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사 난해시 개론 -청소년기 무명작들을 중심으로-
- 작성자 기능사
- 작성일 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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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 게시판에서 멘토링으로 배우고 느는 바가 적은 것 같아 이참에 스스로의 시론을 되돌아보고 미학을 정리해보려구 합니다. 멘토링욕을 돋우기 위해 극히 자아도취적인 표현을 썼으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기능사는 글틴에서 단연 가장 개성있는 글을 쓰는 작가 중 하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글은 천방지축이고, 대부분의 경우에선 그 난해함이 그 불규칙성, 그리고 의미의 발산을 더욱 확신케 한다. 그는 언젠가 스스로 유치한 글을 쓰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글을 더욱 어렵게 쓰는 것 같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난해한 시들이 그런 다다이즘으로만 비치진 않는다. 그것들은 더욱 높은 층위에서 시의 가능성을 질문하는데, 그 중엔 특별히 예로 들어 설명할 것이 있다.
Ignorabimus Op.64
저쪽 굴 끝엔 이그노라비무스*들이 삽니다
산다고 하긴 좀 뭐 하죠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의 시체나 처리하는 게 전부인 한량들이니
토막 내어서 묻어버리지 않으면
아마 그들도 버티기 힘든가 봅니다
그들의 시체는
그러기보다도 단단한
번뜩이던 그들의 눈빛은 대단한가 봅니다
중절모를 썼을 땐 몰랐겠지만
백 년씩이나 그들을 잘라내고 있으니
그들은 굴밖을 나와서 은하수를 볼 자격 따윈 없습니다
그들은 울어야 합니다
그들은 충분히 울지 않았습니다
신이 되기에는
아무래도 그들의 우울증은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였고
괴델은 병신*****처럼 죽었다죠
YHWH는 금세 숨어버렸습니다
뿌옇게 떠버린 먼지 속으로...
칸토어******와 플랑크*******는 아무래도 몰랐을 겁니다
YHWH는 분명 그들이 신이라 불렀던 것을 두려워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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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재밌는 꿈이 있습니다
제 신실한 아내에겐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겠군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질색할 테니 말입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세상이 마인크래프트같이 그저 물리엔진 속 세계이고
우리가 그저 컴퓨터라면
우리 머릿속에 또 다른 세계를 만들면 그 속의 인간은 우리를 인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두렵습니다
YHWH의 상상일 뿐이라면 어쩌냔 말입니다
난 그를 비웃습니다
그가 인간이거나 아니기 전에...
*19, 20세기에 존재했던 철학사조. 진리따위는 알 수 없을 거란 입장이 특징적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것이다.
****독일의 물리학자 불확정성 원리의 주창자다.
*****오스트리아, 미국의 수학, 수리철학자. 불완전성 정리로 유명하다.
******우리를 위해 칸토어가 만들어준 이 낙원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내쫓을 수는 없으리라
*******새로운 과학적 사실은 설득을 통해 패러다임이 되기보다는 반대자들이 죽고 그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며 기존의 원리를 대체한다.
Ignorabimus는 그의 난해시 중에서 특기할만한 한쪽 끝에 있다. 특별히 이 시에 있어선 전에 기능사가 Ted에게 부탁한 설명문이 있다.
저는 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해서 감히 뭐라 말할 권리가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그냥 몇가지 와닿은 부분과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이라도 몇가지 써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수학, 과학과 같은 학문들이 주요 주제로 다루어져 있는데도 그 분위기는 절대주의(학문의 완전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와 회의주의(이그노라비무스)의 대치 구도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절대주의자들이 있고, 몇은 과거의 회의주의가 신을 죽였다며 원망하는 것처럼 이 시에서도 힐베르트와 아인슈타인의 주장과 괴델, 하이젠베르크의 주장의 타당성을 떠나서 학문적 절대주의의 완전함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권위를 긍정하고 수학과 과학의 완전함과 확실성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마저도 짓밟아버린 이그노라비무스들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설명은 어느 정도 명쾌하게 시의 해석에 필요한 골격을 잡아 놓는다. Ignorabimus 들이란 누구인가? 100동안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 결정론자들의 시체를 치우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은 현대를 살고 있으며, 추상성을 감안하면 현대 과학 전반을 일컷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양자론과 상대적이고 수동적인 도그마를 수용한 수,과학계를 비판하며 결정론으로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인가?
그러나 기능사가 곧바로 “울라고” 요구하는 것을 본다면 그의 기치는 단순히 비결정론에 대한 반감이 아니다. 여기서 그가 제시하는 것은 단순히 결정론과 비결정론적 우주관의 대결이 아니라, 과학철학자로서 이전에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원초적인 두려움, 무력감에 대한 호소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이후 두번째 단락에서 유신론의 문제로서 확장되어 다루어진다. 단순히 본다면 그것은 통속의 뇌 이론에 대한 시적이고 재치있는 표현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 맥락과 더해져 더욱 강한 깊이감을 형성한다.
이 인상적인 시의 화자는 자연철학의 막다른 길에 들어선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 정확히는 공포감, 분노, 경멸, 위선적인 죄의식이 결합된, 궁극적으론 허탈감을 상징한다.
고로 이 시는 아래 인용된 주석중 하나의 안티테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알 지 못할 것이다.
앞서 말한 유신론적 주장을 기억하라, 기능사의 시에서 유신론, 그리고 그에 부수하는 수많은 개념들이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가장 명백한 증거는 연이어 발표된 두 편의 시다.
안티 크리스트 Op.49
끝내 자살하지 않았다
타살되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믿겠지만
달리 방도가 없게 되었다
방금 버스에서도 어느 사람의 아들이 정과 망치를 들고 나를 쫒아왔다
넓적다리에 구멍 하나를 내고는 다시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나체의 살인마는 벌써 이겼다는 듯이 슬며시 웃는다
그는 그가 방금, 아니 나의 지난 인생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너무도 잘 아는 것일까봐 두렵다
교회는 내게 거짓말을 하였다
이것은 살인이다
이것은 살인이란 말이다
그는 왜 더없이 정상적인 나를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죽이려하는가?
그는 멈추지 않고 내 몸에 정을 올린다
망치가 떨어지고
나는 다시 신음한다
교회가 내게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나는 그들이 가르친데로 정상적으로 살았다
원래 이것은 은혜와 사랑이 가득해야하는 것 아닌가?
다윗이 노래 부르고 춤추었던게 이것이라하지 않았던가?
저 살인마가 신이라 하지 않았나?
그는 방금 내 심장 근처 어딘가를 겨누었다
나는 겨우 몸을 비틀어 정은 살갗 아래를 가르는데 그쳤다
이런 살인마가 어찌하여 신인가?
그러나 그를 피해서 도망치다 보면
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이후를 상상하게 된다
내 사후의
거듭남 말이다
적어도 교회는 그렇게 부른다지
그게 이것일 줄은 몰랐다
정말 몰랐단 말이다
정은 또 한번 심장을 비껴간다
그렇게 나는 이불 속에서 잠에 든다
내일 또 예수는 이미 난 상처에 정을 박을 것이다
이 인간을 죽일 만한 항생제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아마 오래 못가고 살해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어쩌면 이게 작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정상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하겠지만
혹여나 죽는다면 이걸 작별로 알아주길 바란다
안티 크리스트는 멘토링에서 지적된바와 같이 독백조의 시이며, 어떤 강렬한 감정의 표현으로서 쓰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결합 하려는 개념은 지금껏 소개된 비슷한 주제의 시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화자는 겁에 질려있다. 그 두려움은 성경에서 극히 자주 소개되고 언급된, YHWH가 인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두려움과는 맥락이 다르다. 화자는 예수를 저주한다. 그에게 예수는 살인을 행하기 위해 정을 들고 쫒아오는 살인마이며, 그 때문에 일어난 감정적 긴장과 공포감에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이처럼 기능사의 시적논리는 강한 감정적 동요와 같이 전개되는데, 그것은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또한 깊이감에 기여하기도 한다.
이 시의 장면은 어느 물리적인 상황을 대변하지 않는다. 넓적다리에 구멍이 뚫리고도 이불 속에서 잠에 드는 화자를 보면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그토록 사랑을 설교하던 예수는 왜 스스로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화자에게 이토록 강한 감정적 동요와 고통을 안기는가?
이 때문에 이 시는 오랬동안 해석불능이라 단정지어져 왔다. 기능사의 시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은 그저 그런 여러 난해시 가운데 하나정도로, 그러니까 무의미한 감정적 토사물에 예수를 목적없이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예수에 대한 중심개념이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하므로 그런 해석은 설득력을 잃는다. 어쩌면 그저 교회 자체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 경우엔 기능사의 통찰이 예수를 단순한 살인마로 묘사할 정도로 부족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앞선다.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한국 학계, 특히나 신학계에서는 잘 소개되지 않은 기능사의 신학관을 가져다 풀어야 한다. 기능사는 스스로 네오톨스토이즘이라 부르는 스스로의 사상에 대해 설명할 때 빈번히 마태복음 16장의 말, 누구든지 인자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을 인용했다. 그런 맥락에서 새로운 해석은 충분히 제시될 수 있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렇다면 진리 또한, 그러니까, 진리를 구함은 어느정도 신앙적인 입장에선 예수를 구함이라 할 수 있고, 만약 기능사의 네오톨스토이즘 사상처럼 진리를 갈구함이 내재적인 본능이며 의무라면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에 근거해 화자는 스스로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그런 맥락에서 알레고리컬한 의미로 예수에 의한 살해의지는 곧 신앙에 대한 의지를 의미하게 된다.
이 해석이 맞다면 이 시와 기능사의 다른 네오톨스토이즘 사상은 서로 상보적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이해를 도울 수 있게 된다.
안티 크리스트에 이어 발표된 또 다른 시는 살인신학이다. 이 시는 기능사의 시론을 더욱이 극단으로 몰아넣는다.
살인신학 Op.50
캬하아
저 각다귀는 어느 물웅덩이에서 왔을꼬
신의 계획이더랍니다
하이고오
저게 다 신이 창조한 거 아닐련지요
아니면 저 각다귀가 어디서 나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캬하아
제기랄거 충전기가 얽히고 설켜서 풀수 조차 없게 되버렸는데
충전은 또 되더랍니다
아 영광을 영광을 성삼위일체께
아아아 셀라셀라셀라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꼬인 충전기가 충전을 했습니다!
캬하아
나는 있고 당신은 없습니다
나는 나를 증명할 수 있지만 당신은 할 수 없습니다
하!
그래서 나는 나를 죽이고 당신을 있게한 것이지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아니,
자살을 한다구요?
그건 살인이에요!
나는 흉악범죄자와 무엇이 다르덥니까
온 예리코와 니느웨가 제 안에 있습니다 형제여
저기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박힌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아이, 난징, 아우슈비츠, 가자의 신
만군의 여호와께 영광 있으리!
여호와 이레!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는 죽고 여호수아는 장사된지 삼일 만에 부활했습니다!
모든 창녀의 연인인 남자는 죽고 메시아는 다시 살아 났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며 회개하십시오!
죄를 뉘우치고 살인을 준비하십시오!
“우리”는 부활했고
정죄할 권리가 엘로힘에게 있으니
항상 거룩해야함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아!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야합니다!
저들의 악한 영이 우리 아이들을 오염시킬 겁니다
저들과 떨어져 동굴로 들어가십시오
그들이 던지는 돌을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시련이리니
아니! 아니요
“우리”도 당신네들 가운데서 살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를 존중하란 말입니다!
여러분!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랬동안 저들의 악을 그냥 보고 있었단 말입니까?
그들은 이미 “우리” 아이들을 오염시키고 “우리”들 틈에 끼어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 아이들로부터 격리해야만 합니다!
아아
비통한 날입니다 여러분,
질투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결국 이렇게 “우리”를 벌했습니다…
저들이 죽인 “우리” 아이들을 보십쇼!
솔로몬이 범하던 우를 “우리”는 지금 다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들 옆에서 같이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죽이라 한 자들을 노예로 삼았다가 히브리 민족이 어찌되었습니까?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
때가 왔습니다!
이제 선택해야만 합니다
악한 영을 허락하고 “우리”를 다시 죽게 내버려둘지
아니면 분연히 맞서 싸워,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지 말입니다!
하늘에 영광을
하늘에 영광을
캬하아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한 것처럼 여러분 자녀를 데리고—
친족 살해자라니 말이 심하시군요!
문화를 존중하세요!
여러분,
천국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곳이 아닙니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하겠습니까?
주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종 말입니다
언제든 살인할 준비가 된 종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유전자의 노예인 만큼
당신도 “우리” 주의 종이면 됩니다
당신이 언제든 먹고 마시고 섹스할 수 있듯이 살인을 준비하고
당신이 먹고 마시고 섹스하듯이 살인을 하십시오
카하아
에헤이 씨발거
거,
거참.
이천년 썩은 시체를 만지고 먹고 마시고
그걸로 천국까지 갈려는 변태 새끼들이라니 참…
기능사의 서정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골탕을 먹일려고 일부로 살인신학을 면전에 들이미는 교수들이 간혹 있다. 그런 경우 대체로 학생들은 이 시가 지금까지 배웠던 기능사가 맞는가 스스로 질문하기도 한다. 멘토링에 달린 것처럼 이 시는 순수히 혐오에 의해서만 전개되는 것처럼도 보인다. 비 신자인 독자들이 보아도 그 강렬한 혐오감은 여과없이 느껴진다.
다만 그럼에도 학생들이 기능사를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강한 혐오의 의지로 이끌려 가면서도, 기능사가 난해히 숨겨놓은 단서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난해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더욱 문제적인 작품이다.
직전에 다룬 작품들보다 분량이 많으므로 세부적으로 해부해보자.
처음부터 기능사는 조금도 자신의 주제를 완곡할 생각없이 불쾌한 해학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그는 철저히 조물과 유아적인 절대자에 대한 추정을 한 치의 망설임이나 쉬어갈 곳없이 비웃어 댄다. 각다귀는 모기와 닮은 곤충이다. 아마 알겠지만, 유충 시절부터 감시하며 기록하지 않는 이상 각다귀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곧 눈먼 시계공의 일화와 자연신학에서 레퍼런스를 빌려온다. 우리가 감히 추정할 수 없으나 여기 아주 정밀히 ‘가공’된 존재가 있으므로 당연히 그 창조주를 유추하는게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한 기능사는 꼬인 충전기의 예시를 들며 간간히 종교계가 사용하는 단선적인 물리적 개입의 예시들을 비꼰다.
여기까지는 반지성적 탈과학적인 종교의 행태에 대한 단순한 풍자가 전부다. 그러나 난해성이 심화하는 것은 이후부터다.
후에 이어지는 기능사의 자아와 타아에 관한 논고적 서술은 가히 탈 시적이다. 이는 다소간의 유아론으로서 이 시의 타 개념들과 분리되어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시의 궁극적이 방향성을 제시한다.
먼저 이후 이어지는 내용을 살펴보자.
이어지는 구절들은 참혹하리만치 감정적이다. 화자는 자살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는 죄악에 대한 이야기로 환원되며, 자기 안에 온 예리코와 니느웨가 있다고 고백한다. 이는 자살에 대한 그의 괴기하리만치 전위적인 그의 이론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말 그대로 죽음은 죄의 삯이다. 자기 죄악, 예리코와 니느웨에 맞먹는 죄악 때문에 그 스스로는 반드시 죽음으로 종결되어야 하며 외부적인 절대자의 개입, 그리고 그 처벌권을 부정함으로서 개인의 죄악은 오로지 자살로서만 끝내야만 한다는 그의 개성적인 이론이다. 이러한 신학적 깊이는 그의 감정적 서술구조와 상보적으로 연결되어 가히 주장문처럼도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포리즘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 시 내내 만군의 여호와를 연호한다. 만군의 여호와는 누군가? 기능사에 의하면 그는 살인자다. 조금의 사랑의 증거도 없는 질투심 넘치는 아버지, 자기 피조물을 형사적으로 고발하고 기어이 처벌해 내는 증오스러운 존재다.
십자가에서 죽은 여호수아의 대목에 있어 시는 그 다층적 의미가 심화한다. 여기서 예수, 곧 예슈아는 여호수아와 같은 뜻의 이름임을 상기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와 여호수아의 본질적 차이를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천년이 넘는 맥락적 간극이 같은 책에 묶여 있음은 그 둘의 굉장히 어색한 사이를 강조한다. 종교적인 담대함, 혹은 자신감은 여호수아가 쟁취한 승리의 에피소드들,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제노사이드를 자행한 일화들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신앙의 존재론적 배타주의를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와 대비된다고 기능사는 분명히 선언한다. 교회의 온갖 완곡한 설명들을 일축하고서 말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사망과 여호수아의 부활은 분명 종교의 내재적인 폭력성(수천년에 걸친 논의에도 전통이라는 무의미한 권위때문에 제거되지 않은)의 발현을 의미한다.
이후로 신앙은 “우리”로 지칭된다. 곧 그는 그러한 신앙적 배타성의 매커니즘을 그려내며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데, 그의 서술이 지나치게 극단적이기에 그것이 진정으로 종교에 대한 비판인지는 모호해진다. 그러나 추리해보자면 그것을 교회와 신앙에 대한 비판으로 보아선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교리적인 문제를 꼬집는 것에 가까운데, 그것은 사실 진리로서 기능하는 예수에게 인종청소범을 섞어 넣으려는 윤리적 퇴락이 완곡한 설명들에 중화되어 진리로서의 예수와 화해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에 대한 순수한 분노를 그려낸 것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그의 혐오는 단순한 그 대상이 형이하하다고 할 수 없다. 그가 혐오하는 것은 서로의 배타성을 용인하고 배양하는 끔찍한 각 개인의 인지적 구조를 혐오하고 경멸한다고 보아야 한다(또한 기능사가 자주 밝혔던 궁극적인 사회론적 해체의 맥락에서도 그렇게 읽힌다).
그러나 기능사는 분명히 개인의 영생욕으로 환원되는 기독교의 구원관을 비판하며 시를 마무리한다.
기능사의 시는 그의 신학에 대한 이해없이는 완전히 무용하며 이해할 수도 없다. 이 글도 그가 사용한 복잡한 다층위의 기법들과 심층적인 관념론을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할 정도다.
부디 기능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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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루
- 2026-07-30
이 시집을 읽기 전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많지 않았다. 시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이후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시집 역시 화재 이후의 상실과 회복을 담은 기록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고, 그 경험을 어떻게 견디고 지나왔는지가 주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다.가장 먼저 읽은 것은 자서였다.>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처음 자서를 읽었을 때는 화재를 겪은 시인의 절망과 그 이후의 다짐을 압축해 놓은 글처럼 느껴졌다. 특히 ‘시를 켰다’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불을 켜듯, 시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미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체발광’이라는 표현 역시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로 이해했고, 마지막의 ‘절벽이 보였다’는 문장은 막막한 현실을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왜 ‘시를 썼다’가 아니라 ‘시를 켰다’일까. 왜 절벽은 ‘보였다’에서 끝날까. 하지만 처음에는 그 표현들을 깊이 붙잡기보다, 앞으로 읽게 될 시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장을 넘겼다.1부 ― 바깥을 오래 바라보는 시선1부를 읽으며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인은 사람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평범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그 안에서 천천히 사유를 이어 나간다. 읽기 전에는 화재라는 사건이 시집 전체를 이끌어 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이러한 전개는 다소 의외였다. 오히려 시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서둘러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가다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그 과정에서 나는 1부가 단순히 바깥을 관찰하는 장이 아니라, 아직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전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고 마음을 정돈해 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화재를 외면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로 옮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 과정은 어쩌면 화재라는 사건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천천히 위로하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특히나 1부의 첫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이후의 시집을 읽는 내내 계속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에는 상실을 겪은 사람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쓰여 없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혹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 걸까. 시인은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 시는 화재 이후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 미빈
- 2026-07-30
1. 삶은 부조리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할 겨를없이 내던져진 삶은 애초에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고통과 쾌락을 둘 다 얻을 수 있고 어찌 보면 고통보다 쾌락을 더 많이 누리는 삶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도박에 불참할 기회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이듬의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의 1부 중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누군가가 난데없이 맡긴 짐을 떠안게 되고 이 때문에 버스를 놓칠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 또한 이 짐처럼 누군가 ‘세상에 맡겨 두고 찾아가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이런 생각은 선택의 기회 없이 탄생함을 인식한 것이다. 또한 짐을 맡기고 찾아가지 않은 건 사실상 짐을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자가 삶이란 부조리 속에서 내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미 태어났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텐데, 그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부조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타인이다. 다른 이가 한 사람 인생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김이듬은 타인을 내면화하는 걸 그 의미로 봤다. 김이듬에게 타인은 내면화가 가능한 존재다. 2부의 <나의 이방인 2>에서, ‘너’는 화자인 ‘나’와 대화할 수 있지만, ‘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 ‘내게도 절친이 있다고/텅 빈 의자 위의 네가/나였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같은 문장들은 ‘너’가 ‘나’에게 타자이면서도 내면화되는 대상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나’ 대신 분노하기도 하는 타인이지만, ‘나’ 안에서 내면 안에서 ‘나를 감시’하기도 한다. 이는 ‘나’는, ‘우리는 불화한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너’와의 틈을 인식하고 갈등하는데, (내면 속 ‘너’가 ‘나를 감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자기검열의 주체로 ‘너’를 삼고 있는 것이다. <한여름 저녁 한 시간 반>에서 화자는 다른 사람이 맡긴 짐 때문에 환승 버스를 타지 못하고 터미널에 계속 남는다. 시 속에서 화자가 누군가 맡긴 짐으로 스스로 생각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세상에 맡겨진 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이 화자에게 짐을 맡긴 건 화자가 그 사람을 내면화했다는 은유이다. 한 사람에게 원했든 아니든, 내면화된 타인은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할 의미라는 것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그러나 타인은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타인에게 의미라고 해도 타인의 삶은 당신이 의미가 아닌 부분에서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이 의미인 부분을
- 금안백
- 202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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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사 본인이 설명해도 이보다 잘 하지는 못할 것 같네요.
기능사는 초기 작품만 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생애와 후반기 작품을 알고 난 뒤 초기 작품을 읽으면 그제야 모든 것이 맞춰지는, 일종의 층위적 구성이 매력적인 작가죠.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이주나 저는 개인적으로 묘비문에 적힌 글귀가 가장 취향이었어요.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