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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비결정

  • 작성자 낮선 돌멩이
  • 작성일 2026-04-08
  • 조회수 64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2034년 4월 3일 A대학 위시안 박사가 일생을 바친 연구 99.8%의 뇌 구조 지도를 공개했습니다. 위시안 박사는 20년 전 강도에게 살해당한 동생을 언급하며 자신의 뇌 지도가 특히 범죄예방에 크게 기여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집에 돌아가던 중 나는 편의점 앞에 멈춰섰다. 

시원한 우유가 마시고 싶었다.

나는 바나나우유와 딸기 우유를 똑같이 좋아한다.

동일한 양에 동일한 가격, 동일한 효용에, 나는 내가 왜 딸기 우유를 선택한  지 이유를 모른 채 그것을 집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나와 종이을 까고 목을 축였다. 


집에 들어와서 우유각을 접어 버리고 침대에 앉았다.

책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얀 표지에 파란 눈이 그려져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일어나 그 책을 집어 침대 위로 던지고 내 몸도 침대 위로 던졌다.

배를 깔고 눕고 책을 펼쳤다.

이 책을 예전에 읽었는데 기억은 가물가물 했다.

언제였더라?

4장이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기도.

부록에서 4장 페이지를 찾아 대충 집어 넘겼다.

280p.

오른쪽 페이지 가벼운 그림 아래에 문장이 먼저 보였다.

"의식은 여러 육체를 이동하며 각 육체의 세계를 경험하고 여행한다.

흠.. 이 세계에선 무엇을 경험할까.

기대보단 걱정이 많은 이 평범한 몸의 세계에서.


주말 아침,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대충 토스트 한 장으로 아침을 때우고, 나는 집을 나섰다.

병원으로 가는 길, 앞에서 젊은 남자 둘이 떠들며 지나갔다.

“씨발, 니가 20점인데 내가 54점이라고?”

“또 화낸다. 니가 이러니 54점이지, ㅋㅋ.”

둘은 툭툭 치며 웃고, 아무렇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잠시 멈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발을 옮겼다.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검사 시간은 30분 정도 소요되며 70점 이상 받으신 분들은 즉시 상담 진행됩니다.

자동 발급기에서 뽑힌 번호표엔 23번이 찍혀 있었다.

대기실 의자에 앉으니 앞번호 사람들이 하나씩 불려 들어갔다.


시끌벅적한 대기실에서 벽 중앙에 걸려있는 스크린 소리가 살며시 들려온다.

"A국 범죄율이 24.1%에서 1년 내에 6.7%로 급감했습니다. 이건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거든요." "몰론, 경찰력을 크게 증원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CPT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죠."

"75점? 내가 씨발 지금 범죄자라는 거야? 어!?" 데스크 쪽에서 소리가 났다.

조금 나이 든 남자가 결과지를 움켜쥐고 소리를 쳤다.

"환자분, 일단 진정하시고 상담 먼저 반아보시는 게..."

그 남자는 의사 두명에게 상담실로 끌려갔다.

환자... 습관적으로 나온 말이겠지만... 그는 환자다.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 대기실은 잠깐 고요했다가 곧 다시 웅성거렸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며 번호표를 접어 종이학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종이가 정사각형이 아니라, 결국 종이배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물이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겠지. 

나는 종이를 접었다 폈다 하며 작은 배를 완성했고, 

그걸 손끝으로 꾸물꾸물 굴리며 기다렸다. 

“23번 손님, 검사실로 들어오세요.” 


스피커에서 내 번호가 불렸다. 

나는 눅눅해진 종이배—아니, 번호표를 주머니에 찔러 넣고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문 앞에서 간호사가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먼저 탈의실에서 검사복으로 갈아입으시고, 기기실로 들어가실게요.” 

검사복은 조금 퍼렇고 누런빛이 섞여 있었고, 옷감은 뻣뻣하게 무거웠다. 

나는 긴장이 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기기실 문을 밀어 열었다. 


문이 비껴 나고, 방에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하고 하얀 기계가 있었다. 

기계 중앙에 검은 원형 구멍 속에서 파란 빛이 나왔다. 

기계 왼쪽에 의사가 아까 간호사와 똑같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여기 편하게 누워 계시면 됩니다. 

20분 정도 걸려요." 

내가 기계에 걸터앉자 의사는 문을 열고 기기실 밖으로 나갔다. 

신발을 벗자 땀 찬 발에 시원한 공기가 들어왔다. 

신발을 바닥에 내려놓는데 왼쪽 신발이 굴러서 뒤집혔다. 

신발을 주으려다 창 밖에서 나를 보고 있는 의사와 눈이 마주쳐 급히 등을 기계에 댔다.



쭈삣쭈삣 몸을 기계에 맞춰 올리고 두 손을 모은 채 누웠다. 

기계에 겉 면은 딱딱하게 눌리는 재질이었다. 

나는 땀으로 끈적한 내손을 만졌다. 

주먹을 쥐었다가 까지를 끼고 손가락을 두르고.. 

"우우웅" 나는 기계가 닫히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긴장을 하다니, 새삼 겁 많은 내 검사결과가 뻔히 예상됐다. 

기계가 완전히 닫히고 밖에서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침을 꼴깍 삼킨다. 

잠시 후, 머리 위에서 빨간 불빛과 노란 불빛이 번갈아 반짝였다. 

노란빛 빨간빛, 빨간빛 노란빛. 

서로 꽉 붙잡고 있던 내 양손이 차츰 풀어졌다. 

노란빛, 빨간 빛이 서서히 연해져 가며 달달해졌다.


 노란, 빨간, 노란, 분홍....종이배가 분홍색 위에 띄워져있다. 

바나나 우유가 넘쳐흘렀다. 딸기 우유와 바나나 우유가 섞여 바나나 우유가 되었다. 

바나나 우유는 흐르고 흘렀다. 

종이 배, 23이 적혀있는 종이 배는 우유가 흘러가는 대로 흘렀다. 

오른 쪽으로 흐르면 오른 쪽으로, 위 쪽으로 흐르면 위 쪽으로 갈라지면, 갈라져서. 

23이 적혀있지만, 23이 접혀있지 않은 종이 배...

기계 안은 어두워졌다가 다시 파란 불빛이 나왔다. 

"우우웅" 기계가 열리며 밖에서 빛이 들어왔다. 

나는 일어나서 뒤집어진 신발을 발로 끌어 신었다. 

"후.."숨을 내쉬며 기기실 밖으로 나왔다. 


문 밖에서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 끝났습니다. 결과 나올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려주세요. 

"나는 옷을 갈아입고 대기실로 나왔다.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방금 전에 앉았던 자리와, 그 뒤 왼쪽 자리. 

나는 이번엔 뒤쪽 자리에 앉았다. 

대기실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발걸음 소리, 번호를 부르는 스피커 소리,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한데 뒤엉켜 귀로 쏟아졌다.

“23번 손님.”


흩어진 소리 속에서 그 말만 또렷하게 꽂혔다. 

데스크에서 건네받은 종이에 내 이름이 있었다. 

그 아래, 선으로 갇힌 숫자. 숫자 옆으로 0에서 5까지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60까지는 ‘안정’. 70까지는 ‘준위험’. 

그 위로 100까지는 ‘위험’. 

아래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초록색 막대그래프들이 줄지어 있었다. 

내 눈은 잠깐 머물렀다가, 곧 종이를 접어버렸다. 

나는 성급히 병원 문을 나섰다.


햇살이 저물어가는 오후, 병원 문을 나서자 세상은 가볍게 흘러갔다.

역 앞에서 그는 손을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후드티에 청바지, 늘 보던 모습. 

나는 괜히 크게 손을 흔들며 달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도 거기로 갈까?” 

“음… 거기 말고 그 옆에 새로 생긴 파스타집.” 

“그래.”

창가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내려다보았다. 

여러 가지 파스타가 화면을 타고 올라가다 치킨 리조또가 나타났다.

“난 이걸로.”

“그럼 나도 같은 걸로.”

그가 결제 버튼을 누르고 지문을 찍었다.


그가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병원.”

“왜? 어디 아파?”

“아냐, CPT 받으러 갔어.”

“아, 그거 요즘 다 받아보더라. 결과는?”

나는 주머니에서 결과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5점? 안전 60점 중에? 내가 본 사람들 중 제일 낮은데? 너무 착한 거 아니야? ㅋㅋ”

“나도 화나면 무섭거든? ㅋㅋ”

그는 웃으며 내 어깨를 살짝 툭 쳤다.

그때 로봇이 음식을 들고 테이블 옆에 다가왔다.

“23번 테이블, 음식 나왔습니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그는 내 앞에 그릇을 내려놓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에 슬쩍 들어간 내 브이 손모양을 보며 웃었다.

나는 브이 손모양을 맞춰 흔들며 웃었다.


그의 숟가락을 삼킨 얼굴이 병원에서의 기억을 차츰 덮어갔다.

나는 밥풀을 모아 마지막 한 숟갈을 만들고 삼켰다.

“아, 배부르다. 근데 집에 가긴 귀찮네ㅎㅎ…”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 ㅋㅋ 어쩔 수 없네, 우리 집으로 가자.”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나서자 하얀 달이 하늘에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주머니에 손을 파묻고, 어깨에 기대며 천천히 집으로 걸었다.

조용한 밤공기 속, 길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로의 발걸음 소리만이 가볍게 울려 퍼졌다.


문을 열며 내가 말했다.

“영화 볼래?”

“좋아, 무슨 영화?”

“<생애엔 기대>이라는 영화. 지난주에 나왔는데 재밌어 보이더라.”

나는 티비를 켜고, 서랍에서 과자를 꺼냈다.

그는 소파에 앉아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역시 영화 보는 것도 너랑이면 편안하네.”

나는 과자를 접시에 담고 소파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자, 화면 속 인물들이 생애 전체를 미리 예측하는 장치를 받는 장면이 나왔다.

그들은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면서도, 일상 속 웃음과 소소한 선택을 반복했다.

“재밌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그가 옆에서 속삭였다.

“응, 뭔가 현실 같기도 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화면 속 캐릭터가 예측 점수 때문에 사회적 통제와 배제를 당하는 장면에서 잠시 말을 멈췄다.

주머니 속 CPT 결과지 5점이 떠올랐다.

“저 사람들, 선택할 자유가 없는 거구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곧 과자를 집어 들고, 영화 화면에 집중하며 평범한 웃음을 지었다.


밤이 깊어가고, 창밖 달빛이 서서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나는 그의 팔에 기대앉았다.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 그가 멍하니 말했다.

“정말 우리는 자유가 없을까?”

“그러게… ㅎ”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가 침대에 눕고, 나도 따라 누웠다. 나는 그의 다리를 잡고 잠시 눈을 감았다.

밤이 깊어가고, 창밖 달빛이 서서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서서히 머릿속이 어두워졌다.

내 옷 속에서 종이학이 튀어나왔다. 

"너는 5점이야 작디작은 초록색 막대그래프에 갇힌 채 바나나 우유에 매달려 춤을 추며 흘러내려 23이 적힌 배에 앉아 파란빛을 뿜는 검은 동굴로 와 너에게 딸기 우유 왼쪽 뒷자리는 없어 누구나 알지 넌 5점이야 자유는 종이학이야 " 

"아니야...." 

나는 멍하니 잠에서 깼다. 

손이 몹시 떨렸다.

마음속 어둠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더듬더듬 주방을 향했다.

덜덜 떨리는 손은 칼이 아니라 수저통을 건드렸다.

촤르르 쏟아지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흠칫 돌렸다.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나는 손으로 닦고 다시 손을 뻗어 칼을 집었다.

차가운 손잡이를 통해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곤히 잠든 그의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앞에 섰을 때, 떨리는 팔을 입으로 꽉 깨물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긴장 속에서,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칼을 잡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워있는 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팔이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넘어지듯 그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


끊어진 비명과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붉고 선명한 자국이 내 눈을 가린다.

피가 내 옷을 스며들었다.

그를 껴안은 채 흐느꼈다.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ㄱ…그래… 너는 5점… 5점만이 아니야…”

그가 마지막으로 움켜쥐었던 팔이 내 손에서 떨어졌다.

따뜻했던 그의 심장 소리는 서서히 작아졌다.

달빛은 어두워졌다.


비릿하고 붉은 햇빛이 날 깨웠다.

나는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추었다.

입술에 피가 묻었다.

뻘건 칼을 들고 터벅터벅 집을 나섰다.

발을 옮길 때마다 빨간 자국이 뚝뚝 떨어졌다.

길을 다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핸드폰을 들고 당황하는 사람들 사이로, 나는 터벅터벅 발을 끌었다.

경찰서 앞에 섰다. 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

나는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경찰관의 동공이 그의 입처럼 벌어졌다.


“제가… 사… 사람을… 죽였어요…”

그 순간, 나는 자유에 빠졌다.

경찰관이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뉴스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부터 C연구소에서 개발한 생애예측검사, LPT가 국내 도입됩니다. LPT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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