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보다
- 작성자 말라차
- 작성일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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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오는 친구들 사이에서 늘 농담을 던지고 분위기를 이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게 준오의 역할이다. 그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준오는 어릴 때부터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역할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분위기를 빠르게 파악하며 언제나 나서서 사람들을 챙겨주었다. 하지만 이 행동 뒤에는 준오의 압박이 숨겨져있었다.
벌써 5년전 일이다. 준오와 가족들은 늘 집안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집은 언제나 준오의 안식처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은 밤공기 속 부드럽게 번져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난 뒤 밤은 차분해졌지만 준오의 마음속은 그러지 못했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리고 방 안 선풍기가 윙윙대며 돌아가던 밤이었다. 준오는 학원 숙제를 끝낸 뒤 책상을 정돈했다. 새로 산 샤프심이 말썽인지 샤프를 끄적일때마다 산산조각났다. 부서진 샤프심들을 모아 쓰레기통 안에 넣었다. 드디어 할 일을 끝낸 것 같아 기지개를 펴려던 중 방문 너머 부모님이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오는 기지개를 펴다말고 방문 앞으로 걸어가 가만히 서서 부모님이 대화하는 소리에 집중했다. 아까보다 더 가까이서 들으니 중얼대는 소리가 아닌 투덜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럼 직장 구하지도 않고 가만히만 있을거야?”
엄마의 목소리였다. 아빠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 것이다. 소리치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아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적이 계속 이어지더니 한숨과 함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들한테 말할거야?”
“생각 좀 해보고”
아빠는 엄마의 질문에 한참동안 뜸을 들였다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준오는 심장이 턱 내려앉았다. 그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직접 보았을때 느낄 충격을 생각하니 방문 앞에 계속 있기가 두려웠다. 준오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눈을 계속 감고있어도 잠이 오질 않았다. 심호흡을 하며 잠에 들길 바랐지만 뒤척임은 이어졌다.
그 날 이후로 집안 분위기는 동굴 속 구석 한 곳처럼 착잡했다. 이때까지 가득했던 온기가 냉기로 느껴졌다. 준오는 이런 집안 분위기가 답답했다. 이런 분위기가 무척 어색했고 예전의 익숙한 온기가 그리웠다. 준오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이 나아질지 한참동안 생각했다.2
세린은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특별히 앞에 나서거나 주목을 끌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세린이 있다는걸 대부분 의식했다. 세린은 누구와 함께 있든 존재가 흐려지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조차 세린의 이름이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늘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의 자리에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세린은 3년 전 그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세린은 언제나 인기녀였다. 긍정적이고 다정한 이미지로 알려져있었고 그 소문들 속 세린은 완벽에 가까웠다. 어릴때부터 세린은 장녀로 동생들을 잘 챙겼다. 동생들을 언제나 웃게해주고 동생들이 슬퍼할때는 같이 슬퍼해주며 공감능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세린은 깊은 내면이 숨겨져있었다.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일이 잦아져 모든 일을 다 자신이 감당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모든 짐이 자신에게 생기는거 같아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동생들이 실수하면 어른들은 세린을 탓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지 못한 채 감당 해야되는 건 세린이었다.
“동생들 똑바로 안보니? 너답지 않게 왜그래”
세린은 자기다운게 어떤건지 정체성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런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이 메스꺼웠다. 당장 겉옷을 입고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이대로 집에만 있다가는 속이 탈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채로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세린은 아까의 상황이 떠올라 머릿속에 분노가 가득했다. 빨리 공원에 도착하길 바라며 다리에 힘을 주어 앞만 보고 걸었다. 바닥에 무엇이 있든 신경도 쓰지 않은채 걷기만 했다. 그랬던 탓인지 발밑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수많은 낙엽들 중 하필 은행을 밟은 것이다.
“아.. 진짜, 왜 꼭 이런 날.”
세린의 마음속에 점차 분노가 차올랐다. 마치 누군가 툭 건들이면 바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세린은 바닥에 떨어져있는 낙엽들을 원망하며 먼 곳에 위치한 물들어진 단풍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붉은 낙엽의 색이 더 분노를 차오르게 만들었다. 그 분노는 눈물로 이어져 세린은 울음을 터뜨렸다. 눈가는 계속 젖어 갔고 닦아내도 계속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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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린은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특별히 앞에 나서거나 주목을 끌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세린이 있다는걸 대부분 의식했다. 세린은 누구와 함께 있든 존재가 흐려지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조차 세린의 이름이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늘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의 자리에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세린은 3년 전 그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세린은 언제나 인기녀였다. 긍정적이고 다정한 이미지로 알려져있었고 그 소문들 속 세린은 완벽에 가까웠다. 어릴때부터 세린은 장녀로 동생들을 잘 챙겼다. 동생들을 언제나 웃게해주고 동생들이 슬퍼할때는 같이 슬퍼해주며 공감능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세린은 깊은 내면이 숨겨져있었다.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일이 잦아져 모든 일을 다 자신이 감당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모든 짐이 자신에게 생기는거 같아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동생들이 실수하면 어른들은 세린을 탓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지 못한 채 감당 해야되는 건 세린이었다.
“동생들 똑바로 안보니? 너답지 않게 왜그래”
세린은 자기다운게 어떤건지 정체성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런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이 메스꺼웠다. 당장 겉옷을 입고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구겨 신은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이대로 집에만 있다가는 속이 탈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채로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세린은 아까의 상황이 떠올라 머릿속에 분노가 가득했다. 빨리 공원에 도착하길 바라며 다리에 힘을 주어 앞만 보고 걸었다. 바닥에 무엇이 있든 신경도 쓰지 않은채 걷기만 했다. 그랬던 탓인지 발밑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수많은 낙엽들 중 하필 은행을 밟은 것이다.
“아.. 진짜, 왜 꼭 이런 날.”
세린의 마음속에 점차 분노가 차올랐다. 마치 누군가 툭 건들이면 바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세린은 바닥에 떨어져있는 낙엽들을 원망하며 먼 곳에 위치한 물들어진 단풍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붉은 낙엽의 색이 더 분노를 차오르게 만들었다. 그 분노는 눈물로 이어져 세린은 울음을 터뜨렸다. 눈가는 계속 젖어 갔고 닦아내도 계속 흘러내렸다.
3
준오는 집 안에 밝은 분위기가 감돌기를 바랐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준오는 휴식처 같은 편안한 집이 이젠 날서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준오는 학교에서라도 밝게 지내야된다고 스스로 되새겼다. 그렇게 5년을 버텨왔고 이때까지 자신의 밝은 이미지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준오는 학교에서 이 일을 잊기로 했다. 한참 지난 일인데도 지루한 미술 수업을 들을 때 문득 집이 준오 머릿속을 스쳤지만 준오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그런 생각을 잊도록 했다.
쉬는시간 종이 치고 준오는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이 지루하고 따분한 미술실을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다. 미술실을 나와 모퉁이를 도는데 뒤에서 누군가 준오의 어깨를 탁 잡았다.
“야 같이 좀 가자, 같이.”
건희가 헐레벌떡 달려와 웃으면서 말했다. 준오는 반 친구들과 거의 두루 친했지만 유독 건희와 친했다. 모난 부분이 없고 인기가 꽤 있으며 활동적인 걸 좋아했다. 건희는 특별히 튀는 얼굴은 아니지만 무표정일 때 인상이 더 강했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마른 편 보다는 보통 체형에 속했다. 어깨선이 반듯해 교복 입었을 때 유독 더 깔끔해보였다.
“빨리 좀 오지 그랬냐”
준오는 웃으며 건희에게 장난을 쳤다. 건희가 장난으로 주먹을 치는 시늉을 하자 준오는 손바닥을 보이며 건희의 손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미술시간에 쓴 4b 연필이 손에 온 군데 다 묻어있었다. 손이 하도 시커메서 잿더미를 만진 것 같았다. 건희는 준오의 손을 보고 웃으며 자신의 손도 보여주었다. 얼른 손 씻으러 가자는 눈빛을 보냈고 둘은 말 없이 웃으며 화장실로 갔다.
“와 그 손으로 아까 내 어깨 만진거냐”
“당연히 털었지”
준오는 건희의 센스가 좋다는 걸 항상 느낀다.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 않는 선에서 유쾌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화장실을 나와 준오와 건희는 미술실쪽으로 복도를 걸어다녔다. 식수대를 지나쳐 모퉁이를 돌던 순간이었다.
준오의 어깨에 가벼운 충격이 느껴졌고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미안, 괜찮아?”
준오는 바로 말이 먼저 나갔다. 부딪힌 여자애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준오와 눈을 맞추었다. 준오는 누군지 한 번에 알아차렸다. 명찰 위에 ‘한세린’ 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명찰 없이도 알 수 있었다. 세린은 그만큼 학교에서 유명했고 여리여리한 체형을 갖고 있으며 피부는 새하얗고 눈은 세린의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듯했다. 화장을 했는지 속눈썹이 바짝 올라가있었다.
“응 괜찮아”
세린은 준오를 쳐다보며 멍을 때리다가 자리를 벗어났다.
4
세린의 머릿속은 아직도 3년 전 그 일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펑펑 울어버린 다음날 눈이 퉁퉁 부은채로 학교에 갔다. 화장은 원래처럼 하고 갔지만 시선이 눈쪽으로 가지 않도록 안경을 쓰고 갔다. 친구들이 몰려와 뭐라고 웅성대면 어떡하나 걱정이 먼저 들었다. 세린은 계속 신경이 쓰여 스탠드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계속 확인했다. 1교시 수업때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대로 지나갔다. 분명 사회 수업을 들었는데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기가 들어오려다 다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풍선 바람이 슉 하고 빠지는 것처럼, 세린의 마음도 그랬다. 목이 턱 막혀와 가방에서 챙겨온 텀블러를 꺼내 한모금 들이켰다. 수분이 몸 안으로 전달하는게 느껴졌다.
“한세린”
채윤이었다. 채윤은 전부터 내가 힘들어서 혼자 있을 때마다 먼저 달려와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내 심정이 어떤지 단번에 파악했다. 세린은 그게 참 신기했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데 심정을 어떻게 다 아는건지 매번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거나 웃으며 표정으로 위로해주었다. 근데 채윤은 왠지 그런 눈빛도,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단단히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뭔가 곧 폭발 하려고 하는 듯 했다.
“나와봐”
채윤은 세린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채윤의 손에서 무언가 열기가 느껴졌다. 단단히 열받는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세린은 혈관속에서 불안함이 맥박쳤지만 속으로 심호흡하며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왜?”
세린이 물었다. 채윤이 평소 같지 않다는 건 이미 눈치챈지 오래였다. 채윤이 한숨을 쉬더니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지금 밖에서 무슨 말이 도는지 알아?”
“왜 그러는데?”
“어젯밤에 네가 공원에서 혼자 있는 걸 누가 봤대. 처음엔 그냥 혼자 울고 있다는 말로 시작됐어. 그런데 갈 수록 애들이 이야기를 덧붙이더니 혼자 가출해서 집없이 사는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고있어”
세린은 무언가 쿵 내려앉았다. 물을 마셨는데도 아까보다 더 목이 매었다.
“저렇게 떠들고 다니는 애들 보니까 진짜 속이 타들어갈 것 같더라, 겨우 참았어. 그래서 그날 밤 무슨일이 있었던거야? 정리가 안 되어도 괜찮으니까 말 해봐.”
채윤은 아까보다 누그러진 표정으로 물었다.
“엄마랑 싸웠어. 동생들 안 챙기고 뭐하냐고, 엄마는 항상 나한테만 그러더라”
세린은 고개를 숙인채 말을 꺼냈다. 채윤은 말없이 세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밤늦게 혼자 있었던거야?”
“그냥 혼자 이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다가 울었어. 근데 그걸 누가 봤다며, 어떻게 본거지? 애들이 날 안 좋게 생각할 것 같아.”
둘은 아무말도 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세린은 온통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뒤섞였다. 지금 무슨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린은 자신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가 박힌 것 같아 불안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네 마음이 중요하지 넌 괜찮은 거야?”
채윤은 세린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세린은 채윤과 눈을 맞추더니 곧바로 시선을 바닥으로 옮겼다.
“사실 밝은채로 지내는게 너무 힘들어 이런 일 있고 학교에서 밝게 지낼 수 있을까? 애들이 이상하게 볼게 뻔하고 또..”
채윤은 세린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애들 생각하지 말랬지. 꼭 밝은채로 안 지내도 돼. 힘들면 힘들다고 해도 되고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너 그러다 정말 병 나.”
세린은 채윤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는 것 같아 덜컥 눈물이 나왔다. 세린은 채윤의 품에 안겨 참았던 감정을 마저 토로했다.
다음 날 세린은 복도에 걸어 다닐 때마다 시선을 아래로 고정시킨 채로 다녔다. 주변 친구들이 자신을 안좋게 보는 걸 생각하니 도저히 정면을 보고 걸을 수가 없었다. 채윤은 세린에게 괜찮다며 매번 용기를 주었지만 쉽지 않았다. 세린의 소문은 점차 잠잠해지지 않았고 주눅들며 지내도 학교 소문에 의해 강제로 유명해졌다. 세린은 점점 자신감을 잃은 채 존재감은 자신감과 반대로 이어졌다. 그 일이 있고 3년이 지난 지금, 전보단 점차 나아졌지만 완전히 밝고 활기찬 상태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세린은 힘든 일이 생길때면 문득 그 때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떠올릴때마다 속이 메스꺼워서 속을 올릴 것 같았다.
쉬는시간 종이 치고 세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기할 때 손에 묻은 형광펜을 지우러 화장실로 갔다. 세린은 자신의 손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걸었다. 정신이 비몽사몽 해, 옆에 누가 지나가든 신경 조차 쓰지않고 말이다. 그 바람에 세린은 걸어가다 누구와 부딪히게 된다. 세린은 깜짝 놀라 순간 눈알이 튀어나갈뻔했다.
“미안, 괜찮아?”
처음 보는 남자애였다. 순간 세린은 가슴이 뛰었다. 복도를 돌아다니면서 누구를 이렇게 뚜렷하게 본 적이 있었나, 피부는 새하얗고 짙은 눈썹에 속쌍꺼풀이 있었다. 교복 셔츠 단추는 맨 위쪽만 풀어 느슨하게 했고 소매가 걷어져있어 개방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 남자애는 너무 당황스러웠는지 눈을 세 번이나 깜박거렸다.
“응 괜찮아”
세린은 조금 간격을 뒀다가 대답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곧바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세린은 명찰을 보고 이름을 알아두려했지만 그 아이의 옷에 명찰이 달려 있지 않았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볼까 그랬다가 내가 안하던 짓을 한다는 둥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어떡하지, 세린은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앞에 서있는 그 남자애를 빤히 바라보다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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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오는 괜찮다는 세린의 대답을 들었는데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세린은 자신을 알긴 할까, 당연히 처음 보는 애겠지 생각했다. 그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세린이 떠올랐다. 준오는 전부터 세린에게 말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해왔었다. 인기가 워낙 많고 유명한 탓에 세린이 어떤 앤지 궁금했다. 준오는 쉬는시간에 복도를 돌아다니며 세린을 찾았다. 자신이 못볼까 싶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다녔다. 그렇게 돌아다녔지만 세린은 3교시 쉬는시간까지 보이지 않았다. 준오는 돌아다니다 지쳐 반으로 돌아왔다. 밤을 새운것도 아닌데 살짝 눈 밑이 퀭해져있었다.
“대체 어디 갔다오냐? 쉬는시간마다 어딜 가는거야.”
이상하다 싶은 표정으로 건희가 물었다.
“아까 마주친 한세린 있잖아 원래 밖에 잘 안나오나?”
준오는 허공을 보며 말했다. 새빠지게 찾아다녔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다. 마주치게 된다면 자연스레 말을 걸어보려던 참인데 쥐구멍에라도 숨은 모양이었다.
“뭐야, 이때까지 걔 찾으러 갔던거야? 점심시간엔 나오겠지”
건희 말 대로 점심시간엔 나올 것이다. 준오는 세린의 핸드크림을 손에 쥐며 점심시간에는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준오는 아까 부딪힐 때 떨어뜨린 세린의 핸드크림을 아직까지 돌려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찾고 있으려나, 마주치지를 않으니 더 찝찝했다. 그래도 세린이 핸드크림을 떨어뜨리고 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준오는 세린과 전부터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도 유명해서 어떤 아이인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모르는 애가 말 걸면 세린의 입장에선 당황스러울게 분명하다. 준오는 뚜껑을 열고 어떤 향인지 맡아보았다. 아까 부딪힐 때 세린한테서 났던 향이 났다. 체리향과 비슷하니 여자 애들이 많이 쓸 법한 향이었다. 세린과 잘 어울렸다.
준오는 반 친구들과 여럿이서 점심을 먹으러 내려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복도는 북적북적했다. 마치 만남의 광장 같았다. 이렇게나 시끄러운데 수업시간엔 어떻게 그렇게 조용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계단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복도 끝에서 세린이 걸어오고 있는게 보였다. 준오는 아까 세린을 바쁘게 찾았던 때처럼 눈동자를 바삐 굴렸다. 자신의 친구들과 세린을 번갈아보았다. 이 많은 친구들을 데리고 세린에게 가까이 가는 게 쉽지 않아보였다. 준오는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친구들과 대화하며 잠시 멈춘채로 있다가 천천히 걸었다. 눈으로는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서 머리로는 세린이 어디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 덕에 세린의 바로 뒤에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준오는 세린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야 저번에 축구 내 실력 인정 해줄만 하지 않냐”
친구들은 축구 이야기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준오는 웃으며 반응만 하다가 세린에게 말 걸 기회를 엿보았다. 바로 앞에 세린이 서있었다. 준오는 세린의 어깨를 톡톡 치며 세린을 불렀다. 세린은 눈이 동그래진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준오가 맡은 핸드크림의 향이 여전히 세린에게 느껴졌다.
6
세린은 화장실로 들어가 손에 묻은 형광펜을 물로 씻고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애를 지나친지 한참 됐는데도 심장이 계속 뛰었다. 처음 본 누군가가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말 건적이 오랜만이라 그런지, 외적인 면에서 자신의 취향이라서 그런지, 세린은 이런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데 자신이 말을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에 놀라웠다. 세린은 만일 그 아이가 명찰을 달고 있었더라면 분명히 말을 걸었을거다. 아쉬운 탓에 수업시간에도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음에 마주칠 수나 있을까, 세린은 기회를 놓친 것 같아 허무하기도 했다.
세린은 쉬는시간에 평소와 다름없이 영어숙제를 하고 있었다. 용건이나 다른 일이 없으면 밖에 잘 나가지 않고 교실에 있었다.
“숙제야?”
미진이 세린의 앞자리에 앉아 물었다. 평소 미진은 적극적이고 대화도 잘 이끄는 편이었다. 첫인상이 차가워 처음엔 다들 미진을 무서워했지만 인상과 다르게 따뜻한 친구였다.
“응, 아까 해야되는데 깜빡해서”
“아 맞다 너 핸드크림 있어? 손 씻고왔는데 건조해서.”
미진은 물 묻은 자신의 손을 먹색 교복 치마에 닦으며 물었다.
“아 있지, 내가 자주 쓰는거 있는데 너도 써볼래?”
세린은 자신의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냈다. 파우치를 뒤적거리며 찾는데 핸드크림이 보이지 않았다. 파우치 말고 놔둘 데가 없는데 여기 없는게 이상했다.
“뭐지 잃어버렸나, 없어졌어”
“복도에 어디 떨어뜨린거 아니야?”
세린은 그렇게 잘 흘리고 다니는 애가 아니었다. 다른거 활동을 하다 떨어진걸까 순간 그 남자애와 부딪힌 상황이 세린의 머릿속에 스쳤다. 그 순간 떨어뜨린걸까 그 남자애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린은 그 아이와 우연히 마주치길 바랐다.
점심시간이었다. 채윤은 빨리 가자며 세린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하여간, 먹는거에는 진심이라니까”
세린은 웃으며 채윤과 계단쪽으로 걸어갔다. 순간 건너편에서 아까 부딪힌 그 아이가 보였다. 말을 걸까했지만 복도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무리였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에도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학교에서 대피훈련을 하는 수준이었다. 세린은 줄만 섰을뿐인데 하루 체력을 다 쓴 것 같았다. 멍때리며 서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건너편에 서있던 그 아이였다. 친구들과 축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린은 눈은 정면을 응시했지만 귀로는 뒤에서 들리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기”
뒤에서 누가 세린의 어꺠를 톡톡 쳤다. 세린은 놀라 어꺠를 움찔했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말 걸어주길 기다렸던 그 남자애가 세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7
준오는 세린의 눈을 또렷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 나랑 부딪혔을때 너 이거 떨어뜨린 것 같던데”
세린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준오의 얼굴을 바라보다 몇초뒤에 핸드크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손이 좀 건조해서 찾았는데 어쩐지 없더라”
세린의 표정에 안도감이 묻어났다. 준오는 좀 전에 세린이 돌아보았을때 느껴졌던 향이 아직도 생각났다. 준오는 핸드크림 뚜껑을 열고 손에 바르는 세린을 보았다. 둘 사이엔 편안한 정적이 흘렀다.
“고마워, 떨어뜨린 거 기억해주고 나한테 갖다줬네.”
세린은 준오를 보며 눈웃음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준오는 세린의 이런 눈웃음을 본 건 처음이었다. 세린은 항상 감추려고 하는 모습과 무표정으로 인해 어두운 느낌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에게 짓는 눈웃음은 특별하다고 느꼈다.
“혹시 이름이 뭐야? 저번부터 물어보고 싶었어.”
세린이 물었다. 자신의 이름을 당연히 모를 거라는 것을 준오는 알고 있었다. 준오는 세린과 달리 평범했고 명찰을 교복에 달아도 자꾸 떨어지는 바람에 명찰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명찰 없다고 불려가는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준오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명찰을 세린에게 건넸다. “이준오야 2학년 7반, 너는?” 세린은 고개를 들어 준오와 눈을 마주보았다. 준오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세린의 이름을 알면서도 대답을 듣고싶어 의도적으로 말했다.
8
세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 아이와 우연히 마주치길 바랐고 먼저 말을 걸어주길 원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드라마 속 대본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이런 상황이 생기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세린은 자신에게 무슨 운이라도 씌인 줄 알았다.
“아까 나랑 부딪혔을 때 너 이거 떨어뜨린 것 같던데”
그 아이는 먼저 말을 걸었다. 세린은 자신이 먼저 말을 걸어보고도 싶었지만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 용기를 가지기 전에 그 아이가 먼저 다가왔다. 세린은 그 아이를 볼 때마다 긴장을 느꼈다. 그 바람에 말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세린은 준오의 새하얀 피부와 짙은 눈썹이 유독 눈에 띄었다. 넋놓고 바라보느라 세린은 항상 대답하는 속도가 느렸다. 이번에도 그랬다. 세린은 얼른 시선을 그 아이가 내민 핸드크림으로 옮겼다. 떨어뜨린 게 맞았구나, 세린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편안한 정적을 깨고 세린이 입을 열었다.
“아 어쩐지 없더라. 고마워, 떨어뜨린 거 기억해주고 나한테 갖다줬네.”
세린은 그 아이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눈웃음을 짓자 그 아이의 눈이 커지고 살짝 흔들리는 걸 세린은 느낄 수 있었다. 세린의 웃음이 어느 정도 그 아이에게 반응을 일으켰다. 세린은 자신에게 조금 더 용기를 내었다.
“혹시 이름이 뭐야?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어”
그 아이는 세린의 말을 듣고 눈은 세린을 고정 한 채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무언가를 건넸다.
“이준오야 2학년 7반, 너는?”
세린은 받은 명찰과 준오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준오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걸 표현 한 것 같아 아까보다 가슴이 더 뛰었다. 세린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한세린이야 2학년 4반”
세린은 급식줄을 서고 있다는 것도 잠시 잊었다. 움직이지 않던 대기줄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대화하려면 준오가 세린을 여러 번 뒤돌아보아야했다. 준오는 세린의 옆에 서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세린, 기억할게.”
준오는 세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세린은 준오를 가만히 바라보다 눈웃음을 지었다. 준오의 또렷한 눈빛에 세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약하게 화끈거리는 걸 세린은 느낄 수 있었다.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준오는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뭐야 핸드크림 진짜 잃어버린 거였네!” 채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린이 잃어버릴 거라곤 생각 하지 못한 모양이다. “어 그러게, 설마했는데 진짜였네” 세린은 준오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5교시 수업은 과학이었다. 세린은 필기하다가 괜히 볼펜을 똑닥거렸다. 교과서에 쓸데없는 낙서를 하기도 했다. 준오의 또렷한 눈빛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칠판에 적혀있는 글을 읽었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채윤이 일어서며 물었다.
“나 손 씻으러 갈건데 갈래?”
세린은 채윤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사실 채윤이 물어보기 전에 이미 복도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채윤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준오를 보려는 핑계로 복도를 돌아다니려고 했다. 원래라면 반을 벗어나지 않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세린은 채윤과 이야기 하며 걸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준오를 찾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세린은 내심 서운했다. 평소에 복도에 자주 있었는데 자신이 찾을 때만 없는 것 같았다.
“야 너 내 말 듣고있어?”
채윤은 세린을 보며 이상함을 감지했다. 원래라면 눈도 잘 마주치고 반응도 잘 늦지 않는데 전보다 반응하는 속도가 느렸다.
“..응, 듣고있지”
채윤이 보는 세린은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게 분명했다. 세린은 생각이 많아질 때면 항상 허공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있곤 한다. 지금 바로 물어본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려주진 않을 것이다.
세린은 준오에게 왠지 모를 서운함만 남긴 채 반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서 스탠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자신이 요즘 생각이 많아진다는 걸 이제야 꺠달았다. 세린은 원래 복잡한 생각을 많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준오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질 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감정기복이 자주 생긴다는 걸 세린은 느낄 수 있었다.
9
준오는 세린의 옆에 서서 이름을 기억 하겠다는 말을 한 뒤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세린이 짓던 눈웃음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야 이준오 아까 뭐냐, 한세린이랑.”
“준오야 연애하냐, 우리한텐 말도 안 하고?”
준오의 예상대로 친구들은 한껏 들떠있었다. 준오뿐만이 아니라 다른 남자애 중에서도 여자와 장난 치거나 웃기만 하면 바로 몰아가는 게 그들의 특징이었다. 준오는 자신과 세린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친구들이 쳐다보며 웅성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다 얘들아, 밥 먹자 밥.”
준오는 웃으며 친구들을 진정 시켰다. 식판을 받고 움직일 때도, 친구들과 마주보고 떠들면서 밥을 먹을 때도 세린이 의식 되었다. 준오는 세린을 곁눈질로 흘끔흘끔 보았다. 세린은 친구와 마주보고 앉아 식판과 친구를 번갈아가며 밥을 먹고 있었다. 준오는 자신의 눈길이 티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친구들과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급식실에 나온 후 준오는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경기 할 때 팀워크를 위해 패스를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여러명이서 돌아가며 공을 발로 구르고 원하는 사람에게 패스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해가 얼굴을 다 태우는 방향으로 들어와 단체로 얼굴을 찡그린 채로 연습했다. 준오는 땡볕에 오래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축구를 위해서라면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오래 서있던 도중 드디어 바람이 불어왔다. 준오는 자신의 땀방울을 날릴 수 있어 후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옆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준오의 머리를 흩날려 계속 머리를 넘기며 움직여야했다. 지금 이 순간에는 팀워크와 공에만 집중했다.
축구에 너무 집중한 탓인지 5교시 수업시간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몸에 진이 빠져 머리가 멍해졌다. 준오는 순간적으로 세린이 떠올랐다. 쉬는시간이 되면 마주칠 수 있을까, 찾아가는 건 너무 무리인 것 같다고 느꼈다. 우연히 마주치면 자연스레 말을 거는 게 나았다.
수업시간이 끝나자마자 남자애들이 반에서 우르르 나갔다. 준오는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 앉아 복도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반 친구들이 6반인 동현과 같이 반 앞에서 준오를 불렀다.
“이준오, 우리가 동현이 데리고 왔어 얘도 같이 나가자”
친구들이 아까 반에 들어가며 다음 시간엔 다른반 애도 불러볼까 라는 말을 하긴 했었다. 준오는 그냥 맞장구 치며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런데 그 말대로 진짜 데리고 온 것이다. 세린과 자연스럽게 마주치기 위해 복도를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준오는 웃으며 복도를 나갔고 친구들은 준오를 둘러싸고 단체로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5교시 쉬는시간은 아쉬움만 남긴 채 끝이 났다. 단체로 축구를 하고 올라와 흥미는 있었지만 넋이 나간 상태였다.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의도적으로 세린을 찾아가는 건 괜히 부담을 주는 것 같았다. 같은반이 아니라 이야기 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아쉬웠다. 준오는 다음 쉬는시간에 괜히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준오는 평소 가던 음악실에 들어가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살짝씩 건드려보았다. 가끔 친구들이 준오의 연주를 듣고 싶다며 점심시간때 친구들과 함께 가곤 했다.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을 그토록 열심히 다녀서 그런지 실력이 아직 살아있었다. 준오는 건반을 눌러보며 친구들과 같이 있던 그 때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쑥스럽지만 웃음을 멈출 줄 몰랐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음악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준오는 순간 눈이 동그래졌다. 세린이 친구와 함께 이야기 하며 안으로 들어오는데 준오와 눈이 마주쳤다. 준오와 세린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놀라서 눈이 커진 건 세린도 마찬가지였다. 세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에 걔네. 점심시간에.”
“내 이름 기억 못하는 거 아니지?”
준오는 살짝 장난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아니지, 이준오잖아. 7반 이준오. 나 너 반까지 기억하고 있어.”
세린은 얼른 자신을 칭찬하라는 듯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너 기억해. 3반 한세린.”
준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세린도 준오를 따라 웃었다. 그러고는 준오 앞에 놓여있는 피아노로 시선을 옮겼다.
“피아노 치고 있었어?”
“응, 쉬는시간에 자주 치러 와”
“오 너 피아노 잘 치나 보다”
세린이 조금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학원 다녔거든, 지금은 안 다니긴 하는데 그래도 어느 정돈 칠 수 있어.”
준오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건반을 만지작 거리며 대답했다.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세린의 시선이 어색해 주제를 돌렸다.
“너도 피아노 치려고 온 거야?”
“아니, 나 아까 수업때 필통 놔두고 가서”
세린은 언제 필통을 찾았는지 준오에게 보여주듯 필통을 위로 드는 자세를 취했다. 준오는 ‘아’ 라며 입모양으로만 말하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너 그럼 피아노 잘 치겠네? 한 번 보여주면 안 돼?”
세린은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준오는 조금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농담 섞인 투로 말했다.
“내가 치다가 실수해도 그냥 넘겨 알겠지?”
세린은 말없이 풋 하고 웃으며 얼른 보여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준오는 바로 건반 위에 손을 올려 잠시 망설이더니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세린은 피아노에 집중하고 있는 준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몰두하는 듯한 표정이었고 자신감이 묻어났다. 평소 다정하고 능글 맞은 준오의 이미지와 다르게 보였다. 저런 재능도 있었구나, 세린은 준오에 대해 더 알게 된 거 같아 좋으면서도 부러웠다. 준오가 연주한 곡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이루마의 곡이다. 마음이 지친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감명을 주는 따뜻한 곡이었다.
“나 이거 알아, ‘이루마의 River flowers in you’ 아니야?”
세린이 물었다. 마음이 벅차올라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잠시 억눌렀다.
“오 뭐야 아는구나, 이게 좀 유명하긴 하지 그래서 일부러 이걸 연주한 거야.”
준오는 세린이 아는 곡이길 바라며 연주했는데 마침 그래서 다행이었다. 음악실엔 준오와 세린 둘뿐이었다. 세린은 처음에 채윤과 같이 이야기 하며 들어왔다. 그런데 채윤은 언제 나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세린이 준오의 연주에 집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 이런 재능도 있었구나 방금 제법이었어.”
세린은 좀 전에 받은 감명에서 곧바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동전의 앞면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 뒷면도 보며 양면성을 인지한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해서 그래.”
준오는 웃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세린이 알고 있던 곡을 연주해 뿌듯하기도 했다.
“너 여기 자주와?”
“예전엔 그랬는데 혼자 온 적은 잘 없어. 친구들이 하도 피아노 쳐달라고 난리를 쳐서 항상 같이 왔었거든”
준오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어 대답했다. 문득 친구들과 함께 음악실에 와서 웃고 떠들던 그 날이 생각났다. 조금 그리워지기도 했다. 복잡한 생각과 고민 없이 행복을 느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몇 번 했었다. 세린은 그 말을 하며 준오가 가라앉은 걸 눈치챘다.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이 유독 쓸쓸해보였다. 둘 사이 침묵이 길어지자 세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에 점심시간때 와 또 피아노 쳐주면 안 돼? 되게 좋은 곡 들어서 다음에도 듣고싶어.” 준오는 뜻밖의 말을 들어 살짝 놀랐다. 그 동안 세린에게 어떻게 다가가야할지 계속 고민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여기서 자주 보면 세린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말고 그냥 내일도 괜찮은데, 내일 어때?”
세린이 주위에 있는 악기들을 이리저리 보다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 서로가 서로의 예상을 벗어나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내일 올게.”
세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준오와 세린은 웃음을 티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말아넣었다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린이 먼저 나가고 난 뒤 준오는 티내지 않으려는 웃음을 다시 꺼내었다.
10
세린은 음악실을 나와 곧바로 채윤을 찾았다. 반에 들어가니 화장을 수정하고 있는 채윤이 보였다. 자리에 앉아 한 손에는 스탠드 거울을, 한 손에는 애교살 펜슬을 들고 마치 셀카를 찍는 듯 팔을 위로 들어, 고개도 위로 향하고 있었다.
“뭐야 여기 있었네?”
세린이 채윤의 앞자리로 걸어가며 말했다. 오른쪽만 애교살이 채워져있어 눈이 짝짝이처럼 보이는 채윤을 바라보았다.
“그냥, 분위기 보니까 내가 거기 같이 있는 게 이상해서 자리 비켜준거지”
채윤은 반대쪽 애교살을 그리는 도중 세린을 바라보았다. 본인도 둘 사이에 있던 묘한 기류를 눈치챈 듯 보였다.
“도대체 언제 갔대, 난 너가 내 옆에 계속 있는 줄 알았어”
“내가 간 줄도 몰랐으면 대체 얼마나 걔한테 집중한거야”
채윤은 어느정도 둘의 분위기를 인지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었다. 그 순간 세린은 자신이 그만큼 그 상황에 몰입 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준오처럼 세린은 남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문득 나는 무슨 재능이 있나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다음 시간은 미술이었다. 세린은 이동을 해야된다는 게 귀찮았지만 반 친구들과 함께 이동했다.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음악책을 들고 이동하는 준오가 보였다. 음악실은 교실에서 한 층 밑에 있고 미술실은 한 층 위에 있었다. 미술실과 음악실은 두 층이나 차이났다. 준오를 쳐다보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준오의 시선이 위쪽으로 오는 게 느껴졌다. 순간 세린은 고개를 홱 돌렸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자신이 준오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미술실에서는 번호순대로 앉는 게 규칙이었다. 새학기가 된지도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앉아야하는지 의문이었다. 세린은 자리에 앉으며 준오를 보던 상황이 후회됐다. 그냥 피하지말고 눈이 마주치는 대로 계속 볼 걸, 세린은 잠시 엎드려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옆에 있는 은혁에게도 그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색할뿐이었다. 세린은 5년 전에도 은혁과 같은반이었다. 그 때 당시에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교에 세린의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은혁을 멀리했다. 은혁은 세린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럴때마다 세린은 자리를 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번호순대로 앉아야된다니, 세린은 은혁을 보면 마치 굴 속에 숨어야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필 이번 시간에 모둠별로 하는 활동을 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모둠별로 자신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을 잡지로 만들어 소개하는 거였다. 각자 폰으로 검색하던 중 앞에 앉아있는 수민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작품이 괜찮은 거 같아 이걸 보면 금방이라도 여행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거든.” “괜찮은 거 같아. 여기에 선정 이유랑 작품에 대한 설명도 같이 넣으면 될 거 같네.”
옆에 있던 은혁이 수민의 화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에 세린도 맞장구를 치며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세린은 먼저 말을 꺼내야 할 거 같았지만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까말까 타이밍만 간 보고 있었다.
“너 찾았어?”
은혁이 옆으로 슬쩍 고개를 빼며 세린의 폰 화면을 보았다. 세린은 놀라 폰을 자신의 몸 쪽으로 감추었다. 은혁의 표정이 당황스러운 것 같아 세린은 순간 아차 싶었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너무 놀라서 반사적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응. 찾았어.”
세린은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작품을 보여주며 대답했다.
“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인데 뭔가 영화 속 한 장면 같이 느껴져서 인상 깊었다는 걸 적으면 될 거 같아.”
세린은 모둠원 한 명씩 번갈아보며 말을 이었다.
“좋네, 괜찮네”
은혁이 살짝 웃으며 세린의 폰 화면을 보다가 시선을 옮겨 눈을 맞추었다. 세린이 보기에 은혁은 자신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자신은 정작 은혁을 피하기만 했는데 예상과 달리 다가와주는 모습에 살짝 미안함을 느꼈다.
이번 시간은 자신이 정한 작품을 정하고 학습지에 적기만 했다. 다음시간에는 분명히 모둠원과 협력하는 활동을 할 것이라고 세린은 생각했다. 세린은 자신의 과거를 다 알고 있는 은혁이 어쩜 그리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저 놀랄 뿐이었다.
11
준오는 잠깐 망설이다 반 앞에 서서 세린을 불렀다. 세린은 놀랐지만 웃으면서 다가갔다. “오늘도 음악실 올 거야?”
“당연하지, 오늘 간다고 말했는데 벌써 잊었을까봐?” 세린은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준오도 웃으며 세린의 말을 받아쳤다. 세린의 반에 있던 애들 몇몇이 밖으로 나가며 서있는 둘을 보고 웃었다. 세린은 뭔가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복도 좀 돌까?”
세린은 준오의 제안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세린은 웃으며 끄덕였다. 이게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맞는지 자신의 팔을 잠시 꼬집어보곤 했다.
“나 다음 체육인데 뭐 하는지 알아?”
“아마 농구 드리블 연습할걸”
“오 재밌겠는데”
세린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이 커진 채로 준오를 올려다보았다. 세린은 농구를 잘 하는 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드리블을 하는 활동에서도 익숙하지가 않았다. 준오는 그런 세린을 보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친구들이랑 농구도 자주 하거든, 계속 하다보니 재밌던데”
“기대되네”
세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준오가 자세를 낮추었다. 세린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너 농구 잘하는지 궁금해서”
준오가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다음에 하는 거 보러와.”
세린이 준오를 올려다보자 눈이 바로 마주쳤다. 그 말을 하고 잠시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세린은 알 수 있었다. 세린은 놀라 곧바로 정면을 응시했다. 얼굴이 붉어진 걸 준오한테 들킬까봐 고개를 숙였다.
“너 다음 시간 뭐야?”
준오가 화제를 돌렸다.
“나 미술”
세린은 그 말을 하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둠 활동을 하며 은혁과 불편한 상황을 감수 해야된다고 생각하니 좋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준오는 세린의 변화된 표정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미술시간에 뭐 해?”
“우리 모둠활동으로 신문 제작 해야돼, 발표까지 한다는데 대체 모둠으로 왜 하는 건지 모르겠어.”
“모둠원 별로야?”
준오가 물었다. 순간 세린의 표정이 뜨끔했다. 세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텀을 두고 말했다.
“조금? 아니 잘 모르겠어 그냥 그래.”
세린이 바닥을 보며 대답했다. 세린의 모습은 마치 안에 있는 영혼이 점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럼 미술이 좋진 않겠네”
“약간 그런 것 같아.”
준오가 보기에 세린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뭔지 알고 싶었지만 더 물어보기엔 세린이 부담을 느낄까봐 조심스러웠다.
정적이 불편했는지 세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체육 많이 어려워?”
“어떤 거?”
“농구 말이야 지금 드리블 연습하고 있다며 나는 드리블 할 때 자꾸 공을 놓쳐서 뭔가 어렵던데”
“익숙하지 않으면 다 어렵지, 강약 조절이 안 돼서 그럴 거야. 손목에 힘을 주면 더 잘 될걸.”
“오 뭐야 똑똑한데”
세린이 웃으며 반응했다.
“똑똑한 사람한테 농구 배우러와”
준오가 자신 있다는 듯 세린에게 말했다. 어려우면 자신이 알려주겠다는 뜻이었다. 세린은 준오가 농구를 잘 할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좋아하기도 하고 대개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걸 알고있었다.
“생각해볼게.”
세린이 웃으며 장난식으로 받아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은 좋다는 뜻이라는 걸 준오는 표정으로 느꼈다.
세린은 요즘 수업할 때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걸 느꼈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 건 아니다. 준오와의 대화를 곱씹는 것이다. 준오와 대화를 할 때면 자신의 이야기를 고민 없이 잘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걱정 없이 믿고 의지 해도 될 거 같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분 좋게 이야기 하고 다음 수업 시간에 은석과 이야기 해야될 때가 있다. 정말 도망치고 싶지만 조별활동이라 어쩔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이 생길때면 뭔가 판 뒤집기 게임이 생각났다. 준오가 빨간색으로 판을 놔두면 은석이 파란색으로 뒤집는 기분이었다. 신경이 복잡한 채로 있으면 준오가 다시 와서 빨간색으로 뒤집어준다. 세린은 그런 준오에게 고마웠다. 자신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어 답답했다. 빨간색과 파란색 판이 계속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은석은 세린의 옆자리에서 학습지 빈칸을 채우고 있었다. 세린은 은석이 적는 걸 곁눈질로 흘끔 보았다. 은석이 눈치채고 세린의 학습지로 시선을 옮겼다.
“글씨 작게 쓰는 건 여전하네”
은석이 혼잣말인 듯 말했다. 세린은 방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은석을 보았다.
“몇 년전에도 글씨 작게 써서 썜들이 크게 쓰라고 하셨잖아, 물론 장난식으로 하셨지만.”
은석은 세린과 일상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세린은 과거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에 큰 충격으로 인해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만 떠오르게 되었다.
“아 그랬지 지금도 그때처럼 작게 쓰긴해”
세린은 예의상 적당히 받아주었다. 대놓고 선을 긋는 건 세린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랑 변한 게 없냐”
은석은 그냥 가볍게 툭 던지듯 말했다. 하지만 세린은 무겁게 받아졌다.
“뭐가?”
“글씨도 그렇고 그냥 성격?”
“별로 안 좋은 거네”
세린은 어둡게 받아쳤다. 은석은 그 말을 듣고 동공을 왔다갔다하며 뭐라고 반응할지 생각했다.
“그게 왜 안좋아”
“그냥, 그 때 힘들었으니까”
“나한테 무슨 일 있었는지 말 안 해줬잖아”
은석은 조금 서운했다는 듯 말했다. 사실 서운한 게 맞았다. 과거의 은석은 세린과 어떻게든 이야기 해서 풀어나갈 생각이었는데 정작 세린은 피하기만 했다. 자신의 심정을 세린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있었다.
“너가 알면 싫어할거 같아서 그랬지”
세린은 조금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은석과 세린 둘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애들이 자신의 대화를 듣는 게 불편했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여 편하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왜 하는데?”
은석은 이해가 안 되는 듯 하면서도 세린에게 맞추며 자신도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서 말했다. 세린은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될거 같았다. 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학습지 빨리 적자, 우리 모둠이 제일 늦어”
얼른 주제를 돌려 미술 활동에만 집중 하도록 했다. 은석은 그 말을 듣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우개 가루를 손으로 쓸어밀고 펜으로 끄적거릴 뿐이었다.
이제 미술 신문을 절반 정도 제작했다. 완성하면 이제 이 모둠 활동은 끝이난다. 세린은 얼른 끝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쉬는시간 종이 이미 울렸는데도 주변의 어질러진 것들이 너무 많아 치우느라 세린의 모둠이 제일 늦게 나가게 됐다. 세린은 필통과 미술 학습지를 두 팔로 끌어안고 걸어가려했다. 그 사이로 필통이 빠지는 바람에 주우려고 자세를 낮추었다. 은석이 세린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 필통을 주워주었다.
“고마워”
세린은 조심스레 말했다.
“아까 물어봤던 거 지금 대답해봐, 그런 생각은 왜 한 거야?”
은석은 가끔 망설임 없이 말할 때가 있었다. 특히 장난치는 상황이 아니면 더 그랬다. 지금 상황은 세린도 아까처럼 부담이 되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은석은 아까와 달리 목소리가 큰지 작은지 신경쓰지 않았다. 은석에겐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한테 내 상황을 말 할 용기가 안났어.”
세린이 은석의 눈을 보지 못한 채 말했다. 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세린이 말을 더 덧붙이길 기다렸다.
“그 때 내 소문 안 좋게 났었는데 너도 들었지?”
“애들이 다 떠들고 다니더라”
은석은 그렇게 떠들고만 다니는 친구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듣기만 하고 이렇다저렇다 이야기 하는 게 짜증이 났다. 은석은 본인이 믿고 싶은대로만 믿고 행동하는 그런 걸 싫어했다. “그래서 너가 그 이야기 듣고 내가 싫어졌을 거 같아서 뭔가 말을 못 하겠더라” 세린은 이런 상황이 적응 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상황을 피하곤 했다. 매번 그러기만 해서 오히려 피하는 게 익숙한데 은석에게 자신의 생각을 다 말하고 있었다. 세린은 자신이 이렇게 행동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말을 꺼내는 것 조차 두려웠는데 막상 해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은석은 세린의 말을 듣고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발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너가 싫어진 게 아니라 오히려 걱정됐어.”
전부터 하려던 말이었다. 그 말을 하려고 대화를 시도하면 세린은 항상 자리를 피했다. 그 바람에 은석은 계속 하고 싶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은석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들어 세린과 눈을 맞추었다. 은석이 본 세린의 눈은 자신의 예상대로 커져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세린이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세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거였어?”
세린은 은석의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당연히 자신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자신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고마움과 미안함이 함께 몰려들었다. 은석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세린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 상황만큼은 무작정 뭐라도 하기 보단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관심 있는 사람한테 안 좋은 모습이 알려진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쪽팔렸어. 얼굴을 보기도 힘들거 같고 연락도 먼저 못하겠고 그냥 다 어려워”
세린은 은석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에 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런 자신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용기 내서 자신의 마음을 말 한적이 얼마만인가. 세린과 달리 은석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고민 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너한테 왜 걱정 된다고 말 했는지 알아?”
“뭔데?”
“너한테 관심 있었어서.”
세린은 놀라 얼어붙었다. 순간 누군가가 심장을 망치로 쾅 치는 듯 했다. 세린과 은석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은석은 세린이 수줍어하는 행동, 긴장하는 모습 그런 서툰 행동을 보고 살짝 눈치 채긴 했지만 세린은 아니었다. 자신이 했던 행동이 흑역사라고 생각해 밤새 후회하기 바빠 은석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지는 못했다.
“그 때 힘들었던 거 알아 무슨 일이었는지 궁금하지만 강요하지는 않을게.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세린은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은석에게 미안했다. 그런줄도 모르고 세린은 단지 피하기만 했다.
“말 하고 싶어. 그 때 너무 참고만 있어서 마음에 병이 생긴 거 같아 그런데 말 해도 소용이 없었어 오히려 압박만 받았었지.. 그 뒤로 내 생각을 이야기 하기 힘들어졌어.”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세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지냈어 내 이름이 워낙 학교에서 잘 들리기도 하고 애들이 내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 나에 대한 이미지가 잘 알려져있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내 안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닐까봐 겁이 났어 티는 내지 않았고 밝게만 지내면서 다녔는데 부모님이랑 한 번 크게 싸운 적이 있어.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들으면서 말이야, 집에 있기 싫어서 조금 거리가 먼 공원으로 가서 혼자 한참을 울었어 아무도 없는줄 알고, 근데 다음날 학교에 가니까 나에 대한 소문이 다 퍼진 거야 내가 가출해서 집을 나갔다, 남자한테 시련을 당했다 그 말고도 수많은 말들이 나왔지.. 기억도 못할만큼 그렇게 이미지나 소문에 대해 경계하면서 사리고 조심하고 신경쓰면서 다녔는데 상황이 너무 안좋아졌어. 그 뒤로 내 의견을 말 하기도 힘들고 남들 눈치도 더 보게되고 시선도 정면으로 보기 힘들더라”
오른쪽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먹일 때부터 감정을 억눌렀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 때 누군가의 발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세린과 은석은 은근히 그 소리가 거슬려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준오의 뒷모습이 보였다. 세린은 순간 발이 땅으로 꺼지는 줄 알았다. 세린은 멍하니 서있었다. 은석이 세린의 뒤에 서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그렇게 조심하면서 안 숨겨도 돼, 지금도 용기내서 나한테 말 하고 있잖아 오히려 훨씬 낫지 않아?”
세린이 뒤돌아 은석과 마주보았다.
“…그렇네, 말하길 잘한 거 같아”
세린은 손으로 눈물을 말리고 은석은 그런 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12
준오는 체육시간에 농구 드리블을 하며 세린이 한 말을 생각했다. 농구 하는 걸 세린이 본다고 생각하니 살짝 긴장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농구 하는 걸 세린이 우연히라도 봤으면 했다. 준오는 친구들과 농구를 하며 패스도 하고 슛도 넣었다. 레이업 슛은 하기 수월했지만 점프슛은 쉽지 않았다. 골대에 맞긴 했지만 들어가지 않고 튕겨져 나갔다. 준오는 친구들과 농구 경기가 끝나고 남은 시간동안 점프슛을 연습했다.
체육시간이 끝나고 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 때 세린이 모르는 친구와 이야기 하는 걸 보았다. 분위기가 다소 재밌진 않아보였다. 오히려 가라앉아 있었다. 세린의 앞에는 준오가 모르는 남자애가 서있었다. 세린을 바라보는 그 남자애의 표정은 마치 무언가 꺼내고 싶은 이야기를 삼키고 있는 듯 했다. 준오는 계단을 올라가다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걸음을 뒤로해 둘의 대화를 들었다. 죄지은 사람도 아닌데 둘의 대화를 숨어서 듣는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혼자 오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위에서 세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 하고 싶어. 그 때 너무 참고만 있어서 마음에 병이 생긴 거 같아 그 뒤로 내 생각을 이야기 하기 힘들어졌어.”
준오는 순간 지금 이게 무슨 대화인가 싶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린의 모습은 수줍음과 동시에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음에 병이 생겼다니, 준오는 자신의 귓가에 커다란 종소리가 무겁게 울리는 기분이었다. 세린이 말 한 ‘그 때’ 라는 건 어떤 일을 말하는 걸까, 적어도 준오는 세린이 본인처럼 아픈 과거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준오는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아 숨어서 이 대화를 듣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계속 이 자리에 있다가는 너무나도 많은 생각들이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것만 같았다. 세린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여기 있다고 표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큰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랐다. 세린이 돌아봤을까 안봤을까. 50%가 되는 확률을 생각하며 준오는 반으로 들어갔다.
준오도 세린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아픈 경험이 있다. 여태껏 자신의 과거를 용기내서 말해본 적이 없었다. 다들 이해하지 못하고 더 거리를 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준오는 문득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을만한 친구가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머릿속으로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짧은 시간 내에 세린이 떠올랐다. 준오는 내심 세린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겐 잘만 이야기 하는 고민을 자신에겐 털어놓지 못하는걸까 이때까지 조개껍질처럼 열리지 않던 마음이 세린을 알고 난 뒤 활짝 열린 것 같았다.
쉬는시간이 됐을 때에는 준오는 자기도 모르게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민망해 괜히 왼손에 차고있는 메탈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때 뒤에서 누가 준오의 등을 쿡 찔렀다. 준오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디 가?”
세린이었다. 놀란 듯하면서도 반갑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나 교무실 들렀다가 반 가려고”
사실 아니었다. 세린의 대화를 조금 엿듣다가 반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하지도 않은 일을 말하며 자신의 행동을 들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구나”
세린은 바닥을 보며 대답했다. 그 후 다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뜸을 들였다.
“..오늘 학교 마치고 같이 갈래?”
세린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조금 망설였다가 용기내 말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준오는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13
학교를 마치고 준오는 교문 앞에서 세린을 기다렸다. 학교 밖에서 같이 걸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워!”
세린이 준오의 가방을 잡으며 놀래켰다. 준오는 세린인 걸 바로 눈치채고 웃으며 돌아보았다.
“하나도 안 놀랬거든”
“뭐야, 재미없어”
“다음엔 내가 너 놀래켜야겠다”
“아 안 돼, 하면 죽는다? 그러면 나 비명 지를 수도 있어”
“이러니까 더 하고 싶어지는데”
준오는 입을 씰룩거리며 계속 장난을 걸었다. 한 번 유치해져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면 너 고막 조심 해야될 거야.”
세린도 준오와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둘은 신호등 앞에서 초록불로 바뀌길 기다렸다. 습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7월임을 알리는 것 같았다. 주변에는 푸른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며 열기를 진정 시켜주고 있었다. 나무가 많은데도 햇빛은 가려지지 않고 세린의 얼굴에 반사되었다.
“왜 이렇게 덥지”
세린은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말했다. 햇빛 때문에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햇빛이 너무 따가워서 그런가”
준오는 해가 떠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세린의 눈에 오는 햇빛을 가려주었다.
“뭐하는데에”
“눈 부셔 보여서”
세린은 순간 부끄러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에 반해 준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니, 저런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초록불로 바뀌어 신호를 건너며 세린이 말했다.
“난 여름 좋아해서 괜찮아”
“아 여름 좋아해?”
“응, 더운게 좀 짜증나긴 해도 푸르고 밤에 선선한 그런 느낌이 좋아.”
“난 여름 제일 싫던데”
“왜? 여름이 얼마나 좋냐. 뭔가 여름에는 좋은 일 생길 거 같아.”
“난 여름에 제일 안 좋은 일 있었어서.. 그래서 여름 싫어해”
준오는 기분이 조금 가라앉은 상태로 말했다. 어쩌다보니 지난 과거 일이 떠올랐다.
“괜찮아?”
정적이 흐르는 분위기에서 세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준오는 자신의 일에 걱정 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 것 보다 이런 따스한 말이 더 좋았다. 준오는 세린에게 자신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하고 싶었다. 세린이라면 믿고 말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냥 아주 잘나고 멋진 모습보다, 내가 이런 일을 겪었고 이런 사람이다 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둘은 이미 어딘지도 모르는 아파트 안에 들어선 뒤였다. 준오는 바로 앞에 보이는 정자에서 앉아 이야기 하자는 눈짓을 주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앉아 마주보았다. 주변에 서있는 나무들을 요리조리 보다가 정적을 깨고 준오가 입을 뗐다.
“나 사실 과거에 무척 괴로운 일이 있었어. 가정 상황이 좋지 않았거든 아빠가 회사에서 잘리고 다시 취업하는 게 힘들었나봐 부모님은 그 사실을 나한테 숨기려고 하셨어. 근데 방에서 다 들리더라. 그래서 그냥 계속 모르는 척 하면서 생활했어. 그렇게 아픈 사실을 숨기면서 학교에서도 계속 밝은 척 하면서 지내야했어. 학교에서 난 항상 성실하고 매일 미소 짓고 다니는 이미지였거든 친구들한테 그런 일은 하나하나 다 말 하고 싶지 않았어. 그냥 숨긴 채로 애들한테 맞춰주면서 지냈지. 근데 애들도 다 느끼나봐, 내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내가 너무 비밀이 많은 것 같대 내가 자기들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친구들도 전처럼 안 다가오고 점점 서먹해진거 같아. 그리고 그 때가 여름이었거든 여름이 올 때면 항상 그 때의 일이 생각나서 가장 싫어하는 거 같아 제일 괴로워했으니까.”
모든 걸 다 하소연하고 싶지 않은 나머지 준오는 최대한 간략하게 세린에게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린은 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리자 손으로 정돈하며 귀에 걸었다. 그러고는 생각 정리가 다 된 듯 말했다.
“나한테 믿고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사실 너가 학교에서 자주 웃으면서 다니길래 별 고민 없이 잘 다니고 있는 줄 알았어. 친구들이랑 장난치면서 티격대기는 하지만 먼저 손 내밀고 다른 친구들도 잘 챙기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난 너가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네.”
“나도 너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준오의 손이 꼼지락댔다. 자신의 이야기를 동성도 아닌 이성한테 먼저 했다는 게 너무 어색하고 적응이 안 됐다.
“그래서 여름이 싫었구나.. 난 가을이 싫은데”
“무슨 일 있었어?”
“나 사실 너가 알고 있는 그런 애가 아니야. 내 입으로 이런 말 그렇지만 과거에는 내가 유명하고 소문도 자주 나고 전교생중에 모르는 애가 있는 게 이상할 정도였어.”
“너 지금도 유명하지 않아?”
“이미 잘 알려진 상태인거지 유명한 건 아니야. 근데 잘 알려진 게 좀 싫어.”
“무슨 일 있었어?”
준오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세린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은 마음이 커 자신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인지하지 못했다. 세린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나는 소문에 얽매이면서 살았어. 내가 한 행동의 3분의 2는 다 소문으로 퍼졌을 거야. 매일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한 번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고 선생님께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다며 소문이 퍼질 정도였지. 거의 소문에 시달리며 살았어.”
“너 괜찮아?”
준오도 이런 상황은 뜻밖의 일이었다. 마냥 유명하고 잘나가는 줄만 알았던 세린에게서 이러한 고민이 있는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냥 괜찮은 척만 했어. 내가 좋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면 뒤에서 말 나올 게 뻔하니까, 한 번은 부모님이랑 싸워서 집 밖에서 엉엉 울고 있는데 그 다음날 바로 학교 전체에 소문이 다 퍼졌어. 전교생에게 신상이 털린 수준이었지. 그냥 마음이 답답하고 속상해서 혼자 울고 있었던 것 뿐인데 애들 사이에선 가출한 거 아니냐는 둥 사실 숨겨진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차였다는 둥, 귀중품을 도둑 맞았다는 둥.. 어마무시한 말들이 들려왔어. 소문이 하도 나서 그냥 대처하는데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전에는 가벼운 소문들에 불과했어. 이때까지의 소문은 잔물결들이 발을 적시는 정도라면, 사건이 터진 그 일들은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들이 나를 덮쳐오는 느낌이랄까 하나하나 해명하고 대응하기도 힘들어서 그냥 침묵하기로 했지.”
둘 사이 긴 침묵이 이어졌다. 준오는 말 없이 세린을 바라보았고 세린은 주변에 유모차를 끌고 걸어가고 있는 여자를 넋이 나간 채로 보고 있었다. 세린의 눈에는 힘이 실려있지 않았고 유모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준오도 세린의 시선을 따라 유모차가 걸어가는 걸 보고있었다.
“부모님이랑은 뭐 때문에 싸운 거야?”
눈을 마주보고 물어보는 건 세린에게 부담이 될까봐 유모차에게 시선을 두고 물었다.
“동생들 책임이 나에게로 돌려지는 게 너무 싫어서.”
“동생이 있었구나.”
“없는게 나을지도 몰라, 차라리 외동이었으면 좋겠는데.”
“난 형제 남매 상관 없으니까 차라리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너 외동이야?”
“응, 나는 고민 있을 때 부모님에게 말하는 게 망설여져서.. 내 의견도 말하기 눈치 보이고, 누구라도 있으면 나와 대화를 조금이라도 할텐데 말이야.”
“가끔 부모님보다 형제 자매가 편할때가 있지.” 세린은 그 말을 하며 형제가 있다는 것이 꼭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오의 말을 듣고 흥분 되어있던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럼 그때 가을이었던 거야?”
“응 그떄가 아직 생생해. 혼자 걸어가고 있는데 낙엽 밟는 소리가 너무 잘 들렸어. 근데 그 소리조차 짜증이 났었어. 은행을 밟은 것도 아닌데 밟는 소리가 날 떄마다 마치 은행을 밟아서 하루를 다 망쳐버린 느낌이 들었어. 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이번에 가을이 오면 또 그렇게 짜증이 날 거 같아?”
“무슨 말이야?”
세린은 준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신이 아주 조금 몽롱해져버린 탓일까.
“사실 아까 내가 그랬잖아. 여름이 싫었다고, 그래서 나는 매일 여름이 오는 게 조금 두려웠달까. 여름이 올때마다 나에게 불행이 닥쳐올 것만 같았어 그런데 지금 여름이 왔잖아.”
세린은 조금 초조해하며 물었다. 왠지 모르게 준오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계절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지금도 싫어..?”
준오가 잠시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가 세린의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좋은데.”
“다행이다.”
세린은 잠시 긴장했다가 속으로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혈관이 제대로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너 아니었으면 계속 싫어했을 거야.”
“왜?”
“너 좋아하니까.”
14
세린은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부담 됐으면 말고.”
준오가 정적을 끊어줘서 살짝 고마웠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어색함이 이어져 몸이 근질근질할 지경이었다. 그 덕분에 세린은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아니야, 전혀. 그냥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 몸이 굳었나봐.”
“좀 놀라보이긴 했어.”
세린은 여유가 생긴 탓인지 실 웃음이 나왔다.
“나도 이제 가을 좋아해볼게.”
“좋다는 뜻이지?”
“그럼 이게 뭐겠냐.”
세린은 준오의 가슴을 퍽 치며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준오는 아프다며 가슴을 문질렀고 세린은 바라보며 웃음을 참다 폭소를 터뜨렸다. 둘은 정자에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고 꽤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다.
푸른 잎사귀가 핀 벚나무들이 춤을 추며 바람을 일으키고 눈부신 석양들로 온 세상을 물들였다. 세린이 눈살을 찌푸리자 준오가 얼른 손으로 노을빛을 가려주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응, 뭔데?”
“나 저번에 너 미술실 앞에서 우는 거 봤어. 그 날 바로 물어보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안 나와서 물을 기회를 놓쳤네.”
“미술실 앞에서?”
“어떤 남자애랑 같이 있던데 너가 그 애 앞에서 울고 있었어”
그 말을 듣고 세린은 바로 은석이 떠올랐다. 은석과 미술실 앞에서 이야기 할 때 준오와 눈이 마주쳐 등을 돌린 일이 그려졌다. 세린은 자신이 울면서 흐트러지는 모습을 준오가 봤다고 생각하니 약간의 수치스러움이 밀려들었다.
“그걸 봤어?”
“그 날 왜 울었어? 며칠 전부터 궁금했어.”
세린은 조금 망설여졌다. 방금 고백한 사람 앞에서 예전에 서로 좋아했던 사이라고 말 하기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거짓말은 하기 싫었다.
“어..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
“응.”
“사실.. 예전 썸 타던 애야. 서로 좋아했었어. 근데 과거에 소문이 퍼지고 내 이미지가 나락 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멀어졌어. 마주쳐도 피하고.. 그냥 내가 도망 다녔어.”
“서로 좋아했었다고?”
준오는 살짝 신경이 쓰였다. 서로 좋아했었는데 같은 학교라니, 준오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지금은 아니야. 3년 전에 있었던 일이거든. 그냥 좋은 사람이지, 그 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서로 친구로 지내기로 했어. 이제 나랑 관련 있는 사람 아니야.”
“그렇구나”
준오는 무심히 대답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순간 정적이 이어졌다. 준오는 이 정적이 불편해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서로 좋아했었다니.. 조금 질투 나는데.”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지금 걔 신경도 안 써. 오히려 너를 신경쓰지.”
세린은 준오를 안심 시키고 싶었다. 자신 떄문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
준오는 마치 확인 받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물었다.
“너 바보냐.”
세린이 피식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당연히 너 좋아하니까 너를 신경쓰지.”
준오는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둘은 마주보고 어쩔 줄을 모르는 웃음을 지었다.
붉은 석양빛이 나무 사이 구석구석 비춰들었다. 매미들이 무슨일인지 조용하게 맴맴 울어댔다. 그런 매미들은 평소보다 차분해보였다. 둘은 자줏빛으로 물든 하늘처럼 열기가 달아올랐다. 세린은 준오와 이야기하며 가족에 대한 소중함과 자신감을 다시 되찾았고 준오는 부담 되었던 마음을 한 층 덜어내며 사람에 대한 신뢰를 얻었다. 둘은 서로를 통해 자신에 대해 알게 되고 성장 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설렘과 즐거움까지 느꼈다.
“사실 세린이 너가 나한테 조금 숨기는 게 있다고 느껴졌는데 모습을 감추느라 그랬던 거구나.”
“그게 느껴졌어?”
“너가 이름도 잘 알려지고 유명한 애인데, 유독 멀리서 바라보면 자신감이 없어보인다랄까 꼭 조마조마하면서 눈치보는 사람처럼. 그리고 미술 활동 이야기 하면 표정이 안 좋아지더라고”
“다른 애들이 이상한 소문 낼까봐 행동 하나하나 살피게 돼. 그래서 더 조심하게 되고 자신감도 사라졌나봐. 미술 활동 할 때는 같이하는 모둠원이 불편해서 그랬던 것 같아.”
준오가 이렇게 신경 쓰는데 은석 얘기를 꺼내며 사실 그 남자애랑 같은 모둠이야 라고 말하는 건 준오 생각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아 돌려 말하기로 했다.
“나도 과거에 그랬어. 그거 때문에 사람들한테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두려워. 고민도 잘 이야기 안 하게 되고 항상 밝고 재밌는 모습만 보여야겠다고 생각했지. 근데 너한테는 안 그랬던 거 같아”
준오가 이어 말했다.
“그럼 어떤데?”
세린은 두 눈을 깜박거리며 정말로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냥 너한테 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너가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했어.”
“그건 나도야. 너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어” 세
린이 지그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이제 알아가면 되겠네.”
준오가 자신이 센스있게 대답했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세린은 그런 준오가 좋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 데려다줄래?”
“가자”
준오가 세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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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맑은 하늘이 아닌, 칠해진 땅 위를 걷고 있는 걸까요?나는 언제부터 이 길위에 서있던 걸까요? 더이상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스스로에게 날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그렇게 하늘을 보며 날아올랐고가장 높게 날아올랐다고 믿었을 때나는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하늘을 올려보고땅을 내려봐도나는동떨어져있었습니다. 이내 처음으로내 날개를 보았습니다.동경의 상징이던 날개가뼈대만 남아 앙상하게 퍼덕거리고 있었습니다.어쩌면 나는 비상이라 이름 붙였던 추락을 하고 있던 걸까요? 꿈을 꿨습니다. 하늘에 빛나는 태양이 나의 눈을 가리고비상은 가속됐습니다.태양의 열기에눈을 뜹니다.나의 상상대로 태양은 빛났습니다.그러나 태양이나의 날개를 녹입니다.녹아가는 날개가 땅을 향합니다.추락이 끝났습니다.몸을 세워가지각색으로 칠해진 땅을 봅니다.빛나는 색들 속,나는 스스로 버린 무채색 땅으로 돌아갑니다.꿈이 깨어납니다.발을 움직여땅 위를 거닐고색을 칠했습니다.이제야 나는 땅이라 믿었던하늘에 닿았습니다.눈을 떴습니다.하지만 내 날개는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습니다.나는 여전히 버려뒀던 현실에 불타고 있고변화 앞에서 눈을 감고 싶습니다.칠해진 땅에서날개 없이 날던 당신들을 비상 전에 봤다면,나도 조금은햇빛을 쬘 수 있었을까요?다시 날아보겠습니다.이제 날개를 벗고.
- 이제형
- 2026-08-14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본격적인 겨울을 보기 전 어느 날. 그 외로운 달이 하늘 위에 걸린 시간. 그 서리 어리는 숨결에 점. 점. 빠져들아가던 한 밤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수북히 걸터있던 눈송이가 두둑. 선술집 처마에서 내려앉았다. 그녀는 촉촉히 젖은 눈망울을 보이면서도 은은히 빛나였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달 아래로 지나는 칙칙한 새 정도였겠지. 나는 나의 술잔에 술을 조금 따랐다. 그녀는 그녀의 술잔에 공허를 따랐다. 그마저도 조금 마신. 그 모습에 나는 더욱 취하였다. 그녀를 만난 지 3일 째였다. 그 좁은 술잔 위에서 잔물결이 맹렬히 펴져나갔다. 취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사라지고 말 거라는 감상에 젖어있었다. 그녀는 그 옆에서 달무리처럼 가만히 반짝이고 나는 그것에 이유 모를 쓸쓸함을 느낀 듯 하였다. 조곰 달이 보였다. 그러다 곧 희뿌연 구름에 몸을 감추었다. 나는 그것을 아주 오묘히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은 잠기고 그 아름다운 향기를 충실히 느끼었다. 한겨울의 따스한 벚꽃잎은 조금 애절하였다. 그녀는 길을 걷다 갑자기 민들레가 있다며 들뜨어 말했다. 그녀는 그 하얗게 센 민들레를 호- 불었다. 홑씨들이 하늘에서 춤을 췄다. 그들은 그 날의 그믐달에 반짝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검은색 콘크리트 위로 사라졌다.(그저 보지 않은 거겠지.) 그들의 번식이란 원대한 꿈은 이름 모를 누군가에 의해 차가운 도로 위에서 싸늘히 식어갔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실금처럼 달이 걸려 있는 듯 하였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그날의 달빛처럼 발하였으며 입술은 거리의 별빛들처럼 탐스러웠다. 그런 그녀는 저만치 저 멀 리 시끌벅적한 어둠과 빛의 세계로 돌아갔다. 나는 넋을 내논 채 후미진 골목길 좁디 좁은 단칸방으로 왔다. 싱크대엔 옥빛의 잔이 거꾸러져 있고 바닥엔 백색의 술잔이, 그 새하얗던 빛이 바래진 채 처량히 누워있었다. 나는 차마 그 잔을 보지 못한 채 또 다른 술잔을 꺼내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마셨는데도 술맛이 생생하게만 느껴졌다. 목을 치켜들고 꾸역꾸역 그것을 마셔댔다. 그 쓰라린 맛은 아주 오래도록 남아있겠지. 나는 그 어둠에 잠긴 달을 보며 떠올렸다. 살며시 웃는 반달 아래서 그녀의 모습은 유독 청아하고도 선명하였으니. 그것이 언제까지고 그럴 것이라는 그 가녀린 믿음에 진탕 마셔댄다. "저기, 괜찮으세요? 아주 엷은 살갗처럼 떨리면서도 달조차 닿을 수 없는 그 순백의 부름에 난 고개를 툭. 떨구었다. 마주앉은 바닥에 백빛 잔을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아마, 달빛 때문일거야. 자꾸만 빛나는 건. 그 모습이. 희뿌옇게.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아주 시작도 아주 끝도 아닌. 그 처음의 달밤이 다시 걸린 도시. 그 어린 마음에, 그 어린 숨결에 빠져들었었다.
- io2oi
- 2026-08-13
작은 나무가 있습니다.너무 작아 언제나 주위나무들에게 가려집니다.잎들이 물들어 떨어집니다. 떨어져 가는 잎에도 나무는가지를 뻗습니다.나무는 어느새 가장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나무의 무게에 땅이 무너져갑니다.무너져가는 땅에도 나무는하늘을 봅니다.땅이 나무를 삼킵니다. 땅안에 있어도 나무는하늘을 봅니다. 시간이 지납니다.구름들이 비를 흘려꽃들을 덮습니다.이슬의 무게에 꽃들이가지를 놓칩니다.한 하얀 꽃잎이나무에 내립니다.하늘을 가리는 꽃잎에 나무가가지를 흔듭니다.그러나땅은 나무를 잡고 있습니다.눈동자속 하늘이 지워집니다.꽃잎이불어오는 바람에 맞춰살랑거립니다.나무가 푸른 잎들이 흔들리던 때를 떠올립니다.나무가 바람에 춤추는 꽃잎의무대가 되어줍니다.무대의 막에 노을이 드리웁니다. 붉어지는 노을에 꽃잎이물들어갑니다.나무의 눈동자가 꽃잎을 담습니다. 노을이 떨어집니다.어두운 주변 속 흰색 꽃잎이나무를 비춥니다.흔들리지 못해 져가는 나무가꽃잎 안에 담깁니다.꽃잎이 져뭅니다.다시 해가 떠올랐을 때, 하늘이 보입니다. 그러나나무는 자신을 봅니다.꽃이 있네요.
- 이제형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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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말라차 님. 글틴지기입니다. 작품 잘 읽었습니다. 작품의 길이가 상당해서 확인해 보니, 200자 원고지로 약 185매가량 나오는 상태입니다. ‘쓰면서 뒹글‘ 소설 게시판은 통상적인 단편소설과 같이 원고지 80매 내외로 분량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분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퇴고를 권장드립니다. 현재 분량이 유지될 경우, 원활한 멘토링이 어려울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지사항에서 확인해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