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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창세기

  • 작성자 서벽
  • 작성일 2026-05-30
  • 조회수 135


결국엔 그의 신념이유일무이한 그 신념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무너트린 것이었다그의 삶과 영혼 또한 모두.


-


색다른 풍경이랄 것 하나 없는 흑백의 배경 화면유원은 익숙하고도 낯선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정말 이걸 봐도 되는 걸까확신이 서지 않았다주인 없는 방은 애초부터 이곳에 누구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책상 위 옅게 내려앉은 먼지와 싸늘한 공기만이 유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


유원은 깜빡이는 마우스 커서를 바라보다가는 책상 위에 늘어지듯 기댔다굳게 닫힌 창밖으로 햇빛이 밀려 들어와 그의 얼굴 위를 스쳤다흐릿한 먼지 덩어리가 시야를 가렸으나 그걸 떼어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굳은 다짐을 한 것이 무색하게도 유원은 도무지 이걸 볼 자신이 없었다아니 애초에도대체 누가 이걸 볼 수 있단 말인가?

 

유원은 곁눈질로 바탕화면에 단 하나뿐인 파일을 응시하다가는 결국 눈을 감았다이제야 실감이 났다영영 외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몰라.”

 

두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헝클어트렸다울려대는 심장 박동을 애써 무시한 채 유원은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깜빡이는 커서가 화면 구석에 놓인 파일을 향해 다가갔다결심은 한순간이었다지금 와서 눈을 꾹 감고 있을 만큼 유원은 미련하지 않았다그는 단지 고개를 들어 올려 담담함을 가장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린 채 파일명을 읽어내렸을 뿐이었다.

 

[유서.txt]

 

그러니까 하필립이 방의 주인이자 유원의 둘도 없을 친구.

그는 죽었다. 2주 전에그것도 자살로.

 

 

-

 

필립의 장례식에는 가지 못했다그가 죽었던 날은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이었고필립의 핸드폰은 굳게 잠겨있었기에나는 그저 방학을 마치고 이른 아침의 텅 빈 교실을 마주한 순간에아니 사실은 이주가 넘도록 사라지지 않는 읽지 않음 표시를 보고서야 알아차렸을 뿐이었다필립의 죽음을 알리고 어수선하던 교실 안을 기억한다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낮은 웅성거림과 이따금 들려오던 터무니없는 속삭임들나는 그 가운데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가울고 있었던가모르겠다도무지 그것만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뒤늦게나마 필립의 집을 찾아갔다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섣불리 들어서고 싶지는 않았기에 초인종을 눌렀다어쩌면어쩌면 정말 혹시라도 네가 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고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을 하면서물론 당연하게도 마주한 건 필립의 어머님이었지만이제는 익숙해진 소파에 어색하게 앉아 자초지종을 들었다필립의 장례식은 간단히 치러졌으며이제는 그가 천국에 갔으리라고 생각할 테라고그 말을 내뱉는 어머님의 목소리는 불안한 듯 흔들거렸다분명 그녀의 얼굴은 못다 할 만큼 찌그러져 있었을 테였다다만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자신은 오로지 거실의 정중앙에 매달린도무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그 십자가를 멍하니아주 멍하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길게 이어진 침묵을 인식했을 땐 이미 대화가 끝나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나는 그제서야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내렸다필립의 어머님은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붉게 흐트러진 눈시울과 흐릿한 눈물 자국이 시야에 담겼다그러나 나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어쩌면 조금은 잔인할지도 모르겠으나그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사실은 이러한 끝이 참 너와 잘 맞는다고자신으로서는 지금까지도그러니 앞으로 이해할 수 없는 너였지만 이것만은 분명히구태여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녀는 미약한 웃음을 갈무리하고는 자신을 필립의 방 앞으로 데려갔다제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문 손잡이를 잡아당기기 전 그녀가 말했다필립의 유품은 전부 불태웠다고그러니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말라고그 말을 듣고 나는 픽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지 못했다아니그 점마저 되려 널 생생하게 하는 탓이었나역시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녀의 말대로 열린 방안은 삭막했다인기척 하나 없는 공간이었다여러 갈래로 찍힌 발자국만이 과거 이곳을 드나들던 이들을 떠올리게 했다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그 안에 담긴 책들을 흘겨보았다헤진 교복이 걸려있어야 할 행거는 홀로 서 있었고싸늘한 철제 프레임의 침대는 매트릭스만이 드러나 있었다그렇구나정말 떠났구나어딘가로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그곳으로.

 

문지방 위에 굳은 듯 서 있는 나를 뒤로한 채 그녀는 방 한구석 책상으로 다가갔다그러고는 예의 그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결국엔 저걸 들키고 말았구나과거 필립은 자신의 글을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했다가족들에게까지도이유는 알려주지 않았지만그는 제게 앞으로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거라고그렇게 말하기도 했다지금으로서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고.

 

“엄마로서야 볼 자격이 없지만 유원이 넌 봐도 될 것 같아서.그렇지?”

해볼게요.”

 

묶인 듯 멈춰 서 있던 발을 떼어냈다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았다세월이 느껴지는 물건이었다지금은 잘 쓰지 않는 모델이었는데듣기로는 필립의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았던 거라고 했다그때의 나이에 노트북을 잘 쓸 수 있었을 리가 만무했을 텐데도꽤나 오래된 티가 났다.

 

“그래. 유원이 넌, 필립의 친구잖니.”

 

친구라친구글쎄자신이 정말로 필립의 친구였던가그의 죽음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음에도나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집어삼켰다.

 

그럴게요.”

그래나가 있을 테니 천천히 해도 돼생각도 좀 정리하고.”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문을 닫고 나섰다방 밖으로 작은 소음이 들리더니 이내 도어락 소리와 함께 집 안이 온통 적막으로 휩싸였다뻣뻣한 팔을 주무르며 필립의 의자에 주저앉았다그러고선 유원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침묵이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으나 그보다도 거센 감정이 그의 속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고 있던 탓이었다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손을 뻗었다차갑게 식은 표면을 의식하며 노트북을 열었다잠금은 없었다허무하게도.

 

그렇게 유원은 또다시 한참을 흑백의 배경 화면을 응시하다가는 겨우 파일을 연 것이었다찡그린 표정을 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선다만 나타난 내용이 이것일 줄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

 

유서라는 이름의 파일에는 오직 단 하나의 글만이 들어가 있었다그리고 그 글의 제목은 유원에게는 익숙하고도 낯선 제목이었다.

 

< 창세기 >

 

유원은 화면에 나타난 글의 제목을 속으로 훑었다입안을 굴러다니는 단어가 어색했다창세기라는 제목을 쓴 이유는 또 무엇인지유서가 없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그의 어머님은 유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필립은 유서하나 없이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적어도 그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반드시그러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다만 그 아래의 적힌 글은 자신으로서는 결코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뭐야이게 대체.”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시선을 멈춰 세웠다삼키지 못한 탄식이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글은 단조로운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는 적막한 방에서 눈을 떴다.

 

그 글은 유언이 아니었다소설이었다필립이 여태껏 보여준 적 없던 소설 중 하나였다고막혀오는 숨을 다급히 들이켰다필립의 특이한 성정은 잘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도 이런 순간을 보여준다는 게 어이없었다너는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인간인지목구멍을 가득 채운 덩어리 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몸부림쳤다나는 어느새 그 글에 빠져들어 가 있었다멈출 수도 없이.

 

소설은 평범하게 이어졌다너무 평범해서 이상할 정도였다글에는 한 남자가 나왔다필립과 다르지 않은그러나 조금은 이상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이었다그는 수더분한 인상을 지녔다고 묘사되었다침대에서 일어난 남자는 한시도 빠짐없이 웃는 얼굴로 집 밖을 나설 준비를 했다올라간 입꼬리가 조금은 기이해 보인다는 문장을 지나 어느새 준비를 마친 그를 따라갔다남자는 집 밖을 나서기 전 항상 하는 루틴이 있었다그건 바로 현관문 바로 옆에 서서는 그곳에 달린 커다란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눈앞의 자신을 마주 보았다아니 사실은저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자신과 똑 닮은 무언가를그러나 결코 닮지 않은 저 기괴한 생명체를한참이고눈을 뗄 수조차 없이.

 

내려가던 시선을 멈춰 세웠다유원은 어째서인지 이 문장들을 읽은 순간 필립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생각했다정확히는 그와의 첫 만남이필립은 그와는 달리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지겨운 종소리. 3월 특유의 옅은 바람이 스치는 계절이제는 조금 희미해진 그 과거를 되짚었다어느새 눈동자는 허공을 맴돌았다.

 

필립과의 첫 만남은 특별하다고 보기엔 힘들었다짐짓 회상하자면 떠올릴 수는 있겠다마는그리 기억할 만큼 특이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았다중학교의 첫날이었다등교를 하기엔 아주 이른 시간대인 탓에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환영 문구만이 드문드문 반 앞에 붙어있었다.

 

[1-8]

 

앞으로 일 년을 함께 할 반이었으나 나는 그리 신이 나지는 않았다원하던 학교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을뿐더러유일한 친구인 인규마저 동떨어진 반이었으니까다만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은 공간을 여는 것은 꽤나 하루를 시작하기에 좋은 느낌을 주었다나는 아직은 낯선 나무 문을 밀었다열린 문 너머로 옅은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

 

당연하게 내딛던 발걸음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누군가 교실의 문 앞정확히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나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그를 보았다평범한 얼굴이었다의식하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 알아보지 못할 그런 얼굴다만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옆얼굴로 보이는 그 눈빛이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나는 그 눈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거울 앞의 그는 누군가 옆에 다가온 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 여전히 미동 없이 서 있었다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거울을 통해 그를 마주 보았다.

 

안녕.’

 

필립은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느리지만 뚜렷한 목소리로다만 유원은 말하지 못했다거울 너머 필립의 얼굴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이상한 감각이 그의 몸을 온통 뒤덮었기 때문에그때의 그 감각은 무엇이었을까온몸을 스치던 불쾌하고도 답답한 감각이었다그리고 그것이필립과 자신의 첫 만남이었다.

 

과거의 순간에서 빠져나와 숨을 헐떡였다그 첫 만남 이후로 자주라고는 할 수는 없어도 유원은 이따금 필립이 거울을 보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웃음기 하나 얼굴로 거울 앞에 서 있던 그 모습을다만 침잠한 눈빛으로마치 자신의 얼굴이 아닌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유원은 그 모습을 보고는 의아해져 그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도대체 왜 이 장면이 생각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남들에게는 조금 이상한 습관 같은 거였을 테였다그런데 그러한 습관을 도대체 왜 소설 속 인물에게도 적용한 것인가자신의 모습을 주인공으로 표상한 것일까알 수 없었다필립을 5년이 넘도록 보아온 자신으로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그의 죽음도이 글의 진실도 모두.

 

심호흡과 함께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갔다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무엇이 되었든글은 남자의 평범한 일상으로 이어졌다두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들어 올린 그는 밖을 나서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회사에 가고퇴근길에 마트에 들려 식재료를 샀다일정하고 반복되는 일상지루한 이야기였다필립의 글이 아니었다면아니 유언이라는 파일명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목을 끌지 못할 그런 이야기였다그러니까남자가 계산원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녀는 남자에게 여행을 떠나냐고 물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차림의 그였음에도 불구하고남자는 왜인지 자신의 몸 한구석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웃으며 답했다.

 

시칠리아요먼 곳이죠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

 

거짓말이었다그는 거짓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음에도거짓말을 하고 나면 그는 알게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당장이라도 저 먼 곳으로 떠나아니 지금 당장 어딘가로 뛰어내리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그는 지금 생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벌레가 몸을 기어다니는 감각이.

 

아니아니야.

 

유원은 또다시 들이닥치는 원인 모를 감각에 몸서리쳤다주인공은 필립과 달랐다특히 이 점에서조금 전의 습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필립은 거짓을 말하기를 좋아했다사실은 좋아했다기보단 그저 습관적인따지자면 그의 성격 중 일부였을지도 모를 노릇이지만어쨌건 그는 거짓을 즐겼고 그건 제게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필립과의 만남이 3년이 넘어갈 때 그러니까고등학교 입학식이 있던 주였다필립의 집안은 기독교이니만큼 매주 일요일 교회에 갔다그 때문에 약속 잡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기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날도 마찬가지일 테였고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아직은 조금 쌀쌀한 바람이 열린 문틈 새로 새어 나오기에 후드집업을 집어 들고 밖을 나설 참이었다약속 하나 없는 날이었기에 조금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했으며이틀 전 새로 사귄 친구들이 보내는 알림에 핸드폰이 웅웅 울려대고 있었다필립에게 연락을 해볼까 했지만 결국 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하지 않았다.

 

기억 속 현관문이 끼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그리고 그 앞에는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뭐야하필립?’

 

나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교회 안 갔어?’

.’

?’

 

의아한 자신과 달리 필립은 평소와 같이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답했다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진 적 없던 교회를 빠진 이유가 뭘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갈 이유가 없어져서.’

너 신을 믿는 거 아니었어?’

 

자신의 시선 조금 아래 위치한 필립의 눈동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올곧았다흔들림 없는 그 눈빛은 마치 지금 이 상황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갈 이유가 없어졌다니신을 믿는데 이유가 있는 거였던가불가지론자인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분명 엄청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 착각이었던가.

 

그거 거짓말이었어.’

?’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필립은 태초부터 신 같은 건 없었다며 키득거렸다그 웃음은 그의 유일하고도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이따금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듯그러나 필립은 그저 재미로 그랬다며 짓고는 하는 웃음이었다표정 하나 없던 얼굴에 일순 생동감이 가득 찼다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는 헛웃음을 터트렸다어이가 없었다신을 향한 믿음도 아니고신의 존재조차도 없었다고 말하는 그 모습이여지껏 그래왔듯이 필립이라는 존재는 어떤 식으로도 정의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듯했기에그러니 그는 유원이 보아왔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모호하고 또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고.

 

무언가 또렷이 잡히지 않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일렁거렸다주인공과 너무나도 닮아있음에도 또 다른 필립의 모습과 창세기라는 글의 제목이쯤에서 유원은 이 글을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어도이 글을 끝까지 읽는다면 답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필립의 죽음도 마찬가지였고.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왜인지 모를 신경질적인 기분으로 거울 앞에 섰다그곳에는 새로운 것이 자라나 있었다아니나타난 것인가남자는 거울을 붙잡았다가까이 다가가자 집을 나설 때와는 달라진 그것이 서 있었다거울 속 그의 얼굴에는 새빨간 흉이 새겨져 있었다무언가에 긁히기라도 한 것처럼그랬다거짓이 그를 집어삼킨 것이었다염치도 모르고 거짓을 내뱉은 남자를 단번에 집어삼킨 것이었다고숨죽여 있던 그것이 기어코 눈을 뜬 것이었다.

 

유원은 빠르게 내리던 마우스 휠을 멈추었다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필립의 습관이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일까그는 거울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던 것일까그렇지만 도대체 무엇을거울은 그저 현실을 반사시킬 뿐이지 않던가아니 애초에 무언가를 보았더라면 그는 왜 언제나 감정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동요 하나 없이 거울을 바라보던 그 얼굴을 기억한다익숙해질 수 없을 듯한 그 모호한 눈동자도.

 

멈추었던 휠을 다시금 굴렸다유원은 세상에 오로지 이 글과 자신만이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또다시 수없이 반복되는 남자의 일상특이한 점 하나 없을 묘사들을 지나 글은 어느새 마지막 문단으로 다다랐다.

 

거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남자는 그날 이후 거울을 보지 않았다외면하고 싶다는 듯이혹은 무언가를 조금이나마 늦추고 싶다는 듯이다만 그날만은 그는 반드시 거울을 보아야만 했다마음속에 웅크려져 있던 무언가를 떨쳐내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휘감고 있는 탓이었다빠져나갈 틈 없이비록 비극이 도래할지라도.

 

쨍그랑남자는 있는 힘껏 거울을 내리쳤다유리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남자는 피로 물든 손으로 유리 조각을 쥐었다잔뜩 찡그러진 얼굴이 그곳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비틀리고 한없이 추악해진 얼굴이었다.

 

숨을 들이켰다유원은 이쯤에서 필립이라면 어떠한 비참한 결말을 내놓으리라 생각했다남자가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려 스스로를 찌른다거나거울 속 남자가 뛰쳐나와 그를 죽이는 것과 같은그러나 그뿐이었다그러니까 내 말은한껏 치켜뜬 두 눈을 반사하는 유리 조각을 끝으로 장면은 끝이 났다허무하게도.

 

그리고 그 아래에 적힌 마지막 문장.

 

환상에 살았다이루지 못할 환상에 취해 살았다바보 같이.

 

?”

 

유원은 어딘가 쥐고 있던 감정이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환상환상이라고메마른 두 손을 들어 올렸다얼굴을 쓸어내리자 이내 갑갑한 감각이 온몸을 뒤덮었다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그러니까.

 

.”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옅은 온기가 손바닥 위를 스쳐 지나갔다주위가 온통 싸늘했다나는 두 팔을 끌어안은 채 책상 위에 엎드려 생각했다지난 일주일간 죽은 듯 살았던 자신이었다그런데 너는너는 겨우 내게 이런 말뿐이라고갑작스레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필립의 죽음도그에 울었던 자신도전부아니아니지애초부터 이해할 수 없는 자식이었다웃는 일이 드물었으며 자신의 속내를 좀처럼 털어놓는 일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그런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필립과 친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적어도 네가 나에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걸 털어놓은 순간에이상한 성격이라도 눈을 뗄 수 없는 눈빛을 가지고 있던 네가 나를 마주 본 순간에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떠한 존재가 된 것이라고바보같이 착각했었다.

 

겨우이 문장이.’

 

필립이 죽은 이유를 겨우 이 문장 가지고는 알 수가 없었다그러니까 결국이번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왔음에도 나는 여전히 너를 알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 였다고.

-

 

주말 오후의 카페는 사람들로 붐볐다일상적인 말들이 가득 차 주변을 맴돌고 이따금 옅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나른한 시간대였다다만 유원에겐 그 모든 게 부질없어 보였지만카페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유원은 지잉 울리는 알림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의 다 왔는데

어디?

 

인규로부터 온 메세지였다유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짧게 답했다.

 

-구석알아서 찾아와.

 

조금 신경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는 지금 여유를 부릴만한 기분이 아니었다유원은 필립이 남긴 마지막 문장을 읽고는 도망치듯 그의 집을 나섰다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차올라있었다손에 감싸 쥔 노트북 안에 든 그 글이 너무도 두려웠다조금만 파헤치면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진실이 그의 눈앞에 일렁거리고 있는 듯했다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글이었다정확히는 이해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필립에 대해서도 그 글에 대해서도.

 

정신차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있을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팔을 흔들어 대는 감각에 유원은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읽어.”

 

인규가 채 앉기도 전에 손을 뻗어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그는 유원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내색하지 않고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게 뭔데?”

유언아니 소설이라고 해야 하려나.”
걔가 글을 썼어?”
.”


짧은 대답과 함께 유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인규가 저 글을 읽기 전까지 제 머리를 식힐 참이었다종잡을 수 없이 뻗쳐나가는 무의미한 생각들을 한데 끌어모았다그러니까필립은 죽었다죽은 이유를 분명 저 글에 써놓은 것이긴 할 테다창세기라는 제목은일종의 세상의 시작그러니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 싶었던 거라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는 걸까그런데 도대체 왜무엇이아니 애초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할 수 있나그렇지만 필립은 애초부터 신 같은 건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생각을 정리하려던 것이 무색하게도 되려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한숨을 내쉬어도 목에 걸린 무언가가 빠져나오지 못한 듯 꽉 막혀있었다.

 

이게 무슨.”

 

침묵 속에서 인규는 말했다나는 왜인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갈무리하며 답했다.

 

못 알아듣겠지?”

 

그래너도 그렇겠지필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그러니 나만 너를 알 수 없었던 게 아니라고지금 와서 그게 전부 무슨 소용이겠냐만.

 

얘 무슨 병이라도 있었던 거 아니야그러니까 뭐조현병 같은 거 말이야.”
글쎄뭐 그랬을지도 모르지.”


유원은 인규의 다급한 물음에 건조하게 답했다정신병이었나그래인규의 말대로 조현병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그런데그것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병이라고 이름 짓는다 해서 그것을 온통 거짓으로 치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적어도 필립의 눈동자를 기억한다면.

 

그 말을 내뱉은 인규는 혼란에 휩싸인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그저 유원의 맞은 편에 앉은 채로 갈 곳 없는 시선을 공중에 부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침묵이 그들 주위를 에워쌌다멀리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이들의 말소리가 이따금 타고 넘어왔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유원은 넋이 나간 듯 앉아있는 그를 보다가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인규가 입을 연 건 그로부터 십여 분이 지나간 후였다.

 

있잖아사실걔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그는 어딘가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과거의 한 장면을 회상하듯 인규의 눈동자는 허공을 맴돌았다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던 그는 체념 같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혹시 이 세상이 가짜면그러니까 만약 꿈처럼 환상 같은 거라면그러면 넌 어떡할 거냐고.”

?”

 

벼락같은 말에 눈을 떴다환상환상이라고그 순간 글에 있던 마지막 문장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니까 어쩌면걔는 자기가 환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었을까그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심장이 온몸을 울려댔다이 떨림은 두려움일까아니면 고양감일까기어코 필립의 진실을 알아냈다는 생각은 잠시였다사실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었다아니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거울을 들여다보던 필립의 모습과 태연하게 거짓을 내뱉던 그의 눈빛들도 모두외면하고 있었을 뿐.

 

일단일단 알았어알겠으니까나중에 더 말해.”

 

유원은 도망치듯 카페를 나섰다뒤에서 인규가 무언가를 제게 외쳐대는 듯했으나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웅웅 거리는 심장 박동이 온몸에서 울려대고 있었다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아무런 소음도 그에게 닿지 못할 듯했다그러니까 정말로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듯이.

 

-

 

유원은 비릿한 숨을 들이켰다더 이상 토해낼 것이 없어 위액까지 토해낸 탓이었다주저앉은 화장실 타일에서 찬기가 올라와 뜨겁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식혔다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그는 비틀거리며 침대로 다가가 늘어졌다눈가를 적시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멈출 수 없이 솟구치는 격한 감정도떨리는 숨도 전부눈을 감았다결코 잠들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어느새 어둠으로 끌려들어 갔다.

 

모르겠어모르겠다고.’

 

제 앞에 앉아있던 필립이 느닷없이 말했다이 또한 그 어느 날의 기억이었다그리 오래되지도 이르지도 않은 기억창문 사이로 옅게 들어오는 바람침잠한 눈빛 속에 일렁이던 감정들꿈속의 나는 펄럭거리는 문제집을 성의 없이 넘기고 있는 참이었다그래필립은 부정하는 사람이었다그의 대답은 대부분 모르겠다와 그렇지 않다를 맴돌았다그럼 자신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대체 뭐라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늘 똑같았다.

 

지겨워.’

뭐가사는 거?’

아니그냥.’

전부?’

모르겠어.’

 

기억 속 자신은 언제나 그런 모호한 대답을 내놓은 필립을 보며 피식 웃었다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하면서물론 그게 그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지만.

 

배유원

?’

넌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아.’

 

자신의 웃음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던 필립은 어딘가 꺼림칙한 말투로 말했다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마주 보았다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여전히 변함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오늘 공부는 글렀구나 싶은 마음에 책상에 늘어지듯 엎드렸다식지 않는 여름의 열기가 공기를 맴돌았다.

 

글쎄 좀 슬프고 외롭고 뭐그러겠지.’

그 뿐이야?’

 

눈을 감고 있어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전과 다르지 않은 얼굴일테라 생각했다나는 조금 어이없다는 생각에 웃으며 답했다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정하고 싶지 않았다그것도 죽음이라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자신에게는 그런 말들은 결국 허무맹랑한 것이었기에.

 

그뿐이라니슬퍼하면 된 거 아냐?’

아니그런 거 말고.’

 

말을 흐리는 필립의 모습을 끝으로 꿈은 멀어져갔다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보려 했지만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현실 같던 감각이 한순간에 전부 물러나고 어느덧 낯선 감각이 물씬 찾아왔다나는 터져 나오는 숨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헐떡여 댔다어느덧 밤이 찾아온 것인지 방 안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컴컴했다침대 위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컴컴한 어둠 사이로 희미하게 필립의 모습이 아른거렸다조금 전 꿈속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필립의 눈동자는 언제나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듯 침잠해 있었다마치 빛조차 그의 망막에 닿지 못할 듯이새까만 눈동자는 무언가를 향해 있었지만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어쩌면 실제로 필립은아니 따지자면 단 한 번도 무언가를 바라본 적이 없을지도 몰랐다그가 말했듯 한평생을 환상에 취해있었기에.

 

그러니까 어쩌면걔는 자기가 환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 거 아니었을까.’

 

환상그래환상익숙해지지 않는 그 단어를 수십 번 입 안에서 굴렸다그러니까 넌환상에 살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바보 같이나는 인규의 말을 들은 순간 생각했다차라리 네가 환상을 증명했으면 했다고환상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진실이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다고도무지 현실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것이그랬다면 나는 틀림없이 널 믿었겠지조잡한 신념 따위라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거라고그러나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꿈에서 깨어나자남은 건 흐릿한 주절거림과 거짓된 기억뿐이었기에.

 

다만 상처 입은 현실을 마주하는 건 결국 필립이 아니라 나였다현실은 환상이 되어 그에게 펼쳐져 있었으니남은 건 거짓된 현실뿐이었다부질없고 바보같은 진실이이걸 과연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자신은 평생 이곳에 갇혀 살아가야 할 테였다필립이 말한 환상 속에 취해 살지도 죽지도 못할 인생이었다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자신에겐 죽을 용기도 살아갈 용기도 없는데도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알 수 없었다삶에는 본래 이유란 없고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몸을 들어 올렸다비틀거리는 다리를 옮겨 방 한구석에 놓인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몸을 숙여 거울을 마주 보았다소설 속 그 남자처럼아니 필립이 바라왔던 그 모습으로.

 

필립의 눈동자를 생각한다언제나 허공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세상을 꿰뚫을 듯 치켜뜨던 그 눈빛을그러나 나는 이제서야 생각한다그 눈빛은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고저 먼 존재하지 않는 진실된 세계그러나 그에게는 단 하나뿐인 실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라고.

 

거울 속엔 익숙하고도 낯선 형체가 드리워져 있었다그 안은 이곳과 마찬가지로 빛이 새어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었다익숙한 생김새를 띈 그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렇게 아주 한참이고침묵이 몸을 타고 잠식되어 갈 때까지.

 

하하.”

 

흐릿한 경계를 바라보다가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멈출 수 없는 웃음이었다그 어느 날 필립의 모습처럼덧없이 내뱉는 웃음이었다살아있다는 감각 사이로 기시감이 한껏 차올랐다환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더 이상 현실과 몽상을 구별할 수 없었고구별해서도 안 되었다.

 

숨을 들이켰다보이지 않는 세상이 태어나고 있었다.

씁쓸하고도 무모한 문장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눈을 감았다.

죽지 못할 환상에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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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벽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끝까지 쓰는 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올리기 직전까지 고민했는데 그래도 멘토링을 받는 게 더 낫겠지 싶어서 올려봤습니다.

    • 2026-05-30 15:45:18
    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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