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희, 윤흥길, 김애란의 '집'
- 작성자 Marllin Zero
- 작성일 202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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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의 문학세계가 투쟁과 서늘함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면, 윤흥길의 문학 세계는 다정함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결말부는 “꼭 죽여.”로 끝난다면 윤흥길의 『장마』는 “모든 걸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니까. 또한 난장이의 딸은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사람을 증오하는데,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철거민 입주 권리를 산 사람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에서는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권력자를 절대적 악인으로 상정하고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를 구성함으로써 권력의 폭압에 대한 정서적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윤흥길은 철거민의 광주대단지 입주권을 구매한 엘리트층의 권씨라는 인물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상황을 묘사한다. 권씨는 대학을 나왔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과거의 영광을 기리면서 정장과 구두를 신고 공사장에 출근한다. 권씨가 자신을 도시빈민과 구별짓는 태도나 철거민의 입주 권리를 구매한 점에서는 전형적인 경제적 약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매일 구두를 닦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이며, 조세희의 작품들이 드러낸 사회적 모순은 결국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권씨처럼 연민하게 되는 개인들의 집합일 수 있다.
조세희
뫼비우스의 띠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_30p.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살기가 너무 힘들다.”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
“아버지,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요?”
“지섭이 미국 휴스턴에 있는 존슨 우주 센터에 편지를 써 보냈다. 그곳 관리인 로스 씨가 답장을 보내올 거야. 후년에 우주 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달에 가게 될 거다.” _72p.
(…)
“로스 씨의 편지를 받기 전에 보여줄 것이 있다. 지섭에게 말해서 쇠공을 쏘아올려 보여주마.”
집이 무너진다는 것. 지금은 죽은 여자가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새겨진 채 굳은 시멘트, 오랜 시간이 걸려 손수 지은 집, 집이 부서지는 순간까지 숭늉을 먹는 식구들. 급속한 근대화로 인한 마을 공동체의 붕괴, 고유한 기억이 담긴 공간이 소멸하고, 빈터가 되고, 수몰되는 순간은 한국 문학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현진건의 『고향』, 문순태의 『 징 소리』등 20세기 문학은 전통 사회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의해 해체되어야 했던, 서구화와 근대화를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을 다해 추진하던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김애란의 『 침묵의 미래』는 집과 고향과 거기서 쓰이던 언어의 붕괴가 한국 사회를 넘어서 세계의 섬과 숲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로 시선을 확장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고향과 언어를 ‘중앙’에게 빼앗기고 중앙이 만든 집에 살며 중앙의 언어를 쓰게 되는 것은 비단 소수 민족 사회뿐 아니라 도시적 삶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다.
남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이 일정한 구역 안에서 보호를 받듯이 우리도 이질집단으로서 보호를 받았다. 나는 우리가 이 구역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_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48p.
→ 『 침묵의 미래』의 공간적 배경인 소수언어박물관 또한 소수언어사용자들을 박물관에 ‘보호’한다. 이것은 전시이자 가두는 것이다.
김애란의 최근작 『 좋은 이웃』에서는 집이 허물어짐에 슬퍼하던 난장이 식구들과 달리, 자기 명의의 집이 없어서 슬퍼하는 아파트 입주민을 그렸다. 자신 명의의 집이 없다는 것에 경제적 압박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집이 인간의 경제적 가치를 측정하는 지표가 아닌 삶의 터전, 마침내 돌아갈 곳, 기억이 담긴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슬픔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의 끝에서 인물들이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현관 센서등에 비춰보는 장면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집—’중앙화’의 망치질에도 무너지지 않는 심리적 물리적 공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희미한 노란 불빛 아래서 스무 살 무렵의 남편이 조심스레 밑줄 그은 부분을 가만 쳐다봤다. 내 배우자가 오늘 폐지 상자에 넣은, 나 역시 한때 사랑해 마지않은, 1970년대 한 작가가 슬픈 마음으로 쓴 소설을. _ 김애란, <좋은 이웃> 140p.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내가 늙어 손자를 갖게 된다면, 나의 손자들은 그들의 증·고조부대의 터무니없는 시절 이야기를 듣고 낯을 붉히게 될 것이다. 일종의 경제 발작시대로, 윤리·도덕·질서·책임이 모든 생산행위의 적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그 아이들은 알아 지금 사람들이 내세울 업적을 형편없이 깎아내리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_106p.
미래의 아이가 답한다. “신경 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규칙은 더 견고해졌다.
“그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일만 하게 하는 약을 만드는 거예요. 그들이 공장에서 먹는 밥이나 음료수에 그 약을 넣어야죠. 약은 우수한 연구진을 구성해 만들게 해야 돼요. 처음엔 경비가 많이 들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 이상 좋은 방법은 있을 수 없어요.”
“그만 둬라.”
어머니가 말했다.
“생각하는 게 맨 끔찍한 것뿐이구나.”
“끔찍한 건 제가 아녜요.”
나는 말했다.
“정말 끔찍한 건 이 세계라구요. 몇몇 나라들이 그들의 사회 제도로부터 이탈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미 약물을 투여하기 시작했어요.”
“병이 난 사람들이겠지.”
“질병하곤 상관이 없는 일예요.”
1978년의 소설을 2026년에 읽는다. 노동 환경의 구조적 문제보다 개인의 성격적 결함을 고침으로써 행복하게 일하게 하는 약, 항우울제가 소비되고 있다. “질병하곤 상관이 없는” 고통도 병리화하고 있다. (<정신병을 팝니다>, 제임스 데이비스)
윤흥길
장마
안에 있는 아들보다 밖에 있는 아들을 언제나 더 생각했던 할머니는 마지막 날 밤에 다 타버린 촛불이 스러지듯 그렇게 눈을 감았다. _219p.
국군인 외삼촌과 ‘빨갱이’인 삼촌.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대립과 화해. 이념이 갈라 놓은 가족(민족)이 방문을 닫고 서로를 경멸하다가 공동의 상실을 마주하여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 마침내 화해하는 순간.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실상 그것은 침이 아니었다. 구두를 구두 아닌 무엇으로, 구두 이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다시 말해서 인간이 발에다 꿰차는 물건이 아니라 얼굴 같은 데를 장식하는 것으로 바꿔놓으려는 엉뚱한 의지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신들린 마음에서 솟는 끈끈한 분비물이었다. _2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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