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살아갈 자유와 죽을 수 있는 자유 (영화 『씨 인사이드』 비평문)

  • 작성자 시유레
  • 작성일 2026-09-07
  • 조회수 410




 인간은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문제인 안락사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 맞부딪히는 지점에 놓여 있다. 안락사란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의 의사에 따라 인위적으로 생명을 종결하는 것을 말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 생명 보호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e)』는 실제 인물인 라몬 삼페드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메나바르는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은 물론 편집과 음악까지 직접 맡았으며, 한 사람의 시선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라몬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다루는 작품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라몬은 사고 이후 오랜 시간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라몬의 삶을 따라가며 인간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라몬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말하는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몬에게 죽음은 단순히 삶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에 가깝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살 수 있는 자유’와 ‘죽을 수 있는 자유’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라몬의 생각을 대변한다. 이 개념은 대사로만 설명되지 않고 영화 속 단 하나의 상상 장면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압축된다. 푸치니의 아리아 ‘네순 도르마’가 흐르는 가운데 라몬은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를 달려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카메라는 그의 시점이 되어 갈리시아의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까지 날아간 뒤 훌리아와 입을 맞춘다. 영화 전체에서 라몬의 몸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그려지는 장면은 이 순간이 유일하다. 실제로 아메나바르 감독은 이 장면을 라몬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으로 설명했으며,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그의 몸과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것이 오직 상상 속에서만 허락된다는 사실은 라몬이 되찾고 싶어 하는 자유가 걷고 뛰는 신체적 자유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감각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선택을 인간의 자유로 인정한다면,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정 역시 개인의 의사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라몬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이후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며 일상적인 행동은 물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오랜 시간 이러한 삶을 살아온 라몬에게 고통은 단순한 신체적 불편함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고, 삶의 방향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 자체가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통해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라몬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죽음’이 아니다. 그가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오랫동안 타인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던 그에게 죽음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영역이 된다. 그렇기에 영화 속 ‘죽을 수 있는 자유’는 죽음을 가볍게 받아들이자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어디에서 어떻게 끝낼 것인지까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신체적 조건만으로 한 사람의 삶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받아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 그 삶이 존엄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이 문제를 배우의 연기 방식으로도 보여준다는 점이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특수분장으로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인물로 분장했고, 목 아래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연기를 해야 했다. 표정과 목소리, 눈빛만으로 라몬의 활력과 유머, 분노와 슬픔을 표현해야 했던 이 절제된 연기는 오히려 신체의 정지 상태와 정신의 생동감 사이의 간극을 관객에게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인간의 존엄성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측정하기 어렵고, 특정한 신체적 조건을 기준으로 삶의 가치를 구분할 경우 중증장애인이나 뇌질환 환자 등의 삶을 가치가 낮은 것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과 살 가치가 없다는 판단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안락사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이유가 드러난다. 인간의 생명은 개인에게만 귀속된 가치가 아니라 공동체가 보호해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라몬처럼 스스로 죽음을 실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의 선택은 타인의 행위와 법적 책임까지 연결된다. 라몬에게는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행위일 수 있지만, 그를 돕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생명에 개입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문제를 법정 밖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보여준다. 라몬을 찾아온 파드레 프란시스코 신부는 종교적 관점에서 생명의 존엄을 주장하려 하지만, 정작 그 자신도 전신마비 장애를 가진 몸으로 휠체어를 타고 있어 좁은 계단을 오르지 못한다. 결국 그는 라몬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지 못한 채 젊은 신부를 통해 계단 아래위로 소리쳐 논쟁을 주고받는다. 진지한 신념의 대립을 다분히 희극적인 장면으로 그려낸 이 연출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이 반드시 무겁고 엄숙한 방식으로만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동시에 영화가 생명 옹호와 자기결정 가운데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도 드러난다.

 라몬을 둘러싼 사람들 또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인물 — 그의 선택에 완강히 반대하는 형 호세, 묵묵히 그를 돌보는 형수 마누엘라, 입으로 조작하는 집필 장치를 만들어 그가 시를 쓸 수 있도록 도운 조카 하비— 모두 라몬을 걱정하고 사랑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누군가는 라몬이 살아 있기를 바라며 그의 선택을 막으려 하고, 누군가는 그의 일상을 돌보며 곁을 지키고, 누군가는 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삶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이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반드시 한 가지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생명을 보호한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가 모든 상황에서 당사자에게 최선의 결과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개인의 의사만을 앞세워 안락사를 쉽게 허용한다면 판단의 오류나 타인의 강요와 같은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죽음은 한 번 이루어지고 나면 잘못된 판단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라몬의 의사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을 실현하는 행위까지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규범을 마련하고 있으며, 그 규범을 벗어나 타인의 죽음에 직접 관여할 경우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명 보호를 절대적인 원칙으로 삼아 개인의 의사를 항상 뒤로 미루는 것 역시 또 다른 문제를 남긴다. 회복 가능성이 없고 본인의 의사가 충분히 확인된 상황에서도 사회가 오직 생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결정을 대신한다면, 보호와 통제가 어디에서 구분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결국 『씨 인사이드』가 보여주는 것은 생명 보호와 자기결정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그 선택이 타인의 행위와 사회적 책임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씨 인사이드』에서 라몬의 선택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법과 제도만이 아니다. 그의 곁에는 라몬의 삶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같은 선택을 서로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인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만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를 맺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벨렌 루에다가 연기한 훌리아와 라몬의 관계는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훌리아는 라몬의 생각을 이해하고 그의 선택을 존중하려는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그녀 역시 서서히 몸이 굳어가는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드러낸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그녀가 라몬을 방문하던 중 쓰러지면서 자신도 언젠가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이 설정 덕분에 훌리아가 라몬을 이해하는 방식은 단순한 동정이나 관찰이 아니라 자신의 몸 역시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공감에 가까워진다. 그녀에게 라몬의 선택은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의 삶에도 닿을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라몬을 인터뷰하는 장면은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두 사람이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훌리아가 녹음기로 그 대화를 다시 들으며 미소 짓는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데, 이러한 편집은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쌓여가는 과정을 대사 없이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가까워지고, 그 과정에서 라몬의 선택은 단순한 개인적 결심을 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뒤흔드는 문제가 된다. 훌리아에게 라몬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원하는 삶을 대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결정을 내리는 그의 생각까지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랑하면서도 상대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로사는 라몬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며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그녀는 텔레비전에 나온 라몬의 사연을 접하고 무작정 그를 찾아온 인물이다. 라몬에게 로사는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인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따라서 라몬의 선택을 인정하는 일은 곧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과 연결된다. 로사에게 사랑은 라몬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그렇기에 그의 죽음을 선택으로 인정하는 일은 곧 자신의 바람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는 같은 사람을 향한 애정이 서로 다른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사랑하기 때문에 곁에 남기를 바라지만, 누군가는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가 원하는 결정을 존중하려 한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놓아주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지 않도록 끝까지 붙잡는 것일까. 영화는 어느 한쪽을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바람보다 상대의 의사를 앞에 두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라몬에게 죽음이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선택이라면,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상실이다. 결국 한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는 감당해야 할 슬픔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안락사는 개인의 문제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라몬은 자신의 삶을 끝내고자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씨 인사이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과 남겨지는 사람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의 삶을 대신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상대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 선택으로부터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다. 훌리아는 라몬의 선택을 이해하려 하고, 로사는 그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그를 사랑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모습은 사랑이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는 감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씨 인사이드』는 안락사를 단순히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진 논쟁으로 만들지 않는다. 라몬의 고통과 선택뿐만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랑과 상실을 함께 담아냄으로써 죽음이라는 선택이 한 개인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씨 인사이드』는 한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바라보는 우리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라몬에게 죽음은 삶을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랜 시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의 원칙과 법적 책임이 맞물렸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야 하는 이별이 되었다. 영화는 이러한 충돌을 통해 안락사를 단순히 찬성과 반대의 문제로 바라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자유가 반드시 ‘살아갈 자유’에만 한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삶을 지속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 개인의 의지와 존엄성에 관한 문제라면,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 역시 그 사람의 삶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죽음은 되돌릴 수 없기에 충분한 숙고와 정확한 정보, 외부의 강요가 없는 선택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도 생명을 보호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마지막 결정을 사회가 대신한다면, 그것이 정말 그 사람의 존엄성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씨 인사이드』가 인상적인 이유는 안락사를 법과 윤리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고, 그 선택을 둘러싼 사랑과 상실까지 함께 담아냈다는 점에 있다. 라몬에게 죽음이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선택이라면,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별이었다. 훌리아처럼 상대의 선택을 존중하려는 사랑도 있고, 로사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끝까지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영화는 어느 한쪽의 감정만을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의 삶을 대신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상대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 선택으로부터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다.

 또한 창문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라몬이 오직 상상 속에서만 날아오를 수 있었던 장면은 그가 잃어버린 자유와 되찾고자 했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지된 몸과 대비되는 절제된 연기와 편집은 라몬의 선택을 단순한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바라보게 한다. 결국 영화는 라몬의 선택을 둘러싼 법과 윤리, 사랑과 상실을 함께 보여주면서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내가 생각하는 ‘존엄한 삶’의 의미로 이어진다.

 결국 『씨 인사이드』가 내게 남긴 질문은 ‘안락사가 옳은가, 그른가’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가깝다. 나는 그 질문에 완전한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삶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마지막 선택까지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살아갈 자유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라면,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결정할 자유가 필요하다.










참고 서적:

안락사_신동일

안락사와 존엄하게 죽을 권리

자기결정권_후견주의_윤재왕

조력존엄사의 법윤리적 정당성에 관한 연구_김학태

추천 콘텐츠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남은 것 (소설 『지상의 밤』 비평문)

서론 소설을 읽고 나면 늘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지만,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 이번처럼 소설 한 권을 읽고 나의 감상과 생각을 바탕으로 비평문을 쓰는 것은 처음이기에, 보통의 독서를 할 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상의 밤』을 두세 번 읽으며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은 단순히 소설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했다. 임선우 작가의 소설집 『지상의 밤』에는 서로 다른 일곱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은 「프랑스식 냄비 요리」와 표제작인 「지상의 밤」이었다. 두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등장하며, 이를 통해 상실 이후에도 사랑과 존재가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두 작품에 나타난 인간의 변형과 물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상실한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치유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본론 1. 「프랑스식 냄비 요리」 - 먹을 수 있는 존재가 된 사랑 「프랑스식 냄비 요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인공들의 연인이 물, 순무, 도토리와 같은 먹을 것으로 변한다는 설정이었다. 물과 순무, 도토리는 모두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번쯤 접해 보았고, 실제로 먹어 본 적이 있는 것들이다. 소설은 이러한 평범한 것들에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를 겹쳐 놓음으로써, 익숙한 일상 속에 낯선 상실을 끌어들인다. 특히 연인들이 먹을 것으로 변한 뒤 바로 먹는 것이 아니라 요리를 해서 먹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요리는 재료를 고르고, 손질하고, 익히는 과정을 거치는 행위이기에, 변해버린 연인을 요리하는 것은 그 존재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또한 연인들의 변화가 애정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랑이 끝나는 것과 그 사람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사랑이 사라져도 함께했던 시간과 그 사람의 흔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문장은“타인은 누구나 미지의 영역으로부터 들어온 이방인이다” (소설 『지상의 밤』 中)라는 문장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까운 존재이지만 끝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연인이 물이나 순무, 도토리로 변하는 설정은 타인이 지닌 알 수 없는 영역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존재가 다른 형태로 나의 삶에 스며드는 과정처럼 느껴졌고, 그것을 요리해 먹는 행위는 변해버린 존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읽혔다. 사랑했던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형태로 나의 삶에 스며들어 남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사랑하는 존재의 변형은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존재가 되는 과정이며

  • 시유레
  • 2026-08-19
뮤지컬 넘버는 어떻게 인물의 서사를 음악으로 완성하는가 — 뮤지컬『베르테르』와『킹키부츠』를 중심으로

Ⅰ. 서론 – 뮤지컬에서 넘버는 왜 서사의 언어가 되는가 연극에서 인물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뮤지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만으로 더 이상 감정을 담아낼 수 없는 순간 이야기를 노래로 넘긴다. 이때 뮤지컬의 넘버(Number)가 맡는 역할은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음악적 즐거움을 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넘버는 인물의 내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대사이자 서사를 움직이는 핵심 장치다. 뮤지컬을 감상하다 보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노래들이 있다. 흔히 ‘대표 넘버’라 불리는 이 곡들이 기억되는 이유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이나 대중적 인지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대표 넘버는 인물이 삶의 전환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거나,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 순간 음악은 이야기의 흐름을 멈추기는커녕 이야기가 나아갈 방향 자체를 결정한다. 뮤지컬에서 음악은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경험하게 만든다. 배우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지고 선율은 인물의 심리 변화를 따라 오르내리며 리듬은 흔들리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다. 여기에 가사와 오케스트레이션, 연기와 무대 연출이 더해지는 순간 하나의 넘버는 독립된 음악을 넘어 한 장면, 한 서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비평은 ‘뮤지컬 넘버는 어떻게 인물의 서사를 음악으로 완성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사랑과 성장이라는 전혀 다른 서사를 다루는 두 작품이자,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뮤지컬인 『베르테르』와 『킹키부츠』를 선정하였다. 장르와 시대, 음악적 색채는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삶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마다 넘버를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본 비평에서는 『베르테르』의 넘버 「어쩌나 이 마음」과 「발길을 뗄 수 없으면」, 『킹키부츠』의 넘버 「Step One」과 「Soul of a Man」을 중심으로 가사, 선율, 리듬과 템포, 배우의 음악적 표현, 장면 연출이 인물의 감정선과 서사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분석할 것 이다. 네 곡 모두 주인공이 직접 부르는 대표 넘버이자 서사가 가장 크게 전환되는 순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으며 각 넘버가 왜 하필 그 장면에서 울려야 했는지 그 노래가 없었다면 인물의 서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살펴봄으로써 넘버가 음악을 넘어 인물의 삶을 완성하는 언어임을 고찰하고자 한다.Ⅱ. 『베르테르』 뮤지컬 『베르테르』는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지만 그 사랑은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작품은 한 사람이 감정을 자각하고, 그것을 억누르려 애쓰다가, 끝내 그 감정에 잠식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갈 뿐이다. 이러한 서정적인 심리의 결은 대사만으로는 다 담아내기에는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그 순간마다 넘버가 등장한다. 베르테르의 넘버는 이미 정리된 감정을 노래로 옮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과정 자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도

  • 시유레
  • 2026-07-10
실패하지 않은 인간은 과연 성장할 수 있는가? (드라마 『하이퍼 나이프』 비평문)

드라마 『하이퍼 나이프』는 겉으로는 천재 신경외과 의사들의 사건을 그린 메디컬 스릴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의 핵심은 의학도, 범죄도 아니다. 작품이 끝까지 붙들고 있는 주제는 ‘실패’이다. 나는 이 작품을 실패를 경험해 본 천재가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자신과 비슷한, 어쩌면 더 뛰어난 천재 제자를 붕괴와 좌절을 통해 진정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정세옥은 열일곱 살에 의대에 수석 입학한 천재이다. 뛰어난 실력과 압도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지만 타인의 감정과 사회적 규범에는 무관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우선하듯 행동한다. 세옥은 수술에 집착하고,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에서 강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녀에게 수술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세옥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녀를 단순한 사이코패스 혹은 반사회적 성향의 살인자로 보는 관점이다. 실제로 세옥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폭력과 살인을 저지른다. 의사 면허가 취소된 뒤에도 불법 수술을 이어가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제거한다. 특히 피해자가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그녀의 범행은 강한 가학성까지 드러낸다. 이러한 모습만 본다면 세옥은 위험한 범죄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세옥을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완벽주의적 천재가 스스로 붕괴해가는 인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세옥의 폭력성과 자기중심성은 단순한 선천적 악의가 아니라 지나치게 완벽해야 했던 삶과 압도적인 성공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해석한다. 세옥은 열일곱 살에 명문 의대에 수석 입학한 천재이며,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모든 수술을 성공시켜 온 인물이다. 그녀에게 수술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고 자신이 특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녀는 사람을 살리는 윤리보다 완벽하게 뇌를 다루는 감각과 통제 자체에 더 강하게 매혹되어 있다. 나는 두 번째 해석이 더욱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세옥을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완벽주의적 천재가 스스로 붕괴해 가는 인물로 바라보는 관점. 이 관점에서 세옥의 폭력성과 자기 중심성은 선천적인 악의 결과라기보다 지나치게 완벽해야 했던 삶과 압도적인 성공 경험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해석한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 그녀에게 수술은 사람을 살리는 행위 이전에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세옥은 생명을 구하는 데서 만족을 느끼기보다, 누구도 해내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해낸다는 사실에서 희열을 느낀다. 이러한 특징은 세옥의 범죄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그녀의 첫 살인은 계획적이라기보다 우발적이다. 그러나 이후의 행동은 다르다. 증거를 처리하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체계적이

  • 시유레
  • 2026-05-3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