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 작성자 드시코
- 작성일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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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웃고 있는 곰 캐릭터 얼굴을 만들어줘.
-어떤 경우이든 간에 push (밀치기)를 멈추지 않을 것. 팔과 다리를 이용해서 움직인다. 충격을 받으면 충격을 준 사람을 밀 것.
2
사람을 되살리는 것. 신체 능력을 향상하는 것도 가능. 1회 7900만원.
-신장 : 1cm 당 500만원 추가
-시력 : 0.2 당 200만원 추가
-역노화 : 6개월 당 400만원 추가
연필 소리가 들렸다. 대각선으로 움직일 때는 이런 소리가 안 난다. 연필에 깍지를 끼고 위에서 아래로 빗금을 칠 때 이 소리가 난다.
학원에는 열네 명 아이들이 앉아 있었고 소화전을 그리고 있었다. 소화전은 늠름한 모양새로 스탠드 조명 아래에 놓여 있었고 모의 시험이 시작된 지 십 분 정도 되어, 여전히 아이들은 연필로 윤곽을 잡고 있었다.
이제는 곧 물통에 붓 헹구는 소리가 들리려나.
에어컨 소리도 들려 왔다. 원장 선생은 에어컨의 희망 온도를 28도에서 29도로 올렸다. 나는 상담실에 앉아 창문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 가려고?”
내 앞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물었다. 그는 자신이 상담사라고 했다.
“가긴요?”
“대학 말이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아무것도 없는 오른쪽 벽면을 쳐다보았다.
“어디 생각해 둔 데 있어? 홍대 아니면 경희대? 성적은 어느 정도냐?”
나는 최근에 본 모의고사를 떠올리려고 했다. 눈을 꼭 감았는데 영어 듣기 평가 시간에 시험지 뒤쪽 문제를 풀던 수만 겹의 연필 소리 기억이 났다.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본 날로부터 몇 주 후에 나는 성적표를 받았다. 다른 애들은 등급만 말하던데 그럼 나는 4 9 4 5 6 8 이었다. 그것이 비밀 암호처럼 느껴져 나는 목소리를 낮춰 아저씨에게 그 숫자를 천천히 불러 주었고 아저씨는 또 웃기 시작했다.
“그 성적으로는 대학 못 가.”
나는 아저씨의 입속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깊은 굴 같았다.
”대학 왜 가야 하는데요?“
내가 물었다.
”그럼 여기 왜 왔냐?“
아저씨가 답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의 이젤 위에 놓인 그림을 흘겨보았다. 색깔이 칠해진 그림도 있어 나는 상쾌한 기분이 은근히 들었다.
”아저씨도 저런 거 그릴 수 있어요?“
”뭐 말이야?“
”지금 저 애들이 그리는 거요. 소화기.“
”나 원. 너 그런 얘기만 할 거면 나가 봐.“
나는 의자를 엉덩이로 밀어 일어나려 했는데 의자에서 코알라 울음소리 같은 것이 났다. 아저씨가 혀를 쯧, 찼는데 내가 이 소리를 내고 싶어서 의자를 끈 것도 아니었기에 억울했다. 창문 너머로 뒤를 돌아본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는데 이내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학원 입구에는 챗GPT로 만든 학원 홍보 그림이 붙어 있었는데 그 픽사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그래픽의 아이들은 모두 웃고 있었고 모두 치아가 가지런했고 피부에 여드름 하나 없었고 머리에서는 윤기가 났고 잘생긴, 예쁜 모습이었다. 나는 아저씨가 이 사진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이야기들은 대개 머릿속에서 소리 나지 않았다.
불 꺼진 상가 복도를 지나 밝은 바깥으로 나왔다. 한낮의 도로는 녹아내릴 듯 들끓었다. 나는 이제 계획대로라면 학원에 가야 했다. 대치동 수학 학원으로 가서 수학 I 개념을 조금 익혀두어야 했다. 수능은 6년이 남았지만 할아버지는 미리 공부하는 게 좋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학원 애들도 대부분 시작해, 나도 어쩐지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다. 엄마는 그것이 시간 낭비라고 했다.
수학 학원에 가려면 지하철에서 내린 후에도 조금 더 걸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지하철역으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길에 쓰러진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 바닥은 정말 뜨거웠는데 그 할머니는 그러고 있었다. 주변에 걸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옆에서 촬촬, 소리가 났는데 유모차처럼 생긴 바퀴 달린 게 지하철역 입구에 가 부딪혔다. 그리고 쓰러졌는데 캉, 소리가 났다.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흐르는 땀을 얼굴에 비비고 그 가까이 다가가 보았는데 손이 쭈글쭈글했고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날씨 때문에 조금 어지러웠다. 어떤 애가 내가 나온 상가에서 똑같이 나와 나한테 다가왔다.
”야 너 뭐해?“
그 애는 빨간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처음 보았다. 나는 드림렌즈를 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그 애의 안경테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할머니, 도와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애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어..“
나는 학원에 가야 했다.
”야, 너 어떻게 그렇게 못됐냐?“
”야, 너 왜 나한테 그래?“
”아니, 누가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애는 신발 주머니에 날개가 붙어 있는 신발 키링을 달고 있었다. 빨간 안경은 돋보기였다.
”아 뭐, 나 이 할머니 몰라. 너 그리고 왜 나한테 소리 질러?“
나는 뒤돌아서 지하철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환풍기 소리랑 겹쳐 들렸다.
수학 학원에서는 내가 제일 키가 작았다. 난 그 점이 싫어서 자주 까치발을 하고 다녔다. 까치발을 한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손에 적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자주 그만두었고 또 자주 다시 시도했다.
선생님은 늘 시계를 차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것이 천만 원을 넘는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치, 만 원“으로 듣고 만 원만 있으면 그렇게 아이들의 선망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해 어느 날에는 만 원을 들고 아이들에게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주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아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레오를 먹을 계획이라는 아이만 고맙다고 했다.
쉬는 시간은 한 시간이었는데 그때만 되면 1층 편의점이 붐볐다. 나는 가장 좋아하는 튀김 우동이랑 삼각 김밥을 사고 편의점 의자에 앉았다. 내 옆에는 수학 I를 두 번째로 잘 푸는 민준이랑 가장 못 푸는 서희가 앉았다. 나는 가운데쯤이라고 들었다. 민준이는 뒤에서 키가 두 번째로 작았다. 서희는 가장 컸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우리는 학원에 있는 라운지 바에서 먹기로 했다. 땀이 플라스틱 식탁에 계속 뚝, 뚝 떨어졌던 것이었다.
라운지 바는 소란스러웠다. 튀김 우동이 다 익었을 때쯤, 나는 두 아이에게 물었다.
”야, 너희들 대학이 뭔지 알아?“
”대학? 우리 엄마가 엄청 중요한 거라고 하던데.“
”나도 들었어 거기 가면 행복해진대.“
나는 한 젓가락을 먹고는 삼각김밥 포장지를 까기 시작했다. 민준이는 오레오를 좋아했고 그것만 먹었다. 서희는 왕꿈틀이를 먹고 있었다. 서희 말에 따르면, 아빠가 쉬는 시간에 가야 할 식당을 지정해 주었는데 그게 귀찮아서 왕꿈틀이를 먹는다는 것이었다. 에어컨 바람이 세서 조금 추웠다.
”야, 너 담배 피워봤니?“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고등학생 같았다. 교복을 입고 있었고 앞머리가 길었다. 우리는 무서워서 아무 말 못 하고 있었다.
”담배 안 피워 봤어요?“
뒤쪽에서 한 사람이 웃으며 물었다. 옆 고등학생들은 ”야, 하지마.“라고 말하면서도 웃었다.
민준이가 날 보았다. ‘어떡해?’라고 내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튀김 우동을 집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니요.“
”아, 안 되겠네. 너 그거 다 먹고 같이 내려가자.“
서희가 그 고등학생 무리를 빤히 쳐다봤다. 그중 한 사람이 ‘야, 쟤가 우리 쳐다보는데?’라고 말했다.
난 그냥 빨리 내려가자고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그 고등학생에게 말했다.
골목은 더웠다. 그곳엔 학생이 많았는데 교복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담배 연기로 눈이 매웠다.
그런데 막상 내려가 보니 그 고등학생은 나를 다시 올라가라고 했다.
”그럼 왜 오라고 했어요?“
”아 몰라, 꺼져.“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보라색 장난감 같은 것을 꺼냈다. 다른 한 사람의 것은 파란색이었다. 나는 그것을 골똘히 보았다. 그들은 용처럼 입에서 연기를 뿜었다. 사탕 냄새가 났다.
”저도 해 보면 안 돼요?“
내가 물었다.
”자.“
나는 그것을 들고 만지작거렸다. 한 사람이 버튼을 누르라고 말했고 나는 빨대처럼 생긴 것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내 입에서도 용처럼 연기가 나왔다.
”기분 좋니?“
”잘 모르겠어요.“
나는 그것을 돌려주었다. 두 학생은 나란히 날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서로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같은 반 선생님과 여학생에 관한 것이었다. 골목이 너무 더워서 다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무렵 또 입에서 연기를 내뿜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내리려고 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타서 그러지는 못했다. 이상한 애처럼 보일까 봐.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를 켰다. 숙제를 다 한 후라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밤 열한 시 정도였는데 갑자기 엄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미술학원 다녀왔어? 뭐래?“
나는 보고 있던 쇼츠 화면을 껐다.
”아니.. 대학교 가라는데 대학이 뭐야?“
나는 물었다.
”그건 엄청 좋은 거야. 거기 좋은 데 가면 엄마가 레고 십만 원 넘는 것도 사줄 수 있어. 근데 등록은 안 했어?“
”어. 아직.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
나는 거짓말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엄마가 자주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나만의 쉬는 시간이었기에 빨리 대화를 끝내야 했다. 엄마는 알겠다고 말한 후 잘 자라고 했다. 그리고 나갈 때 책상 위에 놓인 문제집들이 오른편으로 옮겨졌는지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풀린 문제집들은 오른쪽으로 간다. 문제집들은 매일매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졌다.
”너 그런데 오늘 학원 쉬는 시간에 1층에 왜 두 번 내려갔어?“
엄마가 문손잡이를 잡고 물었다.
나는 핸드폰을 켜려다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 핸드폰 두고 와서. 편의점에.“
엄마는 정신을 놓지 말라고 한 뒤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핸드폰을 켜 쇼츠를 이어 보았다. ‘대학 서열 순위’, ‘난동 부리는 할머니의 최후’, ‘하반기 개봉 기대작’, ‘극혐 인간상 순위’ 등이 보였다. ‘인간상’이라는 게 무슨 말일까. 사람에게 주는 상인가? 나는 마냥 재밌게 보았고 정말 그런가 싶었다. ‘대학 서열 순위’의 맨 위에는 서울대가 있었는데 아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서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균관’이라는 도시가 따로 있는 것일까? ‘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열두 시가 되어 핸드폰과 불을 꺼도 이상하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사탕 냄새가 은근히 났는데 알 수 없었다.
이번엔 지하철역에서였다.
어제 미술학원 앞에서 만난 빨간 안경 소녀와 또 마주쳤다. 그 애는 열차 출입문 앞에서 무언가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 애가 날 보지 못하도록 소리 없이 스크린 도어에 비친 모습을 보며 반대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그 애가 쿵쿵, 힘차게 걷더니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너 어제 걔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애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영어 모의고사 등급이 높지 못해서 내 손에는 WORD VOCA 1200이 들려 있었고 새로 등록한 영어 학원에서 테스트를 꼭 보아야 한다고 하길래 엄마가 DAY 1부터 DAY 7까지 일단 외워두라고 해서 지금이라도 읽고 있었다. 이 아이는 이를 드러내고는 말했다.
”너 어제 그렇게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
”나 바빴어.“
”왜 바쁜데?“
”학원 가야 됐어.“
”그렇다고 할, 할머니가 쓰러져 있는데 그렇게 가는 게 어딨어?“
열차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딩동딩동 효과음이 났고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열차 안에서는 단어를 외워야 하는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눈을 감고 빠르게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응? 할머니 어떻게 되셨어? 내가 진짜 미안해.“
그 애는 갑자기 말 않았다. 열차 문이 열리자 나는 그 애에게 고개를 조금 숙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열차 안에서 보니 그 애는 손으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출입문이 닫힌다는 목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문이 닫혔다. 그 애 울음소리가 열차 출발 후 터널 끝에서 번져 왔다.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 괜스레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WORD VOCA를 폈는데 그 애 울음소리가 쟁쟁했다. grief 애통함, 애통함, grief 애통함, 나는 중얼거렸는데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AI 음성이 지하철 스피커를 통해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보시는 이 풍경은 한강, 한강입니다. 수면에 번쩍이는 윤슬이 참 아름답죠..“
고개를 들어 바깥을 보았다. 나만 고개를 들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핸드폰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모습으로 보니 대부분 쇼츠를 보고 있었다. 순간 grief의 뜻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이상하게 집중이 안 되었다. 의자에 앉으면 늘 다리가 땅에 닿지 않았다. 나는 다리를 앞뒤로 흔들어 보았다. 또 나는 손톱을 자주 뜯었는데 오늘은 더 심했다. 살이 드러날 정도까지 씹고 있던 터라 선생님이 주의를 주었다. 나는 손가락을 옷에 닦고 손가락에서 침 냄새가 나는지 조금 맡아 보았는데 심하지 않았다. 계속 사탕 냄새가 맡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쉬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라운지 바에 어제 본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성큼성큼 가다가 물었다. 그들은 떡볶이를 시켜 먹는 중이었다.
”그거 또 하게 해 주면 안 돼요?“
”뭐?“
”그 우주선이요.“
웃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거 있잖아요. 사탕 냄새 나는 거.“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 사람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곳에서 우주선이 나왔다. 맨들맨들하고 반짝거렸다.
”지금은 안 되고, 한 쉬는 시간 끝나기 십 분 정도에 가.“
나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건네받았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주선을 주머니에 넣고 내 식탁으로 돌아왔다. 민준이가 오늘은 오레오 씬즈를 먹고 있었다. 그 애 입술이 초콜릿 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애는 내가 의자에 앉자,
”뭐야? 무슨 얘기 한 거야?“
”몰라도 돼.“
서희는 오늘 없었다. 아빠에게 매일 젤리 먹는 게 어제 들통이 나, 당분간은 아빠에게 인증 사진을 보내야 했던 것이었다. 나는 내일 서희에게 그런 사진은 AI로 만들면 된다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담배 펴?“
민준이 갑자기 물었다.
나는 ‘너구리’ 첫 번째 젓가락을 입에 넣으려다가,
”담배가 뭔데?“
”그거 있잖아. 어른들이 피는 거.“
”어른들?“
내 기억상으로, 담배는 어른들보다는 학생들이 더 많이 피우는 것이었다.
”입에서 연기 나는 거. 왜 몰라.“
민준이 답답한 듯 말했다. 그 우주선을 빨면 입에서 연기가 나는 건 맞다. 그런데 그게 왜?
”담배 피면 일찍 죽어. 피지 마.“
”죽는다고?“
”응.“
”죽는다는 게 뭔데?“
민준은 두 개 남은 오레오 씬즈 중 하나를 씹기 시작했다.
”그거 있잖아. 컥! 하고 더 이상 숨을 안 쉬는 거. 쇼츠에서 안 봤어?“
나는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분명히 어떤 영화 요약 장면에서 본 것 같다. 아니면 AI 드론에 의해 암살당한 내용? 그게 죽는다는 건가? 그게 뭐가 나쁘지?
”죽으면 뭐가 안 좋은데?“ 나는 물었다.
민준은 날 보더니, 그것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죽어도 AI 영상이랑 로봇으로 살릴 수 있잖아. 그리고 우리 선생님도 실은 죽었잖아? 근데 살린 거잖아.“
”그러네. 나 바보인가 봐.“
민준은 마지막 오레오를 입에 넣는다. 혀가 다 닳았을 것이다.
수학 학원 선생님이 버스에 치여 죽은 날에 우리는 장례식에서 회색 옷을 입었다. 로봇으로 인간을 되살리는 경우 장례식은 하루 동안 진행되고 일주일 정도 후면 그 사람이 자신의 집으로 배송되었다. 기억은 ‘어찌저찌’ 보존된다고 했다. 그 ‘어찌저찌’는 너무 복잡해서인지 누구도 설명해 주는 이가 없었다. 선생님은 학부모 톡방에 일주일 정도 수업을 쉰다고 메시지를 올렸는데 아마 선생님의 자녀가 보낸 듯했다. 그리고 그 부재에 대해 항의가 꽤 많았다. 내 엄마만 하더라도 그 시간 동안 보충을 해야 한다며 따로 문제집을 사 풀게 했다. 일주일 뒤 돌아온 선생님은 이전보다 더 말끔했고 특이하게도 몸이 차가웠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숨소리가 안 나서 우리는 그걸 가지고 놀렸다. 선생님은 웃으며 받아 주었다.
“따라서 이 경우 미지수 x는 해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에겐 심장이 없어, 심장이 없어.”
아이들은 웃었다. 그건 작년 겨울이었는데 난 그때를 행복한 시절로 기억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학 I을 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역 앞에 쓰러져 있던 이름 모를 할머니를 떠올려 보았다. 그 할머니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빨간 안경 여자애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던 건 그것 때문이었다. 그 할머니는 분명 더 젊은 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텐데. 물론 더운 날이긴 했다.
그리고 오늘 출발하던 열차에서 들은 그 애 울음소리를 생각해 본다. 할머니가 새로운 몸을 받지 못했나? 주소를 잘못 입력해 엉뚱한 곳에 할머니가 배달된 걸까? 그 할머니와 그 애가 서로 아는 사이였나?
나는 쓰레기통에 민준이 오레오 포장지를 버리고 올 동안 여러 생각을 했지만 시계를 올려다보니 이제 그 우주선을 사용해도 되는 시간이어서, 민준에게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한 후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그런데 그 애가 같이 가자고 해서 뭐라 할 변명이 빨리 떠오르지 않아 잠깐 엄마가 부른다고 핸드폰으로 전화 받는 체를 했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로 들어가자, 핸드폰을 교실에 두고 잽싸게 돌아와 1층까지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골목은 연기로 자욱했다. 나는 고등학생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과 조금 떨어진 채, 쓰레기통 옆에서 버튼을 누른 후 우주선에 입을 가져다 대고 힘껏 숨을 쉬었다. 또 입에서 연기가 났다. 사탕 향기가 났다. 어제보다 세 번 더 숨을 쉬었다.
그때 도로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우주선을 주머니에 넣었지만 너무 커서 손에 꼭 쥐고 골목에서 나왔다. 정신이 조금 몽롱했다.
신호등 옆에서 큰 곰 인형이 걸어가고 있었다. 곰은 그 외형을 생성형 AI로 제작했는지 미술학원에 붙어 있던 전단지처럼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고 그것이 우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걷고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밀치고 있었다. 밀쳐진 사람들은 보도블록 위에 뒹굴었고 들고 있던 가방이나 비닐봉지를 놓쳐 횡단보도에 가지가 쏟아져 있었다.
거동을 보니 저것은 사람이 탈 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AI 로봇이었다. 몇 년 전 ‘디즈니랜드’에 갔을 때 저런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울라프 로봇이었는데 정말 살아있는 것 같았고 인공 지능이라서 그것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실제로 저런 로봇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홈페이지가 있었고 나도 해 보려고 했지만 만 18세 이상부터 가능하다고 해서 관두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곰은 내게 다가왔다. 날 밀쳤다. 내 뒤쪽 머리가 전신주에 부딪혔고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아팠다. 곰 로봇은 내가 나온 골목길로 들어가 연기 속 고등학생 무리에게 다가갔다.
잠시 후 그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다. 로봇은 수학 학원으로 들어갔다. 난 전신주 아래 눈을 껌벅거리며 앉아 있었다. 가로등 불이 켜졌고 푸른 저녁 하늘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이 돌고 있었고 머리가 아파서 토할 것 같았다.
학원 건물에서 소리가 났는데 3층 정도 높이의 창문이 깨지는 게 보였다. 유리 조각들은 추락하는 비둘기처럼 땅으로 곤두박질쳤고 수많은 가루로 산산조각이 났다. 가로등 불빛에 비쳐 반짝거렸다. 비명 소리가 계속 들렸다.
나는 조심히 일어났다. 땅이 너무 뜨거웠다. 갑자기 우주선을 쓰고 싶어서 버튼을 누르려 했는데 깨져 있었다. 끈적한 액체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난 그걸 핥아서 조금 먹었는데 썼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지만 머리가 계속 욱신거려 불쾌했다.
나는 고등학생들이 있던 곳으로 가까이 가 보았다. 철 냄새가 났다. 자전거를 타고 난 뒤에 손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들은 모두 누워 있었고 눈을 뜬 사람도 있었다. 나는 누운 사람이 눈을 깜박이는지 보려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감지 않았다. 갑자기 메스꺼운 느낌이 들었고 다리가 혼자 움직여서 도로변을 따라 달렸다.
나는 계속 달렸다. 저녁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수학 학원에서 멀어져 갈수록 아우성이 뭉툭하게 귀를 찔렀다. 견딜 만했다. 나는 가끔 토하면서 달렸다. 꿈인가 싶었다. 이런 적은 없었다. 너무 더웠다. 가로등 빛 아래에서 내 그림자는 계속 돌고 사라졌다. 멈추면 죽을 것 같았다.
너무 숨이 차 한 사거리에서 멈췄다.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곰 로봇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울고 싶었다. 분명 그 고등학생들은 죽었다. 아냐 괜찮아. 그들도 살릴 수 있을 거니까. 그런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몸도 떨렸다.
사거리 건너편을 보고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어제 한낮에 길에 넘어져 있던 할머니가 그 작은 유모차 같은 것을 끌고 걸어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천천히, 느긋하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 할머니라면 왠지 나를 구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 나는 그 할머니에게 걸어갔다.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가까이 가니 할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마지막 몇 걸음을 놔두고 멈추어 섰다. 할머니는 나를 힐긋 보더니 이내 보도블록을 따라 바퀴를 굴리며 갔다. 찰찰찰, 소리가 났다. 나는 거기에 멈추어 서서 울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이상한 모양으로 납작하게 만들었다. 눈물방울이 매끈한 구 모양을 이루고 땅에 떨어졌다. 그것으로 얼굴을 닦았다. 가로등이 내게 물었다.
“왜 울고 있어? 부모님을 잃어버렸니?”
이것도 인공 지능이었는데 나는 대답 없이 울기만 했다.
“경찰에 신고해 줄까?”
그 사거리에는 나뿐이었다. 상가들은 대부분 셔터가 내려가 있었고 ‘임대문의’라는 종이만 크게 붙은 채 뜨거운 여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나는 한적한, 소리 없는 그곳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죽은 것 같았다. 인공 지능 가로등이 계속 말을 걸었지만 나는 눈물이 그치자 학원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곰 로봇을 잡는 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곰이었다면 마취총을 쏘아 기절시킬 수라도 있었겠지만 로봇의 경우 그것은 유효하지 않았다. 또, 이 로봇을 주문한 사람이 프롬프트에 ‘어떤 경우이든 간에 push (밀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입력했기에 피해가 커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거대한 (곰 로봇의 크기는 1m 92cm였다.) 로봇을 제재할 만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서너 명의 사람들이 그것에게 달라붙었고 망치 같은 것으로 타격해 보았으나 인조털 아래에 내구성이 강한 플라스틱판이 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효과가 크지 않았다. 로봇과 물리적인 싸움을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심정지 상태가 되었다.
한 아이가 플라스틱 전자 담배를 그 곰 로봇에게 던졌는데 그것이 로봇을 자극했는지 그 아이에게 다가가 오른쪽 팔과 다리로 힘껏 밀쳤고 아이는 7m 가량을 날아가 가로등에 머리를 부딪혀 의식을 잃었다. 잠시 후 한 노인이 곰 로봇에게 다가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행기를 밀어 그것을 가격했다. 곰 로봇은 노인 또한 밀쳤고 노인은 사망했다.
곰 로봇은 결국 큰 인명 피해를 남겼고, 최후에는 폭탄 같은 것으로 그 기능을 잃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필 소리가 들렸다. 대각선으로 움직일 때는 이런 소리가 안 난다. 연필에 깍지를 끼고 위에서 아래로 빗금을 칠 때 이 소리가 난다.
학원에는 열세 명 아이들이 앉아 있었고 물병을 그리고 있었다. 물병은 아담한 모양새로 천장 등 불빛 아래에 놓여 있었고 모의 시험이 시작된 지 삼 분 정도 되어, 여전히 아이들은 연필로 윤곽을 잡고 있었다.
이제는 곧 물통에 붓 헹구는 소리가 들리겠지.
에어컨 소리도 들려 왔다. 원장 선생은 에어컨의 희망 온도를 29도에서 30도로 올렸다. 나는 상담실에 앉아 창문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왔네. 그래서, 어디 가려는 거야?”
내 앞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물었다. 그는 자신이 상담사라고 했다. ‘또 왔네’ 라는 말은 아저씨의 착각일까? 난 이 아저씨를 오늘 처음 본다.
“가긴요?”
“대학 말이야.”
난 잘 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고는 꽃무늬가 인쇄된 오른쪽 벽지를 쳐다보았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의 이젤 위에 놓인 그림을 흘겨보았다. 색깔이 칠해진 그림도 있어 나는 상쾌한 기분이 은근히 들었다. 창문 너머로 뒤를 돌아본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는데 그 애는 빨간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 애는 나를 오랫동안 보더니 이내 일어나 상담실 쪽으로 걸어왔다. 난 문을 열고 상담실 밖으로 나왔다. 그 애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안경이 돋보기였다. 그 시선이 의아해서 나는,
“너 나 알아?” 물었다.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 꺼진 상가 복도를 지나 밝은 바깥으로 나왔다. 한낮의 도로는 녹아내릴 듯 들끓었다. 나는 이제 계획대로라면 학원에 가야 했다. 대치동 수학 학원으로 가서 수학 I 개념을 조금 익혀두어야 했다. 수능은 6년이 남았지만 할아버지는 미리 공부하는 게 좋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학원 애들도 대부분 시작해, 나도 어쩐지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다. 엄마는 그것이 시간 낭비라고 했다. 수학 학원에 가려면 지하철에서 내린 후에도 조금 더 걸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지하철역으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계단을 내려가자 열차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딩동딩동 효과음이 났고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열차 안에서는 단어를 외워야 했다. 영어 모의고사 등급이 높지 못해서 내 손에는 WORD VOCA 1200이 들려 있었고 새로 등록한 영어 학원에서 테스트를 꼭 보아야 한다고 하길래 엄마가 DAY 1부터 DAY 8까지 일단 외워두라고 해서 지금이라도 읽고 있었다.
수학 학원에서는 내가 키가 두 번째로 작았다. 열차에서 단어를 외우면서 까치발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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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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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야서야, 서 어디로 갔니. 못 찾겠다 비둘기푸드덕 날아가네. 벽이 있고 내가 있었어. 글을 쓰고 있으니까 아마 난 있었던 거겠지. 물론 잠결에 헛것을 봤는지도 몰라. 나는 집 안에 있었어. 집에는 벽이 많아. 사면이라고 단정하지 않을게. 다 세보진 않았어. 집에 있다는 건 문을 열어야지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거겠지. 물론 선풍기는 계속 고개를 흔들면서 돌고 그럴 때마다 이불 위 먼지는 매번 다른 모양으로 흩어지지만 그것들은 기계잖아.난 방에 앉아 있었어. 머릿속이 문장으로 가득했는데 특이하게 글자들이 서로 겹쳐져 있어서 읽을 수가 없었어. 그것들은 폭포처럼 계속 흘러나왔고 나는 젤리를 너무 많이 먹어서 머리가 잡념들을 생산해 내나 싶었어.겨울방학이었어. 집에 아무도 없어서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밖은 정말 어두워. 지구가 또 돌았나 봐.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어.이러다 죽겠지. 바람 소리도 안 들리고 덥기만 해. 매미도 밤엔 안 울어. 나 아직 열여덟 살인데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이렇게 앉아만 있고 아무것도 안 하니까 슬픈 기분이 들었어.이럴 때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아니면 의지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걸까?막연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아. 나는 어떻게든 너를 찾고 싶었지 서야.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가 널 만날 가능성은 없었어.이건 연애 이야기가 아니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집에는 아무도 없었어. 반도에서 너를 어떻게 찾아? 난 너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걸.그냥 나갈게. 나는 왜 너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어릴 때는 텔레파시가 통할 것 같았어. 그런데 그건 그저 근육의 움직임이었지.너 어딨어 서야?이런 말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않아..너를 찾고 싶어.이것 봐. 이게 사람의 전부야. 안 보이니까 찾고 싶고 보고 싶다는.긍정하는 게 아냐. 그냥 그렇다는..난 신발장에 있었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어 샌들만 신고 어디론가 가고 싶었어. 그냥 가기로 했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었어 널 만날 수도 있었지.널 만난다,는 말은 너무 많은 사람이 써 버려서 닳아 없어지고 가장 평범한 냄새가 나는 염료 같았어.난 모르겠어. 밖으로 나왔지, 후덥지근해. 여름이지 여름밤. 내 집에는 사회가 이름 붙인 문제집들과 온갖 나의 다른 얼굴들과 이름들이 어질러져 있었어 그것에 대해서는 말 안 할래 나는 원시인처럼 걸어보고 싶었어.주변에 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지. 딸기나무야. 딸기나무는 관념적이야. 난 그런 걸 사랑했는데 밤이 너무 어두워.이명 소리랑 매미 소리랑 구별이 안 돼. 너는 내 생각을 듣고 있을 필요 없는데. 그건 너가 날 사랑할 때나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나도 매미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집 앞에 바다가 놓여 있어 바다 앞에 집이 놓여 있기도 하지.나는 조약돌로 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어. 우리 집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지. 꽃이랑 나무랑 새가 있어. 나는 새를 그렸지. 그때 나무를 그리던 할머니가 내가 그린 새를 보고 웃으며 아, 요상하게 생긴 새다. 하고 웃었지. 그때 너
- 드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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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꺼풀 벗긴 하얀 눈썹은 봉긋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양옆에서, 앞뒤에서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아아아, 으으으, 라고.할머니가 죽는 것을 지켜보고 나는 커다란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을 본 듯했다. 할머니는 가장 끝에 놓인 도미노였다.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가 준 초코 머핀을 형이 아닌 나만 먹는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나이가 들 수록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는 좋은 대학교에 가라고 말했고 영어 수학은 과외를 해서라도 뒤처지지 말라고 했다. 할머니는 한글을 쓸 줄도 몰랐다.나는 사랑만 받을 줄 알았던 할머니에게 처음 그 꾸지람을 들었을 때 화가 났고 할머니와 말을 안 하기로 마음먹어 늘 어색한 분위기였다. 할머니가 말을 걸 때마다 나는 아무 말도 없거나 네, 같은 짧은 말로 답했다. 나는 차라리 할머니가 죽기를 바랐다. 나는 스스로 자신이 악마 같다고 생각했다.명절, 할머니 집에서 일찍 홀로 집에 오는 길에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걸었고 할머니가 고사리 같은 반찬을 가져가라고 뒤에서 고함쳤다. 나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체하며 뉘엿뉘엿 지는 해와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더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내게 그렇게 신경 쓸 것 없어요.나는 할머니가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친구들은 대학교 가서 사귀라고 말하며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 전력을 다하라는 식으로 말했고 나는 그 점이 야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친한 친구가 없었고 우정을 위해서 할머니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냥 저건 좋지 않은 말이야, 생각할 뿐이었다.할아버지는 그보다 일찍 죽었는데 할머니보다 더 극심했다. 제사상을 매년 차렸고 수저 놓는 법, 술 따르는 법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해 주저하기라도 하면 쯧쯧, 소리를 내며 자신이 직접 놓았다. 할아버지는 햇빛에 그을려 피부색이 어두웠고 눈썹이 없어 못생긴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위축되었다.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가까운 나들목을 통해 한강 트랙을 달렸으며 자신이 아침 6시에 일어나고, 매일 화분의 꽃에 물을 준다며, 이런 일들은 정말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친척들이 오면 늘 강조했다. 그리고 아빠가 권한 술을 마시고 취하기라도 하면, 나를 포함한 손자, 손녀들이 너무 게으르다고 말했고 세상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밥을 구걸하며 동네를 돌아다녔다며 언제나 옛이야기를 꺼냈다.우리는 그것을 들으며 마인크래프트를 했고 스켈레톤이 나왔다며 빨리 접속하라고 서로에게 속삭였다.나는 한 사람의 과거사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지난 시절의 회상을 듣기 좋아했지만 할아버지의 말은 듣기 싫었고 늘 정치 이야기, 돈을 버는 이야기만 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를 스크루지 영감 혹은 고약한 심보의 욕심쟁이로 치부하고 그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때 중학생이었다.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예술계열 고등학교였다. 할아버지는 내 고등학교 합격 후 낙지마당이라는 낙지집에서 술을 마시고는 소리를 지르며
- 드시코
- 2026-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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