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의 그림으로 만든 퍼즐, <노란 개를 버리러>
- 작성자 naR
- 작성일 20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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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의 그림으로 만든 퍼즐, <노란 개를 버리러>
- <노란 개를 버리러>(김숨 지음, 문학동네 출판)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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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은 십 년을 침묵했다. (2008)와 (2010)는 사실 그렇게 모호한 영화가 아니었다. 누가 살인을 저질렀느냐, 누가 누구를 배신하느냐 등 서사 초반부터 분명함이 존재한다. 이 두 영화의 냉기는 '진실을 모른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아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무력감이었다.그러나 그 태도가 진짜 인식론적 모호성으로 도약한 것은 (2016)에 이르러서였다. 외지인이 악마인지, 무명이 신인지 악마인지, 일광이 진짜 퇴마사인지 사기꾼인지 영화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이 쥐고 나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의심이었다.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영화의 윤리였다.그래서 가 십 년 만에 내놓은 답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장르적 변덕으로 넘기기엔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나홍진이 에서 정점에 달했던 그 모호성을 견디는 태도를 포기했다는 것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역시 소문에서 출발한다.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은 외계인보다 먼저 등장하며, 세계를 다시 의심하게 만든다. 적어도 영화의 전반부는 그렇다. 그러나 이 의심을 끝까지 연장했다면, 는 중반부에 이르러 외계인이라는 해답을 제시한다.발단은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이다. 이 전근대적인,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이 설정은 지금까지 나홍진이 잘해온 것, 진실을 유예시키는 서사를 예고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후 영화가 중반에 다다랐을때,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외계생명체라는 명확한 정답이 나온다. 그러곤 액션신이다. 그렇다고 난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장면이 공들인 티가 나고 미학적으로나 연출적으로나 완성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나홍진의 패기가 실현되는 곳이 모호성이었던 만큼 정답의 세계에서의 나홍진은 약간 아쉬웠던 듯 보인다.영화 초반 외계인이 등장하지 않고 범석이 홀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호랑이라 추정되는 그것을 쫓고 있을때의 긴장감과 서스펜스는 크리처물에 정수라 해도 좋을만큼 완벽했다. 내가 기대한 크리처 호러의 미학은 설명되지 않는 공포에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초반부터 불가해의 공포를 키워왔다. 마치 곡성처럼. 그러나 작중에선 범석이 바미기르라는 외계인이 마을 사람들 모두를 죽였건만 공감하는 듯한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 엔딩엔 결국 불가해의 공포였던 외계인이 말을 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렇기에 나는 말하려 한다. 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불가해의 공포를 지닌 서사가 마치 와 같은 공감에 서사로 바뀌는 전환이 이상하다. 우선 영화에서 범석은 바미기르를 총으로 죽일 수 있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총을 쏘던 도중 외계인의 눈물에 클로즈업을 한다 그때 관객들은 직감한다. 아 이거 불가해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아니구나. 어째서 였을까? 적어도 가 초반에 구축한 공포는 대상의 내면이 닫혀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그러나 영화는 외계인의 눈물을 클로즈업한다눈물은 가장 보편적인 감정 표현 가운데 하나다관객은 그 순간 외계인을 이해하려 하기 시작한다.이해의 대상이 된 존재는 더
- 고래
- 2026-07-18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 명예, 관계, 돈.... 그러다가 많은 경우 우리는 이 생각들을 남에게 들킬까 얼른 마음의 한 구석에 박아놓는다. 마치 도둑이 훔친 물건을 숨겨놓듯이 말이다. 이 때 우리의 가슴 속에 박힌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끊임없이 동정하며 이를 명분으로 스스로 세상과 멀어지게 한다.어떤 문제에 당면했을 때, 우리는 늘 쉬운 길과 옳은 길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우리는 옳은 길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여 마지못해 쉬운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선택은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상실의 아픔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이를 가슴속에 숨겨놓는다. 무언가를 잃은 내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가여워서, 이 사실을 남에게 들키면 내 자신이 초라해 보일까 등의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 쉬운 길의 끝에는 자기연민과 상처, 고립만이 남아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쉬운 길을 선택했던 자신의 모습에서, 머지않아 상처를 스스로 핥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는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의 결과가 어떤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책에서 상실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옳은 길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그건 바로 상실이라는 그 사실을 마주보는 것이다. 상실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타인을 통해 자신만이 상실을 경험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 곳이 바로 상실 극복의 시발점이자 상실로 인한 슬픔의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모두 가슴속에 있는 말 못할 상실한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고, 우리는 그것을 품고 살아간다. 더 나아가기 위해선,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상실을 타인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나는 무얼 잃어버렸는가. 상실을 경험한지 너무 오래되어 원래 없었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이미 쉬운 길을 선택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상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때에, 상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보게 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이를 인정하고, 직시하여 타인을 통해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여 더 나아갈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 윤시현
- 2026-07-16
사실 운문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이 작품이 잘 읽힐지 모르겠다. 으음 그래도, 이 시를 한 편의 소설이라고 생각해 봐. 두 사람은 초능력을 가진 누군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 그 초능력은 보잘 것 없는 초능력이야. 우산을 쓰면 자신에게만 비가 내리고, 우산을 접으면 온 세상에 비가 내리는 능력이지.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그는 비를 맞아야만 해. 슬픔을 견디는 사람처럼 외롭겠지. 혼자만 동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거야. 남들이 보기엔 길을 가다가 넘어진 것처럼,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런데 그런 얘기에 빠져 있던 ‘너’에게 ‘나’는 말해. “외롭다는 거지? 아니, 그 사람 말고, 너 말이야.” “너 집이 어디야? 내가 데려다줄게.” 그 말에 ‘너’는 집(안식처,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는 곳)이 없다며 우물쭈물하게 대답해.그런 ‘너’에게 ‘나’는 흔쾌히 우산을 빌려주지. 영원히 비가 내리면 어떡할지 걱정하는 ‘너’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 영원히 내리는 비는 없다고. 온 세상이 흐린 법도 없다고. 그러니까 지금의 감정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영원히 ‘외로우면’ 어떡하지, 그 마음을 비 내리는 풍경에 빗대 말한 ‘너’에게, ‘진짜 비’를 예시로 든 ‘나’가 ‘너’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괜히 퉁명스러워져선 “내가 그걸 모르겠어?” “이건 시(비유)라고.” 대답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 “아니, 이건 대화야.” 여기서 대화는 무슨 뜻일까?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 때 대화의 방식을 사용하잖아. 대화를 하면서 곁에 함께 있어주잖아. 그러니까 ‘나’가 방금 한 말(영원히 내리는 비는 없고, 온 세상이 흐린 법도 없다)은 대화, 즉 위로라는 뜻이야. 더불어서 좀 크게 보면 ‘대화’란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해. 이건 ‘시’가 아니라 ‘대화(시 제목)인데? 하는, 재밌는 맛이 나는 농담이기도 한 셈이지. 어쨌든 세상에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거나 상관 없이, 혼자만 늘 비를 맞는 듯하고, 영원히 비를 맞을 것만 같은 외로움 속을 걷는 너를 위로하는 ‘대화’의 뜻 아닐까? 이 시는 ‘위로’를 말하는 시인 거지. ‘너’는 ‘나’가 건넨 우산을 쓰고, 비를 맞지 않은 채 걸어가. 우산은 빗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슬픔을 견디는 힘이야. 그렇게 함께 가던 중 우산을 파는 편의점을 발견한 너는, 너만의 우산을 쓰고, 각자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지. 인생의 길 속에서 우리는 가끔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겠지. 그 길을 혼자서 갈 수 없다면 함께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그렇게 걷다 보면 네게도 너만의 힘이 생길 거야.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기를 수 있겠지. 편의점에서 새 우산을 구입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위로를 얻은 상대와 늘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시절인연이라는 단어 알지? 잠시 같은 마음을 나눴던 사람일지라도 평생 인생의 길을 똑같이 걸을 수는 없어. 우리는 그 상대와 헤어질 수도 있으며, 어쩌면 시 속의 ‘너’와 ‘나’처럼 영영 다신 마주칠 수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 방백
- 2026-07-13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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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윤스리 님 // 재밌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이탈로 칼비노 좋아합니다. 아직 '우리의 선조들' 시리즈는 밖에 못 읽었는데, 마침 집 근처 새로 생긴 도서관에 민음사 전집이 풀 세트로 들어와 있어서 시간 내서 읽어보려고요^^
글 잘 봤습니다. 저도 희곡을 좋아해서 의 베케트, 에드워드 올비, 유진 오닐 등 유명한 극작가들의 대표작은 탐독했는데 한국에도 이런 작품이 있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좋은 책 소개시켜 주셔서 감사해요 ㅎ 아 그리고 이탈로 칼비노도 '이상한' 작가라 사료되는데 혹시나 읽으시지 않았다면 강력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