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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상업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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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5-05-07
  • 조회수 145

‘우리가 섹스의 대상이기만 하면 좋겠지? 좋아. 대신 당신들을 노예로 만들겠어’ 

크로이체르 소나타  



톨스토이.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닌가? 작품은 몰라도 이름은  것이고 대체로 작품을 기억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과 평화니 안나카레니나니 하는 것부터 단편선이나 이반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같은 작품들도 꽤나 유명하다. 그러나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어떤가? 톨스토이의 연대기에 짧게 나와있는 것이 전부일뿐이다. 그나마 찾을  있는 설명들은 금욕주의니 섹스에 대한 혐오니 하는 단어들 때문에 언뜻 보면 톨스토이는 노망  반동적인 노인네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두건대, 비록 그가 반동이라 할지라도, 그는 완전히, 정열적으로 순수하게 무모순적인 인간 해방을 위해 노력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나는 그를 반동이라 표현하느니 가장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라 부를  같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래서 어떤 소설인가? 그것은  내용  자체(내용  자체는 조금의 가치도 없다)보다 그것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가지의 질문을 던지겠다. 사랑은 어떻게, 얼마나 인간을 구성하는가?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인간이 있는 반면에 그를 부정하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역사에서나 지금이나)은 사랑으로부터 살아가야  이유와 젊음을 소모해야  당위를 얻는다는 것이다. 부수적으로  쓰는 많은 사람들에게 직업을 제공했다(로맨스 장르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는지 보라). 사랑은 꽤나 중요한 감정이다.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키면서 동시에 감정적 만족을 주고 상당히 많은(대체로 우리가 역사에서   있는 모든 사람은 그런 영향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다) 제도적인 장치와 문화를 남겼다. 자유로운 개인 간의 연애가 확산된 지는 꽤나 오래됐다. 그러나 반동적인 구조가 남아있는 것은 현대의 우리나 톨스토이 시절의 러시아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헤테로섹슈얼에서 다루어볼 것은 3가지가 있다. 섹스, 로맨스, 그리고 관계와 결혼이다. 섹슈얼리티와 로맨스는 본질적으로 성질은 거의 완전히 같다. 모두 상대를 필요로 하며, 독립적인 욕구다. 섹슈얼리티는 선천적이지만 로맨스는 다소  구분이 모호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어떻든, 로맨스 또한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둘은 대체로 비슷한 성질을 띄며 서로 연관되어 나타나고 또한 수많은 매체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출판된다. 다만 섹슈얼리티는 어느 정도 접근에 제한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로맨스는 맥락을 불문하고 섹슈얼리티보다 우월하며 도덕적으로 옳은 것처럼 취급된다. 대중에게 자주 노출되는 것도 있지만, 문학이 로맨스를 신성시하는  크다고 본다. 로맨스는 어째선지 다른 모든 감정과 욕구를 들을 초월하여 훌륭하고 권장할만한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하면, 로맨스는 섹슈얼리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이 평생 섹스만 하며   없듯이, 로맨스도 어느 순간에서는 섹슈얼리티처럼 완전히 사그라들어 알아차릴  없는 때가 온다. 그럴 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인간말이다! 성적으로도, 연인으로도 매력적이지 않은 완전히 평범해진 인간말이다! 연인은 사랑할  있고, 파트너는 사랑할  있지만,  ‘인간’은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묶여버린 관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익히던지 아니면 어설프게 수평적이고 경직된 우리 시대의 연인이나 배우자의 관계는 꽤나 사랑의 달콤한 속삭임들만큼 오래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단,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우리의 연인들은 서로를 서로에게 묶어두고 종속시켜야 하는가? 

 로맨스를 위해 이루어지는 희생들을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멋있다거나 값을 올려 부르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희생이란 뭔가? 자아라는 개념의 포기 없이는 희생은 생각될 수도 없고 실천될 수도 없다. 비단 목숨의 포기만을 말하는  아니라 어떤 목적에 대한 의지로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로 돌아가겠다는 자기 인식의 전환 말이다. 그 결과로 로맨스와 섹슈얼리티와 연인으로서의 종속을 비롯하여 상대에게 가지는 모든 요구와 욕구들의 포기로 까지 돌아가야 한다. 그런 욕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목적, 사랑이라는 목적 아래에, 그것을 요구할 권리마저도 포기해야한다. 사랑은 그런 것이고 그래야만 하는데, 로맨스는 책장 그런 자기희생은 책장 뒤로 던져버리고 신비감과 만족감을 보여주며 마치 자기희생따위는 조금 뒤에 생각해도 되는 문제처럼 말한다. 
혹자는 자기희생의 필요성에 부동의 할지도 모른다. 그럼 되묻겠다.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랑은 계약과는 어떻게 다른가? 자기자신을 남겨 두고 요구 받는 것을 떼어주고 요구하는 것을 가져오는 것이 계약과는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역설적으로, 인간 존재간의 평등한 사랑은 존재의 포기이외에서는 불가능하다. 

톨스토이가 원래 하고자 하던 말은 로맨스나 섹슈얼리티나 아가페에 대한 방해만 될 뿐 그 자체로는 모순 덩어리인데다 안정적이지도 않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유에 대한 사랑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한 사람을 사랑하는게 모든 것의 목표인 사람도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나 이런 글을 읽을 것 아닌가?) 톨스토이적인 짧은 성찰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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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에 대한 단상

여전히 세상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의 이해는 조금도 진전이 없다.언어가 가지는 가정적인 세계가 확장 되었을 뿐, 과연 그 세계가 현실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지, 현실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여전히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일률적인 일반화를 필요로 하며 인간 개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해서 복잡한 언어의 세계를 구성해 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말하자면 이런 것이다.어떤 물리 엔진을 구현한다했을때에 우리는 어떤 것을 필요로하는가? 우선 그 물리엔진을 돌릴 컴퓨터가, 튜링머신이든 유기체든 필요할 것이며 우리가 지금 까지 발견한 물리법칙을 훨씬 단순화한 행동표가 필요할 것이다. 물리법칙을 그대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컴퓨터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아직까지 TOE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계급 투쟁에 대해서도 다뤄보겠다. 인간 개체를 분류하고 그 행동을 일률화하여 이해하고자 하는것, 그것이 운좋게 들어 맞는 경우가 있더라고 그것은 일시적이며 우연적일 뿐이다. 세계의 이해는 이제 미시세계의 법칙과 환원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전술된 경우에선 사회 법칙은 심리학으로, 심리학은 신경학으로, 신경학은 다시 화학과 미시 물리적인 법칙으로 환원되어서 이해되어야하는 것만이 올바른 접근이다. 이 이외에는 단지 이 세계를 언어로 이해하기 위한 일반화일 뿐이다. 어떤 인간이 프롤레타리아(혹은 그 어떤 특수한 계급이나 이론화된 행동양식을 가진 인간 집단에 속한다)라고 한다면, 그러한 이해는 (당연히) 인위적인 것이다. 각 개체가 완전히 상이하며 그나마도 1차원적이지도 않고 동시에 시간에 따라서도 바뀌며 애초에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것 자체부터 굉장히 오만하며 위험한, 그러나 불가능한 발상을 내포한다. 우리 직전 세기에 저물어 버린 과학처럼(현재의 과학은, 그러니까 최협의의, 가장 근본적이며 더이상 환원되지 못하는 과학은 이미 추후 반박되기 어렵다고 보여지는 상당한 부분이 규명되었으며 또한 동시에 기술적 한계에 다다랐다. 더 이상의 발견은 우리 문명의 카르다쇼프 척도가 유의미하게 증가했을 때야 가능할 것이다) 언어로서 표현되는 거시세계 또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전을 이루어 인류에게 굉장히 유용한 혜택을 주고 있으나 여전히 근본적으로 내포된 문제(거시세계를 카오스 이론에 의해 요구되는 정확도 이상으로 이해하는 능력의 부재)는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는듯 하다.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결국 어떤 행동의 당위에 이르는 알고리듬이며 그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모종의 윤리관또한 갖추어야한다. 이데올로기 간의 이질은 세계를 언어로서 표현되는 세계가 다름뿐만 아니라 인간 개체간의 윤리관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윤리관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도 모호하고 호소력이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혹자가 기독교적 유신론자라 한다면, 혹자는 유일신의 공회와 그 유일신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일신이 있다 한들, 그가 창조주이며 전지전능한 절대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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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1
마틸다 비판

영화 마틸다. 1996년의 작품이다. 내 나이의 2배나 되는 영화에게 할 말이 뭐가 있을까. 다만 나는 그 앞에 잠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틸다는 가족과 사회에서 무시되고 탄압받는 이들이 호쾌하게 멍청하고 억압적인 어른들을 무찌르는 이야기이다. 주된 메시지는 아마 어린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는 것이리라 짐작한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히 있다. 인정하지 못할 몇 가지 중 첫째는 마틸다라는 캐릭터를 초인으로 만드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 마틸다라는 표상은, 그 자체로서 보다, 말하자면 일반 대중을 비꼬기 위한 것이다. 일반 대중을 비판하고 그들의 악한 무관심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장치'일뿐이다. 나는 그렇게 정의한다. 마틸다에게는 청소년을 대표할 만한 어떠한 요소도 없다. 모범적인 청소년의 한 예이겠으나 저항하는 약자에게 초능력을 부여하는 것만큼 오래되고 잘못된 서사또한 없을 것이다. 전태일에게 초능력이 있어서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었는가? 시민들에게 초능력이 있어서 민주화가 가능했는가? 아니다. 분명히 아니다. 초능력은커녕 대학을 가지 못해 한자를 읽을 수조차 없었던 일개 노동자가 무슨 힘이 있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를 관철시켰다는 것인가? 어린이들에게는 분명 좋고 행복한 결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잘못된 것을 언제까지 배워야 하는가? 그때 배운 게 틀렸고 잘못된 접근이라고 말해줄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은 행복한 결말은 저항하는 약자에 대한 모독이다. 어쩌면 순간의 통쾌함을 위해 약자라는 손쉬운 개념을 이상한 방식으로 끌어다 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청소년에 대한 모독은 아닐 것이다. 인정할 수 없는 두 번째는 청소년마저 잘못된 방식으로 이용해 버린다는 점이다. 마틸다는 그저 '어른'으로서의 대중에 대한 안티테제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이란 개념은 그저 어른에 대한 안티테제를 설정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차라리 어떤 관점에서는 마틸다의 오빠가 청소년에게 어울릴 것이다. 어른과 소통하고 어른에게 영향을 받으며 어른의 권위를 인정하는 '청소년'말이다. 무기력하게 어른의 방식을 따라가며 동화되는 모습은, 저항없이 정의관의 붕괴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절대로, 절대로 청소년의 모습으로 인정할 수 없다.그렇지도 않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청소년과 어른은 절대로 서로의 안티테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청소년의 특수성이다. 청소년은 젠더가 아니다. 청소년이 필연적으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나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뿐인 것도 아니다. 차라리 인간이 죽어가는 과정이라 말하는게 옳을 것이다. 우리는 존재로서 현재를 살아 숨쉬고 당연하게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존중과 적절한 교육과 합당한 책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청소년은 기성을 단순히 상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른이 됨으로서 기성을 변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그 누구도 대의할 수 없는, 하지 않는 약하고 소극적인 영웅 마틸다나 어른의 라이프스타일을 고심없이 상속하려는 마이클이나청소년에 대한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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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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