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기까지
- 작성자 구포대교
- 작성일 202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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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없는 새벽녘의 달이 결투장을 비추었다. 부족장의 자리를 두고 겨루는 두 아들 간의 결투였다. 여기서 승리하는 자만이 떠오르는 태양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민은 전대 부족장의 맏아들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사냥을 나섰고 도끼를 잘 다루는 전사였다.
그런 그의 상대는 수였다. 부족장의 셋째 아들이었고, 영악한 머리를 타고난 남자였다.
민은 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수는 결투는 둘째 치고 짐승 하나 사냥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싸움을 잘할 리가 만무했다. 민의 도끼질 한 번에 머리를 잃을 게 분명했다.
결투는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끝나야 한다. 횃불을 든 부족민들이 민과 수를 둘러싸 원을 그렸다. 그리곤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회전했다. 원무를 추는 듯, 화광이 새벽을 물렸다.
결투가 시작됐다. 민은 돌도끼를 들었고, 수는 장창을 쥐었다. 창이 보다 더 먼 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하단 이유에서였다. 자루를 쥔 손바닥의 땀이 끈적하게 창과 수를 이었다. 달음박질치며 민이 쇄도해오고, 수는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저 흉포한 돌날이 목을 파고들 거란 생각을 하자 두려움이 사무쳤다. 수는 다급히 창을 휘둘렀으나, 스치는 것조차 불가했다. 돌도끼가 한 덩이의 운석처럼, 추락하듯 내리꽂혔다.
수는 비명을 질렀다. 일말의 전의마저 사그라지고 고통이 빈 자리를 가득 채웠다. 참지 못할 고통이었다. 몸부림치고 목이 나가라 소리를 질러도 해소하지 못할 고통이었다. 돌도끼는 어깻죽지를 파고들었고 거무죽죽한 가죽과 뼈가 짓이겼다. 구정물 같은 피가 울컥울컥 솟았다. 수는 1초라도 빨리 죽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보다 살고 싶단 감정의 비명이 솟았고, 그보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횃불의 원무가 멈췄다. 지평선에서부터 태양의 정수리가 환히 타오르며 아침을 불렀다. 새로운 부족장의 이름은 민이였다.
수는 죽음에서부터 깨어났다. 죽음을 가장한, 잠이었다. 꿈도 없는 잠이었고, 낮밤도 가리지 않던 잠이었다. 그래서 수는 지금이 아침인지, 오전인지 오후인지도 몰랐다. 천막 안이었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에 고통도 뒤따라 깨어났다. 어깨가 타오르는 아픔이었다. 상처를 감싼 누런 천에 선홍빛이 스몄다.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나, 자리에 섰다. 수는 천막 바깥으로 나가기가 두려웠다. 그는 패배자였다. 그것은 치욕스럽지 않았다. 그는 살아있는 패배자였다. 그 사실이 무섭게 수를 엄습했다.
틈새로 새어드는 햇빛의 유혹에 못 이겨 수는 바깥으로 나섰다. 태양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남자들이 사냥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수는 부족마을의 가장자리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스쳐지나가는 자들 중 누구도, 그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수에겐 사람을 만날 체력도 없었기에. 그저 유령처럼 걸었다.
자그마한 언덕 위에 앙상한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수는 나무의 그림자에 자신을 숨겼다. 빛과 사람으로부터.
어깨가 아프고 배가 고팠다. 간단명료하게 말 할 수 있는 수의 상태였다. 어째서 자신이 살아있는지 수는 금방 유추했다. 돌도끼에 어깨를 맞은 직후, 동이 텄다. 해가 뜨면 결투가 끝난다는 예법에 따라, 수가 죽지 않았음에도 민의 승리로 결투가 중단됐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자면 떠올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입 안에선 욕과 신음과 침이 섞여 고였고, 그 속에서 피 맛도 느껴졌다. 지금 무엇보다 간절한 것은 먹을 것이었다. 피를 흘려서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수는 간절함 속에서 뿌리 옆의 풀을 발견했다.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처음 보는 풀이었다. 연두색 줄기에 털 난 곡알들이 바글바글 붙어 있었다. 수는 떼 낀 손톱을 가지고 자그마한 곡알의 털 난 껍질을 벗겨냈다. 그리곤 망설임도 없이 입에 넣었다. 질척이는 입의 타액과 작은 곡알이 범벅되며 이빨에 씹혔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고기를 뜯었었는데. 수는 울면서 곡알을 까먹었다.
남자들이 귀환했다. 어느덧 부족장이 된 민은 그럼에도 사냥에 나섰다. 그것은 일이라기 보단 여가에 가까울 정도로 민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었다. 또,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 사냥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수가 우려했던 상황이 실현됐다. 민은 부족장 감이 아니다. 수는 그 사실을 최선을 다해 설파 했지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강한 자가 부족을 이끄는 것이 그들에겐 상식이었으니까. 수는 그들의 멍청함에 탄식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지혜라고. 수는 홀로 생각했다.
부족장 선정에 대해 반대하는 것조차 힘이 필요했다. 모든 권력이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세상이었다.
‘부족을 떠나가야겠지.’
수는 그런 암담한 생각에 갇혔다. 이곳에 남게 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어도, 제대로 된 인간 대접도 못 받을 게 분명했다. 여자보다도 못한 신세로 남게 될 터다.
‘그래도......살고 싶다.’
그럼에도 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살고 싶었다. 아마 그것은 생명의 본질이겠지. 번식과 확장에 대한 욕구. 본능. 멸종으로부터 달아나는 질주. 그것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수는 그런 생각까지 이르렀다.
‘살아야겠지.’
이내 수는 마음을 다잡았다. 역시 죽는건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 구차하게라도 살고 싶었다. 그는 손아귀의 풀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걸 다 먹을 필요는 없어. 그들도 내게 먹을 걸 나눠줄 거야. 아직 겨울이 오기까진 멀었으니까. 이건 만약을 대비해 묻어두는 게 좋겠어. 수는 뿌리 사이 흙을 파내어 곡알을 묻었다. 언젠가 배가 고플 때, 이곳에서 곡알을 다시 꺼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수는 그리 생각했다.
태양이 지고 감파른 땅거미 아래서 수는 무릎을 꿇었다. 불과 아까 전의 다짐이 금세 허물어졌다.
“부족에서 나가라.”
곰의 머리를 뒤집어 쓴 민이 말했다. 그보다는, 명했다. 서늘한 밤이 바람에 물들어 쓰다듬듯 수를 지나쳤다. 차가운 위로였다.
“부디 한 번만 용서를......”
“이런 쓰레기 같은 놈.”
부족민들이 둘러싸 시선을 집중시킨 그곳에서, 그때에, 민이 수에게 말했다.
“정녕 네놈에겐 명예도 자긍심도, 자존심도 없는 거냐. 나라면 지금 살아있는 것도 부끄러울 거다.”
수는 고갤 숙인 채 흙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간은......살고 싶다고.’
수는 떨며 이를 꽉 물었다.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절감했다. 그는 살아있는 걸 수치로 치부해야 되는 세상에 살았다. 보다 현명하게, 보다 이해적이게 사는 것은 치욕이었다.
“당장 가라.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 나약한 자에게 더 이상의 자원을 나눠줄 순 없다.”
수는 끝없는 추락이 멈추는 기분을 느꼈다. 바닥이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바닥의 바닥의 바닥의 바닥이었다. 더 이상 안 좋아질 수도 없는 종착지였다. 수는 발을 딛고 일어섰다.
그리고 민을 노려보았다. 용기인지 오기인지 뜨거운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수는 부족을 떠났다. 그 초라한 그림자를, 누구도 배웅하지 않았다.
수는 다짜고짜 들판 위를 걸었다. 후회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아니다. 100걸음도 걷지 않아서 비참한 후회가 마음의 틈새를 비집기 시작했다.
이왕 추잡해진 거, 최대한 추잡하게, 살기 위해 발버둥 칠 걸 그랬나. 수는 살아있는 게 모욕이고 치욕이었다. 그리고 그는 살기 위해서 부족을 떠났다. 결과론적으론 죽음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지만. 주어진 삶을 연장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차선은, 없었다.
뭐라도 훔쳐올 걸. 자그마한 먹을 거라도 훔칠 수 있다면. 아니, 무엇이든 도구를 훔치는 게 더 좋았을 테지. 식량은 먹으면 끝이야. 하지만 도구를 이용해선 식량을 쌓을 수 있어.
이러나저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었다. 다시 부족에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고. 수는 스스로 되뇌었다. 되뇌다, 그러다, 문득. 수는 발을 멈췄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 중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수는 자신을 꾸짖으며 주변을 살폈다. 산과 산. 들판. 저 산의 뒤쪽엔 강이 흘렀더랬지. 수는 방향을 정한 후,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아무 부족이나 나타나주길 바라며. 새로운 무리에 속하길 갈망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은 산 아래로 완전히 침전했다. 밤은 그 어느 때처럼 고요히, 천연스레 세상에 스며들었다. 어느새 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수는 무성한 풀들 속에 몸을 숨겼다. 그 자신의 시야 또한 가려버렸지만, 그것이 그가 택한 최선의 안전이었다. 맹수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개들이라도 마주쳤다간 끔찍하게 죽어버릴 터였다.
밤은 죽은 듯 고요히 지나가고, 수는 말끔한 정신으로 아침햇살을 마셨다. 밤사이 아무 일도 없었고, 잠을 자지도 않았다. 가만히 있자니 배가 고파왔고, 갈증에 시달렸으며 찢긴 어깨가 아파왔다. 왼팔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이래서야 기다란 혹이 난 외팔이나 다름없는 꼴이 아닌가. 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목적지는 있다. 일단, 강으로 가서 목을 축일 것이다. 다른 부족을 만나 합류하는 이야기가 최고일 테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였다. 수는 자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장은 걸음을 옮기는 데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하루는 기니까.
태양이 하늘을 미끄러지듯 가로질렀다. 구름 한 점 없이 따사로운 오전과 정오, 오후였다. 도중에 빨간 열매를 따먹어 배를 채우고 목을 축였지만, 부족했다. 고기. 수는 기름을 잔뜩 묻히며 짐승의 살을 뜯어먹고 싶었다. 멍하니 걸으며, 하늘을 보며, 회상하며, 간절히 바랐다.
오후마저도 내일로 달아나고 있을 즈음에 수는 어느 산자락 옆을 지나쳤다. 그와 함께 산의 속삭임이 귀를 간질였다. 무시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소리. 세찬 물살의 함성과도 같은 소리였다. 끈적이다 못해 고체가 되어버릴 것 같은 걸쭉한 침이 게걸스레 소리를 탐했다. 벌컥벌컥 마실 수 있다면. 수의 걸음이 빨라졌다.
수는 무성한 가지들의 틈을 찾아 몸을 비집어 넣었다. 사슴 가죽을 걸치고 있었지만 드러난 맨살이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성치 않은 몸에 붉은 선들이 늘어났다.
곧, 계곡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마지막 도망자를 찾은 술래처럼 수는 황급히 움직였다. 물을 향한 갈망이 상처들을 외면했다. 며칠 전의 소나기 때문인지 아직도 계곡을 치달리는 물살이 세찼다. 휩쓸렸다간 죽을 지도 모를 정도였다.
수는 조심스레 팔을 뻗어 두 손을 씻었다. 발은 바위에 꼼짝 않고 붙은 상태였다. 저 물살에 발을 집어넣기란 불가능했다. 바위에 부딪히고 충돌하며 갈라진 거품들 때문에 얼마나 깊은 지도 알 수 없었다.
대신 수는 두 손을 모아, 조심스레 물을 떠다 마셨다. 마음 같아선 물속에 머리를 쳐 박고 계곡을 즐기고 싶었지만, 현재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검은 잔가지들 사이로 노란 하늘이 비쳤다. 벌써 또 하루가 지났다. 수는 오늘을 무사히 보냄에 기뻐하면서도 다가오는 오늘을 두려워했다. 여전히 고기가 먹고 싶었다.
해가 지기 전에 이 옹이를 찾은 것은 수에게 있어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었다. 거목의 뿌리와 뿌리 사이 공간. 웅크린 사람 하나가 들어가기 충분한 옹이가 있었다. 안에 위험한 동물이 있진 않은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을 뿐이었다. 수는 뱀의 머리를 밟고 몸통을 잡아 뜯었다. 피가 튀겼고, 머리 잃은 뱀의 몸통이 잡아 올린 생선처럼 펄떡댔다. 수는 뱀을 먹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먹지 않기로 했다. 아직 허기는 버틸 만 하고 생 뱀고기는 먹어본 적이 없어 두려웠다. 수는 사체를 수풀 저변에 버려두고선 옹이 안에서 옹송그렸다. 눈을 감자마자 수마가 몸을 감싸 안았다.
수는 그림자 속에서 눈을 떴다. 옹이 밖의 세계는 차가운 아침이었다. 이번에도 무사히 아침에 당도했구나. 수는 침음을 흘리며 몸을 빼냈다. 여전하게도, 어깨가 아팠다.
그리고 배가 아팠다. 고프다 못해 고통스러운 지경까지 와버렸다. 수는 당장 보이는 데로 풀을 뜯어 입에 넣었다가, 예상을 뛰어넘는 쓴 맛에 도로 뱉어버렸다. 고기가 먹고 싶다......수는 어젯밤부터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기고기고기고기......뱀뱀뱀뱀......수는 불에 데인 듯 펄쩍 뛰어 올랐다. 분명 이곳이렷다. 곧이어 그의 손에 기다란 뱀가죽이 축 늘어진 채 쥐어졌다. 배를 채울 수 있는 분명한 고기였다. 사람은 고기 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수는 눈물 흘리며 뱀가죽을 씹었다. 진득한 피가 입 안에 고여 파도쳤다. 피로 절여진 가죽과 살덩이를 씹었다. 한 줄기 강 같은 고미(苦味)가 핏 속에서 느껴졌다.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수는 기어코 삼켜냈다. 그 후론 막힘이 없었다. 수는 단숨에 머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삼켰다.
왠지 몸속에서 피가 출렁이는 것 같다고, 수는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원래 인간이란 놈들은 피로 절여져 있다고. 계속 피를 보충해주지 않는다면 썩어 없어지게 돼버릴 것이라고.
돌고 도는 피.
누군가의 목구멍을 타고 흐를, 피.
수는 온몸의 소름을 일깨우는 고함소리에 움츠러들었다. 인간의 고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차례의 고함이 뒤따랐다. 기쁨과 혼란, 슬픔, 공포가 범벅된 혼탁한 감정이 수의 마음을 마구잡이로 어지럽혔다. 결론적으론 혼란이 머릿속까지 번진 듯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수의 발이 움직였다. 소리가 인 곳에서 떨어진 곳으로. 당장은 피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도 잠시. 감정이 이성을 앞질렀다.
수는 햇빛이 얼룩진 계곡의 바위 위에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엄습해오리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사방에서 일렁이는 그림자가 나무의 것인지 인간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수는 바위에 체화된 듯 굳어버렸다. 보이지 않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어두운 수풀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다,
수풀의 그림자 사이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남자였다. 창을 쥔, 남자. 땀과 피 냄새를 뒤집어쓴 남자였다. 그와 수의 눈빛이 맞부딪혔다. 남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지고 몸의 움직임이 멎었다. 멧돼지가 엄습해온 것은 한순간이었다.
사람보다 덩치가 큰 광포한 멧돼지였다. 그리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멧돼지였다. 놈이 발자국과 피를 남기며 달려들었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남자의 등을 들이받았다.
수는 그 광경에 놀라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움찔, 놀랄 뿐이었다. 창을 쥔 남자는 멧돼지에게 깔린 채로 고함을 질렀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고성의 정체가, 수의 눈앞에서 밝혀졌다.
남자는 멧돼지의 이빨에 물리면서도 창을 놓지 않았다. 고함이 비명인지 기합인지도 분간되지 않았다. 기어코 창날이 멧돼지의 상처를 후볐다. 피가 투두둑, 투둑. 떨어졌다.
고함이 멎었다. 남자가 사냥 중에 죽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수는 충격 받았다.
‘이 근처에도 부족이 있나?’
사냥을 멀리까지 나서진 않을 것이다. 수는 산 근처에서 거주 중일 부족을 상상하다, 눈앞의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온몸에서 유혈을 흘리는 상처투성인 짐승. 흙바닥에 널브러진 창자루가 수의 눈에 띄었다.
‘충분히 죽일 수 있다.’
그런 대담한 생각이 들었다. 멧돼지는 이미 제 상태가 아니고, 수는 창자 루를 쥘 수 있었다. 허기를 격화하는 배의 울음이 멧돼지 고기를 바랐다.
짧은 순간의 뒤에, 멧돼지가 달리기 시작했다. 반대 방향으로, 수에게서 도망쳤다. 멧돼지는 똑똑한 짐승이었다. 자신이 제대로 싸울 수 없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찰나보다 길고 잠시보다 짧은, 그러한 시간이 지나간 후, 수 역시 발을 뗐다.
태양이 정수리 위에서 활활 타올랐다. 분명 여름을 한참 지난 가을인데도 수는 땀을 흘리며 더위를 느꼈다. 저 뜨거운 태양보다도 뜨거운 게 있다면, 내 심장이라고. 수는 생각했다.
오전 내도록 멧돼지를 쫓았다. 수는 달리다 걷다 쉬고를 반복했고, 멧돼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은 꼭 혈흔을 남겼고, 수는 그 흔적을 쫓기만 하면 됐다. 또, 피 냄새를 통해 근처에 있다고 알 수 있었다. 여러모로 꼬리가 긴 도망자였다. 놈도 체력이 거의 없어서 완전히 도망치기도 반격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길고 지루한 경주만이 반복될 뿐.
한 번은 수풀에서 갑자기 나타나 덮쳤으나 수가 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피했다. 오히려 멧돼지가 나무에 머리를 부딪치고 비틀댔다. 정말이지, 곧 죽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수는 찌뿌둥하게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바위와 바위의 사이 공간, 바람의 통로. 절벽의 자그마한 틈새였다. 점차 기억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낮이 저물고, 수는 잠 든 멧돼지를 노리기로 했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져도 멧돼지를 찾을 수 없었고, 동시에 거대한 피로가 밀려왔다. 잠을 자야겠다 생각했고, 낭떠러지를 앞마당으로 두고 있는 절벽의 바위틈에 몸을 비집어 넣었다. 나무옹이 속의 흙처럼 부드럽진 않았지만, 아늑한 공간이었고 안전하게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 후로 또, 하루종일 멧돼지를 찾아다녔다. 중간중간에 열매나 버섯을 따먹고, 계곡물도 꾸준히 마셨다. 놈의 목덜미에 창날을 쑤셔 넣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오늘이 벌써 며칠 째지? 수는 습관처럼 계곡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3일은 확실히 지난 것 같다. 어쩌면 7일이 지났을 지도. 분명 첫날에는......보름달이 떴던 것 같다. 아무렴 상관없나.
하루는 어김없이 시작됐다. 어쩌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이 아닐까 몰라, 하고 수는 생각했다. 예로부터 그는 생각이 많은 편이었다. 때문에 욕도 많이 듣고. 하지만 그 다상량이야말로 지혜의 원천이었다. 요즘엔 멧돼지를 찾으러 산을 돌아다니는 것밖에 할 일이 없으니, 종일 내도록 잡다한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수는 멧돼지가 이미 산을 떠났다고도 생각해보았다. 이틀 가량 모습을 못 봤기 때문이다. 수가 못 보던 틈을 이용해 가시거리 바깥으로 도망쳤다거나. 아니면 쉽게 찾지 못할 은밀한 곳에서 조용히 사망했을 지도 몰랐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으니.
그러나 멧돼지는 이틀 만에 나타났고, 경주는 끝나지 않았다. 길고, 지겹고, 지루한 경주. 수는 자신이 뭔 일을 하는 건지 생각하며 웃었다. 이 얼마나 한심한가. 사실 멧돼지는 식량으로서의 가치가 쇠퇴되었다. 수에게 있어선. 이미 산엔 다양한 열매가 있고, 물이 있고, 짐승이 있었다. 어제만 해도 수는 쥐의 가죽을 벗겨 먹었다.
멧돼지를 쫓는 분명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숨이 오락가락 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가질 수 있다면 가지고 보는 것.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 중 하나라고. 모든 이의 품에 지니고 있는 욕망이라고. 수는 오늘도 생각했다.
또. 멧돼지를 잡아가면 다시 부족에 받아줄 지도 모르지. 가장 낙관적이면서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도전하고 부딪쳐봐야지. 그게 인간이니까. 수는 그렇게 자신을 다잡았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헤아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봤자 달의 주기가 지나간 것은 아니지만. 어째선지 수는 아득한 시간이 지났다 느꼈고, 그 긴 시간 속에서 갇힌 상태라고 느꼈다.
수는 매일 밤 바위 틈새 속에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달이 깎여나갔다. 첫날엔 완전한 원이었지만, 지금의 달은 반이 잘려나간 채 작은 돌칼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달은 15일 동안 스스로를 깎아내린다. 두 팔을 벌리고 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그 후, 또 다시 15일 간 스스로의 여백을 채운다.
이는 선대의 인간들이 발견한 세계의 규칙 중 하나였다. 관찰을 통해 발견하고 이야기에 이야기를 통해 후대로 그들의 지혜를 연결했다. 그렇게, 인간들은 서서히, 느린 속도로 발전했다.
언젠가는 저 달이 변하는 이유도 알 수 있을까. 바위 틈새 속에서, 수는 그런 생각에 잠겼다. 인간은 얼마나 발전을 이루어낼까. 코끼리를 타고 사자의 탈을 쓰며 아낌없이 고기를 뜯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구운, 고기가 먹고 싶다. 서서히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피부로 체감됐다. 밤은 겨울의 주둥이. 혹한이 아가리를 벌리고 수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결국 이곳에서 얼어 죽는 것이 마지막일 지도 모르지.
수는 웅크려 누운 채 잠을 불렀다.
또 다시 두 개의 밤이 지났다. 세 번째 밤을 부르는 황혼 속에서, 수는 마침내 멧돼지를 발견했다. 산의 꼭대기. 있는 것이라곤 바위 무더기와 나무 한 그루가 다인 황량한 그곳에서 멧돼지는 오랜 잠에 빠져 있었다. 수는 창자루를 양손으로 쥔 채 무방비한 놈의 목을 찔렀다. 늙은 피가 느린 속도로 흘러나왔다.
수에게 희열과 만족은, 없었다.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텅 빈 마음속으로 뭔가가 들어오기는커녕 빠져나가는 기분. 진한 상실의 감정이 이리저리, 수의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잠든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상태였다. 나도 알고 있었어. 보자마자 알았지. 수는 멍하니 짐승의 사채 옆에 주저앉았다. 내가 해낸 게 아니야. 내가 해낸 게 아니야.
망연자실한 밤이 하루를 덮었다.
이젠 겨울일까. 하얗고 창백한 하늘에서 태양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알게 모르게 새어드는 빛만 느꼈다.
‘이제 뭘 어쩔 수 있지?’
문득, 수는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이제 자신은 뭘 할 수 있지? 뭘 해야 되지? 그저 멧돼지라는 목적 하나에 이끌려 무의미한 몇날며칠을 지샜지만, 모두 거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남은 알맹이는 뭐지? 그토록 바랐던 고기? 수는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아침은 정말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마치, 인생처럼. 수는 엉킨 수풀을 만지작거리며 생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삶은 정말 무의미한 흐름이다. 목적지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바람처럼. 미지를 떠도는 아이들이 인간인 것이다.
수는 누런 풀들을 엮어 끈으로 만들었다. 포갠 풀은 멧돼지를 지탱할 정도로 질겼다. 아무래도 사람 혼자서 멧돼지를 옮기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해야했다.
수는 끈을 길게 만들어 몸통과 다리들을 칭칭 감아 엮었다. 그러고는 멧돼지를 묶은 끈을 그대로 자신에게 둘렀다. 길고 힘겨운 귀환이 예감되었다.
몇 개의 밤이 또 지나갔을까. 수는 정확하게 그 수를 셀 수 있었다. 3개의 밤이다. 지금은 4번째 밤이었고. 아침을 앞둔 새벽이었다.
시작점이었던 산이 멀리 떨어졌고, 최종 목적지인 부족마을은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이런 험난한 여정 속에서, 수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언제 짐승들이 멧돼지를 채갈지 몰랐으니까.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종일을 보내야만 했다.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만큼이나 쏟아지는 졸음이었다. 수는 이를 악물고 멧돼지를 끌었다. 부족 마을이 점점 선명히 보였다.
들개무리들이 수의 앞에 나타났다. 7마리의 개였다. 코앞에서 끝이구나. 수는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창을 겨눴다. 참으로 무정한 하늘이라 생각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들개무리도 수를 지나갔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이, 수가 한 그루의 나무라도 되는 듯이, 바위라도 되는 듯이 그냥, 지나쳤다.
들개들이란 항상 굶주려있고 만만한 상대, 홀로 있는 인간이라도 보면 달려들고 보는 놈들인데. 어째서 그냥 지나친 것인지. 수는 긴장의 해제와 그 여파로 인해 빨라진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침이 타오르기 시작할 때. 도끼를 얻어맞고 쓰러졌던 때와 동일한 그 시간대에, 수는 부족에 복귀하였다. 그를 반기는 이는 없었고, 그가 귀환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대신해서 그를 반기는 것은 냄새였다. 오래지 않은 죽음의 냄새. 신선한 시취였다.
“뭐하려 이곳에 돌아온 것이냐.”
갑작스런 목소리에 수는 화들짝 놀랐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아침을 등 진 부족장 민이 서 있었다. 반석처럼. 굳은 표정으로 민은 수를 노려보았다.
“널 반길 상황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다.”
“단체로 어딜 간 거야?”
“넌 이 냄새도 맡지 못하는 거냐?”
수는 졸음 속에서도 머리를 찌르는 충격을 느꼈다.
“설마 다 죽었다고 말하려는 거야?”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절반 이상이 죽고, 나머지는 노예로 구름 없는 새벽녘의 달이 결투장을 비추었다. 부족장의 자리를 두고 겨루는 두 아들 간의 결투였다. 여기서 승리하는 자만이 떠오르는 태양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민은 전대 부족장의 맏아들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사냥을 나섰고 도끼를 잘 다루는 전사였다.
그런 그의 상대는 수였다. 부족장의 셋째 아들이었고, 영악한 머리를 타고난 남자였다.
민은 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수는 결투는 둘째 치고 짐승 하나 사냥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싸움을 잘할 리가 만무했다. 민의 도끼질 한 번에 머리를 잃을 게 분명했다.
결투는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끝나야 한다. 횃불을 든 부족민들이 민과 수를 둘러싸 원을 그렸다. 그리곤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회전했다. 원무를 추는 듯, 화광이 새벽을 물렸다.
결투가 시작됐다. 민은 돌도끼를 들었고, 수는 장창을 쥐었다. 창이 보다 더 먼 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하단 이유에서였다. 자루를 쥔 손바닥의 땀이 끈적하게 창과 수를 이었다. 달음박질치며 민이 쇄도해오고, 수는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저 흉포한 돌날이 목을 파고들 거란 생각을 하자 두려움이 사무쳤다. 수는 다급히 창을 휘둘렀으나, 스치는 것조차 불가했다. 돌도끼가 한 덩이의 운석처럼, 추락하듯 내리꽂혔다.
수는 비명을 질렀다. 일말의 전의마저 사그라지고 고통이 빈 자리를 가득 채웠다. 참지 못할 고통이었다. 몸부림치고 목이 나가라 소리를 질러도 해소하지 못할 고통이었다. 돌도끼는 어깻죽지를 파고들었고 거무죽죽한 가죽과 뼈가 짓이겼다. 구정물 같은 피가 울컥울컥 솟았다. 수는 1초라도 빨리 죽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보다 살고 싶단 감정의 비명이 솟았고, 그보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횃불의 원무가 멈췄다. 지평선에서부터 태양의 정수리가 환히 타오르며 아침을 불렀다. 새로운 부족장의 이름은 민이였다.
수는 죽음에서부터 깨어났다. 죽음을 가장한, 잠이었다. 꿈도 없는 잠이었고, 낮밤도 가리지 않던 잠이었다. 그래서 수는 지금이 아침인지, 오전인지 오후인지도 몰랐다. 천막 안이었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에 고통도 뒤따라 깨어났다. 어깨가 타오르는 아픔이었다. 상처를 감싼 누런 천에 선홍빛이 스몄다.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나, 자리에 섰다. 수는 천막 바깥으로 나가기가 두려웠다. 그는 패배자였다. 그것은 치욕스럽지 않았다. 그는 살아있는 패배자였다. 그 사실이 무섭게 수를 엄습했다.
틈새로 새어드는 햇빛의 유혹에 못 이겨 수는 바깥으로 나섰다. 태양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남자들이 사냥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수는 부족마을의 가장자리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스쳐지나가는 자들 중 누구도, 그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수에겐 사람을 만날 체력도 없었기에. 그저 유령처럼 걸었다.
자그마한 언덕 위에 앙상한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수는 나무의 그림자에 자신을 숨겼다. 빛과 사람으로부터.
어깨가 아프고 배가 고팠다. 간단명료하게 말 할 수 있는 수의 상태였다. 어째서 자신이 살아있는지 수는 금방 유추했다. 돌도끼에 어깨를 맞은 직후, 동이 텄다. 해가 뜨면 결투가 끝난다는 예법에 따라, 수가 죽지 않았음에도 민의 승리로 결투가 중단됐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자면 떠올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입 안에선 욕과 신음과 침이 섞여 고였고, 그 속에서 피 맛도 느껴졌다. 지금 무엇보다 간절한 것은 먹을 것이었다. 피를 흘려서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수는 간절함 속에서 뿌리 옆의 풀을 발견했다.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처음 보는 풀이었다. 연두색 줄기에 털 난 곡알들이 바글바글 붙어 있었다. 수는 떼 낀 손톱을 가지고 자그마한 곡알의 털 난 껍질을 벗겨냈다. 그리곤 망설임도 없이 입에 넣었다. 질척이는 입의 타액과 작은 곡알이 범벅되며 이빨에 씹혔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고기를 뜯었었는데. 수는 울면서 곡알을 까먹었다.
남자들이 귀환했다. 어느덧 부족장이 된 민은 그럼에도 사냥에 나섰다. 그것은 일이라기 보단 여가에 가까울 정도로 민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었다. 또,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 사냥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수가 우려했던 상황이 실현됐다. 민은 부족장 감이 아니다. 수는 그 사실을 최선을 다해 설파 했지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강한 자가 부족을 이끄는 것이 그들에겐 상식이었으니까. 수는 그들의 멍청함에 탄식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지혜라고. 수는 홀로 생각했다.
부족장 선정에 대해 반대하는 것조차 힘이 필요했다. 모든 권력이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세상이었다.
‘부족을 떠나가야겠지.’
수는 그런 암담한 생각에 갇혔다. 이곳에 남게 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어도, 제대로 된 인간 대접도 못 받을 게 분명했다. 여자보다도 못한 신세로 남게 될 터다.
‘그래도......살고 싶다.’
그럼에도 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살고 싶었다. 아마 그것은 생명의 본질이겠지. 번식과 확장에 대한 욕구. 본능. 멸종으로부터 달아나는 질주. 그것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수는 그런 생각까지 이르렀다.
‘살아야겠지.’
이내 수는 마음을 다잡았다. 역시 죽는건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 구차하게라도 살고 싶었다. 그는 손아귀의 풀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걸 다 먹을 필요는 없어. 그들도 내게 먹을 걸 나눠줄 거야. 아직 겨울이 오기까진 멀었으니까. 이건 만약을 대비해 묻어두는 게 좋겠어. 수는 뿌리 사이 흙을 파내어 곡알을 묻었다. 언젠가 배가 고플 때, 이곳에서 곡알을 다시 꺼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수는 그리 생각했다.
태양이 지고 감파른 땅거미 아래서 수는 무릎을 꿇었다. 불과 아까 전의 다짐이 금세 허물어졌다.
“부족에서 나가라.”
곰의 머리를 뒤집어 쓴 민이 말했다. 그보다는, 명했다. 서늘한 밤이 바람에 물들어 쓰다듬듯 수를 지나쳤다. 차가운 위로였다.
“부디 한 번만 용서를......”
“이런 쓰레기 같은 놈.”
부족민들이 둘러싸 시선을 집중시킨 그곳에서, 그때에, 민이 수에게 말했다.
“정녕 네놈에겐 명예도 자긍심도, 자존심도 없는 거냐. 나라면 지금 살아있는 것도 부끄러울 거다.”
수는 고갤 숙인 채 흙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간은......살고 싶다고.’
수는 떨며 이를 꽉 물었다.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절감했다. 그는 살아있는 걸 수치로 치부해야 되는 세상에 살았다. 보다 현명하게, 보다 이해적이게 사는 것은 치욕이었다.
“당장 가라.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 나약한 자에게 더 이상의 자원을 나눠줄 순 없다.”
수는 끝없는 추락이 멈추는 기분을 느꼈다. 바닥이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바닥의 바닥의 바닥의 바닥이었다. 더 이상 안 좋아질 수도 없는 종착지였다. 수는 발을 딛고 일어섰다.
그리고 민을 노려보았다. 용기인지 오기인지 뜨거운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수는 부족을 떠났다. 그 초라한 그림자를, 누구도 배웅하지 않았다.
수는 다짜고짜 들판 위를 걸었다. 후회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아니다. 100걸음도 걷지 않아서 비참한 후회가 마음의 틈새를 비집기 시작했다.
이왕 추잡해진 거, 최대한 추잡하게, 살기 위해 발버둥 칠 걸 그랬나. 수는 살아있는 게 모욕이고 치욕이었다. 그리고 그는 살기 위해서 부족을 떠났다. 결과론적으론 죽음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지만. 주어진 삶을 연장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차선은, 없었다.
뭐라도 훔쳐올 걸. 자그마한 먹을 거라도 훔칠 수 있다면. 아니, 무엇이든 도구를 훔치는 게 더 좋았을 테지. 식량은 먹으면 끝이야. 하지만 도구를 이용해선 식량을 쌓을 수 있어.
이러나저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었다. 다시 부족에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고. 수는 스스로 되뇌었다. 되뇌다, 그러다, 문득. 수는 발을 멈췄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 중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수는 자신을 꾸짖으며 주변을 살폈다. 산과 산. 들판. 저 산의 뒤쪽엔 강이 흘렀더랬지. 수는 방향을 정한 후,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아무 부족이나 나타나주길 바라며. 새로운 무리에 속하길 갈망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은 산 아래로 완전히 침전했다. 밤은 그 어느 때처럼 고요히, 천연스레 세상에 스며들었다. 어느새 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수는 무성한 풀들 속에 몸을 숨겼다. 그 자신의 시야 또한 가려버렸지만, 그것이 그가 택한 최선의 안전이었다. 맹수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개들이라도 마주쳤다간 끔찍하게 죽어버릴 터였다.
밤은 죽은 듯 고요히 지나가고, 수는 말끔한 정신으로 아침햇살을 마셨다. 밤사이 아무 일도 없었고, 잠을 자지도 않았다. 가만히 있자니 배가 고파왔고, 갈증에 시달렸으며 찢긴 어깨가 아파왔다. 왼팔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이래서야 기다란 혹이 난 외팔이나 다름없는 꼴이 아닌가. 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목적지는 있다. 일단, 강으로 가서 목을 축일 것이다. 다른 부족을 만나 합류하는 이야기가 최고일 테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였다. 수는 자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장은 걸음을 옮기는 데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하루는 기니까.
태양이 하늘을 미끄러지듯 가로질렀다. 구름 한 점 없이 따사로운 오전과 정오, 오후였다. 도중에 빨간 열매를 따먹어 배를 채우고 목을 축였지만, 부족했다. 고기. 수는 기름을 잔뜩 묻히며 짐승의 살을 뜯어먹고 싶었다. 멍하니 걸으며, 하늘을 보며, 회상하며, 간절히 바랐다.
오후마저도 내일로 달아나고 있을 즈음에 수는 어느 산자락 옆을 지나쳤다. 그와 함께 산의 속삭임이 귀를 간질였다. 무시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소리. 세찬 물살의 함성과도 같은 소리였다. 끈적이다 못해 고체가 되어버릴 것 같은 걸쭉한 침이 게걸스레 소리를 탐했다. 벌컥벌컥 마실 수 있다면. 수의 걸음이 빨라졌다.
수는 무성한 가지들의 틈을 찾아 몸을 비집어 넣었다. 사슴 가죽을 걸치고 있었지만 드러난 맨살이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성치 않은 몸에 붉은 선들이 늘어났다.
곧, 계곡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마지막 도망자를 찾은 술래처럼 수는 황급히 움직였다. 물을 향한 갈망이 상처들을 외면했다. 며칠 전의 소나기 때문인지 아직도 계곡을 치달리는 물살이 세찼다. 휩쓸렸다간 죽을 지도 모를 정도였다.
수는 조심스레 팔을 뻗어 두 손을 씻었다. 발은 바위에 꼼짝 않고 붙은 상태였다. 저 물살에 발을 집어넣기란 불가능했다. 바위에 부딪히고 충돌하며 갈라진 거품들 때문에 얼마나 깊은 지도 알 수 없었다.
대신 수는 두 손을 모아, 조심스레 물을 떠다 마셨다. 마음 같아선 물속에 머리를 쳐 박고 계곡을 즐기고 싶었지만, 현재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검은 잔가지들 사이로 노란 하늘이 비쳤다. 벌써 또 하루가 지났다. 수는 오늘을 무사히 보냄에 기뻐하면서도 다가오는 오늘을 두려워했다. 여전히 고기가 먹고 싶었다.
해가 지기 전에 이 옹이를 찾은 것은 수에게 있어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었다. 거목의 뿌리와 뿌리 사이 공간. 웅크린 사람 하나가 들어가기 충분한 옹이가 있었다. 안에 위험한 동물이 있진 않은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을 뿐이었다. 수는 뱀의 머리를 밟고 몸통을 잡아 뜯었다. 피가 튀겼고, 머리 잃은 뱀의 몸통이 잡아 올린 생선처럼 펄떡댔다. 수는 뱀을 먹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먹지 않기로 했다. 아직 허기는 버틸 만 하고 생 뱀고기는 먹어본 적이 없어 두려웠다. 수는 사체를 수풀 저변에 버려두고선 옹이 안에서 옹송그렸다. 눈을 감자마자 수마가 몸을 감싸 안았다.
수는 그림자 속에서 눈을 떴다. 옹이 밖의 세계는 차가운 아침이었다. 이번에도 무사히 아침에 당도했구나. 수는 침음을 흘리며 몸을 빼냈다. 여전하게도, 어깨가 아팠다.
그리고 배가 아팠다. 고프다 못해 고통스러운 지경까지 와버렸다. 수는 당장 보이는 데로 풀을 뜯어 입에 넣었다가, 예상을 뛰어넘는 쓴 맛에 도로 뱉어버렸다. 고기가 먹고 싶다......수는 어젯밤부터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기고기고기고기......뱀뱀뱀뱀......수는 불에 데인 듯 펄쩍 뛰어 올랐다. 분명 이곳이렷다. 곧이어 그의 손에 기다란 뱀가죽이 축 늘어진 채 쥐어졌다. 배를 채울 수 있는 분명한 고기였다. 사람은 고기 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수는 눈물 흘리며 뱀가죽을 씹었다. 진득한 피가 입 안에 고여 파도쳤다. 피로 절여진 가죽과 살덩이를 씹었다. 한 줄기 강 같은 고미(苦味)가 핏 속에서 느껴졌다.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수는 기어코 삼켜냈다. 그 후론 막힘이 없었다. 수는 단숨에 머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삼켰다.
왠지 몸속에서 피가 출렁이는 것 같다고, 수는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원래 인간이란 놈들은 피로 절여져 있다고. 계속 피를 보충해주지 않는다면 썩어 없어지게 돼버릴 것이라고.
돌고 도는 피.
누군가의 목구멍을 타고 흐를, 피.
수는 온몸의 소름을 일깨우는 고함소리에 움츠러들었다. 인간의 고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차례의 고함이 뒤따랐다. 기쁨과 혼란, 슬픔, 공포가 범벅된 혼탁한 감정이 수의 마음을 마구잡이로 어지럽혔다. 결론적으론 혼란이 머릿속까지 번진 듯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수의 발이 움직였다. 소리가 인 곳에서 떨어진 곳으로. 당장은 피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도 잠시. 감정이 이성을 앞질렀다.
수는 햇빛이 얼룩진 계곡의 바위 위에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엄습해오리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사방에서 일렁이는 그림자가 나무의 것인지 인간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수는 바위에 체화된 듯 굳어버렸다. 보이지 않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어두운 수풀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다,
수풀의 그림자 사이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남자였다. 창을 쥔, 남자. 땀과 피 냄새를 뒤집어쓴 남자였다. 그와 수의 눈빛이 맞부딪혔다. 남자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지고 몸의 움직임이 멎었다. 멧돼지가 엄습해온 것은 한순간이었다.
사람보다 덩치가 큰 광포한 멧돼지였다. 그리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멧돼지였다. 놈이 발자국과 피를 남기며 달려들었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남자의 등을 들이받았다.
수는 그 광경에 놀라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움찔, 놀랄 뿐이었다. 창을 쥔 남자는 멧돼지에게 깔린 채로 고함을 질렀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고성의 정체가, 수의 눈앞에서 밝혀졌다.
남자는 멧돼지의 이빨에 물리면서도 창을 놓지 않았다. 고함이 비명인지 기합인지도 분간되지 않았다. 기어코 창날이 멧돼지의 상처를 후볐다. 피가 투두둑, 투둑. 떨어졌다.
고함이 멎었다. 남자가 사냥 중에 죽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수는 충격 받았다.
‘이 근처에도 부족이 있나?’
사냥을 멀리까지 나서진 않을 것이다. 수는 산 근처에서 거주 중일 부족을 상상하다, 눈앞의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온몸에서 유혈을 흘리는 상처투성인 짐승. 흙바닥에 널브러진 창자루가 수의 눈에 띄었다.
‘충분히 죽일 수 있다.’
그런 대담한 생각이 들었다. 멧돼지는 이미 제 상태가 아니고, 수는 창자 루를 쥘 수 있었다. 허기를 격화하는 배의 울음이 멧돼지 고기를 바랐다.
짧은 순간의 뒤에, 멧돼지가 달리기 시작했다. 반대 방향으로, 수에게서 도망쳤다. 멧돼지는 똑똑한 짐승이었다. 자신이 제대로 싸울 수 없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찰나보다 길고 잠시보다 짧은, 그러한 시간이 지나간 후, 수 역시 발을 뗐다.
태양이 정수리 위에서 활활 타올랐다. 분명 여름을 한참 지난 가을인데도 수는 땀을 흘리며 더위를 느꼈다. 저 뜨거운 태양보다도 뜨거운 게 있다면, 내 심장이라고. 수는 생각했다.
오전 내도록 멧돼지를 쫓았다. 수는 달리다 걷다 쉬고를 반복했고, 멧돼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놈은 꼭 혈흔을 남겼고, 수는 그 흔적을 쫓기만 하면 됐다. 또, 피 냄새를 통해 근처에 있다고 알 수 있었다. 여러모로 꼬리가 긴 도망자였다. 놈도 체력이 거의 없어서 완전히 도망치기도 반격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길고 지루한 경주만이 반복될 뿐.
한 번은 수풀에서 갑자기 나타나 덮쳤으나 수가 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피했다. 오히려 멧돼지가 나무에 머리를 부딪치고 비틀댔다. 정말이지, 곧 죽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수는 찌뿌둥하게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바위와 바위의 사이 공간, 바람의 통로. 절벽의 자그마한 틈새였다. 점차 기억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낮이 저물고, 수는 잠 든 멧돼지를 노리기로 했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져도 멧돼지를 찾을 수 없었고, 동시에 거대한 피로가 밀려왔다. 잠을 자야겠다 생각했고, 낭떠러지를 앞마당으로 두고 있는 절벽의 바위틈에 몸을 비집어 넣었다. 나무옹이 속의 흙처럼 부드럽진 않았지만, 아늑한 공간이었고 안전하게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 후로 또, 하루종일 멧돼지를 찾아다녔다. 중간중간에 열매나 버섯을 따먹고, 계곡물도 꾸준히 마셨다. 놈의 목덜미에 창날을 쑤셔 넣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오늘이 벌써 며칠 째지? 수는 습관처럼 계곡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3일은 확실히 지난 것 같다. 어쩌면 7일이 지났을 지도. 분명 첫날에는......보름달이 떴던 것 같다. 아무렴 상관없나.
하루는 어김없이 시작됐다. 어쩌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이 아닐까 몰라, 하고 수는 생각했다. 예로부터 그는 생각이 많은 편이었다. 때문에 욕도 많이 듣고. 하지만 그 다상량이야말로 지혜의 원천이었다. 요즘엔 멧돼지를 찾으러 산을 돌아다니는 것밖에 할 일이 없으니, 종일 내도록 잡다한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수는 멧돼지가 이미 산을 떠났다고도 생각해보았다. 이틀 가량 모습을 못 봤기 때문이다. 수가 못 보던 틈을 이용해 가시거리 바깥으로 도망쳤다거나. 아니면 쉽게 찾지 못할 은밀한 곳에서 조용히 사망했을 지도 몰랐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으니.
그러나 멧돼지는 이틀 만에 나타났고, 경주는 끝나지 않았다. 길고, 지겹고, 지루한 경주. 수는 자신이 뭔 일을 하는 건지 생각하며 웃었다. 이 얼마나 한심한가. 사실 멧돼지는 식량으로서의 가치가 쇠퇴되었다. 수에게 있어선. 이미 산엔 다양한 열매가 있고, 물이 있고, 짐승이 있었다. 어제만 해도 수는 쥐의 가죽을 벗겨 먹었다.
멧돼지를 쫓는 분명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숨이 오락가락 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가질 수 있다면 가지고 보는 것.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 중 하나라고. 모든 이의 품에 지니고 있는 욕망이라고. 수는 오늘도 생각했다.
또. 멧돼지를 잡아가면 다시 부족에 받아줄 지도 모르지. 가장 낙관적이면서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럼에도 도전하고 부딪쳐봐야지. 그게 인간이니까. 수는 그렇게 자신을 다잡았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헤아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봤자 달의 주기가 지나간 것은 아니지만. 어째선지 수는 아득한 시간이 지났다 느꼈고, 그 긴 시간 속에서 갇힌 상태라고 느꼈다.
수는 매일 밤 바위 틈새 속에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달이 깎여나갔다. 첫날엔 완전한 원이었지만, 지금의 달은 반이 잘려나간 채 작은 돌칼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달은 15일 동안 스스로를 깎아내린다. 두 팔을 벌리고 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그 후, 또 다시 15일 간 스스로의 여백을 채운다.
이는 선대의 인간들이 발견한 세계의 규칙 중 하나였다. 관찰을 통해 발견하고 이야기에 이야기를 통해 후대로 그들의 지혜를 연결했다. 그렇게, 인간들은 서서히, 느린 속도로 발전했다.
언젠가는 저 달이 변하는 이유도 알 수 있을까. 바위 틈새 속에서, 수는 그런 생각에 잠겼다. 인간은 얼마나 발전을 이루어낼까. 코끼리를 타고 사자의 탈을 쓰며 아낌없이 고기를 뜯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구운, 고기가 먹고 싶다. 서서히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피부로 체감됐다. 밤은 겨울의 주둥이. 혹한이 아가리를 벌리고 수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결국 이곳에서 얼어 죽는 것이 마지막일 지도 모르지.
수는 웅크려 누운 채 잠을 불렀다.
또 다시 두 개의 밤이 지났다. 세 번째 밤을 부르는 황혼 속에서, 수는 마침내 멧돼지를 발견했다. 산의 꼭대기. 있는 것이라곤 바위 무더기와 나무 한 그루가 다인 황량한 그곳에서 멧돼지는 오랜 잠에 빠져 있었다. 수는 창자루를 양손으로 쥔 채 무방비한 놈의 목을 찔렀다. 늙은 피가 느린 속도로 흘러나왔다.
수에게 희열과 만족은, 없었다.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텅 빈 마음속으로 뭔가가 들어오기는커녕 빠져나가는 기분. 진한 상실의 감정이 이리저리, 수의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잠든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상태였다. 나도 알고 있었어. 보자마자 알았지. 수는 멍하니 짐승의 사채 옆에 주저앉았다. 내가 해낸 게 아니야. 내가 해낸 게 아니야.
망연자실한 밤이 하루를 덮었다.
이젠 겨울일까. 하얗고 창백한 하늘에서 태양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알게 모르게 새어드는 빛만 느꼈다.
‘이제 뭘 어쩔 수 있지?’
문득, 수는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이제 자신은 뭘 할 수 있지? 뭘 해야 되지? 그저 멧돼지라는 목적 하나에 이끌려 무의미한 몇날며칠을 지샜지만, 모두 거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남은 알맹이는 뭐지? 그토록 바랐던 고기? 수는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아침은 정말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마치, 인생처럼. 수는 엉킨 수풀을 만지작거리며 생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삶은 정말 무의미한 흐름이다. 목적지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바람처럼. 미지를 떠도는 아이들이 인간인 것이다.
수는 누런 풀들을 엮어 끈으로 만들었다. 포갠 풀은 멧돼지를 지탱할 정도로 질겼다. 아무래도 사람 혼자서 멧돼지를 옮기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해야했다.
수는 끈을 길게 만들어 몸통과 다리들을 칭칭 감아 엮었다. 그러고는 멧돼지를 묶은 끈을 그대로 자신에게 둘렀다. 길고 힘겨운 귀환이 예감되었다.
몇 개의 밤이 또 지나갔을까. 수는 정확하게 그 수를 셀 수 있었다. 3개의 밤이다. 지금은 4번째 밤이었고. 아침을 앞둔 새벽이었다.
시작점이었던 산이 멀리 떨어졌고, 최종 목적지인 부족마을은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이런 험난한 여정 속에서, 수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언제 짐승들이 멧돼지를 채갈지 몰랐으니까.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종일을 보내야만 했다.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만큼이나 쏟아지는 졸음이었다. 수는 이를 악물고 멧돼지를 끌었다. 부족 마을이 점점 선명히 보였다.
들개무리들이 수의 앞에 나타났다. 7마리의 개였다. 코앞에서 끝이구나. 수는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창을 겨눴다. 참으로 무정한 하늘이라 생각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들개무리도 수를 지나갔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이, 수가 한 그루의 나무라도 되는 듯이, 바위라도 되는 듯이 그냥, 지나쳤다.
들개들이란 항상 굶주려있고 만만한 상대, 홀로 있는 인간이라도 보면 달려들고 보는 놈들인데. 어째서 그냥 지나친 것인지. 수는 긴장의 해제와 그 여파로 인해 빨라진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침이 타오르기 시작할 때. 도끼를 얻어맞고 쓰러졌던 때와 동일한 그 시간대에, 수는 부족에 복귀하였다. 그를 반기는 이는 없었고, 그가 귀환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대신해서 그를 반기는 것은 냄새였다. 오래지 않은 죽음의 냄새. 신선한 시취였다.
“뭐하려 이곳에 돌아온 것이냐.”
갑작스런 목소리에 수는 화들짝 놀랐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아침을 등 진 부족장 민이 서 있었다. 반석처럼. 굳은 표정으로 민은 수를 노려보았다.
“널 반길 상황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다.”
“단체로 어딜 간 거야?”
“넌 이 냄새도 맡지 못하는 거냐?”
수는 졸음 속에서도 머리를 찌르는 충격을 느꼈다.
“설마 다 죽었다고 말하려는 거야?”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절반 이상이 죽고, 나머지는 노예로 끌려갔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다. 며칠에, 며칠에, 며칠에,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그의 고향부족이 사라졌다.
“서쪽 부족에서 공격해왔다. 기습이라서 당했지.”
“넌 어째서 여기 남은 거야?”
“난 부족장으로서 싸웠다. 하지만 놈들은 날 내버려두고 이곳을 떠났지. 숲의 냇가에 시체들이 쌓여 있다.”
오목조목 사실을 읊조리는 민의 표정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모든 감정을 상실하고 해탈의 지경에 이른, 얼굴이었다
“......이제 어쩔 거지?”
수의 물음에 민은 고민할 게 뭐가 있냐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복수할 것이다.”
“성공할 수는 있나?”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 놈들은 강하지.”
민의 담담한 인정에 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가 알던 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복수하겠어. 실패할지언정, 부족장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겠다. 너와는 달리.”
수는 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론 실패한 부족장일지라도, 수는 민을 존경했다. 그의 생각보단 나쁘기만 한 부족장은 아니라고. 적어도 책임감은 존재했다.
“나는 동쪽으로 갈 거다.”
수가 말했다.
“미지의 땅을 한 번, 밟아봐야지.”
“그래.”
공백을 메꾸다 바닥난 침묵에, 수가 간신히 뒤를 이었다.
“이거나 좀 먹고 가지 않을래?”
그들은 멧돼지를 통째로 불에 태웠다. 껍질을 벗기고 질긴 고기를 뜯었다. 수가 간절히 바랐던 고기의 맛이었다. 당연하게도, 굉장히 맛있었다.
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땐 정오였다. 자신마저도 속일 정도로 급박한 잠이었다. 어쩌면 기절했던 걸지도 몰랐다.
민은 자리에 없었다. 아무래도 서쪽을 향해 떠났을 터였다. 양손으로 도끼를 쥔 채.
수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알지 못하는 땅. 태양이 떠오르는 땅. 아침의 지평선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앙상한 가지를 늘어뜨린 익숙한 한 그루의 나무 앞. 수는 뿌리와 뿌리 사이에 돋아나 있는, 갓 자라난 싹을 보았다.끌려갔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다. 며칠에, 며칠에, 며칠에,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그의 고향부족이 사라졌다.
“서쪽 부족에서 공격해왔다. 기습이라서 당했지.”
“넌 어째서 여기 남은 거야?”
“난 부족장으로서 싸웠다. 하지만 놈들은 날 내버려두고 이곳을 떠났지. 숲의 냇가에 시체들이 쌓여 있다.”
오목조목 사실을 읊조리는 민의 표정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모든 감정을 상실하고 해탈의 지경에 이른, 얼굴이었다
“......이제 어쩔 거지?”
수의 물음에 민은 고민할 게 뭐가 있냐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복수할 것이다.”
“성공할 수는 있나?”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 놈들은 강하지.”
민의 담담한 인정에 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가 알던 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복수하겠어. 실패할지언정, 부족장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겠다. 너와는 달리.”
수는 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론 실패한 부족장일지라도, 수는 민을 존경했다. 그의 생각보단 나쁘기만 한 부족장은 아니라고. 적어도 책임감은 존재했다.
“나는 동쪽으로 갈 거다.”
수가 말했다.
“미지의 땅을 한 번, 밟아봐야지.”
“그래.”
공백을 메꾸다 바닥난 침묵에, 수가 간신히 뒤를 이었다.
“이거나 좀 먹고 가지 않을래?”
그들은 멧돼지를 통째로 불에 태웠다. 껍질을 벗기고 질긴 고기를 뜯었다. 수가 간절히 바랐던 고기의 맛이었다. 당연하게도, 굉장히 맛있었다.
수가 잠에서 깨어났을 땐 정오였다. 자신마저도 속일 정도로 급박한 잠이었다. 어쩌면 기절했던 걸지도 몰랐다.
민은 자리에 없었다. 아무래도 서쪽을 향해 떠났을 터였다. 양손으로 도끼를 쥔 채.
수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알지 못하는 땅. 태양이 떠오르는 땅. 아침의 지평선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앙상한 가지를 늘어뜨린 익숙한 한 그루의 나무 앞. 수는 뿌리와 뿌리 사이에 돋아나 있는, 갓 자라난 싹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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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무렵이었다. 비행기는 시끄럽게 고공행진 했고 나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둥근 지구와 내가 분리된 순간. 아니 중력권 내이기 때문에 아직 난 지구였을까.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나와 무언가가 분리된 듯 한 기분에 휩싸인 순간. 양쪽 귀에서 톰 요크의 목소리가 춤추던 그 때. 일그러진 일렉 기타의 사운드가 뇌파와 주파수를 맞출 때.아. 그것은 airbag였나. 아니, just였던 것 같기도. 가물가물한 기억의 모서리. 닳고닳은 모서리. 끝에 서 있는 가장 무딘 나. 그곳은 넘실거리는 바다의 소금기 밴 바람이 불었다.야트막한 언덕 위에 오두막이 있었다. 그것은 일몰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전망대였다. 동시에 밤바다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전망대였고, 아침을 맞이하는 가장 좋은 전망대였다. 해변의 혼석은 햇빛에 달궈지고 파도는 윤슬을 둘러 반짝이고. 언덕 위에선 노래가 흐르고. 나는 춤을 췄다. 노을 진 저녁에 오두막의 테라스엔 사람으로 가득했다. 낮의 마무리를 술과 함께 하는 이들이었다.브래들리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아저씨였다. 그는 그곳에서 바(bar)를 운영하였는데, 갈 곳 없는 나를 흔쾌히 재워주기도 했다. 덕분에 오두막은 내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낯선 동양인에게 침대를 내어준 브래들리에게 무수한 감사를. 그는 영국인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비틀즈의 팬이었다. 광신도라는 표현도 과하지는 않겠지. 덕분에 오두막에선 레논-매카트니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그 끈질긴 사랑에 약간 지치긴 했어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비틀즈의 노래로 채운다 생각해보라. 지치지 않을 리가) 만족했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 투정부리기엔 진 신세가 대단히 무거웠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때문에 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손님은 많이 없었고 해야 할 일이라곤 브래들리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과 비틀즈의 노래를 감상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꽤나 체력을 소모하긴 했다만. 일은 오후 3시에 끝났다. 그러면 보통 시내로 걸었다. 걸어서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갖가지 소음들이 뭉쳐서 소란을 퍼뜨리는 곳. 내겐 뒤엉킨 혼잡함이 필요했다. 무엇이든 균형이 중요하니까. 해변은 무척이나 고요했고, 하루의 일부분은 소란을 채워 넣어야 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도 하고.당시 내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가 인간관계였다. 그것은 현재까지도 내 삶을 관통하는 가장 굵은 줄기다. 그 줄기는 손을 가지고 있었다. 혹은 더듬이. 혹은 입. 혹은 성기라고도 해도 되겠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줄기들의 손, 혹은 더듬이, 혹은 입, 혹은 성기와 이어졌다.그러한 방식의 맺음들은 모두 각자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무언가는 사랑, 무언가는 미움, 무언가는 유대, 무언가는 미안함. 무언가는 부끄러움.무수한 색깔의 맺음들. 그것들이 피워낸 꽃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 그 꽃의 이름은 동경이었다. 나는 한 소설가를 동경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관계로 앞으로도 소설가라 기술해야 할 듯싶다.그러나 이름을 제외한 그의 많은 것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와 친해
- 구포대교
- 2025-07-06
계단에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그런 계단이 내 발을 받치고 있다고. 그 아래의 풍경이 아주 위태롭게 날 노려보았다. 어디까지 올라갈 셈이지?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길을 걸었을 뿐이었으니까. 그것은 아스팔트였고, 시멘트였고, 콘크리트였고, 우레탄이었고, 일종의, 횡단보도였다. 빨간불일 때는 횡단해서는 안 됩니다. 초록불이 깜빡일 때만 건너실 수 있습니다. 25초가 너무 짧다고 느껴지신다고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그것이 규칙이니까요. 앞선 인간들이 만든, 규칙. 법. 그 법을 따라 걸었을 뿐이란 생각이다.그것들은 모두 지그재그로 접혀져 있었다. 나를 끝없이 하늘로 올려 보내고 있었다. 앞선 인간들도 모두 하늘 너머, 우주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투명한 공포가 나를 감싸 안았다. 날개 없는 인간의 무력함이, 매섭게 날아와 꽂혔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가야 하는 거라고. 최선을 다해서.그럼요. 인간은 올라가기 위해 태어났는걸요. 하늘을 동경하는 것은 태고의, 시초의, 시작에서부터 깃든 본능이랍니다.어느 대단하신 인간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속삭였다.당신은......토머스 에디슨? 위대한 인류의 선지자. 속삭임의 정체는 당신인가.인류는 이제 비행할 수 있었다. 수많은 비행기가 낮과 밤을 누비고, 그런 비행운들로 어질러진 하늘 아닌가. 모험의 시대는 끝났다. 지구는 인간의 발자국들로 뒤덮였다.바람은 높아. 이젠 날 수 있겠어.우린 강철의 날개를 달았다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도 녹는 일이 없지. 이제 발과 다리는 필요가 없어. 잘라내야겠지. 계단을 오를 필요는, 없다고.그렇게, 지구를 돌았다. 태양계를 회전하는, 회전하는, 지구를 회전했다.그리고 지구의 축에 섰다. 북극점이었다. 새하얀 파랑색들로 얼룩진, 거대한 원이었다. 그것이 과녁의 정중앙이라도 되는 듯, 화살이 쇄도했다.폭발이 일고 나서야, 그것이 비행기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부러진 날개가 빙산에 부딪혔다. 붉은 열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후, 불길 사이를 유유히 걸어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슈퍼맨이었다, 라고 생각해버렸다. 슈퍼맨이어여만 할 것만 같은 사내였다. 올곧은 몸에 올곧은 눈빛, 올백머리. 그 올백머리가 나를 사로잡았다.당신은 누구십니까?비행삽니다.비행사는 소매의 불씨를 탁탁 털어냈다. 역전의 영웅과도 같은 비주얼이라, 생각했다.비행사는 나를 지나쳐,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다시 날아오르면 되는 것 아닌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비행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한 번의 비행을 위해선, 무수한 계단을 밟아야 하는 법입니다. 많은 이들이 모든 성공에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나 부연설명이 필요합니다. 성공을 향해 도약하기 전, 출발대에 서는 것에도 거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출발선보다도 뒤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들에겐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것이, 사실은 출발선에 불과했다는 진실은, 그들을 절망케 합니다.
- 구포대교
- 2025-07-01
하늘에는 보랏빛이 아름답게 번지고, 땅에선 노오란 들판이 바람에 나부꼈다. 이 하늘과 땅을 모두 눈에 담을 수 있는 언덕 위에서, 나는 잠을 잤다.평화로운 삶이었다. 이 삶이 언제부터 시작 됐는가에 대한 질문은 사절한다. 나도 모르니까.나는 몇 살인가.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내 이름은 무엇이었지?제기랄.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래서, 체념했다. 이건 아무리 고민 해도 알 수 없는 문제다.그냥 자고 일어나기의 반복이다. 저 드넓은 들판도. 광활한 하늘도 다 볼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재미가 없었다.나는 언제부터 이러고 살았지?이름 모를 고목에 기대 잠을 자고 일어나면 항상 같은 풍경이다.이따금씩 하늘을 가로지르는 철새들을 보면, 왠지 모를 부러움이 솟아 올랐다. 아무래도 자유를 향한 갈망이리라.하지만 내 어깨엔 날개 따윈 없다.난 내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꽤 오래 전에 깨달았다. 내 몸뚱아리 하나 지탱할 발은 있지만. 이 발을 가지고 무언갈 할 생각을 하질 않았다.굳이 여기서 움직여야 하나? 지루함 하나 때문에?그리고 어느순간 난 깨달았다.아무래도 나는 게으른 것 같다고.* * *이건 몇 번째 기상일까.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스치자 저절로 눈이 떠진다.그러한 내 시야 안에, 평소와 다른 이물질 하나가 들어 있었다.“응?”아직 잠결이 다 가시지 않은 지라 잠긴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생각해보면 소리를 낸다는 행위 자체를 오랜만에 해봤다. 나는 잠시 언어를 잊어버린 듯 멀뚱히 놈을 쳐다보았다.잔뜩 헝클어진 검은 머리에 불구하고도 아리따운 미모를 자랑하는 여아였다.“?”어디서 나타난 걸까? 이 근처에 사람이 살만한 것은 없다. 있는 것이라곤 들판이 전부다.내가 가뜩이나 경계어린 눈빛으로 아이를 쳐다보자, 놈은 겁이라도 먹은 듯이 주춤거렸다.(아니면 걸음이 미숙한 탓일 수도 있다.)이런 부시시하고도 예쁜 놈이 어디서 튀어나왔는 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는다.그래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오래된 언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어디서…왔니?”제법 친절하게 물었다고 생각했다.다만 내 목소리자체가 조금 무서운가 보다. 아이는 이내 눈물샘을 터뜨리며 소리내 울고 말았다.어떻게 해야하지? 제기랄. 이게 어떻게 되먹은 일인지 도저히 모르겠다.나는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세심히 관찰했다.유치를 뽑고 얼마 되지 않았는지 이빨 몇 개가 없었다. 저 오똑한 코와 쳐진 눈매가 제법 매력적이다. 부시시한 머리칼과 어울리는 외모다.그나저나 이놈의 울음은 언제쯤 그칠까.아아. 아무 것도 없던 공허한 내 삶 안에, 울음소리가 울려퍼졌다.*그 여아는 내가 잠시 눈을 뗐을 때, 사라졌다.어디로 간걸까. 고작해야 2초 남짓한 시간 안에, 사라져버렸다. 걷는 것조차 잘 못하던데. 허공으로 증발해버린 걸까?내가 저 하늘의 새였다면 봤겠지. 어떻게 사라졌는지.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내 시야각은 그렇게 넓지 못하였기에. …아무래도 상관 없다.평화롭고 조용하던 내 일상에 잠시 동안의 잡음이 스쳐지니간 것따윈. 하지만 다음날이 되고서, 아이는 또 내 시야에 들어왔다.“…안녕
- 구포대교
- 2023-09-17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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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열심히 쓰시는군요...
다시 읽어보면 굉장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조금 더 담백하게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