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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귀여우며 무서운 -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

  • 작성자 도두
  • 작성일 2026-10-03
  • 조회수 117

   작고 귀여우며 무서운 -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



     진시황은 어째서 불로초나 수은도 마다 않고 영생을 희구했는가? 인생의 절정이라는 순간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단순히는 죽음을 두려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 정말 영원하고 무한한 삶의 추구과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고 싶지 않다'라는 말은 '영원히 살고 싶다'로 치환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은 영원을 제대로 감각하고 있는가? 애초에 감각할 수는 있는가? 『극장판 치이카와: 인어섬의 비밀』(이하 『치이카와』)은 이 같은 질문의 중심을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 순간을 극복하려다 영원의 함정에 빠져버린 자들이 그려낸 궤적으로 관통한다.


   작고 귀여운 것들, 그 이면


    '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들'의 줄임말인 먼작귀로 공식 번역된 치이카와의 극장판 캐치프레이즈는 '그 우정도/ 그 죄도/ 그 생명도/ 언제까지나'. 아무래도 수상쩍다.

    줄거리를 보자. 인어섬에 간 치이카와 일행은 영생을 불러오는 인어 동료를 잡아먹은 범인을 찾으려 마을에서 흉포를 부리는 세이렌에 맞서 싸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마을 주민 히토바와 후타바는 사전에서 본 영생을 가져오는 인어를 낚으러 바다로 향하지만 세이렌의 실수로 사고가 나 후타바가 중태에 빠지자 히토하는 복수를 위해 납치한 세이렌의 잉어를 후타바에게 먹인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작고 귀여운' 얘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문제는 다음이다. 후타바가 영생이 가져올 공포, 히토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죽고 없어지는 동안 홀로 남겨질 공포를 어렴풋이 감각하고는 히토하도 인어를 먹도록 종용하자, 재촉에 못 이긴 히토하도 인어를 먹은 뒤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기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을 둘러싼 사유를 추출해낼 수 있다.

   우선 후타바가 영생을 얻은 이유는, 그가 사경을 해메고 있었으며 죽음 아니면 영생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치료의 가능성은 묘사되지 않았으므로 논외로 친다). 히토하는 후타바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기에 그를 영원히 살리기로 한다. 고로 후타바의 영생은 도피 시도이며 동시에 일종의 도피처이다. 

   반면 히토하는 어떤가. 히토하가 영생을 얻은 이유는, 이미 영생의 운명이 정해져버린 후타바가 뒤늦게 영원에 수반되는 공포를 직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히토하의 영생은 후타바가 겪는 공포를 덜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되었다. 영생이 수단으로서 이용된 것이다. 이렇듯 두 인물의 영생은 세부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영원이 순간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순간과 영원, 유한과 무한


    두 인물이 영생에 이르는 계기는 사소하며 지극히 순간적인 감정과 선택에 매여있다. 지금 죽음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지금 느끼고 있는 공포를 달래기 위해서 택해진 수단이 영생이라는 것은 농담에 가깝다. 

    이러한 농담이 하나의 실체로 구현되는 이유는 그들이 영원을 순간의 렌즈로 해석하여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영원의 순간성이 도드라지는 지점이며 이는 타 창작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 널리 알려진 만화 『5억년 버튼』을 보자. 거액의 돈을 받는 대신 그 순간부터 5억 년을 버텨야 하지만 5억 년이 지난 뒤에 모든 기억이 소멸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에서 우리는 영원을 하나의 순간으로, 다시 말해 무한을 유한으로 압축시키는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을 인식하고자 할 때 피하기 어려운 태도다. 3차원 존재로서 우리는 4차원을 제대로 감각할 수 없기에, 태서랙트와 같이 4차원을 한 차원 단순화하여 이해한다. 인식 한계의 너머에 있는 것을 차원을 낮추어 감각하려는 태도가 무한-유한 관계에 적용되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최후를 맞는지를『치이카와』는 실험하고 있다.

     이 논리 실험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순간을 극복하려는 욕망이 갈구하는 영원은 인간의 저차원적, 근시안적 태도 그 자체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극복이 어렵다. 


   비밀과 농담


    그렇다면 수단으로서의 영생은 영화 내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우선 영생을 얻은 당사자들은 비밀이 들킬까 노심초사하며 살아간다. 서로를 위해 영생을 택한 히토하와 후타바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비밀을 약속한 순간부터 오직 서로에게로 휘말려들어간다. 주인공 치이카와가 사건의 전말을 알아차리자 두 인물이 손을 꼭 붙잡는 과정은 클로즈업으로 강조된다. 비밀과 약속은 하나의 서약으로서 강제성을 띄어 두 인물을 고립시키며, 항시 비밀의 탄로를 걱정하도록 해 그들의 삶에 끊기지 않는 긴장감을 형성한다. 이 모든 결과가 순간의 판단으로 획득한 수단적 영원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세이렌은 범인을 찾으면 '우리에 넣어서 깊고 어두운 바다에서 영원한 삶을 맛보게' 할 것이라 노래한다. 영생을 노리고 세이렌의 인어를 한 마리 더 잡아먹으려던 등장인물은 인어섬을 떠나는 배에서 영생도 우리에 갇혀버린다면 소용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치이카와』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순간과 영원의 문제를 가벼이 여기는 부분들이 있다. 더 나아가 영화 전체가 무겁고 끔찍한 부분인 비밀과 작고 귀여운 부분인 농담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치이카와』만의 특이점은 자연스럽게 재봉질 된 두 상이한 부분의 경계에서 찾을 수 있다. 사례로 들기에 가장 적합한 장면이 있다. 히토바가 인어를 잡아온 뒤, 영화는 무언가가 여러번 맞고 으깨지는 소리를 들려준다. 직후, 밝은 배경에 인어 조림 요리 일러스트가 반짝거리는 효과음과 함께 등장한다. 

    이것을 표면과 이면 사이의 낙차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뫼비우스의 띠 같이 표면과 이면을 어떤 거슬림 없이 자유자재로 넘나든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영화 내에서 세 번 반복되는 삽입곡 「오늘은 이제 안녕今日の日はさようなら」 의 가사는, 영생을 둘러싼 그 모든 잔혹하고 처절한 소동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우정을 되풀이해 노래한다. 


いつまでも絶えることなく友だちでいよう

언제까지나 헤어지는 일 없이 친구로 지내자.

(...)

信じあうよろこびを大切にしよう

서로 믿는 기쁨을 소중히 하자.


     관객은 표면과 이면 사이에서 몇 번이고 왕복 운동하며, 세상의 비밀 하나를 깨닫고 만다. 히토바와 후타바의 이야기는 결코 둘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비밀을, 지독한 농담을 말이다. 


   언제까지고 되풀이되는 것


    인간이 결코 감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영원과 무한의 무게감은 지금 순간에 한없이 가볍게 측정되고, 이것이 촉발하는 비극 옆에서 다른 이들은 영원을 노래하며 우정을 약속한다. 약속으로 지켜지고 강제되는 비밀은 삶이 언젠가 터져버릴지 모른다는 긴장을 배경음악으로 삽입한다. 

   『치이카와』의 세계에서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은 영원의 비극과 영원에의 신뢰가 떼어낼 수 없게 밀착되어 있다는 역설 그리고 그 역설을 가리려는 절박한 시도 밖에는 없다. 언제까지나 함께라고 영원한 우정을 노래하는 작고 귀여운 것들 사이엔 찰나의 감정으로 오독되는 순간 즉발하는 지뢰가 숨어있다. 원작 만화가이자『치이카와』각본가인 나가노는 지뢰밭을 세계의 메타포로 삼는다. 이 비유법은 아주 지독하고 커다란 비밀이 되고, 무한과 영원을 가벼이 욕망하는 자들의 우스운 농담이 된다. 우리는 두 손에 영화가 가르쳐준 역설과 앞으로의 여정을 버티게 해줄 진통제로서의 귀여움을 쥐고 모순과 긴장감으로 가득 찬 역설의 체현이 되어 집으로 향한다. 되풀이되는 것 리스트에 새로이 추가된 '무섭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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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비
  • 2026-10-04
모이의 운명: 『옥수수와 나』 (김영하, 2011)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죽겠습니다. _ 소설집『오직 두 사람』, 113p., 문학동네 편리하게 해석한다면 이렇다. 옥수수 = 나. 옥수수를 쪼아먹는 닭 = 출판사 사장 내외. 작가와 편집자는 마감에 시달리고 싶지 않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은 기한 내에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하고, 반드시 소비되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창작자가 느끼는 압박은 모이 시점에서 닭이 눈앞에 있는 것과 같다. 출판부(닭)가 작가(나=옥수수)를 ‘쪼아대는’ 것이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169p.) 중얼대지만 잡아 먹힐 것 같은 생존의 불안을 일상적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나’는 옥수수다. 그건 단지 출판계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 전반은 마감에 맞추어 빨리 빨리, 효율적으로, 생산적으로, 성실하게, 신 들린 것 같은 폭발적인 집중력으로 일들을 처리하라고 인간들을 쪼아대고 있다. 교육도 시장의 요구를 반영하는데,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는 성실한 산업 역군을 양성하는 전일(全日)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했다. 작품 속에서 작가인 '나'는 딸의 뒷바라지를 하려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고, 딱히 다른 재주가 없는 ‘나’는 써야만 한다. 그런데 글이 안 나온다. 원고료를 지급했는데 마감일이 훌쩍 지나도 산출물이 없는 것에 대해서 출판사측은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그러면 '나'는 민법에 따라 금전적 손해배상의 의무를 지게 될 것이고 더불어 '사기죄'로 형사 재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월스트리트 금융계 출신 출판사 사장을 만난 뒤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막 써버린다. 서사 구조의 개연성, 인물의 성격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말자. 한 문장 한 문장에 정성을 들이지 말자. 이미 쓴 글 되돌아보지도 말자.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마감과 효율, 생산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에라 모르겠다’, ‘신경 꺼’, ‘너무 공들이지 마’, ‘대충대충 해’의 정신을 학습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작품 속 인물들과 현실 세계 사람들이 내면화한 메시지를 나의 언어로 재구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오랜 시간 몰두하지 마. 천착하지 마. 시간이 아깝지도 않니? 그런 자잘한 골몰은 접고 거칠게 획을 그어가야 해. 그렇게 다들 계약을 지키며 살아가는 거야. 왜 작가들은 자꾸 채무를 불이행하니? 결국 인생의 핵심적 요소는 생존(돈)과 생식(섹스)가 아니겠는가. 일을 ‘쳐내는’ 감각으로 빠르게 과제를 ‘마감’했다면, 너는 비로소 잘 시간을 확보할 수 있고, 게다가 그런 감각은 곧 인류가 숭배해온 거친 ‘남성성’과도 유사하므로 '생산성이 좋은' 사람이 '광포한 섹스'(150p.)도 잘 하는 거야. 이 작품은 쟁취의 감각, 온라인 게임하는 감각, 경영학, 세상물정, 똑부러짐 같은 것들과 멀다고 여겨지는 문인조차 그러한 지배적 사회질서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을 인생이라는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작가라고 믿으며, 자신이 사회구조적으로 결정되는 “종속변수”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행동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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