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창세기
- 작성자 서벽
- 작성일 2026-05-30
- 좋아요 0
- 댓글수 2
- 조회수 135
결국엔 그의 신념이, 유일무이한 그 신념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무너트린 것이었다. 그의 삶과 영혼 또한 모두.
-
색다른 풍경이랄 것 하나 없는 흑백의 배경 화면. 유원은 익숙하고도 낯선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 이걸 봐도 되는 걸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주인 없는 방은 애초부터 이곳에 누구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책상 위 옅게 내려앉은 먼지와 싸늘한 공기만이 유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하….”
유원은 깜빡이는 마우스 커서를 바라보다가는 책상 위에 늘어지듯 기댔다. 굳게 닫힌 창밖으로 햇빛이 밀려 들어와 그의 얼굴 위를 스쳤다. 흐릿한 먼지 덩어리가 시야를 가렸으나 그걸 떼어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굳은 다짐을 한 것이 무색하게도 유원은 도무지 이걸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도대체 누가 이걸 볼 수 있단 말인가?
유원은 곁눈질로 바탕화면에 단 하나뿐인 파일을 응시하다가는 결국 눈을 감았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영영 외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아, 몰라.”
두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헝클어트렸다. 울려대는 심장 박동을 애써 무시한 채 유원은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깜빡이는 커서가 화면 구석에 놓인 파일을 향해 다가갔다. 결심은 한순간이었다. 지금 와서 눈을 꾹 감고 있을 만큼 유원은 미련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고개를 들어 올려 담담함을 가장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린 채 파일명을 읽어내렸을 뿐이었다.
[유서.txt]
그러니까 하필립, 이 방의 주인이자 유원의 둘도 없을 친구.
그는 죽었다. 2주 전에. 그것도 자살로.
-
필립의 장례식에는 가지 못했다. 그가 죽었던 날은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이었고, 필립의 핸드폰은 굳게 잠겨있었기에. 나는 그저 방학을 마치고 이른 아침의 텅 빈 교실을 마주한 순간에, 아니 사실은 이주가 넘도록 사라지지 않는 읽지 않음 표시를 보고서야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필립의 죽음을 알리고 어수선하던 교실 안을 기억한다.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낮은 웅성거림과 이따금 들려오던 터무니없는 속삭임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가. 울고 있었던가? 모르겠다. 도무지 그것만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뒤늦게나마 필립의 집을 찾아갔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들어서고 싶지는 않았기에 초인종을 눌렀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 혹시라도 네가 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고.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면서. 물론 당연하게도 마주한 건 필립의 어머님이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소파에 어색하게 앉아 자초지종을 들었다. 필립의 장례식은 간단히 치러졌으며, 이제는 그가 천국에 갔으리라고 생각할 테라고. 그 말을 내뱉는 어머님의 목소리는 불안한 듯 흔들거렸다. 분명 그녀의 얼굴은 못다 할 만큼 찌그러져 있었을 테였다. 다만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자신은 오로지 거실의 정중앙에 매달린, 도무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그 십자가를 멍하니, 아주 멍하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길게 이어진 침묵을 인식했을 땐 이미 대화가 끝나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그제서야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내렸다. 필립의 어머님은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붉게 흐트러진 눈시울과 흐릿한 눈물 자국이 시야에 담겼다. 그러나 나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어쩌면 조금은 잔인할지도 모르겠으나, 그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은 이러한 끝이 참 너와 잘 맞는다고. 자신으로서는 지금까지도, 그러니 앞으로 이해할 수 없는 너였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구태여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녀는 미약한 웃음을 갈무리하고는 자신을 필립의 방 앞으로 데려갔다. 제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문 손잡이를 잡아당기기 전 그녀가 말했다. 필립의 유품은 전부 불태웠다고. 그러니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말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픽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그 점마저 되려 널 생생하게 하는 탓이었나. 아,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녀의 말대로 열린 방안은 삭막했다. 인기척 하나 없는 공간이었다. 여러 갈래로 찍힌 발자국만이 과거 이곳을 드나들던 이들을 떠올리게 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그 안에 담긴 책들을 흘겨보았다. 헤진 교복이 걸려있어야 할 행거는 홀로 서 있었고, 싸늘한 철제 프레임의 침대는 매트릭스만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구나. 정말 떠났구나. 어딘가로.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그곳으로.
문지방 위에 굳은 듯 서 있는 나를 뒤로한 채 그녀는 방 한구석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예의 그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결국엔 저걸 들키고 말았구나. 과거 필립은 자신의 글을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했다. 가족들에게까지도.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는 제게 앞으로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뭐, 지금으로서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고.
“엄마로서야 볼 자격이 없지만 유원이 넌 봐도 될 것 같아서.그렇지?”
“…네. 해볼게요.”
묶인 듯 멈춰 서 있던 발을 떼어냈다. 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세월이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모델이었는데, 듣기로는 필립의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았던 거라고 했다. 그때의 나이에 노트북을 잘 쓸 수 있었을 리가 만무했을 텐데도. 꽤나 오래된 티가 났다.
“그래. 유원이 넌, 필립의 친구잖니.”
친구라. 친구. 글쎄. 자신이 정말로 필립의 친구였던가. 그의 죽음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음에도. 나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집어삼켰다.
“네. 그럴게요.”
“그래. 나가 있을 테니 천천히 해도 돼. 생각도 좀 정리하고.”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문을 닫고 나섰다. 방 밖으로 작은 소음이 들리더니 이내 도어락 소리와 함께 집 안이 온통 적막으로 휩싸였다. 뻣뻣한 팔을 주무르며 필립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고선 유원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침묵이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으나 그보다도 거센 감정이 그의 속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고 있던 탓이었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손을 뻗었다. 차갑게 식은 표면을 의식하며 노트북을 열었다. 잠금은 없었다. 허무하게도.
그렇게 유원은 또다시 한참을 흑백의 배경 화면을 응시하다가는 겨우 파일을 연 것이었다. 찡그린 표정을 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선. 다만 나타난 내용이 이것일 줄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
유서라는 이름의 파일에는 오직 단 하나의 글만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글의 제목은 유원에게는 익숙하고도 낯선 제목이었다.
< 창세기 >
유원은 화면에 나타난 글의 제목을 속으로 훑었다. 입안을 굴러다니는 단어가 어색했다. 창세기라는 제목을 쓴 이유는 또 무엇인지. 유서가 없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님은 유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필립은 유서하나 없이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러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아래의 적힌 글은 자신으로서는 결코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뭐야…. 이게 대체.”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시선을 멈춰 세웠다. 삼키지 못한 탄식이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글은 단조로운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는 적막한 방에서 눈을 떴다.
그 글은 유언이 아니었다. 소설이었다. 필립이 여태껏 보여준 적 없던 소설 중 하나였다고. 막혀오는 숨을 다급히 들이켰다. 필립의 특이한 성정은 잘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도 이런 순간을 보여준다는 게 어이없었다. 너는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인간인지. 목구멍을 가득 채운 덩어리 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나는 어느새 그 글에 빠져들어 가 있었다. 멈출 수도 없이.
소설은 평범하게 이어졌다. 너무 평범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글에는 한 남자가 나왔다. 필립과 다르지 않은, 그러나 조금은 이상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이었다. 그는 수더분한 인상을 지녔다고 묘사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남자는 한시도 빠짐없이 웃는 얼굴로 집 밖을 나설 준비를 했다. 올라간 입꼬리가 조금은 기이해 보인다는 문장을 지나 어느새 준비를 마친 그를 따라갔다. 남자는 집 밖을 나서기 전 항상 하는 루틴이 있었다. 그건 바로 현관문 바로 옆에 서서는 그곳에 달린 커다란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눈앞의 자신을 마주 보았다. 아니 사실은, 저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과 똑 닮은 무언가를. 그러나 결코 닮지 않은 저 기괴한 생명체를. 한참이고. 눈을 뗄 수조차 없이.
내려가던 시선을 멈춰 세웠다. 유원은 어째서인지 이 문장들을 읽은 순간 필립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와의 첫 만남이. 필립은 그와는 달리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겨운 종소리. 3월 특유의 옅은 바람이 스치는 계절. 이제는 조금 희미해진 그 과거를 되짚었다. 어느새 눈동자는 허공을 맴돌았다.
필립과의 첫 만남은 특별하다고 보기엔 힘들었다. 짐짓 회상하자면 떠올릴 수는 있겠다마는, 그리 기억할 만큼 특이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았다. 중학교의 첫날이었다. 등교를 하기엔 아주 이른 시간대인 탓에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환영 문구만이 드문드문 반 앞에 붙어있었다.
[1-8]
앞으로 일 년을 함께 할 반이었으나 나는 그리 신이 나지는 않았다. 원하던 학교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을뿐더러, 유일한 친구인 인규마저 동떨어진 반이었으니까. 다만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은 공간을 여는 것은 꽤나 하루를 시작하기에 좋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아직은 낯선 나무 문을 밀었다. 열린 문 너머로 옅은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
당연하게 내딛던 발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 교실의 문 앞, 정확히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그를 보았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의식하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 알아보지 못할 그런 얼굴. 다만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옆얼굴로 보이는 그 눈빛이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그 눈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울 앞의 그는 누군가 옆에 다가온 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 여전히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그를 마주 보았다.
‘안녕.’
필립은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느리지만 뚜렷한 목소리로. 다만 유원은 말하지 못했다. 거울 너머 필립의 얼굴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감각이 그의 몸을 온통 뒤덮었기 때문에. 그때의 그 감각은 무엇이었을까? 온몸을 스치던 불쾌하고도 답답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필립과 자신의 첫 만남이었다.
과거의 순간에서 빠져나와 숨을 헐떡였다. 그 첫 만남 이후로 자주라고는 할 수는 없어도 유원은 이따금 필립이 거울을 보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웃음기 하나 얼굴로 거울 앞에 서 있던 그 모습을. 다만 침잠한 눈빛으로. 마치 자신의 얼굴이 아닌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유원은 그 모습을 보고는 의아해져 그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도대체 왜 이 장면이 생각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남들에게는 조금 이상한 습관 같은 거였을 테였다. 그런데 그러한 습관을 도대체 왜 소설 속 인물에게도 적용한 것인가. 자신의 모습을 주인공으로 표상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필립을 5년이 넘도록 보아온 자신으로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도, 이 글의 진실도 모두.
심호흡과 함께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되었든. 글은 남자의 평범한 일상으로 이어졌다. 두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들어 올린 그는 밖을 나서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회사에 가고, 퇴근길에 마트에 들려 식재료를 샀다. 일정하고 반복되는 일상. 지루한 이야기였다. 필립의 글이 아니었다면, 아니 유언이라는 파일명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목을 끌지 못할 그런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남자가 계산원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녀는 남자에게 여행을 떠나냐고 물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차림의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왜인지 자신의 몸 한구석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웃으며 답했다.
“네. 시칠리아요. 먼 곳이죠.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거짓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음에도. 거짓말을 하고 나면 그는 알게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당장이라도 저 먼 곳으로 떠나, 아니 지금 당장 어딘가로 뛰어내리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생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벌레가 몸을 기어다니는 감각이….
아니. 아니야.
유원은 또다시 들이닥치는 원인 모를 감각에 몸서리쳤다. 주인공은 필립과 달랐다. 특히 이 점에서. 조금 전의 습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필립은 거짓을 말하기를 좋아했다. 사실은 좋아했다기보단 그저 습관적인, 따지자면 그의 성격 중 일부였을지도 모를 노릇이지만. 어쨌건 그는 거짓을 즐겼고 그건 제게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필립과의 만남이 3년이 넘어갈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 입학식이 있던 주였다. 필립의 집안은 기독교이니만큼 매주 일요일 교회에 갔다. 그 때문에 약속 잡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기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일 테였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아직은 조금 쌀쌀한 바람이 열린 문틈 새로 새어 나오기에 후드집업을 집어 들고 밖을 나설 참이었다. 약속 하나 없는 날이었기에 조금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했으며, 이틀 전 새로 사귄 친구들이 보내는 알림에 핸드폰이 웅웅 울려대고 있었다. 필립에게 연락을 해볼까 했지만 결국 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하지 않았다.
기억 속 현관문이 끼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뭐야. 하필립?’
나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교회 안 갔어?’
‘응.’
‘왜?’
의아한 자신과 달리 필립은 평소와 같이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답했다. 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진 적 없던 교회를 빠진 이유가 뭘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갈 이유가 없어져서.’
‘왜? 너 신을 믿는 거 아니었어?’
자신의 시선 조금 아래 위치한 필립의 눈동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올곧았다. 흔들림 없는 그 눈빛은 마치 지금 이 상황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갈 이유가 없어졌다니. 신을 믿는데 이유가 있는 거였던가? 불가지론자인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엄청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 착각이었던가.
‘아, 그거 거짓말이었어.’
‘뭐?’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필립은 태초부터 신 같은 건 없었다며 키득거렸다. 그 웃음은 그의 유일하고도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이따금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듯, 그러나 필립은 그저 재미로 그랬다며 짓고는 하는 웃음이었다. 표정 하나 없던 얼굴에 일순 생동감이 가득 찼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었다. 신을 향한 믿음도 아니고, 신의 존재조차도 없었다고 말하는 그 모습이, 여지껏 그래왔듯이 필립이라는 존재는 어떤 식으로도 정의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듯했기에. 그러니 그는 유원이 보아왔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모호하고 또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고.
무언가 또렷이 잡히지 않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일렁거렸다. 주인공과 너무나도 닮아있음에도 또 다른 필립의 모습과 창세기라는 글의 제목. 이쯤에서 유원은 이 글을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어도, 이 글을 끝까지 읽는다면 답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필립의 죽음도 마찬가지였고.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왜인지 모를 신경질적인 기분으로 거울 앞에 섰다. 그곳에는 새로운 것이 자라나 있었다. 아니, 나타난 것인가? 남자는 거울을 붙잡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집을 나설 때와는 달라진 그것이 서 있었다. 거울 속 그의 얼굴에는 새빨간 흉이 새겨져 있었다. 무언가에 긁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 그랬다. 거짓이 그를 집어삼킨 것이었다. 염치도 모르고 거짓을 내뱉은 남자를 단번에 집어삼킨 것이었다고. 숨죽여 있던 그것이 기어코 눈을 뜬 것이었다.
유원은 빠르게 내리던 마우스 휠을 멈추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필립의 습관이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일까. 그는 거울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던 것일까? 그렇지만 도대체 무엇을? 거울은 그저 현실을 반사시킬 뿐이지 않던가. 아니 애초에 무언가를 보았더라면 그는 왜 언제나 감정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동요 하나 없이 거울을 바라보던 그 얼굴을 기억한다. 익숙해질 수 없을 듯한 그 모호한 눈동자도.
멈추었던 휠을 다시금 굴렸다. 유원은 세상에 오로지 이 글과 자신만이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다시 수없이 반복되는 남자의 일상. 특이한 점 하나 없을 묘사들을 지나 글은 어느새 마지막 문단으로 다다랐다.
거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남자는 그날 이후 거울을 보지 않았다. 외면하고 싶다는 듯이, 혹은 무언가를 조금이나마 늦추고 싶다는 듯이. 다만 그날만은 그는 반드시 거울을 보아야만 했다. 마음속에 웅크려져 있던 무언가를 떨쳐내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휘감고 있는 탓이었다. 빠져나갈 틈 없이. 비록 비극이 도래할지라도.
쨍그랑. 남자는 있는 힘껏 거울을 내리쳤다. 유리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피로 물든 손으로 유리 조각을 쥐었다. 잔뜩 찡그러진 얼굴이 그곳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비틀리고 한없이 추악해진 얼굴이었다.
숨을 들이켰다. 유원은 이쯤에서 필립이라면 어떠한 비참한 결말을 내놓으리라 생각했다. 남자가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려 스스로를 찌른다거나, 거울 속 남자가 뛰쳐나와 그를 죽이는 것과 같은.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한껏 치켜뜬 두 눈을 반사하는 유리 조각을 끝으로 장면은 끝이 났다. 허무하게도.
그리고 그 아래에 적힌 마지막 문장.
- 환상에 살았다. 이루지 못할 환상에 취해 살았다. 바보 같이.
“뭐?”
유원은 어딘가 쥐고 있던 감정이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환상. 환상이라고. 메마른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얼굴을 쓸어내리자 이내 갑갑한 감각이 온몸을 뒤덮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 그러니까, 넌.
“하.”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옅은 온기가 손바닥 위를 스쳐 지나갔다. 주위가 온통 싸늘했다. 나는 두 팔을 끌어안은 채 책상 위에 엎드려 생각했다. 지난 일주일간 죽은 듯 살았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너는, 너는 겨우 내게 이런 말뿐이라고. 갑작스레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필립의 죽음도. 그에 울었던 자신도. 전부. 아니. 아니지. 애초부터 이해할 수 없는 자식이었다. 웃는 일이 드물었으며 자신의 속내를 좀처럼 털어놓는 일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필립과 친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네가 나에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걸 털어놓은 순간에, 이상한 성격이라도 눈을 뗄 수 없는 눈빛을 가지고 있던 네가 나를 마주 본 순간에.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떠한 존재가 된 것이라고. 바보같이 착각했었다.
‘겨우, 이 문장이….’
필립이 죽은 이유를 겨우 이 문장 가지고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왔음에도 나는 여전히 너를 알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 였다고.
-
주말 오후의 카페는 사람들로 붐볐다. 일상적인 말들이 가득 차 주변을 맴돌고 이따금 옅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나른한 시간대였다. 다만 유원에겐 그 모든 게 부질없어 보였지만. 카페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유원은 지잉 울리는 알림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의 다 왔는데
- 어디?
인규로부터 온 메세지였다. 유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짧게 답했다.
-구석. 알아서 찾아와.
조금 신경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는 지금 여유를 부릴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유원은 필립이 남긴 마지막 문장을 읽고는 도망치듯 그의 집을 나섰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차올라있었다. 손에 감싸 쥔 노트북 안에 든 그 글이 너무도 두려웠다. 조금만 파헤치면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진실이 그의 눈앞에 일렁거리고 있는 듯했다.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글이었다. 정확히는 이해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필립에 대해서도 그 글에 대해서도.
“야. 정신차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있을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팔을 흔들어 대는 감각에 유원은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읽어.”
인규가 채 앉기도 전에 손을 뻗어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그는 유원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내색하지 않고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게 뭔데?”
“유언. 아니 소설이라고 해야 하려나.”
“걔가 글을 썼어?”
“응.”
짧은 대답과 함께 유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인규가 저 글을 읽기 전까지 제 머리를 식힐 참이었다. 종잡을 수 없이 뻗쳐나가는 무의미한 생각들을 한데 끌어모았다. 그러니까, 필립은 죽었다. 죽은 이유를 분명 저 글에 써놓은 것이긴 할 테다. 창세기라는 제목은, 일종의 세상의 시작. 그러니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 싶었던 거라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는 걸까. 그런데 도대체 왜? 무엇이? 아니 애초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할 수 있나? 그렇지만 필립은 애초부터 신 같은 건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생각을 정리하려던 것이 무색하게도 되려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한숨을 내쉬어도 목에 걸린 무언가가 빠져나오지 못한 듯 꽉 막혀있었다.
“이게 무슨….”
침묵 속에서 인규는 말했다. 나는 왜인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답했다.
“못 알아듣겠지?”
그래. 너도 그렇겠지. 필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나만 너를 알 수 없었던 게 아니라고. 지금 와서 그게 전부 무슨 소용이겠냐만.
“얘 무슨 병이라도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러니까 뭐, 조현병 같은 거 말이야.”
“글쎄, 뭐 그랬을지도 모르지.”
유원은 인규의 다급한 물음에 건조하게 답했다. 정신병이었나. 그래, 인규의 말대로 조현병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것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병이라고 이름 짓는다 해서 그것을 온통 거짓으로 치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필립의 눈동자를 기억한다면.
그 말을 내뱉은 인규는 혼란에 휩싸인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유원의 맞은 편에 앉은 채로 갈 곳 없는 시선을 공중에 부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침묵이 그들 주위를 에워쌌다. 멀리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이들의 말소리가 이따금 타고 넘어왔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유원은 넋이 나간 듯 앉아있는 그를 보다가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인규가 입을 연 건 그로부터 십여 분이 지나간 후였다.
“있잖아. 사실…, 걔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그는 어딘가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거의 한 장면을 회상하듯 인규의 눈동자는 허공을 맴돌았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던 그는 체념 같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혹시 이 세상이 가짜면, 그러니까 만약 꿈처럼 환상 같은 거라면, 그러면 넌 어떡할 거냐고.”
“뭐?”
벼락같은 말에 눈을 떴다. 환상, 환상이라고. 그 순간 글에 있던 마지막 문장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니까 어쩌면…. 걔는 자기가 환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었을까. 그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심장이 온몸을 울려댔다. 쿵. 쿵. 이 떨림은 두려움일까, 아니면 고양감일까. 기어코 필립의 진실을 알아냈다는 생각은 잠시였다.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아니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던 필립의 모습과 태연하게 거짓을 내뱉던 그의 눈빛들도 모두. 외면하고 있었을 뿐.
“일단, 일단 알았어. 알겠으니까, 나중에 더 말해.”
유원은 도망치듯 카페를 나섰다. 뒤에서 인규가 무언가를 제게 외쳐대는 듯했으나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웅웅 거리는 심장 박동이 온몸에서 울려대고 있었다.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런 소음도 그에게 닿지 못할 듯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듯이.
-
유원은 비릿한 숨을 들이켰다. 더 이상 토해낼 것이 없어 위액까지 토해낸 탓이었다. 주저앉은 화장실 타일에서 찬기가 올라와 뜨겁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식혔다.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그는 비틀거리며 침대로 다가가 늘어졌다. 눈가를 적시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멈출 수 없이 솟구치는 격한 감정도, 떨리는 숨도 전부. 눈을 감았다. 결코 잠들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어둠으로 끌려들어 갔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제 앞에 앉아있던 필립이 느닷없이 말했다. 이 또한 그 어느 날의 기억이었다. 그리 오래되지도 이르지도 않은 기억. 창문 사이로 옅게 들어오는 바람. 침잠한 눈빛 속에 일렁이던 감정들. 꿈속의 나는 펄럭거리는 문제집을 성의 없이 넘기고 있는 참이었다. 그래. 필립은 부정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대답은 대부분 모르겠다와 그렇지 않다를 맴돌았다. 그럼 자신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대체 뭐라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늘 똑같았다.
‘지겨워.’
‘뭐가. 사는 거?’
‘아니. 그냥….’
‘전부?’
‘…모르겠어.’
기억 속 자신은 언제나 그런 모호한 대답을 내놓은 필립을 보며 피식 웃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물론 그게 그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지만.
‘배유원’
‘응?’
‘넌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아.’
자신의 웃음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던 필립은 어딘가 꺼림칙한 말투로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마주 보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여전히 변함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늘 공부는 글렀구나 싶은 마음에 책상에 늘어지듯 엎드렸다. 식지 않는 여름의 열기가 공기를 맴돌았다.
‘글쎄 좀 슬프고 외롭고 뭐, 그러겠지.’
‘그 뿐이야?’
눈을 감고 있어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전과 다르지 않은 얼굴일테라 생각했다. 나는 조금 어이없다는 생각에 웃으며 답했다.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죽음이라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자신에게는 그런 말들은 결국 허무맹랑한 것이었기에.
‘그뿐이라니, 슬퍼하면 된 거 아냐?’
‘아니, 그런 거 말고….’
말을 흐리는 필립의 모습을 끝으로 꿈은 멀어져갔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보려 했지만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현실 같던 감각이 한순간에 전부 물러나고 어느덧 낯선 감각이 물씬 찾아왔다. 나는 터져 나오는 숨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헐떡여 댔다. 어느덧 밤이 찾아온 것인지 방 안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컴컴했다. 침대 위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컴컴한 어둠 사이로 희미하게 필립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조금 전 꿈속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필립의 눈동자는 언제나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듯 침잠해 있었다. 마치 빛조차 그의 망막에 닿지 못할 듯이. 새까만 눈동자는 무언가를 향해 있었지만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실제로 필립은, 아니 따지자면 단 한 번도 무언가를 바라본 적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가 말했듯 한평생을 환상에 취해있었기에.
‘그러니까 어쩌면…. 걔는 자기가 환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었을까.’
환상. 그래, 환상. 익숙해지지 않는 그 단어를 수십 번 입 안에서 굴렸다. 그러니까 넌, 환상에 살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바보 같이. 나는 인규의 말을 들은 순간 생각했다. 차라리 네가 환상을 증명했으면 했다고. 환상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진실이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다고.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것이. 그랬다면 나는 틀림없이 널 믿었겠지. 조잡한 신념 따위라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거라고. 그러나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자, 남은 건 흐릿한 주절거림과 거짓된 기억뿐이었기에.
다만 상처 입은 현실을 마주하는 건 결국 필립이 아니라 나였다. 현실은 환상이 되어 그에게 펼쳐져 있었으니, 남은 건 거짓된 현실뿐이었다. 부질없고 바보같은 진실이. 이걸 과연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은 평생 이곳에 갇혀 살아가야 할 테였다. 필립이 말한 환상 속에 취해 살지도 죽지도 못할 인생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신에겐 죽을 용기도 살아갈 용기도 없는데. 도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알 수 없었다. 삶에는 본래 이유란 없고,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몸을 들어 올렸다. 비틀거리는 다리를 옮겨 방 한구석에 놓인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몸을 숙여 거울을 마주 보았다. 소설 속 그 남자처럼, 아니 필립이 바라왔던 그 모습으로.
필립의 눈동자를 생각한다. 언제나 허공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세상을 꿰뚫을 듯 치켜뜨던 그 눈빛을. 그러나 나는 이제서야 생각한다. 그 눈빛은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고. 저 먼 존재하지 않는 진실된 세계, 그러나 그에게는 단 하나뿐인 실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라고.
거울 속엔 익숙하고도 낯선 형체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안은 이곳과 마찬가지로 빛이 새어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익숙한 생김새를 띈 그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아주 한참이고, 침묵이 몸을 타고 잠식되어 갈 때까지.
“하, 하하.”
흐릿한 경계를 바라보다가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멈출 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 어느 날 필립의 모습처럼. 덧없이 내뱉는 웃음이었다. 살아있다는 감각 사이로 기시감이 한껏 차올랐다. 환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현실과 몽상을 구별할 수 없었고, 구별해서도 안 되었다.
숨을 들이켰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 태어나고 있었다.
씁쓸하고도 무모한 문장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눈을 감았다.
죽지 못할 환상에 살고 있었다.
추천 콘텐츠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끝까지 쓰는 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올리기 직전까지 고민했는데 그래도 멘토링을 받는 게 더 낫겠지 싶어서 올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