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빈의 예술가들(‘비엔나 1900’ 전시를 보고)
- 작성자 Ted
- 작성일 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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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어떤 한 문화 전체의 서사시적 저술을 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이 문화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의 작품들 속에서, 그러니까 이 문화의 종말이 단지 예견될 수 있었을 뿐인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그것을 기술할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문구이다. 이를 인용한 까닭은 1900년대 당시의 예술이 이러한 가치의 종말에 대한 예언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2월 말 무렵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전시한 그림 전인 ‘비엔나 1900’을 볼 수 있었다. 이 그림전은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에 활동하던 빈 분리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룬 전시였다. 앞으로 서술하겠지만 나는 이 전시를 조금은 분석적으로 바라보며 빈 분리파의 화가들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의 ‘예언’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미술 사조에는 인상주의, 큐비즘 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로 활동한 화가들로는 이 전시의 중심 주제인 빈 분리파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하고, 통일성이 없어 보이는 미술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나는 그들의 공통점이 그 통일성을 타파한다는점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상주의는 세계의 단순한 묘사에서 예술가의 눈에 비친 세계로, 큐비즘은 표상적인 사물에서 사물의 본질로, 빈 분리파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기존의 예술에서 추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예술로의 변화를 꾀하였다. 가히 그들의 그림은 혁명적이며 기존의 화풍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은 프랑스 대혁명이나 르네상스의 문화혁명과는 달리 역동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들의 혁명은 열정이기 보다는 체념이며 환희가 아니라 차라리 심연의 고뇌이다. 이러한 점에서 내게는 이런 미술의 변화가 기술에게 그 가치를 위협받는 예술의 처절한 노력이자 앞서 인용문에서의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느껴졌다.
먼저 당시 미술 사조와 특징을 어렴풋이나마 분석해보고자 한다. 인상주의는 절대적인 세계의 사물 대신 상대적인 인식된 사물을 말한다. 사물은 빛과 보는 각도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상주의는 어차피 그것이 상대적이라면 눈에 포착된 바로 그 순간에 그리자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한편 입체주의, 즉 큐비즘은 그 시작을 기술의 발달에 둔다. 왜냐하면 큐비즘은 그림의 사실 묘사의 기능은 발전된 기술의 산물인 카메라와 같은 기계가 더 잘 수행하므로 미술은 다른 목적, 즉 예술가의 자기 표현과 사물의 본질 파악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미술 사조가 예술가 자신의 눈에 비친 사물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예술가가 주체적인 실존자로서 세상의 복제품을 만드는데 만족하지 않고, 그림을 통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고자 한 실존주의적 철학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꼭 미술 사조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유명한 미술가들은 대부분 실존적 색채를 띤다. 가령 내가 미술관에서 본 실레와 클림트가 그러하다. 그 둘은 정말이지 셀 수 없이 많은 누드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들의 누드화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자 했던 르네상스의 누드화하고는 결이 다르다. 그들은 인물에 대해 가능한 한 최소한의 부분을 그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이 그린 인물을 보다 보면 마치 그 인물이 뼈 위에 살가죽을 옷가지처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정도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마치 한 인간을 다른 사치품이나 외적인 아름다움을 제거하고 그 인간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존하는 인간 자체를 그린 것처럼 말이다. 실레와 클림트뿐 아니라 당시의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한 박물관을 가면 정말이지 ‘실존주의’라는 키워드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 미술사에서 이런 실존주의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나는 이런 미술의 실존주의가 기술의 발전으로 예술에 대해서조차도 유물론적으로만 논하려는 시대에게 직관적으로, 그저 자신의 아름다움을 봐달라는 요구였지 않았을까 한다. 예술적 아름다움은 그리스 시대부터 선함, 총명함의 동의어로 쓰였을 정도로 불가침적이고, 위엄있는 가치였다. 그러나 근대에 기술이 발전하고 회의주의가 팽배하며 예술은 그 가치를 과학이라는 이름의 색안경을 낀 대중들에게 평가 받게 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당연히도 예술의 가치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졌고, 예술에게 유용성의 잣대를 대보느라 그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기 말 빈의 예술가들은 점차 예술에 대한 존경이 사라져가는 시대 속에서 예술이 완전히 핍박 받는 현대 시대를 예상했을 것이며, 근대의 유물론이 현대의 물질만능주의로 이어질 것임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앞으로 더 많은 비판이 가해질 보수적 예술에서 탈피하고, 실존주의를 예술에 투영함으로서 목적에 앞서는 예술의 본질, 즉 아름다움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기술의 시대이며, 오만한 회의주의자들의 시대이다. 지금 예술은 죽었고, 그렇기에 예술은 인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암울한 시대에 있어 지나가버린 시대의 예술가들의 외침은 또다른 것을 예언한다. 그들의 실존주의는 더 이상 근본적인 것에 대해 ‘왜’를 묻지 않는 현대인에게 ‘왜’를 물을 것을, 자신의 본질을 찾을 것을 말한다.
예술의 위엄이 상업성과 퇴폐로 환원된 현대 시대에 있어 인류의 길잡이인 도덕과 종교 또한 곧 과학과 쾌락주의로 인해 그 신비성과 위엄을 잃고 약화되어 갈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인류는 분명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가치를 잃고, 휘청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미 세기말 예술가들의 예언을 받아들이고, 인류 문화의 가치를 되살릴 수 있다면 인류에게 있어 가장 하찮은 것, 우리 각자가 내뱉는 숨조차도 더이상은 무의미하지 않아질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의 예언을 따르기를, 오만함에 차 모든 가치를 의심하지 않기를, 아름다움과 도덕의 가치를 인정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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