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상상력은 갇힐 수 없어, 오늘도 삽질을-이기호 '수인' 을 읽고

  • 작성자 러블리아
  • 작성일 2014-05-06
  • 조회수 3,832

1. 서론

 

이기호, 흔한 이름 같으면서도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작가이다. 수업 시간에 잠깐 감상했던 그의 등단작 <버니>를 읽으며, 머릿속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좆나리 멋있는 그녀가 왔어……. 랄라라라라랄~’ 소설이 아니라 마치 노래 가사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뮤지션의 소울이 들어간 랩 가사를 읽는 기분. 학교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노래 가사 같은 시는 많이 접해 봤지만, 노래 가사 같은 소설은 처음 본다. 아주 신선하고 기존의 틀을 파괴한 그런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신 <수인>이란 작품도 상당히 관심이 갔다. 소설가가 되고 싶으면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고. (작가가 되겠다면서,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다니. 반성하자!) 수인이라……. 어딘가에 갇혀 있는 사람의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미국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나 영화 <쇼생크 탈출> 같은 탈옥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목만 봐서는 아주 삭막하다.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은 절대 갇히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고, 책을 펼쳐봤다. 소설 <수인>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란 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다. 경쾌한 연두색 표지에, 무수히 찍힌 유머러스한 발자국들. 그 발자국의 주인인 듯한, 머리를 감싸고 있는 사람. 아마도 표지 속의 사람이 바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선한 상상을 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작가. 그리고 발자국은 작가의 상상력의 자취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수인>을 읽으면서, 주인공은 땅굴을 파며 갇혀 있을지언정 상상력은 절대 갇히지 않고 머릿속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2. 본론

 

(1) 어서 와~ 이기호는 처음이지?

1972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9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버니〉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2010년 제11회 이효석문학상을, 2013년 제1회 김승옥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수상경력으로는 2010년 제11회 이효석문학상, 2013년 제1회 김승옥 문학상이 있으며, 저서로는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와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가 있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사과는 잘해요>……. 전체적으로 소설의 제목들이 심상치 않다. 요즘 유행하는 ‘열도의 제목학원’ 교본으로도 쓰일 수 있을 정도이다! 살짝 박민규 작가 같은 느낌도 나면서, 중독성 있고 신선한 제목들이다.

제목이 이 정도인데 속은 어떨까? 모든 소설들이 기본 구조를 파괴한 형식들이다. 앞에서 말한 <버니>처럼 노래 가사 형식인 것도 있고,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성경의 형식을 따 왔다. <나쁜 소설-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읽어줘야 하는 이야기>는 최면을 거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용 야채볶음 흙>은 레시피 형식이다.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도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야채볶음 흙>은 지하 벙커에 숨어든 주인공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흙을 먹는다는 내용이고, <국기게양대 로망스>의 주인공은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떼어 내어 팔려다, 국기게양대와 이상한 사랑에 빠진다.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 는 주인공이 ‘사과 대행’을 하는 사건이 들어가 있다. 상상을 뛰어넘는 줄거리와 형식, 그리고 내용은 필자도 닮고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강원도 태생답게 소설 속에는 강원도가 자주 등장한다. (이기호 작가 외에도, 전상국 작가, 김형경 작가 같은 강원도 출신 문인들이 확실히 고향의 배경이나 정서를 잘 살리는 듯) <원주통신>에서는 작가의 고향인 원주시 단구동에 박경리 선생이 이사를 왔던 일화를 토대로, <토지>의 인물인 길상과 서희가 룸살롱을 차린 스토리를 넣어 소설로 형상화했고,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는 작가가 어린 시절, 고향에서 겪었던 따돌림의 경험이다. <수인>의 주인공 수영이 서울을 떠나 소설 집필을 위해 살았던 공간도 ‘강원도 대관령 근처 태기산’의 화전민 폐가이다.

전아리 같은 작가처럼,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들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별 볼일 없는 32세의 무명작가인 수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수인>을 비롯하여,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국기게양대 로망스>의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가 속된 말로 ‘쩌리’내지는 ‘잉여’라고 불리는 사회의 비주류 인물들이다. 이기호 작가의 소설 주인공 이름은 ‘이시봉’이 대부분이다. ‘이 X발’(초성으로 시옷과 비읍)을 꼬아서 만든 이름인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마이너리티들이 이 사회에 던지는 저항이나 욕을 이름으로 형상화 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시봉, 사회가 왜 이 모양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머러스한 면을 잃지 않는 점도 작가만의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2) 줄거리까지 가두면 너무해!

대한민국에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났다. 바로 남동부와 남서부의 원자력 발전소 2기가 폭발해버린 것! 반경 40km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이 즉사하고, 방사능은 400km이상 유출되었다. 이 사고로 인해 전 국토의 70% 이상이 낙진으로 뒤덮여버렸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휴전선은 뚫려버리고, 정부조차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까지 가게 된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망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실제 사고였다면, 대한민국은 그대로 소멸이다. 피난은 고사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한민국의 정부마저 국민을 보호해주긴 고사하고,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은 ‘고립된’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박수영은 절대 죽지 않았다. 강원도 대관령 근처 태기산의 폐가에서 아주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서울에서 살던 수영은 4년 전에 등단한 소설가이다. 하지만 생활고로 인해 집필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부양하신 외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할머니의 입원비와 건강 비를 위해 대필업에 뛰어들게 된다. 주로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고, 할머니를 간호하며 글을 썼지만 생활고 해결은 쉽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수영은 태기산의 한 화전민 폐가에 들어가게 된다. 11개월 동안 소설 쓰기에 몰두하던 중, 그때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다. 소설을 완성하고 사회에 나갔지만, 나라가 없어졌다니. 내 작품을 읽어줄 독자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다.

수영이 심판대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 소설의 시작 부분이다. 대한민국에 원전 폭발이라는 국가적 재난이 일어난 것과 그로 인한 전쟁까지. UN에서 피난민들 중 자격이 되는 사람들을 선별하여 외국에 정착시켜주는데, 평생 글만 써온 수영에게는 자격증도, 특별한 기술도 없었다. 수영이 원하는 것은, 소설을 쓸 수 만 있는 그런 곳이다. 결국 심판관은 그가 소설가인지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며 발간되었던 소설책을 가져오라 하였고, 수영은 폐허가 된 도심 속, 봉인되어버린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기 위해, 지하로 땅굴을 파기로 한다. 곡괭이로 종로 출입구 시멘트벽을 부수며 자신의 소설책을 찾으러 나서지만, 두꺼운 시멘트벽은 며칠이 지나도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벽을 부수던 어느 날, 수영은 교보문고에 자신의 소설 대신, 대필해 준 자서전이 꽂혀 있는 꿈을 꾼다. 다음 날 자신의 소설이 팔렸으면 어쩌나 걱정하지만, 사실 심판관이 원했던 것은 수영의 소설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써먹기 위한 기술이었다. 수영이 땅굴을 파며 수영은 심판관이 자신의 소설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판관은 수영이 정말 소설가인지, 아닌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난민들을 외국에 보내기 위해 오직 실생활에서 유용한 기술 유무 사항만 필요했던 것이다.

심판관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소설이 아니라, 그나마 쓸 만한 ‘기술’이었단 걸 알고 분노한 수영은 심판관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려친다. 다시 땅굴로 내려간 그는 교보문고에 다시 도착한다. 곡괭이로 벽을 부수며 자신이 파내려갔던 땅굴을 막고, 교보문고에서 라이터를 껐다 켰다를 반복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3)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갇혀 있어

<수인>은 말 그대로, 가둘 수(囚) 자에 사람 인(人) 자. 비좁은 공간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사전 상으로도 감옥에 갇힌 사람, 수감자, 갇혀 있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본문 내용에는 전혀 감옥이라든지, 어딘가에 갇혀 있는 사람의 모습은 표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인생을 심판하는 감독관과 서기가 법정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을 뿐, 법정소설이나 감옥과는 살짝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수인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을까? 꼭 감옥이나 어느 공간 속에 갇힌 것이 아니더라도, 작품 안에 고립을 암시하는 상황이 여러 군데 들어가 있다.

수영이 제대로 된 소설을 한 편 써보기 위해 강원도의 폐가에서 생활하게 된다. 자신이 대필해 준 자서전들 대신, 자신의 영혼이 담긴 그런 소설을 한 편 쓰기 위해 11개월 동안 외부와는 완벽히 단절되어 살아온 것이다. 고립된 동안, 자신의 주민번호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소설에 몰두한 것을 보면, 자신의 내면세계에 얼마나 심취했을지, 소설 속에는 폐가에서의 생활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어떻게 보면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소설을 쓴다는 사람이, 동시대의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이 자기 세계에만 몰두해서 `어떻게 좋은 글이 나오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문학을 통해 사회에 저항하는 작가들도 많다. 하지만 대다수의 작가들은 사실상 자신의 내면세계에 깊이 심취해 있다. 언뜻 보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작가들도 사실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성찰하는 것을 통해, 주변을 관찰하고 이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수영은 완전히 내면세계에 심취하고 싶은 작가로 보인다. 사실은 수영도 생활 속에서 글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고, 생활고와 할머니와의 사별을 겪으며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내면세계에 심취하고 갇혀 지내게 된 것은 아닐까? 필자 또한 어려서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이 있었고, 그 일을 계기로 내면세계에 심취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어쩌면 작가를 꿈꾸게 된 것도 그러한 경험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심판을 받는 수영의 모습도 묘하게 고립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11개월 동안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아무도 갈 곳이 없는 막막한 느낌과 오래 전 연락이 끊긴 사랑하는 사람들도 없이 외롭게 심판대에 선 것이다. 심판을 받는 수영의 말투에도 잘 드러나 있다. 수영의 대사를 보면, 중간 중간 말줄임표가 많이 쓰여 휴지가 긴 편이다. 읽는 내내 심장을 자물쇠와 쇠사슬로 감아놓은 듯,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저는 그러니까,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소, 소설가가 제 직업입니다”

“아, 그러니까 저는……. 그러니까, 소설을 쓰다가 그만…….”

“저, 그러니까……. 제가 쓴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소설은……. 예술의 영역이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줄곧 자신이 없이 더듬거리는 듯한 말투는, 마치 오랫동안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을 연상시킨다. 줄곧 사회와 단절되어 있다가 간신히 세상으로 나왔는데, 그 세상조차도 방사능 낙진이 휘날리고,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말이 청산유수처럼 나오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의 대사를 읽으며 일부러 독자가 답답해지게 하는 효과를 준 것 같다. 심판을 받는 상황도, 마치 이 세상을 떠난 후 최후의 심판을 받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심판관과 서기의 말투는 그리 딱딱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으나, 부드럽게 말하는 척, 비꼬는 말투를 사용하고 있다. 이 심판이 끝나면 나의 인생이 완전히 정해질 거란 그런 느낌도, 운명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세상 돌아가는 일들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수영이 심판대 위에 설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자신의 주민번호와 건강보험 가입 이력조차 가물가물한데, 병아리 감별사 자격증이나, 대형 운전면허 소지 여부까지 물어보다니. 자신의 소설이 이럴 때는 아무런 쓸모가 없고, 무능력(?)한 폐인으로 전락했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대한민국도 고립된 상황이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방불케 하는 사고가 터지고, 내전까지 일어난 상황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국민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 서기가 애리조나 주에 살던 교포이고, 심판관은 뉴욕 주에 살던 교포 3세이다. 작가가 이러한 언급을 넣은 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인적사항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포’인 심판관과 서기는 어쩌면 이러한 대한민국의 현실에 좌절하고 외국으로 떠난 사람들이 아닐까? 조국이 멸망한 후에도 역시 국민들을 외국에 정착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이 둘이 교포라는 사실을 통해, 대한민국이 이대로라면 희망이 없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해 보라는 심판관의 말을 듣고, 수영은 곡괭이를 파며 땅으로 내려간다. 지하에 위치한 교보문고 역시, 방사능 때문에 봉인되어 있다. 교보문고의 통로를 그대로 막은 시멘트벽을 내려치며, 심판관과 서기에게 자신의 소설로 인정받고 싶어 외롭게 일하는 수영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가둘 수(囚)자를 쭉 늘려 보면, 수영이 땅굴을 파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 나오지 않을까? 사실상 노동력이 필요했던 심판관에게, 그래도 소설이란 정신적 가치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수영의 모습을 통해, 고립되어 버린 예술가의 현실을 봤다. 그리고 심판관과 서기를 통해서는 예술을 그저 도구적 가치로만 보고, 물질주의에 갇힌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소설가 같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가둘 수(囚) 자가 자세히 보면, 사면초가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방이 막혀서 도망칠 수도 없고, 다른 길도 없는 상황에 놓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앞에서 언급한 수영의 대사를 보면, 소설 쓰는 일에 대해 언급할 때 특히 더듬거리는 것이 보인다. 자신의 소설을 인정해 줄 사람이 없는 상황, 자신의 직업에 대한 프라이드가 사라진 상황을 암시할 수도 있겠다.

 

“아, 어느 국가가 망한 나라의 소설가를 고이 받아들이겠어요? 소설 말고 뭐 다른 장점이 하나쯤은 있어야죠.”

 

심판관의 말처럼, 나라가 망해버린 판국에 세상 기준에서 보면 돈이 전혀 되지 않는 예술가들을 받아줄 국가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세상이 끝나지 않은 때라도, 문학의 위기가 오랬동안 대두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소설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것에 대한 경고와 암시가 아닐까?

 

그건 일종의 형벌이 아니었을까? 나라가 망한 줄도 모르고 소설만 쓴 죄? 소설을 쓰느라 심사에 늦게 도착한 죄? 심판관의 논리에 반감을 드러낸 죄……?

 

자본주의가 우세한 시대에, 소설만 쓰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죄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수영이 땅굴을 파고 힘겹게 내려가는 것도, 심판관이 내린 형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 봐서, 작가는 소설 쓰는 것, 곧 예술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어 버리는 세상에 대해 개탄을 표하고 있다.

가둘 수(囚) 자 자체가 사람이 네모난 공간 안에 갇힌 모양을 암시하고 있고, 알고 보면 우리들은 모두 갇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활고에 갇혀 대필업을 하다, 외할머니와 사별 후, 소박한 꿈인 소설을 위해 ‘산골 폐가’라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수영이나, 위기의 상황에서 갈 곳이 없어진 상황인 대한민국,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소설가를 포함한 예술가들. 도구적 가치가 우선시되어버린 삭막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갇혀서 지내는 것이 아닐까?

 

 

(4) 나는 삽질한다, 고로 존재한다

어떤 사람이 쓸데없어 보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흔히 “삽질한다.”는 말을 쓴다. 사전상의 의미와는 달리, “헛질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군대에서 온 말로, ‘죄 없는 땅을 괜히 파며 괴롭힌다.’, ‘엉뚱한 일을 하며 시간을 죽인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군대에서 선임들이 후임에게 삽질을 시키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나 괜히 군기로 자신들을 괴롭힌다는 생각에서 온 말일 거라 추측해 본다.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수영이 삽질, 아니 곡괭이질을 하며 교보문고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일 것이다. 수영은 특별한 기술도 없고 자격증도 없는 수영이 유일하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자신의 소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디스켓에 소설을 저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관의 명령에 의해 땅굴을 파고 교보문고에 내려가 소설을 찾아와야 하게 되었다. 수영의 곡괭이질은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수영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심판관이 틀렸구나. 그 역시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그를 우쭐하게 만들어주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이란, 말도 안 되는 심판관의 제안을, 현실로 바꾸는 일뿐인 것 같았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지만, 세상엔 그런 일들이 너무도 쉽게, 너무도 많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밟고 있는 현실이 그랬다. 그런 현실 속에서 25m두께의 시멘트벽을 뚫는다는 것은, 그것은 오히려 더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는 일처럼 여겨졌다. 그렇다면…….

오기가 생긴 것일까? 수영은 소설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 심판관에게, 자신의 소설은 여전히 팔리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서서히 땅굴을 파내려가기 시작한다. 자격증도, 능력도 없는 자신이 소설이 있음을 증명함으로서 심판관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 25m의 시멘트벽을 뚫는 것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데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땅굴을 파는 동안, 그는 곡괭이질과 땅굴을 파내려가는 방법에 대해 거의 마스터하게 된다. 자신과 소설의 존재 가치, 단 하나를 위해 매일 곡괭이와 혼연일체가 되어 땅굴을 파는 노동을 하는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곡괭이를 다루는 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양손의 힘으로만 곡괭이를 휘둘렀지만, 이내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모든 벽에는 그 나름대로의 결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시멘트가 서서히 굳어갈 때, 그때 그곳에 불던 바람과 공기의 흐름이 만든 미세한 흐름이었다. 그 흐름을 따라 곡괭이를 내려찍어야만 더 많은 시멘트가 벽에서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로 보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자신이 불어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그리고 자신의 소설이 교보문고에서 이미 팔렸을 거란 걱정까지 하게 된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저곳에 네 소설책이 남아 있지 않다면, 직원들이 출판사에 반품을 시켰거나, 남아 있는 한 권을 누구나 사갔다면, 그땐 어쩌지……? 수영은 그렇게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네가 그 소설책을 확인한 건 1년 전의 일이잖아. 그때도 네 소설책은 서점 안에 딱 1권만 남아 있었다고……. 그게 과연 1년이 지나는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이런 걱정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꿈을 꾸게 된다. 교보문고에서 자신의 책이 꽂힌 19번 코너에, 자신의 소설 분류번호와 같은 번호를 단 책을 찾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소설책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대신 써준 자서전이었다. 수영은 자신의 존재가치가 무시당할까봐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있다.

 

048-33! 그는 그 책을 집어들었다. 아아, 그 책은 그의 소설책이 아니었다. 분류번호는 맞았으나 그의 소설책이 아니었다. 분류번호는 맞았지만, 그의 소설책이 아니었다. 그가 썼으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온 책, 그가 대신 써준 자서전이었다!

 

자서전도 분명히 자신의 작품이 맞고, 자신의 문체로 쓴 글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소설책과 차이점이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지, 자신이 그 글을 충분히 즐기면서 썼는지의 척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자서전은 생활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글이다. 외할머니의 치료비와 간병비를 벌기 위해, 자신이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은 내버려두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되어 쓴 글이다. 수영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름이 없는 책, 다른 사람인 척하고 쓴 책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악몽을 꾸는 것을 통해, 수영조차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신의 소설책 대신 자서전이 꽂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진짜 존재보다는 껍데기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는 암시로도 보인다.

 

그는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에 입은 상처가 문제였다. 그는 자신이 놓인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계속 그 상처만 떠올렸다. 어떻게 하든 그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다.

 

심판관이 소설을 일반적인 물건들과 같은 취급을 하자, 그때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바로 이 ‘상처’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위협을 뜻한다. 더 이상 소설이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과 대한민국에서 이미 돈으로 환산될 효용가치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곡괭이란 단어가 사라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것이 어디 비단 곡괭이에만 해당되는 일일 것인가. 낫도, 호미도, 동상들도, 교통 표지판도, 그리고 그의 소설도……. 모두 같은 운명일 것이다.

 

외국에 가서 다른 일들을 찾아야 하는데, 굳이 외국으로 곡괭이를 가지고 나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수영은 소형원동기 운전면허나, 배관기술자 같은 자격증이나 기술도 없어 이 상황에서는 절대 외국으로 보내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외국으로도 반출되지 못한 곡괭이는 수영과 그의 소설을 뜻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해 갈 곳이 없어진 수영과, 효용가치가 사라져 더 이상 읽을 가치가 없어진 소설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곡괭이란 단어가 사라지는 순간’은, 바로 소설의 존재 가치가 지구상에서 소멸해 버리는 순간이고, 곧 수영의 존재 가치 또한 사라져 버리는 순간을 뜻하고 있다.

심판관과 서기는 겉으로 수영을 격려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그가 정말 노동력으로서 쓸모가 있는지만 관찰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소설에 관심을 가진 듯 보이나, 단순히 그가 쓸 만한 사람인지, 그의 소설이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에만 관심을 두고, 그의 존재 가치 따위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수영이 땅굴을 파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두려는 것도, 그의 노동 가치를 간접적으로 증명할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아, 이 벽을 다 깼잖아요. 이렇게 두꺼운 벽을 혼자서 다 깼는데, 그 이상 무슨 증명이 더 필요합니까? 제가 그 동안 사진으로 다 찍어서 이미 서류 제출 끝났어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 심판관이 소설책을 너무 좋아해서, 뭐 겸사겸사 이쪽으로 작업장을 잡은 거죠. 어쨌든 당신은 이 땅을 떠나게 되어 좋고, 우리 심판관은 밤에 무료하지 않아서 좋으니, 뭐 이거야말로 윈윈 아니겠습니까? 안 그런가요?

 

수영이 소설을 꺼내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노동이다. 아무리 자신의 소중한 것을 꺼내 와야 하는 상황에서, 25m의 시멘트벽을 부순다는 것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일까? 원전 사고로 대국가적인 재앙이 일어난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상관없이, 존재 증명을 위한 몸부림이, 그저 돈벌이를 하기 좋을 노동적인 가치로만 치환된다는 현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아니, 어쩌면 이미 회색 시멘트벽 자체가 그의 존재였고, 그의 실체였는지도 몰랐다.

 

이곳엔 사람도 없고, 소설도 없다. 그저 효용성을 따지기 좋은, 속된 말로 부려먹기 좋을 노동력만이 어떤 사람의 전부가 되고 있다. 과연 곡괭이나 회색 시멘트벽 자체가 그의 존재가 될 수 있고, 모든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5) 달과 6펜스의 상관관계

수영의 이야기는, 문예창작학과에서 수학하며 소설가로 등단하기를 꿈꾸는 필자에게 있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머릿속에 생각해 둔 소재나 줄거리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생활고로 인해 소설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면 어떨까? 게다가 수영은 갓 등단한 신인이었고, 할머니 간호를 위해 제대로 집필에 몰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집안에 환자분이 있으면 돈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생업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가 있다. 암환자들 가족 대부분이 실직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회사원이나 공무원도 아니라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수영도 소설이란 ‘예술적 글쓰기’ 대신 ‘상업적 글쓰기’인 대필 작가로 펜을 돌렸다. 예전에 신문의 문학 면에서, 생활고로 인해 대필 작가 활동을 하셨다는 어느 작가분이 떠올랐다. 과연 나라면 생활고 속에서도 소설을 놓을 결심을 할 수가 있을까.

 

“소설가라, 소설가…….모집 직종 란엔 없는 직업이군요.”

 

소설 속에서, 예술가가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설 자리가 없어진 상황임에도, 수영이 가고자 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 뿐이다. 프랑스든, 어디든. 어느 나라든 상관없이, 소설을 쓸 수 있는 곳. 그곳만 원한 것이다. 수영은 소설로 돈을 벌기를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돈이 되는 글쓰기인 대필업을 마다하고, 제대로 된 자신의 소설, 즉 ‘순수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대관령 산골로 찾아간 것이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컬한 상황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직업을 소설가라 말하면서도, 그것으로 돈을 벌고 싶어 하지 않다니. 직업이란 수입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을 말하지 않는가? 물론 필자도 순수문학 쪽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하지만 그를 통해 베스트셀러작가가 되고, 돈을 벌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재능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은 욕구는 다들 하나씩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 예술 활동을 직업과 돈벌이의 문제에 집어넣기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어찌 보면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추구하지 않고, 순수한 예술만을 지향하니까. 예술은 돈이 우선이 되어선 안 된다는 관점도 있다. 흔한 말로, ‘꿈을 꿀 때 돈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지, 꿈이 돈을 따라선 안 된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일전에 문예창작학과 특강 중에서, ‘서정시의 운명과 혼의 형식’이라는,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김경복 교수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영혼과 소통하는 글을 쓰기 위해선, 돈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적 가치는 절대 돈과 통용될 수 없다고, 상업적으로 흘러가는 오늘날의 예술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셨다. “마광수의 <가자, 장미여관으로> 같은 시도 영혼과 소통하는 시라고 볼 수 있을까”라는 필자의 다소 황당한(?) 질문에도, “장미여관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은 되지만, 거기서 돈을 버는 것은 안 된다”고 답을 하셨다.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물질에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그리고 예술 활동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전업 예술가 외에, 다른 안정적인 일을 통해 수입을 얻고, 부수적으로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자본주의에 의하면, 통상적으로 돈이란 것은 일한 결과에 따라 받는 보상으로 봐야 하는 것 같다. 직업의 귀천이란 말도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그런 시각으로 볼 때, 예술가들에게 그만큼 대우를 해 주지 않는 것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예술이라고 해서 완전히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미술이라면 작품 제작에 필요한 돈이 있을 것이고, 문학도 겉으로 보기에 작품 창작 과정에선 컴퓨터 혹은 원고지 구입비용이나, 독서를 위한 책값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흔히들 ‘돈이 없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그러한 불편함의 크기는 사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소설을 읽으며, 예술이라는 ‘달’의 세계와 돈벌이라는 ‘6펜스’의 세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술에 돈이 완전히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심판관과 서기가 예술 행위까지 완전히 자본주의의 실용적 가치로 재단하는 모습을 보고, 돈이 주목적이 되면 그 또한 위험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술이냐 돈이냐 완전히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가짐 그 자체가 아닐까. 서기와 심판관은 물론이고, 수영조차도 생활고에 시달리다 온전히 자신의 소설을 즐기지 못한 것 같아 보여서 안타까웠다.

 

 

(6) 예술 작품과 발명품의 경계

소설 속에는 ‘발명품’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발명이란 전깃불이나 자동차같이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과학의 산물’이 아닌가? 문학작품 같은 예술품을, 어떤 의미로 쓰이든 ‘발명품’이라고 가리키는 것은 처음 들어 보았다.

 

“이것도 일종의 발명품 아닌가요?”

“네?”

“선생이 쓰는 소설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구나 라디오 같은 발명품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래도 그거와는 좀 다른…….”

 

작품 속에서, ‘발명품’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심판관의 생각으로는, 소설이란 하나의 예술 작품이 아니라 전구나 라디오 같은 발명품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수영의 생각은 다르다. 자신이 쓰는 소설이란 것은 분명히 자신이 만들어 낸 어떤 것은 맞지만, 전구나 라디오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둠 속, 축구장 크기만 한 서점 안에, 수많은 발명품들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는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어디선가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수영은 스스로 교보문고 안에 갇히는 길을 택한다. 그는 교보문고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발명품’이라고 보고 있다. 그 역시 심판관이 소설을 보는 관점에 수긍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낙담했다고 하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일까. 그가 소설들과 함께 땅굴 속에 갇히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아, 그는 소설에 대한 자부심이 일말은 남아 있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어려서 재미있게 봤던 전집 중, 저명한 교육 출판사인 ㈜교원의 <발명가와 발명>이 있었다. 위인전과 과학책이 혼재된 듯한 콘셉트로, 세계의 유명한 발명가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발명품, 그리고 그것에 응용된 과학적 원리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다. 애니메이션 비디오로도 있었는데, 만화 주제가가 아직도 기억난다. ‘참 놀라운 세상이 있어요~ 참 새로운 세계가 있어요~ 신나는 모험이 시작 되는 곳~ 함께 가보자~ 알쏭달쏭 생각해요~ 뚝딱뚝딱 만들어요~ 새로운 생각은 놀라운 세상을 만들어요~ 밝은 꿈과 희망이 넘치는 곳~’ 이 노래를 들으며 든 생각은, 발명이란 것은 누군가의 고뇌를 거쳐 만들어진 것으로, 세상을 편리한 신세계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후로, 세상은 그야말로 누구나 쉽게 빛을 접할 수 있는, ‘밝은 꿈과 희망이 넘치는 곳’이 되었다.

 

“선생이 건낸 이 소설도 지금 여기선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

“그게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그게 다 발명품이어서 그런 거 아닌가요?”

 

하지만 이러한 발명품들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게 된다면? 백열전구 대신 더 성능이 좋은 형광등이나 LED등의 출시로, 이젠 전 세계적으로 백열전구를 사용하지 않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예술 작품은 어떤가? 실생활에 직접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풍요롭게 해주고 어떤 이에게 ‘신세계’를 가져다주는 것은 맞다. 그러나 발명품과는 달리 예술 작품은 절대 소멸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예술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것 뿐, 감상해주는 사람이나 독자가 있다면 절대 죽지 않은 것이다. 예술은 단순히 물질적 가치로는 재단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제가 낸 소설책이 아직도 서점에 진열되어 있으니까요. 4년 전에 나왔고, 얼마 팔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서점에 있으니까요……. 그건 다른 발명품들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예술이란 것은 ‘특별한 발명품’ 이라고 생각한다. 수영이 위험도 불사한 채 심판관의 말을 듣고 깊은 땅굴을 파내려가 교보문고로 내려가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쓴 소설을 아직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의 소설은 아직도 교보문고에서 팔리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소설은 가치가 있고, 하나의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술 작품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발명품’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한자를 직역하면 발명(發明)은 세상을 밝게 만들어 주는 힘이란 뜻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으니까. 예술도 세상을 밝게 만들 수 있고, 놀라운 세상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적어도 예술품의 가치를 알아봐주고 제대로 감상하는 사람은 한 명 정도는 있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라디오나 전구 같은 일반적인 발명품과는 분명히 뭔가 다르다.

한 예를 들어, 요즘 인문대학이나 예술대학의 많은 과가 폐과되거나 통폐합되고 있다. 모든 대학의 성과를 취업률로만 재단하다 보니, ‘취업’이란 잣대로 판단하기엔 살짝 거리가 있는 인문, 예술대학의 과는 그 잣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의 경우, 취업률보다는 등단 성과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는가? 대학 취업률의 기준이 학과마다 다르게 적용되지 않고, 모든 대학이 천편일률적으로 ‘취업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작품 속에서 소설이란 예술작품마저도 일반적인 ‘발명품’에 맞춰 효용성의 유무를 따지는 모습과 비슷하다. 예술도 분명히 작자의 ‘발명품’임에 틀림이 없지만, 일반적인 발명품과는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7) 정부가 잘못했네!!

이기호 소설가는 이문열 작가나 공지영 작가처럼 특별히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이다. 직접 소설이나 트위터로 정부를 비판하거나 작품에 직접적으로 사회비판적 시선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수인> 속에도 무능력한 대한민국 정부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에 전쟁이 터지면 대한민국은 그대로 소멸해 버릴 거라고 말한 어느 네티즌이 있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소설 속에서도 정부는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전혀 보호해 주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 방사능이 터질 때, 초기 대응조차 잘못되었을 것이고, 낙진이 확산되는 것도 막지 못한 것 같다.

 

정부는 이 우연한 사고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저 동요하지 마라, 서둘러 특단의 대책을 내놓겠다, 위법행위는 엄단하겠다, 등의 피상적인 구호만 외쳐댔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들 마음속에 있던 정부를 깨끗하게 지워버린 상태였다. 이제 그들에게 지시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방사능과 회색 낙진뿐이었다.

 

마치 세월호 사건을 연상케 한다. 자신은 먼저 배를 버리고 탈출했으면서, 승객들에게는 객실 안에 그대로 있으라고 안내 방송을 한 선장과 승무원들, 초기 대응을 잘 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대응한 정부와 공무원들의 모습과 많이 비슷하다. 그래도, 소설 속의 사람들은 살 길이라도 스스로 찾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앞에서 말했듯, 실제 상황이었다면 대한민국은 심판대에 설 겨를도 없이 그대로 소멸해버렸을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예술과 문학이 멀어진 것은, 소설 쓰는 일을 비롯한 예술 활동에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은 정부의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처럼 실생활에 유용하고, 소위 돈이 되는 것들만 우대하고, 당장은 성과가 없어 보이는 예술은 시선 너머로 치워둔 것도 문제점이다. 정부가 조금만 예술에 신경을 썼더라면, 소설을 단순히 돈과 물질로 보는 서기나 심판관 같은 사람들이 존재했을까?

 

 

 

3. 결론

 

작품을 감상하며, 이기호 작가의 <수인>은 정말 소설가가 되려면 꼭 읽어봐야 할 작품 중 하나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피부로 와 닿았다. 소설의 미래와, 도구적 가치가 우선시되는 세상에서 소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해준 좋은 작품이었다. 재난 상황을 다룬, 다른 문학 작품들과는 뭔가 다른 분위기가 드는 것도 좋았다. 다른 재난영화나 문학은, 어려운 상황에서의 가족애나 연인과의 사랑을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그 속에서 소설의 미래에 대해, 예술에 대해 정신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거의 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도 사실 소설이 도구적인 가치에 재단되는 것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다른 길을 가지 않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에 대해 답을 하기 어려운 것은 필자도 잘 알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 그냥 글이 좋고, 자신의 상상력을 절대 가둬놓을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오늘도 삽질을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허황된 짓처럼 보이더라도, 땅을 파다 보면 그 속에서 석유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 끝내 자부심을 놓지 않았던 수영처럼, 이기호 작가도 이 소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의 영혼이 담긴 자식같은 존재.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교보문고 종로 출입구 벽면에 새겨진 문구,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의 뜻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돈의 가치로만 재단되는 삭막한 세상 속에선 ‘책’이란 정신적 가치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정신적인 가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다가오는 때이다.

러블리아
러블리아

추천 콘텐츠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