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이별은 무엇으로 남는가 — 임선우의 『지상의 밤』 수록 단편 「프랑스식 냄비 요리」에 대하여

  • 작성자 고래
  • 작성일 2026-08-20
  • 조회수 131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임선우의 「프랑스식 냄비 요리」는 시작부터 관계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은밀하게 드러낸다. 소원해진 연인끼리의 수영,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영은 같이 하기에 물리적인 거리는 좁아지지만, 정서적으로, 언어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함께 무엇을 한다에서 멈추고,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 후 연인이었던 단은 문자 그대로 물이 된다. 이 점은 임선우 소설가의 탁월한 부분이다. 설명이 아닌 경험으로써 상황을 목도하는 것, 여기서 독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가 아닌, 상황을 목도할 수만 있는 목격자가 된다. 환상이 현실에 침투한 것이다.


물은 실체가 없지만 몸에 꼭 필요한 것, 그것이 진짜 물이 된 시점에서 여주인공과 단의 관계는 끝났다고 볼 수 있고, 아마 환상 밖의 현실에서는 이미 파토가 났을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물이 된다는 행위는 추상적인 감정 상태가 초자연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후 여주인공은 그런 단을, 이번엔 그가 원래 원했던 대로 빵으로 만들어 먹는다. 현실일지 정신적 문제일지 모르는 단을 빵으로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애도와 합체가 함께 일어나는 행위다. 현실에서는 파토가 났을 수 있으나 여주인공의 정신세계에서는 단은 더 이상 실체가 없으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주인공은 그런 단을 먹는다. 단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으로 들이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없애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보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는 우울증적 동일시, 즉 멜랑콜리와도 연결해서 볼 수 있다. 그 후 실제로 여주인공은 단과 비슷한 면모를 띠게 된다. 단은 시인이었고, 여주인공도 시를 쓰게 되었다. 습관과 취향이 바뀌었다.


이 시점에서 노아라는 남자를 만난다. 노아와의 연애가 진정 새 연애인지, 단의 그림자가 드리운 채 진행되는 연애인지는 모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노아 역시 애인이 순무가 되어 있었다. 노아는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라, 헤어지자 말해놓고 다음날 연인이 순무로 변해 있던 것이다. 여기서 단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노아는 이별을 말로 했고, 그다음에 변신이 일어났다. 반면 단은 아무 말도 없이 어느 날 그냥 물이 되어버렸다. 여주인공에게는 이별의 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노아의 이야기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거꾸로 비춰준다. 말해진 이별 뒤에도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남는다는 것을 노아를 통해 먼저 보고 나면, 말조차 되지 못한 채 물이 되어버린 단과 여주인공의 관계는 더 깊은 침묵 속에서 끝난 이별이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노아는 그 후, 프랑스식 요리 포토푀를 끓였다 한다. 프랑스에는 연애가 끝나면 포토푀를 끓이라는 말이 있다고, 이별한 사람은 늘 마음이 추우니까 계절과 무관하게 포토푀를 끓여 먹어야 한다고, 순무를 넣은 포토푀의 맛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맛이라고, 노아는 말한다.


여기서 노아는 앞의 단과 여주인공의 관계를 다시 설명해주는 인물이 된다. 단이 물이 되고 빵이 되어 사라졌지만 여주인공 안에 남았듯, 노아의 연인 역시 순무가 되어 그의 삶에 남았다. 사랑했던 사람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남는다.


그래서 노아와 여주인공의 새로운 연애 역시 완전히 새로운 두 사람의 만남이라고만 할 수 없다. 여주인공은 단을 먹음으로써 단의 일부를 자신 안에 가지고 있고, 노아 역시 순무가 된 연인을 요리함으로써 과거의 연인을 자신의 안에 가지고 있다. 결국 이 둘의 만남은 각자의 과거 연애를 내부에 품은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환상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현실에서는 말하기 어려운 이별의 잔여물을 가장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장치가 아닐까, 생각된다. 작가는 사랑이 끝나면 사람의 일부가 상대에게 남는다고 설명하지 않고, 대신 사람을 물로 만들고, 빵으로 만들고, 순무로 만든다. 독자는 그 기묘한 사건을 먼저 받아들인 뒤에야 그것이 관계의 잔여를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추천 콘텐츠

분노 이후의 계절 — 김이듬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났다」론

김이듬 시인의 라는 시에선 그녀의 전작들이었던 『히스테리아』『명랑하라 팜 파탈』등의 관능적 전복적 화자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톤이 옅어졌다. 김이듬 시인을 지탱했던 원망과 원념이, 최승자 시인을 기억하게 했던 그 감정들이 어디 가고 이렇게 차분하고 초연한, 불가적으로 말하자면 해탈한 듯 보이는 화자가 만들어진 걸까.이를 알아가고자 한다. 우선 이 시집이 김이듬 시인의 자전적인 시집이라는 점을 알아두었으면 한다.1. 김이듬 시인의 본래 화자를 보자히스테리아 김이듬이 인간을 물어뜯고 싶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널 물어뜯어 죽일 수 있다면 야 어딜 만져 야야 손 저리 치워 곧 나는 찢어진다 찢어질 것 같다 발작하며 울부짖으려다 손으로 아랫배를 꽉 누른다 심호흡한다 만지지 마 제발 기대지 말라고 신경질 나게 왜 이래 팽팽해진 가죽을 찢고 여우든 늑대든 튀어나오려고 한다 피가 흐르는데 핏자국이 달무리처럼 푸른 시트로 번져가는데 본능이라니 보름달 때문이라니 조용히 해라 진리를 말하는 자여 진리를 알거든 너만 알고 있어라 더러운 인간들의 복음 주기적인 출혈과 복통 나는 멈추지 않는데 복잡해 죽겠는데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려는 인간들 나는 말이야 인사이더잖아 아웃사이더가 아냐 넌 자면서도 중얼거리네 갑작스런 출혈인데 피 흐르는데 반복적으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 큰 문이 달린 세계 이동하다 반복적으로 멈추는 바퀴 바뀌지 않는 노선 벗어나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대형 생리대가 필요해요 곯아떨어진 이 인간을 어떻게 하나 내 외투 안으로 손을 넣고 갈겨쓴 편지를 읽듯 잠꼬대까지 하는 이 죽일 놈을 한 방 갈기고 싶은데 이놈의 애인을 어떻게 하나 덥석 목덜미를 물고 뛰어내릴 수 있다면 갈기를 휘날리며 한밤의 철도 위를 내달릴 수 있다면 달이 뜬 붉은 해안으로 그 흐르는 모래사장 시원한 우물 옆으로 가서 너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히스테리아의 표제작이다. 원망과 원념이 느껴지는 이 이유를 따지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중요점은 지금 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이냐.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났다김이듬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났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미움이 없어 분노가 없어 관심과 눈치도 없이 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올리브유로 비누 만들기만큼 쉽게 지나갔다봄에 나는 죽어 있었고 내가 죽으면 애인은 어찌 살까 걱정하지 않았다 애인은 내가 죽기 전에 죽었으니까 나의 집은 황무지가 되었다 풀들이 불에 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나는 벽돌만 한 비누를 집어 던지지 않았다자연은 좋겠다 폭풍이든 초대형 산불이든 지진이든 일으켜도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 대부분 인재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니까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학 가기 전에 매일 다퉜던 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동생이 공원 공중화장실에서 얼굴이 벌개가지고 울면서 나왔다유머를 잃어버렸지만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을 보냈다 내 동생은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다 키가 백팔십이고 머리를 허리

  • 고래
  • 2026-07-28
〈호프〉와 불가해함의 상실

나홍진은 십 년을 침묵했다. (2008)와 (2010)는 사실 그렇게 모호한 영화가 아니었다. 누가 살인을 저질렀느냐, 누가 누구를 배신하느냐 등 서사 초반부터 분명함이 존재한다. 이 두 영화의 냉기는 '진실을 모른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아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무력감이었다.그러나 그 태도가 진짜 인식론적 모호성으로 도약한 것은 (2016)에 이르러서였다. 외지인이 악마인지, 무명이 신인지 악마인지, 일광이 진짜 퇴마사인지 사기꾼인지 영화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이 쥐고 나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의심이었다.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영화의 윤리였다.그래서 가 십 년 만에 내놓은 답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장르적 변덕으로 넘기기엔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나홍진이 에서 정점에 달했던 그 모호성을 견디는 태도를 포기했다는 것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역시 소문에서 출발한다.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은 외계인보다 먼저 등장하며, 세계를 다시 의심하게 만든다. 적어도 영화의 전반부는 그렇다. 그러나 이 의심을 끝까지 연장했다면, 는 중반부에 이르러 외계인이라는 해답을 제시한다.발단은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이다. 이 전근대적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이 설정은 지금까지 나홍진이 잘해온 것, 진실을 유예시키는 서사를 예고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후 영화가 중반에 다다랐을때,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외계생명체라는 명확한 정답이 나온다. 그러곤 액션신이다. 그렇다고 난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장면이 공들인 티가 나고 미학적으로나 연출적으로나 완성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나홍진의 패기가 실현되는 곳이 모호성이었던 만큼 정답의 세계에서의 나홍진은 약간 아쉬웠던 듯 보인다.영화 초반 외계인이 등장하지 않고 범석이 홀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호랑이라 추정되는 그것을 쫓고 있을때의 긴장감과 서스펜스는 크리처물에 정수라 해도 좋을만큼 완벽했다. 내가 기대한 크리처 호러의 미학은 설명되지 않는 공포에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초반부터 불가해의 공포를 키워왔다. 마치 곡성처럼. 그러나 작중에선 범석이 바미기르라는 외계인이 마을 사람들 모두를 죽였건만 공감하는 듯한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 엔딩엔 결국 불가해의 공포였던 외계인이 말을 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렇기에 나는 말하려 한다. 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불가해의 공포를 지닌 서사가 마치 와 같은 공감에 서사로 바뀌는 전환이 이상하다. 우선 영화에서 범석은 바미기르를 총으로 죽일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총을 쏘던 도중 외계인의 눈물에 클로즈업을 한다 그때 관객들은 직감한다. 아 이거 불가해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아니구나. 어째서 였을까? 적어도 가 초반에 구축한 공포는 대상의 내면이 닫혀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그러나 영화는 외계인의 눈물을 클로즈업한다눈물은 가장 보편적인 감정 표현 가운데 하나다관객은 그 순간 외계인을 이해하려 하기 시작한다.이해의 대상이 된 존재는 더

  • 고래
  • 2026-07-18
깊이라는 위조—영화 <마이클>론

마이클 잭슨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20세기 팝스타로서 전 세계 각지에서 사랑을 받는, 세계 제일의 월드스타라 봐도 무방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삶을 제대로 알았던가? 이라는 영화는 퍼포먼스에 초점을 맞춰 그의 생애를 너무나 평면적으로 다룬다는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던가. “마이클 잭슨이 무슨 사람이지?”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성추행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월드스타라기보다, 문워크를 한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사람이 정녕 영화화될 수 있던 사람이었는가라는 궁금증에 휩싸였고, 이렇게 글로 풀어나가려 한다.우선 최근 들어 유행하는 몇 가지 예시를 가져오자면 숏츠와 틱톡이 있다. 짧은 영상으로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그런 시대가 온 현대다. 나는 마이클 잭슨 또한 숏츠적인 인물이라 생각된다. 문워크를 하는 장면과 고개를 돌리는 쇼트, 빌리진 스텝과 스릴러 군무 등, 짧게 소비되는 순간과 밈화되는 동작 및 반복된 퍼포먼스로 사랑을 받던 인물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계는 모두 그를 알지만 세계는 그를 모른다. 극소수의 사람만 안다.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이라는 팝스타에 열광하는 것이지, 마이클 잭슨이라는 인간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마이클 잭슨이라는 인간은 완벽주의적 성향을 띠는 인물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 조 잭슨에게 엄하게 자랐고, 심한 체벌과 모욕, 외모 비하, 끊임없는 연습 강요를 당했다고 인터뷰에서 여러 번 밝혔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천재로 소비되며 쉬는 아이가 아닌 항상 결과를 내야 하는 아이였으며, 마이클 잭슨이 처음으로 들어간 기획사 모타운의 교육 방식은 표정, 동작, 인터뷰, 태도, 발성, 무대 매너까지 통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마이클 잭슨은 를 통해 세계적 히트를 쳤다. 훗날 지인들은 그 후로 그가 완벽해지려 노력했다고, 수백 번에 걸친 녹음 반복, 끝없는 안무 수정, 작은 음정 차이에 대한 집착, 공연 연출 강박 등 완벽주의적 성향이 불타올랐다고 한다.그의 완벽주의가 매체에서 드러나지 않을 리가 있을까. 마이클 잭슨이 매체에 남긴 흔적은 MTV, 라이브 편집, 뮤직비디오, 반복 재생, 클로즈업 — 모두 파편들이었다. 그러나 그 파편 너머에 진짜 이야기가 있었을까. 모타운의 교육은 ‘팝스타란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명제 위에 서 있었고, 마이클 잭슨은 완벽주의적 인간이었다. 완벽주의는 매체에서 깊이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파편화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그 파편이 곧 그였다.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라는 영화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 생각된다. 숏츠와도 같은 그의 서사를 숏츠와도 같은 강렬함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좋았다. 은 분명히 그렇게 혹평받을 작품은 아니라고, 난 생각한다.평론가들은 이 비극을 외면했다고 한다. 학대, 의혹, 약물이 퍼포먼스 뒤로 흘러들어가 모습을 감췄다고.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존재 양식이 깊이를 대중

  • 고래
  • 2026-05-14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