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건너다
- 작성자 구포대교
- 작성일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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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포기한다면 결국 쓰레기인 것이다. 지난 시간, 지난 수고들이 쓰레기가 돼버리는 것이다. 스스로를 그렇게 쓰레기통에 쳐넣고 싶은 거냐.
문틈은 빛과 소리를 허용한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독백처럼 방 안으로 스며든다. 커튼을 친 방은 칠흑처럼 어둡고, 방문의 윤곽만 누런빛이 선명하다. 나는 관뚜껑처럼 보이는 그것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다. 형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가만히, 밤을 샌다. 가만히, 영원한 것만 같은 밤. 아버지의 말. 내가 지금껏 쓰레기를 키워왔다는 거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1
눈을 뜨자 한강이었다. 창에 비치는 옥색 철교 위로 꿈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누런빛이 흐르는 관뚜껑 모양의 문. 곧 서울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오고, 부스럭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하나둘씩 선명해졌다. 깜빡 잠든 사이에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역 가까이서, 기차가 감속하는 만큼 상쾌한 긴장감이 온몸을 조여왔다.
몇 분 전에 온 정현의 문자를 확인하며 기차에서 내렸다. 기차 안과는 질감부터가 다른 더운 공기가 훅 끼쳐왔다. 부산보다는 시원할 거라더니, 순 거짓말이었나.
대합실로 올라가자 금방 정현을 만났다. 그는 예전보다 살이 더 붙은 모습으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반가움과 어색함이 뒤섞인 감정으로 인사를 했다. 정현은 어색함이란 게 없는지 천진하게 웃었다. 어색한 게 나 혼자인 듯한 무안함과 함께, 나란히 서울역을 빠져 나왔다.
정현과는 중학교 1학년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4년을 훨씬 넘어서의 재회였다. 그는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직전에 서울로 전학을 갔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엄마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정현은 나에게만 말했다. 당시의 난 이혼이란 두 글자가 굉장히 무겁고 잔인하게 느껴져 정현을 많이 걱정했으나, 그는 아무렴 잘 사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원룸을 구해 자취 중이라고 했다. 학교를 자퇴하고 혼자 수능 준비 중이라고, 그의 자취방으로 향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할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여느 19살처럼 대학을 앞둔 고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다였다. 공부를 하고, 아직 연애는 못 하고 있다고, 학원은 따로 안 다닌다고, 무언가 커다란 것을 생략하며 말했다. 정현은 먼저 형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그는 이유도 잘 대지 못하는 내게 기꺼이 잠자리를 내어준 것이었다.
그의 집까지는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40분가량을 이동해야 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도 20분가량 비탈길을 걸어야만 정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택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의 구석, 창문의 절반을 시멘트 담장으로 채운 원룸. 1층에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세 들어 살고 있었고 2층에 집주인 할머니가 사신다고 했다. 정현은 아까 전부터 혼자 사는 삶의 장단점을 가지고 떠드는 중이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혼자 살기에는 꽤 쾌적해 보이는 원룸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정현이 말했다. 막 열두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난 그가 자주 식사를 해결한다는 분식집으로 인도되었다.
우린 치즈 돈까스와 오므라이스를 사이에 두고 말을 나눴다. 이제는 어색함 같은 것 없이 주저 않고 떠들 수 있었다. 말하기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정현 덕분이었다. 난 접시가 거의 다 비워졌을 즈음에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일단 다 먹었으면 갈까?”
“응. 다 먹었어.”
내 카드로 계산을 한 뒤, 난 가게를 나오며 말했다. 가면서 이야기해주겠다고. 형에 대해. 정현은 강한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지금 바로 가는 거야?”
“응. 가야지.”
한강으로, 형이 있는 곳으로.
2
자신 있게 말했으면서도 긴장감에 몸이 빳빳해졌다.
인간은 0.1퍼센트의 가능성만으로 수만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다. 한강에서 서성이고 있을 형의 수만 가지 모습이 기억을 동원해가며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티비 화면 속 형을 본 것은 일주일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한강에 괴물이 출현했던 날. 방학을 앞둔 여름에.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한강으로 몰려들 동안 난 소파에 앉아 실시간 뉴스를 봤다. 특파원이 인파들 사이에 전봇대처럼 서서 쫑알댔고,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샜다. 감탄과 비명 등.
곧 특파원의 영상은 화면 하단의 조그만 사각형으로 분할된 후 괴물의 모습이 나타났다. 재송출 화면이었다. 흐느적거리는 온갖 쓰레기를 뒤집어 쓴 모양새로 괴물은 물가를 거닐고 있었다. 그러한 10초가량의 영상이 반복 재생됐다.
이후 화면은 몇 번 전환되며 다양한 장면들을 비춘다. 괴물보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었다. 저거 하나 보겠다고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다니. 영화 같은 데서는 보통 도망가는 쪽이 아니었던가. 말하자면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유명인의 죽음, 발각된 정치인의 비리, 먼 나라에서 발생했다는 재난. 이것들보다는 더 흥미로울까. 괴물이 나타난 상황 자체는 흥미로울지언정 나와는 하등 무관한 일이었다. 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형은 특파원의 뒤 인파의 일부였다. 가는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얼굴은 분명 형이었다. 당장 알아는 봤지만 그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달랐다. 인상을 요약하자면, 더러웠다. 되는대로 내버려 둔 모양의 장발과 더 초췌해진 몸은, 그간 씻지 않아 생긴 온 피부의 트러블 때문에 더 부각 됐다. 척 봐도 노숙 생활을 오래 한 듯했다. 처참한 몰골. 때맞지 않은 긴팔 옷이었고 오른손엔 붕대까지 감고 있었다. 괴물에 의해 다친 것일까. 괴물이 강변의 노숙자들을 일차적으로 덮쳤다는 아나운서의 말을 기억해냈다. 형도 피해자 중의 하나란 생각이 빠르게 확신으로 굳었다.
‘형을 찾아야돼.’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야 일반적인 가족이라면 당연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가족과, 부모님과 절연한 형을 찾겠단 결심은 쉽게 설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다. 3살 터울의 형은 중학생 때부터 밤늦게까지 학원에 치여 살았으므로 함께 놀 시간 자체가 절대적으로 적었다. 키 작은 꼬마 시절의 언젠가 함께 뛰놀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 형과 나 사이에 학업이라는 벽이 나날이 견고해져갔다. 형이 집을 나갈 때까지도, 계속.
그러니 형을 찾고자 하는 본능적인 마음은 스스로도 꽤 당황스러웠다. 특별한 유대도 없고, 괜히 그랬다가 부모님으로부터 한 소리 들을지 모르는데. 그런데, 마음은 진작, 멋대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울렁거릴 정도로.
3
형이 가출했을 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러니까 형은 고등학교 3학년, 현재의 내 나이에 집을 떠난 것이었다.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후였다. 난 친구들과 한참을 놀다 저녁식사가 시작되기 직전 귀가했다. 현관문 여는 소리에는 집안 누구도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역으로 터져 나온 아빠의 고성에 난 화들짝 놀라, 중문을 열지 못하고 신발장에 선 채로 머뭇거렸다. 아빠는 형을 향해 소리치는 중이었다. 이전보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낮은 성적이 원인인 듯했다. 난 최대한 소리를 죽여 중문을 열고 들어와 내 방으로 들어갔다. 말소리는 부엌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 아빠의 목소리였고 형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난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 조용히, 숨을 죽였다. 악몽으로 남은 기억이다.
형은 다음날 등교하지 않았다. 밤사이 아빠가 진정됐을 법도 하건만 다시 크게 화를 냈고 문을 부수며 형을 끌어냈다. 형은 평소보다 늦은 시각, 여덟 시에 가까워져서야 집을 나섰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형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 휴대폰과 지갑, 그리고 무거운 책가방을 멘 후 학교가 아닌 곳으로 떠났던 것이었다.
부모님은 경찰까지 동원해가며 형을 찾았다. 그러나 형은 번번이 도망쳤고 세 번째 탈출 때 편지를 남겼다. 엄마는 눈물을 흘렸고 아빠는 밖에 나갔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술과 담배 냄새가 뒤범벅된 채로. 부모님은 더 이상 형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차후에 형의 편지를 읽었다. 엄마가 편지를 큰방 서랍에다 보관 중이던 것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다. 작년의 일이다. 엄마와 아빠가 1박으로 여행을 떠난 날이었고 난 오랜 숙원이었던 형의 편지를, 쓰인 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몰래 읽었다.
형이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죽은 일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사인은 자살. 학업 스트레스에 못 이겨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졌다는, 우리나라에게 만큼은 상투적인 이야기. 형은 편지에다 정부에 대한, 교육계에 대한 비판을 빼곡히 썼다. 경쟁과 사교육, 선택과 자유 등의 단어들이 박힌 문장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학원에 갇혀 지내던 스스로가 느낀 무수한 스트레스와 그 사례들. 편지의 끝 무렵에서 난 눈물을 훔쳐야 했다. 동생에게만큼은 다양한 길을 보여 달라는 부탁으로 편지는 끝마쳤다.
지금도 형을 회상하면 울컥울컥했다. 사실 훨씬 전부터 형과 나의 대우가 달랐다. 형은 몰랐겠지만, 난 형에게 가해지는 것만큼의 부담을 짊어져 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손에 꼽을 정도로 잘하지도 않았다. 형보다 낮은 성적에도 회초리 한 번 맞아본 적 없었다. 1등급이 아닌 과목이 하나라도 있으면 효자손으로 맞아야 했던 형과는 대조적으로. 형은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더 엄격하게 관리받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장남이란 사실임을, 옛날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형이 떠나기 전부터 형을 생각하면 좋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죄책감이라고 부를 만한 마음이.
4
괴물이 나타났다던 공원은 제법 컸다. 경계가 명확지 않았으나 하루 안에 다 살펴보기란 어려울 듯싶었다. 나와 정현은 일단 강가로 향했다. 넓은 주차장과 공터를 지나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물과 뭍의 경계. 일주일 전의 소란을 거짓 치부하듯 더운 바람이 호젓이 불어왔다.
수면 위로는 형형색색의 쓰레기들이 잔뜩 떠다녔다. 과자 봉지나 플라스틱 병, 담배곽, 낡은 신발이나 바람 빠진 공까지, 종류를 다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그 알록달록한 쓰레기들은 파도의 결을 따라 출렁였다. 잿빛 시멘트에, 뭍을 향해 자꾸만 몸을 부딪쳤다.
“그날 이후로 쓰레기가 더 늘었나봐. 원래도 적잖은 편이었지만. 쓰레기통도 넘치고, 사람이 그렇게 많으니 슬쩍 버리고 토끼기 쉬웠겠지.”
알록달록한 강의 둘레를 따라 걸으며 정현이 말했다. 누군가 쓰레기를 버려놓으면 그 자리는 암묵적으로 임시 쓰레기통이 되어 사람들이 다 함께 버린다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 하지만 강에까지 버리다니. 내가 어이없어하자 정현이 말했다.
“오히려 강이라서 더 쉽게 버린 것 아닐까. 한강은 깊고, 계속 흐르니까 쉽게 눈에서 사라질 거라 생각했겠지.” 정현은 문득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결국 다시 돌아오게 돼 있지만 말이지.”
정현은 자신의 통찰력을 과시하듯 음흉한 표정을 지어댔다. 위키 사이트를 탐독하는 게 취미인 그는 자신의 넓은 지식을 활용하여 떠들길 좋아하는 친구였다. 저렇게 으스대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괴물이 나타났단 곳까지는 30분가량이나 걸어야 했다. 차가 지나는 다리 밑이었다.
그곳까지는 평범한 산책로였다. 강에서는 보트가 커다란 엔진 소리를 부아앙 내며 빠른 속도로 곁을 지나쳤다. 그 유명한 대괴수 수색대였다. 일주일 전 괴물이 나타난 이후로 계속 한강 유역을 지킨다고 했다. 반짝이는 물방울 튀기며 달리는 모습은, 지금으로선 수색보다는 즐겁고 시원한 놀이처럼 비쳤다. 땀 흘리며 걷는 우리가 괜히 비참해졌다.
괴물이 나타났다던 다리 밑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해 외려 놀랐다. 얕은 강물을 뚫고 삐져나온 풀잎이 무성했고 그 앞에 접근을 제한하는 울타리가 서 있었다. 다리와 땅이 만나는 지점 밑에 작지 않은 공터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괴물의 출현 이후 추가로 조치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꽤 보이기는 했다. 방송사랄 건 아니고, 개인 방송인들이었다.
난 울타리 너머 사이사이로 강물이 비치는 수풀을 바라보았다. 저 억센 풀들을 헤집고 그 큰 괴물은 이 땅에 상륙을 한 것이었다. 결국엔 실패했지만.
괴물이 나타났던 날, 그것은 당일 사살되었다. 군인이 동원되고 헬기가 주위를 날아다니던 광경을 티비로 봤었다. 모든 것을 촬영하는 드론과, 여백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머리들. 운 좋게 현장 가까이 자리 잡은 사람들은 두 눈으로, 공원에 왔지만 거리가 먼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그리고 또 전국의 사람들, 전세계의 사람들 역시 미디어를 통해 괴물이 사살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다리가 있기는 한 건지 어떻게 섰던 건지 모를 괴물은 주저앉았고, 흘렀으며, 모습을 드러냈던 강가로 돌아갔다. 별 흔적도 남기지 않고.
과학자들은 분노했다. 생포를 그토록 쉽게 포기함에 내보인 반응들은 경악에 가까웠다. 정현 역시도 옆에서 시도 때도 없이, 생물학적으로 귀중한 연구 가치를 지닌 괴물을 생각 없이 사살해버린 대한민국의 군대를 규탄한다! 며 떠들어댔다. 분명 내가 본 영화 속에선 괴물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던데. 난 심드렁하게 흘려들으며 주변을 살폈다. 제방을 오르면 나무가 많은 공원이었다. 뉴스에서 비췄던 바로 그 장소였다. 무수한 사람들로 북적였던, 형이 밟고 있던 땅. 강가를 등진 채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한강에 온 목적은 형을 찾는 것이었지만 형을 찾을 수 있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방송에서 형을 본 것도 벌써 일주일이나 전의 일이었으니. 공원의 부지는 무진장 넓은 사막처럼 느껴졌다. 지독하리만치 뜨거운 열기가 정수리에 쌓여갔다.
정현은 헉헉대며 이제 어쩔 거냐고 물었다. 살이 오른 얼굴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에게 돌려줄 답은, 일단 걷자는 것밖에. 그것밖에 없었다. 난 정현의 심히 좋지 못한 표정을 뒤로한 채 몸소 걷기 시작했다. 형이 이 넓은 사막에 바늘처럼 숨어 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난 생각이라는 것을 그만두기 위해 노력했다.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약간이나마 걱정이나 부담이 덜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중키의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길을 걸으면.
그러면 정말, 마음은 가벼워졌다.
5
공원엔 형은 고사하고 사람이 많이 없었다. 나야 평소의 모습을 모르지만 정현에 이르면, 이상할 정도로 없었다. 두 시간가량을 걷다 정현은 기어이 벤치에 드러누웠다. 더 이상은 무리라 말하는 그는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나도 그랬다.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뙤약볕이었다. 아지랑이 피는 공원은 끝을 보이지 않는데.
“너네 형뿐만 아니라 노숙자가 한 명 안 보이네 오늘은.”
“보통은 많아?”
“몇 명씩은 꼭 보이는데 말이야.”
난 지나친 풍경들을 되짚었다. 많지 않은 사람이 다니던 풍경. 그중에 노숙자는 없었고 평범히 놀러 나온 사람이라든가, 사건현장을 보도하러 온 방송사나 개인 방송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괴물이 노숙자들을 공격했단 사실을 떠올렸다. 일주일이 지났다지만, 짚이는 상관관계는 그뿐이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집이나 갈까, 중얼거렸다.
우린 내렸던 역에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넜다. 오후 햇살에 몸을 뒤챌 때마다 반짝이는 한강, 괴물이 나타났던 한강, 형이 마지막으로 발견됐던 한강.......괴물의 정체는 뭘까? 작은 읊조림에 정현이 반응했다.
“추측할 거리가 없지는 않지.”
그는 입을 가만두기를 못 견뎌하는 사람이었다. 어디 한 번 얘기해보란 식으로 말하자 정현은 씩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6
시카고의 어느 연구소에서의 일이야. 존 K 에르노라는 과학자가 있었어. 1899년에 태어나 일찍이 과학에 흥미를 보이고,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다사다난한 인생의 남자였지. 그는 화학 실험의 중독자였어. 응? 무슨 실험이냐고? 에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요지는 따로 있으니까. 들어 봐봐. 초등학교 과학시간 때 실험하던 거 기억하지? 항상 실험 전에 선생님이 알려주던 준칙들이 있잖아. 기억해? 항상 직접 맛보지 말고, 냄새를 맡을 땐 손부채질로 바람을 만들라 하고 하는 것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뭐야. 어떤 물질이 손이나 피부 어딘가에 묻었을 땐, 당장 세면대로 달려가 씻으라는 거잖아. 이 사항은 존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거였지. 화학자인 존은 그런 상황이 아주 많이 발생했고, 아주 많이 세면대로 달려가 손을 씻어야만 했어. 그 말은 즉, 그의 연구소에 있는 싱크대에 무수한 종류의 화학물질들이 들어갔단 소리지. 우리로서는 하나하나 다 알지도 못하는, 다 헤아리기도 힘든 많은 양의 잔여물들이, 그 안에서 섞이고 있던 거야. 그런 날들이 몇백 개로, 몇 년으로 쌓였지. 아, 잠깐, 여기서 내려야 된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응? 음, 맞아 맞아. 그래서 어느 날 사고가 터진 거야. 가장 가시적으로 잘 드러나는 드라마틱함이지. 폭발이야. 말 그대로, 펑! 터진 거지. 세계각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만큼 충격적인 사고였어. 다행히 존은 죽지 않았......응? 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어차피 다 지어낸 이야기니까. 아무튼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이후로 전해오는 후일담이 알짜야. 들어봐.......왜? 아니, 이 이야기에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원래 세상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소설인 법 아니겠어? 일단 들어는 봐. 그 폭발이 있은 후 근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현장에, 검은 연기 속 유유히 걷는 거대한 그림자를 봤다고 해. 그래, 한강의 괴물처럼. 비록 그 진짜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했고, 연기가 걷힌 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지만, 목격자들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고 해. 그곳에 괴물의 그림자가 있었다고.
......결론은, 한강의 괴물도 그렇게 생겨난 것 아니겠냐고. 기억해봐, 쓰레기를 왕창 뒤집어쓰고 있었잖아. 한강으로 유입되는 쓰레기가 어마어마한데, 거기에 얼마나 유해물질이 많겠어. 저런 괴물이 나타나도 이상할 것 하나 없겠지.
7
정현의 자취방에 들어갈 땐 하늘이 밝은 저녁이었다. 정현이 배달음식을 고르는 동안 난 1인용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 견고한 멍때리기는 엄마의 문자가 오며 깨졌다. 정현이한테 잘 대해주라는 내용 등의 짧은 문자였다. 나 역시 짧은 답장을 보냈다.
부모님은 내가 서울에서 여름방학 특별강의를 듣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수능을 고작 몇 달 앞둔 고등학교 3학년인 만큼, 형을 찾으러 2주간 서울로 떠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왤까. 막상 서울에 올라와 형에의 생각이 많아진 것도 아니었다. 조금은 편해진 것도 같았다. 외려,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는 수능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불안이었다. 이러고 멍 때릴 때가 아니지. 챙겨온 문제집을 꺼내 펼쳤다.
치킨을 주문한 정현도 식탁에 앉아 인강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좌식 탁자 앞에 앉아, 배달이 오기까지 각자의 공부를 했다. 한 시간이 금방 지났다. 정현의 방은 채광이 좋지 않아 해가 넘어가는 것도 몰랐다. 난 배달이 도착한 후에도 쉽게 문제집을 덮지 못했다. 여기까진, 적어도 여기까지는 풀자. 그런 마음들이 쌓여갔다. 걱정이 무거운 추가 되어 어깨를 누르는 느낌이었다.
“너도 참 열심이다.”
정현이 치킨 상자를 열며 말했다. 기름진 냄새가 순식간에 방 전체로 풀어졌다. 고3인데 이것도 부족하지. 난 닭다리를 하나 집어 들며 무심하게 답했다. 우린 닭을 뜯어먹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의 공부 상황, 지망 대학교, 인터넷 강사를 대상으로 하는 농담 등등. 시간이 지나 주제는 옛날 이야기로까지 이어졌다. 정현과는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그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내가 널 가르쳐주고 그랬는데 말이야.”
정현의 말에 그런 과거를 떠올리며 은은히 웃었다. 분명 어렸을 적엔 지금처럼 공부에 열중이지 않았지. 형이 있던 때만큼은, 아쉽지 않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었지.
형이 떠나고 나서야 의무적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형의 편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모님은 나를 예전처럼 대우했으니, 의무감은 오로지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 혼자라는 불안감이 엉덩이의 무게를 차츰차츰 불린 것이었다. 부모님의 형을 향한 말들은 기실, 문틈을 넘어 내 귓바퀴에도 고인 것이었다. 잠시간 말없이 고기만 우물우물 씹다가 속이 거북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치킨무도 콜라도 소용이 없었다. 식사를 마친 뒤 더부룩한 속을 안은 채로 펼쳐져 있던 문제집 앞에 앉았다. 수능까지 남은 시간 119일......
8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잠에 잘 들지 못하는 편이다. 다만 정현의 집에서는 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집의 푹신한 침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맨 바닥에 이불만 깐 자리였음에도. 정현이 부르는 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으로 흉흉한 꿈에서 깼다. 꿈의 내용은 오래지 않아 잊혔다. 정현은 비가 온다 말했다.
난 그제야 타지에서 2주를 보내는데도 일기예보 한 번 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어차피 실내에서 수업이나 들으리라 생각했겠지만. 난 할 일이 있었다. 장대비는 그런 내게 짙은 무력감을 자각시켰다. 타닥타닥타닥.
정현은 처마 아래 선 채로 이제 어쩔 거냐 물었다. 일단 자신은 집에서 인강이나 들을 예정이라 말하며. 난 빈칸을 채우듯 떨어지는 흰 선들을 바라보며 깊게 생각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포기해야지, 뭐.
신기하게도 조금,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9
비는 일주일간 지속 됐다.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한참을 공부를 했다. 강의를 듣고, 문제를 풀고, 과목을 바꾸기. 이러한 패턴이 하루 내도록 반복되고, 그런 하루가 반복됐다. 어디 지하 터널에 물이 잠겨 사람이 죽었단 뉴스가 들렸고 발목 너머까지 찰랑이는 수면을 뚫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엄마에게 괜찮냐는 전화가 총 세 통 왔다. 어차피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괜찮은데. 엄마에겐 학원이랑 정현이네 집이 가까워서 큰 문제는 없다 전했다.
그러니까, 큰 문제가 없었다. 형은 없었고, 괴물의 존재를 사람들은 점차 잊었다. 폭우기간 동안 노숙자들이 크게 사라지고 있단 기사가 떴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잘 됐단 반응이 많았다. 인터넷에선 추모와 농담이 공존했고 말싸움은 끊기는 일이 없었다. 평범한 일상. 재난문자가 온 것은 내가 서울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나는 날, 막 비가 그친 오전이었다.
10
한강 부근에 괴물 출현.......
우리말이 아닌 것을 본 듯 눈앞에 두고도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농담이라거나 일종의 착시현상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봐도 글자는 변하지 않았고, 고개를 돌리자 진즉 날 보고 있던 정현과 눈이 마주쳤다. 얇게 뜬 눈이 어떠한 질문을 보내오고, 난 소파에서 일어남으로써 대답했다. 일주일만의 외출이었다.
돌이켜보면 일주일이나 외출을 안 했구나. 정현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지만, 난 무려 서울까지 와서 집에 틀어박혀 있던 것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일각에서는 대견스럽기도 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바깥을 걷는 감각이 신선했다. 거의 잊고 지내던 형의 얼굴이 오래간만에 선연해졌다.
정현은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도 능숙하게 길을 안내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이전이랑 같은 장소라네. 금방 갈 수 있겠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이 운행하는 게 다행이었다. 정현은 휴대폰을 내게 비춰 영상을 보여주었다. 오랜 비로 황색으로 변한 한강 한가운데 까만 괴물이 하나 헤엄치고 있었다. 저번처럼 지상에 상륙할 틈도 이번엔 없었다. 대괴수 수색대의 진가가 빛을 발했다. 한량처럼 보이기도 했던 보트들이 괴물의 사위로 달려들며 그물을 던졌다. 몰린 구경꾼들의 환호소리가 일발 들려왔다.
순간, 화면 위로 꿈속의 장면이 덧씌어졌다. 형이, 누추한 모습의 형이 그물에 엉킨 채로 한강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기껏 잊었는데.
나도 모르게 정현의 팔을 쳐냈다. 그는 황당한 표정이었고 나는 미안, 짧게 말할 뿐이었다. 정현도 핸드폰을 끄고, 우린 잠시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냈다. 나의 머릿속은 한껏 시끄러웠지만.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정현이었다.
”형을 생각하지?“
난 꿈의 내용을 되짚었다. 희미한 인상일 뿐이었다. 넓은 강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형. 어쩌면 꿈이 아니라 현실일까. 섬뜩한 생각이 뒤통수를 스쳤다. 정현의 질문 때문에 더욱 형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 동안 형을 잊고 지냈던 나에 대한 생각을.
분명 서울에 온 동기가 형을 찾겠다는 것이었는데 실질적으로 행동한 것은 두 시간이 채 안 됐다. 그저, 공부를 했다. 집에서처럼. 형에 대한 생각은 그 견고한 생활 속으로 침투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하루들이다.
“너무 자책하지는 마. 네가 잘못한 것은 없으니까.”
정현이 무심하게 말했다. 당연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한없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줄곧 속으로만 생각해왔기에 그런 것일까.
“뭐, 만약 형을 만나면 뭐하고 말을 걸 건데. 엄청 어색할 것 같은데?”
정현은 이내 분위기를 풀려는 듯 자못 쾌활한 투로 말했다. 난 머릿속으로 그의 가정을 그려봤지만 조금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에 온 첫날이 떠올랐다. 이글거리는 땡볕의 공원과 땀 흘리며 걷던 시간이 재생됐다. 그다지 형을 찾으려는 노력도 않고 맹목적으로 걸었던 시간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훨씬 간명해졌다. 정말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실 난 형을 찾으러 서울에 온 게 아닐지 몰라.”
“무슨 소리야, 갑자기?”
혼란한 정현의 목소리와 달리 내 머릿속은 더없이 명정했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처럼 말이 술술 나왔다. 사실 난 형을 보러 서울로 온 게 아니었다고. 바로 형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그날 공원을 걸으며 끝난 거였어. 그날로 난 확인했던 거야. 이 세상에 형은 없다고. 우리 그날 엄청 힘들었잖아. 형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그랬던 건 일종의 작별인사였던 거지. 아니, 선언이었던 거지. 나와 형은 이제 서로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고. 적어도 다음 날부터는.......다음 날에 포기하자고 입에 담은 순간부터는 완전하게 끝난 일이었어.”
이제는, 이제는 잊을 수 있겠어. 정현은 이해하지 못한 듯 했지만 나로서는 더없이 후련했다. 비로소 서울에 오기를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진동을 내포한 경고음이 지하철 안을 가득 울렸다.
위급재난문자가 각각의 휴대폰 정중앙에 박혀 있었다. 내용을 읽기도 전에 정현이 다급하게 어깨를 치며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아까 전과 같은, 괴물의 현상황을 비추는 라이브 방송이었다. 휴대폰 화면 속 한강에는, 뒤집힌 보트와 여러 마리의 괴물들이 헤엄치는 중이었다.
“뭐, 뭐야?”
“갑자기 더 늘어났어! 괴물이 하나가 아니었다고!”
사람으로 의자가 가득 찬 지하철 안은 한껏 어수선했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휴대폰으로부터의 경고음,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포개져 혼돈이라는 이름의 불협화음이 연주됐다. 그리고 실내의 상황이 조금도 진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하철은 지상으로 올랐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와, 앞선 칸부터 후미까지 차례대로 비춰드는 빛. 한낮의 풍경이 모서리가 둥근 창들에 가득 찼다. 한강 위였다.
사위에서 비명과 고함, 욕, 울음이 빗발쳤다. 정현도 등 뒤로 목을 꺾어 이마를 박고 창밖을 쳐다봤다. 나도 그랬다. 한강 위 떼를 지어 헤엄치는 괴물들과, 그들이 상륙하지 못하끔 싸우는 강변의 모습이 철교 위에서도 선명했다. 도망치는 구경꾼들의 뒷모습까지도.
난 창밖에 눈을 떼지 않고, 입을 꾹 닫은 채 그저 생각만 했다. 어쩐지 괴물들이 땅 위로 상륙하지는 못할 것 같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철교에도, 닿지 못하겠지.
가만 보면 괴물들은 헤엄치는 것보다는 발버둥 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저 중 하나가 형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등받이에 어깨를 기대고, 한강의 혼돈을 내려다 봤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한강. 지하철은 선로를 따라 한강을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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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너무 빠르다. 10개월 만에 온 도훈의 전화를 받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올해 새해 인사가 마지막이었다. 반년이 훌쩍 넘은 10월, 스피커 너머의 그는 술이라도 먹었는지 잔뜩 들뜬 목소리였다. 야, 너. 우리 초등학교 폐교한 거 아냐. 그럼 인마, 내 말 못 믿냐? 당연하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요즈음 학교가 폐교하는 것은 흔한 일이고 지방의 우리 모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에 한 번 가보자고. 그의 말에 응? 굳이. 언젠가 시간 날 때 가 봐도 괜찮긴 하겠지만......내가 말꼬리를 끌자 도훈은 감춰뒀던 비밀을 하나 더 풀었다. 너 민성이 기억하냐? 갑작스런 이름에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무시무시한 부잣집의 도련님이시자 알아주는 동네 바보 김민성. 아이들에게 곧잘 먹을 것들을 사주고 짓궂은 장난도 잘 받아주던 녀석을 난 기어이 떠올렸다. 뒤따르는 도훈의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우리 학교 이제 민성이 거란다. 뭐? 민성이가 샀다고! 그 땅을! 대박이지 않냐? 말하자 나는 속으로, 대박이잖아! 외쳤다. ‘폐교를 구매해 집으로 개조 했어요’ 같은 영상들은 몇 번 봤으나 나의 동창이, 나의 모교를 사버릴 줄은 감히 예상 못했다. 내 무음의 흥분이 전해졌는지 도훈은 신이 나서 말해댔다. 그니깐. 다음 달에 한 번 놀러가자고. 딴 애들도 몇 명 모아서. 나도 누구한테 들은 거야. 일단 다음에 날짜 맞춰보자. 그리하여 다음 달, 11월 말. 토요일 아침부터 도훈의 승합차에 올랐다. 다른 두 친구들과 함께였다. 그 두 친구가 뒷자리에 타고 내가 조수석에 탔다. 두 사람 모두 평소 연락하지 않는, 그저 고향으로 묶여있는 친구들이었다. 분위기가 무척 어색했고, 그것은 창문을 열어도 쉽게 환기되지 않았다. 차 안의 구세주는 도훈이었다. 모두와 두루두루 친한 그가 대화를 주도하며 분위기를 풀었다. 대화의 주제는 아무래도 고향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5년 만의 귀향이었고 다른 이들도 아무튼 오래간만이었다. 함께 뛰놀았던 어렸을 적의 친구들과 낙서로 가득했던 좁은 골목들과 학교의 뒤뜰-같은 것들을 입에 올리며 그들과 나 사이의 투명한 벽은 금세 허물어졌다. 동향과 동창은,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예진의 이름이 대화의 장에 올랐다. 내게선 무르익다 못해 썩어 사라지기 직전까지 가버린 이름. 간신히 기억해낸 그 이름은 다소 충격적인 내용으로 등장했다. 민성이랑 예진이랑 사귀잖아. 한 사람의 말에 다들 알고 있던 듯 맞장구쳤고 나 혼자만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야 소식을 들었다는 소외감 같은 건 차치하고, 그 내용 자체가 얼얼했다. 예진이란 이름을 기억한 시점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들이 무수하게 떠올랐다. 단정한 단발의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와 갸름한 눈매, 그 예쁜 미모, 그래서 더 괜히 장난을 당하곤 했던 날들. 아마 그녀를 괜히 건드리던 남자 애들은 모두 일말의 연정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 파릇했던 나 역시도 그랬다. 날 쫓아오는 그녀에게서 달아나던, 달리며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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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밤을 달린다. 휴대폰으로 틀어놓은 뉴스에서는 아나운서가 쫑알댄다. 인공지능 발전의 현황이 어떠하니...전망은 어떠하고...이러이러해서 택시기사가 대체될 날도 머지않았으며...뻔하디 뻔한 말들. 분명 5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밤을 달리는 미터기는 빠르게 올라간다. 운전이 너무 빨랐던 걸까. 뒷자리의 손님은 몇 번 유리창에 머리를 박더니, 우웩, 토를 한다. 이젠 익숙해진 상황에 튀어나오는 익숙해진 욕설. 인공지능에게 토사물을 닦을 능력이나 있을까? 택시를 몬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때는 택시 운전사란 참 좋은 직업이라 생각했다. 운전이야 원래 좋아하는 편이었으니. 돈을 받고 드라이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손님들과 대화도 하면 무료하지도 않을 테고. 희망찬 몽상이었다. 첫날부터 늦었으니 빨리 좀 달리라고 재촉하는 인간, 자꾸만 뭘 씹으면서 부스러기를 흘려대는 인간, 하차하며 차가 부서져라 문을 쾅 닫아버리는 인간. 지갑 사정이 나빠짐에 따라 야간 택시로 노선을 바꾸며 골치 아픈 상황들은 늘어났다. 이 정도 일이야, 뭐. 유별나지 않다. 한강의 공원 주차장에다 잠시 차를 세운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거리가 꽤 남은 지점. 운전석을 박차고 나오니 겨울의 밤공기가 시리다. 날숨마다 허연 입김이 베여있다. 택시 트렁크를 열어 걸레를 꺼낸다. 해진 걸레다. 토는...나름 흔한 상황이니까. 아무래도, 야간의 택시였으므로. 공중화장실에서 걸레를 한 번 적신 다음에 진득한 토를 닦기 시작한다. 걸레질이 수월하도록 몸을 움직여 준 손님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신 사과한다. 자신이 걸레질을 하고 싶다는 듯 팔을 어정쩡하게 움직이기도 한다. 결국 내가 다 닦았지만. 공중화장실에서 걸레를 빨고 나오니 손님이 택시 바깥에 나와 서 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하얀 와이셔츠만 입고 있는데도 추운 기색이 없다. 다가가니 그가 왠지 모르게 조급한 어투로 내게 말을 건다. 그, 죄송한데 잠시 몸 좀 식히고 가도 될까요? 영 좋지 않은 것 같아서...흐려지는 말꼬리. 이후에 세탁비를 지급하겠단 말을 덧붙인다. 사내는 나름 멀쩡해 보인다. 그렇게까지 취한 건 아닌 걸까. 그렇다기엔 그의 얼굴이 너무도 창백하다. 물이라도 좀 드릴까요? 아, 너무 감사하죠. 입이라도 헹궈야 될 것 같아 물병을 건넨다. 그는 입 안에 물을 머금다, 뱉는다. 퉤. 사회생활이란 게 참, 쉽지 않네요. 그가 웃으며 말한다. 아직 입사한지 1년도 안 됐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이런 걸 60대까지 하라니, 영혼이 남아나지 않겠죠. 하하. 그는 웃는다. 시원한 허심탄회라도 할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눈시울은 점점 더 뜨거워져 간다. 같이 입사했던 동기들도 다 퇴사하고, 술은 잘하지도 못하는데, 하필 요즘 또 대리님한테 존나 까이고......그래서 회식을 빠지기도 힘들고, 그리고, 어머니는 아프시고......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미끄러진다. 코끝에 콧물이 맺혀있다. 그는 울음을 토하기 시작한다. 난 말 없이 그의 어깨를 토닥인다. 번듯한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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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식. 여름방학이 끝났단 서러움은 금세 새 학기의 설렘으로 잊혔다. 오래간만인 친구들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 학교는 오기 싫으면서도 오고나면 재밌는 곳이었다. 조용히 앉아 있는 친구들도 있지만 교실 뒤편에 모여 떠드는 친구들이 많았다. 종이 치고도 떠들던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자 느긋이 자리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익숙한 자세로 교탁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방학 잘 지냈냐, 놀기만 한 건 아니겠지, 하는 상투적인 인사들 뒤로, 중요한 공지가 있다 말했다. 그는 전학생이 있다며 열려있는 문 너머의 복도에 손짓했다. 한 여자아이가 뻣뻣한 걸음걸이로 교실에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뻣뻣이 굳어버렸다. 안녕하세요. 뒷자리에는 닿지도 않을 자그마한 목소리. 시선을 내리깐 그녀의 얼굴은 이틀 전의 오전으로 날 호출했다. 볕이 들지 않는 복도였다. 낙후된 복도식 아파트는 하나의 복도에 다섯 개의 문이 나란히 있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옆집으로 이사 온 가족이 초인종을 눌렀다. 우리 가족 모두 집에 있던 참이었고 우리는 복도로 나가 그들과 대면했다. 그들은 거구의 흑인 남자와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딸로 보이는 여자아이 세 사람이었다. 남자는 두터운 입술로 어설픈 한국어를 구사하며 인사했다. 엄마와 아빠는 어엿한 한국인이면서 괜히 아, 예, 안녕하세요, 우물쭈물 인사를 받았다. 난 반대편에 선 그들의 딸을 보았다. 키는 나보다 작지만 또래로 보이는 외모였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 얼굴을 들여다보다 괜히 시선을 돌렸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엄마아빠는 상대 부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내게 일을 떠맡겼다. “따님이 참 예쁘네요. 우리 애랑 또래로 보이는데.” 그러고는 인사를 시키는 것이었다. 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의도치 않은 작은 목소리로 안녕, 하니 메아리처럼 안녕, 이 돌아왔다. 엄마에 의해 강제적으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자신의 아빠만큼은 아니지만 어두운 피부였고 이목구비도 신비로운 느낌이 맴돌았다. 그녀와 나는 동갑이었다. 그녀가 이름을 유진이라고 소개할 때, 난 그것이 본명일까에 대한 의구심을 잠시간 품었다. 불편한 이웃이 교실로까지 들어오자 꽤나 당황했다. 다만 오래지 않아 사라질 당황이었다. 유진은 조용한 아이였고 쉬는 시간에도 홀로 책상에 앉아 노트에다 뭔가를 끄적이는 데만 열중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교실의 누구와도 쉽게 말을 섞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지목 당할 때나 겨우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친구들과의 대화는 의무적으로만 성립됐다. 난 아직 한 번도 대화해보지 못했다. 나 또한 친화력이 좋지 않아 본래 어울리던 친구들과만 어울렸다. 같은 교실이 아니었다면, 같은 아파트가 아니었다면 아예 모르는 사이였을 터다. 우연한 배경으로 서로를 인지하는, 그 정도의 사이였다. 유진이 1학년 2학기에 전학을 온 후 나와 그녀는 3학년까지 같은 교실을 썼다. 이웃이라고 선생님들이 반 배정에 수작을 부렸나 의심하기도 했다. 나도 유진도
- 구포대교
-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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