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살인에 관한 짧은 소설

  • 작성자 노스텔지아
  • 작성일 2026-05-04
  • 조회수 145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살인하지 말라."

-십계명의 구절 중


유일한 집, 텐트가 무너졌다. 텐트 위에 물 웅덩이가 편안히 앉아있었다. 나는 급하게 텐트 안에 있는 짐들을 꺼냈다.

가장 소중한 책들이 검은 물을 내뿜었다. 축축하게 젖은 책들을 짜내자 마치 죽여달라는 듯 절규하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해놨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돈통으로 사용하는 알루미늄 깡통을 든채 광장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광장의 가장자리에서는 똑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오전 8시 30분 경 항상 급하게 넥타이를 고쳐매고선 전철역으로 향하는 직장인 한 명, 

늦게 일어나서 어슬렁 어슬렁 광장을 지나는 대학생, 점심을 먹고선 잠시 커피를 마시러 온 아저씨까지. 매일 매일이 비슷하게 흘러간다.

그런데 오늘따라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검은 자켓을 입고 광장 주위를 배회하다가 노숙자 몇몇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는 사내였다.


사내가 내 시선을 의식한 탓일까. 사내는 나에게로 걸어왔다. 나를 죽일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나는 너무나 두려웠다.

도망칠까 생각 해보기도 했지만 어차피 노숙자로 살아온 인생 여기서 마무리 지어도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내 앞에 서서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알루미늄 깡통에 검은 식칼을 조심히 넣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내가 말했다.

"오늘 광장에서 사람 한 명을 죽이면 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먹을 것과 집을 주겠습니다. 대신 오늘 안에 입니다."

내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사내는 말을 이어갔다.

"잡혀갈까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오늘 하루 종일 당신을 지켜볼 예정이거든요. 제가 아니여도 다른 사람들도 있답니다. 

제가 시킨대로만 하면 당신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될 겁니다."


믿기는 어려웠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알루미늄 깡통에 놓인 검은 식칼만을 바라보았다.

거리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뒤로 돌아 검은 식칼을 몰래 빼보았다. 식칼은 정말 몇 번을 갈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광이 났다. 조금만 위로 들어보자 햇빛이 강하게 반사되었다. 순간 눈이 너무나 부셨다.


나는 칼을 주머니에 넣고선 광장을 배회했다. 광장엔 길이 없다. 길이 없기 때문에 방향이 없다.

나그네는 방향을 상실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나그네들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마치 길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자신이 정해진 루트를 아주 잘도 걸어간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광장의 가장자리에서 평생을 노숙자로 살며 이 광경을 지켜봐도

이 광장에 동서남북 방향 따위는 없다. 누구라도 이 광장에 있으면 제대로된 갈피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새 광장의 한 가운데 도착했다. 광장의 한가운데에서 바라 본 모습은 가장자리에서 바라봤을 때보다 훨씬

넓고 어지러운 것처럼 보였다. 정말 이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길도 방향도 없는 이 광장에서 나는 무엇에 의지할 수 있을까.

나는 검은 식칼을 꺼냈다. 다시 햇빛에 식칼이 반사되었다. 너무나 눈이 부셨다. 나는 눈을 감았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부모를 잘 알지 못했다. 태초의 기억이라 해봤자 처음 책을 읽었을 때였던 것 같다.

누군가 나에게 글을 가르쳤던 기억은 난다.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도 일반 서민들처럼 노동하고,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돈을 가지게 되면 무작정 중고서점에서 책을 구매했다. 혹은 도서관을 갔다.

그러나 배움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다.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아 도서 대출증 발급도 어려웠다.

오른쪽 무릎은 태어날때부터 말썽이었고 지금까지 절름발이로 살아왔다.

대학에도 갈 수 없었고, 노동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사상가는 노동이 가장 큰 쾌락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쾌락마저 누릴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낮은 담장. 모든 사람들이 손 쉽게 넘는 그 담장이

나에게는 하늘처럼 느껴졌다. 하늘을 뛰어넘는 인간은 없다. 나는 그렇게 담장 아래 작은 소년이 되었다.


광장의 구석으로 갔다. 내가 있었던 가장자리와는 또 다른 곳이었다. 구석엔 그림자가 있어서

칼을 꺼내보아도 빛이 잘 반사되지 않았다. 다시 기억이 떠올랐다. 

부모님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온갖 궁리르 해보았다. 나의 유전자를 채취해서 연구소에

가져다 준다면 부모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인가. 예전에 신문에서 구글 어스로 자신의 가족을

찾았다는 이야기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궁리는 궁리에 불과하다. 궁리는 오히려 깊은 굴을 만든다.

그 굴에서 빠져나오기는 더 어려운 법이다.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궁리의 굴에서

벗어나 이젠 새로운 목표를 새워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목표를 세우기도 전에 나는 오늘 아침

내 책을 잃었고, 유일한 보금자리도 잃은 꼴이다. 그래, 누가 죽여도 신이 나를 노여워 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이건 동해보복법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정당성이 있는 살인이다.


사실 지옥에 가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지옥이나 현실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은총을 받은 자만이 신을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은총을 받지 못 했나 보다. 그래도 상관없다. 신은 이미 나를 버린지 오래이고,

나도 그런 신을 별로 따르고 싶지 않다. 


검은 식칼 앞에 사람들이 보였다. 갑자기 소설 <이방인>이 생각났다.

칼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는 이유로 총을 쏜 뫼르소. 그야말로 부조리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만약 광장에서 한 번도 본 적없는 노숙자에게 칼을 맞고 죽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부조리하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노동조차 누리지 못하고 담장 아래에 쓰러진 불쌍한 나그네가 더 부조리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맹자는 의로움을 위해선 목숨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벤담은 사회 전체 이익을 위해선 개인의 희생도

정당화 된다고 이야기했다. 칸트는 인간을 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수많은 사상가들이 내놓은 답변이 불협화음이 되어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칼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비로소 나는 뫼르소가 되기로 한 것이다.

마치 야생의 뫼르소랄까. 신에 내게 내린 살인이라는 명령. 나는 따르고 싶지 않았다.

신에게 맞서고 싶었다. 이 상황에 저항하는 시지프스가 되고 싶었다. 나는 광장에서 광장으로 향했다.

길이 없다는 것은 어디로 가도 길이 될 수 있다는 것. 방향이 없다는 것은 내가 가는 곳이 곧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


나는 처음으로 녹슨 목줄을 풀어내고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광장의 한 가운데에서 벗어나 나는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살인을 저질렀음을.

내 안에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 어린 소년을

담장을 하늘처럼 올려다보며 눈동자 뒤로 눈물을 숨기는

그 어린 소년을 내가 죽였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길이 없다고들 이야기하겠지만 나에게는 분명히 보였다.

내 앞에 길이 놓여져 있었다.


-살인에 관한 짧은 소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에 영감을 받아 쓴 소설입니다.)


노스텔지아

추천 콘텐츠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