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 작성자 밍맹
- 작성일 202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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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은 죽은 듯 고요했다. 창밖에서는 봄 햇살이 먼지처럼 가볍게 얹혀 있었고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 드는 바람이 커튼을 천천히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듯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다 뜬 느낌보다는 어쩌다 다시 삶을 되찾게 된 느낌이었다. 천장은 하얗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밝았다. 공기 속에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소독약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고, 귀 끝엔 낮고 일정한 기계음이 맴돌았다. 몸 곳곳에 붙어 있는 기계 장치들은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기계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실패했다. 모든 것이 다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다시 돌아왔다. 내게 느껴진 건 살았다는 안도도, 아프다는 고통도 아니었다. 처음 느껴진 감정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마른 목구멍, 혀끝에 닿는 무기력한 침묵. 몸은 마치 비워진 껍데기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천천히 수액이 흘러들어오는 감각만이 희미하게 손끝을 간질였다.
“다온아... 다온아... 들려? 너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머릿속에 맴돌던, 내 결정에 가장 많은 질문을 던지게 했던 그 사람. 바로 엄마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자 갑자기 눈물이라도 흐르려는 듯 눈이 아려왔다. 하지만 눈은 아려오기만 할 뿐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대신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엄마는 다시 한번 더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를 부른다기보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절박한 동작처럼 들렸다. 내가 다시 어딘가로 떨어지지 않도록, 이곳에 붙들어 두려는 몸짓 같았다.
‘괜찮아. 난 이미 죽었으니까.’
나는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마치 내 안의 문을 걸어 잠그기라도 하듯, 엄마의 목소리를 천천히 밀어냈다.
나의 마지막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옥상, 차가운 바람, 흩날리던 머리카락.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의 적막한 정적. 그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조용했던 순간이었다. 세상의 소음이 모두 꺼진 듯했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빨리 가라며 재촉하는 자동차 경적도,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사라졌다. 시간조차 정지된 듯한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를 맞이한 건 흰 천장과 기계음뿐이었다.
“내가 살아있는 척을 너무 오래 해서 내가 진짜 살아있는 줄 알았어.”
내가 남긴 마지막 문장이었다. 마지막인데도 SNS에 올리지도 못하고, 핸드폰 메모장에 쓸쓸히 적어두었던 말이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다는 건 기적이 아니었다. 운명도, 우연도 아니었다. 그저 다시 한번 내 목을 조이는 형벌일 뿐이었다.
웅성거리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걱정스러운 엄마의 표정이 아닌 흰 가운을 입은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의사였다. 그는 내 몸을 쭉 훑어보더니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겠어요?”
나는 그의 얼굴만 응시했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호흡기 탓에 대답 못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호흡기도 제거했지만, 그 이후에도 난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의사는 몇 번 펜으로 뭔가를 끄적이고는 병실을 나갔다. 드디어 끝났나 했지만 또 다른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상담사로 보이는 온화한 얼굴의 여인이었다. 그 여자는 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셨는지 기억하세요?”
나는 침묵했다. 그녀는 여러 질문을 하고 오랜 시간 나의 답변을 기다렸지만, 나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나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엄마에게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말한 뒤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나는 그들에게 들려줄 얘기도 듣고 싶은 얘기도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내가 왜 그곳에 올라갔는지, 어떤 마음으로 발을 내디뎠는지 그건 모두 나만 아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마 영원히 나만 아는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말 대신 매일 밤 나만의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기록. 죽은 내가 남기는 존재의 자국처럼, 내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들을.
왜냐면 난 그 이후로 살아있지 않으니까.
2025년 3월 14일
D+1 “오늘도 난 살아있는 척을 한다.”
오늘도 나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떴다. 창밖에 봄 햇빛은 유리창을 희미하게 번지듯 앉아 있었고, 창틀에 널린 커튼은 무심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세상은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의미를 가지고. 그 사이에서 나는 늘 맞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끼워 넣을 수 없는 오류처럼 존재 했다. 그저 숨 쉬는 것도, 깨어있는 것도 그냥 다 연기 같았다. 나를 가끔 찾아오는 사람마다 나에게 말했다.
“이건 기적이야.”
“삶이 너를 다시 선택한 거야.”
모두가 나에게 살아있는 사람이라 말했다. 나는 그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선택도, 기적도 아니었다. 그저 사라지고 싶었지만 사라지지 못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저 그런 병원 밥을 대충 때우고 엄마가 조심스레 다시 병실에 들어왔다. 예전 내가 알던 엄마와 달리 많이 말하지 않았고, 그저 반찬통에 챙겨온 사과를 조용히 건넬 뿐이었다. 그리고 내 곁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듯 아무 말 없이 그 책들을 건네었다. 책들의 제목은 대개 이랬다.
‘위로가 되는 예쁜 문장들’
‘힘들 때 버티는 방법’
‘마지막 희망’
하지만 나는 그 책들을 펼치지 않았다. 그 어떤 문장도 지금의 나를 위로하거나 나를 구할 문장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병실 문 너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른들이 잔잔히 대화하는 소리도 가끔가끔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나의 병실 안의 차가운 공기와 달리 따스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애써 외면하려 등을 돌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오늘 오후에도 의사가 들어와 내 상태를 확인했고 상담사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조심스러웠고 또 친절했다.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분이라는 것은 나에게는 더 이상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었다. 색도, 모양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두려웠다. 무언가를 말하면, 내가 다시 현실로 끌려올까 봐. 내가 다시 그 악몽 같던 삶을 다시 한번 살아가게 될까 봐. 상담사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아무 대답 없는 나에게도 빙그레 웃고는 인사를 하고 다시 병실 밖으로 향했다.
벌써 밤이 깊어졌다. 나는 혼자 남았다. 그리고 나는 기록을 남긴다. 죽은 내가 살아있는 척을 하며 세상에 마지막 흔적을 남긴다.
2025년 3월 17일
D+4 “그 애는 문도 두드리지 않고 들어왔다.”
낮 3시쯤이었다. 오늘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며칠 동안 익숙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복도 너머의 잔잔한 대화도 들리지 않았다. 그 공백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햇빛은 서서히 기울어 커튼의 그림자가 병실 바닥을 천천히 덮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노크도 없었고, 예고도 없었다. 간호사도 의사도 상담사도 아니었다. 환자복을 입은 마른 체격의 또래 남자아이가 조심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누가 들어오든 상관없었고 그에게 관심을 줄 체력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익숙한 사람처럼 내 앞의 빈 침대에 걸터앉아 말했다.
“여기 조용해서 좋네. 간호사님 말대로 아무도 없는 것 같고.”
그 말에 나는 눈만 깜빡였다. 그 아이는 나를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단지 공간이 조용해서 좋다고 말했다. 그 말투가 묘하게 가벼웠는데도 어쩐지 불편하지 않았다.
“간호사님이 나한테는 여기 아무도 없다 했거든. 기분 나빴으면 미안.”
그는 입꼬리를 약간 더 올렸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 아이의 입꼬리도 어느샌가 내려가 있었다.
“사람들이 너 얘기 많이 하더라. 너 기적이라면서.”
기적. 또 그 말이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그에게 돌아가 있던 고개를 돌려서 눈을 감았다. 좀 다른 사람인가 했는데 결국 똑같았다.
“기적…. 웃기지 않냐? 본인들은 사람을 살린 것도 아닌데 왜 기적을 운운할까?”
그는 천천히,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다들 기적이면 행복하고 모두가 괜찮을 줄 아나 봐. 사실은 그 누구보다 안 괜찮은데.”
그 목소리는 처음으로 균열이 가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고개를 그에게 돌렸다. 그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병원에서 살아난 여섯 번째 사람이야. 넌 일곱 번째고.”
그 말은 마치, 아무도 모르게 접힌 쪽지를 내미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은 위태로워 보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굳세게 땅을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가 떠난 자리엔 열려 있는 병실 문이 조금 비스듬히 남겨졌다. 닫으려 했지만, 나는 그 틈을 그대로 두었다. 그 애가 다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그 애가 남긴 공기 속 잔향이 조금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랐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 애는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우리 사이엔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강요도, 이해시키려는 다급함도 없었다. 그건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공기였다.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상처로만 남았던 나에게, 방금 전 그 애의 침묵은 오히려 위로였다. 그 아이의 말은 단단하지 않았지만 오래 남았다. 위로하려는 말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 조용히 닿았다. 나는 여전히 죽은 사람이지만, 오늘은 누군가 나의 죽음 속을 흘긋 바라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조금 무서운 감정이었다. 나는 창밖을 다시 보았다. 늘 보던 그 창이었다. 바람이 커튼을 천천히 밀고 들어왔고, 햇빛은 천천히 내리쬐며 병실 안으로 기울어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오늘의 바람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조금 다르게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 애는 내게 기적이라는 말이 웃기다고 했다. 사람들이 만든 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내 속 어딘가 깊은 곳에서 그 말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기적이면 뭐가 달라지는데.”
나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모두는 단지 살아있다는 결과만을 말했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남았는지는 관심 없었다.
그 애는 그런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애의 말은 단단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병실에 남겨진 말 중, 유일하게 내 안쪽 어딘가에 닿은 말이었다.
자꾸만 그 애의 말투가 몇 번이나 떠올랐다.
'웃기지 않냐?'
그 짧은 말 안에, 스스로를 비웃는 듯한 체념과 누군가 자신처럼 느끼길 바라는 조용한 소망이 섞여 있었던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말에서 묘하게 어딘가 나를 닮은 얼굴을 보았다.
밤이 되자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기계음과 가끔 지나가는 발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직,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느낌을 안고 있다. 그 애의 마지막 발소리, 그 애의 작은 숨, 그 애가 머물렀던 공기의 잔상. 나는 여전히 죽은 사람이지만, 오늘은 누군가 나의 죽음 속을 흘긋 바라본 것 같은 기분이다.
아무 말도 없던 내가, 속으로 조용히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건 죽어있던 내가 오늘 하루 동안, 살아있는 척 말고 진짜로 ‘무언가’를 느낀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조금 무서웠다.
2025년 3월 18일
D+5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늘 아침도 어제와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창밖의 햇볕은 여전히 따뜻했고, 커튼은 언제나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그런데 오늘은 그 움직임조차 낯설게 다가왔다. 어제 남긴 기록 때문일까. 문득 머릿속에 조용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왜였을까?”
그 물음은 어제 이후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창밖을 보며 한참을 그 질문만 되뇌었다. 의사도 오지 않았고, 상담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도 오늘은 병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적막한 하루 동안 나는 마침내 어떤 기억을 스스로 꺼내어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눈을 감고 외면해온 시간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나날들을.
나는 누군가에게 직접 상처받은 적은 없었다. 따돌림도 없었고, 폭력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이유 없이 무거운 날들이었다.
왜였을까?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아무도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아무도 나를 ‘정말로’ 찾지 않았다. 그 말은 참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내 이름을 불렀고, 누군가는 나를 친구라 불렀고, 가족들은 나를 돌봤다.
하지만 그건 모두, 틀 안에서 정해진 관계들이었다.
내가 사라진다면, 그들이 진짜 나를 그리워할까? 아니, 내가 있었는지도 잊지 않을까?
교실 한복판에서도, 식탁의 한자리에 앉아 있을 때조차 내가 그곳에 꼭 있어야만 할 이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자리는 마치, 나 대신 누구든 앉아도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도 날 미워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날 절실히 원하지도 않았다.
그게 매일, 매 순간 나를 갉아먹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살아있는 척’을 하며 살아왔다. 웃는 법을 배웠고, 맞장구치는 법도 익혔다. 하지만 속은 공허했다. 그 빈 공간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았고, 누가 옆에 있어도 외로웠다. 그런 날들이 쌓이고 쌓였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그게 시작이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무슨 사건이 일어나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 이 세상에 있었으면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기분이었고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삶이었다.
애초에 없던 것 같은 존재. 그게 나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내 숨을 조여왔다.
그래서 나는…. 결국 이유를 찾지 못한 삶을 조용히 내려놓기로 했던 거다.
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그저…. 살아갈 이유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2025년 3월 19일
D+6 “말을 걸어온 건, 이번에도 그 애였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다. 창밖의 햇살은 더 짙었고, 커튼은 오늘도 같은 방향으로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문득, 어제 쓴 글이 떠올랐다.
‘살아야 할 이유.’
그 문장을 끝내고도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유를 묻는 그 짧은 문장 안에 너무 많은 날이 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장에는 어떤 정답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무렵, 병실 문이 또 한 번 열렸다.
이번에도 노크는 없었다.
그 애였다.
그 애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환자복 차림으로, 어제 앉았던 그 침대 자리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았다. 나를 보자마자 인사하지도 않고, 그냥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여기 있는 게 익숙하다는 듯이.
나는 어제와는 달리 아무 말 없이 그 애를 살짝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그는 약간 입꼬리를 올릴 뿐, 정적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뭔가 너랑은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왜인지 모르게 편한 것 같아. 그리고….”
그 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여기 있으면 좀 덜 무서운 것 같아.”
그러곤 침대 옆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조용한데 누가 있잖아. 그러면 조금 덜 무서워.”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누가 곁에 있으면, 조용해도 덜 무섭다는 말.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늘 고요는 외로움이었고, 침묵은 단절이었다.
하지만 그 애의 말에는… 침묵 속에도 누군가의 ‘기척’이 있다는 걸 믿는 사람의 체온이 묻어 있었다.
그 애는 한참을 말없이 병실 안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물었다.
“어제 너, 울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울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눈물이 흐르진 않았지만, 안에서 무너진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그 애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창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나도 가끔 울어. 눈물 나지 않아도, 마음이 울 때 있잖아.”
그러고는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게 더 오래가. 훨씬 아프고.”
그 순간,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 애의 말이 자꾸만 안으로 들어왔다. 방어하려 해도, 튕겨지지 않았다. 그건 너무 조용해서, 너무 솔직해서, 아프지 않게 아픈 말이었다.
그 애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창밖에 떨어진 햇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내일 또 올게. 문 닫지 말고 둬.”
그는 문을 닫지 않고 나갔다. 그 열린 문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병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오늘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누군가와 오랜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었다. 몸이 무겁지도 않았고, 공기가 차갑지도 않았다. 그 애는 다정하지 않았고, 밝지도 않았지만… 그 침묵이 자꾸 생각났다.
그 애가 나간 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일기를 쓰던 공책을 꺼냈다. 죽은 내가 오늘도 살아있는 척을 한다. 그런데… 오늘의 ‘척’은 어제와는 조금 달랐다.
‘그 애가 다녀간 자리에 아직도 기척이 남아있다.’
그건 아주 조용하고, 아주 사소한 변화였지만
죽어있던 내 안의 공기 흐름이…
조금 바뀌기 시작했다.
2025년 3월 20일
D+7 “처음으로, 내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창밖의 햇살은 어김없이 병실을 비추고 있었다. 커튼은 익숙한 리듬으로 바람에 흔들렸고, 기계음은 낮고 일정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달라진 건 하나 없었지만, 어제부터인가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
발소리.
누군가의 기척.
그리고,
문이 열렸다.
예상한 대로, 그 애였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나 자신에게조차 낯선 일이었다. 그 애는 내가 쳐다보는 걸 보곤 순간 멈칫하더니,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다.
“기다렸어?”
그 물음은 장난스러웠지만, 어딘가 진심처럼 들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건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건넨 ‘말’ 같은 것이었다.
그 애는 익숙한 동작으로 창가 쪽 의자에 앉았다. 잠깐 창밖을 보던 그는 작은 소리를 꺼냈다.
“너…. 글 쓰지? 간호사님이 그랬어. 네가 기록을 남긴다고.”
그 말에 잠시 멈칫하며 그 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도 해봤거든. 처음엔 말하기 싫어서 적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적다 보면 좀…. 가라앉더라.”
그 말에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적는다.
말하지 못한 것들을, 적는다.
그건 분명히 죽은 후 내가 쓰던 방식이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침대 옆 탁자 위의 메모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 애의 시선을 느꼈다. 그 애는 나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나는 펜을 들고, 메모장 한 귀퉁이에 이렇게 적었다.
“기다리진 않았어. 하지만…. 네가 다시 올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 애는 조용히 다가와 메모장을 읽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지만, 어쩐지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너, 생각보다 말 많네.”
그러곤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다시 자기 자리에 앉았다.
이상하게, 그 말이 좋았다.
나를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보다 말 많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그 방식이.
그건 처음으로 내가 단지 고장 난 존재가 아닌, ‘사람’으로 불린 기분이었다.
그 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곁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곁에서, 오늘 하루 동안 처음으로 가슴이 덜 무거웠다.
조금, 숨을 쉬는 게 쉬워졌다.
오늘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말없이 연결된 하루를 보냈다.
2025년 3월 21일
D+8 “작은 움직임 하나가, 긴 침묵을 흔들었다.”
오늘 아침도 특별할 건 없었다. 햇살은 여전히 투명했고, 기계음은 익숙하게 병실 안을 메웠다.
하지만 나는 문득, 오늘 그 애가 올까? 라는 생각을 했다. 기다린 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은 그 애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오후가 조금 지나 병실 문이 열렸다.
그 애였다.
오늘은 손에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봉투 안에서 조용히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 애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빈 침대에 앉았고,
나는 오늘, 그 애를 바라보는 데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 애는 나를 슬쩍 보며 봉투를 들었다.
“간식시간인데, 먹기 싫어서 나눠주러 왔어.”
그리고 나를 향해 종이봉투를 건넸다. 그 안에는 병원에서 나눠주는 작고 둥근 귤 한 개와 포장지에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사탕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묘한 따뜻함을 느꼈다. 거절하지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 봉투를 받았다.
그 애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아무 말 없이 다시 창밖을 봤다.
우리 둘 사이에는 여전히 긴 침묵이 흘렀지만, 오늘은 그 침묵이 어쩐지…. 덜 어색했다.
그리고 그 애가 조용히 말했다.
“나, 너 있는 병실 자주 와도 돼?”
그건 허락을 구하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작은 신호처럼 들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떼진 않았지만, 내 안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애는 만족한 듯 웃더니,
가만히 귤 하나를 까서 자기 입에 넣고는 나머지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사탕은 그대로 남겨뒀다. 나중에 네가 먹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귤껍질을 바라보다가, 사탕 하나를 집어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오늘 처음으로, 내 손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감각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건 살아 있는 감각이었다.
나는 오늘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침묵은 더 이상 두려움이나 절망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나와 같은 공간 안에 있고, 그 사람이 말없이 내 곁에 머물러 준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덜 외로웠다.
밤이 되어 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내 손바닥은 아직도 사탕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애가 준 사탕은 아직 먹지 않았다. 먹기 아까운 게 아니라, 그냥… 지금은 쥐고만 있어도 괜찮아서.
오늘의 나는 죽은 후 처음으로 어제보다 아주 조금, 살아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걸 아무도 몰라도 괜찮았다. 나만 알면, 오늘은 그걸로 충분했다.
2025년 3월 22일
D+9 “내가 낸 소리가, 누군가에게 닿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흐렸다. 햇살이 들지 않는 병실은 어딘가 낯설었다. 커튼은 닫힌 창문 탓에 바람에 흔들리지 못했고, 창밖의 풍경도 흐릿했다.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침대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아직 먹지 않은 어제의 사탕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포장지의 무늬가 손바닥에 눌려 희미하게 남을 정도로,
나는 그걸 오랫동안 놓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점심 무렵, 문이 열렸다.
그 애였다.
오늘도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이번엔 작은 색종이였다.
그리고 처음 접어본 듯 서툰 모양이 종이학 한마리였다.
그 애는 조용히 내 탁자 위에 종이학을 올려놓고, 아무 말 없이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창문을 반쯤 열자, 찬 바람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애는 창밖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은 너한테 목소리 한 번쯤 듣고 싶었는데.”
그리고 이어서,
“그냥…. 무슨 말이라도 좋아.”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애는 기대하지 않은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포기한 듯 조용했다.
나는 손에 쥔 사탕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포장을 벗겼다.
포장지의 끝이 ‘짤깍’하고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그 소리는 병실 안에 작지만, 선명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 애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나는 아직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 애는 아주 천천히, 작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 작은 소리가 내가 말하고 싶다는 신호였던 것처럼.
그때,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다.
정확히 어떤 마음이었는진 모르겠다.
그저 갑자기,
이 침묵이 오늘은 너무 길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지도.
나는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히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그 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바로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 진짜 말했네. 고마우니까 종이학 두 마리 접어올게.”
나는 그 말에 작게, 정말 아주 작게 웃었다.
기계음 너머에서 창밖의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으로, 내가 낸 소리가 누군가에게 닿았다. 내가 무너지는 대신, 무언가를 내어주는 쪽에 가까워진 하루였다.
나는 오늘의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죽어있던 내가 말을 했다.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내 안의 무언가는 확실히 달라졌다.”
2025년 3월 23일
D-day “두 마리의 종이학만이, 그 애를 대신해 다녀갔다.”
오늘 아침은 어제보다 더 조용했다.
비는 밤새 내렸고, 창밖엔 작은 물웅덩이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그 애가 올 거라는 생각을 당연스레 하게 되었다.
어제, 내가 처음으로 말을 했고 그 애는 “고마우니까 종이학 두 마리 접어올게”라고 말했으니까. 그래서 오늘, 나도 모르게 조금 일찍 눈을 떴다.
그리고… 오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기계음만이 병실을 메웠고 누군가의 발소리도 더는 내 문 앞에 멈춰 서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서운했다.
아니, 그보다 더.
나는… 실망했다.
그 애는 약속을 지킬 것 같았다.
적어도, 종이학 두 마리는.
그런데 오후 3시쯤 간호사가 병실 문을 조심스레 열며 나에게 무언가를 건네었다.
“그 애가 너한테 이거 전해달래”
그 애라는 단어로도 나는 바로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간호사가 건네는 것을 받아 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작은 종이학 두 마리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종이학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그사이에 간호사는 이미 나간 뒤였다.
하나는 어제 접은 것보다 훨씬 더 정교했고,
다른 하나는 어설프게 날개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 둘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우리 같았다.
그 애는 정교하게 접힌 종이학 같았다.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조용히 나를 위로했고, 다시 살아 있는 쪽으로 이끌어 주었다. 겉으로는 위태로워 보여도 어쩌면 그 누구보다 단단하고 정교한 아이였다.
나는 그에 반해 어설프고 불완전한 종이학 같았다. 휘청휘청하며 날아오르지 못하고 자꾸만 주저앉으며 포기하기 직전이었던 그런 종이학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종이학도 날개는 있었다. 포기를 결심했던 그때 정교한 종이학이 날아와 다시 한번 날개를 정돈해 주고 날 수 있게 도왔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은, 아주 조금은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종이학을 옆 탁자에 올려두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 햇살이 잠깐 비추더니 커튼 너머로 들어와 종이학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나는 오늘의 기록을 쓰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망설임 끝에, 처음으로 날짜 아래 죽은 지 며칠이 되었는 지 대신 살아난 지 며칠이 되었는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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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ls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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