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뢰침(김영하, 1998)의 상징에 관한 효용론적 관점의 해석
- 작성자 Marllin Zero
- 작성일 2026-09-28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192
그 짧고 강렬한 순간이 지나가고 난 후, 까닭 없이 죄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여느 여자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어떤 사고가 발생하기만 하면, 그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우선 사과하도록 교육받은 탓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일을 엄마에게도, 그리고 그 시절 가장 가까웠던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었다. 시간이 좀더 지나고 나이를 먹게 되니,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예단 때문에 더더욱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순간’에 대한 자세한 서술 이전 이 단락을 읽었을 때, ‘그 순간’이 벼락 맞은 순간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보다 현실적인 비일상적 경험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스스로가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첫 성적 경험 같은. ‘나’는 유년 시절의 그 순간을 어쩌면 잊은 게 아니라 묻어뒀던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 친구를 통해 ‘벼락 맞고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을 알게 되고 가입한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살아났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공포보다 빨리 덮친 수만 암페어의 전류를 받아냈습니다. 그때 전류는 우리 몸에 길을 냈기 때문에 또다시 맞는다 해도 전류는 그 길을 따라 마치 피뢰침을 지나듯 우리 몸을 지나갈 겁니다.
초점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벼락 맞은 경험의 발설을 성폭행 경험의 진술로 치환하는 것, 벼락을 맞아 몸에 전류가 흘렀던 경험을 ‘첫 경험’이라 칭하는 것, 모임 구성원들을 뜻하는 ‘발기한 피뢰침’이라는 표현을 통해 짐작할 때, ‘벼락 맞고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은 ‘성폭행 생존자 모임’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탐뢰여행’을 떠나는 걸까?*
이들은 벼락을 맞아 죽을 뻔 했음에도 일부러 벼락을 맞으러 간다. 다 같이.
트라우마 극복을 목적으로 한 자조모임 성격의 ‘퇴역 군인들 모임 같은 건가요?’, ‘레저 삼아 위험을 즐기는 건가요?’ 모임의 지도자격인 J는 답을 알려주지 않고 ‘나’ 스스로에게 왜 이 모임에 왔는지를 물어보라고만 한다. 또한 J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를 이곳에선 마음 놓고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첫 경험을 털어 놓은 이후에도 빗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꿈을 꾼다. 사실 벼락을 네 차례 맞아 의연해보이는 J도 꿈을 꾼다. J는 말한다.
그 경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게 우리 몸에 흔적을 남깁니다.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곧 되살아납니다. 공포 보다 먼저 지나간 것을 몸은 잊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 라는 ‘나’의 질문에 J는 ‘공포와 전류를 일치’시키고 ‘스스로 전격이 되어 대기와 대지와 몸의 주인이 되라’고 한다. 이는 모임 구성원들이 주기적으로 ‘탐뢰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한 암시가 될 수 있다. 벼락 맞고도 살아난 인간은 벼락에게 당한 객체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탐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탐뢰여행을 가면 ‘표백제’ 냄새가 나는데, 이는 방전이 시작되면 공기중의 산소가 오존으로 변하는 과학적 원리에 기반한 것이지만, 문학적으로는 오줌 냄새의 눅눅한 기억을 표백하는 주체적 인간을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 이는 영화 <세계의 주인>의 문제의식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삶에는 성폭행 피해자라는 프레임으로 규정할 수 없는, 예상치 못한 폭력이 정복할 수 없고 완전히 바꿀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고 두 작품은 선언한다. 폭력은 ‘우리 몸에 흔적을 남기고’, 특히 ‘나‘에게는 ‘두 젖가슴에서 시작되어 배꼽을 거쳐 내려가는 희미한 전문(電紋, 번개 무늬)’을 남겼다. 그러나 <세계의 주인>은 그 ‘번개 무늬’가 피해자 삶의 전부일 것이라는 편견을 정면으로 부수며 ‘주인’이 남친과 키스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성폭행 피해자는 성적 욕망을 느끼면 안 되나? 벼락을 맞은 사람은 벼락을 두려워하기만 해야 하나? 두 작품은 사회적 담론이 규정한 피해자다움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피해자는 오로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자아와 기억으로 구성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한편 피해자의 주체성이 한 개인의 독립성, 성격적 우수함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연대로 확장된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연결된다. ‘나’는 처음 이 모임에 관해 들었을 때 ‘쌍둥이였다는 사실을 다 크고 나서야 안 기분’이라며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삶의 기저가 아주 천천히 흔들리는 느낌’이었다고 진술한다. J는 ‘전 세계적으로 우리와 같은 이들이 수백명’있으며, 이제는 당신조차 못 믿게 된 당신의 기억을 우리가 믿고, 당신이 비밀로 해온 ‘배설’의 경험을 우리가 공유하고 있음을 밝힌다. 탐뢰여행에 처음 참여하는 신입들은 J를 비롯한 베테랑들 옆에 붙어있다. 베테랑들은 안테나를 들고 있고, 벼락을 맞아 ‘모로 쓰려져도’ 다시 일어날 것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나’는 J의 옆에 있고, 벼락을 맞고 싶지 않다면 비가 그칠 때까지 J 곁에 머물면 된다. J가 대신 벼락을 맞아 피뢰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J가 자신을 일컬어 피뢰침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불현듯 서글펐다.’
그러나 공동체가 모든 것을 구제해줄 수는 없었고,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벼락치기 직전, ‘나’는 토하는 여자를 도울까 하다가 ‘이곳에선 누구도 누구를 도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옆에 있던 남자는 혼절했고, 구토하던 여자는 그의 맥을 짚고는 그가 다시 일어날 것을 믿는다. 남자는 깨어나 걸어간다. ‘나’는 ‘분명 나무 뿌리처럼 갈라진 푸른 섬광이 그의 몸을 지나갔는데, 어떻게 몇 분 만에 저렇게 일어나 걸어갈 수 있는걸까.’ 생각한다. 비가 멈추고, 모임원들은 서로를 부축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글에서 제시한 해석 말고도 더 깊고 다양한 탐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또한 저는『피뢰침』의 은유와 상징을 효용론적 관점에서 트라우마와 연대 공동체의 메시지로 읽었으나 다른 관점에서 읽힐 여지가 다분한 작품입니다. 어려분의 감상을 댓글이나 새 비평문으로 알려주세요.
추천 콘텐츠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죽겠습니다. _ 소설집『오직 두 사람』, 113p., 문학동네 편리하게 해석한다면 이렇다. 옥수수 = 나. 옥수수를 쪼아먹는 닭 = 출판사 사장 내외. 작가와 편집자는 마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은 기한 내에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하고, 반드시 소비되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창작자가 느끼는 압박은 모이 시점에서 닭이 눈앞에 있는 것과 같다. 출판부(닭)가 작가(나=옥수수)를 ‘쪼아대는’ 것이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169p.) 중얼대지만 잡아 먹힐 것 같은 생존의 불안을 일상적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나’는 옥수수다. 그건 단지 출판계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 전반은 마감에 맞추어 빨리 빨리, 효율적으로, 생산적으로, 성실하게, 신 들린 것 같은 폭발적인 집중력으로 일들을 처리하라고 인간들을 쪼아대고 있다. 교육도 시장의 요구를 반영하는데,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는 성실한 산업 역군을 양성하는 전일(全日)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했다. 작품 속에서 작가인 '나'는 딸의 뒷바라지를 하려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고, 딱히 다른 재주가 없는 ‘나’는 써야만 한다. 그런데 글이 안 나온다. 원고료를 지급했는데 마감일이 훌쩍 지나도 산출물이 없는 것에 대해서 출판사측은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그러면 '나'는 민법에 따라 금전적 손해배상의 의무를 지게 될 것이고 더불어 '사기죄'로 형사 재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월스트리트 금융계 출신 출판사 사장을 만난 뒤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막 써버린다. 서사 구조의 개연성, 인물의 성격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말자. 한 문장 한 문장에 정성을 들이지 말자. 이미 쓴 글 되돌아보지도 말자.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마감과 효율, 생산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에라 모르겠다’, ‘신경 꺼’, ‘너무 공들이지 마’, ‘대충대충 해’의 정신을 학습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작품 속 인물들과 현실 세계 사람들이 내면화한 메시지를 나의 언어로 재구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오랜 시간 몰두하지 마. 천착하지 마. 시간이 아깝지도 않니? 그런 자잘한 골몰은 접고 거칠게 획을 그어가야 해. 그렇게 다들 계약을 지키며 살아가는 거야. 왜 작가들은 자꾸 채무를 불이행하니? 결국 인생의 핵심적 요소는 생존(돈)과 생식(섹스)가 아니겠는가. 일을 ‘쳐내는’ 감각으로 빠르게 과제를 ‘마감’했다면, 너는 비로소 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게다가 그런 감각은 곧 인류가 숭배해온 거친 ‘남성성’과도 유사하므로 '생산성이 좋은' 사람이 '광포한 섹스'(150p.)도 잘 하는 거야. 이 작품은 쟁취의 감각, 온라인 게임하는 감각, 경영학, 세상물정, 똑부러짐 같은 것들과 멀다고 여겨지는 문인조차 그러한 지배적 사회질서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을 인생이라는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작가라고 믿으며, 자신이 사회구조적으로 결정되는 “종속변수”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행동양식
- Marllin Zero
- 2026-10-02
유사한 소재와 다른 서술 조세희의 문학세계가 투쟁과 서늘함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면, 윤흥길의 문학 세계는 다정함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결말부는 “꼭 죽여.”로 끝난다면 윤흥길의 『장마』는 “모든 걸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니까. 또한 난장이의 딸은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사람을 증오하는데,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철거민 입주 권리를 산 사람이다. 연작에서는 철거민 입주권을 구매한 권력자를 절대적 악인으로 상정하고 선과 악의 대립적 구도를 구성함으로써 권력의 폭압에 대한 정서적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윤흥길은 철거민의 광주대단지 입주권을 구매한 엘리트층의 권씨라는 인물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상황을 묘사한다. 권씨는 대학을 나왔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과거의 영광을 기리면서 정장과 구두를 신고 공사장에 출근한다. 권씨가 자신을 도시빈민과 구별짓는 태도나 철거민의 입주 권리를 구매한 점에서는 전형적인 경제적 약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매일 구두를 닦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이며, 조세희의 작품들이 드러낸 사회적 모순은 결국 미시적 관점에서 보면 권씨처럼 연민하게 되는 개인들의 집합일 수 있다.조세희뫼비우스의 띠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_30p.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살기가 너무 힘들다.”아버지가 말했었다.“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아버지,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요?”“지섭이 미국 휴스턴에 있는 존슨 우주 센터에 편지를 써 보냈다. 그곳 관리인 로스 씨가 답장을 보내올 거야. 후년에 우주 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달에 가게 될 거다.” _72p.(…)“로스 씨의 편지를 받기 전에 보여줄 것이 있다. 지섭에게 말해서 쇠공을 쏘아올려 보여주마.” 집이 무너진다는 것. 지금은 죽은 여자가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새겨진 채 굳은 시멘트, 오랜 시간이 걸려 손수 지은 집, 집이 부서지는 순간까지 숭늉을 먹는 식구들. 급속한 근대화로 인한 마을 공동체의 붕괴, 고유한 기억이 담긴 공간이 소멸하고, 빈터가 되고, 수몰되는 순간은 한국 문학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현진건의 『고향』, 문순태의 『 징 소리』등 20세기 문학은 전통 사회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의해 해체되어야 했던, 서구화와 근대화를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을 다해 추진하던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김애란의 『 침묵의 미래』는 집과 고향과 거기서 쓰이던 언어의 붕괴가 한국 사회를 넘어서 세계의 섬과 숲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로 시선을 확장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고향과 언어를 ‘중앙’에게 빼앗기고 중앙이 만든 집에 살며 중앙의 언어를 쓰게 되는 것은 비단 소수 민족 사회뿐 아니라 도시적 삶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포착한다.남아
- Marllin Zero
- 2026-08-21
이유리 작가의 작품세계1.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사랑했던 순간들이 ‘나’의 기억 속에서 재생되고, 타인을 사랑할 때 인간의 행동과 생각들이 감각적으로 서술됨2.초월적, 비인간 존재와의 상호작용3.동거 후 이별로 시작되는 구조가 여러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남. 첫 만남부터 시작하는 타 소설과의 차별점으로, 인물이 이별 전 이야기를 회상하고 변화할 계기를 마련하는 서사적 기능을 함. 독자로 하여금 동거 커플의 역사를 궁금해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음. → 다른 소설집에 수록된 ‘이구아나와 나’도 비슷한 구조.4.‘우리 집’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작품들의 공통된 특징임.5.SF 요소가 가미된 작품들에서는 공통적으로 감정이나 기억을 다루는 상용화된 기술(크로노스, 감정전이, 기억-담금주)을 상상하고, 상실과 이별의 고통을 기술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 에서는 이러한 기술들을 적극 지지하는 인물들이 나오는데, 각각 의사와 변호사로 경제성과 효율성에 기초한 사고관을 가지면서 주인공과 결혼 또는 연애 직전 단계에 있는 남성들이다. 그리움을 다루는 과학기술적 방편에 대한 주인공과 남성들의 견해 차이는 주인공이 남성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될 때 중요한 문제가 되므로 깊은 관계를 맺기 전 갈등 요소로 작용한다.이어지는 작품 속 ‘기억-담금주’는 ‘나’가 취하고자 하는 그리운 상대의 시절만을 재현하거나 감정을 제거하거나 이식하는 것을 넘어, 혀 끝에도 댈 수 없던 씁쓸한 기억과 감정을 우리고 발효시키면 달큼한 술이 됨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헐벗은 상태’의 아픈 기억을 오래도록 재구성하다가, 그것이 담긴 술을 버리지 않고 집 한편에 놓아두었다. 문득 술이 담긴 커다란 유리병을 돌이켜보고 들이켜보니 달콤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칠맛이 느껴지는 것은 인간 삶의 미묘한 성질이다.*이는 김초엽 작가의 , 과 연결되는 주제의식이다. 급속한 기술 발전 이전과 이후를 모두 겪어본 2030 작가들이 포스트 휴먼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영원하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인간을 원했잖아 이제 어떻게 할래?’라는 질문을 탐구한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슬픔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소셜미디어와 항우울제 등 행복이 판매되고 소비되는 현재,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온 문학계의 시선은 웃음소리 가득한 세계를 새로운 고통으로 비춘다.표제작 「 비눗방울 퐁」-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그리고 그다음 순간이었다, 옆에서 퐁 하는 소리가 난 것은. _278p.집에서 그것을 유현의 오른 팔목에 감고 시험 삼아 몇 걸음 걸어 보니 과연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고 있는 우리 모습이 슬프고 또 동시에 우스워서 울다 웃다 했음은 물론이었다. _249p.삶의 덧없음은 조선시대 때부터 가사를 통해 노래되었던 유서 깊은 모티프다. 21세기의 이 소설은 어려운 한시를 인용하는 대신 그 덧없음을 ‘퐁’ 하고 터지는 인간 비눗방울로 형상화했다. 유현의 현재 연인인 ‘나’와 전여친 혜령은 죽기 직전에도 농담을 건네는 사이다. 덧없지만 서로의 눈물을 닦
- Marllin Zero
- 2026-08-2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