이 모두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의 변화 앞에서 슬픔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감정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밤』에서 인물들이 경험하는 감정을 무조건적인 ‘상실’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타자를 잃었다는 슬픔인 동시에, 자신이 사랑했던 타자의 특정한 모습이 무너졌다는 데서 오는 환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안에는 상대가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으로 계속 존재하기를 바랐던 욕망과, 그 기대가 좌절된 데서 오는 배신감이 함께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감정이 작품에서 어떻게 다뤄지는가가 중요해진다. 『지상의 밤』은 타인을 자신의 이해 속에 완전히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타인의 모습 역시 그 사람의 전부일 수 없다는 메시지가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점에서 작품은 타자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욕망이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배신감을 무조건 긍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자신의 한계를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작품이 그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작가는 인물들의 욕망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기보다는, 그것을 인간이 가진 유약함과 불완전함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감싸는 쪽을 택한다. 환상적인 사건과 이미지 역시 이러한 방식의 위로와 맞닿아 있다. 현실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와 슬픔을 환상의 언어로 옮겨놓음으로써,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견딜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다정함에 있다. 작품은 타인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잘못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그 욕망이 왜 생겨났는지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비판해야 할 감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끝까지 비판하지 않고 품어주는 것이다. 그 결과 인물의 미성숙함은 성찰의 대상인 동시에 위로받아야 할 인간적 유약함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분명 하나의 위로가 될 수 있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에게 당장 자신의 욕망을 분석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끊임없이 검열하다 보면 ‘나는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되는 사람인가’라는 죄책감으로 인해 더 깊은 우울함에 잠길 수 있다. 그렇기에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감정 자체를 판단하지 않는 위로에는 분명 필요한 역할이 있다.
그러나 감정을 이해하는 것과 감정을 미화하는 것은 다르다. 인물의 이기적인 욕망을 인간적인 한계로 바라보는 것까지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 욕망이 충분한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상실’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질 때는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서사적 처리가 작가의 의도적인 선택이었는지, 혹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인지는 작품만으로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타자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욕망과 그로 인한 배신감이 깊이 탐구되지 않은 채 다정한 위로로 수렴되는 과정은, 자칫 그것을 인간적인 슬픔의 한 형태로 지나치게 쉽게 받아들이게 만들 위험이 있다. 결국 ‘내가 알던 네가 아니야’라는 감정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충분히 묻지 않는다면, 타자의 변화에 대한 거부와 그 안에 깃든 소유욕이 의도치 않게 미화되거나 정당화된 것으로 읽힐 가능성도 남는다.
이러한 점에서 『지상의 밤』의 위로에는 일종의 봉합이 존재한다. 작품은 인물의 상처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상처가 왜 생겼는지를 끝까지 파고들기보다는 그것을 환상과 다정함으로 덮어준다. 이는 상처를 당장 견딜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힘을 가지지만, 동시에 상처를 만들어낸 욕망까지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상실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상실감만 위로받는다면, 비슷한 상황이 다시 찾아왔을 때 같은 슬픔을 반복하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자기성찰도, 무조건적인 위로도 아닐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이기적이라고 몰아붙이며 검열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을 이해하는 데서 멈출 필요도 없다. 충분히 슬퍼한 뒤에는 내가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했는지, 왜 그것을 잃는 것이 두려웠는지,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것이 상대방 그 자체였는지 아니면 내가 상대에게서 발견한 특정한 모습이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상실을 견디는 것과 상실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전자가 후자를 영원히 대신할 수는 없다.
『지상의 밤』의 위로가 내게 남기는 불편함은 위로 자체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위로가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가깝다.
내가 이러한 위로에 의문을 품게 되는 이유는 그 위로가 따뜻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쉽게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변화 앞에서 느낀 낯섦과 배신감, ‘내가 알던 네가 아니야’라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그 감정에서 멈춰도 된다는 것은 다르다. 상대가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을 잃었다고 슬퍼하는 데 그친다면, 상처를 덮어주는 다정함이 자신의 욕망을 돌아볼 기회까지 없애버린다면, 위로는 치유가 아니라 봉합에 머무를 수 있다.
『지상의 밤』은 이러한 마음을 함부로 나무라지 않는다. 그것이 이 소설이 건네는 다정함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다정함 때문에 이 소설에 아쉬움을 느낀다. 인물의 슬픔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슬픔 속에 섞여 있던 자신의 욕망까지 마주하고 성찰하게 했다면 어땠을까. 타자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마음과 그 안에 자리한 기대와 소유욕을 들여다보는 일까지 이어졌다면, 상실을 견디는 과정 역시 조금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슬픔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그 감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슬픔을 이해해 주는 것과 그 안에 담긴 모든 욕망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누군가의 변화 앞에서 내가 느낀 상실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슬픔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아팠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결국 상실을 견디는 일은 잃은 것을 슬퍼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잃었다고 믿고 있었는지를 마주하는 데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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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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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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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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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상실과 상실감을 나누는 것, 변화를 상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나 그것에서 소유욕으로 발전되는 것이 참 좋네요. 그러나 결국은 그저 위로로 수렴되는 이야기에 대한 비판까지 좋았어요. 잘 읽었습니다
@구포대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