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무적자의 하루

  • 작성자 밍맹
  • 작성일 2025-08-02
  • 조회수 346

밤새 내린 비가 멎자 엷게 낀 구름 사이로 서서히 해가 드러났다비는 이미 멎은 지 오래였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로부터 아이를 겨우 막아주던 종이에 고인 물방울들은 아직 천천히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서늘한 물줄기가 팔을 타고 스며들었지만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대신천천히 눈을 떴다.

해가 떴지만아직 아이의 공간에는 어둠이 얹혀있었고 빗물의 물비린내와 젖은 땅 내음이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중간중간 틈이 생긴 지붕 사이로 햇볕이 가늘게 들어오고 밤새 지붕에 맺힌 물방울들이 한 방울두 방울씩 아이의 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아이는 자신에게 덮여있던 담요를 더욱 끌어안았다초봄의 한기로부터 아이를 지켜주던 담요에서는 아주 얕게 익숙하면서도 따뜻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달력과 시계조차 없는 작은 폐허에서는 시간도요일로 바뀌지 않았다하지만 아이는 오늘이 월요일이란 것만은 알 수 있었다밖에서는 육중한 차체가 움직이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저 쓰레기차는 이곳에 월요일마다 들렸다그 때문에 아이에게 저 차는 그저 그의 삶에 도움 되지 않은 것일 뿐이었고 월요일 또한 그저 조금 더 배가 고픈그런 날일 뿐이었다.

아이는 이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어제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한 탓인지 약간 어지러운 듯한 느낌에 잠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멈추고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곧 다시 몸을 일으킨 아이는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를 정리했다사실정리할 것도 없었다그저 자신이 덮고 있던 담요를 구석에 개어 두는 것그것이 정리의 전부였다그러고는 자신의 옷차림을 정리한다헌 옷 수거함에서 꺼낸 옷은 상의와 하의가 따로 놀고 옷 사이즈도 제각각이었으나 어제 공중화장실에서 대충 씻었던 탓인지 나름 행색이 못 볼 꼴은 아니었다아이는 자신의 머리만 간단히 정돈하고 작은 박스들을 모아 만든 의자에 잠시 앉아 오늘도 자신을 되새겼다.

사실되새기려 노력했다되새길 것이 없었다아이는 이름도 생일도가족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모두가 아는 자신의 나이조차 알지 못했으니아이는 그 무엇도 가지지 못했다.

아이는 잠시 앉아 있었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더 밝아지기 전에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낡고 헤진 운동화 끈은 다시 한번 동여맨 아이는 천천히 폐허의 문을 열었다녹슨 철문은 삐걱대며 반쯤 열렸고 바깥 공기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젖은 아스팔트 냄새담배꽁초와 물때가 섞인 하수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익숙한 냄새였다아이는 그사이를 걸어갔다.

아이의 공간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자그마한 시장과 고물상쓰레기장이 있었다누군가에겐 불필요한 것들이 쌓이는 곳이었지만아이에게는 하루를 이어가게 해주는 유일한 장소였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걸어갔다길 위의 물웅덩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아이의 그림자가 그 위를 스쳐 지나가듯 건너갔다.

시장은 이미 꽤 북적였다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는 상인들의 목소리와 손님들의 발길이 얽혀 소란스러운 기운이 묻어났다아이는 그 틈을 비집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이 아이를 힐끗 쳐다보았다마치 보기 싫은 얼룩이라도 본 듯한 시선도잠깐의 연민을 담고 곧 외면하는 시선도 존재했다아이는 그런 시선들에 익숙했다익숙하다는 건 아무렇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다이미 질려버려 반응할 힘도 없다는 말이었다.

아이는 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가게 앞에 쌓인 골판지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주인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서둘러 꺼내 들고는 조심스럽게 미리 챙겨둔 큰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손끝을 스친 테이프 자락이 아이의 살을 얇게 베어냈지만 아이는 작은 상처 따위는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저런 애는 부모가 안 찾는 거야?”

어휴... 애만 딱하지 뭐...”

뒷말은 작지도 멀지도 않게 들려왔다일부러 크게 말한 것이 분명했다아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더 푹 숙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갓 구운 빵 냄새가 풍겨왔다아이는 본능처럼 그 냄새를 향해 몇 걸음 다가서다가빵집 유리 너머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과 눈이 마주쳤다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안쓰러움과 경계심이 뒤섞인가까이 오지 말라는 의미의 눈빛아이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그런 눈빛은 따뜻하지 않았다누군가를 위해 멈춰주지도다가와 주지도 않는 그런 따뜻함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아이는 봉투를 더욱 세게 움켜쥐고발끝을 조심스레 끌며 다음 가게로 나아갔다.

아이의 봉투는 이제 꽉 차 찢어질 듯 불룩해졌다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고손은 묵직한 봉투에 눌려 감각이 흐려지고 있었다몇 번이고 내려놓고 싶었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해가 지기 전에는 일을 마쳐야 했다.

시장 끝자락좁고 구불거리는 골목 넘어 고물상이 모습을 드러냈다녹슨 철문은 어림없이 덜컥묵직한 소리를 내며 아이를 맞았다.

어 왔냐?”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저씨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봉투를 받아들었다.

오늘은 꽤 모았네.”

저울 위에 올라간 봉투가 꾹 하며 내려앉았다아저씨는 주머니 속 종이봉투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아이가 고개 숙여 그것을 받자아저씨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말했다.

이거나 마셔.”

아저씨의 손에는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듯 차가운 생수가 들려있었다.

고생이 많다.”

아이는 눈을 한번 깜빡이고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 짧은 말에 어떤 감정을 담아야 할지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자 아저씨도 더 이상 아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철문을 나서는 아이의 손에는 물병 하나와 꼬깃꼬깃하게 접힌 지폐 몇 장이 쥐어져 있었다문이 닫히며 또 한 번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아이의 마음 안에서도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오래전부터아이는 알았다누군가의 작은 따뜻함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루를 버티게 만든다는 걸.

땀에 젖은 손바닥에 플라스틱이 미끄덩 미끄러지다결국 아이는 멈춰 서서 다시 물병을 움켜쥐었다.

길 건너편에서 아이들 몇 명이 뛰놀고 있었다흙먼지가 일었고그 사이로 투명하게 웃음소리가 흘렀다누가 봐도 방학을 맞은 아이들 같았다맨발이었고입은 옷은 헐렁했지만 밝았다아이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아이들이 서로를 부르며 달려갔다소리 지르고넘어지고다시 웃고.

하루는 잠깐 멈춰 섰다손에 들고 있던 병을 내려다보다가문득 그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저런 웃음이 언제 마지막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아마 애초에 그런 건 없었을지도 몰랐다.

하루는 눈길을 거두었다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다시 걷기 시작했다.

물이 얼음처럼 차가웠지만목은 이상하리만큼 마르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폐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세월에 닳아 문짝은 뒤틀렸고창틀 사이로 바람이 빈틈을 노리듯 불어왔다아이의 집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무도 오지 않는아이의 장소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햇빛이 한쪽 벽에만 걸려 있었다그 벽에는 낡은 종이 하나가 여전히 붙어 있었다구겨진 사진 조각 같기도 했고누런 벽지 자국 같기도 했다.

할아버지.

아이의 눈이 천천히 그 자리를 향했다.

여기우리 집이야.”

늘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살았던 적이 있는지조차 희미한 사람하지만 분명히아이를 불렀던 유일한 목소리.

하루야.”

아이는 몸을 돌려 벽에 등을 기댔다.

물병은 바닥에 놓인 채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고아이는 가만히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래전의 기억을 꺼냈다기억은 아주 조용히천처럼 펼쳐졌다.

언제였는지도 모를 계절의 끝자락폐허 안으로 아직 겨울의 바람이 드나들던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낡은 재킷을 입고아이 옆에 앉아 있었다말이 없었고담배를 피우는 것도 아니었다그저 멍하니 입을 다문 채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게 언제 적 노래인 줄 아니?”

그렇게 말을 꺼낸 건 둘이 앉아 있는 지 몇십 분쯤 지났을 때였다.

아이보다 더 말이 없던 사람의 목소리였기에그 조용한 말 한마디는 오래 남았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해야 할 이유도내용을 알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몰라도 괜찮아나도 몰라그냥 들은 적은 있어서.”

말을 뱉고도할아버지는 라디오를 끄지 않았다그러곤 아이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그 손엔 마른 굳은살이 많았고체온은 낮았다손을 잡고할아버지는 말했다.

우린... 기록에 없어서류도 없고주소도 없고이름도 없는 사람이지.”

말은 담담했지만그 담백함 뒤에 눌러 담긴 무게는 컸다.

그래도 사람은 살아어떻게든계속 살아.”

그 말 뒤에아이는 한참 동안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할아버지가 남긴 가장 또렷한 말이었다자주 뭔가를 이야기하던 사람은 아니었지만그날만은 다르게 느껴졌다그저 몇 마디였는데그것만으로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었다.

아이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폐허 안은 여전히 고요했고물병의 표면에는 아직 차가운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이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그래도살아야 하니까.”

그 말은 누구를 향한 것도듣는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그저 자신을 조용히 붙들기 위한 말이었다.

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뇌며지금도 이 아이는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햇빛은 천천히 벽을 옮겨가고 있었다하루는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지나가는 하루 속에서누군가의 하루가 또 시작되고 있었다그리고 그 하루는어김없이 살아 있었다.


추천 콘텐츠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콘텐츠 입니다. 마지막 일기장

2025년 7월 7일 (월)죽기로 했다.정확히는, 오늘 아침.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다 말고, 머릿속에서 딱, 그런 문장이 흘러나왔다.“이쯤이면 됐지.”그리고 너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살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버텨야 한다는 책임감도 그 순간엔 아무 소용 없었다. 그냥, 끝을 생각하는 내가 이상하게도 나를 제일 이해해주는 사람 같았다.서랍을 열고 메모지들을 꺼냈다. 예전 일기, 아무 말도 안 하고 접어둔 편지,'도와달라'는 말 대신 종이에만 적어두었던 문장들.누군가 볼까 무서워서 숨겼던 말들.이제는 보여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어차피,나는 거기 없을 테니까.사실은 며칠 전부터 학교 책상도 정리했다.필통은 필요한 것만 남기고, 공책은 깨끗한 쪽만 남겨두었다.민서가 물었다.“너 왜 갑자기 정리 중이야? 전학 가?”나는 웃으면서“그냥 요즘, 덜어내는 게 좋더라” 했고 민서는 금세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다행이었다.아무도 진심으로 묻지 않아서.2025년 7월 8일 (화)요즘은 이상하리만치 잠을 안 자도 멀쩡했다.밤새 핸드폰만 보고 음악 듣고, 예전 사진을 뒤적여도 아침이 오면 별로 힘들지 않았다.'어차피 얼마 안 남았으니까.'이 말이 머릿속을 자주 맴돌았다.그러면 모든 게 버틸 만해졌다.SNS 프로필 글도 바꿨다.예전엔 그냥 웃긴 글귀였는데며칠 전부터는"생각은 깊어지고, 말은 줄어든다"라는 문장을 적어놨다.좋아요는 몇 개 달렸고,댓글로 누군가가 말했다.“무슨 감성 터졌냐ㅋㅋ”나는 그 말에“그냥 요즘 그런가 봐”라고 답했다.2025년 7월 9일 (수)오늘 친구에게 치마를 빌려줬다.진짜 마음에 들던 건데 괜찮다고, 더는 잘 안 입는다고 했다.사실은 그 옷을 내가 다시 입을 일은 없을 것 같아서.급식도 며칠째 남김없이 다 먹고 있다.식판 싹 비우는 내가 신기했는지 옆자리 애가 물었다.“너 입맛 돌아왔어?”나는 “응. 요즘은 잘 먹혀.”라고 말했다.마지막이라서.그냥 다 먹고 가고 싶었다.정수기 앞에 서 있다가 괜히 눈물이 났다.무슨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혼자 마시다 말고 울었다.누가 다가오면 얼른 눈을 닦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말했다.“요즘 눈이 좀 시려.”이젠 그런 핑계도 익숙하다.2025년 7월 10일 (목)오늘은 또 담임 선생님이 상담을 하자고 불렀다.무슨 일 있는지 물었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아뇨, 그냥 요즘 생각이 많아서요.”그리고 끝.선생님도 바빠 보였고 나는 더 말할 용기도 없었다.정말로,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내가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나는 그말을 믿는 척했을 뿐인데.마지막 하루를어떻게 보낼지는 대충 정해놨다.아침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날 거고,좋아하는 노래 들으면서천천히 옷을 입을 거다.엄마가 일어나기 전에 나갈 거고,문 앞에 짧은 메모 하나 남겨둘 거다.긴 말은 쓰지 않을 거다.아무리 길게 써도그 마음은 다 닿지 않을 걸 아니까.마지막으로,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그 한 마디를누군가가 내게 했더라면모든 게 달라졌을까.“진짜 괜찮은 거 맞아?”그 질문,누구 하나 진심으로 묻지 않았다는 게아직도 좀 아프다.2025년 7

  • 밍맹
  • 2025-07-05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콘텐츠 입니다. 내가 죽은 날

병실은 죽은 듯 고요했다. 창밖에서는 봄 햇살이 먼지처럼 가볍게 얹혀 있었고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 드는 바람이 커튼을 천천히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듯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다 뜬 느낌보다는 어쩌다 다시 삶을 되찾게 된 느낌이었다. 천장은 하얗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밝았다. 공기 속에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소독약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고, 귀 끝엔 낮고 일정한 기계음이 맴돌았다. 몸 곳곳에 붙어 있는 기계 장치들은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기계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나는 실패했다. 모든 것이 다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다시 돌아왔다. 내게 느껴진 건 살았다는 안도도, 아프다는 고통도 아니었다. 처음 느껴진 감정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마른 목구멍, 혀끝에 닿는 무기력한 침묵. 몸은 마치 비워진 껍데기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천천히 수액이 흘러들어오는 감각만이 희미하게 손끝을 간질였다.“다온아... 다온아... 들려? 너 괜찮아?”익숙한 목소리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머릿속에 맴돌던, 내 결정에 가장 많은 질문을 던지게 했던 그 사람. 바로 엄마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자 갑자기 눈물이라도 흐르려는 듯 눈이 아려왔다. 하지만 눈은 아려오기만 할 뿐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대신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엄마는 다시 한번 더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를 부른다기보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절박한 동작처럼 들렸다. 내가 다시 어딘가로 떨어지지 않도록, 이곳에 붙들어 두려는 몸짓 같았다.‘괜찮아. 난 이미 죽었으니까.’나는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마치 내 안의 문을 걸어 잠그기라도 하듯, 엄마의 목소리를 천천히 밀어냈다.나의 마지막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옥상, 차가운 바람, 흩날리던 머리카락.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의 적막한 정적. 그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조용했던 순간이었다. 세상의 소음이 모두 꺼진 듯했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빨리 가라며 재촉하는 자동차 경적도,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사라졌다. 시간조차 정지된 듯한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를 맞이한 건 흰 천장과 기계음뿐이었다.“내가 살아있는 척을 너무 오래 해서 내가 진짜 살아있는 줄 알았어.”내가 남긴 마지막 문장이었다. 마지막인데도 SNS에 올리지도 못하고, 핸드폰 메모장에 쓸쓸히 적어두었던 말이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다는 건 기적이 아니었다. 운명도, 우연도 아니었다. 그저 다시 한번 내 목을 조이는 형벌일 뿐이었다.웅성거리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걱정스러운 엄마의 표정이 아닌 흰 가운을 입은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의사였다. 그는 내 몸을 쭉 훑어보더니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겠어요?”나는 그의 얼굴만 응시했을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호흡기 탓에 대답 못 한다고

  • 밍맹
  • 2025-07-02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