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아류가 아닌
- 작성자 마스터쿤
- 작성일 20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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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은 벌써 4시간째 노트북 앞에 앉아서 고뇌 중이었다. 글이 전혀 써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곗바늘은 새벽 5시를 향해 달려가고 창밖으론 서서히 동이 터왔지만, 예은의 커서는 조종사가 사라져 버린 비행기처럼 그저 깜빡이기만 할 뿐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제자리에 멈춰 버린 제 주인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문장이 떠오르질 않아······.”
예은은 그런 사람이었다. 실력은 안 되지만 쓸데없는 완벽주의 성향 탓에 이도 저도 못하는 사람. 그녀는 늘 장편 소설 집필에 도전했지만, 뭐든 처음이 완벽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 때문에 초반부를 다듬는 데만 몇 달을 쏟았고, 그 후 지쳐서 원고를 포기해 버렸다.
그런 예은이 찾은 방법은 안타깝게도 ‘남의 것을 적절히 모방하는 것’이었다. 남의 책, 영화, 혹은 인터뷰 등을 짜깁기해 가져오면 글쓰기가 배로 수월했다. 덕분에 예은은 하나의 아류 작가로 남을 수 있었고, 이것은 작가라는 신분에 있어서 퍽 불명예스러운 것이었다.
“아니야, 이대로는 안돼······.”
혼잣말을 연신 내뱉으며 자세를 고쳐 앉은 그녀는 자판 위에 손을 올리고 뭐라도 써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용도, 등장인물도, 하다못해 장르도 정해지지 않은 소설이 잘 굴러갈 리 만무했다. 그것은 이야기를 쓴다기보단 배설하는 것에 가까웠다.
“좋아, 일단 로맨스를 써보는 거야.”
‘남자는 여자와 함께 맛집이라고 소문이 난 치킨집에 들어갔다. 남자는 여자가 치킨을 먹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자기야, 입가에 닭 다리가 묻었잖아.” ― 그렇다, 실제로 여자의 입가에는 닭 다리가 붙어 있었다! “아이고머니, 몰랐네!”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그 닭 다리를 떼어 한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밖에서 운석이 쾅!!!’
세상 이런 어이없는 소설이 있을 수가 있는가. 그녀는 백스페이스를 연신 두들기며 남은 한 손으로 머리를 틀어쥐었다.
한숨을 내쉰 예은은 글쓰던 창을 끄고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이전에 원고를 투고했던 출판사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메일의 내용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문장은 깔끔하나 이미 많이 본 이야기라는 것, 특정 작가와 도입부가 너무 겹친다는 것(이는 예은이 그 작가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수정한다고 해도 뿌리가 같기 때문에 결국 같은 나무일 것이라는 것. 한 마디로, 예은이 무언가를 베꼈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 메일이었다. 예은은 쓰린 마음을 뒤로 하고 메일 창을 닫은 뒤 원고를 휴지통에 처박았다.
그녀에게도 빛나던 시절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출간한 책은 기대보다는 잘 팔렸으며, 학생 때는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기발한 아이디어와 필력으로 상도 종종 탔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는 지금 잿빛을 띠며 대중에게 차츰 잊혀 가고 있었다. 다 타버린 양초같이 볼품없는 신세였다.
“막히기만 하는 인생이야······. 아니야, 난 행복하다, 하하하, 난 행복하다! 행복해, 너무 행복해! 아하하하!”
드디어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억지로 웃으며 자신의 뇌를 속이던 예은. 그녀는 지금 당장 어떤 아이디어라도 필요했다. 예은의 수중엔 단 한 조각의 아이디어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바싹 마른 한여름의 우물처럼. 예은은 한숨을 내쉬며 방금까지 뜨거운 대화가 오간 단체 채팅방을 열었다.
ㅎㅇ.
오, 이예은이다!
안 자고 뭐 함?
글 쓰다가 막힘.
때려치울까? ㅋㅋㅋ
또 저러네;;
예은아 내일 술 한 잔 어떤데!
아, 출근하기 싫다.
아니, 좀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 봐;;
단체 채팅방은 들어가기만 했는데도 지능이 자동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예은은 그 속에서 묘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슬쩍 입꼬리를 올린 채 예은은 자판 위에서 손을 놀렸다.
됐고, 아무나 아이디어 좀 줘 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긴 해!
네가 찾아.
그게 안 되니까 도움 요청을 했지;;
이겨내!
회사에서 썩어가는 소설 어떰?
그딴 거 누가 읽는데.
“하······.”
예은이 한숨을 내쉬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은 단체 채팅방을 끄려던 참이었다. 창을 닫기 직전, 한 메시지가 예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 내일 소개팅 앱으로 연락한 남자 처음 만나러 감.
개 떨려 ㅜㅜ.
“오?”
예은은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주인공이 소개팅 앱으로 남자 친구를 만드는 로맨스 소설! 이런 내용 정도라면 써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꽤 대중적인 소재에, 일단 뼈대가 갖춰져 있으니 대충 살만 붙이면 되는, 아주 좋은 플롯 아닌가 ― 적어도 예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예은은 이미 수많은 채팅에 묻혀 모습을 감춘 해당 메시지에 하트 표시 하나를 남기고 곧장 창을 닫았다.
그러나 예은이 그다음으로 켠 것은 글쓰기 프로그램이나 메모장이 아닌 소개팅 앱이었다.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그녀는 글을 쓰기 전에는 반드시 사전 조사를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몇 달 전 외로운 새벽 감성에 휩싸여 홧김에 깔았다가 잊은 이 앱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놀랍게도 앱에 들어가자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 짤막한 메시지는 이미 메시지 창에서 썩어간 지 두 달이 지났다. 앱을 완전히 방치하다시피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먼지가 쌓일 대로 쌓인 이 메시지는 예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예은은 제게 메시지를 보낸 남자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이름은 고현우. 예은보다 두 살 많은 스물아홉 살이었으며, 영어영문학과를 나와 동네 영어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더랬다.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에 외모 또한 반반했다. 테가 얇은 안경과 잘 어울리는 덮은 머리가 신뢰할 수 있겠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예은은 이 남자에게서 적잖은 호감을 느꼈다. 예은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데다가, 직업 또한 글쓰기와 조금은 연관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무엇보다도, 그의 외모가 예은의 취향이었다.) 예은은 ‘이건 글을 위한 사전 조사다.’라고 자신을 세뇌하며 그에게 답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답장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얼핏 보기에도 답장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지금 예은은 그런 걸 신경 쓸 만큼 팔팔하지 않았다. 예은은 그 메시지를 보내둔 후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저 남자가 내게 정말 관심이 있다면 어떻게든 답장을 보내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다음날, 예은은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창밖엔 해가 중천에 뜨다 못해 슬슬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확인한 스마트폰 알림창엔 현우의 답장이 떠 있었다. 예은은 그걸 확인한 순간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괜찮아요, 반가워요.
우리 사는 곳도 가까운데,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까요?
‘꽤 저돌적이네. 인상이랑은 다르게······.’
보통은 대화를 나누며 친해지다가 만나는 게 일반적일 텐데. 예은은 그런 그가 어쩐지 싫지만은 않았다. 예은은 별 고민도 없이 그에게 긍정의 답을 보냈다.
그래요.
둘은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한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시간은 그에 따라 흘러갔다.
며칠이 지나고, 동네의 어느 한적한 카페에 예은이 먼저 도착해 앉아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킨 그녀는 거울을 보며 제 용모를 정리했다. 몇 달 만에 만나는 사람인 만큼 최소한 깔끔하게는 보이고 싶었다.
그녀가 한참 단장에 열을 쏟을 때였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익숙하게 음료 주문을 마친 그는 주위를 두리번대다 예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저 그런 청년이었다. 특출나게 못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출나게 잘나지도 않은, 그야말로 평범한 이였다. 그는 예은과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
“혹시 예은 씨 맞으세요?”
“아, 네······.”
예은은 어딘가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 그와 합석했다.
현우는 소개팅 앱에 올려둔 사진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었다. 반반한 외모는 조금 부족해 보였고, 어딘가 달라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인상 하나는 변치 않은 채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예은을 읽기라도 한 듯 현우가 멋쩍게 입을 열었다.
“아, 제가 몇 달 사이에 살이 좀 쪄서요. 사진이랑 좀 다르죠?”
“아니에요, 사진이랑 똑같으신데요, 뭘.”
예은은 저도 모르게 예의상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건 그녀에게 특화된 일이었다. 그녀는 으레 자아가 없는 이들이 그러하듯 제 속마음을 숨기고 거짓을 말하는 데에 능했다. 물론 이를 나쁜 의도로 쓴 적은 거의 없었다.
“예은 씨는 무슨 일을 하세요?”
그 질문에 예은은 숨이 턱 막혀 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라고 말하기엔 그녀는 작가답지 못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녀는 순수한 제힘으로 작품을 완성해 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남의 것을 베끼는 처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상상력이라곤 신인 시절에 전부 써 버려 남지 않았다. 마치 닳아버린 지우개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 자신도 자신을 감히 ‘작가’라고 칭해도 될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는 프리랜서를 가장한 백수입니다”라든가 “비밀이에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예은은 비명을 지르는 양심을 뒤로하고 어렵사리 답했다.
“저는 그냥 작가로 활동하고 있어요.”
“와, 작가요? 멋지네요! 무슨 작품 쓰셨어요? 제가 또 취미가 독서거든요. 아마 알 수도 있어요.”
현우는 그녀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엄청난 반응을 쏟아냈다. 예은은 그런 그가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이게 이럴 일인가? 요즘 시대에 널리고 깔린 게 작가일 텐데. 그녀는 제 직업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마 모르실 것 같긴 한데······.”
그 뒤로 둘은 예은의 작가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은은 현우에게 자신이 써냈던 작품들을 이야기했고, 당연하게도 현우는 그중에서 단 한 개도 아는 것이 없었다. 현우가 모른다는 말과 함께 지었던 그 어색한 웃음이 예은에겐 꽤 쓰리게 다가왔다.
그러나 현우에겐 사람의 긴장을 풀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예은은 어느새 그에게 거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었다. 작업이 잘되지 않아 고민이라거나, 작가로서 자질이 의심된다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러면 현우는 그를 듣고 공감과 해결책을 적절히 섞어 예은에게 주었다. 예은이 일방적으로 제 얘기만 하는 꼴이 되었는데도 현우는 피곤한 티 한 번 내지 않았다.
“어머, 제가 너무 제 얘기만 했죠. 죄송해요.”
주저리주저리 자기 얘기를 늘어놓던 예은이 정신을 차리고 말을 끊어 냈다. 누군가에게 제 얘기를 하는 것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예은은 거의 한 시간째 자기 얘기를 하고 있었다. 황급히 사과하는 예은을 보며 현우는 풋, 웃었다.
“죄송하시면 저랑 저녁이나 드실래요?”
예은은 그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일곱 시, 둘은 양식 전문점에 앉아 있었다. 녹진한 소스 냄새가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스타 하나씩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예은과 현우는 아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마저 하고 있었다.
“현우 씨는 직업이 영어 학원 강사라고 하셨죠?”
“네, 주로 학생들을 가르쳐요.”
“학생들이 말을 안 듣는다거나 하진 않나요?”
“엄청 안 듣죠.”
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주고받았다. 어느덧 분위기는 제법 무르익었고, 꽤 괜찮았다.
한참을 떠들던 때, 현우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예은 씨, 저 어떤 것 같아요?”
예은은 그 질문에 잠시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어떻냐니.
어째서일까, 예은은 이 질문에만큼은 거짓으로 답하기가 싫었다.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는지,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꽉 막힌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예은은 최대한 사실만을 답하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예은은 현우를 진심으로 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쓸데없는 얘기는 잘 하지 않는 그녀도 현우의 앞에선 이상하리만치 풀어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현우는 예은이 무슨 얘기를 하든 맞장구를 치며 조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현우가 예은은 좋았다.
“현우 씨는······, 편안한 사람인 것 같아요.”
한참의 생각 끝에 나온 답변은 조촐했다. 작가라는 양반이 이런 흔해 빠진 단어의 나열밖에 내놓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제 마음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어휘력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쩐지 현우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제 마음과 뜻이 전부 전해졌을까 노심초사하는 예은을 바라보며 현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편안한 사람이라니, 좋네요.”
“그럼 저는 어때요?”
예은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현우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예은 씨는······, 강아지 같아요. 밝고, 수다스럽고.”
매우 의외의 평가였다. 강아지라니, 밝고 수다스럽다니. 살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수식어였다. 말수가 적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말이 많다는 말을 들은 것은 살면서 처음인 것 같았다. 더군다나 예은은 자신을 강아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하며 되묻는 예은을 보며 현우는 그녀가 퍽 귀엽다고 생각했다.
“평소엔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오늘 제가 본 예은 씨는 그랬거든요.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밝고 활기찬 사람. 그런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았어요.”
예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과연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예은은 편안한 사람이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렸는데, 그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예은을 누구보다도 깊게 꿰뚫어 봤다. 그래, 나 내 얘기 하는 거 좋아했었지. 예은이 어릴 적을 회상하며 생각에 잠긴 동안, 현우는 말없이 파스타를 먹었다.
“현우 씨.”
예은이 입을 열자, 현우는 씹던 면발을 얼른 삼키고 대답했다.
“네?”
“저희 다음엔 언제 만날까요?”
다음 만남은 예은의 주도로 서울의 한 고양이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현우는 고양이 카페라는 곳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살았다고 했다.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현우에게 예은은 아주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신세계를 보여드리죠.”
현우는 고양이 카페에 꽤 만족스러워했다. 아니, 어쩌면 매우 만족했을 수도 있겠다. 그가 좋아하는 고양이들이 잔뜩 있는 고양이 카페는 그에게 예은의 말대로 신세계였다.
“현우 씨, 이것도 줘 볼래요?”
예은은 현우에게 츄르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현우가 츄르 포장지를 까자, 주변에 있던 고양이들이 몰려들었다. 현우는 이럴 줄은 몰랐는지 예은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물론 손으로는 고양이들에게 츄르를 뜯기고 있는 채였다. 예은은 처음 보는 그의 서툰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장면을 놓칠 수 없다는 듯 현우의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찍지만 말고 좀 도와 줘요······.’
현우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츄르가 전부 동이 나자, 고양이 무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유유히 사라졌다. 지쳐 보이는 현우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네며, 예은이 말했다.
“고양이들한테 인기 폭발인데요, 현우 씨?”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 현우가 허허 웃었다.
“이런 거라곤 말 안 해줬잖아요.”
“미안해요. 저도 이렇게까지 몰려들 줄은 몰랐죠.”
예은은 그런 현우의 모습이 너무 즐거웠다. 늘 듬직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의 새로운 면을 찾은 것 같아 기뻤다.
말갛게 웃는 예은을 보며 현우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얼굴이 홧홧해지는 느낌이었다. 현우는 혹시라도 그런 제 모습을 들킬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렸고, 예은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일 뿐이었다.
고양이 카페에서 나온 둘은 옷에 잔뜩 묻은 고양이 털들을 떼느라 바빴다.
“고양이들은 털이 엄청 빠지는군요.”
“그러게요, 저도 이정도일 줄 몰랐어요.”
“저녁, 같이 먹을래요?”
훅 들어온 저녁 약속에 예은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예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근처에 아는 라멘집이 있는데, 거기로 갈까요?”
“그래요.”
둘은 한 뼘 정도의 거리만을 유지한 채 라멘집으로 향했다.
라멘집엔 사람이 많았다. 저녁 시간치고는 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좌석은 거의 다 차 있었다. 가게 구석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은 둘은 메뉴판을 보며 각자 메뉴를 고민했다.
“음, 저는 차슈 라멘이요. 현우 씨는요?”
“글쎄요, 여긴 뭐가 제일 맛있어요?”
“여긴 차슈 라멘이랑 돈코츠 라멘이 유명해요.”
“그럼 전 돈코츠 라멘으로 먹을게요.”
주문을 마친 둘은 또다시 수다를 떨었다. 아까 본 페르시안 고양이의 털 색깔이 마음에 들었다거나, 흰 고양이의 이름이 소금이어서 웃겼다거나 하는 시답잖은 대화들 말이다.
라멘은 빠르게 나왔다. 현우는 라멘 한 입을 먹고 감탄사를 연신 내뱉었다.
“와, 여기 되게 맛있네요. 예은 씨는 어쩜 이런 가게를 알았어요? 육수가 진짜 진하네.”
예은은 그의 반응이 조금 호들갑스럽다고 느꼈다. 그럴 맛까진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그가 싫지만은 않았기에, 그녀는 대답 대신 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쵸, 여기 맛있다니까요.”
둘은 웃음이 가득한 라멘 한 그릇을 먹었다.
“잘 먹었어요, 현우 씨. 제가 사도 됐는데.”
“아니에요. 오늘 고양이 카페도 그렇고 전부 예은 씨가 알아봤는데, 사는 건 제가 해야죠.”
라멘을 다 먹고, 둘은 거리로 나왔다. 한참 대화를 나누며 거리를 걷던 그들의 곁으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대학생인데요,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스티커로 투표 한 번만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대학생들이 ‘가장 관심 있는 환경 오염 문제’라고 커다랗게 적힌 패널을 들고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예은과 현우는 까짓것 투표하기로 했다. 둘이 스티커를 하나씩 붙이자, 대학생들이 특유의 열정을 가득 담아 환호했다.
“감사합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최고의 커플!”
그 말에 예은과 현우의 얼굴이 순간 동시에 빨개졌다. 순식간에 치고 들어온 대학생들의 말은 예은과 현우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은이 우린 커플이 아니라고 정정하려던 찰나, 현우가 대충 상황을 무마시키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 후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그들은 그동안 수많은 만남과 대화를 가졌고, 늘 행복했다.
어느 오후, 예은은 현우를 만나기 위해 옷장 앞에서 몇 시간째 고뇌 중이었다. 그녀는 화장하는 데 오랜 시간을 쏟았고, 옷을 고르는 데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예은은 분홍색 원피스와 흰색 블라우스를 번갈아 몸에 대 보다가 둘 다 침대로 던져 버렸다.
“어쩜 집에 입을 게 없냐.”
작가 활동을 하며 밖이라곤 집 바로 앞 편의점만 나간 그녀는 옷을 활발히 사던 시절보다 약 10kg 정도가 더 쪄 있었다. 그러니 괜찮은 옷이 있을 리 없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결국 그녀는 그나마 괜찮았던 흰 티와 노란 카디건 조합을 택하고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인 공원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해 있던 현우가 손을 들어 그녀를 반겼다. 일찍 온다고 일찍 온 건데, 현우는 대체 언제 나온 걸까. 예은은 서둘러 현우에게 뛰어갔다.
“일찍 오셨네요?”
“예은 씨 만나는 게 기대돼서 일찍 나와지더라고요.”
그 말에 예은과 현우가 동시에 웃었다. 이 말은 유머일까, 진심일까. 예은은 유머일 거라고 애써 믿으면서도 진심이길 바라는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현우와 예은은 천천히 공원을 걸었다. 주말 낮의 공원은 그야말로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많은 가족이 나들이를 나와 있었고, 개중에는 배드민턴을 치거나 캐치볼을 하는 이들도 보였다. 둘은 그런 사람들을 보며 공원 옆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어, 예은 씨. 이것 봐요!”
현우가 예은의 앞으로 날아온 비눗방울을 손가락으로 찔러 터뜨렸다. 멀리서 여러 개의 비눗방울이 무리를 지어 날아오고 있었다.
“우와, 비눗방울이네요?”
그 모습은 영롱하고 반짝였다. 햇빛을 받아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비눗방울들은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마치 꿈결들 사이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 속에서 예은은 보고 있었다. 알록달록 빛나는 비눗방울 사이로 보이는 현우의 즐거워 하는 얼굴을, 그 푸근한 미소를. 예은은 정체 모를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은 마치 설렘과도 비슷했다.
······이 모습, 어디서 봤는데. 예은은 드는 생각, 그리고 현우와 겹쳐 보이는 인물을 무시하고 현재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렇게 예은과 현우는 불어오는 바람과 비눗방울에 몸을 맡긴 채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해가 땅에 가까워지고, 가로등 불빛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예은과 현우는 벤치에 앉아 도심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별 하나 없는 밤이지만, 나름대로 어둡게 아름다웠다.
“예은 씨, 오늘 어땠어요?”
현우의 물음에 예은이 풀어진 웃음으로 답했다.
“재밌었어요. 오랜만에 산책하니까 좋네요. 현우 씨는요?”
“저도 좋았어요. 산책도 좋았고, 예은 씨도 좋았고.”
그 말에 예은은 잠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현우가 제 얼굴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저 말의 의도가 뭘까. 내가 좋았다고? 예은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적이 이어지던 때, 현우가 예은을 불렀다.
“예은 씨.”
“네?”
현우는 말하기가 망설여지는지 꽤 오랜 시간 동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너무 이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예은 씨가 좋아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어제는 예은 씨 만날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렇게 말하며 현우가 고개를 슬며시 숙였다. 예은은 여전히 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현우가 그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우리, 제대로 만나 볼래요?”
현우와 예은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예은은 알 수 있었다. 이런 게 정말 ‘운명’이라고. 이건 틀림없이 운명일 거라고. 예은은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설령 지금 예은이 그를 밀어낸다 하더라도, 결국 예은은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우도 마찬가지였다.
예은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가장 길고 짧은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둘은 연인이 되었다. 담백한 고백 끝에 이루어진 사랑은 평범하고 달콤하게 흘러갔다.
둘은 하루의 시작과 끝에 연락을 주고 받았다. 주말이 되면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며 데이트를 즐겼고, 다른 연인들처럼 사탕 같은 말을 하며 서로를 만끽했다.
예은 씨, 뭐 하고 있어요?
현우에게서 온 메시지에 예은은 쓰던 글을 뒤로하고 곧장 메시지창을 켰다. 현우의 메시지 위로는 현우와 예은이 어젯밤 나눴던 굿나잇 인사의 흔적들이 보였다. 혹여나 현우의 수업이 시작되어 이야기가 중단될까, 예은은 얼른 답장을 보냈다. 서로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은 것이 연인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작업하고 있었어요.
쉬는 시간이에요?
네 ㅎㅎ.
예은 씨, 이번 주말에 시간 돼요?
같이 저녁이라도 먹고 싶은데.
되죠, 왜 안 되겠어요.
저녁 먹어요, 같이.
예은은 현우와 문자를 주고받는 내내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요즘 예은은 이전과는 다르게 현우 덕분에 늘 웃으며 지내고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기만 해도,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하지만 그런 예은도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긴 시간 동안 무너져 있던 그녀의 자존감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아무리 현우가 예은에게 좋은 말만 해주더라도, 예은은 늘 그가 자신에겐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예은은 그를 언제든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은이 이러한 문제를 현우에게 털어놓거나 현우와 상의한 것은 아니었다. 예은은 본래 제 속내를 잘 숨기는 사람이었다. 설령 그게 무지 쓰라린 상처이고, 곪아 터져도 말이다. 그렇기에 예은은 그를 믿어 보자고, 그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고 저 자신을 달래가며 불안을 숨기고 있었다.
초가을의 저녁, 예은은 왁자지껄한 술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이전에 참여한 글쓰기 모임의 술자리였다. 여러 작가가 모인 만큼 예은은 이 자리에서 무언가라도 얻어가길 바라고 있었다.
“언니, 요즘은 무슨 작품 써요?”
말주변이 없어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예은 곁으로 그나마 안면을 트고 지냈던 후배 한 명이 다가왔다. 그 후배는 최근 낸 신작이 대박을 터뜨려 온갖 신인상을 전부 쓸어간, 적어도 예은보단 훨씬 나은 작가였다.
예은은 딱히 이렇다 할 작품을 쓰고 있지 않았다. 본 것이 많으니 시도는 많이 했지만 전부 극초반부에서 막혀 버렸고, 그렇게 방치한 원고가 세 자릿수를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결국 예은은 후배의 질문에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이것저것 쓰고 있어. 너는?”
“저는 요즘 아이디어가 없어서 큰일이에요. 한 번 대박을 터뜨리니까 다음 작품에 대한 압박이 장난 아닌 거 있죠.”
예은은 순간 ‘얘가 날 놀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박을 터뜨렸단 얘기를 굳이 내 앞에서 해야 할 이유가 뭐지? 그런 생각을 하던 예은은 순간 정신을 차렸다. 아, 이놈의 피해망상. 고쳐야 하는데. 그러고 예은은 곧장 마음에도 없는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아, 맞다. 상 탔다고 했었지? 야, 완전 축하해.”
거짓말은 늘 그랬듯 술술 흘러나왔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후배는 그 말이 거짓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멋쩍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아니에요. 그냥 운이 좋았죠.”
그러던 중, 저 멀리서 후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배는 “선배, 저 가볼게요. 파이팅!”이란 짧은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예은은 그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 상념에 잠겼다.
‘대체 나만의 목소리란 뭘까?’
예은은 끝끝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예은과는 다르게 투명한 소주가 든 술잔을 입으로 가져다 대며, 소주보다 더 쓴 인생의 맛을 볼 뿐이었다. 그 모습은 활주로 위에서 멈춰 버린 비행기 같았다.
가을날의 한 새벽, 예은은 악몽을 꿨다.
꿈에선 그간 예은이 참고라는 핑계 하에 베낀 모든 작가와, 문장과, 작품이 한데 모여 예은을 쫓아오고 있었다. 끔찍하게 추상화된 그들은 보기만 해도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이리저리 뭉치고 꼬여 하나의 ‘아류’가 되어 예은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을 피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가 넘어지고 말았다. 미처 일어나지 못한 그녀가 그들의 표적이 되어 잡아먹히기 직전이었다.
“헉!”
예은은 비명과도 같은 숨을 내쉬며 꿈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새벽 3시에 가까웠다. 목이 탔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예은이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려던 때, 예은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예은의 전 남자 친구였다.
보아하니 또 술을 먹고 연락한 것 같았다. 예은은 기분이 나쁜 것을 꾹 참고 바보같이 그 연락을 받아 주었다.
“여보세요?”
“야, 이예은!”
“갑자기 웬 전화야?”
“너 요즘 새 남자 친구 생겼다며?”
예은은 순간 말을 멈췄다. 얘가 이걸 어떻게 알지? 그는 예은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려는 듯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너, 걔가 천년만년 네 곁에 있어줄 거 같냐? 꿈 깨! 너같이 남 베끼기나 하는 애를 누가 좋아해 줘! 아마 걔도 얼마 못 가서 도망갈걸?”
예은은 크게 충격받았다. 늘 걱정해 오던 일이지만 막상 남의 입으로 들으니 차원이 다르게 아팠다. 전 남자 친구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예은은 그 자리에 남겨져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예은의 전 남자 친구는 예은이 남을 베끼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빌미로 떠나갔다. 물론 진짜 이유가 그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 여름날의 저녁, 그는 뜬금없이 예은을 공원으로 불러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통보했다.
“헤어지자. 너 같은 기생충이랑은 더 이상 같이 작업 못 하겠어.”
예은은 그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상처를 받았다. 커다란 장검으로 심장을 베인 느낌이었다.
발끈한 예은은 참지 않고 화를 냈다. 그렇게 둘은 한동안 소리를 지르며 싸워댔고, 그 사이에선 상처만을 남기는 말들이 오갔다. 싸움이 길어지자, 그가 짜증을 내며 버럭 외쳤다.
“야, 너 그거 알아? 너 같은 아류는 죽었다 깨어나도 성공 못 해!”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예은을 공원에 홀로 둔 채 유유히 떠나갔다. 예은은 그의 마지막 말을 잊고 소화 시키느라 한동안 술에 절여져 폐인이 되어 살았다.
현우는 울리는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전화를 건 이는 다름 아닌 예은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예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은 씨, 무슨 일 있어요?”
수화기 너머에선 그저 우는 소리만이 들렸다. 훌쩍이는 예은의 소리를 듣고 현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예은 씨? 내 말 들려요?”
“현우 씨도 날 떠날 거죠?”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에 현우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오밤중에 전화해서 갑자기 자길 떠날 거냐니, 이게 무슨 소린가. 어처구니없는 소리일뿐더러, 현우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현우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예은 씨. 난 예은 씨를 떠나지 않아요.”
“거짓말······. 저는, 저는 기생충인데도요?”
“예은 씨가 왜 기생충이에요.”
“저는 저로서는 아무것도 못 해요. 아무것도 못 쓰고, 아무것도 못 말해요. 있죠, 실은 지금까지 썼던 글들 전부 다 어디서 베껴 온 수준이에요. 우리 첫 만남 때도 저 거짓말 되게 많이 했고요. 저는 작가인 주제에 누구한테 기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써요······. 저는 쓰레기인가 봐요.”
그렇게 말하며 예은은 오열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까지 들리는 듯했다. 숨을 헐떡이고 있었으며, 목소리는 눈물에 잠겨 잘 들리지도 않았다.
현우는 그녀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그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현우는 함부로 무어라 말하기 대신 생각하기를 택했다. 지금 어떤 말을 건네야 예은이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렇게 이따금 예은의 울음소리만이 들리는 정적이 이어지던 가운데, 현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예은 씨.”
예은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예은 씨는 기생충이 아니에요. 쓰레기도 아니고요.”
그 말에 예은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이내 울음을 뚝 그쳤다. 현우는 예은이 진정되길 바라며 사근사근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정말로 예은 씨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못 쓴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예은 씨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예은 씨는 그대로 예은 씨인 거예요. 전 예은 씨가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든, 어떻게 무너지든 예은 씨를 사랑할 거예요. 그런 모습까지 전부 예은 씨고, 예은 씨는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제가 저여도 괜찮은 걸까요?”
현우는 그 질문에 느릿느릿한 어투로, 아주 편안하게 대답했다.
“그 질문을 저한테 던진 순간부터 이미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신 거죠. 괜찮은지 아닌지를 제가 정해 줄 문제라면, 그건 이미 예은 씨의 인생이 아니에요.”
그 말에 예은은 충격인지 깨달음인지 모를 것을 얻었다.
그렇구나. 나는 나로서 충분하구나. 그러니까 난 이제 남의 걸 베끼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냥 나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면, 그게 나인 거구나.
이제, 괜찮구나.
어릴 적, 누군가 예은에게 말해 준 동화가 있다.
아주 오래 머금은 겨울이 있었다.
그 겨울은 너무 오래 머금어진 탓에 무척이나 시리고, 강했다. 칼날 같은 바람이 항상 몰아쳤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얼려 버렸다.
그런 겨울의 곁에, 봄이 찾아왔다.
봄은 너무도 따뜻했다. 늘 아름다운 벚나무가 만개해 있는 그 봄은 겨울의 고드름과 빙하를 사르르 녹였다.
겨울은 녹은 고드름과 빙하를 눈물 삼아 펑펑 울어 버렸다. 그렇게 흐르고 흐른 눈물들이 모여 지금의 바다를 이루었다.
현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겨울을 사르르 녹인 봄과 같은 사람. 꽁꽁 얼어 겨울을 찌르는 빙하를 따스한 말 몇 마디로 스르륵 녹게 만드는 사람. 피아니시모로 아주 여리게 치는 클래식 음악 같은 사람. 그것이 고현우라는 사람이었다.
“예은 씨,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이젠.”
현우는 그런 그녀의 대답을 듣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제 뜻이 예은에게 전부 전해졌나 보다, 하는 안심이었다. 예은은 코를 풀고 눈물을 쓱쓱 닦은 뒤 현우에게 말했다.
“현우 씨, 고마워요. 많이.”
“뭘요.”
“이제 알게 됐어요. 저는 저로서 충분히 괜찮다는 걸. 또, 꼭 완벽할 필요는 없단 걸. 무너져도, 깨져도, 전부 나란 걸. 왜 이걸 그동안은 모르고 살았을까요.”
현우는 그 말에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예은은 퉁퉁 부은 눈을 손으로 괜스레 만지며 따라 웃었다. 새벽 중의 소동은 그렇게 잠잠해졌다.
그날 이후로, 현우는 예은의 완벽한 뮤즈가 되었다. 예은은 그를 만나며 무수한 영감을 얻었고, 자신의 색깔을 찾아갔다.
그녀는 더 이상 잿빛의 아류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하는 빛깔로 빛날 수 있었고, 온전한 자신만의 것을 가질 수 있었다. 마치 잘 빚어낸 도자기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낸 글들을 쓰며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외쳤다.
또, 그녀는 더 이상 글을 쓸 때 막다른 길에 다다라 고민하지 않았다. 수만 번 연습한 곡을 연주하듯 자연스럽게 글이 써졌다. 물 흐르듯 매끄러운 글은 자연스레 타인의 시선을 끌어당겼고, 이는 곧 그녀에게도 팬이 생기는 경험을 안겨 주었다.
“혹시 이예은 작가님 아니세요?”
현우와의 데이트 중 누군가 말을 걸어오자, 예은은 깜짝 놀랐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예은은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겨우 답했다.
“네, 맞아요. 어쩐 일로······?”
“저 진짜 팬이거든요! 이렇게 뵙다니, 너무 영광이에요.”
예은은 팬이라는 말에 또다시 놀랐다. 제게 팬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머, 제 팬이요? 세상에, 말도 안 돼······.”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요, 당연하죠.”
예은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팬에게 사인을 해주었다. 팬이 떠나가자, 예은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한 치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현우가 예은에게 다가왔다. 그는 예은이 귀엽다는 듯 웃고 있었다.
“어째 팬보다 작가가 더 떠네요.”
“놀리지 말아요. 안 그래도 아직도 실감 안 나니까.”
그 말에 현우는 짓궂게 웃으며 예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예은은 그런 현우의 행동에 현우와 마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오늘은 예은의 첫 북토크가 있는 날이다. 그 말인 즉슨, 더 많은 팬들과 만나는 날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현우도 그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북토크가 시작되기 직전, 현우가 예은에게 물었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솔직히 많이 떨려요.”
현우가 웃으며 예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러고는 귓가에 대고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은 씨는 예은 씨다울 때 가장 빛난다는 거, 이젠 알죠?”
현우의 애정이 잔뜩 어린 그 말에 예은이 결국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알아요. 나는 나일 때 가장 아름답다.”
예은은 그 말을 남기고 북토크 현장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나타나자, 관객석에서 박수갈채가 터졌다. 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예은은 떨린다는 사람치고는 북토크를 아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녀는 모든 질문에 프로다운 답을 내놓았다. 그중 현우의 귀에 가장 선명하게 들어온 질의응답은 따로 있었다.
“작가님은 글이 안 써질 때 어떻게 하시나요?”
“저는 ‘나는 나일 때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을 떠올려요. 그럼 자연스럽게 제 이야기가 담긴 글이 써지더라고요.”
“그런 생각은 어디서 얻으시나요?”
“음······.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서요.”
“현우 씨!”
예은이 현우를 향해 손을 붕붕 휘두르며 인사했다. 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예은에게 다가갔다.
“북토크 잘 봤어요. 완전 프로던데요?”
“고마워요. 정말 떨려서 죽을 뻔했던 거 있죠.”
“전혀 티 안 났으니까 걱정 말아요.”
현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예은은 그런 그의 태도에 괜히 머쓱해져 시선을 피했다. 아직도 그의 무한한 칭찬에는 적응이 되질 않았다.
“얼른 들어가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그를 카페 안으로 이끌었다. 현우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한 번 짓고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 줬다.
그리고 예은은 다짐했다. 집에 가면 그동안 묵혀 뒀던 글들을 전부 다시 쓰리라고.
파란 하늘 위로는 비행기 한 대가 당차게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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