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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제비꽃

  • 작성자 오징
  • 작성일 2026-08-02
  • 조회수 110

-에필로그-

나는 자줏빛 도는 제비꽃을 좋아한다. 꽃의 풍성한 볼륨과 그의 배경이 되는 잎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 특히 하나의 군집으로 있을 때가 좋다. 이 보랏빛에 눈을 차근히 빠뜨리고 있다 보면 저희들끼리 흰 제비꽃 무리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밤하늘의 별인 양 그 흰 몸을 한껏 반짝이는데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또한 아름다웠지만 편하지는 못하였다.

모든 제비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잎의 물결을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그 물결은 그 모임을 경직되고 이질적이지 않게 해주는 연결고리와 같다. 겹치고 흔들리고 파도치면서 서로를 보듬어 비록 보라색일지언정 따스한 빛을 내는 듯하다. 흰 제비꽃 또한 제 물결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다만 내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햇빛을 가려버린다면 빛 잃은 흰 제비꽃은 이제 잿빛이 될 터, 미안함에 차마 그러지 못하였다. 나는 잿빛으로 변한 모습도 사랑하지만 그들은 나를 미워할 터였다.


-이야기-

저는 카페에서 오랜만에 볼 고향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사로운 햇빛을 맞으며 혹여 피부가 상할까, 유리창을 거울 삼아 선크림을 덧발랐습니다. 유리창 밖 보랏빛 화단이 눈에 들었는데 한눈에 봐도 방치된 지 꽤 되어 보였습니다.

"무슨 관리를 저리 엉망으로..."

혼잣말하며 그 난장판을 보는데 흰 제비꽃이 눈을 따갑게 해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마을은 흰 건 씨가 말랐었지."

"미정아! 많이 기다렸어? 아니 택시가 막혀서 뛰어오는데..."

오랜만에 본 영숙이는 꽤나 잘나가는 듯 보였습니다. 5년 전에 만났을 때는 그리 일이 힘들다 하던 직장인은 어디 가고 피부도 탱탱한 것이 여유가 넘쳐 보였습니다.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앉아 앉아."

"커피는 내가 시킬까?"

"무슨~ 내가 쏠게. 뭐 마실래?"

영숙의 저 경박함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껍데기만 바뀐 꼴이 약간은 우스워졌습니다.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

"에이~ 그러지 말고 말 좀 해봐. 나 예전처럼 빌빌대지 않는다고."

저는 그런 영숙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그럼 녹차로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녹차? 정말로? 여기 다른 것도 많은데?"

"에잉. 알았어. 그때나 지금이나 구닥다리야 아주"

카페 모카와 녹차를 주문하러 걸어나가는 영숙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눈만 가리면 부잣집 며느리인지는 아무도 모를 테다. 누구더러 구닥다리라는 거야. 고상한 거지'

"자자. 시키고 왔어. 우리 뭐 말하고 있었지?"

"아, 그래그래! 꽃집 한다며? 장사는 잘되고? 요즘 워낙 불경기잖아. 먹고살기도 힘든데 누가 꽃을 사긴 사?"

"살 사람은 사지. 그래도 봄이니까 결혼도 많이 하고. 서프라이즈 한다고 많이들 사"

이번 매출이 상당히 저조하다는 사실은 차마 영숙이에게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적성에 맞는다고 차라리 회사를 때려치고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보라 했던 지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도 봄이었잖아. 그때 막 뒷산에서 꽃가지는 다 꺾어 놓고. 근데 임자가 있었다며?"

영숙은 꽤나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붉어진 채 얼버무렸습니다.

"그땐 옛날이고. 그리고 걔가 달래를 좋아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솔직히 결혼감도 아니고"

달래라고?

"못난이 달래? 광덕이가 달래를 좋아했다고?"

"못난이까지는 아니었고. 미달하다?"

맞아요. 달래는 꽤나 못난 아이였습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소녀답지 못하게 까무잡잡한 피부, 음침하게 애들을 바라보던.

"광덕이가 걔를 왜 좋아해?"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취향이 이상했나 보지."

둘이서 붙어다니는 것을 본 기억도 언뜻 날랑말랑 했습니다. 물론 광덕의 마음이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그날은 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이었고 느티나무 아래서 저는 영숙과 수다를 떨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할까?"

"아 진짜 그만 좀 해. 그럼 그건 왜 꺾었는데? 나무 다 죽으라고?"

"아 쫌! 그래 내가 머저리지. 닌 심장도 없지? 네가 이 콩닥임을 아냐고"

"머리가 쿵쿵 울린다. 울려. 그냥 가. 가. 훠이!"

"야, 나 진짜 가? 못됐어 진짜. 그래. 간다. 가"

아마 그런 후 질질 짜며 돌아온 영숙이를 달래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자꾸 짜증 난다며 분해하면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 같이 화가 났었죠.

"짜증 나."

"어? 갑자기?"

영숙이의 말에 얼굴을 보니 방금 전 제가 쳐다보던 창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 저 꽃이야. 달래가 하루 종일 보던 그거"

"뭐? 제비꽃?"

"그래 그거. 제비풀. 맨날 흰 게 불안하지 않냐며 말 걸던 게 얼마나 진절머리 났는데!"

"사실 내가 광덕이 좋아하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런 걸지도 몰라. 나쁜 년."

그래서 광덕이가 종이 치면 흰 제비꽃을 따러 갔던 걸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뭔 상관인데."

"내가 봤다니까? 수풀에서 같이 그걸 따는 걸. 근데 나한테 막 흰 제비꽃이 어쩌구"

아직도 첫사랑의 상처가 저리 깊은 영숙이를 보며 입을 가려 하품을 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넌 어차피 지금 결혼도 했잖아."

"그거랑 다르지. 어이없잖아."

항상 이런 식이었습니다. 영숙이 흥분하면 달래주는 것도 이제는 좀 힘들었습니다.

"달래 엄마가 약초꾼이었잖아. 뭐라 했겠지. 제비꽃이 몸에 좋다. 뭐 이렇게"

"아니, 그런 식으로 말한 게 아니라니까? 막 흰 게 없었으면..."

"흰 게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안 그래?"

"어. 어. 그러게."

"우리 아빠가 뱃일을 하는 데 거품이 많이 이는 날이..."

"응? 잠깐만 친구가 불러서"

뭔가 다른 말을 했던 것 같긴 했지만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뭐, 그냥 한 소리겠지."

"아니야, 걔네 아빠 죽었잖아. 그래서 애가 이상한 거 아니야? 그때 학교 안 나왔을 때."

"그날 이후로는 망할 제비 이야기는 더 이상 안 하더라? 이상한 비린내도 안 나고."

"비린내?"

"그래, 그 미끈대는 냄새 있잖아. 약초에서 그런 냄새가 나나 봐. 으, 역겨워."

공기가 잠시 어색해지자 주제를 돌렸습니다.

"근데, 광덕이가 달래를 좋아한다고 직접 한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광덕이가 달래랑 꽃들에서 대화하고 있잖아. 그리고 손에 막 흰 제비꽃도 쥐고 있고"

"딱 봐도 고백 받고 감동해 우는 거겠지."

"지금 둘이 아직도 사귈까?"

달래가 흰 제비꽃을 싫어했던 걸로 알았는데 영숙이의 말이 맞다면 광덕이는 꽤나 생각이 없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꽃 따기를 도와주었는지도. 아 그것도 꽤나 달콤한 짓이려나.

"몰라?"

"예나 지금이나 도움이 안 돼. 진짜"

영숙이와의 이야기꽃이 서서히 저물 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청구 고지서가 날아오는 꽃집으로, 영숙이는 아직도 꽉 끼는 며느리의 차림으로.

돌아와 가게 메일을 확인하니 꽃 주문이 와 있었습니다.

"보라색 거베라와 흰 데이지 꽃"

보라색 거베라의 줄기를 자르고 데이지의 잎을 속았습니다. 풍성한 거베라 사이사이 알알이 데이지를 꽂아 갔습니다.

"거품이 많이 이는 날이 파도가 가장 강한 날이래.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런가?"

왜 갑자기 떠오른 지 모를 기억에 순간 데이지를 꽂던 손이 멈췄습니다.

"바람이 심하니까 거품이 이는 거지. 일었다 부서졌다 일었다..."

위치를 고민하느라 꽂았다 뽑기를 반복한 데이지의 줄기는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상해 버린 데이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거베라가 가득 찬 꽃다발을 보았습니다.

'흰 데이지가 다 떨어져 대신 다른 색의 데이지를 보내요. 양해 부탁드려요.'

메시지를 전송한 후 저는 연보랏빛이 도는 꽃다발을 상자에 고이 담았습니다. 이번엔 카페에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화병에 담긴 줄기가 뭉개진 흰 데이지를 보며 커피를 마셔 봅니다.

오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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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과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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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형
  • 2026-08-14
달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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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o2oi
  • 2026-08-13
꽃이었네요

작은 나무가 있습니다.너무 작아 언제나 주위나무들에게 가려집니다.잎들이 물들어 떨어집니다. 떨어져 가는 잎에도 나무는가지를 뻗습니다.나무는 어느새 가장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나무의 무게에 땅이 무너져갑니다.무너져가는 땅에도 나무는하늘을 봅니다.땅이 나무를 삼킵니다. 땅안에 있어도 나무는하늘을 봅니다. 시간이 지납니다.구름들이 비를 흘려꽃들을 덮습니다.이슬의 무게에 꽃들이가지를 놓칩니다.한 하얀 꽃잎이나무에 내립니다.하늘을 가리는 꽃잎에 나무가가지를 흔듭니다.그러나땅은 나무를 잡고 있습니다.눈동자속 하늘이 지워집니다.꽃잎이불어오는 바람에 맞춰살랑거립니다.나무가 푸른 잎들이 흔들리던 때를 떠올립니다.나무가 바람에 춤추는 꽃잎의무대가 되어줍니다.무대의 막에 노을이 드리웁니다. 붉어지는 노을에 꽃잎이물들어갑니다.나무의 눈동자가 꽃잎을 담습니다. 노을이 떨어집니다.어두운 주변 속 흰색 꽃잎이나무를 비춥니다.흔들리지 못해 져가는 나무가꽃잎 안에 담깁니다.꽃잎이 져뭅니다.다시 해가 떠올랐을 때, 하늘이 보입니다. 그러나나무는 자신을 봅니다.꽃이 있네요.

  • 이제형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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