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철학 논고' 를 읽고
- 작성자 Ted
- 작성일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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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겐 여기서 전달된 사고들의 진리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라고 보인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지금껏 과학, 철학, 수학, 예술 등에서 알고자 했던 그 본질적 진리를 그 자신이 찾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내가 이 책을 읽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는 결코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다만(그가 정말로 그 문제들의 근본적 답을 찾았는지와는 관계없이) 그가 이런 진리를 찾는데 어쨌거나 철학을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해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껏 인류가 제시한 세계 해석 방식으로서의 거의 모든 학문들은 그 시작을 철학에 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철학의 유물론적이고 경험론적인 한 분야가 분리된 것이고 심리학과 인문학은 최근에야 철학에서 분리되었으며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의학, 역사학 등도 고대에 철학에서 분리되었거나 적어도 고대 철학자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이 점에서 철학은 모든 학문의 시점이며 세계 해석 방식의 시초였다. 그리고 이후 많은 학문으로 나뉘어 지긴 했지만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이 다시금 철학적으로 발견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점에서 그의 주장이 진리에 대한 답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머리말에서 아마 이 책 속에 표현된 사고들을-또는 어쨌든 비슷한 사고들을-스스로 이미 언젠가 해본 사람만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이 책은 그러므로 교과서가 아니다.-이 책의 목적은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어떤 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면 달성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전에 그가 했던 사고들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하나의 문장도 그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만 그러한 생각을 전에 해본 적이 없어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의 문장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생각은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내가 이 책을 읽으며 해본 생각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이 책의 두번째 문장 1.1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나는 이것이 세계가 절대적이지 않고 오직 인식 가능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가 사용한 사물은 말하자면 물리적이고 실존하며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물질이며, 사실은 그 절대적으로 ‘보이는’ 사물을 인식하여 사고되고 정의된 사물이며 상대적이고 인식에 의한 것이다. 만약 세계가 절대적이라면 우리의 인식(여기서 인식은 사고를 포함한 모든 세계 해석 방식이라고 할 때)은 그저 절대적인 세계를 옆에서 관망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가 인식 가능한 세계로 한정될 때 인식은 세계에 앞서며 세계가 더 거대하거나 위대한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인식의 창조물일 수 있고, 설령 그것이 절대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이며 그 정당성은 또한 인식에 기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후자의 세계라는 것은 분명하다. 단편적인 예로 만약 우리가 어떤 사과를 보지 못하는데 한 맹인이 그 사과가 빨간색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인식이 세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분명해진다. 또한 만약 인식에 의해 세계가 조작되어 보여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인식을 의심할 수 없으며 또한 그로 인한 세계를 의심할 수 없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 세계가 절대적이라는 것은 오해이며 세계가 아닌 인식이 절대적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생각되고 느껴지는 모든 인식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 하늘을 보면서 ‘저건 하늘색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과 2차적으로 사고 될 수 있는 ‘저 하늘은 예쁘다’ 첫번째 인식이 두번째 인식보다 더 옳지 않으며 둘은 동등할 것이다.
2.012 논리에서는 아무것도 우연적이지 않다: 사물이 사태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그 사태의 가능성은 사물 속에 이미 선결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색다른 운명론처럼 받아들여졌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어떤 상황이나 세계 속에 그 상관관계 속에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실이 가지는 그 뜻이 이미 가능성의 형식을 선천적으로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선천적으로 뜻을 지니며 그 뜻이 가능성의 형식을 띠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경우 모든 가능성이 선천적이라는 뜻은 모든 가능성이 이미 사물 속에 고려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1.21 나머지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데 하나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 (옮긴이)주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가 사실들로 나뉠 때, 나뉜 것들 각각의 발생 여부가 서로 논리적으로 독립적인 단계(각 사실이 말하자면 논리적으로 ‘원자적’이 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나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러한 원자적 명제에 관한 주장이 다소 옳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가 생각하던 세계가 사물의 세계가 아닌 사실의 세계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기존에 전부라고 착각된 사물의 세계의 규칙을 사실의 세계에 대입하여 생각하는 것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의 세계가 더 정확한 명칭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그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로운 규칙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의 원자적 명제에 관한, 명제 즉 사실을 쪼갤 수 있고, 그렇게 쪼개어서 더 이상 쪼개어지지 않을 최소 단위가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은 내게는 다소 과학적이며 말하자면 약간은 유물론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에서 그의 주장과는 상반되게 모든 명제, 사실은 상하위어의 개념이 있지 않으며 각 개념이 공간적, 시간적으로 모두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창 밖을 보고 구름을 보았을 때 그 구름은 하나의 사실이다. 또한 내가 그 구름을 하며 그것으로 비롯되어 든 생각, 그러니까 ‘저 구름은 아름답다’와 같은 가치평가도 그 구름의 사실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다. 과연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사실로서의 구름은 ‘하얀색’, ‘저 구름은 아름답다’와 같은 더 세부적인 사실로 나누어지냐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으며 ‘구름’을 구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각각의 요소들은 또한 ‘구름’과 독립적이며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구성요소, 가령 하얀색을 (지금 보고 있는 구름과는 관계없이)떠올릴 때 우리가 떠올리는 그 하얀색은 현재 구름의 햐얀색이 아닌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대표적인 하얀색, 말하자면 주관적인 이데아의 하얀색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얀색을 떠올린 후 다시 구름을 보고 그 감각 자료로 오는 하얀색을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그 둘은 일치할 수 없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점에서 우리는 ‘하얀색’과 ‘구름의 하얀색(감각으로써 전해지는 하얀색)’이 분명히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리로 기존에 ‘구름’을 이룬다고 생각하였던 사실들이 그것과 구름의 그것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고, 그로 인해 그 개별적 사실들이 구름을 이루지 않는다고 알 수 있다. 또한 만약 누군가가 그럼에도 ‘구름’을 이루는 하얀색을 찾는다면 그것은 분명 자신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하얀색이 아닌 현재 감각자료로서 구름의 하얀색임을 알아야하고 이 경우 그것이 지금 눈 앞의 구름을 전제해야 함은 분명하며 그러므로 그 다른 사실을 처음의 사실로부터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만약 누군가가 ‘구름’이 하얀색과 같은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면(그리고 그러면서 구름이 오직 그것으로 이루어져 그 전체가 오직 이 개별적 사실들로만 이루어졌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불완전한 사실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구별될 수 있는 사실(가령 시간 단위로 감각자료 혹은 가치판단, 그로 인해 내가 느끼는 감정, 생각 등이 약간이나마 바뀔 수 있다)은 모두 독립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나는 그 각 사실들이 독립적일뿐더러 동등하다고 말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상하위어, 즉 사실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졌다는 것을 이유로 하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상하위어 관계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무, 잔디, 밀 등을 식물의 하위어라고 말할 때 그것의 상위어인 식물은 그들이 움직이지 않고 광합성을 하며 다세포 생물이라는 등의 공통점을 표한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하는 것은 분명 사물이 아닌 사실이기에 우리가 어떤 사실들이 이러한 공통점을 지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하나의 사실은 오직 그것의 일부로서의 다른 사실(물론 그것이 구성한다고 생각되는 사실을 전제하지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어떤 일부가 다른 것의 어떤 일부와 일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는 분명 그것이 유사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유사점만이 있다면(어떤 사실과 어떤 사실은 한 점에서는 닮고, 다른 점에서는 닮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 그 둘은 개별적이다.) 우리는 어떤 사실들에 대해 그것을 편의상 하나의 하위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 상하위어 개념은 오직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허황된 기호일 것이다. 나는 이점에서 언어의 모든 단어는 이러한 허황된 상위어적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각 단어는(설령 그것이 가장 세세한 규정을 가한다 하더라도) 모두 셀 수 없이 많은 사실들의 상위어이기 때문이다. 앞선 구름의 예를 가져 오자면 분명 구름의 하얀색은 주관적 이데아적 하얀색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하얀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점에서 각 단어는 모두 그것이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상황의 개별적 사실들의 유사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편의를 위해 사용된 (그러나 허황된) 상위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2.013 모든 사물은 말하자면 가능한 사태들의 공간 속에 있다. 나는 이 공간을 텅 비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물을 그 공간 없이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이 문장이 사고의 한계를 명확히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모든 공간은 그것에 관해 사고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자신 안에 사고를 가둔다. 예를 들어 색깔의 공간을 생각할 때 나는 그 공간 속의 사물로서의 빨강, 노랑, 주황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 색깔 공간이 없을 때의 이러한 색들을 생각할 수도 물론 없으며 또 그 색깔 공간이 존하지 않을때의 어떠한 색도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더 나아가 모든 공간의 본질적인 것이 사물의 존재를 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색깔 공간은 어떤 색의 존재를 표하고, 수의 공간은 각 수의 존재를 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공간이 없을 때 그 공간 속 사물은 존재의 의미를 잃기에 그것을 생각할 수 없다. 또 나는 존재 조차도 하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공간 속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적으로 이 공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누군가는 일종의 반례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어떠한 사물도 없을 때 내 앞에 한자루의 연필이 놓여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반론이 결코 옳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비존재가 아닌 존재의 가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점에서 그는 비존재를 존재적 방식으로 사고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색다른 존재적 방식으로 비존재를 논리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고 전에 생각했다. ‘나는 비존재에 대해서 크게 두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1)비존재는 존하지 않는다. 2)비존재는 존한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모순되는 것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먼저 비존재가 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존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두번째 경우 비존재가 존한다면 이는 이미 있기에 비존재의 상태일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지금 돌아보면 지극히 존재적 접근 방식임에 분명한 것이 왜냐면 논리(혹은 사고)는 이미 존재의 공간 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이는 분명히 순환논법적이며 또 자기 모순적이기에(이는 ‘사과는 사과이기에 사과이다.’ 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결국 이것이 가지는 확실성, 중요도는 0이 된다. 그렇기에 (논리, 인식 등을 포함한)존재의 사고 방식 속에서 존재를 합리화하거나 존재 이외의 것을 부정하려는 모든 시도가 (그것이 존재의 공간 내에서 이뤄지는 한)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존재에 대해 의미 있는 논의를 하려면 분명 비존재의 방식으로 사고 같은 것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우리가 가장 본질적인 공간에서(또 그와 연관된 약간 표상적인 모든 공간에서) 그것을 정당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어떤 논의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모든 것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그러니까 부정으로서가 아니라 무의미로서 무지하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위 인용구와 관련하여 세계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만약에 위의 글처럼 어떤 사물에 대한 공간이 존재한다면 거기서 공간이 앞서는가, 혹은 사물이 앞서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경우 중요한 것은 공간이 새로 발견 혹은 발명되는 사실에 의해서 확장되는가, 아니면 사실이 세계에 의해서 그것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앞서 경우의 본질은 과연 모든 사실이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냐는 것인데 약간만 조사해봐도 이미 운명론이란 이름으로 그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는 과학적으로 시간과 공간조차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우주(사물로서의 세계로 그 범위를 축소할 때)에서만큼은 오히려 모든 것이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오히려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을 때 그 각 시간에 해당하는 공간이 어쨌거나 배치되어 있을 텐데 그 나열된 시간은 우주의 탄생부터 끝까지 무한할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사물로서의 세계로 세계를 한정하여 생각하지 않고, 사실로서의 세계로 보다 확장하여 생각했을 때는 오히려 세계보다 사실이 앞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장벽으로 세계의 기준을 보고 그것이 나중에 새로 발견된 사실에 의해 확장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세계 자체가 이미 일종의 그것들의 유사점만을 뜻하는 단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소 글이 주제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나는 어쨌거나 위 인용구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텅 빈 공간, 혹은 그 공간 속에서 그 밖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볼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속하지 않는 공간에 대해서만큼은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수의 공간에서(물론 그 광활한 수학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닌 그것의 극히 일부인 수직선을 상징적으로 이용해서) 텅 빈 공간으로서 0(zero)를 생각할 순 있겠지만 수의 공간이 없는 것(말하자면 ‘none’에 가까운 것)을 생각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2.17 그림의 현실을 그림의 방식으로-올바르게 또는 그르게-모사할 수 있기 위해 현실과 공유해야 하는 것이 그림의 모사 형식이다.
2.172 그러나 그림은 자신의 모사 형식은 모사할 수 없다; 그림은 그 모사 형식을 내보인다.
사실 이 모사형식과 그림에 관한 부분이 이 책에 나와있는 그의 주장 중 가장 유명한 주장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그 자체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각 단어가 앞에서 설명이 되었던 것이라서 마치 한 단어에 관한 앞선 한 문장이라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이해하기 쉽상이었다. 그래서 마치 외국어 문장을 해석할 때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중심 단어 몇 개의 뜻을 헷갈려 문장을 유추하기 조차 힘든 상태에 놓인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최근에 고등 국어를 공부하며 자습서를 공부할 때 소설에서의 인물 묘사, 서술 방식 등에서 언급된 ‘보여주기’와 ‘말하기’ 서술 방식을 들었을 때 그림과 현실이 공유하는 모사 형식이라는 것이 이런 거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보여주기’는 소설의 서술 방식 중 인물의 대사, 즉 큰 따옴표(“”)를 사용하여 인물의 성격 등을 간접적이고 독자가 유추할 수 있게 서술하는 것이고, ‘말하기’는 우리나라 고전소설처럼 비교적 단순한 소설에서 이용되는 형식으로 인물의 성격 등을 직접적으로 ‘그는 악하다’ 처럼 제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 나는 모사형식이 마치 소설 속 ‘보여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먼저 첫번째 인용문에서 나는 만약 소설에서 형식을 모사한다면 당연하게도 ‘말하기’ 보다는 ‘보여주기’가 더 알맞으며(현실엔 누군가의 성격이나 속마음을 말해주는 서술자는 없기 때문에) 실제로 현실과 분명히 매우 중요한 것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우리는 마치 다른 사람들의 삶의 일부를 보듯 소설을 감상한다. 또 그것은 분명히 그림과 같이 우리에게 무엇을 그려서 보여준다는 느낌을(마치 글로 그림을 그리는 듯이 생생하다) 주며, 분명히 그 매개체인 글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책에서 서술하듯 모사형식은 말해질 수 없는데 이는 이 서술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우리가 책 어린왕자에서 여우와 어린왕자의 대화 장면을 볼 때 우리는 그 장면을 오직 ‘보여주기’ 식으로만 진정성있는 방식으로 볼 수 있고, 진정한 뜻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막말로 만약 그 장면의 서술 방식이 ‘말하기’로 진행되어 여우와 어린왕자의 속마음을 제아무리 남김없이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두고 우리는 결코 기존의 장면과 그것이 같은 뜻을 지닌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장면은 ‘보여주기’식으로 서술되어 마땅했으며, 무언가 그 서술 방식 안에는 말할 수 없는 어떤 방식이 있음에 분명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두번째 인용구에서 나는 다시금 이것이 서술 방식 ‘보여주기’에서도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어떤 소설도 ‘보여주기’를 ‘보여주기’의 방식으로 독자에게 느끼게 할 순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에서 그가 그림에서 찾은 그 모사 형식과 내가 우연히 소설에서 발견한 ‘보여주기’가 신비성(그것이 말하거나 그려질 수 없는 것을 뜻한다면)의 면에서라도 약간이나마 유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3.11 우리는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명제의 기호(음성 기호 또는 문자 기호 등)를 가능한 상황의 투영으로서 이용한다. 그 투영 방법은 명제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아마도 기호가 절대적이거나 어떤 뜻을 필연적으로 함유하지 않음을 말하자면 언어의 자의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이 문장이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는데 나는 이 문장을 읽고는 그의 책(적어도 지금 이 책)이 마치 뜻을 생각하지 않고도 가능한 상황에 투영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 내 이해력이 부족하여 이 책을 잘못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틀림없지만 내게는 이 책의 모든 문장이 이해하기 전에 그저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말하자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이 알료사에게 종교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 신은 자신의 머리를 유클리드적으로, 또 3차원적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어쨌든 자신은 신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기에 받아들인다고 말한다(이 말의 진실성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마치 그의 신에 대한 의견과 같은 느낌으로 이 책에 내용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받아들일 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입장에서 이렇게 말하니 다소 합리화로 보이고, 이해도 못했으면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점에서 다소 오만해 보이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언젠가 이 책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이해력이 충분해지고 영리해지기를 바라본다.
4.46 진리 조건들의 가능한 집단들 중에는 극단적인 두 경우가 존재한다. 그 한 경우에 명제는 요소명제들의 진리 가능성들 전부에 대해서 참이다. 우리는 그 진리 조건들이 동어반복적이라고 말한다. 두번째 경우에 명제는 진리 가능성들 전부에 대해서 거짓이다: 그 진리 조건들은 모순적이다. 첫번째 경우에 우리는 그 명제를 동어반복이라고 부르고, 두번째 경우에 우리는 그 명제를 모순이라고 부른다.
4.464 동어반복의 참은 확실하고, 명제의 참은 가능하며, 모순의 참은 불가능하다. (확실하다,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확률론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등급 표시를 얻는다.)
먼저 여기서 제시되는 핵심 용어인 동어반복과 모순에 대해 책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서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동어반복은 무조건 참인 명제를 뜻하고, 모순은 무조건 거짓인 명제를 뜻한다. 여기서 그는 명제 기호 p와 부정 기호 ~, ‘A이거나 B이다’를 뜻하는V(A V B=A이거나 B이다.), ‘A이고 B이다’를 뜻하는 .을 사용하여 모순과 동어반복을 표현한다. 먼저 모순은 ‘p . ~p’이다. 이에 대해 예를 들면 이는 ‘내일은 비가 오고, 오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명제를 뜻한다. 다음으로 동어반복은 ‘p V ~p’로 같은 예시를 가져오면 ‘내일은 비가 오거나 오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명제를 뜻한다. 그는 여기서 동어반복은 모든 공간을 허용했기에 무조건 참이고, 모순은 모든 공간을 부정했기에 무조건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주장이 옳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오직 우리가 고려 가능한 사고의 영역 내에서만 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만약 동어 반복이 모든 것을 허용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 명제 내에서 고려되지 않고 있는 사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허용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p V ~p에서 동어반복은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허용했다(p는 말하자면 그 명제가 제시하는 공간 내의 것을 허용하고, ~p는 그 공간 외의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는 ‘우리가 미처 사고하지 못해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라는 사실을 사고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이 안에서 허용된다. 하지만 그 우리가 ‘미처 사고하지 못한 것’은 분명 그 안에 있지 않기에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동어반복이 모든 것을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증명된다. 그리고 모순도 같은 방식으로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P가 ~~p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의 논리 체제 내에서 허용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러한 식으로 분명히 우리가 고려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모든 것을 완벽하게 허용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허용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명제에 대하여 우리는 예의상(말하자면 논리적 공간 내에서) 그것을 동어반복이나 모순이라고 불러줄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의 절대적으로 참이라거나 절대적으로 거짓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사고와 논리를 확신할 수 없기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적은 글은 사실 근본적으로 논리를 부정하고 의심했기에 그렇기에 자신이 자신의 확실성을 부정했기에 말하자면 ‘거짓말쟁이의 역설’에 해당되며 분명 무의미하다. 그래서 나는 이것의 일종의 정당성 증명 등을 하기 위해 또 어쨌거나 분명한 모순인 모든 것의 확실성에 대한 부정이 왜 의미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 몇줄을 할애해 보고자 한다. ‘나’가 속하는 가장 근본적인 세계(혹은 공간)인 존재의 공간에서 내가 만약 비존재와 관련된 명제를 말한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전혀 의미가 없을 것이며 일종의 모순에 속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내가 존재와 관련된 명제를 말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은 그 정당성이 존재적 방식으로 옴을 전제하기에 결국에는 동어반복이며 순환논법으로 오류이고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을 말해도 결국은 존재의 공간(최소한 사고의 공간) 내에 있고, 그렇기에 그것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없을 때 어쨌거나 내가 무엇을 말하든 정당하지도 의미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에 만약 누군가가 “내가 지금까지 말했고, 말하고 있고, 말할 모든 것은 의미가 없으며, 나는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비록 그 자신에 대해 확실성을 스스로 내려놓고 있기에 그것의 정당성에 대해 논리적 이유로 설령 반론한다면 분명 그것은 또한 존재적, 논리적 공간 내에 있기에 그 또한 무의미하다고 누군가는 다시 말할 것이며 이러한 끝없는 무의미의 순환 속에서 첫번째 주장이 가령 전혀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은 정당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 참은 아니고 사실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저 옳지 않을까? 설령 그 모든 논리와 말이 철저히 사실이라는 것도 옳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그것이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알 수 없다는 것도 옳지 않을까?
2.0121 만일 그 자체로 홀로 존립할 수 있을 터인 사물에 어떤 상황이 나중에 가서 걸맞게 된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우연으로 보일 것이다. 사물들이 사태들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이 점은 이미 그 사물들 속에 놓여 있어야 한다. (논리적인 어떤 것은 단지–가능한-것일 수 없다. 논리는 모든 가능성 각각을 다루며, 모든 가능성들은 논리의 사실들이다.) 우리가 공간적 대상들을 결코 공간 밖에서, 시간적 대상들을 시간 밖에서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는 어떠한 대상도 그것과 다른 대상들과의 결합 가능성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대상을 사태라는 연합 속에서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러한 연합의 가능성 밖에서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이 다소 운명론적인 주장 혹은 가능성의 색다른 뜻을 제시하는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나는 가능성이 사실에게 부여된 일종의 뜻으로서 단순히 어떤 사태 속에 나타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아니라 가능성이 이미 사실에게 선천적으로 내제되어 그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도 분명히 사실의 뜻이라고 말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니까 가능성이 단순히 전체 경우의 수 분에 일어난 경우의 수로서 관측되는 게 아니라 어쨌거나 우리가 부르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일종의 형식으로서 사실이 가진다는 것이다. 내게는 그가 ‘이 사실은 이 사태에서 ~%의 확률로 일어날 것이다’가 아닌 ‘이 사실이 그 사태에 대해 지니는 가능성은 ~%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는 생각보다 많은 사고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데 가령 우리는 지금껏 불확실의 의미로 사용했던 이것을 오히려 선천적이고 운명적인 의미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종의 가능성에 대한 매우 의미 없어 보이는 조금의 뜻 변화는 실제로 내가 생각했던 가능성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부쉈다고 생각되며 실제로 이후에도 이러한 편견을 바로잡은 의미로 이후 책에서도 쓰였다고 생각한다. 이 주장이 흥미롭게 느껴진 것은 이것이 정말 특이한 운명론처럼 내게는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운명론은 ‘이것이 100%로 일어난다’의 느낌을 주었다면 그의 운명론은 가능성의 불확실성을 거의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오히려 선천적이고 확실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에 후반부에서 말했듯 어떠한 대상도 그것과 다른 대상들과의 결합 가능성을(사태 속에서 사물이 발생할 가능성으로 이해하였다)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가능성은 그 사실의 발현될 현상이 아닌 그 사실의 핵심적인 일부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4.003 철학적인 것들에 관해 씌어 있는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런 종류의 물음들에 대해 결코 대답할 수 없고, 다만 그것들의 무의미성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의 물음이나 명제들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의 언어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기인한다. (그것들은 선이 미보다 다소 동일한가 하는 물음과 같은 종류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문제들이 실제로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의 철학이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말이 앞서 말한 것과 어느정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앞서 어떤 명제가 그것이 뜻하는 바가 거짓이라면 그것은 거짓이지만 그것의 구성요소가 거짓이라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이를 생각할 때 나는 그의 주장이 철학의 요소인 언어논리가 거짓이기에 그것은 그 요소가 거짓이라는 점에서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언어 논리는 단순히 그 각 단어의 뜻을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일상적’ 문법과 그 속에 전제되는 수많은 논리들(알지도 못한 체 사용되는)에 맞추지 않고 ‘철학적’으로 그것을 분석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그의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에 차이점은 있겠지만 그는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앎의 용법에 대해 ‘나는 저것이 나무라는 것을 안다.’라는 명제는 일상적으로 설령 그 명제가 참이 아닐지라도, 그러니까 책에서 그가 말했듯 설령 그것이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생긴 착각이나 나의 환상이었을지라도 그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또 이후 이러한 것에 대한 의심에 대해 논하며 그는 자신이 그것을 의심해선 안되는 이유는 만약 자신이 그것을 의심한다면 나는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논리 체계를 의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며, 그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그가 철학적 명제를 무의미하다고 말한 이유가 일상적 용법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거나 의심해서는 안될 것을 의심해서 생긴 오류라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쓰고자 한다.
5.4731 자명성-이에 관해 러셀은 매우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은 언어 자체가 모든 논리적 결함을 방지한다는 단지 그 점으로 인해, 논리학에서는 없어도 되는 것이 될 수 있다.-논리가 선천적이라는 것은, 비논리적으로는 생각이 될 수 없다.
이는 논리학은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앞 문단의 중심문장과 큰 틀을 같이 한다. 나는 이 점에서는 단지 논리학 뿐 아니라 모든 학문이 자기 자신을 돌본다고 생각한다. 모든 학문은 모두 자신이 참임을 자신이 말하는데 예를 들어 과학에 대해 우리가 그것의 핵심인 인식을 의심하며 ‘인식은 어째서 참인가?’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다. ‘여기 해부학적으로 각 감각기관의 신경이 뇌로 연결된 것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이는 물론 과학적인 답변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는 약간의 오류로 보였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가령 수학의 어떤 공식을 증명할 때 우리가 증명 과정에서 그 공식을 사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그것이 옳은가를 물었을 때 그것이 옳다는 것을 전제하고 답변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며, 이는 결국에는 잘 감춰진 순환논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질문이 논리 대해서 행해질 때만큼은 그것이 순환논법임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만약 누군가 ‘논리가 왜 참인가?’라고 물었을 때 어떤 식으로 논리적 답변을 하든 그것은 비록 순환논법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타당하지 않다면 애초에 처음에 제기된 질문이 무의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경우 이러한 반론은 무의미한 질의응답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논리에 대해 제기된 모든 질문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며 또 같은 논리의 방식으로 다시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적어도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첫번째 질문이 옳은지를 적어도 확인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논리는 어쨌거나 옳아보인다.
5.641 그러므로 철학에서 자아에 관해 비-심리학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뜻이 실제로 존재한다. 자아는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라는 점을 통해 철학에 들어온다. 철학적 자아는 인간이 아니며, 인간 신체가 아니며, 또는 심리학이 다루는 인간 영혼도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주체, 세계의 한계-세계의 일부가 아니라-이다.
어쩌면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 보다 “세계는 나다”가 더 이것의 이해를 돕기에 유용한 표현일 것 같다. 물론 여기서 “세계는 나다”라는 말은 은유법으로서 쓰인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장은 어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그저 말 그대로 세계가 나이며 적어도 나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그가 맨 앞에서 말한 세계가 사실의 총체라는 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만약 모든 것이 그저 (자신의 주관적인)사실일 때, 절대적이라고 믿던 사물은 사실 우리의 인식이고,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논리조차도 그저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 타당성을 확신할 수 없을 때 내 사고는 ‘나’에 의해 한정 지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생각한 바를 써보니 마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주장과 다소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해석한 바에 따르면 이 책이 말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주장보다는 다소 적지만 더 확실한 부분을 말하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는 그저 자신의 사고는 자아에 의해서(사실이 세계에 의해 한정 지어지 듯) 존재하지만 또 그것에 한계가 된다고 주장하지만 데카르트는 그렇기에 세계는 설령 거짓이라도 어떤 경우라도 자신(인용문에서처럼 물리적인 의미 등등이 아닌 자신)은, 그러니까 자신의 사고는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인용구에서 특히 ‘세계의 한계’라는 주장에 집중해보았다. 나는 그의 이 주장이 일종의 유아주의적 주장으로 들렸는데 왜냐하면 사실이 자신에 의해 한정될 때 내 세계에는 내가 아는 것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점에서 조금 더 앞서 내용과 연계하여 생각해보았는데 이러한 그의 ‘세계 한계’에 관한 주장은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가령 내가 지구를 알지만 그 안에 어떤 공간, 가령 내가 유럽의 어떤 시골의 한 지역을 알지 못할 때 분명 세계에는 지구는 존재하지만 그 유럽의 한 시골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러한 주장을 한다면 정말로 이상하게 들릴 것인데 왜냐하면 만약 내가 처음에는 그러한 마을이 있다는 것을 몰랐지만 조사를 통해 혹은 여행을 통해 그러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느냐는 등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고, 이러한 예시 속에서 세계의 뜻을 확실히 짐작하기 힘들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앞서 그가 제시한 ‘사물이 사태 속에 나타날 가능성’이 ‘사물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내가 설령 그 사실을 몰랐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어쨌거나 세계에 속하게 될 가능성을 앞서 말했듯 그 사실이 선천적으로 일종의 운명론적으로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경우 모든 사실들은 이러한 형식 하에 모두 세계에 속한다는(존재하게 될 모든 사실은 결정되 있고, 존재한다) 뜻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6.522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 내가 이러한 그의 윤리적 문제들에 관한 언급과 신비주의에 관한 말들을 접했을 때 나는 형이상학적이고, 논리학적이고, 어쨌든 매우 깊고 어려운 철학을 논하다가 갑자기 주제가 바뀐 듯한 느낌이 들어 당황했었고, 이해하려고 잘 시도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비트겐슈타인 평전과 그가 인상 깊게 읽었다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아 그 내용을 여기에 써보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에게 있어 신비스러운 것은 말해질 수 없고, 단지 보여질 수 있는 것 가령 종교, 도덕, 아름다움 등의 것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말해지는 방식으로 다뤄질 수도, 또 그것을 시도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신비스러운 것들은 말해질 수 있는 것 밖에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타당하지만 그것은 말해질 수 있는 어떤 원리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자신에 의해서 타당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어떤 것의 수단이 아니라 오직 목적이기만 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너는 그것을 해야한다”라는 도덕적 명령은 우리에게 그것이 참이라거나 거짓이라거나 혹은 그것의 유래가 어떻거나에 관계없이 그것은 옳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내가 어떤 미술 작품, 가령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보고 내가 ‘이 작품은 아름답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을 같이 본 누군가는 자신도 그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봤다면 이에 동감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며 설령 그렇게 물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아름다움을 말할 순 있지만 그가 아름다움을 느끼게, 아름다움을 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듯 신비스러운 것은 그것이 참인지와는 관계 없이 타당하고, 차라리 그것에 대한 말해질 수 있는 증거와는 반비례로 그 타당성이 변화한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가령 말해질 수 있는 방식으로 입증되는 것을 참이고, 말해질 수 없기에 타당한 것을 옳다고 말할 때 신비스러운 것은 참은 아닐지 모르지만 옳다는 것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신비스러운 것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그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나는 이것을 어긴 모습을, 그리고 당장은 보이지 않겠지만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폐해를 책에서 약간이나마 엿봤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과 알료사의 대화 중 이반의 태도였다. 이반은 당시 러시아의 회의주의적 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수도사인 동생 알료사에게 질문을 제기한다. 이반은 하느님의 나라가 오면 모두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 지상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을 이야기 하며 무슨 권리로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죽인 영주를 용서하고, 하느님이 그 끔찍한 범죄자들을 용서하냐면서 자신은 만약 하느님의 나라에 입장하기 위한 값으로 그렇게 많은 고통을 지불해야 한다면 겸손히 그 입장권을 내려놓겠다고 말한다. 또 그는 종교가 너무나 강한 자들, 그러니까 스토아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억제하고, 선악과를 베어 물어 수많은 유혹 속에도 자신을 유혹에서 구하고, 현명한 선택을 하는 소수의 자들만을 원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약한 다수를 위해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책임지는 그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스스로 버거워하고, 이를 덜어줄 우상을 찾을 때 자신이 그 우상을 자처하고, 그들의 자유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말한다. (약간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이겠지만 니체가 정말로 비판한 약자는 순전히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면에서 부족한 자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자신이 짊어지는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해내는 자들을 가리켰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짐을 지는 낙타 이후에 그 모든 의무를 격파하는 사자와 초인의 단계도 있으니 어쩌면 내 이해력보다 훨씬 높은 것을 말해 내가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이러한 이반의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주장을 읽었을 때 내게 든 생각은 ‘궤변’이었다. 물론 내가 당시에 이반의 위치에 있었다면 부패와 대학살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수많은 이들의 비명을 외면하는 종교를 비판하고자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내가 봤을 때 그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볼셰비키즘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이러한 종교를 버린 볼셰비키즘은 어떤 종교적 죄책감도 없이 수 만명을 숙청하고, 고문했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인식의 변화로 무너져 내린 종교의 자리에는 더 견고한 인식에 관한 ‘믿음’인 과학이 들어섰고, 그 결과 신비성은 외면 당하고, 모든 가치가 마치 수단인 양 여겨지는 사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현재에 모든 가치는 돈을 위한 수단이지만 그 돈조차도 다른 모든 것을 위한 수단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 또 그 신비성과 진지함이 무너진 자리에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때의 종교를 시작으로 모든 신비스러운 것들은 무너져 내렸다. 그 결과 현재 종교가 옳다는 사실은 그것이 참이 아니라는 무의미한 말로 묻혀버렸고,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결국 사치품 이상의 뜻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으며 도덕은 오직 쾌락과 고통의 저울질이 되버렸고, 그마저도 가끔은 도덕이 오직 그것이 깨지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적이고 퇴폐적인 순간적 쾌락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헷갈릴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이고, 매우 말할 수 있는 참인 현대사회에 대한 묘사로 신비스러운 것에 대한 비난에 대해 반박하는 것은 물론 옳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러한 질문이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일 것이다.
6.54 나의 이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으로 인해 뜻풀이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나의 명제들을 딛고서-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 문장을 인용한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먼저 이 문장은 실제로 이 책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장으로서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고, 어떤 글의 마지막 말로 사용하기에 알맞고 정말로 멋있는 문장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이 문장을 읽다가 갑자기 비트겐슈타인 평전과 관련하여 이 문장의 뜻을 짐작해보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다룬 비트겐슈타인 평전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어렸을 때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책인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에 대해 이렇게 그 책 전체에 ~(부정기호)를 붙이면 진리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인용구에서 그는 이 책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가 앞서 주장한 것처럼(비록 단 한번 그다지 강조하지 않고 말하긴 했지만) 한 사실은 그것이 거짓일 때 거짓이고, 그 구성요소도 거짓일 때 무의미하다. 이 경우 이 책을 이루는 것은 수십 혹은 수백개의 명제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이 책을 이해했다면 그는 그가 성과 성격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그 앞에 조심스럽게 ~를 붙여주길, 각 문장이 거짓임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책이 무의미하다고 말해 주길 바랐던 것이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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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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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https://open.kakao.com/o/gCgPKj8g여기로 들어오시면 되요!!!
제목이 너무 특이해서 들어와 봤는데...읽어보니 너무 어렵더라고요....근데 이글을 쓰신 분이 중3이라니...넘 대단하신거 아니에요? Ted님 글이 기대되네요!!!
@역사 좋앙 감사합니다. 그리고 링크도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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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 대단한데요 다만 좀 가독성이나 폰트를 좀 수정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글틴 톡방도 와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기능사 조언 감사합니다. 사실 혼자 재미로 쓴 독후감을 한번 올려본거라 가독성이나 폰트 같이 부족한 점이 한둘이 아닌데 다음번에는 약간의 수정을 가해보려고요. 그나저나 저는 이 사이트를 처음 이용해봐서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글틴 톡방이 안보이더라고요. 혹시 글틴 톡방이 어떤 건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