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난 동료와 손 잡으며 동행하고-김이듬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를 읽고
- 작성자 송희찬
- 작성일 2026-01-19
- 좋아요 0
- 댓글수 2
- 조회수 883
작년 12월에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만났다. 그때, 여러 가지 근황을 이야기했다. 그는 12월 18일에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을 졸업하게 되고, 시험 성적도 원한 만큼, 그리고 딱 한 만큼 나왔다고 했다. 그의 물음과 대답에 축하와 함께 내 근황도 이야기했다. 여전히 글을 쓰고, 검정고시와 수능 그리고 대학까지. 만나지 못한 지난 반년 사이의 성장과 앞으로 어떻게 고등학교 3학년과 대학 생활을 견딜 수 있을지, 이런 사소하지만, 우리 나름대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비효율적이어도.
누가 볼 때는, 이런 우리의 모습이 과해 보일 거다.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다가온 것처럼 걱정하는 행동이 결코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인 일은 아니다. 역으로 가벼운 수다를 나눌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고, 생산적인 행동 하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론 생산적이거나 완벽하지 않더라도 바라봐야 하는 것이 있다. 현재 내가 타인과 함께 있을 때의 기분, 혼자만 있을 때 몸의 상태나 버릇 등. 이런 것들은 시간이 많이 들더라도 바라봐야 한다. 특히 자신의 일부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글쓰기만큼 좋은 것이 없다. 하루, 하루 일기를 적고, 기분과 제 모습을 이미지로 치환하는 일이 결국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일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이기에 미래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는 친구에게 김이듬의 시 <후배에게>를 추천해 준 적이 있다. 그녀의 시는 결코 경제적이거나 단아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려한 수사나 특색 있는 은유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내가 추천해 준 <후배에게>는 다양한 일상의 이야기와 이미지를 나열한다. 커피숍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화자 주변의 이야기. 어찌 보면 산문적이고, 다르게 많으면 꽤 일상의 디테일들이 잘 녹여져 있다. 그런 점 때문에 <후배에게>는 시치고는 분량이 많은 편이다.
분량이 많은 시를 읽을 때면, 독자는 특정 메시지를 기대하며 보게 된다. 그러나 결미와 메시지에 이르기 전에 모든 독서를 사용하면, 집중력을 잃어 길을 잃게 된다. 또한 거창한 분량 대비 메시지가 부족하거나, 힘이 빠지는 결미일 때 독자는 시에 대한 기대와 흥미도가 떨어지게 되며, 그런 시를 경제성이 부족한 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이듬의 <후배에게>라는 시는 경제성이 그다지 좋은 시는 아니다. 이미지가 꽤 많고, 어느 독자에게는 과잉으로 보이는 경우가 생긴다. 단지 결미에서 “어쩌면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사는 걸 꽤 좋아하면 좋겠어.”라는 구절만 기억 속에 남긴다. 이 말 하나를 하기 위해 “학부모 회의를 마치고 난 뒤의 학부모”, 그들의 자식 등의 이야기를 경유한, 껍데기만 요란한 시라고 생각을 들게 한다.
하지만, 마지막 결미의 문장은 결코 쉽게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꾸며 쓴 말도, 대단한 사유도 아니지만, 시 자체가 기억에 남은 것 같은 잔향을 만든다. 그러면서 <후배에게>를 다시 읽게 만들고 힘들 때마다 다시 빠져들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짧은 시도, 아름다운 시도 아닌 많은 이미지와 화자의 마른 말투. 그것들이 시인이 직접 경험해 온 삶인 것 같고, 화자의 자리, 혹은 타자에 독자를 두며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본인의 삶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것이 김이듬의 시이며, 그녀가 쓰는 과잉의 힘이다.
만약 본문을 읽고 있는 당신이, 과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싶거나, 자신을 응시하는 방법이 경제적이지 않더라도 천천히 자신을 알아가고 싶으면서도 <후배에게>를 괜찮게 읽었다면, 나는 그녀의 신간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도 한번 잡아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시인과 화자의 진정성 있는 태도를 우리 삶에서 적용할 수 있기에.
-
약 넣으러 왔어요
길모퉁이 시계 가게 주인은 저녁 식사 중이다 먹고 있던 배달 도시락 뚜껑을 덮고 일어난다 낡은 작업대로 가서 보조 확대경을 왼쪽 눈에 붙이고 시계 뚜껑을 연다
시계가 멈춘 지 오래되었죠? 시계 배터리에 녹이 슬었네요 이 배터리는 이제 안 나옵니다 이십 년 전에도 구하기 어려웠어요 특이하게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이 반대로 장착된 베터리라 시계판 전체를 바꿔야 하는데 그러느니 새로 사는 게 낫죠
어떻게든 약을 구할 수 없을까요?
이제 어디서도 구할 수 없을 겁니다
남대문 시장에서도 오래된 시계를 잘 고치기로 소문 난 할아버지가 포기하라고 말한다
나는 여러 시계 수리점을 거쳐서 여기 왔다
아버지가 차던 오메가 시계인데
바람 부는 골목에 서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니
오메가란 그리스 말로 끝, 종말이란 뜻이라고 나온다
마지막으로 넓고 환한 귀금속 가게에 들어왔다
나보다 먼저 온 이가 목걸이를 팔고 현금을 받아 나갔다
{중략}
여기서도 내 시계 알은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오십 년 넘은 시계니까 골동품으로 간직하라고 했다
{중략}
“이 골목에는 출생 신고하지 않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고 나이가 차도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유령처럼......”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아시아 저 골목은 여기와 닮았다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몸을 거래하는
나는 약이라고 부르고 시계방 주인들은 알 혹은 배터리라고 부르는 이 작고 둥근 것을 매만진다 다 닳은 세계를 손바닥에 놓고 본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이 세상에 없는 것> 13~15p 中
위 시집을 처음 시작하는 시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라는 제목의 서사시다. 오래된 시계라는 자칫하면 평범해질 수 있는 소재를 끈질기게 풀어가는 시지만 결코 이미지에서 멈추지 않고 다양한 이미지와 서사를 쌓아간다. 대표적으로 텔레비전 속 다큐멘터리의 사람들과 화자가 있는 시계방과 귀금속 가게가 있는 골목을 연결 지으면서.
그러나, 그 외적인 부분을 보면 디테일이 너무 짙어 설명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다. 예를 들어 시계를 정비하는 정비공의 가게가 남대문 시장에 있다는 것과 “오메가란 그리스 말로 끝, 종말이라는 뜻이다”라는 진술이 그러하다. 이런 진술과 디테일이 시를 읽는 독자가 글 읽기를 잠시 멈추게 하고 늘어지게 만든다. 이는 일부 독자에게는 설명의 과잉인 동시에 불필요한 친절로 느껴지게 한다.
그래도 <이 세상에 없는 것>은 독자가 느끼는 과잉을 화자와 함께 느끼도록 만든다. 실제 있는 장소를 말함으로, 그리고 자세한 것을 이야기하며, 독자는 화자와 같은 시선으로 화자의 상실감과 떠도는 감각을 체험하게 한다. 그와 동시에 마지막 결미에서 화자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고장 난 시계를 고치려고 떠도는 자신이 있는 골목과 다큐멘터리의 나오는 사람들 그리고 이 고장 난 시계를 바라보는 타인과 자신의 시선을 겹쳐 놓는다.
누군가 봤을 때 이렇게까지 고장 난 것에 집착하는 것은 그저 안쓰러운 일일 뿐이기에. 독자는 여기서 판단할 것이다. 그러고는 “소중한 것은 알겠는데. 너무하다.”라는 식으로 화자를 나무랄 수도 있고, “안쓰럽고 안타깝다.”라는 식의 동정을 할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책으로만 화자를 본다. 화자 역시 다큐멘터리로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렇기에 독자와 화자 모두, 화자나 골목의 사람들에 관하여 쉽게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일부 독자는 너무 과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그 상황에 자신을 얹어 보게 된다면, 위 시를 쓰고 있는 시인과 시인이 창조한 화자를 과하다고 판단 못 할 것이다.
그저 이런 과잉이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살아야 하니까 나온 중얼거림이자, 문장이기에. 독자의 삶과 함께 겹쳐 읽어야 그 절박함과 절실함에서 오는 진정성이 돋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위 시집은 전반적으로 절실함과 절박함. 살아남고 살기 위해서 나온 한 사람의 목소리이자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모여 있다. 특히 시인의 자아가 가장 많이 밀려 나오는 시가 있는데 바로 <넌 아직 재밌니> 다.
-
네 주인집 정원엔 올해도 붓꽃이 피어났니?
넌 아직 반지하에 사니?
물이 새던 그 방에
죽은 시계를 벽에 걸어 놓은 채
내가 쓰다 준 회색 소파에 앉아 골똘한 표정을 짓는지
내가 놀러 가자고 해도 안 나가고
누가 사귀자고 해도 안 만나고
그렇게 살아도 지겹지 않니?
너 아직 붓을 안 꺾었니?
나는 가끔 시를 쓰다가 우는데
그림이 거의 팔리지 않아도
전혀 알아주지 않아도
너는 네 인생에 만족하더라
공공연히 너를 끌어내리려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찌그러진 물감 옆에 물통을 쏟으면서도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라
너는 화가라는 업이 짊어져야 하는 짐처럼 여겨지지 않니?
그 직업이 놀이처럼 재밌니?
어떻게 하면 시 짓기가 다시 재밌어질까
내일 나는 마감해야 해서
네 전시회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넌 아직 재밌니> 110~111p 전문
시를 쓰는 것이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김이듬의 시를 만나기 전에도 여러 번 했었다. 하나의 행동을 계절이 지나는지도 모르고 열중하면, 열중한 일에 대한 흥미도 열중한 만큼 쉽게 떨어지기도 한다. 의학적인 용어로는 번아웃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며, 이는 시로만 한정 지을 수 없으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넌 아직 재밌니>에서 화자 역시 지금은 번아웃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시 안에 화자 자기의 이야기를 넣을 때마다 가끔 울뿐더러 시 쓰기가 더 이상 재미없다고 하니. 반면 화자가 대화하고 있는 타자는 화자와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타자는 화자가 이 시를 쓰고 있을 당시의 내일 전시회가 있는 것을 보거나 “너는 네 인생에 만족하더라”라는 화자의 말을 통해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린 그들의 삶을 살아보지도, 바라보지도 않았고,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번아웃이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위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나아갔나보다는 시 자체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화자는 시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시인. 특히 ‘시’라는 소재로 시를 쓸 땐, 화자의 정서를 시인의 손끝으로 완결짓게 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에 수록된 <넌 아직 재밌니>는 결국 화자의 끝없이 쓰려는 마음이 시인의 손끝으로 완결됐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포기하고 싶어도, 붙잡게 되는 것은 시를 써야만 할 것 같은 상황과 그 상황을 마주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화자는 “내일 나는 마감해야 해서”라는 말로 상황을 끝까지 마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는 화자와 시를 읽고 있는 독자. 특히 그들 중 위 시를 쓴 김이듬을 향한 위로와 응원의 손길이다. 이런 그녀의 손길은 과잉과 함께 있을 때 더 빛을 보이는데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시가 바로 표제작이다.
-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미움이 없어 분노가 없어 관심과 눈치도 없이 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올리브유로 비누 만들기만큼 쉽게 지나갔다
{중략}
자연은 좋겠다 폭풍이든 초대형 산불이든 지진이든 일으켜도 자연은 벌하지 않으니까 대부분 인재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니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학 가기 전엔 매일 다퉜던 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동생이 공원 공중화장실에서 얼굴이 벌개가지고 울면서 나왔다
유머를 잃어버렸지만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을 보냈다 내 동생은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다 키가 백팔십이고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다 이렇게 설명해 봤자 그 아주머니는 남자가 왜 여자 화장실에 들어오냐고 소리쳤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내 탓이라고 말하지 말라며 나는 동생을 다독였다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향기로웠다 봄이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104~105p 中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말이다.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생을 살아가는 모두가 한 계절이 지나기 전에 부정적인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은. 그렇기에, 시집 제목에서도 시 단 편 하나에서도 흥미롭게, 그러나 좀 조심스럽게 읽게 됐다.
이번 시에서도 산문 형식으로 빠르지 않게 전개된다. 도입부의 진술과 자연들의 묘사는 화자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결미에 다다르면, 이 자연물의 묘사가 단순 자연이나 화자의 내면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의 끝에는 동생이 나온다. 동생은 여자지만, 사회에서는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보이는 존재. 그런 존재가 상처받고, 상처를 주는 사람도 무지로 인해 상처를 주는 것에 대한 상처를 여자 화장실에 들어간 화자의 동생과 그녀에게 뭐라고 소리치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로 보여준다. 이 때문에 사람의 상태가 바뀌는 것을 도입에서 자연 묘사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시를 볼 때 화자 역시 동생과 같은 상처를 가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유머를 잃어버렸지만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을 보냈다 내 동생은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다”라는 구절을 볼 때, 동생이 당한 상황과 비슷한 일을 겪었고, 지금, 이 상황이 화자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동생이 이렇게 된 이유 역시 “내 탓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타자인 동생을 다독였다. 이를 볼 때 화자는 그 아픔을 경험하고 경험 중이면서도 조금씩 묻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향기로웠다 봄이었다”라고 말하며 시를 닫는다. 이는 상처에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나아온 자신에 대한 합리화이자 동생에게 향한 위로를 표현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것처럼. 타자인 동생과 함께 위 시를 읽는 독자에게도, 수많은 사람에게 밀려 나간 사람들에게 향해 시는 나아간다.
다만, 수많은 사람의 상처를 견딘 시간과 그 시절을 향한 위로에서 “향기로웠다 봄이었다”는 다소 낭만으로 포장되었기에 표현이 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는 결미로서 아쉽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 결미를 통해 시는 더 단단해진 인상을 들게 한다. 과한 표현이지만, 상처나, 지침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가진 삶의 언어이기에. 결코 과하다고 이야기하지 안 는개 맞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김이듬의 시는 사람에 따라 이미지나 정서가 과잉되어 나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시가 길고, 경제적인 시는 김이듬의 시에서 말하기 어렵다.
다만, 경제적이지 못한 시가 결코 창작자나 독자에게 악영향만 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독자들은 과잉 속에서도 삶을 보고, 그 삶에 자신을 대입하여 위로받고 싶은 독자 또한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김이듬의 시들은 한 사람의 내면이자 견딤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모난 곳도, 포기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겠지만, 결국 김이듬은 제 동료인 시와 다시 함께 글을 쓰고 있다.
위 시를 읽고 있을 무수한 독자들이 자신의 시간을 가지며, 자신을 다시 돌아 볼 수 있게. 그 독자 속에 있는 시인 김이듬 자신도 위로 할 수 있게. 김이듬의 시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독자에게 자신의 과잉을 내밀어 준다. 비록 모나 보여도, 삶을 보여준다.
추천 콘텐츠
나는 늘 믿어왔다. 삶과 문학. 삶과 시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시는 삶의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삶은 시를 지탱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기에 나는 늘 내 삶을 바탕으로 문학을 써왔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에는 나의 순간순간을 이룬 ‘학교’,‘기침’,‘소리’,‘가족’,‘친구’,‘그리움’,‘이방인’,‘유령’과 같은 단어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내 문학 세계를 이끌어왔다. 내 내면의 세계에서부터 외면의 타자에게까지 한 사람의 삶이 다른 한 사람에게 닿기를 바라며. 나는 끝없이 순간들을 마주하며 활자를 컴퓨터 화면에 새겼다. 그러면서 하나의 생을 담은 문학을 추구해 왔고 꿈꿔 왔다.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내 경험과 삶을 텍스트 안에 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행위들을 했다. 하루를 끝까지 살아내는 것. 감정과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글을 쓸 수 있는 물건 앞에 가서 글을 쓰는 것. 이를 실천하기 위해 나는 글과 삶에 전념한다는 태도로 살아왔고 문학을 해왔다. 하지만 일상과 삶을 텍스트로 환원할 때 늘 빈틈이 생겼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문학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자 기본적인 수단이 문자라는 상징체계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의미론적 특징을 나타내는 기호 삼각형{Semiotic Triangle}은 기호[문자], 지시물, 개념 사이의 관계를 그려낸 것이다. 이 개념 안에서 기호와 지시물의 관계는 간접적인 영향을 가진다. 대표적인 예시로 ‘나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 실제 있는 나무를 가지고 수필을 쓰거나 소설과 시를 쓴다 할 때, 텍스트 안에 적힌 문자 ‘나무’는 실제 필자가 바라보고 쓴 나무가 아닌 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문자가 함유하는 것은 단순 개념이지 지시물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삶 전체를 온전히 텍스트 안에 문자로 전환하여 넣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이런 문자의 특성은 필자가 생각하는 것을, 독자가 온전하고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그렇기에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은 자신과 독자들이 생각하는 사물의 심리 영상의 간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묘사하고 서술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이런 식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이는 문자의 빈틈을 메우는 과정이며 타자와 세상과 소통하는 글쓰기에서 가장 기초적이면서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하지만 때때로 이렇게 구체적으로 쓰는 과정 안에서, 한 글 안에 많은 정보를 풀고, 많은 언어를 쓰며 과한 감정을 표출하게 되기도 한다. 실제로도 글을 쓰다 보면, 많은 습작생, 일반 초고를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중간중간에 보이기도 한다. 이런 과잉은 문학. 특히 함축성을 중요시하는 시에서는 문제가 되는 부분이 된다.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서 시에서 함축의 방식이 조금씩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 가고 있다. 고전적인 운문의 함축 방식보다는 서술하는 호흡으로 삶의 단면을 함축하는 산문시가 지금 한국 시단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진다. 대표적으로 2026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자인 임유영
- 송희찬
- 2026-07-30
대부분의 한국 고전 산문들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을 띄고 있다. 당장 ‘홍길동전’과 ‘장화홍련전’의 결말을 두고 비교해봐도 그렇다. 두 작품 모두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는 결말이다. 이러한 구성 방식과 결말은 한국 근대 이전의 소설들 속에서 주를 이뤘다. 그러나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는 한국 고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도 상업 소설인 웹소설, 상업 드라마, 상업 영화 등 대중적인 이야기 플롯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일종의 모티프다. 이런 모티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한다. 그중 인과응보, 권선징악이라는 모티프는 전 세대에 걸쳐 과거에서 현재까지 매체와 서술 방식을 변주하며 계속 나타난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상업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권선징악과 관련된 모티프가 자주 나타난다. 상업 드라마에서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보여주는 드라마 중 일부는 복수라는 장르를 내세우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 ‘펜트하우스’, sbs 시리즈 드라마 ‘모범택시’, ‘열혈사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복수극도 개인에 이야기만을 하는 드라마와 개인을 넘어 사회까지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 이로 볼 때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복수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모범택시’ 시리즈, ‘열혈사제’ 시리즈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 현실 사회 문제도 건드리는 복수극이다. 따라서 ‘열혈사제’와 ‘모범택시’ 시리즈는 각종 사회 문제를 시리즈별로 이야기하여 그려낸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구은재와 신애리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차이점은 각각 드라마의 결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김순옥의 ‘아내의 유혹’은 악역인 신애리와 정교빈이 죽음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극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주인공인 구은재는 그들이 받은 벌을 보고도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구은재는 신애리에게 피해를 받은 피해자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신애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수의 성공이 결코 행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역으로 한때 악역이었던 애리를 용서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결말을 맺는다. 반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 실현으로 복수를 진행하는 ‘모범택시’ 시리즈와 같은 드라마는 무지개 운수라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이 사회 문제를 대표하는 사건을 해결하는 식으로 에피소드별 결말을 맺는다. 그 과정은 복수극과 복수 대행 서비스 안에 맞춰서 폭력적이고, 역지사지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해결된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는 악인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벌하는 모습을 보며 고양된 감정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하지
- 송희찬
- 2026-06-29
2024년 12월 3일 밤. 내가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친구들이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를 기다리고 있던, 그날 밤. 우리의 일상은 지워질 뻔했다. 평화를 깨트리는 한 남자의 목소리로. 현재 내란 수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윤석열의 목소리로. 그날도 평소처럼 지냈던 날이다. 7살짜리 동생을 재우고, 그 옆에서 잠들었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의 모습만이 잠들기 전, 마지막 기억이다. 그리고 평소처럼 잠을 설치다가 23시쯤 저절로 깨어났다. 그때 엄마와 이모의 통화 소리를 통해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한 사회가 한 사람이자 어느 집단의 폭력으로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다행히도 그의 계엄이자 내란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멈췄다. 국회의 신속한 대응과 잠을 자지 않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나갔던 수많은 시민 덕분에. 나 역시 새벽 4시까지 내란의 밤을 뉴스로 전달받고 바라봤다. 아침이 될 때까지 끝까지 마주했다. 그때 내 손에 들고 있었던 책은 그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한강의 <>였다. 한강의 <>는 2025년 12월 3일의 밤처럼 폭력의 혼란이 가득했던, 1980년대 광주를 배경으로 쓰인 소설이다. 한 사람 한 사람. 5월 18일 전후 광주에 있던 사상자와 피해자 그리고 유가족의 시점이 알레고리 형식으로 쓰여 있다. 1부의 동호로부터 시작되어 2부 겹겹이 쌓인 시체 하나인 정대. 마지막 6장에는 죽은 동호 어머니의 시점으로 진행되고 막을 내린다. 그날 직간접적으로 그곳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하나의 파트를 넘길 때마다 읽히게 하고 모으게 한다. 1장의 소제목은 ‘어린 새’다.화자는 동호다. 동호는 죽은 정대 혹은 살아 있을 정대를 찾고 있다. 그러면서 추도식이 열리는 성당에서 시체들 사이를 방황하고 있다. 이후 2부에서 정대의 사망 여부가 나타난다. 그는 시체로서 그리고 그 몸에서 튀어나온 혼으로서 죽은 자와 산 자의 모습을 바라만 본다. 그런 그는 소설 전체에 있어 혼과 평범한 일상을 지키려던 여린 삶으로 작용한다. 혼은 위 책에서 어린 새이자 흰 새로 묘사된다. 맑고 순수하고 아무 잘못 없는 여린 존재로. 그러나 이런 여리고 순수한 존재들이 국가의 폭력 혹은 사회적으로의 폭력, 개인과 개인 사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폭력을 마주하게 될 때, 그들의 순수한 신체와 색은 변질된다. 이는 흰색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이다. 흰색은 흰색을 더하지 않으면, 색을 잃는다. 초록색과 결합되면 연두색이 되고, 노란색과 결합하면 연한 노란색이 되고, 검은색과 결합하면 연한 검은색이 된다. 심지어 흰색만 있을 때도 바람에 흩어져 오는 먼지로 인해 오염된다. 이런 특징은 소설의 혼과 시체에서도 드러난다. 순수하고 여린 것들이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던 순간들의 마지막이 이렇게 묘사된다.“여자의 이마부터 왼쪽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차례 대검으로 그은 자상이 있다. 곤봉으로 맞은 듯한 오른쪽 두개골은 움푹 함몰돼 뇌수가 보인다. 눈에 띄는 그 상처들이 가장 먼저 썩었다. 타박상을 입은 상체의 피멍들이 뒤따라 부패했다.”
- 송희찬
- 2026-04-30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전, 김이듬 시인의 시 너무 좋던데, 몇몇 분들은 과하다고 하는 분들도 있어서 적어본 비평이에요. 개인적으로 2024년에 위 시집이 나왔으면, 아마도 신용목 시인의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대신 위 시집이 글틴에 올라왔을 수도?(그만큼 위로 많이 받은 시집이에요. 김이듬 시인의 시를 읽으면 창작자로서 공감이 많이가고 오랫동안 울리게 하는 힘이 있어요^^)+ 요즘 글을 노트북 한글 혹은 블로그(비공개로) 올려두고 복붙하는데, 글틴에 다 적어놓고 오타 확인 작업할 때 최근들어 마우스 표시(맞는지 모르겠지만 흰색 화살표)가 잘 보이지 않아 어렵네요...제 노트북이 안좋은건지, 제 시력이 나쁜건지 아님 글틴 자체에서 원래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댓글 보신 글티너 분들 있으면 알려주세요.(제 시력이나 노트북 둘 중 하나가 좋지 않을 것 같은 확률이 더 크긴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