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에세이_<시와 아침>
- 작성자 미우
- 작성일 202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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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의 구성요소
T.S ELIOT의 시론에 의하면, 시에는 세 가지 목소리가 있다. 제1의 목소리는 시인이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리이다. 제2의 목소리는 수의 다소를 불문하고 청중에게 얘기하는 목소리이다. 제3의 목소리는 시인이 극 중 인물을 창작하여, 하나의 상상 속의 인물이 또 하나의 상상 속의 인물에게 말하는 목소리다. 만일 저자가 조금도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화려한 수사를 쓴다 해도 결과는 시가 아니다. 시인이 아무 할 말도 없으면서 무언가 할 말이 있다고 자기 설득을 할 때 시는 최악의 위조품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시론을 인용한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시의 정의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시는 연과 행, 단어와 문장, 생략과 비약, 변주, 운율, 리듬, 묘사와 상징의 언어이지만, 그것은 결국 언어일 뿐. 우리의 작품이 시가 되려면 시를 쓰는 작가만의 시선이 시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겪은 일, 내가 본 세상, 나만의 시선, 내가 생각하는 세계의 통점. 그런 것들로 시는 이루어져 있다.
2. 시의 규칙
구성된 시를 어떻게 체계화할 수 있을까. 우선 시란 무엇일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시는 거대하면서도 작다. 우주이면서 개인이다. 하나의 딸기에서도 썩어가는 거대한 세계를 봄과 동시에 타인이다. 나는 이 형체도 목소리도 이름도 눈도 없는 것을 가장 오래 꿈꿔왔다. 거기에는 어떠한 자부심도 없다. 내가 없어도 시는 계속되고 시인들은 죽지 않고 계속해서 태어난다. 그러니 시를 쓴다는 건 내 손 위에 글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내려온 시의 숨을 나도 잠깐 호흡하는 것이다.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나를 쓰는 거라고 누군가 말했었는데, 나는 시에게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서도, 시의 언어를 빌려야 내가 되는 기분이다.
키 작은 자야
키 작은 자야
사랑이 뭘까?
박연준의 <사랑은 죽은 이빨>의 첫 연이다. 박연준 시인의 시를 처음 읽은 건 작년 여름, 선생님이 준 발제 과제였다. 시인을 처음 만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나는 이 시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샤워를 하면서, 침대에 누울 때, 친구의 전화를 받으러 기숙사 복도로 나오고, 샤워 바구니를 든 여자애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걸 볼 때도. 키 작은 자야 키 작은 자야. 사랑이 뭘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시를 읽고, 사유하는 우리는 영원한 ‘키 작은 자’ 일 것이다. 우리는 늘 세계를 등에 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 왈曰; 그게 뭐든 나는 미끄럼틀 아래에서 배웠네 내려오는 것들에게 치이고 차이면서
<사랑은 죽은 이빨>의 다음 연이다. 옳고 곧은 것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 내려오는 것들에게 치이고 차이면서 배우는 것. 시는 구불거리는 현상에서 곧게 서 있는 하나의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시는 우리에게 혼돈으로 찾아온다. 이것을 사유와 문장, 표현으로 질서화시키는 것이 시의 규칙이다.
고등학교에 오고, ‘언제 이렇게 시를 열정적으로 써보겠냐’라는 이야기를 동아리 친구들과 나누곤 했다. 언제 또 우리가 새벽에 함께 노트북을 열고 밤새 시를 쓸까. 시 때문에 동경하고 질투하는 날이 또 올까. 온종일 시만 생각하는 날들이 또 있을까. 시를 찬양하지만, 동시에 시 쓰는 일을 가장 멀리 미루는 날이 우리 앞에 얼마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나는 시를 사랑하는 건지 시로 묶인 아이들을 사랑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내 곁에 시를 쓰는 친구들이 없어도, 내 언어가 일정한 리듬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데 시가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면 시는 무엇이지? 시라고 할 수 있을까.
3. 시=타인
나에게 시가 타인인 이유는 여기서 비롯한다. 시를 모르겠다. 시집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이 셀 수 없고, 아름다운 문장은 어떻게 쓰는지, 시는 무엇인지,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른다는 것의 동음어는 궁금하다는 것이다. 시가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그렇기에 시가 궁금하고 알고 싶어진다. 우리는 무언가를 알 때 그 개념에 대해 깨닫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거나 새로운 전공을 공부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일이고, 기존에 나에게 있던 배경 지식에 접목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시는 영원히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결론짓는 것이 아닌 시를 생각할 땐 늘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될 수 있다. 그것이 나의 시이자 틀이다. 나는 시라는 창구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아주 개인적인 시가 되는데 괜찮은 걸까. 내 시를 아무도 읽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으면서도, 딱 한사람에게라도 읽히고 싶다. 잊혀지지 않고 싶다. 사람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과 거리가 없어지면 정말로 죽듯, 시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그건 시의 죽음이다. 나도 시도 죽고 싶지 않다.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죽음은 더 이상 흘러갈 수 없는 것일까? 흐른다는 것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걸까?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흐를 수 있을까, 나아간다는 것은 극복인지 멀어지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러던 중 나희덕 시인의 <가능주의자>를 읽었다. 「흐르다」에서 시인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흐르다, 라는 동사는 흐르지 못한다는 것을
-「흐르다」부분
왜냐하면, 결국 흐름은 멈추기 때문이다. 흐르는 것은 어디론가 도달하기 위함이고 그곳이 어디인지 간에 젊음과 사랑과 우정은 죽음 앞에, 혹은 죽음을 압도하는 것에 고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에 있는 것은 기억일지도 모른다. 죽음 또한 남은 이들에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결국 시는 좋든 싫든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는 행위며 읽음이 멈추는 순간 시 또한 사라짐을 뜻한다.
4. 시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그러므로, 시가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시가 죽음에 대한 간절한 반항에서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모두 세계를 밀어내는 중이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이미 알지만, 나도 한번 말을 하고 싶어서. 이것은 욕망이다. 이것은 어쩌면 욕망보다 이전에 생겨났다. 시는 이 지점에서 태어난다. 감각과 통찰, 사유이기 전에 시선에서 태어난다. 의지와 상관없이 잠에서 깨어나듯,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기점에서 생긴다. 눈을 뜨고 보기 전에 인식하는 것이다.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고 물을 마시기 전에, 잠에서 깬 감각을 느끼지 않고 인식할 때. 쏟아지는 잠을 느끼기 전, 찰나의 순간처럼. 시는 눈을 감고도 얼마나 볼 수 있는지 시험한다. 예민하게 리듬을 타라고 속삭인다. 이 세계에 숨지도 말고 뒤처지지도 말라고 얘기한다. 세계를 인식해야한다. 그러나 무슨 수로 세계를 인식한단 말인가. 한 사람에게는 저마다 하나의 우주가 있고 우리는 옆에서 숨을 쉬며 잠을 자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내가 무슨 수로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볼 수 있을까. 사랑은 독자적이기 때문에 고유한 가치가 있는데,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므로, 시란
‘시란 머물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집을 짓는 것’ - 김연덕 시인
김연덕 시인이 말했듯, 시는 머물 수 없으므로 결국 변하고 말 것들을 위한 집이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은 변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의 통점도 언젠가는 아물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땐 아물지 않고 벌어지는 상처가 있는 것 같다. 나를 하염없이 낮은 곳으로 이끌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들. 예를 들면, 21세기에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대체하는 시대가 왔음에도 여전히 굶어 죽는 아이가 있고 거리 어디에나 CCTV를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속이 곪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세상의 중심이 있다면 반드시 모퉁이도 존재한다는 것. 문학의 시선은 곧 모퉁이로 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곳에서 시는 몸을 가진다.
5. 시의 사춘기
태어나 몸을 가진 시. 이 다음으로 시가 이야기하는 사춘기란 무엇일까, 김행숙 시인의 <오늘밤에도>와 박상수 시인의 <18세>를 비교해보았다.
오늘밤에도 소년들 소녀들 전화를 한다. 오늘밤에도 하늘은 푸르스름하고 해는 떠오르지 않는다. 소년들 소녀들 오늘밤에도 총총하다.
(...중략)
12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소년은 전화를 한다. 난 달리지 않을 거야. 달려가서 누군가를 만나고 덜컥,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난 오토바이족을 동경하지도 않고 여자애를 엉덩이에 붙이고 싶지도 않아. 나는 무섭게 세상을 쏘아보지 않지. 그런 눈빛은 이제 아주 지겨워.
(...중략)
그 몇초에 대해 오늘밤에도 명상하는 소년들 소녀들 전화를 한다. 오늘밤에도 쉽게 깊어진다. 우리는 어디서도 만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하면 오늘밤이 아주 달콤해지지.
어떤 날은 종일 스탠드에 앉아 운동부 애들이 빳다 맞는 것을 보았다 옥상으로 가는 계단은 막혀있었다 철문 앞에 쪼그려앉아 담배를 피우고 담배가 떨어지면 문밖의 바람 소릴 생각했다
(...중략)
경박하게 나는, 옥상에 대해 생각했다
(...중략)
나는 히히덕거리며 옥상에 돌을 던졌다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강아지 흉내를 내었다 자꾸만 흔들리는 바람의 소리를 생각했다
시 속에서 사춘기는 담배를 피우며 회의적인 태도로 가만히 앉아있는 소년을 떠올리게 한다. 경박하게 옥상에 대해 생각하며, 강아지 흉내를 낸다. 열여덟의 불안과 환상, 권태로움. 그러나 동시에 오토바이족을 동경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덜컥 임신시키지도 않는다. 불안이 꼭 방황으로 이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학의 사춘기란 자신의 불안을 과감하게 드러내면서, 그것이 꼭 세상 안에서 죽고, 멸망하지 않아도 좋음을 나타낸다. 그로 인해 시인은 영원히 사춘기일수 있다. 이것은 내가 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행숙 시인은 사춘기를 겪은지 30년이 지난 후 사춘기라는 시집을 냈다. 열여덟이 지나도 열여덟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시의 고유한 아름다움이다.
6. 결론
결국 나는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그 대신 시를 존재로 인식하여 관찰하였다. 나는 아무도 다치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는 세계를 꿈꾼다. 불가능한 일을 알고 있지만, 문학은 열이 끓는 아이의 이마를 짚는 부모의 손처럼 언제나 조심스럽고 다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시를 쓸 때는 늘 기도하는 마음이다. 시는 알 수 없기에, 미지의 영역이며, 세계를 사랑해보겠다는 용기를 가졌다. 어느 골목에서도 우는 이를 찾을 수 없고 사라지는 소녀들과 배고픈 아이가 없는 세계를 꿈꾸지만, 나에게 여름은 맑고 청량함보단 철물점의 쇠냄새가 쉽게 퍼지던 거리처럼, 결국 시를 쓸 때는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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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님 안녕하세요. 시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담은 글 잘 보았습니다. T. S. 엘리엇의 시론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해 여러 시편과 시에 대한 시인의 말 등을 인용하며 스스로가 시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술하고자 노력한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제목에 ‘에세이’라는 표현을 쓴 것처럼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을 소재를 개인적인 이야기와 엮어 편안하게 풀어나가고자 한 점이 좋았어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용함으로써 그러한 생각들이 개인적인 것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법한 영역으로 확장을 시도한 것도 괜찮았습니다. 다만 조금씩 부정확해 보이거나 다듬으면 좋을 것 같은 문장들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구성된 시를 어떻게 체계화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의 경우, ‘구성된 시’라는 것이 이미 ‘시로서 구성을 마친, 즉 완성된 시’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시를 구성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호한 지점에서 그것의 체계화를 묻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마도 ‘어떻게 체계화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되려면 후자의 의미여야 하는데, 그렇다면 ‘구성된’이 아니라 ‘시의 구성을 통해’와 같은 형태로 말을 바꾸어야 하겠죠. 만약 전자의 의미로 쓴 것이라면, ’이미 만들어진 시‘를 다시 체계화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서술해야 할 터입니다. 시간을 두고 퇴고하는 연습을 한다면 보다 좋은 글을 쓰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제목에 ’시와 아침‘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이 무엇일까요? 어째서 ’아침’이 쓰이게 된 것인지 찾지를 못했어요. 항상 건강한 글쓰기 생활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김태선 안녕하세요 멘토님! 자세하고 정성 가득한 피드백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부정확한 표현들이 보이네요. 계속해서 퇴고하고, 고민해보겠습니다. 주신 질문에 답을 해보자면, 먼저 제목을 짓기 전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 걸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저를 대표하는 게 시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시를 대표할 제목을 생각하려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저에게 시란 무슨 존재일까 고민했습니다. 문학은 저에게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어주는 친구였습니다. 절대로 더렵혀지지 않는, 절대로 꺼지지 않는 빛이 문학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여러 날들을 지나, 결국 다시 글을 쓰게 된 지금처럼 아무리 포기한다 하더라도 아침이 밝듯 태양이 떠오르듯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의 시를 대표할 수 있는 단어인 아침을 제목에 두었습니다. 이렇게 댓글이 아닌 글 속에서 의도를 담을 수 있도록..! 더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합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