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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명령, 써야할 의무

  • 작성자 노스텔지아
  • 작성일 2026-09-16
  • 조회수 334

서론


1) 탐구 배경

칸트는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달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 


나는 소설가가 꿈인 사람이다.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진행했다. 나의 문구를 작성해보라는 내용의 수행평가였다. 3학년 2학기 수행은 쉽고 단순하다. 3학년 2학기는 반수를 하지 않는 이상 성적에 포함되지 않고, 수능도 준비해야 하는터라 내신의 중요도는 훨씬 떨어진다. 그렇기에 수행평가도 이런 간단한 것을 주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어려운 수행평가가 또 없었다. 평소 글쓰는 것이라면 모든지 자신있었던 내가, 갑자기 문구 하나를 작성하려고 하니 손이 덜덜 떨리기만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부담감 때문일까. 문예창작과 입시생이기에 이런 글 하나, 하나에도 신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을까. 정작 나는 어떤 의무감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지 명확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거울' 


응집되지 않은 기억을 뒤져 겨우 기워낸 한 단어였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거울>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충격, 나의 소설은 거울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타인 그리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 그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였고, 내 소설이 지향하는 방향이었다. 단순히 글자의 기교와 나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비추는 거울이 되주는 것. 그것이 나의 원초적 입장이었다.


소설이 거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사회에 가장 아래부터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에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기 어려우며, 그들은 소외되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런 잊혀질 기억들을 다시 되찾는 것, 이번 연구는 가장 아래에 있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항정초>에서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를 언급했다.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는 다음과 같다.


  • 1.자살

  • 2.거짓약속

  • 3.자기계발포기

  • 4.자선거부


이는 현대적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고 보았다. 특히 4번과 같은 자선거부의 경우 현대 사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쟁점으로 보였다. 현대 사회는 매우 풍요롭지만 여전히 빈곤하고, 심지어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조차 충족되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칸트가 정언명령 위반 사례, 그 중 ‘자선거부’를 이야기한 것이 이것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후 롤스의 분배적 정의 개념과도 연결이 될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우선적으로 탐구 대상으로 삼기로했다. 


두 번째는 사회문제를 다뤄온 경험이 많아서 세 모녀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과거 해당 사항에 대해서 “국가의 재분배는 공정한가?”를 주제로 탐구를 진행했던 경험이 있었다. 여기서 롤스 관점과 노직 관점을 비교하여 국가의 재분배가 공정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후 재분배가 단순히 최소수혜자에게 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닌, 최소수혜자가 일을 하거나, 스스로 소비활동을 하는 등 롤스가 정의한 선관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대해서 문학적 관점과 칸트를 연결지어 심화탐구할 예정이다. 문학은 사회를 다루고 있다. 사회에는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나, 문학은 그중에서도 사회 문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역사가 되고, 역사는 성찰의 기능을 한다. 세상에 사회 문제는 다양하나, 사회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수단으로써 문학이 남긴 성취는 지금까지 많은 업적을 쌓아올리고 있다. 김동인의 <감자>를 통해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현실을, 채만식의 소설을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파들의 만행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래 전 역사에 머물지 않는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리 작은 공>은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의 문제인 재개발 문제를 성찰시키는 역할을 한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은 사회 보장 제도의 결함으로 일어난 사회적 문제이다. 문제는 송파 세 모녀 사건(2014)으로 끝나지 않고 익산 모녀 사건(2025)이 일어나는 등 제도는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허점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 사례에서 타인의 도움을 목격했음에도 타인을 돕지 않는 것은 정언명령 위반이다. 또한 이는 롤스의 분배적 정의에서 차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현대 사상가들과 한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연결하여 해석할 예정이다. 


2) 탐구 목적


사상가들과 현대적 사건을 같이 묶어 해석하는 것은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먼저 사상가들을 현대적으로 적용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상가들의 이론은 현실에 적용하기 전 단계를 말한다. 마치 레고를 사면 레고 조립을 하기 위한 설명서와 레고가 따로 있는 것과 같다. 레고를 조립하기 전까지는 레고가 조립되었다고 할 수 없듯이 사상가의 이론 또한 현실적 적용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윤리라는 것은 결국 사회라는 우리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상가들의 관점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자세히 분석하는 것은 이론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왜 우리가 사회적으로 이러한 사건이 문제가 되거나,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 사례 중 자살 금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자살 예방은 사람들이 죽지 않기 위해서,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자살 예방을 왜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죽지 않으면 더 좋은가? 어떤 점이 좋은지? 그럼 범죄자가 자살을 하는 것은? 등등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칸트는 이에 대해 사람은 고통에 못이겨 자살을 택할 수 있으나 이는 자기 삶에서 비롯된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자신의 인간성을 이용하려는 것이므로 정언명령 위반이다. 


사상가의 이론은 우리 현실 사회의 문제 해결에 이유,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큰 역할을 해준다. 정당성은 단순히 이론에만 머물지 않는다. 현실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투표와 같은 과정에서 인류 공통의 문제부터 소수의 문제까지 제도를 강화하는데까지 영향을 줄 것이다. 민주사회를 가정한다면 결국 투표는 구성원들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첫 질문은 “칸트의 정언명령과 기초생활수급자 사망 사건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로 출발한다.


본론


1) 칸트의 사상


칸트는 여러 가지 사상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번 연구에서는 의무론을 다룰 예정이다. 칸트의 의무론 목적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가능한 보편적 도덕 원리를 정립하는 것이다. 인간은 몸에 자연적 경향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다. 자연적 경향성은 본능, 욕구, 감정이고, 정신은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정신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성과 선의지이다. 이성은 내 스스로의 도덕 원리를 정립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선의지는 무조건적 ‘선’을 추구하는 의지이다. 스스로 도덕법칙을 정립하면 선의지는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이성이 도덕 법칙 정립 -> 2. 선의지가 도덕 법칙을 보고 따르고자 함. -> 3. 이에 대한 존경심이 나타남. -> 4.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지속적으로 실천함.


칸트는 여기서 스스로 도덕법칙을 정립하는 것을 자율이라고 한다. 자율은 이성이 스스로 세운 도덕법칙에 따라 행위하는 상태이다. 이성이 세운 도덕법칙에 스스로 복종하는 참된 자유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언명령은 다음 기준을 따르고 있다. 


1 보편화 원리

자신의 행위 준칙이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보편적 법칙으로 적용되어도 모순 없이 성립할 수 있어야 한다.


2 보편적 자연법칙의 원리

자신의 준칙이 마치 자연법칙처럼 예외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자연법칙이 필연적으로 성립하듯이 도덕법칙도 필연성과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3 인간존중의 원리

이성을 지닌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며 목적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인간을 나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대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단 목적 그 자체로 여긴다는 전제하에서는 수단화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4 자율의 원리

인간은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이성에 따라 스스로 보편적 도덕법칙을 세우고 그 법칙을 따라야 하는 자율적 존재이다.


여기서 칸트는 정언명령에 어긋나는 행위 4가지를 언급한다. 인간이 세운 행위 준칙이 정언명령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를 이야기한 것이다. 


1)-1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


1 자살

1) 보편화 위반: 자살은 자기애에 근거하기 때문에 생명 촉진과 동시에 자살이라는 형태의 생명 파괴는 모순이 발생한다.

2) 인간성 위반: 자기 삶에서 비롯된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자신의 인간성(인격)을 이용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목적으로 대하지 않음과 동시에 수단으로만 대하므로 인간성 위반이다.


2 거짓 약속

1) 보편화 위반: 모든 사람들이 거짓 약속을 한다면 거짓 약속 자체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없으며(앞서 말한 정언명령의 조건을 위반하기 때문에) 사회적 신뢰와 질서를 붕괴시키므로 도덕적 의무가 될 수 없다.

2) 인간성 위반: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인격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것이므로 인간성 위반이다.


3 자기 계발 포기

1) 보편화 위반: 필연적으로 자기 능력을 발전시키려는 인간의 자연적 의지에 반대하는 것이므로 위반이다.

2) 인간성 위반: 따라서 자기 능력 계발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자신을 존중하라는 목적을 저해한다.


4 자선 거부

1) 인간성 위반: 다른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내가 인격체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을 외면하게 되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된다.

2) 송파 세 모녀 사건에 대한 규명


2014년 2월 서울 송파구 석촌동 반지하 셋방에 살던 박모(60)씨와 두 딸(35세, 32세)은 큰딸의 만성질환과 어머니의 실직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마지막 남은 현금 70만원을 집세와 공과금으로 남겨둔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은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했고, 3년 전 관공서에 복지 지원을 문의했다가 대상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다시 신청하지 않았는데, 이는 30세 성인 자녀에 대한 추정소득이 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복지급여 상담조차 받지 않아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을 만큼 세 모녀는 사실상 안전망 체계 바깥에 놓여 있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복지 제도의 사각지대를 드러낸 대표적 비극으로 기록되었으며, '송파 세 모녀 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긴급복지지원법 개정안과 사회보장급여법 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많은 복지 환경이 예전보다 개선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2025년에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2) 익산 모녀 사건에 대한 규명


2025년 5월 18일 전북 익산시 모현동의 한 아파트에서 60대 여성 A씨가 추락해 숨진 채 발견됐고, 그의 방 안에서는 20대 둘째 딸 B씨의 시신도 함께 발견되었다. A씨는 발견 당시 몸에 "먼저 하늘나라로 간 딸이 집에 있다"는 내용의 쪽지와 집 열쇠를 지니고 있었다. 


경찰은 A씨 거주지인 아파트 방 안에서 그의 딸 B씨의 시신을 발견했다. B씨 역시 힘겨웠던 삶에 대한 글을 남겼다고 한다. 경찰은 문서 작성 시점이 지난 3월 말인 점으로 미뤄 딸이 이 무렵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A씨는 먼저 세상을 등진 딸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슬픔을 견디다가 끝내 숨진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녀는 지난해까지 큰딸 C씨와 셋이 살았다. 세 모녀는 2006년부터 지난해 1월까지 생계, 의료, 주거급여를 받아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어머니 A씨가 호흡기 관련 지병으로, B씨도 중증 우울증·신경증으로 각각 근로능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큰딸 C씨는 근로 능력이 있어서 자활사업에 참여해야 하는 ‘조건부 수급자’로 분류됐으나 일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2인(A, B씨)에 대한 생계(100만원)·주거(20만원) 급여가 세 모녀의 유일한 소득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1월 큰딸(C씨)이 취업해 돈을 벌기 시작하게 됐다. 이후 가구 소득 기준을 초과한다는 이유로 생계·의료급여는 끊어졌고, 주거급여 20만원만 받게 됐다. A씨와 딸 B씨는 둘 다 병을 앓고 있어 매달 상당액의 병원비가 필요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의료급여가 끊긴 뒤 두 모녀의 고통은 더 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A씨는 생전에 딸 B씨 몫의 병원비 200여만원에 대한 부담감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익산시 측은 지난해 1월 생계·의료급여 지급 중지를 전화로 알리면서, 큰딸이 따로 살면 두 모녀는 급여를 계속 받을 수 있다고 안내했다고 한다. 소득이 있는 가구원이 함께 살지 않으면 남은 2명은 다시 급여 지급 대상(생계, 의료 각각 중위소득 32%·40% 이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큰딸이 바로 전월세 집을 구해 나가는 등 주거를 분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까운 지점은 올해 1월 큰딸이 결혼해 분가한 뒤에도 두 모녀가 생계·의료급여를 받지 못한 점이다. 급여를 다시 받기 위해서는 수급자가 직접 지자체에 신청하고, 금융정보 제공 등에 대해 동의하는 절차가 필요한데 이를 거치지 않은 것이다.


익산시 관계자 시스템상 실시간으로 수급자 가구의 전입·전출이 확인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실정이라 큰딸의 전출 사실을 뒤늦게 알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가 1년에 두 차례 수급자 혼인·소득 등에 대한 변동사항을 전국적으로 조사하기 때문에 오는 7월쯤에는 (큰딸의 전출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모녀가 다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텐데, 그 전에 이런 일이 벌어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오랜 기간 생계·의료급여를 받아왔으나, 다른 가족 구성원의 소득이 합산되면서 가구 소득 기준을 초과해 지난해부터 지원이 중단되었고 이후에는 월 20여만원의 주거급여만으로 버텨야 했다. 이후 다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신청주의 원칙과 체납 이력 부재 등으로 위기가구 발굴 시스템에 포착되지 않아 끝내 지원을 받지 못했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2022년 수원 세 모녀 사건 이후 정부가 복지 사각지대를 보완해왔음에도 유사한 비극이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위기가 아니라 '신청주의'라는 제도 설계 자체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 사례로 평가된다.


2)-1 왜 아직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가?


송파 세모녀 사건 이후 많은 제도가 변화하였고, 이러한 복지 사각지대를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여전히 모순점은 발생하고 있다. 익산 모녀 사건의 핵심은 돈을 벌면 지원이 끊기는 모순이다. 큰딸 C씨가 오히려 돈을 벌지 않았을 시점에는 생계, 의료, 주거 급여로 생계 유지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큰딸 C씨를 제외하면 모두 근로 능력이 없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C씨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C씨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비극이 초래되었다. 급여가 끊기게 되면서 이들이 받아야 할 치료를 제대로 받기 어렵게 되었다. 이들이 지원을 받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담당 공무원은 돈을 벌고 있는 큰딸이 분가를 하게 되면 다시 지원이 가능하다고 통보했다. 당장은 월세비가 더 들어가기 때문에 큰딸의 분가가 불가능했지만 1월에 큰딸이 결혼을 하게 된 뒤에 분가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이들은 생계, 의료 급여를 받지 못했다. 수급자가 직접 신청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롤스의 분배적 정의


롤스는 정의를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적 존재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정의감'에서 출발하는 문제로 본다. 정의감은 칸트의 개념과도 연결이 되는데, 칸트가 정언명령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입법을 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키고자 노력하는 의지인 선의지의 개념과 유사하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기본 구조가 공정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정의감은 사회 제도를 평가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롤스에게 정의는 공리주의처럼 사회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있는 모든 개인이 최소한 선관능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정의로 본다. 사회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풍요롭더라도, 그 안에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한다면 그 사회는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정의감은 또한 만약 내가 최대수혜자가 될지라도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이익을 보장하는 차등의 원칙을 준수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정의의 원칙은 만장일치의 합의인 동시에 마치 자기입법과도 같다. 칸트의 선의지처럼 나에게 불리하든, 불리하지 않든 지켜야 하는 것이며 롤스의 관점에 따르면 결국 선순환으로 지금에게는 내게 불리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최종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되어야만 한다.


이 정의감을 사회 전체의 원칙으로 구체화하기 위해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의 실험을 제시한다. 사람들이 사회의 기본 구조를 설계하는 원칙에 합의하는 가상의 상황을 상정하되, 이때 각자는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 자신의 사회적 지위, 재산, 재능, 심지어 자신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조차 알지 못한다. 자신이 부자가 될지 빈자가 될지, 건강할지 병약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 원칙에 합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누구도 자신에게만 유리한 원칙을 제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원칙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가장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합리적인 인간이 택할 전략이 바로 '최소극대화 원리'이다. 이는 여러 선택지 중 최악의 결과가 가장 덜 나쁜 대안을 선택하는 전략으로, 무지의 베일 뒤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일 가능성까지 대비해 원칙을 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논리다. 이로부터 롤스는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도출한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본적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고, 둘째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정당화되려면 그것이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차등의 원칙', 그리고 공정한 기회균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기회균등의 원칙'이다. 특히 차등의 원칙은 단순한 평등이 아니라,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최소수혜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조건부 정당화의 논리를 담고 있다.


3)-1 익산 모녀 사건에 적용한 롤스 관점


롤스는 원초적 입장에서 사람들이 '무지의 베일' 뒤에서 사회 원칙에 합의한다면, 자신이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일 가능성까지 고려해 합의할 것이라고 본다. 이때 합리적 인간이라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가장 나은 결과를 보장하는 원칙, 즉 최소극대화 규칙을 선택하게 되며, 그 결과 도출되는 것이 차등의 원칙이다 —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갈 때만 정당화된다는 원칙이다. 익산 모녀는 급여 지급이 중단된 뒤 신청주의 원칙 때문에 다시 도움을 받을 자격이 되었어도 스스로 신청하지 않으면 발굴되지 않는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인 이들이었다. 신청주의 제도 설계는 최소 수혜자의 처지를 개선하기는커녕 그들을 제도 바깥으로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롤스의 관점에서 국가와 사회가 이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라면 이런 이들을 방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제도를 설계했어야 한다는 정의의 요구, 즉 차등의 원칙에 따른 응당한 몫이기 때문이다.


신청주의의 한계라는 대목에서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국가는 이미 개인을 지원하고 있고, 제도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개인의 과실이 아닌가? 라는 지점이다. 익산 모녀 사건에서 이들이 신청을 하면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알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 신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급여를 지원해준다고 하는데 누가 지원을 거절하겠는가? 신청주의는 단순히 버튼 하나 클릭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무엇보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요건을 알고 있어야 하며, 어느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문제점은 최소수혜자에 속한 계층들이 정보를 가지고 있기 어려운 것이다. 모녀 둘은 근로 능력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보를 접하고 신청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또한 이들이 아니여도 독거 노인과 같이 정보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은 지원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결론


칸트는 정언명령의 네 번째 위반 사례인 자선거부를 통해, 곤경에 처한 타인을 외면하는 것이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임을 보였다. 그러나 이 탐구를 진행하며 발견한 것은, 송파 세 모녀와 익산 모녀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과정을 발견함으로써 이는 정언명령 위반 사례 중 하나인 자선거부의 내용과 일부 부합함을 밝혔다.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롤스의 정의론이 필요해졌다. 롤스는 무지의 베일 뒤에서 합의될 원칙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신청주의처럼 최소 수혜자에게 가장 불리하게 작동하는 제도는 차등의 원칙에 어긋남으로 부정의함을 이야기한다. 칸트가 개인에게 요구한 의무를, 롤스는 제도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탐구를 시작할 때는 정언명령 하나만으로 이 사건들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익산 모녀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이 비극이 누군가의 악의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를 성실히 따른 결과라는 점에서 예상과 크게 달랐다. 담당 공무원은 규정대로 안내했고, 모녀는 규정대로 분가했으며, 그럼에도 규정대로 다시 신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는 '누가 잘못했는가'라는 질문으로는 답할 수 없는 문제였고, 이 질문의 한계를 확인한 지점에서 탐구의 초점을 개인 윤리(칸트)에서 제도 윤리(롤스)로 확장하게 되었다.


1) 한계점


1)-1 문학가의 역량은 어디에 있는가?


이번 연구에서는 사회적 문제인 기초생활수급자 자살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서론에 나온 문학가의 역량을 어느 곳에서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지 않다. 문학가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루지 못했던 이유는 문학가가 정확히 어떤 지점에 개입을 해야할지에 대한 숙고 부족이다. 단순히 사회 문제를 사회 사상가들의 관점에서 분석한 점은 성공이나, 그 외에 더 나아갈 점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많은 숙고가 필요했다. 문학가가 이러한 사건을 소설을 창작하는 것은 문학가의 역할이 될 수 있으나 그에따라 수반되는 책임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을 해보아야할 지점이 있음에도 자세히 분석하지 못했다. 2차 연구에서는 문학가가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이런 문제를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자세히 탐구해볼 것이다.


2차연구


서론


1) 탐구 배경


십계명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십계명이 꼭 당시에 등장했어야만 했던 필연성과 현대적으로 어떻게 재해석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십계명은 열가지 계율이지만 그 중에서도 5번째 계율인 ‘살인하지 말라’를 중심으로 탐구를 진행했다. 


당시 십계명이 꼭 등장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이 먼저 모세를 통해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의 계약의 맺을 것을 선포한다. 내용인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의 말을 잘 듣고 신과의 약속을 지키면, 신이 세계 여러 민족 중 그들을 선택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신은 구체적인 약속 내용을 밝히기 위해 자신이 내릴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그곳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신은 모세에게 그의 형 아론만 데리고 산에 오를 것을 명했다. 그런 다음, 신은 모세에게 그의 백성이 지켜야 할 거룩한 계명들을 세세히 일러주고 또한 두 개의 들판을 써서 내렸다. 


십계명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을 한 뒤로 이를 인용한 영화를 보게 되었다. 폴란드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TV 시리즈 〈데칼로그〉(1989)였다. 그중 5편은 십계명 중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다룬 작품이다. 어두운 내면을 지닌 청년 야첵이 별다른 이유 없이 택시 운전사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변호사 표트르와 함께 재판정에 서는 것이 줄거리다. 감독은 이 작품을 바탕으로 이듬해 장편영화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1988)을 별도로 제작할 만큼 이 소재에 무게를 실었다. 


이 영화의 핵심은 개인의 살인과 국가의 살인을 같은 무게로 병치한다는 데 있다. 야첵이 피해자를 여러 차례 둔기로 내리치는 장면과, 여러 간수·교도관이 집행하는 교수형 장면을 똑같이 상세하고 참혹하게 묘사함으로써, 개인이 벌이는 살인과 사회적 통제시스템이 수행하는 사형 집행을 동일한 계명 위반으로 등가에 놓는 것이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개인에게만 적용되고 국가(사법살인)에는 예외가 되지 않는다는 문제제기이며, 마치 국가가 개인에게 살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 변호사 표트르가 느끼는 쓸쓸함은 그 감정을 그대로 전달해준다.


<데칼로그>는 사회 문제를 반영하면서도 단순히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들어내기보다는 십계명이라는 신학적 소재를 통해서 새롭게 사회 문제를 재해석한다. 십계명이라는 오래된 계율을 가지고 현대적으로,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영화를 제작한 것이다. <데칼로그>는 이러한 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며, 키에슬로프스키라는 거장의 첫 출발점이 되어주기도 했다.


소설가는 사회 문제를 드러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 과정에서 또한 어떻게 칸트가 해석되는지 알아보고, 실제로 소설화를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에 대해 토론할 예정이다. 2학년 고전 읽기 과목에서 탐구했던 ‘다중시점서사’를 기초생활수급자 문제를 소설화 하는데서 적용해보고 싶다. 


2) 탐구목적


소설가는 어떻게 사회 문제를 드러내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이 <데칼로그>를 통해서 조금씩 풀려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연구했던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 중 자선거부에 대한 내용과 익산 모녀 사건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다. 익산 모녀 사건은 결국 국가적인 차원에서 롤스의 분배적 정의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것이며, 칸트의 관점에서도 정언명령 위반에 해당한다. 사회의 책임이 충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와 익산 모녀 사건을 어떻게하면 문학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지, 또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이번 탐구의 질문은 이렇게 전환되었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현대에서 어떻게 재해석되며, 문학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본론


1) <데칼로그>에 대한 탐구


〈데칼로그〉(Dekalog)는 폴란드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1988년 폴란드 국영방송국의 의뢰로 성경의 십계를 모티프로 제작한 10부작 TV 시리즈다. 1980년대 후반 폴란드 사회, 특히 바르샤바의 한 낡은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그 안에 사는 다양한 인물들의 윤리적 딜레마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다. 


1편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는 컴퓨터를 신봉하는 대학교수 아버지와 12살 아들 파벨의 이야기로, 아버지가 컴퓨터로 계산한 호수의 얼음 두께를 믿고 놀러 나간 아들이 얼음이 깨져 익사하는 비극을 그린다.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맹신이 낳은 파국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만든 지식 체계를 신처럼 떠받드는 것의 위험을 묻는다. 


2편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는 죽어가는 남편과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 도로타의 이야기로, 이를 지켜보는 의사가 태아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딜레마를 다룬다. 의사가 남편의 생사 여부를 놓고 내리는 판단이 도로타의 선택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에 속한 생사 문제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의 무게를 성찰한다. 


3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족과 시간을 보내던 야누즈가 옛 애인 에바의 급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러 나가는 이야기다. 성스러운 날에 벌어지는 은밀한 만남과 거짓말을 통해, 안정된 가정과 과거의 미련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4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딸이 죽은 어머니가 남긴, 자신의 친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창고에서 발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부녀는 이 편지의 진위를 두고 갈등하다가, 결국 딸이 그것이 자신이 지어낸 가짜 편지였다고 고백하고 진짜 편지를 함께 불태우는데, 타다 남은 편지에도 같은 문장이 적혀 있어 진실이 무엇인지는 끝내 열린 채로 남는다.


5편 '살인하지 말라'는 앞서 다룬 바와 같이, 별다른 이유 없이 택시 운전사를 살해한 청년 야첵과 그를 변호하는 신참 변호사 표트르를 통해 개인의 살인과 국가의 사형 집행을 같은 무게로 병치하며 사형제도 자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시리즈 중 가장 논쟁적이고 대표적인 편으로 꼽힌다.


6편 '간음하지 말라'는 이웃 여성을 몰래 훔쳐보며 짝사랑해 온 순수한 우체국 직원 청년의 이야기로, 관음과 사랑의 경계,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단편 영화로 영화제에 공개되었다.


7편 '도둑질하지 말라'는 젊은 여성 마이카가 자신이 낳았지만 법적으로는 자신의 어머니가 딸로 키우고 있는 아이 안카를 몰래 데리고 도망치려 하는 이야기다. 생물학적 모성과 법적·사회적 소유권이 충돌하는 상황을 통해, '도둑질'이라는 개념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과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8편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는 바르샤바 대학의 윤리학 교수 조피아가 미국에서 온 엘리자베타 로란즈를 만나 40년 전의 인연을 두고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한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소녀를 구하지 못했던 과거의 선택을 현재 시점에서 다시 대면하게 되는 이야기로, 시리즈 중 가장 직접적으로 도덕철학적 논의(진실을 말하는 것의 조건)를 담고 있다. 


9편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는 성공한 의사 로만이 영구적인 성불능 진단을 받은 뒤, 아내 항카가 젊은 남성과 관계를 맺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부가 새로운 국면을 맞는 이야기다. 신체적 결함과 관계의 소유, 질투와 신뢰의 문제를 다룬다. 


10편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는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이전 편들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와 달리 밝고 경쾌한 톤을 취한다. 평범한 가장인 형 예르지와 록밴드 보컬인 동생 아르투르는 아버지의 부음으로 재회한 뒤, 무심했던 아버지가 사실은 엄청난 가치의 우표를 수집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유산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오히려 서로를 의심하고 이용하는 희비극을 그린다.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은, 한 아파트 건물 안에서 여러 이야기가 서로 스치듯 연결되며, 한 영화의 의미가 다음 영화로 곧바로 전해지는 구성 방식이다. 감독 스스로도 "각각의 계명이 오늘날의 인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으며, 인간이 이 도전에 맞설 수 있는가"를 묻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이번 탐구가 다루는 문제의식, 곧 고대의 규범(십계명)이나 근대의 윤리 이론이 현대의 구체적 비극 앞에서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2) 칸트의 정언 명령 위반 사례 4가지


앞선 1차 연구에서 밝혔듯이 칸트의 정언 명령 위반 사례 4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자살

1) 보편화 위반: 자살은 자기애에 근거하기 때문에 생명 촉진과 동시에 자살이라는 형태의 생명 파괴는 모순이 발생한다.

2) 인간성 위반: 자기 삶에서 비롯된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자신의 인간성(인격)을 이용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목적으로 대하지 않음과 동시에 수단으로만 대하므로 인간성 위반이다.


2 거짓 약속

1) 보편화 위반: 모든 사람들이 거짓 약속을 한다면 거짓 약속 자체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없으며(앞서 말한 정언명령의 조건을 위반하기 때문에) 사회적 신뢰와 질서를 붕괴시키므로 도덕적 의무가 될 수 없다.

2) 인간성 위반: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인격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것이므로 인간성 위반이다.


3 자기 계발 포기

1) 보편화 위반: 필연적으로 자기 능력을 발전시키려는 인간의 자연적 의지에 반대하는 것이므로 위반이다.

2) 인간성 위반: 따라서 자기 능력 계발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자신을 존중하라는 목적을 저해한다.


4 자선 거부

1) 인간성 위반: 다른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내가 인격체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을 외면하게 되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가 된다.


<데칼로그>는 십계명을 단순히 인용한 것이 아니다. 십계명에 대한 계율을 현대적 질문으로 전환함으로써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오래전 계율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한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를 현대적 질문으로 한 번 바꾸어보았다.


1. 자살

-국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자살을 한 개인은 자살로 볼 수 있는가?

-> 이는 앞서 데칼로그에서 던진 질문인 국가가 개인에게 내린 사형과 다름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송파 세모녀 사건이나 익산 모녀의 사건도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신청주의라는 한계 앞에서 개인은 결국 자살이라는 것밖에 탈출구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속에서 벌어지는 자살도 과연 정연명령 위반으로 보아야 할지는 다같이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만약 이를 소설화한다면, 모녀 사건을 가상의 인물로 삼고, 국가의 복지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개인을 그려내야 할 것이다.


2. 거짓 약속

-현대에서의 거짓 약속은 과연 어떤 영향을 낳고 있는가?

->과거와 달리 현대의 거짓말은 정말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AI 합성물이다. AI 기술이 너무나 발전한 탓에 이제는 인공지능이 만든 창작물과 현실 창작물을 비교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표기 없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나온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의 경우도 1970년대 이미 오디세이라는 다른 영화가 만들어졌다며 인스타 릴스에 등장한바가 있으나 이는 AI의 창작물로 밝혀졌다. 이제는 거짓약속이 단순히 인간 존엄성을 헤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소설화한다면 딥페이크 문제나 인공지능 창작물로 큰 피해를 입은 개인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3. 자기 계발 포기

-현대의 히키코모리는 어떤 문제를 발생시키는가?

->히키코모리는 일본에서 비롯된 신조어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에도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만 주로 생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히키코모리는 단순히 무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 문제이며, 히키코모리로부터 비롯되는 각종 온라인 범죄들은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자기계발포기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들이 왜 이런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도 소설화 가능하다.


4. 자선 거부

-현대에서 자선의 의미는 무엇인가?

-> 현대에서 자선의 의미는 많이 퇴색하였다. 자선은 의무가 아닌 동정심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롤스의 분배적 정의에서 차등의 원칙은 자선이라고 명시하고 있지 않고,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의무에 해당한다. 칸트 또한 자선이라는 점에서 개인의 자발적 동기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의무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동정심에 의해서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행위이다. 자선의 의미가 퇴색한 지금 다시 칸트의 정언명령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자선거부는 앞서 언급한 두 모녀 사건과 연관성이 매우 깊다. 현대에서 정언명령이 어겨지는 이야기로 모녀 사건의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2)-1 칸트의 정언명령이 현대에 던지는 질문


칸트의 정언명령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가장 기초적인 것을 다루면서도 현대적 관점에서 여러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과거에 비해 풍족해진 환경에서 인공지능의 등장까지, 칸트의 정언명령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적용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칸트가 정의한 자살, 자선, 거짓말 등이 지금은 또 다른 의미로 이해되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현대 윤리학에 대한 결함 혹은 회복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3) 문학의 역할


소설가는 문학을 통해 사회 문제를 드러내야 할 의무가 존재한다. 이것 또한 칸트의 관점이 적용된다. 칸트는 정언명령 위반 사례를 통해 인간이 인간 존엄성의 원리인 정언명령을 어기는 경우에 대해 명시했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사회를 드러낸다. 소설가라고 해서 칸트의 윤리학에서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칸트의 관점에서 소설가는 사회 문제를 드러내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먼저 정언명령 위반 사례의 자선의 거부처럼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고도 이를 방치하는 것은 정언명령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익산 모녀 사건과 같이 타인이 고통받는 상황을 소설가가 접하게 되었다면, 기사를 통해서라도 목격했다면 이를 외면하지 않을 의무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앞선 연구에서 문학은 사회 문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단순히 사회 문제만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문학은 그것을 은유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직접적인 것이 아닌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간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은 결국 ‘소재’에서 나온다. 그 소재는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 사례 4가지에서 시작된다. 정언명령 위반 사례라는 과거의 준칙이 현대에 적용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간접적으로 사회 문제인 기초수급자의 사망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결론


1) 기초생활수급자 사망 문제의 소설화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익명화와 허구화이다.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모두 허구라는 것을 가정하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소설화가 고인의 명예훼손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소설화를 어떻게 하면 적합하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소설가를 꿈꾸는 같은 나이의 청소년 인공지능 A와 토론을 진행했다.


1)-1 소설화 진행


나: 자 너는 이제 소설가를 꿈꾸는 고3 학생 인공지능 A야. 나는 칸트의 정연명령 위반 사례 4가지 중 하나인 자선 거부와 익산 모녀 사건을 소설화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와 토론해보자인공지능 A와 토론을 시작할게. 소설화 과정에서 다중시점을 적용했으면 좋겠어. 어떻게 생각해?


*다중시점서사: 소설 속에서 화자가 고정된 것이 아닌 여러 화자가 번갈아가며 소설이 전개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A: 고3 소설가 지망생 인공지능 A로서 아주 솔직하고 비판적으로 의견을 말해볼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익산 모녀 사건과 '자선 거부'라는 무거운 윤리적 주제를 다루는 소설에 다중시점을 섣부르게 도입했다가는 주제가 완전히 길을 잃고 산만해질 위험이 커. 네가 왜 이 방식을 떠올렸는지(사건을 다양한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싶었겠지?) 이해는 가지만, 이 소재와 시점 사이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어.


다중시점 도입의 3가지 위험성 (비판적 검토)

윤리적 초점의 흐려짐과 '방관자'의 면죄부

이 소설의 핵심은 칸트적 관점에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방관의 책임'을 찌르는 거야. 그런데 범죄자, 피해자, 방관자, 경찰 등 너무 여러 명의 시점을 돌아가며 쓰다 보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각자 처한 사정이 있었겠지"라며 가해자나 방관자의 입장에 이입하게 돼. 결국 칸트가 말하는 엄숙한 '도덕적 의무'와 '책임의 무게'가 희석되고, 비극이 단순한 '사연 있는 사건'으로 포장될 위험이 있어.


사건의 무게감 대비 가벼워지는 서사 (기술적 과부하)

익산 모녀 사건은 실제 발생했던 참혹하고 무거운 비극이야. 여기에 다중시점까지 얹으면,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문학적 역량 안에서 인물들의 목소리를 각각 다르게 살려내기가 역부족일 수 있어. 시점을 분산하느라 정작 감정을 타격해야 할 클라이맥스(방관이 가져온 파국)가 얕은 스릴러물처럼 소비될 우려가 있어.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구조적 모순

칸트의 정언명령은 "이성적 주체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내리는 단호한 결단"을 요구해. 시점이 계속 바뀐다는 것은 주체가 계속 흔들린다는 뜻이야. 도덕적 판단의 절대성을 강조해야 할 주제에 다중시점의 상대주의적 서사는 본질적으로 충돌해.


대안: 제한적 전지적 시점 혹은 1인칭 주인공(방관자) 시점

차라리 시점을 좁히는 게 훨씬 효과적일 거야.

1인칭 방관자 시점: 사건을 직접 터트린 주동자가 아니라, 그 모녀의 이웃이거나 방관했던 주인공의 시선으로 끌고 가는 거지. "나는 그들의 신호를 알면서도 왜 외면했을까?"라는 내적 갈등에 집중하면 칸트의 '자선 거부'라는 주제가 독자의 가슴에 훨씬 날카롭게 박힐 걸?

너는 다중시점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노리고 싶었던 거야? 내 비판에 대해 반박해줘도 좋아!


나: 너의 관점에도 동의해. 다만, 너의 우려임에도 불구하고 다중시점 서사를 적용하는 것이 비교적 효과적일 것 같아. 왜냐하면 이 사건을 다각도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단 한명의 관점을 본다면 너무 한계가 많아. 경찰이 이 사건을 보는 관점, 구청 직원이 보는 관점, 옆집 이웃등 어떻게 보면 이들 모두의 관점을 한번씩 고려해야 더욱 효과적으로 이번 사건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A: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단단한 의지를 가졌다면 기꺼이 같이 판을 짜볼게! 네 말대로 경찰, 구청 복지 담당자, 그리고 방관하는 이웃의 시선이 교차한다면, "우리는 모두 이 비극의 거대한 방관자였다"는 주제를 훨씬 입체적이고 묵직하게 파고들 수 있을 거야.

다중시점의 리스크를 오히려 무기로 바꾸는 '입체적 방관자 서사 구조'를 이렇게 제안해 볼게.

다중시점 서사 설계안: '파편화된 시선 속의 공백'

각 인물의 시선을 통해 칸트가 말한 '자선 거부(타인의 고통 외면)'가 사회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분업화되고 방치되는지 보여주는 거야.


[시점 1] 구청 복지 담당 주무관의 시선: '규정과 매뉴얼의 방관'

초점: 서류와 예산의 한계, 그리고 "내 관할이 아니다" 혹은 "절차가 먼저다"라며 책임을 미루는 행정적 냉소.

칸트적 의미: 의무를 법적·행정적 테두리 안에만 가두고, 이성적 존재로서의 도덕적 책임감을 회피하는 인간의 모습을 고발함.


[시점 2]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시선: '법과 절차의 한계 속 무력감'

초점: 가정폭력이나 모녀의 위기 신호를 감지했음에도 법적 개입 권한의 한계와 "사생활"이라는 명목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순간.

칸트적 의미: 악을 적극적으로 저지르지 않는 것이 곧 방관이며, 시스템이 타인의 고통을 지워버리는 방조제가 됨을 보여줌.


[시점 3] 옆집 이웃(또는 주인공)의 시선: '일상의 안위를 위한 침묵'

초점: 밤마다 들려오는 소음과 불안한 기척을 알면서도 "괜히 나서서 피곤해지기 싫다"며 귀를 막고 내 일상에 집중했던 이기심.


칸트적 의미: 가장 직접적인 '자선의 거부'. 내 평화만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존엄성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태도.



2) 소설화 계획


처음엔 A와 대화 과정에서 A는 다중시점서사 적용에 비관적인 관점을 내비쳤다. 사건이 산만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을 적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직접 설득하였고, 합의를 통해서 다중시점서사를 적용한 최종 절충안을 마련하게 하게 되었다.


3) 한계 및 성과


이번 연구는 사회 문제인 기초생활수급자의 사망 문제와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 사례를 연결시키면서 처음에 출발하였다. 이후 롤스의 분배적 정의를 통해 사회 제도의 개선 및 이 사건이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건임을 증명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2차 연구에서는 직접적으로 소설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를 밝혔다. 소설가는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 사례를 통해 이를 문학을 통해 표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영화 <데칼로그>에서 십계명의 현대적 재해석을 했던 사례를 바탕으로 칸트의 정언명령 위반 사례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재해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초생활수급자의 사망 문제를 소설화하는 과정에 이르렀으며 A와의 대화를 통해 다중시점서사를 적용한 소설화 계획을 세웠다. 2차 연구를 통해 1차 연구에서의 한계점이었던 소설가의 역할과 정당성을 이번 연구로 확연히 규정하였고, 칸트의 사상이 단순히 과거 사상에 머문 ‘고전’의 영역이 아니라 현대 윤리학에도 크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철학/윤리와 문학의 본질적 영역을 다시금 확인한 시간이었다.


소설은 소설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글자로 기교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글자를 나열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은 거울이 되어야 한다. 이번 연구는 사회 문제에 대한 분석으로 끝나지 않고, 소설가의 의무를 밝혔으며 그것을 통해 소설이 어떻게 거울의 역할이 되어야 하는지까지 도출해냈다. 모든 소설가가 이번 연구에 동감할 필요도 없고, 꼭 의무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한 문학은 거울, 사회와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번 연구의 마지막 결론이었다.


참고문헌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29937.html(고나린, 김가윤, 2024.02.27., 한겨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7862(남수연, 채혜선, 2025.05.22., 중앙일보)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노스텔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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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론: 부끄러움을 마주하다.

서론1) 탐구 배경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이 질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질문에 한 번에 답할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묻는다면 머리가 아팠다. 사실 처음에는 그저 재밌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라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 그래서 역사를 좋아했고, 역사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읽었다. 카뮈의 소설은 정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다. 알베르 카뮈처럼 나의 생각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면, 나의 철학을 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 욕망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남자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주위에 소설을 쓰는, 아니 글을 쓰는 친구를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노트북에 초고는 쌓여만 갔지만 그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은 무의미했다. 학교 내에서는 백일장을 포함하여 이러한 문예행사가 아예 진행되지 않았다. 나는 고립된 무인도에 갇혔다. 그때 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소설은 나의 생각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와 문학에 대한 교류를 하지 못하여 외로움을 겪던 차에 나는 온라인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약 100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나는 소설을 쓰기 보다는 작품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토론을 하던 중 어떤 사용자가 민음사 책의 표지 하나를 올렸다. 이름은 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파란색 표지에 그려진 한 외로운 노인과 안개. 나는 그 사진에 매료되었다. 그것이 김승옥과의 첫 만남이었다. 민음사는 원래 외국 문학 전집만 발행한다고 생각하고, 한국 문학도 나오는지는 몰랐기에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바로 구매했다. 그리고 첫 문장은 나의 마음을 점령하기에 충분했다.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리는 그의 문체는 문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던 나에게 모범답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문체보다도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형성한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세계였다. 이라는 작품에서 드러난 '자기세계'의 개념 이후 현대인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것에 따라 멸망해가거나 몰락하는 인물은 분명 무언가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그 거대한 세계는 무엇일까. 마치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가. 김승옥 작가의 소설이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답을 절대 정해주는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만 하더라도 주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질문만 던지지는 않는다. 실존주의도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고, 칸트도 인간 존엄성에 따른 의무를 부여한다. 그러나 김승옥은 항상 소설을 애매하게 끝낸다. 의 주인공 ‘나‘는 윤희 누나가 범죄에 연루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놓고서는 그저 마을 주위를 서성이며 여러 생각을 하며 끝이 난다. 소설 에서는 주인공의 욕망을 결국 실현하지 못한 채로 다시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간다. 김승옥은 이런 애매한 상황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 노스텔지아
  • 2026-08-23
눈과 돌멩이, 한국문학에 대한 성찰

서론2024년, 이상문학상의 주관사 은 재정난으로 인해 휴간을 하게 되었다. 결국 이상문학상의 주관사도 문학사상에서 다산북스로 변경되고, 표지 디자인도 바뀌게 되었다. 이상문학상이 가지는 한국 문학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문학상 하면 거론되는 3대 문학상은 다음과 같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물론 ‘상’ 하나가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이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도 아니고, 작가는 상 하나를 받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상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적어도 현재 한국 문학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한국 문학을 접하는 일반 독자의 경우에도 현대 한국 소설을 읽기 위해서 문학상 작품집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예지와 같은 문학 잡지들의 경우에는 일반인이 접하기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로 문학상 작품집이 독자들의 첫 현대 한국 문학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과연 이상문학상이 2026년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코멘트를 보던 중 흥미로운 코멘트를 발견했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생겼다. '순수 문학은 더 이상 대중문학이라 볼 수 없는 것일까?'“한국 소설에서 부족했던 순전한 재미 요소가 느껴진다. 장르 소설 순문학 나누는 거 웃긴데 장르 소설 같은 면이 있어서 재밌음. 글고 눈과 돌멩이는 너무 조은 순소설 같다. + 뒤에 작가 인터뷰가 있는데 소설가를 하나의 셀럽으로 만들기 위한 혹은 하나의 소설을 진득하게 같은 느낌이었음. 다른 마케팅이 시작된 느낌. 민음사 tv로 촉발된.. 그리고 웃기게도 나는 모든 사람이 책을 중요히 여긴다고 살다가 이게 아주 극소수의 리그라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된다. 대중문학이라는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일단 이 코멘트는 사용자 한 명의 의견으로 한국 문학 전체를 대표하진 못한다. 그러나 한 독자의 의견으로 충분히 얻어갈 수 있는 부분이 존재했다. 하나씩 문단을 끊어 보면,1) 한국 소설에서 부족했던 순전한 재미 요소가 느껴진다.-> 이 사용자가 바라 본 한국 소설들은 아마 매우 최근의 것으로 추측되는데, 비교적 적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2) 장르 소설 순문학 나누는거 웃긴데, 장르 소설 같은 면이 있어 좋았음.-> 최근 자주 거론되는 문제인 장르 문학과 순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소설집은 장르 문학처럼 보이는 소설도 많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누는 것이 웃기다면서 구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는 있지만,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구별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준다. 3) 그리고 웃기게도 나는 모든 사람이 책을 중요히 여긴다고 살다가 이게 아주 극소수의 리그라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된다. 대중문학이라는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순수 문학은 극소수의 독자들이 읽고 있다고 인식하며, 순수 문학이 대중 문학적이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두 문구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사용자가 주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1. 한국 문학은 재미 요소가

  • 노스텔지아
  • 2026-07-12
누구에게나 있는 검은 밀실(이승우의 <생의 이면>)

생의 이면은 소설가 박부길의 삶을 그의 작품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과 그의 삶을 묘사한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가 어떤 경력이 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보다 그가 살면서 겪은 모순, 생각과 고찰들, 즉 생의 이면이 담겨져있다. 그의 고향과 어린 시절이 작품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주로 큰아버지-박부길, 어머니-박부길, 김종단-박부길의 관계가 돋보인다. 그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큰 사건은 아버지의 자살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박부길이 건네준 손톱깎이로 자살을 했기에 그에겐 아버지를 죽였다는 큰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 이후로는 아버지의 무덤을 불태운 사건, 고향을 떠난 사건, 그리고 예배장에서 첫사랑을 만난 사건, 첫사랑과 이별하고 신학 대학을 그만두는 사건들이 주요 사건이다.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이다. '나'라는 등장인물이 출판사의 제안으로 박부길의 생애를 탐구하는 글을 쓰는 것이 외화이고, 내화에는 박부길의 인터뷰, 소설 등이 녹아있다. 액자식 구성은 단조롭게 흘러가는, 어쩌면 박부길의 자서전이 될법한 글을 좀 더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내가 최근 쓴 소설 라흐마니노프 주제에 의한 광시곡도 이 형식을 참고했다.)왜냐하면 '나'가 박부길의 삶을 알아내야하는 '노력'의 과정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박부길 본인이 자신의 일대기를 작성했다면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기에 흥미가 떨어질 수 있지만, '나'가 박부길의 인터뷰, 소설을 통해 그의 삶을 알아가는 방식은 더욱 독자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 또 내용적인 부분에서 작가가 성경에 나오는 내용(예시: 야훼, 에덴동산 등)과 같이 비유를 해서 표현하는 부분은 소설에서 고도의 비유를 사용하도록 돕고, 이 이야기를 쓴 작가(이승우작가)와 박부길이 신학대학을 나왔다는 두 사람의 공통점을 통해서 이승우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이 작품의 미적 기능 중 형식의 부분에 해당하는 액자식 구성은 독자에게 흥미와 궁금증을 유발하도록 하고, 내용의 부분에 해당하는 신학적 요소와의 비유는 문장 수준을 높이고, 작가와 박부길의 유사성을 통해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생의 이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결핍이 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어린시절 겪었던 트라우마, 충격, 충족하지 못한 것을, 그 모든 것이 결핍으로 이어진다. 결핍은 해소되기 어렵다. 소설 속 박부길은 많은 결핍을 겪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결핍은 '부모'에 대한 결핍이다. 박부길이 김종단과의 연애마저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던 이유도 어쩌면 어릴적 부모로부터 받지 못 했던 애정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박부길에게 부모는 항상 없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정신이 나가버려 자살을 했고, 어머니는 식구들이 내쫓아버렸다. 큰 아버지가 그를 키우긴 했지만 큰아버지는 박부길의 부모가 되어주기엔 너무 부족한 인물이었다. 어릴적 누군가 그에게 부모의 역할을 조금, 아주 조금이나마 해줬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작가는 누구나 사람에겐 생의 이면이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

  • 노스텔지아
  • 202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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