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곤증
- 작성자 마스터쿤
- 작성일 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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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이현, 일어나라.”
휴대용 마이크를 타고 역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조용한 교실을 울렸다. 제 이름이 불리자, 이현이는 발작을 일으키듯 깨어났다. 그 모습에 반 아이들이 웃었다. 이현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니까 자지 마, 알겠지? 자, 그래서 흥선대원군의 업적은······.”
4월, 창밖엔 벚꽃이 만개했지만, 학생들은 애석하게도 책상 앞에 앉아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달이었다. 꽃내음이 거쳐 간 교실엔 나른함이 들어앉았고, 그 나른함은 아이들을 하나둘 꿈의 세계로 인도했다. 결국 잠에 못 이겨 전멸해 버린 아이들을 보고 역사 선생님은 “깨어 있는 애들이라도 들어라.”라며 수업을 이어 나갔다.
이현이는 그런 아이였다. 나무가 파릇해질 시기만 되면 유독 졸음을 못 견뎌 하던 아이. 봄만 되면 머리가 닿은 어디서든 잠에 빠져들던 아이. 졸린 눈을 하고서도 내게 사랑한다 속삭여 주던 아이.
그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더 이상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내게 남은 한이라면 한이다.
“우와, 벚꽃 예쁘다. 그치?”
이현이의 책상에 마주 앉아 과학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공부는 뒷전이었던 그 아이는 대뜸 창밖을 가리켰다. 이현이의 집은 3층. 벚나무가 눈앞에 보이는 층수였다.
“그러게. 자, 그래서 선운동량 보존 법칙은······.”
다시 공부 얘기로 화제를 돌리는 나를 보며 이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그 아이의 검은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나와 이현이는 어색한 새 학기의 반에서 처음 만났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결국 책만 읽던 내게 이현이는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었다. “안녕, 너는 이름이 뭐야? 그 목걸이, 잘 어울린다!” 그 관심에 내 긴장이 조금은 녹았던 것 같다.
함께 이동수업을 가고, 함께 급식을 먹고, 함께 등하교하며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여자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했고, 또래끼리만 통하는 장난을 쳤다. 그러던 중, 우리의 관계를 먼저 변질시킨 것은 이현이였다.
“있지, 우리 언제까지 친구로만 지낼 거야?”
가을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던 이현이가 대뜸 입을 열었다. 앞뒤로 삐걱삐걱 흔들리던 내 그네가 한순간에 멈췄다. 내가 이현이의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언제까지 친구로만 지낼 거냐니? 절교라도 하자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설마.
“나는 너 좋아하는데.”
그 한마디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보며, 이현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말을 이었다.
“너도 그렇지 않아?”
어떻게 안 그러겠어. 좋지, 너무 좋지.
그 밤 이후로 우린 친구를 넘어선 사이가 되었다.
그럼 뭐해, 너는 내 곁에 없는데.
“······이현아, 자?”
결국 이현이는 과학 문제를 풀던 자세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왼손에 펜을 들고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눈을 감은 그 아이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나는 책을 덮고 잠시 그 아이를 바라봤다. 뭉툭한 코끝, 빨간 꽃처럼 피어난 여드름, 쌍꺼풀이 없는 눈까지 평범하디 평범한 사춘기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 아이를 원 없이 바라봤다.
내 스마트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한 것은 정확히 4월 16일 오후 9시 32분이었다.
채태민의 자녀 채이현님께서 2024년 4월 16일 16시경 별세하셨습니다. 가시는 길 깊게 애도하고 명복을 빌어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고인 : 채이현 (향년 17세)
빈소 : 평온의 낙원 장례식장 103호
발인 : 2024.04.18. 10:00
장지 : 서울공원묘역
상주 : 부친 채태민
학원이 끝나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울며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이현이의 부모님께서도 경황이 없으신 걸 보니 갑작스러운 일인 듯했다. 이현이의 영정엔 그 아이의 학생증 사진이 걸려 있었다. 교복을 단정히 입은 채 웃고 있는 그 얼굴은 지독하게도 익숙했다.
사인은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그 아이가 며칠 전 내게 했던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다른 한 명도 꼭 따라 죽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불길하게.”
“그냥 미래를 기약하는 거야. 죽음이란 건 언제 닥칠지 모르니까.”
바보 같은 년. 그런 식으로 밑밥을 까냐.
장례식장을 나와 근처 상가 옥상으로 향했다. 8층짜리 건물의 꼭대기에서 바라본 벚나무는 분홍색 휴지 덩이 같았다.
네가 벚꽃이 예쁘다고 할 때, 조금 더 같이 봐줄걸. 그깟 공부가 뭐가 중요하다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노랫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쩜 지금이 꿈이고, 꿈속 내가 진짜라면, 나의 악몽도 끝날까?
나는 신발을 벗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춘곤증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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