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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론: 부끄러움을 마주하다.

  • 작성자 노스텔지아
  • 작성일 2026-08-23
  • 조회수 402

서론


1) 탐구 배경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이 질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질문에 한 번에 답할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묻는다면 머리가 아팠다. 사실 처음에는 그저 재밌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 그래서 역사를 좋아했고,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읽었다. 카뮈의 소설은 정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다. 알베르 카뮈처럼 나의 생각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면, 나의 철학을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 욕망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남자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주위에 소설을 쓰는, 아니 글을 쓰는 친구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노트북에 초고는 쌓여만 갔지만 그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은 무의미했다. 학교 내에서는 백일장을 포함하여 이러한 문예행사가 아예 진행되지 않았다. 나는 고립된 무인도에 갇혔다. 그때 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소설은 나의 생각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와 문학에 대한 교류를 하지 못하여 외로움을 겪던 차에 나는 온라인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약 100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나는 소설을 쓰기 보다는 작품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토론을 하던 중 어떤 사용자가 민음사 책의 표지 하나를 올렸다. 이름은 <무진기행>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파란색 표지에 그려진 한 외로운 노인과 안개. 나는 그 사진에 매료되었다. 그것이 김승옥과의 첫 만남이었다. 민음사는 원래 외국 문학 전집만 발행한다고 생각하고, 한국 문학도 나오는지는 몰랐기에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바로 구매했다. 그리고 첫 문장은 나의 마음을 점령하기에 충분했다.


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리는 그의 문체는 문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던 나에게 모범답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문체보다도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형성한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세계였다. <생명연습>이라는 작품에서 드러난 '자기세계'의 개념 이후 현대인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에 따라 멸망해가거나 몰락하는 인물은 분명 무언가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그 거대한 세계는 무엇일까. 마치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가. 


김승옥 작가의 소설이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답을 절대 정해주는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만 하더라도 주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질문만 던지지는 않는다. 실존주의도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고, 칸트도 인간 존엄성에 따른 의무를 부여한다. 


그러나 김승옥은 항상 소설을 애매하게 끝낸다. <건>의 주인공 ‘나‘는 윤희 누나가 범죄에 연루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놓고서는 그저 마을 주위를 서성이며 여러 생각을 하며 끝이 난다. 소설 <무진기행>에서는 주인공의 욕망을 결국 실현하지 못한 채로 다시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간다. 김승옥은 이런 애매한 상황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와 현대인과 인생에 관해서 독자 자신을 돌아볼게끔 한다. 대다수의 소설이 이러한 형태인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김승옥이 애매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더욱 와닿았던 것 같다. 불분명한 세상 속 사실 확실한 것은 없기에, 때로 인간의 감정은 정말 애매하기에 김승옥의 소설은 더 리얼리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나오는 무진의 안개처럼, 세상은 잘 알 수 없고, 여전히 불투명하다.


어떤 방식으로의 삶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어떻게 생각해?를 묻는 소설, 나는 그것에 반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다시 중학교 때로 되돌아갔다. 다시금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단편 <설경>은 그렇게 탄생했다. 세 사람이 한밤의 거리를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 그 속에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이야기들은 마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과 닮아있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 <생의 이면>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읽었다. <생의 이면>은 이승우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승우 작가의 어린 시절 가졌던 아이러니와 모순, 그리고 여러 성찰과 위기를 겪으며 작가로서의 발판을 다진 이야기들을 소설로 드러낸다. 한 작가의 생애를 관찰한다는 것은 작품의 해석에 아주 큰 도움을 준다. 작가가 왜 그런 작품을 썼는지, 왜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가에 대한 깊은 탐구를 해보고 싶었다.


김승옥의 단편 <서울 1964년 겨울>을 통해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문학의 가치를 깨달았고,  이후 <무진기행>을 읽으며 현대인의 무기력을 느꼈다. 김승옥 작가는 처음 한국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 소설가였다. 1960년대 전후 문학의 흐름에서 벗어나 현대인의 무기력함과 고통에 대해서 담아냈다. 전후 문학이라 하면 <오발탄>(이범선), <광장>(최인훈)과 같이 본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개인을 다루지만, 김승옥의 작품은 전쟁의 피폐함을 다루면서도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전쟁 이후로 서울이 다시 회복되면서 젊은이들이 회사에 취업하고, 사회 활동을 하면서 겪는 이야기들을 소설 속에 녹여내는 것이다. 이러한 김승옥의 특성과 김승옥 특유의 문체는 초기 문학가의 꿈을 가지는데 기반이 되어준 소설가였기에 김승옥 작가론을 작성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가져왔다. 


김승옥 문학관은 순천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순천에 직접 방문했다. 당시에는 김승옥 작가의 싸인을 받기 위해서 방문을 했던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김승옥 작가의 건강 악화로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순천까지 다시 오는 일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해설사님께 죄송한 마음과 함께 내가 처음 샀던 무진기행 책을 드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안개낀 무진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한듯 마치 수채화가 펼쳐진 곳에 있는 김승옥 문학관. 나중에 소설가가 된다면 다시 방문하고 싶었다.


정확히 1년 뒤에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해설사님은 내게 편지 한장과 함께 김승옥 작가님의 싸인을 보내주셨다. 사실 해설사님도 작가로 활동하시는 분이셨고, 김승옥 문학관에서 해설을 하시면서 글을 쓰시는 남길순 작가님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작가님의 디카시집과 함께 내 꿈을 응원하셨다. 




이 연구의 시작은 2025년 12월 경에 진행하여 1차 연구를 3월 쯤 마무리지었고, 학업으로 인해 틈틈히 작성하여 최종적으로 8월에 2차 연구를 마감했다. 약 반년간의 걸친 연구였다.


2) 문제 제기


김승옥 작가에 대한 뉴스 기사를 평소 많이 찾아보는데, 특이한 기사 하나가 있었다. 발견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제목: “김승옥, 김동인 소설의 여혐을 비판한다.”(최재봉, 2025.12.06.,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786253.html


기사에서는 모 문예지의 봄호 리뷰를 다루고 있다. 일부 젊은 작가들이 유명 한국 소설 속에 ‘여성비하, 여성혐오’의 내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김승옥 소설의 여성들은 자주 강간을 당하며, 당시 도시의 풍경은 섬세하게 드러내지만 피해자인 여성 인물들은 철저하게 지워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단편 <건>에서는 주인공 소년이 윤희 누나를 강간하는 형들의 모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면서도, 결국 소설의 결론은 주인공 소년의 성장만을 다루지, 성폭행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단편 <건>을 고등학교 때 읽어봤기 때문에 충분히 이러한 내용에 공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당시 읽었을 때는 큰 문제의식 없이 읽었다는 점이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소설은 상당히 위험한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 남성의 성장만을 다루고, 여성 인권이나 보호는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건> 뿐만이 아니다. 김승옥의 대표작 <생명연습>, <무진기행> 등에서도 이런 내용은 계속해서 등장한다. 


김승옥의 1977년 제 1회 이상문학상 대상작 <서울의 달빛 0장>에서는 여성 인권 타락의 끝을 보여줄 만큼 매우 심각한 묘사도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는 3개월 동안 무려 60명 이상의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독자들 반응 중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사실상 야설과 다를바가 있는가?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수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77년 제 1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참고로 1977년 이상문학상 우수작의 라인업은 매우 화려하다. 대표적으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윤흥길 작가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 현재 교과서에서 매우 친근하게 볼 법한 작품들이 당시 우수작이었다. (대상작은 1순위로 단 한 개의 작품 밖에 없고, 우수작은 2순위로 총 7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서울의 달빛 0장>은 당시 시대에서는 매우 높은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는 이야기인데, 2026년 현대 독자의 관점에서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부분이 존재하고, 매우 불편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번 탐구는 단순히 여성 인권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당대 소설 속에 왜 이러한 서사가 등장하였고, 왜 이러한 이야기가 등장하는지를 다루면서 현대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을 모두 적용할 것이다. 역사적 관점과 현대적 관점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시대적, 기술적으로 매우 변화하였고, 윤리적 기준이나 사람들의 관점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현대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가 이번 연구의 관건이다. 앞서 언급한 뉴스 기사의 경우에는 단순히 김승옥의 작품을 비판하고 있는 면이 강하다. 그것이 바로 저 뉴스 기사의 한계이다. 현대적 관점으로만 과거의 작품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만약 예를 들어 홍길동전을 현대적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걸리는 것이 한 두가지 인가? 홍길동이 율도국을 점령하는 행동은 당연히 납득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작품 속에 나오는 가부장제, 신분제 모두 비판을 해야한다. 그러나 현대 독자들은 그것을 비판하기보다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문제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조선시대처럼 아주 먼 과거는 비교적 해석이 쉽게 될 수 있지만 약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소설의 경우에는 현대적 관점에 부합하는 부분과 역사적 관점에만 부합하는 부분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를 작품성의 요소로 보아야 할지가 불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김승옥 작가의 작품론을 다루면서, 각 작품 별로 어느 범위까지를 역사적 관점으로 보고 현대적 관점으로 봐야하는지 다룰 예정이다. 


김승옥의 대표작 <무진기행>의 마지막 부분에는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라는 서술이 있다. 처음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것 같으면서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 비판은 김승옥의 부끄러움을 다시 재해석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내가 김승옥을 좋아하기에 오히려 이번 연구는 객관적이며, 주관성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김승옥 소설 속 여성에 대한 묘사는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묘사를 했을까. 왜 이런 서술을 했어야만 했을까. 그 의문을 해결해나가는, 어쩌면 나의 부끄러움을 성찰하는 연구가 될 것을 기대한다.


본론


1) 김승옥에 대한 소개


김승옥 작가는 1960년대~70년대 후반까지 활동한 작가로 초기 한글 세대 작가라고도 불린다. 한글 세대라는 말이 쓰인 이유는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1960년대는 1945년 해방의 기쁨과 1950년 한국 전쟁에서의 분단의 아픔이 공존하던 시기이다. 아직 일제강점기라는 억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한글 문학이라는 것이 새롭게 등장해야 하는 시기였다. 한글 문학의 새로운 출발점이 김승옥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후 문학에만 치우치지 않고, 실존적인 문제나 철학적인 관점을 다룬 작품들이 많아 한국 문학사의 불멸의 천재라고도 불린다. 그가 쓴 작품은 단 10~20개에 불과 하지만 한국 문학사에 큰 영향을 남긴 작가이다.


2) <생명연습>(1962)


단편 <생명연습>은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시에 김승옥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다. 김승옥의 데뷔작인 만큼 이후 김승옥의 단편보다는 비교적 소설적 완성도가 낮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명연습>은 김승옥 단편 중에서도 김승옥의 철학적 고찰이 가장 잘 드러나는 소설 중 하나로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생명연습은 논문을 들고 한 교수를 찾아간 화자 '나'가 카페에서 기이한 차림의 학생을 목격하고 '자기 세계'라는 상념에 잠기면서, 자신의 유년 시절과 한 교수의 과거를 번갈아 회상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 통에 폭격을 맞아 피난했던 '나'의 가족은 종전 후 폐허가 된 집으로 돌아와 삶을 재건하려 하지만,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형과 어머니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고, 누나의 만류에도 형의 분노는 결국 어머니를 향한 살의로 치달아 형의 자살과 어머니의 실성이라는 파국으로 끝을 맺는다. 한편 화자가 전해 듣는 한 교수의 젊은 시절 이야기 역시, 일제강점기에 사랑하는 여인 정순과의 관계와 유학이라는 개인적 성취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가 결국 유학을 택하며 정순에게 씻을 수 없는 폭력을 저지르고도 별다른 죄책감 없이 조국을 떠났지만 평생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시대와 인물을 통해 각자가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자기 세계'를 지키거나 무너뜨려가는 과정을 겹쳐 보여준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평범한 소설로 보인다. <생명연습>은 신춘문예 등단작인 만큼 뒤에 나오는 작품들에 비하면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의 수위 높은 이야기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줄거니 내에서는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조금 불편할 만한 지점들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자세히 짚어보자면 한 교수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문제가 될 수 있다. 한 교수는 과거 연인 정순을 범하게 되는데 자신의 책임을 덜기 위해서 비윤리적 행동을 보인다는 점이다. 당시 한 교수는 정순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면 유학길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자신의 책임을 덜기 위해서 정순을 범하고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고국을 떠나는 장면은 인간성이 상실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장면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큰 문제가 될지는 고민해보아야 할 지점이다. 왜냐하면 작품 내에서도 이런 한 교수의 모습을 비판하며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이런 내용이 드러난 이유도 결국 인물들이 가지는 각자의 ‘자기 세계’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김승옥은 ‘자기 세계’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기 세계’라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몇 명 나는 알고 있는 셈이다. ‘자기 세계’라면 분명히 남의 세계와는 다른 것으로서 마치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성곽에서, 대기는 연초록빛에 함뿍 물들어 아른대고 그 사이로 장미꽃이 만발한 정언이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을 불러일으켜 보는 것이지만 웬일인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특히 ‘자기 세계’를 가졌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가 그 성곽에서도 특히 지하실을 차지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 지하실에서는 곰팡이와 거미줄이 쉴 새 없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모두 그들이 가진 귀한 재산처럼 생각된다.”- <생명연습>


김승옥은 이 구절을 통해 분명히 자기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자기 세계는 김승옥의 세계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가정이다. 자기 세계를 가졌다는 것은 연초록빛에 물들어 아른대고, 장미꽃이 만발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자기 세계는 마치 성곽에서도 지하실의 부분이다. 지하실에는 어둡고, 감추어져 있으며 개인의 내면에 곰팡이와 거미줄이 쉴 새 없이 자라는 공간인 것이다. 한 교수의 자기 세계는 바로 과거 정순과 겪었던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이를 통해 한 교수의 이러한 뻔뻔한 자기 세계를 소설은 냉소하고 조롱하는 것에 가깝다. 오히려 이 부분은 여성의 차별 혹은 폭력을 다루고 있을 뿐, 여성 차별이나 혐오를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 작품이 옹호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비판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적 관점에도 부합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반박하고 있는 관점도 존재한다. 다음은 김승옥 작품에 여성혐오, 여성차별이 인식되고 있다는 논문이다.


“그들은 '성장'을 넘어 기성세대가 요구하는 '청년'으로서 행동해야 하고 '자기세계'를 건립 해야하기 때문이다. '자기세계'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기'를 거쳐야 한다. 극기는 '자기조절'이라는 긍정적인 의미이지만 김승옥의 소설 속에서 '극기'는 타자를 훼손하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략) 이에 본 연구는 극기를 자기방어로 해석하고 이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자기세계'라고 본다. 「생명연습」의 한 교수, 영수는 사랑하는 여자를 범하거나 "여자 정복"을 통해서 '자기세계'를 구축한다.


남성인물의 극기는 모두 여성인물을 성적으로 훼손시킨다는 공통된 양상을 보인다. 이는 근대의 이분법적 세계에서 여성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폭력적인 남성성의 세계로 편입하라는 파괴적 교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성인물들이 보여주는 극기는 남성인물들이 폭력적 근대화를 수용하는 과정을 순수의 세계, 여성성을 상징하는 세계를 '여성'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또 남성인물들이 여성인물에 대해 묘사하는 데에 있어 여성인물에 대한 인식을 가늠해볼 수 있다.

① "여자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가고 있었다." (「생명연습」, 77쪽)”(정남현. "김승옥의 여성인물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강남대학교 일반대학원, 2018. 경기도)


먼저 논문에서는 여자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가고 있었다는 표현을 통해서 김승옥의 여성 차별적 인식을 이야기하고, 이외에도 여성이라는 대상을 폭력적으로 정복한 후 자기세계를 견고히 지키려고 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여성 차별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아래 논문에서는 상반된 의견을 보인다.


“한편 역시 <생명연습>의 한 교수는 당장은 상실할 수 없는 소중한 대상을 상실해도 좋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든 후에 비로소 상실을 맞이함으로써 상실감 자체를 상실하는 전략을 택한다. 그에게 훼손된 대상은 상실감 자체를 느낄 수 없도록 만드는 무가치한 대상에 불과하다. 때문에 한 교수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대상을 직접 훼손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하여 성공적으로 상실감을 상실함으로써 ‘자기 세계’를 온전히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곽상순. (2016). 김승옥 소설에 나타난 상실의 양상과 주체의 대응태도 연구. 현대소설연구,(63), 5-26. 10.20483/JKFR.2016.09.63.5)


먼저 우리가 보아야 할 부분은 작가가 과연 이러한 왜곡된 인식을 가진 인물을 어떻게 인식하냐의 문제이다. 서술자가 이 인물을 긍정한다면 작가 또한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김승옥은 이러한 인물의 이중성을 비판하고 있다. 한교수는 초반 매우 긍정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나’라는 인물을 평소 귀엽게 바라보고, ‘나’ 또한 그런 한교수를 존경해왔다. 그러나 한교수는 오늘따라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한교수의 과거 연인 정순의 장례식이 오늘이었다는 것이었다. 한교수의 자기세계는 자신의 명예에 대한 출세로 가득찬 욕망의 세계이다. 


유학길이라는 출세의 길과 정순과의 사랑 속에서 고민하던 한교수는 단 하나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정순을 범한다. 정순을 범하는 이유는 정순의 처녀성을 상실시킴으로써 이제 정순을 잃어도 상실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윤리적으로 상당히 어긋난 행동이며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작가가 이러한 자기세계를 긍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의 핵심은 이러한 인물에 대한 자학적인 태도이다. 작가는 인물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인식을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도 한교수는 정순의 장례식에 가지 않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교수가 그나마 양심적인 인물이라면 정순의 장례식의 갔겠지만 한교수의 자존심에 그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한교수가 그나마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소설에서는 지우고 있다.  


작가는 자기세계를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지하실, 거미줄이 낀 공간이라 묘사하고 있다. 자기세계는 정당화될 수 없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인간에게 남겨진 아주 최소한의 양심이 자기세계처럼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결국엔 양심에만 머물고 전혀 행동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것으로도 인식될 수 있다. 지난 100년 넘게 서양 철학사에서 대부분의 사상가는 인간을 이성과 경향성으로 나누어보았다. 인간에게는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성도 존재하지만, 경향성이라는 오류가능성을 전제한다. 결국 김승옥은 이러한 경향성, 인간의 불완전한 이중성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교수가 가진 왜곡된 인식도 결국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후 김승옥은 <생명연습>의 앞 부분에서 이야기 했던 극기로 이 부분을 이어지도록 한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인간들이 나오고, 이 인간들은 모두 ‘자기 세계’를 각자가 가지고 있다. 성령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며 자신을 거세한 전도사,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를 닮은 여러 남자들과 만나는 어머니에 대한 살의로 자살한 형, 최음제를 먹여가며 여자를 유혹시키려고 하는 재주에 빠져 있는 영수, 직선을 손으로 직접 그리지 않고, 자를 대고 그렸다고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만화가 오 선생 등 이들은 모두 비밀의 왕국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추방시킨 성장의 매개자들이다. 이들은 자학이나 죄의식을 통해 극기를 이루려는 성인이자 근대인의 모습을 보인다. 


다만 그렇다고해서 논문에 등장하는 비판도 불가능한 비판은 아니다. 분명 김승옥의 소설 속에서 여성은 남성의 내면적 성장을 위한 수단적 가치로만 이용된다는 점은 비판받을 수 있는 지점이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소설 속 여성 인물 정순은 남성에 의해 파괴되고,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이 부분부터는 보다 더 좁은 관점으로 좁혀진다. 1960년대의 시대적 맥락도 고려해야만 넓은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생명연습>은 1950년대 이후 전후 문학의 경향에서 벗어나 현대인의 내면을 초점적으로 다룬다. 현대인의 방황과 혼란함, 이는 전쟁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기 보다는 ‘자기 세계’ 하나의 감추어진 내면을 인물이 직접 마주함으로써 그에 대처해나가는 성장하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후 김승옥의 소설에서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점점 몰락하거나, 내면의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이러한 점에서 <생명연습>은 김승옥 단편의 가장 첫 에필로그를 보는 느낌이다. 김승옥의 소설의 가장 첫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후 김승옥의 단편도 이러한 ‘자기 세계’를 다루는 작품이 매우 많다.


3) <건>(1962)


<건>은 산문시대에서 발표한 작품으로 <생명연습> 바로 직후 나온 단편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마을은 빨치산들의 습격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었고, 빨치산들의 습격으로 형이 계획한 친구들과 무전여행은 취소가 되었다. 학교 가는 길에 주인공 ‘나’는 윤희 누나로부터 빨치산 시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빨갱이 시체를 보러 간다. 동네 반장으로부터 빨치산의 시체를 치워달라는 부탁을 받은 무기력한 아버지는 형과 형의 친구들을 데리고 시체를 치우러 나선다. 시체를 묻고, 형과 형의 친구들과 산에서 내려오는 중에 윤희 누나를 만난다. ‘나’는 윤희 누나에게 의지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형의 친구들은 윤희 누나를 겁탈할 계획을 세우고, ‘나’는 그 나쁜 음모를 돕는 역할을 하고 만다. ‘나’의 위악적 행위로 인해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훨씬 앞선, 어떤 섭섭함과 함께 그것이 ‘자라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모순된 성장의 인식에 도달한다.

이 소설은 전후 배경을 다루고 있는 단편이다. 빨치산의 시체를 치우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김승옥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김승옥의 아버지는 여순사건과 연관된 인물로 이후 산으로 피신을 가서 죽음을 맞이한다. 어릴적 겪은 시대적 이데올로기와 경험이 <건>에서는 잘 드러나고 있다.

<건>은 충격적인 내용들이 몇몇 등장한다. 첫 번째로 빨치산의 시체를 치우는 장면이다. 주인공 ‘나’는 빨치산의 시체를 치우면서 크게 실망한다. 시체에는 어떠한 폭력성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빨치산의 시체에 돌팔매질을 해보지만 그럼에도 시체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빨치산의 습격으로 무전여행이 취소된 상황에서 형들과 그의 친구들은 윤희 누나를 겁탈하려고 한다. 이 사건이 바로 충격적인 내용의 두 번째 사건이다. 주인공 ‘나’는 윤희 누나가 자신을 아껴준다고 생각했지만 윤희 누나가 성폭행을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형들은 윤희 누나를 유인하는 심부름을 ‘나’에게 시키게 되고, ‘나’는 이를 저지하기는커녕 그대로 이행하여 비극을 자처한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소설 <생명연습>과도 이는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바로 ‘자기 세계’라는 음침한 공간과 자학과 죄의식이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주인공 ‘나’가 겪은 이번 경험은 결국 자학과 죄의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면서도 소설은 ‘성장형 소설’을 표상한다. 이것이 어떻게 성장이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아, 모든 것이 항상 그렇지 않았더냐. 하나를 따르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개 위에 먹칠을 해 버리려고 할 때,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보다 훨씬 앞서 맛보는 섭섭함. 하기야 그것이 ‘자라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

일반적인 성장소설은 주인공이 세계의 부조리를 겪고 나서 성숙한 윤리적 주체로 나아가는 구조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건>이 독특한 건, 화자가 그 상처를 극복하는 방식이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형처럼 위악을 스스로 선택하는 쪽이라는 점이다. 순진함으로는 이 혼돈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체득한 소년이, 차라리 가해자 쪽의 태도(위악)를 내면화함으로써 세계에 적응하려 한다.


앞서 언급했던 기사

제목: “김승옥, 김동인 소설의 여혐을 비판한다.”(최재봉, 2025.12.06.,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786253.html에서는 <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비판을 하고 있다.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상찬을 들으며 4.19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문학사에 등재된 김승옥의 소설을 후배 여성 소설가가 ‘여혐’ 코드로 비판하고 나섰다. 젊은 여성 소설가 강화길은 <문예중앙> 봄호 리뷰 코너에 실은 글에서 ‘건’을 비롯한 김승옥의 주요 단편들에 보이는 여성 혐오 요소를 가차 없이 까발렸다. ”


먼저 <건>에서는 윤희 누나를 범하는 장면에서 여성혐오의 요소가 느껴졌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이는 작품 해석의 관점에서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인데, 가장 모호한 부분은 주인공의 성장소설이라는 점이다. 결국 주인공은 윤희 누나를 범하려고 했던 형들의 모략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부름을 이행했기 때문에 범죄에 기여한 바가 명확하게 존재한다. 정리해보면 건에서 느낄 수 있는 여성혐오적 요소는 두 가지이다.


1) 주인공의 범행(성폭행 사건의 원인 제공)이 성장의 계기가 된다는 점

2) 여성 피해자가 가해자(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소재로만 쓰인다는 것.

이외에도 더 있을 수 있으나 일단 압축적으로 두 가지만 다루도록 하겠다.


일단 작품은 성폭행 사건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관점으로 이를 반박할 수도 있다. ‘나’라는 인물 또한 성폭행 사건의 원인 제공을 자신이 했다는 점에서 소설 후반부 내내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는 서술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내에서 직접적으로 이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한쪽 입장을 지지하기 매우 애매한 지점이기도 하다. 만약 1)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2)처럼 성장을 위한 소재로만 쓰인다는 점에서도 고려를 해보아야 한다.


“바야흐로 나는 무서운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 간단한 말을 전해 주는 그런 책임이 희박한 행위로써 가담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 미영아, 너의 집을 제공하라고 한다. 매가라는 글이 적힌 너털너털한 종잇조각이 붙은 너의 집 대문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러나 나는 그 집이 빈집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고 고집하고 싶다. ”-<건>


주인공이 이러한 사건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 윤희에게 벌어진 사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라고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어두운 사건을 통해 나름대로의 성장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나름대로의 성장은 씁쓸하고, 참혹하며 비극적인 성장과도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처음 회사에 취업한 사회 초년생이 회사의 비리를 감추고, 회사를 위해 온갖 불법적인 일을 하게 되면서 나름대로 ‘성장’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 의미는 성장, 성숙보다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알아가는 초년생의 비극적인 처지라고 볼 수 있다. 비극적인 처지를 증명하는 것은 바로 소설의 배경이다. 현재 <건>에 등장하는 소설의 배경은 6.25 전쟁,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놓인 이데올로기를 보여준다. 매우 혼란스럽고, 주인공도 초반에 빨치산의 시체를 보는 등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것들을 보여준다. 전쟁과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 민간인은 범죄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나 중동에서 발생하는 충돌만 보아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전쟁이라는 배경은 법이라는 강제력의 부재를 발생시킨다. 법의 부재는 사회의 자연상태를 만들어내고, 결국 인간은 전쟁상태를 맞이한다.


<건>에 등장하는 이러한 범행은 마치 전쟁상태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전쟁의 참혹함과 주인공의 어두운 내면적인 성장을 다루는 소설이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성숙한 주인공이 성숙한 주인공이 되는 성장소설이 아니다. 주인공의 이러한 어두운 성장은 긍정적인 의미의 성장이라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이후의 서술이다. 소설 후반부에서 주인공은 동네를 떠돌고, 텅 비어버린 미영의 집을 보며 어린 아이의 순수성이 상실된 모습을 보여주며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그러나 여성차별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만한 서술도 동시에 존재한다.


“너 윤희 누나에게 심부름 좀 갔다 와, 응?”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얼결에


“응.”


하고 대답해버렸다. 얼결에가 아니라 나는 벌써부터 그런 부탁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건>


이 대목에서 주인공 ‘나’는 의도적으로 심부름에 응했음을 알 수 있다. 어린아이니까, 형의 음모를 몰랐던 것이 아닐까? 하고 의문을 제시할 수도 있지만 앞 서술에서 이미 주인공 ‘나’는 형들의 음모를 눈치채고 있었다. 심지어 무슨 짓을 할지까지도 모두 들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윤희 누나에게 충분히 호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응한다. 


여기서부터 주인공의 성장은 성장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주인공 ‘나’는 양극단에서 방황한다. 윤희 누나 앞에 서는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어지럼증, 억울하게 꾸중 들을 때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장면이 뒤에 등장하는데, 이건 이 소년이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감각해진 게 아니라, 머리로는 형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 하면서도 몸은 그 배신/기만 행위에 저항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후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나'는 미영이네 빈집 앞에 멈춰 서서, 그 집을 자기만의 신비로운 상상의 공간으로 지켜왔다고 되뇐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이 모든 것 위에 먹칠을 해버리려 하는" 행위라는 걸 안다. 즉 그는 자신의 순수했던 내면 세계(미영이의 빈집)와, 지금 윤희 누나를 유인하는 데 이용되는 또 다른 빈집을 겹쳐 보면서, 자기 안의 순수한 부분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는 자각을 품은 채로 행동한다.


작가는 주인공 ‘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옹호하는 서술을 보이고 있지는 않기에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 채만식의 소설에서도 채만식 소설의 주인공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나 친미파를 내세우며 그들의 행동을 유쾌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김승옥이 채만식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고, 심지어 이 소설은 채만식의 소설처럼 3인칭 편집자적 논평을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작가라고 해서 자신이 세워둔 주인공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마지막 미영의 집을 보며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을 묘사하는 장면은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소재로 드러나는 점은 사실이나, 이것이 여성 혐오로 해석된다는 것은 조금 더 세심한 분석이 필요하다. 오히려 전쟁 속에서 일찍히 순수성을 상실해 버린 처지의 어린아이의 모습을 비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가깝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애매한 부분도 사실이다. 조금만 빗겨가서 보면 이 소설은 범죄를 옹호하는 소설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윤희 누나를 이끌지 않았다는 점, 그럼에도 나를 성장을 이룬 인물로 그려낸다는 점은 비판받을 수 있는 지점이다. 즉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후빈다는 사실은 여전히 씁쓸하게 남는 민감한 부분인 것이다. 여성에 대한 인권이 추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시대의 현실인가? 아니면 저자의 왜곡된 인식인가?



3) 무진기행(1964)


김승옥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문체’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소설 <무진기행>의 첫 문장, 마지막 문장은 매우 유명하고 이외의 묘사도 상당한 수준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향으로 소설가 지망생들이 무진기행 문장 필사를 하는 경우가 매우 많기도 하다. 무진기행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제약회사 중역인 '나'(윤희중)는 아내의 권유로, 회사에서 중요한 주주총회를 앞두고 잠시 고향인 무진에 내려가 며칠을 보내게 된다. 무진은 그가 젊은 시절 폐병을 앓으며 도피하듯 숨어 지냈던 곳으로, 서울에서의 성공한 삶과 대비되는 과거의 자아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무진에 도착한 '나'는 고등학교 후배인 '박'과 세무서장으로 출세한 옛 친구 '조'를 만나고, 그 자리에서 무진의 중학교 음악 선생으로 있는 '하인숙'을 알게 된다. 하인숙은 세무서장 조와 결혼을 저울질하는 처지이면서도, 무진을 벗어나 서울로 가고 싶어 하는 인물로, '나'에게 무진에서의 처지와 답답함을 토로한다. '나'는 하인숙에게서 과거 무진에 갇혀 있던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게 되고, 둘은 하룻밤을 함께 보내며 가까워진다. 그 와중에 '나'는 사흘 전 자살한 술집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는 무진이라는 공간이 지닌 폐쇄성과 절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으로 기능한다. '나'는 하인숙에게 함께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약속과도 같은 말을 건네지만, 아내로부터 총회 때문에 즉시 상경하라는 전보를 받자 망설임 없이 그녀를 무진에 남겨둔 채 혼자 서울로 돌아가기로 한다. 무진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무진기행은 구조적으로 상당히 잘 짜여져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해석의 다양성의 폭이 매우 넓다. 서울과 무진이라는 두 공간이 대비된다는 해석이 존재하기도 하고, 오히려 동일하다는 해석도 존재하며, 마지막 문장인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라는 대목에서도 왜 주인공이 부끄러움을 느끼는지에 대한 수 많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진기행은 오히려 역사적 관점에서의 해석이 더 어색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무진기행은 정말 현대인 그 자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윤희중은 제약 회사의 전무이사로 승진이 될 예정이다. 그의 인생은 매우 전망이 밝은 상태이다. 제약회사의 따님과 결혼을 했고, 승진도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인의 능력으로 전무이사가 된 것도 아니다. 윤희중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고독감과 불안감, 허무함을 느낀다. 소설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무진기행>


이후 문장은 무진이라는 공간을 상당히 은유적으로 잘 설명해준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기행>


이 문장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무진의 이미지는 바로 ‘안개’일 것이다. ‘안개’는 이 작품의 분위기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장치이다.


그러나 <무진기행>에서는 주인공 ‘나’와 ‘하인숙’의 이야기에서 문제가 비롯된다.첫째, 하인숙이라는 인물의 도구화 문제이다. 하인숙은 무진이라는 공간에 갇힌 답답함과 서울로 향하고자 하는 욕망을 '나'에게 토로하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그녀의 서사는 결국 '나' 자신의 과거, 즉 한때 무진에 도피해 있던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만 기능한다. 그녀가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하룻밤을 함께 보낸 이후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서술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감정과 판단만이 서사의 중심에 놓인다. 이는 앞서 살펴본 생명연습의 어머니와 정순, <건>의 윤희 누나에게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 구조, 즉 여성 인물이 남성 화자의 내면 성찰을 위한 재료로만 존재하는 서사적 패턴이 드러난다.


두 번째로 무책임한 약속과 일방적 결정의 문제이다. '나'는 하인숙에게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뜻의 말을 건네지만, 아내로부터 온 전보 한 통에 별다른 갈등 없이 그녀를 무진에 남겨둔 채 홀로 서울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하인숙의 동의나 의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한 인물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약속을 상대와의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던지고 거두어들이는 구조 자체가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내용 또한 위에 나온 <생명연습>과 <건> 모두 유사하다. 김승옥의 여성 서사는 소설마다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폭력을 당하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동일하게 이는 주인공 남자의 자책, 자멸, 자학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과연 평등과 불평등의 문제로 판단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아래 소설들을 더 탐구해보면서 결론을 지어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참고로 어떤 연구에서는 무진기행이 오히려 김승옥 소설 중에서 여성의 역할, 주체성이 비교적 더 드러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의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연구를 참고하길 바란다.


'강00은 1960년대의 김승옥 소설에 나타난 남성주체의 성장서사가 보여주는 폭력적 구도와, 철저하게 지워지는 피해자로서의 여성인물 형상화를 창작자의 입장에서 비판한다. 이때 논의의 배경에 깔려 있는 '근대적 남성성'의 문제나 '훼손된 여성'의 표상에 대한 비판은 성별 도식의 단일한 해석을 넘어서 당대 현실과 작품이 맺는 길항관계에서 좀 더 세심한 분석이 필요하다.' 라고 했다.  / 백지연 <페미니즘 비평과 '혐오'를 읽는 방식> 中.


https://magazine.changbi.com/MCQuarterly/Item/5334#fn-fn-8d4099c2-9691-4494-adcc-20be6357ccc912


이번 연구의 주제인 ‘부끄러움을 마주한다는 것’이 바로 이 무진기행에서 드러나는 만큼 우리는 김승옥이 던지는 질문에 집중할 필요성도 있다. 왜 주인공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이 과연 여성에 대한 폭행의 정당성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부끄러움, 그것은 자학, 성찰의 정서가 아닐까. 무엇이 되었든간에 해석의 여지는 있기 마련이다.



5) 야행(1969)


단편 <야행>은 김승옥의 단편 중 유일하게 여성 화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주인공 ‘현주’를 3인칭 관찰자가 초점화하여 전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60년대 후반 여성의 지위와 현대 사회의 감옥과도 같은 피폐함을 적나라 하게 묘사하는 소설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현주'라는 기혼 여성으로, 은행에서 근무하며 낮에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녀는 거리를 배회하며, 낯선 남자들이 던지는 성적인 접근과 유혹을 스스로 확인하고 시험해보는 행동을 반복한다. 이 밤거리 배회는 단순히 남편과의 관계나 외부의 억압 때문이 아니라, 현주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확실한 세계 인식을 갖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그려진다. 그녀를 유혹하는 사내들의 짓궂은 행위 이면에는, 그들 역시 반복되는 일상과 도시 생활, 그리고 스스로도 지겨워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자리하고 있음을 현주는 눈치챈다. 소설은 이런 밤거리의 방황을 통해 현주가 상실된 순수한 자아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소설에는 당시 60년대의 배경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1960년대에는 '성 혁명'이라 불리는 자유로운 성 담론과 국가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근대화 프로젝트를 통해 가부장적 규범성을 여성들에게 제도화하는 방식이 등장하고 있었다. 1960년대 근대화 프로젝트는 사회뿐만 아니라 가정 내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정부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높은 출산력은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간주하고 '가족계획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출산은 분리되었다. 하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결혼 제도 아래서만 가능한 것으로 경계 지었다. 이러한 정부주도하에 이루어진 가족계획사업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규제하고 관리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고 가부장적 규범성을 제도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더불어 여성의 교육이 양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결혼 연령이 늦추어지고, 여성의 사회진출 또한 늘어 여성이 자신의 성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자유로운 성을 향유하는 이들은 경제력 있는 여성들로 엘리트 여성 혹은 중산층 여성의 욕망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연구에서는 <야행>에 관해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여성인물인 현주는 타자에 의해 성(性)을 훼손당한다. 더욱이 남성인물이 성장/입사를 위해 통과의례처럼 여성인물의 성(性)을 훼손한 것이 '자라나기'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하였듯이 현주가 낯선 남자에게 끌려가 당한 '강간'이라는 폭력적 사건을 현주의 내면의 욕망을 일깨웠다는 사건으로 정당화시키고 미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현주의 욕망은 순수한 것인가. '주체적'인 것인가. 현주가 폭력적 사건으로 일깨운 욕망은 작가에 의해 재단된 것이며 여성의 순수한 욕망이라 보기 어렵다. 여성의 성적 욕망조차 여성의 '몸'에서 시작되지 않고 남성에 의한 폭력적 사건에 의해 자각된다는 것은 남성작가에 의해 구성된 허구적 여성인물의 한계로 보인다.”(정남현. "김승옥의 여성인물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강남대학교 일반대학원, 2018. 경기도)


위 연구에서 말하는 부분을 요약 하자면 김승옥은 여성 인물인 ‘현주’를 내세워 앞서 보였던 남성 화자가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서사에서 벗어나 여성 주체적인 활동을 보여준 것은 맞지만, 결국 앞 작품과 동일하게 여성은 성으로 훼손을 당한다는 것은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강간’이라는 폭력적 사건을 현주의 내면의 욕망을 일깨웠다는 서술로 사건을 정당화시킨다고 주장하며 이는 작가의 한계라고 이해하고 있다.


<야행>에서 현대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은 완전히 충돌하는 지점을 보인다. 이는 누가 옳다, 그르다를 따지기 어려운 부분이다. 독자의 해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해석은 어떤 방향으로든 가능하다. 그러므로 비판적인 관점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무진기행>(민음사)에 실린 <김승옥론>(작가론)에서는 <야행>에 대해 앞서 언급한 관점과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낯선 외간 남자를 만나 성적인 해방을 추구하려는 현주의 행동이 비상식적이고 반사회적일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감옥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죄수와 같은 인간들에게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하는 현주의 야행에 대해 도덕적 단죄나 비난만을 일삼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중략) 이 소설을 단지 여성의 성적 방종을 비판하는 반페미니즘적 소설로 치부할 수 없다. 오히려 근대의 산책자를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까지의 확대시키면서 1960년대 서울의 밤거리로 진출시킨 후 도시의 환부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진정한 고현학의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무진기행>, 민음사, <김승옥론>(김미현), 421p)


위 작가론에서는 현주라는 여성 주인공이 자기가 싫증이 날 지경으로 잘 알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해 보고 싶은 남성들의 탈일상적 욕망과 동일하게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여성의 성적 방종을 비판하는 반페미니즘적 소설로 볼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위 연구와 비교하자면 논문에서는 여성의 욕망은 성적으로 순수한 욕망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있다. 위 작가론에서도 현주의 성적 욕망에 대해 순수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논문에서는 현주의 욕망과 사건이 강간이라는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위 작가론에서는 강간이라는 사건의 정당화가 아닌, 서울 밤거리 도시의 이면을 드러내는 소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현주라는 인물을 설정했고, 이러한 사건을 구성했는지는 작가만이 알 수 있고, 소설에서 크게 중요한 요소인지에 관련해서는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결국 독자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점은 이 소설이 60년대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소설임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 또한 평소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아래에서 알 수 있다.


“그 여자의 직장에서는 기혼 여성은 쓰지 않았다.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 직원은 그 직장을 그만두거나 기혼 여성이어도 무방한 다른 직장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현주의 경우, 두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할 자신이 없었다.”-<야행>(무진기행, 민음사, 355p)


이 장면은 주인공 현주가 자신의 남편과 비밀 결혼을 올린 이유를 말해준다. 같은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이 부부는 서로를 모른척 해야만 했다. 둘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현주는 분명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한 줄로 작가의 인식이 확정적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전반적 맥락과 저 구절을 대조해 보았을 때 당시 여성 문제에 대한 언급도 드러나고, 이것이 시대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매우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6) 서울의 달빛 0장(1977)


단편 <서울의 달빛 0장>은 1977년 제 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다음 사진은 이상문학상 1회 작품집으로 당시 수록된 작품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제 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는 <서울의 달빛 0장>을 수상작으로 선정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본문 그대로가 아닌 원문을 요약했습니다.)


“본상 결정 경위: 애초 김승옥의 연작소설 「서울의 달빛」 형식으로 쓰인 독립 작품들 전체를 수상작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결론에 심사위원 전원이 도달했으나, 최종적으로는 그중 「서울의 달빛 0장」 한 편을 수상작으로 결정함.


작가에 대한 평가: 김승옥이 오랜 침묵 끝에 발표한 작품이지만 그 침묵 기간에도 문학적 상상력을 계속 정진시켜 왔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함.


선정 이유

- 단순히 표현 기교에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특히 부부 관계)를 다루는 통찰력이 뛰어남.

- 현대 도시문명 속에서 변질되어 가는 인간관계, 타자와의 단절을 통해 고립된 인간의 자의식 문제에 접근하되, 고정관념과 굳어버린 윤리를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붕괴 과정을 비극적으로 그려냄.

- 부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암시하며 절망 바닥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인간애도 함께 그려냄.”(제 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378~379p(1977.10.15. 문학사상사)을 요약함.)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유한계급 출신의 대학 시간강사인 '나'는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유명 여배우 한영숙을 만난다. 이 둘은 이후 결혼에 이른다. 결혼 전 '나'는 군 복무 시절의 경험으로 성병에 걸렸던 전력이 있어, 혹시 아내에게 옮길까 염려한 나머지 미리 검사를 받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아내가 순진무구한 사람일 거라는 믿음을 의심 없이 품고 있었다. 그러나 신혼여행에서 그 믿음이 무너지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충격을 받는다. '나'의 시선은 점차 냉소적이고 환멸에 찬 방향으로 기울어 간다. 결혼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아내가 임신했다가 갑작스레 유산을 겪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 과정에서 '나'는 아내에 대한 신뢰를 사실상 완전히 잃고 만다. '나'는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시달리며, 심지어 그녀의 지나온 과거까지도 소유하고 싶어 했던 자신의 불가능한 욕망을 뒤늦게 깨닫는다. 결국 '나'는 재산을 정리해 마련한 돈을 챙겨 한영숙을 찾아가 관계를 다시 이어보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이혼의 마무리를 위한 위자료 정도로만 받아들이며 침통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진심을 전하려 하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그 어긋난 순간을 끝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음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서울의 달빛 0장에서는 주인공 ‘나’ 아내 한영숙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내용과 주제의식은 현대 도시 속 인간관계의 붕괴를 아주 잘 그려낸 작품으로 당시에는 큰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묘사적인 부분에서 성적인 부분을 지나치게 묘사한 부분들이 종종 등장한다.


우선 ‘나’라는 인물이 한영숙과의 신뢰를 잃게되는 장면은 신혼여행 첫날이다. ‘나’는 아내가 예상과 달리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나’는 신뢰를 잃어버리며 이후 자신의 아내 한영숙을 이렇게까지 묘사한다.


“이제부터 아내는 나에게 도깨비들이 실컷 뜯어먹다 싫증이 나서 던져 준 썩은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았다.”-<서울의 달빛 0장>(<무진기행>. 민음사. 392p)


주인공 ‘나’는 뻔뻔스러운 태도를 작품 내내 보여주고 있다. 이제 김승옥의 모든 소설에서 대부분의 남성 주인공은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주인공 ‘나’는 과거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고 성병에 걸린 적이 있다. 결혼식 전에 이를 대학병원으로부터 검사해서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받긴 했지만 ‘나’라고 해서 한영숙과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순수성을 믿고 결혼한 한영숙으로부터 크게 실망하고 이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간다. 마지막에 ‘나’는 그럼에도 한영숙이라는 인물을 붙잡고 싶었고 통장을 그녀에게 주지만 한영숙이 이것이 위자료냐고 물었을 때 정작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통장을 준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소설 내용 중에는 ‘나’가 한영숙에게 실망한 이후 3개월 동안 60명 이상의 여성과 관계를 가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77년 이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묘사는 더러움과 혐오스러움으로 주로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성적으로 문란한 여배우와 유한계급 남자의 만남과 결혼, 이혼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상을 (중략) 더러움과 연결시키면서 적나라하게 제시하고 있다. (중략) 더 풍족해졌지만 더 불행해졌고, 더 사랑할 수 있지만 서로를 학대하는 이유는 바로 ‘관계’가 아닌 ‘거래’만이 가능한 자본주의 현실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더 강력해졌고, 그만큼 더 부패했으며, 그래서 더 문제적이다.”


이 소설은 더러운 묘사가 지나치게 나타나는 것이 역설적으로 소설의 특이점이자 강점이 된다. 이 부분이 상당히 논란의 지점이 될 수 있다. 더럽다는 감정, 그 감정은 단순히 이 등장인물들의 단편적인 이야기로 향할 것이 아니라 70년대 돈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 자본주의로 향해야 하는 것일까. <김승옥론>에서는 김승옥의 소설에서 대부분 여자는 더럽고, 남자는 부끄러운 등장인물로 등장한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더러움이나 부끄러움을 유발한다고 하더라도 근대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김승옥의 소설에서는 낭만화되고 이상화된 자연, 즉 전근대적 사회로의 동경과 회귀 욕망이 드러나지 않는다. 전근대적 사회의 향수가 아니라, 그는 밖이 아닌 ‘안’에서 그 문제를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작가론에서는 언급한다. 김승옥에게 근대는 피를 빨리우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건넬 수 밖에 없는 드라큘라적인 괴물에 가깝게 된다.


다시 첫 소설부터 김승옥의 흐름을 살펴보자. 김승옥은 <생명연습>에서 ‘자기세계’의 형성을 이야기했다. 이는 결국 근대화의 과정이 ‘남’이 아닌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어떠한 합리화도, 희생양의 논리로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자기 행위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든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자아를 파괴한다. 근대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발생하는 공포심은 현대인의 혹독한 대가로 돌아온다. 


김승옥의 소설의 결국 나에게로 향한다. <무진기행> 때부터 느껴온 ‘부끄러움’의 감정. 이는 자아 성찰의 감정이다. 현대인은 가해자 이자 피해자가 되는 역설적 상황을 맞이한다. 이 복잡하고 공포스럽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유일한 방법은 ‘자기 성찰’, 즉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뿐이다. 김승옥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이러한 부끄러움의 감정을 공유한다. 요약하자면


[현대문명 속에서 겪는 부조리] -> [자기세계의 형성과 성찰] -> [부끄러움의 감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책임을 실감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는 자아성찰을 하지 않는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주체성, 자유의지를 의식하는 감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개념과도 유사하다. 이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사회로 탓을 돌리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 김승옥 소설 속 인물은 자기 자신에게 화살을 쏜다.


하지만 너무나 과한 묘사도 이 소설의 단점으로 보인다. 여성을 고깃덩어리에 비유하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도 그리 설득력있는 서술이라 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독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떤 관점을 가지든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2차 연구에서는 이에 대한 확실한 기준을 다루며 절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결론


1) 문학가의 역할


문학가, 그 중에서도 특히 문학평론가, 소설가는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소설가는 우선적으로 자신의 창작물, 소설에 대한 책임이 주어진다. 자신이 쓴 소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소설가는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소설가는 시대를 주관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객관성에서 너무 벗어나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의 주관성에 빠질수록 소설은 더욱이 미궁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김승옥 작가는 객관성 안에서 자신만의 ‘주관성’을 찾아냈다. 이 부분은 추후 2차 탐구에서 더 탐구해볼 것이다. 김승옥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는 아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2차 최종 결과물에서 김승옥이 가진 작가로서의 역할을 더 보완, 보충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문학평론가는 이 연구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지금까지 논의된 작가론, 작품에 대한 논문 모두 문학평론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문학평론가는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이 말은 무엇이냐면 앞서 말했던 김승옥 작가가 여성차별적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그 이의제기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이 아니여도 앞으로 더 나아질 인식을 고려한다면 김승옥 작가의 작품 속에서 여성 폭력적인 서사가 나온다는 점은 충분히 의문이 가는 지점이고, 이의를 제기할만한 부분이다. 결론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여성차별적 인식이 드러난 것’ 혹은 ‘작가는 다른 것을 의도한 것’이다. 이 둘 중 어느 것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심지어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이 논의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번 탐구를 진행하며 김승옥 작가의 작품을 일일이 모두 분석했다. 논문, 작품론 가리지 않고 김승옥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니 김승옥 작가의 작품들이 단순히 소설 작품의 나열이 아닌, 작품과 작품 사이의 유기적인 연관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더 상승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도가 상승했는지에 대해서는 2차 최종 연구에서 자세히 언급할 예정이지만, 이번 연구의 의의는 김승옥 작가의 작품을 여러번 읽고, 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지점에서 충분히 성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의제기가 아예 없었다면 사람들은 감수성의 혁명, 6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김승옥으로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물론 좋지만 이러한 작가에 대한 이의제기를 끊임없이 함으로써 잘 못된 인식을 교정하고, 작품의 오해를 바로 잡으며, 작가에 대한 더 심층적인 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평론가의 역할, 이의제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2) 한계점


2)-1 자료간의 비교분석의 한계


우선 논문간의 비교분석을 통해서 김승옥의 소설에 인식된 여성혐오, 차별적인 서사와 소재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나의 의견을 밝혔을 뿐,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연구의 결론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한계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확고한 기준을 설립하는 것이다. 우선 소설 속에서 나오는 소재나 서사는 독자의 해석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만약 김승옥 작가가 A 방향으로 생각한다 할지라도 독자가 B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문학은 작가의 의도보다도 독자의 다양한 해석을 지향한다. 그러나 현재 발생하고 있는 김승옥 작가에 대한 비판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면 김승옥 작가가 써온 지금까지의 작품들에 대한 ‘작품성’이 재평가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이 현대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작품성이 낮은, 고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다면 그것은 옳은 것인가? 작가가 살아온 시대는 현대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매번 변화하는 것이고, 그 변화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현대적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점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 인권 문제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여성의 참정권, 선거권을 가진 역사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한국에서는 30~40년 전만 하더라도 가부장제, 여성 인권이 지금에 비해 훨씬 하락한 상태였다. 당시의 관점에서 본다면 남성 중심의 소재나 사건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작가는 존재하지만, 시대라는 울타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문제는 김승옥의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는 지점이다. 역사적 관점과 현대적 관점을 절충한다고는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불편한 지점들이 너무나 많다. 이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자료를 통한 해결방안을 최종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 현재 단계에서의 한계이다. 2차 연구에서는 해결방안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결론적으로 김승옥의 소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자세히 분석할 예정이다.


2)-2 직업 역량에 대한 분석 부족


김승옥이라는 작가라는 작가의 위치와 독자의 위치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했으나, 그 근거를 찾지 못했다. 특히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구성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독자가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 바가 있지만 이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 최종 결과물에서는 이러한 점을 보완하여 독자가 능동적인 해석을 해야하고, 왜 그것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근거에 따라 명확하게 주장할 예정이다.


2)-3 해결방안의 부재, 그리고 모순


이 연구에 모순점이 있다는 것을 연구를 하면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 연구의 가장 큰 모순은 독자의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해석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이 연구의 첫 시작은 김승옥의 소설에 여성혐오적, 차별적 시선, 서술, 묘사가 있다는 뉴스 기사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러나 연구 중간에 이러한 해석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논리가 일관되지 못하고 모순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나의 주장을 논문을 근거로 반박한다는 점에서 발생한 모순인데 이 지점은 문제 상황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뉴스 기사의 인식에 대해서 반박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기대효과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나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문학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면서도, 올바른 해석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올바른 해석을 단순히 나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나의 관점에 부합하는 논문을 찾아 반박하는 것은 이 연구의 한계점이다. 그렇다면 나의 관점과 충돌하는 관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문학에서의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독자들이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할까? 그 지점을 2차 연구에서 최종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3) 의외의 성과


그럼에도 이번 연구가 성과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작가 ‘김승옥’의 사상구조를 아주 깊이있게 탐구했다. 또한 김승옥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가진 논문과 나쁜 인식을 가진 논문 이 두 가지를 비교 분석 했기 때문에 김승옥의 소설에서 가질 수 있는 인식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김승옥 작품간의 유기적 연관성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김승옥의 작품을 교과서나, 단편집에서 접하다보니 순서대로 읽지는 못했다. 이번 연구에서는 김승옥의 소설을 집필 순서대로 읽고 분석하니 김승옥의 사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발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현대 부조리를 인식]->[자기세계 형성]->[부끄러움을 느낌]->[자학과 자멸]이 대다수의 작품에서 드러남을 알게 되면서 김승옥이 문체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뛰어나지만 소설에서 담고 있는 철학적 깊이 또한 매우 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김승옥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김승옥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 김승옥이 살아온 환경, 사상적 배경을 모두 이해해야만 역사적 관점을 고려하여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위 뉴스 기사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김승옥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게 전제된 상태인지는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김승옥의 그러한 인식을 단순히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 김승옥의 소설을 본다면 그러한 서술이 현대적으로 부합하지 않을 순 있어도 당시에는 나올 수 있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2차 연구에서는 위에서 다룬 김승옥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실에 적용가능한 해결방안, 문학 평론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까지 도출해낼 예정이다.



2차 연구

 

1) 바르트의 사상과 김승옥


바르트의 사상을 접하기 전까지는 전 탐구에서 드러났던 한계점인 ‘자료간 비교분석의 한계’, ‘직업 역량에 대한 분석 부족’이 여전히 남은 과제로 남아있었다. 문학은 독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타논문을 인용하거나, 작품론을 인용하여 반박을 할지라도 저자의 의도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저자는 작품에 대해서 침묵하기 때문이다. 만약 저자가 의도를 직접적으로 밝힌다 할지라도 독자의 다양한 해석을 가로막는 것은 옳지 않다.


텍스트의 의미를 어떤 태도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았다. 1차 탐구에서 처음 가졌던 생각은 역사적 관점과 현대적 관점의 적절한 조화, 절충이었다. 김승옥의 작품 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을 바라볼 때 한가지 관점에만 치중해서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는 것은 옳은 방향성이라 볼 수 없었다. 당연히 시대가 바뀌면서 현대 사회의 윤리도 바뀌고, 사회적 인식도 많이 바뀌게 된다. 그러니 현대적 관점과 당시의 문학은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적절한 조화와 절충에 대해 이야기를 한 사상가를 찾던 중에 롤랑 바르트의 사상이 있었다.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1967)에서 저자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단지 그 시대의 모습을 표현하는 사회적 도구일 뿐,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독자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스스로 해석해야 한다. 마치 저자는 죽은 존재가 된 것이고, 그러므로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텍스트란 저자의 의도나 언어의 형식적 구조 등에 의해 규제되어 단 하나만의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고 가변적이라고 이야기했다.


바르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저자 개인의 의도나 전기적 사실로 전환하여 해석하는 전통적 비평 방식을 비판한다. 이러한 해석은 저자를 텍스트에 단일하고 확정적인 '진짜 의미'를 부여하는 신학적 존재로 상정하는 것이며, 이는 텍스트가 지닌 의미의 다양성을 억압한다. 바르트는 글쓴이를 창조의 근원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문화적 코드, 관습, 언어를 조합하는 주체로 재정의하며, 텍스트란 저자의 내적 고백이 아니라 선행하는 무수한 인용들이 짜인 직물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텍스트에 나타나는 특정 표현이나 서사 패턴을 저자 개인의 심리나 세계관의 직접적 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어려우며, 오히려 그 작가가 살아온 시대적 배경이 텍스트에 기입된 흔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아가 바르트는 저자라는 해석적 권위가 소멸하는 지점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완성하는 권한과 책임이 독자에게로 위임된다고 주장하며, 이는 저자의 의도로부터 텍스트의 효과를 분리하여 독자가 능동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김승옥의 소설 속에는 비윤리적인 모습들이 종종 묘사된다. 공통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이다. 바르트의 관점에 따르면 이는 저자(김승옥)가 가진 여성차별에 관한 인식보다는 60년대 당시의 시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저자의 내적인 부분에서 비롯된 심리적 부분이 세계관이 아니라 시대적 코드를 저자는 조합이라는 과정으로 소설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의미를 완성하는 것이 ‘독자’에게 있다는 점이다. 앞서 현대 소설가들이 김승옥이 여성차별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은 바르트에 따르면 타당하지 않다. 다만 김승옥의 소설에 이러한 내용이 여성혐오적, 차별적 사회상을 담고 있다고는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이는 앞서 1차 연구에서 진행했던 한계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주었다. 내가 생각했던 역사적 해석과 현대적 관점의 해석의 절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 또한 저자의 의도를 정의하는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독자가 능동적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지, 김승옥 작가가 여성차별적 인식을 가졌을 것이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1)-1 문학가의 역할


앞선 1차 연구에서는 문학가의 역할에 대해서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했다. 특히 김승옥이라는 작가라는 작가의 위치와 독자의 위치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했으나, 그 근거를 찾지 못했다. 특히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구성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독자가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 바가 있지만 이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


앞서 본 바르트의 관점에 따르면 문학가는 결국 시대적 상황을 묘사하는 주체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로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 문학가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묘사하는 역사적 기록자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 그것이 문학가의 역할이라는 것을 이번 연구로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2) 인식의 변화


초반 질문은 김승옥의 소설에 관한 비판에서 시작했다. 김승옥의 소설 속에는 여성 폭력, 혐오, 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그의 소설이 현대적 관점에서는 상당히 왜곡된 시선을 가진 소설로 평가된다는 문제였다. 첫 질문은 김승옥의 소설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 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단순히 해석의 차이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김승옥의 소설은 답을 정해주는 소설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할 일은 김승옥의 소설을 단정적으로 여성차별적 소설이다라고 평할 것이 아닌, 김승옥의 작품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무엇인가?(저자의 의도 파악이 아니라 작품이 현대 사회에서 시사하는 바를 찾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번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전환점이었다.


연구 전에는 김승옥의 작품들을 본래 따로 따로 보았던 바가 있다. <생명연습>은 자기 세계에 대한 이야기, <건>은 전쟁 이후의 파괴된 인간의 순수성을, <무진기행>은 무기력한 현대인의 방황을, <서울 1964년 겨울>은 화려한 서울의 이면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러나 김승옥의 소설은 마치 한 사람의 성장을 보는 것만 같다. 마치 <생명연습>, <건>은 [어린아이, 대학생]으로서 처음 사회를 접하고, 사람들의 이면을 보며 순수성을 잃어가는 학생이나 아이라면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서울의 달빛 0장>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에 적응한 [직장인, 성인]의 모습을 보이지만 열정을 잃어버리거나, 보다 못해 자기파괴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요한 지점은 바로 ‘자기파괴, 자학’의 태도이다. 이전에 김승옥의 작품을 읽었을 때는 인물들의 정서나 태도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 특히 생명연습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자기세계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하기 그지없다. 무진기행에서 보여준 주인공의 행동 또한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관계를 맺고 결국엔 다시 자신의 길을 향해 떠나는 이런 인물들의 모습은 너무나 비윤리적이고 독자도 주인공을 그리 좋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는 본래 소설의 인물의 감정에 공감하며 더욱 소설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김승옥 소설의 주인공들은 감정에 몰입되기보다는 혐오의 정서에 가까워지도록 한다. 이점이 항상 불편하게 남아있었으나 이번 연구를 통해 완전히 해소할 수 있었다. 채만식 소설의 경우에는 편집자적 논평을 사용함으로써 친일파로 활동하며 식민지에 대한 수탈을 하면서도 일제에는 아부를 떠는 인물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직접적으로 비판하다보니 작가는 전혀 주인공을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김승옥은 편집자적 논평을 사용하지 않고 때로는 1인칭, 3인칭으로만 묘사를 한다. 작가가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가 주인공을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 소설을 가리지 않고 중요한 것은 직접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 감독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이 영화를 보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영화관에 가는가? 무엇이 그들을 두 시간 동안 스크린 위의 그림자 놀이를 쳐다볼 수 있는 컴컴한 방 속으로 몰아가는 것일까? 관객들은 영화관에서 만사를 잊고 즐거운 오락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 관객들은 혹시 특별한 종류의 마취제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 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타르코프스키는 관객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을 위해 영화를 본다고 이야기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후 자신의 작품 <거울>을 통해 영화로 자신을 어떻게 성찰하는지를 드러냈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는 미메시스 3단계를 통해 결국 마지막 단계인 미메시스 3단계에서는 독자가 독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이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소설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한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다. 어떻게 나를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있고, 그 등장인물의 삶은 하나의 예시를 만들어준다. 누군가는 소방관으로 일하며 평생을 명예롭게 살았다면, 누군가는 사채업자로 살면서 높은 이자율을 부과하여 사람들을 착취했을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공무원으로 일하며 공익을 표상하였지만 결국 사익을 챙기는 이중성을 보였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인물들의 인간적인 속성은 결국 나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는 만들어준다. 이 인물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에 따라서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 나라면 어떨까? 라는 질문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김승옥의 소설은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김승옥의 소설은 절대로 단정적이지 않다. 서술자는 인물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확실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애당초 소설 속 인물의 관점으로 소설을 쓰다 보니 서술자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독자의 몫에 맡겨져 있따. 바로 이 부분이 성찰의 계기를 만들어준다. 독자는 결국 작가가 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기준은 독자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고 독자 자신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김승옥의 소설이 여성차별적, 여성혐오적 인식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과 유사하다. 작가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확실히 내리지 않기 때문에 인물에게 나타난 이러한 모순적 행동이 정말 작가의 생각일 수도 있겠다는 해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연구에서도 김승옥 소설에 나타난 여성차별적, 혐오적 시선이 있을지 없을지의 유무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냐는 것이다. 인류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진보하고, 발전해왔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상승한 부분도 있고, 하락한 부분도 존재한다. 김승옥이 활동했던 1960년대 여성 인권의 실태는 분명히 실추되어있다. 이미 김승옥의 소설에서도 그러한 부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김승옥 소설 속에서 남성은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그에 비해 여성은 폭력의 대상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작가가 여성차별을 했는가? 안했는가의 유무로 질문이 이어지기 보다는 우리는 1960년대, 작가가 바라본 한국 사회는 이러했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은 성찰의 기능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찰이란 단순히 자기 성찰을 넘어 ‘역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우리는 역사를 왜 연구하는가? 그것은 역사를 통해 잘못된 점을 깨닫고, 지금의 삶의 수정, 보완하기 위함이다. 자기 성찰의 이유와 동일하다.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은 전쟁의 참혹함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제 3차 세계대전의 발발 위험에 항상 경계하고 경고를 해왔다. 김승옥의 소설 또한 앞서 말했던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작가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가에 대한 심층적 이해는 단순히 한 작품만 깊이 이해한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가의 전 작품에 대한 이해와 시대적 배경을 모두 고려한 것이 바로 심층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 비중, 즉 많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독자의 의도를 단정짓는 해석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다. 물론 독자가 어떠한 해석을 가지는 것은 오류라고 볼 수 없으나 해석의 질을 따져보았을 때 김승옥 작가에 대한 이해가 비교적 덜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김승옥의 첫 작품 <생명연습>에서부터 이어진 사상적 흐름과 이에 따른 시대적 배경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작품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 


3) 김승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김승옥은 앞서 1차 보고서에서 밝혔던 바와 같이 최종적인 결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화살로 향한다. 내가 생각한 김승옥의 결론은 바로 ‘질문’이다. 화살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이면서도 성찰,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김승옥은 지금까지 소설을 통해 사회에 대한 질문을 이어나갔다. <생명연습>에서는 현대인의 자기세계와 극기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건>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순수성을 잃어버린 어린 아이를 보여주며 질문을 던지고, <서울의 달빛 0장>에서는 70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락해 버린 인간의 관계와 교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김승옥은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관점에서 한쪽 측면(여성차별 등의 문제점) 옹호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이다.


바르트의 관점이 여기서 등장해야 한다. 그 시대의 지배적 코드가 텍스트에 기입된 흔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르트는 저자라는 해석적 권위가 소멸하는 지점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완성하는 권한과 책임이 독자에게로 이양된다고 이야기한다. 다만 여기서 독자의 책임으로 이양된다고 해서 독자가 아무렇게나 해석을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의 관점을 좀 더 절충하자면 앞서 말한바와 같이 김승옥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 즉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의 한해서 해석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에 대한 배경이나 역사적 관점을 고려하지 않고서 해석하는 것은 해석의 왜곡이 되지, 주체가 올바르게 이행한 독자의 해석이라 볼 수 없다.


4) 해결책


김승옥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방법, 그것은 토론에 있다. 올바른 해석의 기준은 독자가 작가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하고 있냐의 여부로 정해진다. 그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은 토론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토론의 기본 전제는 하버마스의 담론 윤리를 전제로 해야 한다.(이성적 담화 상황, 절차주의, 만장일치 등) 핵심은 누구나 이 토론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이 토론은 해석의 방향을 단정짓는 것이 아닌 올바른 해석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정립하는 것으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해석의 기준은 언제든지 토론을 통해서 수정이 가능하다.


인공지능 챗봇 Claude에게 가상의 인물, 상반된 관점을 가진 토론자 A와 B로 가정하고 연구의 논의 주제로 토론을 진행했다. 

아래는 인공지능이 진행한 가상의 토론이다.


토론 주제: 김승옥의 여성 인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


1라운드: 입론


A: 저는 일단 김승옥을 "이 사람은 여성차별적 인식을 가진 작가야"라고 딱 못 박는 거, 그거부터 좀 위험하다고 봐요. 바르트가 그랬잖아요, 작가라는 게 텍스트에 자기 생각을 도장 찍듯 새겨 넣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세상에 떠다니던 말들이랑 관습을 짜맞추는 사람에 가깝다고. 그리고 김승옥의 작품 흐름을 쭉 보면 더 확실해져요. 처음엔 전후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잖아요, 생명연습이나 건처럼. 그러다가 그 부조리 속에서 어떻게든 자기만의 세계를 세워보려고 발버둥치는 걸 그리고, 무진기행 가면 그 발버둥이 사실 얼마나 부끄러운 짓이었는지 깨닫는 감정이 나오고요. 그 다음엔 그걸 계속 곱씹는 자아성찰로 이어지죠. 이 전체 흐름 자체가 이미 자기비판적이에요. 그러니까 불편한 장면들도 "이게 옳다"고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그때는 이랬고, 결국 이걸 부끄러워하게 되더라"는 걸 보여주려는 거라고 봐야죠.


B: 그 궤적 자체는 저도 인정해요. 근데 궤적이랑 별개로 텍스트가 실제로 하는 일을 봐야죠. 생명연습에서 한교수는 자기 입으로 "여자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가고 있었다"고 말해요. 건에서는 윤희 누나가 형이랑 친구들 손에 희생되는데, 정작 걔 감정이나 목소리는 한 줄도 안 나와요. 그냥 소년이 성장하는 데 쓰이는 재료로만 소비되죠. 서울의 달빛 0장도 마찬가지예요, 아내 한영숙의 몸이나 과거는 '나'가 소유하고 싶어 하는 대상으로만 계속 다뤄지고, 정작 한영숙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끝까지 안 나오잖아요. 이게 한두 번이면 우연이라고 치겠는데, 계속 반복되면 그건 패턴이에요.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라는 감정도 결국 남자 화자 혼자 느끼는 거지, 정작 피해 입은 여자 쪽으로는 그 감정이 안 돌아가요.


2라운드: 반박


A: 그 패턴 있다는 거 저도 부정 안 해요. 근데 그 원인을 "김승옥이라는 사람의 인식"으로 바로 연결하는 게 문제라는 거죠. 그 시대 문학판 자체가 남성 지식인 중심으로 돌아갔고, 실존주의 수입도 다 남성 개인의 내면 문제로 좁게 번역돼서 들어왔거든요. 그러니까 여자가 말할 자리가 없었던 건 김승옥이 특별히 그렇게 설계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문학이 짜여 있던 방식 자체가 그랬던 거예요. 만약 이게 정말 여성 정복을 찬양하는 이야기였으면, 그렇게 한 인물들한테 다 파국을 줬겠어요? 형은 죽고, 어머니는 미치고, 한교수는 평생 죄책감에서 못 벗어나잖아요. 오히려 그 폭력의 논리를 따라간 인물들을 다 무너뜨리는 거 보면, 이건 그 논리 자체를 비판하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고 봐요.

B: 파국을 준다고 해서 그게 곧 비판이 되는 건 아니죠. 파국을 겪는 것도 결국 남자 인물들이잖아요. 형이 죽든, 한교수가 죄책감에 시달리든, 그 서사의 무게중심은 여전히 남자 쪽에 있어요. 정작 훼손당한 여자들, 어머니, 정순, 윤희, 한영숙은 파국 이후에 뭘 느꼈는지, 어떻게 됐는지조차 안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가해자가 벌 받으니까 이건 비판적 서사다"라는 논리는,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사실 반쪽짜리 구원이에요. 진짜 비판적인 서사였으면 최소한 피해자 쪽에도 서사적 무게를 실어줬어야죠.


3라운드: 재반박 및 종합


A: 좋은 지적이긴 한데, 그건 "이 작품이 완전한 페미니즘 텍스트가 아니다"라는 거지 "김승옥이 여성을 혐오했다"는 결론까지 가는 건 비약이라고 봐요. 시대적 한계 안에서 자기비판을 시도한 거고, 그 자기비판이 완전하지 못했던 거예요. 완전하지 못한 거랑 여성혐오를 가졌다는 거는 다른 얘기죠.

B: 저도 "혐오"라는 단어까지 쓰자는 건 아니에요. 근데 "시대적 한계"라고 퉁치고 넘어가는 순간, 그 반복된 서사 구조가 오늘날 독자한테 주는 불편함을 너무 쉽게 무마해버리는 것 같아요. 작가 개인의 의도랑 별개로, 텍스트가 만드는 효과는 오늘 우리가 계속 문제 삼을 수 있어야죠.



판정

A는 "저자 개인에게 책임을 소급하는 게 방법론적으로 무리"라는 지점에서 강했고, B는 "텍스트의 서사 구조가 여성을 도덕적 고려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A가 답을 못 하고 물러선 걸로 봐요(3라운드에서 A도 결국 "완전한 자기비판은 아니었다"는 걸 인정했잖아요).


그래서 판정하자면 — B가 근소하게 우세다만 이건 "김승옥은 여성혐오자였다"는 결론이 아니라, "저자의 책임은 면제될 수 있어도, 텍스트가 반복하는 서사 구조 자체는 오늘 비판적으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기운다는 뜻이에요.

--토론 종료



4)-1 AI 성찰


결론은 관점 B가 우세하기 때문에 B가 승리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토론의 방향은 올바르게 흘러갔다. 김승옥이 여성혐오자라는 결론이 아닌, A 토론자의 관점이 결합되어 텍스트의 해석이 저자의 책임은 면제될 수 있으면서도 서사 구조는 오늘날 비판적으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는 두 관점이 절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토론은 승패를 가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하버마스의 담론 윤리처럼 ‘합의’에 중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프롬프트에 ‘승패를 정해’라는 말은 나의 실수이자 틀린 말이다. 승패를 정하는 것이 아닌 상호간의 토론을 통해서 올바른 해석이란 무엇인지 합의를 도출하는 것. 동시에 각자의 해석이 올바르게 진행되었다면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앞으로 문학평론가들이 전개해나가야 할 방식이 될 것이다.



5) 최종 결론


결국 문학의 역할은 한 시대의 풍경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풍경을 다시 마주하면서 사회를 성찰하게 만드는 기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승옥의 작품들은 당대의 인식과 오늘날의 인식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왜 지금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과거에는 왜 그렇게 다르게 생각했는지를 비교하고 분석하도록 이끌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스스로 발견하게 한다. 따라서 앞으로 문학가의 역할 역시, 하나의 정해진 답이나 고정된 가치를 제시하는 데 머무르기보다, 시대와 시대 사이의 인식 차이를 드러내고 그 긴장을 독자가 직접 성찰하도록 이끄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김승옥의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처음 던졌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알 수 없다가 되었다. 롤랑바르트가 쓴 저자의 죽음에 따르면 말이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걱정이 되었던 지점은 이 연구가 김승옥의 소설에 드러나는 여성혐오적 표현을 정당한다라는 성격을 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연구에서 김승옥 소설에 드러나는 여성혐오적 표현에 대해서 오히려 명확하게 밝혔다. 그리고 그 어떤 주장에 찬성하기 보다는 상반된 자료를 비교분석했다. 그럼에도 이 연구가 논쟁거리가 된다면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김승옥의 부끄러움을 독자는 상상할 수 있다. 하인숙을 고향에 두고 상경하는 주인공은 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나는 주인공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무언가(자학)을 느꼈지만 이 표현 또한 누군가는 여성혐오에 대한 정당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연구에서는 최대한 나의 감상을 배제하였다.


어떤 해석을 하던간에 적어도 작가에대한 깊은 이해와 작품들간의 상호 연결성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것을 거치지 않고 작가의 의도를 추론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작가의 의도는 우리가 명확히 모르는 것이 옳다. 대신에 작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유의지를 주지 않는가. 우리는 이 소설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는 자유 말이다. 그것이 문학의 매력이 아니었는가?


최근 김승옥의 다큐를 보고선 여러 생각이 들었다. 김승옥은 뇌졸증으로 인해 이젠 필담으로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언어의 마술사라 불렸던 그도 이제는 옛날만큼 힘을 쓰기는 어려워보인다. 그럼에도 다큐 속 김승옥은 여전히 열정이 있었다. 자신의 무진에 대해서 열심히 필담으로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는 여전히 언어의 마술사의 손길이 남아있었다. 반면 이제 막 데뷔한 작가들은 김승옥의 소설에 대한 여성혐오 표현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김승옥에 대한 혐오를 오히려 보여주고 있다. 이제 50, 60년이 다 된 작품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리고 저 작가들이라 해서 50, 60년 뒤 관점에 온전히 부합한 작품을 썼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김승옥의 부끄러움을 마주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 한마디에도 논란이 되는 세상에 조심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연구를 1, 2차로 나누었던 이유는 결국 나에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적어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이번 연구로 잘 못 해석한건 아닐까.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1차에서 부족함을 성찰했고, 2차에서도 부족함이 여전히 보이지만 3차까지 가면 끝도 없을 것 같아 여기서 마무리 지었다. 결국 주관성을 극복하기는 어렵기에 이 연구가 누구에게나 통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적어도 이번 연구가 문학 평론이 단순히 누군가를 비난하고 혐오하기보다는 담론의 장을 형성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김승옥의 부끄러움을 통해 나의 부끄러움도 마주한 아주 귀한 순간, 순간들이었다. 문학은 성찰, 부끄러움 또한 결국 자학이 아닌 성찰로 이어져야 함을 이번 연구로 깨달을 수 있었다. 부디 나의 의도가 잘 전달되었길 바란다.


참고문헌


1) 정남현. "김승옥의 여성인물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강남대학교 일반대학원, 2018. 경기도

2) 곽상순. (2016). 김승옥 소설에 나타난 상실의 양상과 주체의 대응태도 연구. 현대소설연구,(63), 5-26. 10.20483/JKFR.2016.09.63.5

3) <무진기행>(김승옥), 민음사(김승옥 전집입니다!)

4) 김승옥론(김미현)

5) 제 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378~379p(1977.10.15. 문학사상사)

6)<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저자의 죽음> 부분(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7)<시간의 각인>(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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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7-12
누구에게나 있는 검은 밀실(이승우의 <생의 이면>)

생의 이면은 소설가 박부길의 삶을 그의 작품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과 그의 삶을 묘사한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가 어떤 경력이 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보다 그가 살면서 겪은 모순, 생각과 고찰들, 즉 생의 이면이 담겨져있다. 그의 고향과 어린 시절이 작품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주로 큰아버지-박부길, 어머니-박부길, 김종단-박부길의 관계가 돋보인다. 그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큰 사건은 아버지의 자살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박부길이 건네준 손톱깎이로 자살을 했기에 그에겐 아버지를 죽였다는 큰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 이후로는 아버지의 무덤을 불태운 사건, 고향을 떠난 사건, 그리고 예배장에서 첫사랑을 만난 사건, 첫사랑과 이별하고 신학 대학을 그만두는 사건들이 주요 사건이다.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이다. '나'라는 등장인물이 출판사의 제안으로 박부길의 생애를 탐구하는 글을 쓰는 것이 외화이고, 내화에는 박부길의 인터뷰, 소설 등이 녹아있다. 액자식 구성은 단조롭게 흘러가는, 어쩌면 박부길의 자서전이 될법한 글을 좀 더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내가 최근 쓴 소설 라흐마니노프 주제에 의한 광시곡도 이 형식을 참고했다.)왜냐하면 '나'가 박부길의 삶을 알아내야하는 '노력'의 과정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박부길 본인이 자신의 일대기를 작성했다면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기에 흥미가 떨어질 수 있지만, '나'가 박부길의 인터뷰, 소설을 통해 그의 삶을 알아가는 방식은 더욱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 또 내용적인 부분에서 작가가 성경에 나오는 내용(예시: 야훼, 에덴동산 등)과 같이 비유를 해서 표현하는 부분은 소설에서 고도의 비유를 사용하도록 돕고, 이 이야기를 쓴 작가(이승우작가)와 박부길이 신학대학을 나왔다는 두 사람의 공통점을 통해서 이승우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이 작품의 미적 기능 중 형식의 부분에 해당하는 액자식 구성은 독자에게 흥미와 궁금증을 유발하도록 하고, 내용의 부분에 해당하는 신학적 요소와의 비유는 문장 수준을 높이고, 작가와 박부길의 유사성을 통해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생의 이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결핍이 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어린시절 겪었던 트라우마, 충격, 충족하지 못한 것을, 그 모든 것이 결핍으로 이어진다. 결핍은 해소되기 어렵다. 소설 속 박부길은 많은 결핍을 겪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결핍은 '부모'에 대한 결핍이다. 박부길이 김종단과의 연애마저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던 이유도 어쩌면 어릴적 부모로부터 받지 못 했던 애정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박부길에게 부모는 항상 없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정신이 나가버려 자살을 했고, 어머니는 식구들이 내쫓아버렸다. 큰 아버지가 그를 키우긴 했지만 큰아버지는 박부길의 부모가 되어주기엔 너무 부족한 인물이었다. 어릴적 누군가 그에게 부모의 역할을 조금, 아주 조금이나마 해줬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작가는 누구나 사람에겐 생의 이면이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

  • 노스텔지아
  • 2026-05-04
타자로부터 비추어지는 '나'라는 거울의 고찰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한 몇 달 전쯤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을 처음 본 것 같다. 솔직히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라 생각하고 나의 평점을 올려두지 않은 영화였다., 등 타르코프스키 영화에 나는 평점을 매기지 않았다. 아직 평가하기엔 너무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즉 아직 내가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타르코프스키 작품 중 내가 평점을 매긴 작품은 비교적 쉬운 작품인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시도해 보고 싶었다. 이 어려운 영화를 이렇게 완벽하게 해석하기는 거의 쉽지 않다. 나는 여러가지 해설책을 참고하고, 나의 옅은 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나만의 비평문을 완성했다. 워낙 철학적, 심리학적 개념이 많이 나오다보니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의 해석에 성공해서 뿌듯하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해보겠다.■타르코프스키의 의도는 무엇인가?먼저이란 작품의 줄거리조차 정리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정리를 조금 하자면, 이 영화의 주인공의 이름은 알렉세이이다. 알렉세이와 그의 어머니 마루샤, 알랙세이의 아내 나탈리아, 그리고 주인공의 아들 이그나트까지가 주요 인물이다. 물론 중간 중간 중요한 인물들이 나오긴 하는데, 생략하도록 하겠다. 작품 장면 하나, 하나를 설명하기 전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사실 타르코프스키는 장면 하나를 깊게 분석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영화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이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물론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영화관에 가는 이유를 이렇게 서술한다.사람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영화관에 가는가? 무엇이 그들을 두 시간 동안 스크린 위의 그림자 놀이를 쳐다볼 수 있는 컴컴한 방 속으로 몰아가는 것일까? 관객들은 영화관에서 만사를 잊고 즐거운 오락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 관객들은 혹시 특별한 종류의 마취제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 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타르코프스키 79p즉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거나,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폴 리쾨르라는 철학자는 미메시스 3단계라는 것을 제시했다. 1, 2단계는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3단계에 가서는 결국 독자가 그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한다. 결국 최종 목적지는 그것을 향유하고 시청하는 관람객에게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저 그것에 연결다리를 제공할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책은 독자에게 전달되는 순간, 독자의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독자마다 각자의 방법으로 책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고, 다른 경험을 통해 살아왔기에 모두 다르게 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그래서 이라는 영화는 불규칙한 장면과 타르코프스키의 어린 시절을 무의식적으로 조합한 후 20번이 넘는 재편집을 거친 영화로, 일반 사람이 이해하기엔

  • 노스텔지아
  •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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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8-24 20: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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