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상실하는 사람들(모든 사람)과 함께

  • 작성자 금안백
  • 작성일 2026-08-21
  • 조회수 177

  누구에게나 무언갈 잃어버린다는 게 유쾌한 경험이진 못할 것이다.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든 간에, 잃음의 경험은 당사자를 상처입히고 변화시킨다. 지우개나 잃어버리면 그나마 낫겠지만, 우리는 반드시 살면서 지우개보단 더 소중한 것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상실은 단순히 우리를 방황하게 만들지만은 않는다.

  임선우의 소설집 <<지상의 밤>>에는 이런 잃어버림의 상처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프랑스식 냄비 요리>, <사랑 접인 병원>, <동네 친구>, <지상의 밤>에선 사랑하던 사람을 잃은 인물이 나온다. 그리고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유령 개 산책하기>에선 반려동물을 잃은 인물을 볼 수 있다. 언급한 모든 작품의 중심인물들은 다른 존재를 잃고 나서 그 이후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

  이를 잘 볼 수 있는 작품이 <프랑스식 냄비 요리>. 이 작품은 환상적인 방법으로 이별의 과정과 결과를 드러내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는 연인인 과 이별한다. 단순히 관계가 끊어지는 게 아니라 단의 형태가 액체로 변하여 갑작스러운 이별의 과정을 겪는다. ‘는 단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단의 요청으로 고민 끝에 그를 빵으로 만들어 먹음으로써 그와의 이별을 맞이한다. 액체가 된 단이 점점 증발하는 것과 가 그런 단을 먹는 건이별과 그 과정의 은유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을 섭취함으로써 단이 의 일부가 됐다는 것이다. 단순히 신체적인 합일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단계에서도 는 단과 융합된다. 단의 습관이나 취향 등이 에게로 복사된 것이다. 이는 밀접했던 어느 이와 헤어지고 난 다음에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을 흔적이자, 그와 함께했던 시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특한 점은 그 변화를 이별 이후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에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가령 작중 시를 쓰는 단의 특징은 이별 전까진 주인공 게 아니었지만, 단으로 만든 빵을 먹은 이후에야 주인공도 시를 쓰는 습관을 갖게 된다. 이는 작가가 관계 그 자체보다는 이별이 가져다주는 변화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식 냄비 요리>와 달리 관계로 인한 변화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사랑 접인 병원>이다. 이 소설은 서로의 신체 일부를 공유하게 함으로써 두 사람을 동일화시키는 접인 수술을 소재로 사람의 변화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김애주와 박민철의 이야기였다. 둘은 접인 수술로 서로가 동일화됐던 부부였지만, 도리어 그 접인 수술로 변한 김애주의 모습을 이유로 이혼한다. 이는 의도적인 독자를 위한 빈칸이다. 채워놓는 건 독자의 몫으로, 변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이별(김애주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조금 시간이 결렸을지언정, 큰 문제는 없었다)이나 억지로 서로에게 끼워 맞추는 행위의 결과 등 다양하게 의미 부여할 수 있는 영역이다. 다만 소설은 접인 수술 자체를 중립적으로 보진 않는다. 작중에서 접인 수술의 결과는 긍정적인 사례보다는 부정적인 것을 더 부각하고 자세히 표현한다. 앞서 김애주의 이야기 또한 당장 연인과 같아지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상대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각자의 개성을 받아들여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주인공과 은금의 사랑 관계는 접인 수술 없이 서로로 인해 변화하고 자연스럽게 맞물리며 발전해 나간다. 이것들은 소설이 접인 수술처럼 억지스럽고 인위적으로 상대에게 맞추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단서이다. 은금과 주인공처럼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맞춰지는 걸 더 참되게 바라보고 있다. 작중에서 은금과 주인공은 의도적으로 상대와 같아지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함께하다 생긴 상호작용의 결과로 둘이 조화로울 수 있을 매개가 탄생했다. 주인공이 만화카페를 특정 시간에 즐겨 가게 바뀐 것이 그중 하나다. 물론 은금과 함께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주인공과 옆집 할머니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둘은 서로를 억지로 알아가려 하지도, 맞추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서로를 인식하면서 곁에서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 둘은 눈에 띄는 행동 없이 오래도록 같이 담배를 피운 것만으로 가까워지고 친근해졌다. 이로써 소설의 자연스러운 관계 발전에 관한 긍정적 시선이 비단 연인만이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당장 어제 만난 사람과도 그러한 공명을 할 수 있음을 작가는 제시한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지상의 밤>에서 그렇다. 주인공 수는 직장 내 폭력과 당시 회사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히키코모리 생활을 자처한다. (자존감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셈이다) 이때 주인공 수는 침에 쏘인 생물을 같은 종으로 만들어버리는 특이종 해파리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저 해파리가 되겠다고 각오한다. 유일하게 자신을 보살피던 아버지를 하늘로 보낸 이후, 수는 우여곡절 끝에 사람을 해파리로 만들어주는 업체에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업체를 운영하는 강과 희조를 만나고 수는 달라진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지만, 인간으로의 삶을 유지하겠다는 정말이지 용감한 결정이었다. 어떤 것이 그의 마음을 바꿨을까? 그것은 강과 희조와의 교류이다.

  수가 해파리가 될 예정일의 전날, 강과 수는 함께 잡일을 하다가 국수를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수의 이런 일은 어떻게 시작했냐는 물음에 강은 어차피 수는 내일이면 해파리가 될 테니, 지금 자신이 꺼낼 얘기는 지상에 새어나갈 일이 없을 거라여기고는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희조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수에게 강은 희조에 대해 느끼는 소중함을 말해준다. 희조 또한 강보다야 덜하지만 비슷하다. 강이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말한 것과는 달리, 희조는 수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그와 교류한다. 수에게 왜 해파리가 되고 싶은지 물으면서 그의 내막을 조금이나마 알아가기도 한다. 물론 강보다는 그 교류가 얕고 짧았다. 그래서 해파리가 되길 하루 앞두고 펜션을 갑작스레 떠나는 수 맘을 강만이 이해했던 건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강은 희조보다 수와 더 오래 함께했고, 자신의 상처를 나눴기 때문이다. 수는 강과 희조 두 명 모두에게 자신의 상처 일부를 보여줬다.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것과 세상이 두렵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함께한 시간의 차이와 상처를 공유함의 유무가 결말에서 수의 행동에 이해 여부를 갈랐다.

  “당시에는 밥먹듯이 배를 탔는데, 선상에서 있다보면 문득문득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어요. () 그 시기에 저를 매번 선실로 돌아가게 해준 것은 희조였고, 희조뿐이었어요.”

  상처를 공유함뿐만 아니라, 둘은 함께 잡일을 하고, 밤바다를 보면서 서로의 사고방식을 알아갔다.

  “수가 잡초를 힘주어 잡아 뜯으려 하자, 옆에 있던 강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면서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수에게 강이 물었다. 어젯밤에 창밖을 보긴 했는데요,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또다른 느낌이네요. 어때요? 사람들 말대로 홀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 그런 것 같아요.”

  두 인물은 함께하면서 말과 행동으로 서로의 사고방식을 조금이라도 파악하게 되고, 상대방의 영혼을 미약하게나마 들여다보게 됐다. 이 두 차이가 결말에서 제멋대로 밤중에 펜션을 떠나는 수의 행동에 대한 강과 희조의 태도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희조가 작게 투덜대는 사이 강은 간밤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지상에는 희조가 영영 모를 일 또한 존재했다. 이를테면 강이 한동안 이어지던 발소리를 숨죽인 채 듣다가, 현관문이 조심스레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다시 눈감았던 일 같은 것.”

  <프랑스식 냄비 요리>에서도 비슷한 요소가 등장한다. 작중 주인공은 단을 먹어서 완전히 그와 이별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노아라는 남자와 사귀게 된다. 처음엔 단에 대해서 철저히 숨겼지만, 그 트라우마로 노아가 자신을 걱정하고 자신도 심리적으로 위태로워지자 끝내 털어놓는다. 그런데 노아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노아는 공감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도 유사한 경험이 있음을 똑같이 털어놓는다. 자기도 다른 형태가 된 연인을 잊기 위해 그를 프랑스식 냄비 요리인 포토푀로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포토푀와 관련된 풍습도 알려준다. 이별하면 포토푀를 끓이는. 그리고 포토푀에서 정말 중요한 건 따뜻한 요리만이 아니라 냄비가 남아있단 것이라고, 포토푀가 비워져도 냄비가 남아있는 것처럼 삶 또한 비우고 나서도 다시 채워지는 것이라고. 이 얘기는 주인공이 단과의 이별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상처를 공유하는 것을 은유한 것이다. 상대의 얘기를 듣고 본인의 비슷한 상처를 드러내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자신의 경험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인공 자신도 용기 있게 상처를 드러냈고, 노아 또한 비슷한 아픔을 공유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로써 주인공은 상처를 극복했다.

  유사하지만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희재와 유자를 봐보자. 희재는 오랫동안 함께했던 반려견 묵을 무지개 너머로 떠나보냈다. 습관적으로 찾은 오랜 친구인 유자의 죽집에서 둘은 묵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다. 반려견을 잃은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이번엔 희재와 해영의 관계를 보자. 묵을 떠나보내고 희재는 해영을 가정부로 고용한다. 홀로 남은 집에 해영을 들이고 둘은 의식하진 않았지만, 서로에 관해 조금씩 알아간다. 묵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이 또한 무언갈 잃음에 대한 치유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식 냄비 요리>와 다른 점은 상처 입은 이의 주변인이 직접 극복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곁에 있어 준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이 무조건 적극적으로 상황을 개선시켜야 한다는 게 아닌 아픔을 나눈다는 것의 가치를 메시지로 삼는다는 걸 증명한다.

  또 다른 예시는 작중 해영과 누드화를 그리며 희재가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다. 이전까지는 늙어가는 몸을 혐오했지만, 해영이 그린 자신의 누드화를 보면서 육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더욱 자기의 몸을 아끼게 된다. 이 또한 타인과 함께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지상의 밤>에서 봤던 수와 강, 희조와의 관계와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타인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내면에 변화가 생겼단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서로의 차이가 그 변화를 불러왔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내재하고 있다. 수가 계속 사람이기로 각오한 것은 강과 희조와 며칠간 있으면서 자신과는 달리 타인과 즐겁게 보내는 모습을 보고, 또 그것을 자신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가령 책의 120쪽 두 번째로 시작되는 문단의 전체에서는 펜션에 머무르며 겪었던 일상적이면서도 수에게 정말이지 소중할 기억들을 청각적인 정보에 의존해서 상기되고 있다. 희재와 해영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두 사람에겐 일상일 누드화를 서로 그려주는 것 속에서 희재의 육체를 처음엔 희재 본인이 부끄럽게 여긴 반면, 해영은 그것을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자 희재는 점점 몸에 대해 애정을 갖게 됐다. 서로 다른 타인들끼리의 교류가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길로 인도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설은 그 이후를 말한다.

  <프랑스식 냄비 요리>에서 주인공은 어느 날 나나의 전화를 받게 된다. 나나 본인이 사랑하던 사람이 도토리가 돼버렸단 것이다. 그러자 주인공은 나나에게 어떤 프랑스식 냄비 요리를 만들어 먹자고 제안한다. 이는 주인공이 노아의 경험을 공유받음으로 얻은 위로를 나나에게 전해줌으로써 그를 돕고자 함을 보여준다. 이렇듯 소설은 어떤 이가 타인 덕분에 위로나 성장이나 극복 같은 참된 영향을 받은 이후, 그도 다른 사람에게 그와 같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인다.

  또한 <지상의 밤>에서는 사람 때문에 무너져버리더라도 사람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보이고,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는 잃어버린 어떤 존재의 빈자리가 다른 형태로 다시 채워질 수 있음을, 그런 관계의 변화가 내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보인다.

  이 책은 말한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상처받지만, 치유 받을 수도 있음을.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음을.


금안백
금안백

추천 콘텐츠

비극 속에서 타인과 춤추는 것

1. 삶은 부조리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할 겨를없이 내던져진 삶은 애초에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고통과 쾌락을 둘 다 얻을 수 있고 어찌 보면 고통보다 쾌락을 더 많이 누리는 삶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도박에 불참할 기회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이듬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의 1부 중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누군가가 난데없이 맡긴 짐을 떠안게 되고 이 때문에 버스를 놓칠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 또한 이 짐처럼 누군가 &lsquo;세상에 맡겨 두고 찾아가지 않은&rsquo;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이런 생각은 선택의 기회 없이 탄생함을 인식한 것이다. 또한 짐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건 사실상 짐을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자가 삶이란 부조리 속에서 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미 태어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텐데, 그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부조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타인이다. 다른 이가 한 사람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김이듬은 타인을 내면화하는 걸 그 의미로 봤다. 김이듬에게 타인은 내면화가 가능한 존재다. 2부의 <나의 이방인 2>에서, &lsquo;너&rsquo;는 화자인 &lsquo;나&rsquo;와 대화할 수 있지만, &lsquo;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rsquo;, &lsquo;내게도 절친이 있다고/텅 빈 의자 위의 네가/나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rsquo; 같은 문장들은 &lsquo;너&rsquo;가 &lsquo;나&rsquo;에게 타자이면서도 내면화되는 대상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lsquo;나&rsquo; 대신 분노하기도 하는 타인이지만, &lsquo;나&rsquo; 안에서 내면 안에서 &lsquo;나를 감시&rsquo;하기도 한다. 이는 &lsquo;나&rsquo;는, &lsquo;우리는 불화한다&rsquo;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lsquo;너&rsquo;와의 틈을 인식하고 갈등하는데, (내면 속 &lsquo;너&rsquo;가 &lsquo;나를 감시&rsquo;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기검열의 주체로 &lsquo;너&rsquo;를 삼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다른 사람이 맡긴 짐 때문에 환승 버스를 타지 못하고 터미널에 계속 남는다. 시 속에서 화자가 누군가 맡긴 짐으로 스스로 생각되는 것처럼 &lsquo;다른 사람&rsquo;도 세상에 맡겨진 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화자에게 짐을 맡긴 건 화자가 그 사람을 내면화했다는 은유이다. 한 사람에게 원했든 아니든, 내면화된 타인은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할 의미라는 것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그러나 타인은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타인에게 의미라고 해도 타인의 삶은 당신이 의미가 아닌 부분에서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이 의미인 부분을

  • 금안백
  • 2026-07-30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