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육체에 관하여, 반유물론적 관점으로
- 작성자 Ted
- 작성일 2025-07-08
- 좋아요 0
- 댓글수 4
- 조회수 681
만약 가장 현대적인 시선을 가진 어떤 지식인, 그러니까 현대의 유물론적 지식에 자신의 최고의 열의를 다하느라 지혜와 도덕에게는 냉소 밖에 남겨놓지 않은 지극히 현대적인 지식인에게 ‘정신과 육체’에 대해 물으면 무어라 답할까요? 아마 그는 냉소적으로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정신은 실존하지도, 가치 있지도 않으며 전적으로 불가지한 것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혹 그가 최소한 정신이라는 단어를 인정한다면 이렇게 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신은 호르몬이나 신경과 같은 육체적 작용의 조화로 만들어지는 실존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육체와 구분되거나 우월할 수 없다” 그리고 저는 이번 시간에 이 가장 현대적이라 할 수 있는 오만한 유물론(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여기서 오만함은 유물론 일반에 대한 호칭이 아닌 대중의 것이 되어 오만해진 유물론을 말한 것임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에 반론하는 형식으로 정신과 육체에 대해 분석하고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유물론이 정신과 육체에 대해 어떻게 주장하는지 간단히 나마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유물론은 현대에 이르러 ‘정신의 패배’를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정신을 단지 미신적인 영역으로 치부하고 육체의 객관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 정신의 권위는 근현대에 이르러 세번의 타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주론적 타격, 생물학적 타격, 심리학적 타격이 그것입니다. 먼저 우주론적 타격은 코페로니쿠스가 지구가 실은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서 이루어진 인간의 물리적 권위에 관한 타격이고, 생물학적 타격은 다윈이 인간이 단지 짐승으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인간과 정신의 특별성이 부정된 것을 뜻하며 세번째 타격은 프로이트가 정신이 실은 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밝혀내며 정신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생긴 타격입니다. 이렇듯 근현대의 회의주의와 유물론은 과학을 발판으로 정신의 권위에 대한 부정을 당연시하고 있으며 육체를 우상으로 받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정신과 육체에 대한 유물론의 접근은 어떤 오류를 지니고 있을까요? 저는 그들의 이런 접근이 정신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부터 발생하는 모순이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에 대해서 오직 자신들의 방식으로, 즉 현상계 혹은 물질계라고 불릴 수 있는 세계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논하는 것은 유니콘의 존재를 논하는 것만큼이나 불가지하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 근거는 ‘신의 존재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질량을 잴 수 없기 때문이다' 정도의 타당성 이상을 지니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들은 오만하게도 (과학적 의미에서) 실존하는 우주 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그 우주에 대한 모든 이론과 그 기초가 모두 실존하지 않는 개념과 기호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며 결국 정신에게도 그들의 실존의 잣대를 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를 통해 정신에 대한 유물론적인 접근이 ‘정삼각형은 도덕적인가?’하는 질문만큼이나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정삼각형에 도덕의 잣대로 재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정신이라는 정삼각형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요? 저는 이를 말하기 위해 정신이 지니는 논리적 필연성과 신비성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럼 먼저 정신이 논리적으로 어떤 역할을 지니는지 생각해보죠. 명제에서 정신은 화자, 즉 1인칭 주어 ‘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정신은 생각하니까요. 그럼 정신이 명제에서 필연적일까요? 이는 매우 간단하게도 아무 명제, 더 구체화해서 실존하는 세계나 사물을 대상으로하는 명제에서 정신 ‘나’를 제외하고 성립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책상은 있다’ 라는 명제에서 정신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간단히 보면 가능해도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나’는 인격체나 성격을 지닌 인간이기 이전에 1인칭 주어이고 관찰자이며 화자입니다. 그리고 이 명제는 이렇게 더 분석할 수 있죠. “나는 생각한다(본다/말한다). ‘이 책상은 있다’” 이렇게 분석해보면 ‘나’라는 정신이 단지 형식적으론 생략될 수 있더라도 본질적으로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나’는 논리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세계에 있어도 논리적 필연성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과 같은 물리계의 세계 형식과 동등한 논리계의 세계 형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정신이 지니는 신비성입니다. 방금 말한 정신의 논리적 필연성이 정신의 권위를 증명했다면 이는 정신의 권위를 침해하는 유물론 등지의 것들로부터 절대적인 정신의 불가침성을 증명할 것입니다. 방금 예시로 든 ‘이 책상은 있다’에서 주어 ‘나’가 분명 필연적으로 있지만 그 실주어가 이 명제에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다음 명제 “나는 생각한다. ’이 책상은 있다’”에서 명제 내에 주어가 있을까요? 물론 주어 자리에 ‘나’가 들어가 있긴 하지만 실주어는 명제 내에 있지 않고 이 명제 자체를 사고하는 주체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명제들을 보며 언제나 정신이라는 에테르적인 주어는 문장 내에 있지 않고, 그 문장의 밖에서 명제 전체에 대해 주어의 지위를 지닌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를 통해 정신은 논리적으로 필수적이지만 그 자신은 초논리적이며, 마치 자연수의 무한처럼 결코 직접적으로 범접할 수 없지만 그 존재는 실감되는, 그리고 하나의 가산적(문장 내에서 다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런 비유가 가능하지 않을까요)인 대상일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정신이 지니는 특성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다시 유물론으로 돌아와서 유물론이 말한 인간 정신의 3가지 타격과 앞선 해석을 바탕으로 유물론의 주장이 지니는 의의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유물론은 인간 정신을 부정하며 온갖 물질계적 반론들로 인간을 공격하고, 심지어는 정신을 뇌라는 물질에 담아 이를 말함으로서 인간과 정신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태양계 속 자그마한 지구를 생각하고, 원숭이라는 단어 밑에 인간을 써놓고, 의식에 대한 무의식에 정복을 외치는 자기 자신을 잊었으며 그 위대한 정신이 그들의 주장 밖에서 그들을 비웃고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유물론의 오만한 태도와 달리 위대한 정신을 부정하지 않는 유물론을 가정할 때 우리는 이것의 진정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입니다. 유물론의 진정한 의의는 ‘인간 정신의 패배’가 아닌 ‘인간의 패배와 정신의 승리’에 있습니다. 유물론은 온갖 물질적 자료로 우주 속에선 한낱 자그마한 원소 덩어리인 인간과 그 육체의 하찮음을 일깨워줬으며 그 육체의 오만한 주인놀이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줬습니다. 그리고 유물론은 실은 육체에 대한 정신의 부정이라는 점(만약 유물론이 진정으로 정신을 육체의 일부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면)에서 정신의 권위를 더욱 단단히 할 수 있게 우릴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만함을 버린 유물론은 마땅히 절대주의로 환원될 것이며 우리의 정신은 방탕적인 오만함이 아닌 안락한 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추천 콘텐츠
*이 글은 '이 세계의 시작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를 주제로 철학적 입장에서 쓴 발표문입니다.세계라 함은 물질 세계, 가능 세계, 수학적 세계 등등 수많은 세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세계란 무엇일까요? 세계의 정의는 앞서 제시한 세계들의 공통점에 있는데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각자 존재를 정의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이 각각의 세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물질 세계는 물질적인 존재들의 집합이고 가능 세계에서는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 수학적 세계에서는 수학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집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완전한 세계처럼 보이기에 우리는 논제에서 말하는 세계가 도대체 어떤 세계를 말하는지를 헷갈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시간에 이런 헷갈리는 세계들을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제시하여 그 시작점을 탐구할 생각입니다. 여러가지 세계 중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다루기 쉬운 세계를 꼽으라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물질 세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 세계는 겉보기에 완전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실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 다는 것은 쉽게 입증될 수 있는데 가령 우리는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이 튀어나와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대가 말하는 물질 세계는 어째서 믿을만한 것이 되는가?” 그럼 우리는 물질 세계는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해 너무나 쉽고 실감나게 체험되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한 사람은 또다시 묻는 것입니다. “그대의 감관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럼 우린 아마 그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럼 그가 과학적이라는 용어를 이렇게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감관에 의해서 체험된 사실을 말하는가?” 그럼 우린 이때 무언가 논리가 잘못됨을 느끼면서도 그의 물음에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그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이렇게 우리의 대화를 요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네의 주장을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런 거라네. ‘물질세계는 믿을만하다. 왜냐하면 감관에 의해 체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관이 믿을만한 이유는 감관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 경우 만약 감관이 믿을만 하다면 물질 세계를 우리가 믿을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감관이 믿을만 하지 않다면 물질 세계 또한 믿을만 하지 않음을 찾을 수 있지만 감관이 믿을만한 이유가 없기에 물질세계는 ‘꼭 그래야 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다른 대부분의 세계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순환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수학의 경우에도 공리를 믿음으로서 시작하므로 필연적일 이유가 없고, 또 가장 쉬운 사례로 종교의 경우에도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세워진 것에 지나지
- Ted
- 2025-09-14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흔히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모든 사상과 철학의 집합체라고 말해진다. 말하자면 그의 ‘백조의 노래’인 셈이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이런 온갖 찬양들과는 상반된다. 이 책의 내용은 (오직 내용만 놓고 보자면) 언뜻 보기에 최소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불리고 찬양 받는 이유는 내용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책이 예술적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상세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때로는 신비스럽게 때로는 차가운 이성으로 종교와 신, 자유와 인간의 본성, 그리고 사랑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묘사한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마치 오페라와 같았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오페라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어쩔 수 없이 내용이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오페라를 저급하다거나 세속적이라고 비판하지 않으며 차라리 아름답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오페라 속의 아리아가 지니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아리아가 아니지만, 아름다움은 그 안에 있으며 우리는 아리아의 형식으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반박해선 안되는(반박은 말하는 것이다) 권위를 지니며 그 권위는 아리아에서 오페라, 한 극 전체로 확대된다. 이 책은 오페라처럼 아리아와 같은 몇몇 서술을 지니고, 또 그 서술은 ‘신비스러운 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느끼고 알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오직 이 점에서 그의 책이 그런 찬양에 마땅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생각한다.쓰다보니 서론이 길어지고, 또 혼잡해진 것 같다(내게 생각을 조금 더 잘 서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일단 그럼 서론은 접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이번 글을 어떤 형식으로 전개할 것인지에 관해 약간의 설명을 해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내용은 가능한 한 간단하고 짧게 쓰고, 이 책의 아리아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고자 하는데 그 이유인 즉 이 책은 내용보다는 메시지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1800페이지 책의 내용을 상세하고도 잘 요약할 능력도 시간도 내게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 책은 여러 심오하고 뜻깊은 주제를 다루는 만큼 철학적으로도 조금 더 풀어내보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사실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이유 중 하나가 비트겐슈타인이 이 책을 좋아했었기 때문이었고, 또 이 책이 내가 니체의 사상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내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먼저 내용을 짧게나마 서술해보고자 한다.이 책의 내용은 카라마조프 가문의 가정사이다. 그것도 아주 복잡한 가정사인데 일단 처음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이 책은 카라마조프가의 가장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그를 찾아온 세 아들 장남 드미트리, 차남 이반, 막내 알료셴카(보통 애칭으로 알료샤라 부른다)가 찾아오며 시작된다. 인물을 간단하게나마 소개하자
- Ted
- 2025-04-16
만일 당신이 어떤 한 문화 전체의 서사시적 저술을 보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이 문화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의 작품들 속에서, 그러니까 이 문화의 종말이 단지 예견될 수 있었을 뿐인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그것을 기술할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문구이다. 이를 인용한 까닭은 1900년대 당시의 예술이 이러한 가치의 종말에 대한 예언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2월 말 무렵 서울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전시한 그림 전인 ‘비엔나 1900’을 볼 수 있었다. 이 그림전은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에 활동하던 빈 분리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룬 전시였다. 앞으로 서술하겠지만 나는 이 전시를 조금은 분석적으로 바라보며 빈 분리파의 화가들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의 ‘예언’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미술 사조에는 인상주의, 큐비즘 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로 활동한 화가들로는 이 전시의 중심 주제인 빈 분리파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하고, 통일성이 없어 보이는 미술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나는 그들의 공통점이 그 통일성을 타파한다는점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상주의는 세계의 단순한 묘사에서 예술가의 눈에 비친 세계로, 큐비즘은 표상적인 사물에서 사물의 본질로, 빈 분리파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기존의 예술에서 추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예술로의 변화를 꾀하였다. 가히 그들의 그림은 혁명적이며 기존의 화풍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은 프랑스 대혁명이나 르네상스의 문화혁명과는 달리 역동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들의 혁명은 열정이기 보다는 체념이며 환희가 아니라 차라리 심연의 고뇌이다. 이러한 점에서 내게는 이런 미술의 변화가 기술에게 그 가치를 위협받는 예술의 처절한 노력이자 앞서 인용문에서의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느껴졌다. 먼저 당시 미술 사조와 특징을 어렴풋이나마 분석해보고자 한다. 인상주의는 절대적인 세계의 사물 대신 상대적인 인식된 사물을 말한다. 사물은 빛과 보는 각도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상주의는 어차피 그것이 상대적이라면 눈에 포착된 바로 그 순간에 그리자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한편 입체주의, 즉 큐비즘은 그 시작을 기술의 발달에 둔다. 왜냐하면 큐비즘은 그림의 사실 묘사의 기능은 발전된 기술의 산물인 카메라와 같은 기계가 더 잘 수행하므로 미술은 다른 목적, 즉 예술가의 자기 표현과 사물의 본질 파악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미술 사조가 예술가 자신의 눈에 비친 사물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예술가가 주체적인 실존자로서 세상의 복제품을 만드는데 만족하지 않고, 그림을 통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고자 한 실존주의적 철학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꼭 미술 사조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유명한 미술가
- Ted
- 2025-04-08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양테드야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 카톡 옾챗 아이디가 유실되었을 뿐임을 알아줘....... 이메일로 주는 게 나을듯
@강완 이메일이면 네이버 메일 말하는거야?
주소좀알려다오
@강완 ted1711301@naver.com 네이버 주소가 그냥 아이디인걸로 아는데 맞나..?
너무 겸손해서 뭐라 하려했는데 발표 재탕이었다니...
@기능사 재탕은 아닙니다. 발표하기 전에 글틴에 먼저 올렸거든요ㅋㅋ (그런데 이러면 발표가 재탕이 되어버리는군요..)
테드님이 합니다체를 쓰면 제가 뭐가 됩니까 ㅋㅋㅋㅋ 아니에요 각자 문체가 있는거죠 뭐
원래 발표용이었던 글을 다듬어서 올린 것이어서 문장도 구어체이고, 어색한 부분도 몇 있는 거칠고 서툰 글입니다. 그냥 가볍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