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맞는 환상적인 삶
- 작성자 방백
- 작성일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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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게임이란, 아무 단어를 제시어로 던졌을 때 그 단어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유의어와 반의어를 말하는 것으로 최근 친구들과 하기 시작한 게임이다.
얼마 전, 혼자 은유게임을 하다가 ‘상실’을 제시어로 던졌다.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삶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이 단어는 분명 게임의 답이 맞는데, 유의어와 반의어 중 어느 쪽에 두어야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러던 중 문득, 좋은 은유는 어느 쪽의 말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이 찾아왔다.
삶은 상실과 유사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상실과 반대인 말이 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같은 성질’과, ‘다른 성질’을 넘어선 본질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상실과 삶은 본질적인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 만질 수 없지만 존재하고, 보지 못하지만 느낄 수 있는 것. 잃음과 얻음이 한 판의 유리장처럼 서로 붙어 있어 떨어트릴 수 없는 것. 한 쪽을 바라볼 때 다른 쪽이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삶과 상실의 동일한 면이었다.
그렇기에 삶은 즉, 상실이 될 수 있다. 삶은 상실이라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상실을 통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또 얻어간다. 임선우 작가의 소설집, <지상의 밤>을 읽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상실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햇빛에 비춰 보는 다각면의 보석처럼 여러 인물들과 상황 속에서, 환상적인 장치 속에서 세심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것일까? 소설은, ‘상실’이라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궁금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평을 쓰고자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상실이 삶이고, 삶이 상실이라면, 결국 그게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건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우리가 카페에 앉아 유리창의 얼룩을 바라보고 있더라도, 멀리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결국 반대편의 거리를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의 시선에서, 생의 목표하는 지점들은,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한 것이 아니라 사실 긴 터널과 같이 이어져 있다.
<지상의 밤> 소설집에서 사용되는 환상적인 장치들은, 독자가 익숙하다고 여겼던 세상과 몰입하는 것을 계속해서 깨트리며, 독자로 하여금 소설 속 인물들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독자를 타자화시키면서, 독자는 인물들이 목표하는 띄엄띄엄한 지점들이, 멀리서 보았을 때 전부 이어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촉수에 닿으면 인간이고 동물이고 전부 해파리로 변”하는 “변종 해파리”의 출현은, 인물의 상황이 실화가 아닌, ‘지어낸 이야기’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만든다. 그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수’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 히키코모리가 된 사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도둑질을 하다가 해파리 변신 대행업체를 찾아간 사건은, 삶의 의미를 다시 깨닫는 소설의 마지막 결론을 위한 하나의 수순처럼 느껴진다.
즉, 이 소설집에서 나타나는 ‘상실’은 ‘환상’과 결합하는 순간 ‘잃었다’는 의미보다 ‘생겨남’의 의미로 연결되게 된다. “변종 해파리”의 출현 전까지, ‘수’의 ‘현실적인’ 상황들(히키코모리, 아버지의 돌아가심, 도둑질 중 잡힐 위기)은 독자에게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을 부여하지만, “변종 해파리”가 나타나는 순간 앞선 ‘현실적인 상실’들은 ‘환상’ 앞에 묻혀버리고, ‘지어낸 이야기(소설)’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인물은 ‘어디로 향할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어디로 갈까...... 이것들은 모두 잃어버린 지점에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것이 형성되는 지점으로 향하는 물음이다.
임선우의 소설집은 상실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실 속에서 이를 마주하는 사람들의 ‘얻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상실은 언제나 현실적인 지점들과 맞닿아 있지만, 환상은 그 현실을 자꾸만 무너뜨리고 우리에게 소설을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이때 환상은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독자를 한 발짝 분리시켜주는 다정한 장치가 되기도 하며, 상실, 잃어버림이 무엇인지 보다 ‘얻음’이 어디에 있는지 시선을 돌아가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또 소설집 속에서 나타나는 ‘상실’은 재미있는 특성이 존재한다. 이 상실은 무언가를 ‘잃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잃음’이 우리 삶 속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형태를 휙휙 바꾸는 상실’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식 냄비 요리>에서 헤어진 연인들은 물 같은 “액체”로, “순무”로, “도토리”로 나타나며 상실을 실체화해서 보여주고, <사랑 접인 병원>에서는 연인이나 결혼의 관계가 끝났을 때 실제로 몸의 “손가락” 하나가 사라지거나, 타인의 “손가락”이 내 손에 영영 남는 방식으로 도드라진다. <만두 가게 앞에는 싱크홀이 있다>에서는 ‘비밀스러움’의 상실이 “두더지”로 나타나고, <유령 개 산책하기>에서는 죽은 개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유령”의 형태로 드러난다. ‘상실’은 현실이다. 소설이 무언가를 상실하는 지점은 언제나, 환상이 등장하지 않는 현실적인 장면 속에서 현실적인 맥락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실’이 인물들에게 ‘남는’, ‘생겨나는’ 방식은 ’환상‘과 결합되며 ’영영 사라진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구체화된 형태‘로 존재한다. 이 ’구체화된 형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상실 다음의 지점, 무언가 발생하는 지점의 메시지를 더 강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렇게 소설은 상실의 잃어버리는 면과 얻어가는 면의 실체적인 특성을 서로 섞어가며 ’환상‘ 속에서 ‘상실’에 관한 논의를 남아있는 지점으로 연결시킨다. 환상이 등장하지 않는 지점에서도, 끝나버린 언주와의 관계는 나체의 “그림” 형태로 주인공의 방 안에 남고, 키우던 개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희재’는 가사도우미 ‘해영’을 집 안에 들일 수 있게 된다. <동네 친구>에서는 상실이 “그림”의 형태로 남고,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는 반려동물의 상실이 누드모델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며 무언가 새로운 것이 발생하고 나아가는 지점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지만 잃어버림이 남긴 흔적조차, 결국에는 사라진다. 헤어진 연인의 자리에 남은 물체는 음식으로 만들어 섭취하고, 손가락의 유무와는 상관 없이, 헤어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결국에는 내 안에 남아 있던 타인의 흔적을 나의 것과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비밀스러움의 상실이었던 “두더지”는 주인공의 앞에서, 신비로움을 잃어버린 싱크홀과 함께 모습을 감추고, 유령 개는 주인공이 홀로 사랑하고자 하는 집착을 놓아주었을 때, 충분한 사랑을 받고선 사라진다. <동네 친구>속 "그림”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버리지 않는다면 계속 남아 있을 것 같은 그림도, 결국에는 잊힐 것임을 소설에서 암시하고 있다.
여자가 헌책방이라고 말하는 순간 스물다섯 살 이 동네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서울에서 구한 네번째 거처였고, 처음으로 나만의 화장실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전까지는 기숙사와 고시원을 전전한 탓에 늘 남들과 화장실을 함께 써야만 했다. 서울에 얕게나마 정착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불면증이 생겼다. 책장을 넘겨야만 버틸 수 있던 밤들이었다.
아, 기억나요. 어느 날 가보니 책방이 없어져서 놀랐어요.
(......)
당신이 마지막으로 왔을 때 그림책 한 권을 찾았었어요. 제목이 ‘파리 스케치’라고 했어요. 나는 파리 여행 가이드 책은 있어도 그림책은 없다고 했고요. 며칠 뒤에 그림책을 들여놨는데, 그뒤로 오지 않더군요.
(.......)
실은 그뒤로 책을 읽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언주를 마트에서 만났고, 언주는 책보다 영화를 좋아했다. 대학에서는 영화 동아리 회장이었다고 했다. 나는 언주와 가까워지기 위해 밤마다 영화를 봤다.
(......)
제 친구는 여기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는걸요.
그래서 자주 찾아오나요?
글쎄요.
<동네 친구> 중
언주가 있는 ‘이 동네’는, 주인공이 간절히 책을 찾았던 시기가 존재하는 동네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결국 책을 잊었다. 언주라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찾았던 “파리 스케치”은 기억에서 잊히고, 언주라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찼다.
언주도 주인공과 마찬가지다. 그는 코너 바가 열리기만을 기다렸지만, 정작 집을 새로 인테리어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자 코너 바를 찾지 않게 되었다.
주인공은 언주와 관계의 끝을 직감하자마자 ‘이 동네’에서 벗어나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은 언주의 “그림”을 방 안에 두며,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지만 언주는 결국 잊힐 것이다. 새로운 동네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가 한때 놓아주지 못했던 어떤 것은 벽지 뒤에, 방 안에 남아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차츰 잊히게 된다. 그 잊힘은 상실과 상실의 부산물(미련, 집착)을 지울 것이다.
끝을 온전히 맞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잃음과 잃음의 부산물인 미련/집착은 사라지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했을 때 헤어진 연인이 남긴 물건은 내 안으로 흡수되어 나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타인이 남긴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없겠지만, 타인에 대한 나의 마음, 삶에서 겪은 어떤 경험은 삶 속에서 남길 수도, 지울 수도 있다. 결국 소설집은 내내 상실 너머의 어떤 곳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린다. 두 가지가 이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음으로. 우리가 유리창의 얼룩을 바라보고 있을 때도, 멀리서 보면 그 너머의 끝없이 이어진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시선이 되는 것처럼. 상실은 단편적으로 남거나, 끊어지는 작용이 아니니까. 상실은 삶과 동의어고, 그 속에서 잃음과 얻음은 이어지며 끝없이 나아가는 생, 밤과 아침이 연결된 지상에서의 생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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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호수의 경관은 새하얗고 텅 비어 보인다. 그러나 비었다는 것이 정말 텅 빈 것일까? 이 물음에서부터 김이듬 시인의 시집, 를 읽어볼 것이다. 여기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빈 방이 하나 있다고 치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방, 혹은 생활의 흔적이 남지 않은 방을 보며 흔히 ‘빈’이라는 묘사를 붙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다시 방을 보았을 때, 주름 지지 않은 이불과 고요한 침대, 먼지 쌓인 책상과 마룻바닥, 잘 개어진 옷과 닫힌 옷장 등 많은 물건이 들어찬 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두고 본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권력을 잡고 있으며, 주류라고 칭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며, 이때 인간 아닌 ‘그밖의 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 같이 묻혀 버린다. ‘그밖의 것’들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류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던 비주류는 ‘있으나 없는 것’처럼 지워진다. 이 시집에서는 등장 인물이 ‘너’, ‘나’, ‘친구’ 혹은 일상적인 직업, 화자와 가까운 특징을 지닌 인물 정도에 그치는 여타 시집들에 비해 더 다양한 사회적 위치나 직업,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또한 재해의 상황들을 언급하며 그 속에서 피해를 입은 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고, 특정 사물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도록 한다. “폭풍”/“기근”/“역병”/“전쟁”, “동남아”에서 온 “가사도우미”, “생리대/초콜릿 바/담배/술”과 같이 값싼 물건과 생활 필수품을 훔쳐 곧 “감옥”으로 “떨어지”게 될 “도둑”, “사람”에게 죽은 “사람”과 “자기 혈육”에게 죽은 “가족”과 “마스크”가 “없”어 “승차를 거부”당한 “누추하게 젖은 사람”, “몽골인 노동자들”, “죽어 있”는 “식물”에서 떠오르는 방치된 사람들과 “태어났고 평범하게 성장했고 온순했으며 살해당한 소녀”와 “식물이 죽고 나서야” “그 식물의 이름을 알게 되”는 세상의 무관심함에 놓여 있는 사람들, “거리 곳곳의 무장군인들과 탱크”, “고독사”, 태어나
- 방백
- 2026-07-30
사실 운문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이 작품이 잘 읽힐지 모르겠다. 으음 그래도, 이 시를 한 편의 소설이라고 생각해 봐. 두 사람은 초능력을 가진 누군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 그 초능력은 보잘 것 없는 초능력이야. 우산을 쓰면 자신에게만 비가 내리고, 우산을 접으면 온 세상에 비가 내리는 능력이지.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그는 비를 맞아야만 해. 슬픔을 견디는 사람처럼 외롭겠지. 혼자만 동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거야. 남들이 보기엔 길을 가다가 넘어진 것처럼,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런데 그런 얘기에 빠져 있던 ‘너’에게 ‘나’는 말해. “외롭다는 거지? 아니, 그 사람 말고, 너 말이야.” “너 집이 어디야? 내가 데려다줄게.” 그 말에 ‘너’는 집(안식처,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는 곳)이 없다며 우물쭈물하게 대답해.그런 ‘너’에게 ‘나’는 흔쾌히 우산을 빌려주지. 영원히 비가 내리면 어떡할지 걱정하는 ‘너’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 영원히 내리는 비는 없다고. 온 세상이 흐린 법도 없다고. 그러니까 지금의 감정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영원히 ‘외로우면’ 어떡하지, 그 마음을 비 내리는 풍경에 빗대 말한 ‘너’에게, ‘진짜 비’를 예시로 든 ‘나’가 ‘너’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괜히 퉁명스러워져선 “내가 그걸 모르겠어?” “이건 시(비유)라고.” 대답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 “아니, 이건 대화야.” 여기서 대화는 무슨 뜻일까?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 때 대화의 방식을 사용하잖아. 대화를 하면서 곁에 함께 있어주잖아. 그러니까 ‘나’가 방금 한 말(영원히 내리는 비는 없고, 온 세상이 흐린 법도 없다)은 대화, 즉 위로라는 뜻이야. 더불어서 좀 크게 보면 ‘대화’란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해. 이건 ‘시’가 아니라 ‘대화(시 제목)인데? 하는, 재밌는 맛이 나는 농담이기도 한 셈이지. 어쨌든 세상에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거나 상관 없이, 혼자만 늘 비를 맞는 듯하고, 영원히 비를 맞을 것만 같은 외로움 속을 걷는 너를 위로하는 ‘대화’의 뜻 아닐까? 이 시는 ‘위로’를 말하는 시인 거지. ‘너’는 ‘나’가 건넨 우산을 쓰고, 비를 맞지 않은 채 걸어가. 우산은 빗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슬픔을 견디는 힘이야. 그렇게 함께 가던 중 우산을 파는 편의점을 발견한 너는, 너만의 우산을 쓰고, 각자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지. 인생의 길 속에서 우리는 가끔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겠지. 그 길을 혼자서 갈 수 없다면 함께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그렇게 걷다 보면 네게도 너만의 힘이 생길 거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기를 수 있겠지. 편의점에서 새 우산을 구입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위로를 얻은 상대와 늘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시절인연이라는 단어 알지? 잠시 같은 마음을 나눴던 사람일지라도 평생 인생의 길을 똑같이 걸을 수는 없어. 우리는 그 상대와 헤어질 수도 있으며, 어쩌면 시 속의 ‘너’와 ‘나’처럼 영영 다신 마주칠 수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 방백
- 2026-07-13
고등학교 3학년 현대문학감상 시간의 일이다. 나와 친구들은 수능 특강 교재에서 임철우의 을 읽었다. 딸린 문제를 다 푼 뒤 선생님께서는 주인공의 고향 마을인 꼬두메의 어원을 추측해 말씀해 주셨는데, 꽃이 많아 ‘꽃동네’라 하던 것을 점점 편히 부른 것 같다 하셨다. 그 말을 듣고 꽃동네, 꽃동네, 연달아 발음하자 정말 꼬두메가 되었다. 사실, 실제로 ’두메‘는 깊은 산골을 의미한다. 꼭꼭 숨은 두메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 바로 ‘꼬두메’다. 그렇지만 눈 내리는 결말의 풍경과 대비되는 꽃의 이미지가 마음에 깊이 남았던 것 같다.소설 속 주인공인 ‘그’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했던 추억과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고향 마을 꼬두메로 향한다. 그러나 도착한 곳에는 도시 개발이 다 되어, 잣고개라는 언덕 이외의 옛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던 공동묘지 지부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을 깨달은 뒤 부끄러움을 느낀다. 정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향이 사라졌음을 받아들인 그가, 잠시 혼자 두었던 어머니에게 돌아가는데, 어머니가 잣고개로 향하셨다는 소식만 듣는다. 그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어머니를 찾아 잣고개로 간다. 그러나 한순간, 어머니를 다신 보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하며, 열린 결말로서 끝나게 된다. 독자는 삶을 사는 데에 지쳐 분묘 이장 광고를 확인하지 못한 그의 안타까운 상황, 정서적 기둥이 되어 주는 고향 마을을 잃어버린 상황에 깊이 공감하며 7080년대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인식한다.고등학교 3년 동안 국어 시간에 가장 많이 접한 키워드를 떠올려보면 아마 산업화/도시화가 아닐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소외된 인간’을 다루던 현대 문학 작품들이 줄줄이 생각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여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7080년대란, 내게 너무 먼 과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업 이후, 학습지에 적힌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적는 과정에서 이 키워드를 지금 삶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질문지에는 두 가지 해석이 적혀 있었다. 의 결말을 어머니를 찾지 못하는 쪽으로 봤을 때, 어머니의 입장에서 좋게 해석하는 경우와, 그의 입장에서 불행하게 인식하는 경우였다. “여러분은 이 둘 중, 어느 쪽으로 바라보았나요?” 선생님이 물어보셨고, 각각의 결말에 손 드는 비율은 거의 반반이었다. 그 중 대표로 한 친구가 발표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꼬두메의 환상을 그리며 기쁘게 잠드셨다면 좋은 결말이라고 봅니다.” 정답이 없는 길이지만, 난 불행한 결말로 해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앞선 해석은 독자로 하여금 무책임한 사회에 안주하도록 할 수 있고, ‘왜 이들은 불행하게 끝났을까?’하는 질문을 던질 수 없어 더 깊은 시사점을 갖는 데 방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며, 농사를 짓고 살던 많은 사람들이 돈벌이를 잃었다.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나 공장에 가야 했으며, (1)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택/교통/실업/교육/
- 방백
- 202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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