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빈 [哀彬]
- 작성자 문휘
- 작성일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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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까기 인형
-1장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린 클라라의 집에서 클라라는 대부 드로셀메이어에게 호두까기인형을 선물 받는다. 하지만 오빠 프리츠와 다투던 중 인형이 망가지고, 슬퍼하는 클라라를 드로셀메이어가 달래준다.
-2장
한밤중 클라라는 호두까기인형을 보러 내려갔다가 생쥐들과 장난감들의 전투를 목격한다. 클라라가 쥐왕을 물리치자 호두까기인형은 왕자로 변해 함께 과자의 궁전으로 떠나고, 눈의 여왕과 눈송이들의 춤을 만난다.
-2막
과자의 궁전에서 요정들이 두 사람을 환영한다. 초콜릿, 커피, 차 등 각 나라를 표현한 춤과 꽃의 왈츠가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사탕요정과 왕자의 2인무로 막을 마무리 한다.
-에필로그
유모에 의해 잠이 깬 클라라는 지난밤 즐거운 꿈을 생각하며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는다.
(https://cafe.daum.net/100yanara/ErQ8/12?svc=cafeapi 백야나라 | 호두까기인형 작품해설)
글 중 나오는 ‘바’는 발레 연습 때 몸을 지지하고 균형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고정된 수형막대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시면 사진을 한번 보는 게 이해하시기 쉬울 것입니다.
(구글검색 ai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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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한 공기가 너와 나를 짓 누른다. 그 짓누름 때문인지, 나의 찢음 덕분인지 너에게서는 더러운 피가 흐른다. 그 액체를 가만히 바라본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검붉은 색에 위압감을 느끼지만, 그러한 느낌을 떨쳐내려 머리를 연신 흔든다. 감긴 눈을 바라본다. 아무 감정도, 미동도 없는 그 감긴 눈이 너무나 공허하다. 힘 없이 축 쳐진 두 팔로 시선을 옮긴다. 내가 드디어 널 무너트렸다는 사실에 기쁘다. 나도 너의 옆에 천천히 눕는다. 축 늘어트려진 5개의 손가락이 달린 손. 그리고 검지와 중지가 없는, 3개의 손가락이 달린 손. 손가락 하나, 하나를 세어가며 기억들을 떠올린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기억을 어느 때보다 더 온전히, 뚜렷이 해보려 노력한다. 그리고 너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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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발레리나가 멋진 점프를 할 때. 관중들이 모두 무대 속에서 빛나는 발레리나만 쳐다볼 때. 그 장면에서 나는 희열을 느꼈다. 너무나 멋져 보였고, 저 존재가 내가 되고 싶었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엄마에게 처음 발레에 대해 얘기했다. 엄마는 고민하다가 나를 데리고 발레학원에 갔고, 나와 너는 거기서 처음 만났다.
넓고도 하얀 건물 속, 세련된 조명까지. 어린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선생님은 나의 나이를 물어보고는 누군가를 불렀다. 바를 잡고 거울을 보며 반복된 동작을 하던 그 아이는 선생님의 부름으로, 내 앞으로 뛰어왔다. 그 아이는 나와는 다르게 예쁜 옷에 정갈한 머리 묶음까지, 모든 것이 예뻤다. 선생님은 잠깐 이 아이랑 놀라며, 원장실을 엄마와 함께 들어갔다.
“안녕? 내 이름은 애빈이야. 하애빈.”
그날 난 애빈이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고, 애빈이가 계속해 내 머릿속에 남았다. 나도 마치 너처럼 되고 싶었던 것처럼.
선생님은 항상 애빈이와 내가 같아지길 원했다. 동작도 애빈이 처럼. 시선처리도 애빈이 처럼. 그럴 때마다 나는 애빈이와 같아지려 노력했다.
처음 콩쿠르에 나가게 된 날. 엄마는 나에게 정말 예쁜 무대의상을 사주셨다. 처음 입게 된 예쁜 옷과, 드디어 무대에 서게 된다는 설렘. 그것 두 개가, 그때의 전부였다.
대기실에서 발견한 애빈이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복장을 입고 있었다. 반짝이는 레이스와 악세사리들. 집에선 너무나 마음에 든 복장인데, 애빈이의 복장을 보고 나니 내 자신이 초라해졌다. 학원선생님도 내 복장을 보곤 이야기한다. “애빈이 처럼 입어야 수상하기 쉬운데.. 괜찮아 더 잘하면 돼.” 그때의 난 죄를 짓지 않아도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만 같았다.
니가 춤추는 그 광경을 바라봤을 때 난 너의 모습에 매료되었지.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웃음을 터트리며 애빈이를 바라보고 계셨다. 내가 본 선생님의 표정 중에서 가장 환했다. 난 춤출 때 선생님을 바라본 적이 없지만, 나의 춤보다 더 환한 미소로 너의 춤을 바라봤을 거야. 그 정도의 표정이었거든.
4등을 한 나에게는 잘했다는 한마디. 그때, 자신의 노력이 너로 돌아온 것만 같은 선생님은. 트로피를 든 너를 바라보며 칭찬했지. 나에게는 잘 췄다며 웃어주는 너가, 앞 카메라를 보고 환하게 웃는 너가. 처음으로 싫었어, 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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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빈이와 함께 같은 예술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조례시간, 담임선생님은 자신이 발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설명하셨다. 시간이 많이 지나간 걸 확인한 선생님은 말의 결론을 내곤, 자신이 학생들의 이름 뜻을 듣는 걸 좋아한다며 애빈이를 바라보았다.
“이 반에서 제일 유명한 우리 애빈이부터 해볼까?”
당황한 너를 일어나,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지.
“먼저 제 이름의 애는 ‘사랑 愛 (애)’ 이구요. 빈은 ‘빛날 彬 (빈)’자입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께서는 ‘남들을 먼저 사랑하고, 그에 맞게 빛나라’라는 의미로 지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넌 천천히 자리에 다시 앉았고, 아이들과 선생님은 큰 박수를 쳤어. 왜 인지 모르게 너의 이름 뜻이 잊혀지지 않더라. 선생님이 제일 유명한 너를 먼저 시켜서 인지, 나와 다르게 이름 뜻이 너무나 화목하고 행복해 보여서 인지. 난 집에 가서 그 이름의 한자를 계속해 손에 썼어. 이 한자가 정말 먼저 시킬만한 한자 인지, 박수받을 만한 한자인지 궁금했거든.
쉬는 시간이 되고, 교실에 찾아온 선배들은 모두 널 찾았지. 너가 그 전국콩쿠르에서 대상을 탄 애냐며, 몇 살 때부터 했냐며, 얼굴은 왜 이렇게 이쁘냐며. 난 그 옆에 서서 내가 무얼 해야 할까 고민했어. 빠져줘야 하나, 가만히 있어야 하나 말이야. 한 선배는 뻘쭘해하는 나한테 물어보시더라고, 몇 등 했었냐고. 분명 4등도 자랑스러운 등수인데, 난 그렇게 생각하려 했는데. “4등 했어요.”라고 하니깐 “너도 잘했네~”라고 하시면서 다시 너한테 시선이 가더라고.
애빈이와 같은 복도를 걸어도, 선생님을 함께 마주하여도, 나도 그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야기는 애빈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널 우러러보고, 너는 그걸 부담스럽다고 말했지만 또 좋아하는 표정을 지을 때. 인기 많은 너가 부러웠고, 또 행복해 하는 너가 좋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응어리가 지기 시작했었어. 그게 왜 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전공 수업 중간에 물을 뜨러 간 너를 찾으러 계단에 내려갔었어. 근데 계단 밑에서 내 이름이 들리더라.
“요새 시은이 잘하더라?”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다음 너의 목소리가 울렸어.
“맞죠. 항상 열심히 하죠.”
“조심해~ 친구라고 견제 없는 거 아니다? 그러다가 자리 뺏긴 애들 많아.”
“아-”
“알겠지? 난 너가 더 괜찮다고 보거든. 발레판에선 밝은 미소가 가장 강한 무기인 거 알지?”
“네. 잘 알죠, 언니. 시은이가 잘하긴.. 하지만. 저도 그만큼 잘하고 또 열심히 하니까요.”
그게 무슨 뜻 이였을까. 난 평생 널 못 이긴다는 걸까. 나도 널 이길 수 있을 텐데, 조금만 더 한다면. 널 이기고 싶어, 선배들이나 선생님들이 날 우러러보았으면 좋겠어. 내가 너 보다 더 대단할 수 있다는 걸 보이고 싶어.
나는 그날 이후로 계속해,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했다. 빼먹었던 보강운동과 유연성까지. 몇 번은 턴을 하다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정말 한 번쯤은 이기겠다는 마음 하나로. 그렇게 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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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교무실에 간진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그 말을 잊지 못한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이다. 교무실 문틈 사이로 나는 분명히, 명확하게 들었다.
“국어쌤. 이번 학예회 ‘호두까기 인형’ 하죠?”
“어. 이번에 클라라역을 1학년 중에서 뽑기로 했어.”
“그래요? 음.. 시은이 어때요? 요새 열심히 하던데.”
“열심히야 하지. 애빈이보다 잘하는 것도 사실이고. 근데 전국에서 우리 학예회를 집중할 텐데. 보장된 스타를 올리는 게 안전하기도 하고, 관심도 더 많이 올걸.”
“그래도.. 잘하는 애를 올리는 게..”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사람들은 보던 애만 좋아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스타 말이야. 경험도 없는 애를 세웠다가 민시은이 무대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너 그거 네가 책임질 수 있어?”
수업종이 울림과 동시에 나는 뒤를 돌아 도망치듯 걸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교실에 돌아온 선생님은 학예회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하기로 했다고, 클라라역이 우리 반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하셨다. 다들 자신이 되길 기대하면서도 모두들 시선을 애빈이에게로 돌렸다.
“클라라역은.. 뭐 다들 알지? 애빈이야. 다른애들도 분명 기회가 올 거니까 너무 상심하진 말고, 다들 박수.”
그 박수소리가 교실을 매워쌌고, 내 목도 매워쌌다. 분명 내가 더 잘하는데, 그렇다고 했는데. 잘한다고만 해서 최고가 될 순 없는 건가. 그럼 대체 뭐가 더 있어야 했던 거지.
다음 날, 나는 이 사실을 너에게 이야기했지. 선생님들이 내가 더 잘한다고 했지만 국어쌤이 너만을 고집했다고. 그 센터자리는 원래 내꺼였다고. 부당하지 않냐고. 난 뭐가 되는 거냐고.
“아닐 거야. 너가 잘 못 들은 거겠지. 너무 상심하지는 마.. 다음에도 기회가 올 거니까.”
당황한 기색의 애빈이의 눈빛이 나를 짓 눌렀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며 날 뒤로 하고 걸어가던 애빈이의 뒷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집에 돌아와, 책상에 가만히 앉아 멍을 때린다. 무대에서 금색 트로피를 든 채 웃는 애빈이의 얼굴, 모두가 애빈이를 보며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모습과 기뻐하는 선생님의 표정. 나는 그 사진을 바닥으로 던져버린다.
열심히 했는데도, 죽을 듯이 혼자 연습을 골백번 했는데도. 나는 애빈이를 이기 못했다. 아니 이겼는데, 기어코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다시 내려왔다. 그 자리는 내께 아니라는 것처럼, 너만이 영원히 그 자리를 빛낼 수 있다는 것처럼.
바닥에 떨어진 유리조각을 집어 상장들을 찍어버린다. 장려, 동상, 은상. 그 대회의 상징의 대상은 모두 하애빈.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다쳐버린 손에서 피가 흐른다. 나는 그 피를 보며 아프다고 느끼지만, 조금의 쾌락을 느낀다. 느끼려 노력해 본다. 내가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 애빈이의 말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해 울린다. 듣고 싶지 않아, 유리조각으로 손목을 내리친다. 소란을 들은 엄마는 내 방 상태를 보고 소리를 지른다. 아빠도 들어와 피가 흐르는 나의 손목에 수건을 감싸고, 병원으로 가자며 엄마를 부추긴다.
손목이 아리다. 움직이면 피가 더 나와버릴 것만 같아 움직이지 않는다. 엄마는 연신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묻는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고. 아빠는 조용히 하라며 엄마에게 소리친다. 조용해진 정적에 내가 한마디 한다.
“내 첫 콩쿠르에서 조금 더 예쁜 무대의상을 사주지 그랬어. 그 무대의상만 하애빈 같았더라도, 내 위치는 4등에서 영원히 머물지 않았을 텐데.”
내 말을 들은 엄마는 당황하며 말한다. 학원값으로 나가는 돈이 얼마인데, 그 의상도 중학교 학비도 얼마나 비싼지 아냐고.
그날 나는 깨달았다. 너와 나의 사회적 지위, 너와 나의 가정환경, 너와 나의 태어난 상황은 이미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너와 나는 너무나 다른 패를 쥐고 있었다는 것을.
손목에 밴드를 찬 내 손이 바를 잡는 순간, 많은 아이들이 내 손목을 응시했다. 밴드의 위치가 모든 걸 말해주듯. 많은 아이들이 나의 그리한 기행을 알아버렸고, 선생님들 또한 나를 바라보며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애빈이는 나를 바라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동시에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이냐고 물었다. 그때 너의 표정은 마치 내가 이상한 것에 오해해서 이렇게까지 행동한 것처럼. 이게 이 정도 일인 거냐 묻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한 표정으로 나를 대하는 애빈이가 무슨 마음인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나에게 이 정도로 위로를 건네는 너도, 이 정도로 멘탈이 약한 거냐 쳐다보는 눈빛도. 따뜻함 뒤에 숨어 나를 더욱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내 팔을 잡고 있던 애빈이의 팔을 잡아 때며 도망치듯 무용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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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빈이는 전국 발레 명문 예술고등학교에. 나는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애빈이가 없는 학교는 생각보다 낯설었다. 지역 중학교를 같이 올라와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는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예술중학교에서 일반계로 온 내가 신기하고 또 이상했던 아이들은 내가 망한 발레리나라며 질 안 좋은 소문들을 퍼트렸다.
가끔씩 올라오는 너 게시물 다 보고 다 읽어봤어. 너의 트로피 사진들을 한참 동안 바라본 날도 있어. 그 금색의 색이 너무나 아름다웠거든, 얻어본 적 없는데 그리운 느낌 알아? 넌 모르겠지. 평생을 말이야.
적응하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나는 방안에만 있었다. 그런 나에게 애빈이가 한통의 문자를 보냈다.
“잘 지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연락했어! 나 이번에 춤춘 건데 한번 보고 피드백 좀 해주라~”
“어. 난 잘 지내. 연기 좋네.”
“할 말이 너무 많네 ㅠ 언제 한번 볼까? 이번 주 토요일 나 연습 쉬는 날인데 볼래?”
“응.”
‘내가 애빈이를 왜 봐야 하나, 할 말은 뭐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보고 싶었다. 얼마나 변했을지 내심 궁금했다.
음료를 시키고 카페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오랜만에 본 너는 더 예뻐지고, 옷도 잘 입더라. 애빈이가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나 걸었다. 조금 더 길어진 다리길이가 무섭기도, 아름답기도 했다. 테이블에 놓인 애빈이의 핸드폰을 바라본다. 폰 케이스에 끼어져 있던 앤생네컷이 눈에 띈다. 트로피를 들고 중학교 때 선배들과, 처음 보는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다. 이상하게도 눈이 갔어. 너와 사람들이 브이를 짓고 있는 그 사진에. 너가 올 때까지 뚫어져라 쳐다봤지. 그 브이에 눈이 갔었거든. 날 평생 이인자로 말하는 것처럼. 저 손가락이, 마치 나 같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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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런 걸 봤어. 너도 알꺼야. 저번달 일어났던 살인사건. 범인이 마스크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경찰차에 타는걸. 그 영상하나에 정말 많은 댓글이 달리더라. 그 범인은 분명히 나쁜 사람일 텐데, 왜 이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는 건지. 모든 카메라의 플래시가 그를 향해 터지잖아, 모든 사람이 그 범인의 얼굴과 존재를 알고 있잖아.
나도 그런 관심이 받고 싶었던 건데, 나의 내다 버린 몇 년이 그에겐 1번의 선택으로 이루어졌어. 만약 너가 내 인생에 없었다면, 그 학예회의 클라라는 내 거였겠지. 너만 없었다면, 예고에 진학하여 지금의 너처럼 대한민국을 빛내는 발레리나가 되었겠지. 너만이 없었더라면, 황금빛으로 물든 너의 커리어가 내 커리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랬겠지.
나를 바라보고 있던 은색과 동색의 트로피들을 전부 내 던진다.
그때, 나는 결심했어. 어릴 적 유명해지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로. 내 앞길을 막았던 너를, 어릴 적 나를 위해 없애버리기로.
=
전화를 받은 중년의 남성은 가래 섞인 기침을 몇 번 하고 말을 시작했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폐창고를 산다니 의아하다는 말투로 나에게 의도를 물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전시장을 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요새 젊은 사람들은 이런 숲 속 테마를 좋아한다고. 나는 도예가를 꿈꾸는 사람인데 이번에 도예가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 생각이라고, 정 안 믿긴다면 계획서를 보여드릴 수도 있다고. 그러자 남성은 그런 건 필요 없다며, 자신도 안 팔려 골 머리를 앓던 중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에게 10%를 더 쳐 줄 테니 빨리 계약을 하자고 이야기한다. 남성은 기분이 좋아진 말투로 알겠다며 약속 장소를 정했다. 전화를 끊고 마른 한숨을 뱉는다.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다. 다음으로 해야 할 건 또 뭐가 있을까, 머릿속으로 천천히 정리해 본다.
차를 끌고 좁은 산 길을 따라 올라간다. 푸른 나무가 낮선이 의 출입을 가로막듯 우거져 있다. 창고입구에 차를 세우고 내린다. 맑은 공기가 내 폐를 감돌고 코로 다시 나간다. 조금 녹슨 열쇠로 문을 연다. 사람을 불러 설치해 뒀던 작은 무대와 스탠드 형식의 스포트라이트가 들어서자 바로 보인다. 그와 동시에 꿉꿉하면서도 차가운 한기가 빠져나온다. 걸음을 옮겨 전선실로 향한다. 스포트라이트 2개가 연결된 멀티탭으로 향하는 전기를 킨다. 팍- 하는, 조명이 켜지는 특유의 울림이 밖에서 들린다. 전선실을 나와 본 광경은 놀라웠다. 하얗고도 따뜻한 색의 스포트라이트가 정말 알맞게 무대를 밝히고 있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건다.
8번의 연결음, 끊으려던 찰나에 전화를 받는다.
“애빈아. 요새 많이 바빠?”
“어? 너 왜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했어? 나 어제 딱 스케줄 끝났지.”
“미안. 전화할 겨를이 없었네.”
“괜찮아. 왜 전화했어?”
“내가 요새 새로운 사업을 하나 하거든. 전시장을 하나 만들 건데, 발레 무대처럼 꾸며봤어. 너가 좋아할 거 같아서 보여주고 싶더라고. 시간 되면 한번 올래?”
“우와, 진짜? 너가 그런 재능이 있는지 몰랐네. 나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시간 돼.”
“혹시 내일 돼?”
“어? 아- 음. 그래 알겠어. 오전은 조금 힘들 거 같고, 오후 몇 시가 편해?”
“저녁이 이쁘지 확실히. 전시장이 조금 멀어서 차 타고 가야 하거든. 내가 너네 집 앞으로 갈게 6시에. 괜찮지?”
“어. 완전 괜찮지. 내일 보자.”
“응.”
전화를 끊고 옅은 웃음을 짓는다. 이 웃음은 행복함일까, 씁쓸함일까.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
담 너머로 삐져나온 살구나무와, 장미꽃들. 나무로 지은 2층짜리 고급 주택과 모던하우스들. 그것들 사이에 있는 애빈이에게 간다. 하얀 긴 원피스에 금색 단추와 포인트 벨트. 애빈이는 우아한 자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애빈이 앞에 차를 대고 창문을 내린다.
“왔어? 얼른 가자~”
애빈이는 내 차에 마치 하얀 백조처럼, 다른 세상에 있다가 내 세상에 들어온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내 차에 탑승한다.
“오랜만이네.”
“그러니까~ 전시장까지는 얼마나 걸려?”
“조금 산으로 들어가야 해.”
“그렇게 멀리? 왜 굳이 산이야? 도시에 좋은 곳도 많지 않나?”
“뭔가 산에 있으면 나중에 전시를 열 때 관심이 더 끌릴 것 같았어. 요새 사람들 그런 거 좋아하잖아. 적어도 나는 그러는데 넌 어때?”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들 많지. 나도 나쁘지 않게 봐.”
“발레는 좀 어때?”
“요새 너무 바쁘지. 딱 겨울시즌이라서 인기 많을 때잖아. 공연도 많고.”
“상 받은 거 봤어.”
“아 그래? 요새 번아웃 오려다가 상 받고 좀 괜찮아졌어. 뭔가 더 잘하고 싶은데, 이제 더 올라갈 실력은 없나 봐.”
애빈이는 아쉽다는 듯한 짧은 한숨을 뱉고 내가 튼 라디오에 집중한다. 나도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것에 집중한다.
옆을 돌아 애빈이를 바라본다. 곤히 잠든 애빈이의 얼굴은 온화해 보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어린양처럼. 너무 평안히 자는 너의 얼굴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어. 솔직히. 내가 널 없애버릴 만큼의 분노가 없어지고 있는 것 같았거든.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횡단보도의 뒷 풍경을 바라보며 지난 있었던 일들을 더 또렷이 곱씹는다. 매 말라가는 잿더미에 계속해 나무를 넣듯. 나도 계속해 애빈이에게 쌓인 분노의 불이 꺼지지 않게 노력했다.
=
창고 앞에 도착한 후 애빈이를 깨운다. 캄캄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애빈이는 조금 당황한다. 그 당황한 기색에 안심하라며 설명을 한다. 내 말을 들은 애빈이는 수긍의 고개를 끄덕인다. 차에서 천천히 내리며, 애빈이는 연신 고개를 돌리며 감탄한다.
“공기 좋다~ 나도 나중에 이런데나 여행 올까.”
“좋지. 너무 바쁜 삶은 사람을 지치게 하니깐.”
“안 본 사이에 많이 변했구나? 이런 말도 하고.”
나는 애빈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창고문을 연다. 창고 안으로 들어온 애빈이는 감탄한다. 나는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뒤, 전선실에 들어가 조명을 켜주겠다고 말한다. 전선실에 들어온 나는 아까 뒀던 수술용 메스를 주머니에 넣는다. 스포트라이트를 키자, 밖에선 “우와~” 라며 놀라는 애빈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는 한숨을 몰아쉰 뒤, 밖으로 나선다.
무대에 올라선 애빈이를 보고, 창고의 문을 닫는다. 그러고 애빈이에게 다가간다. 애빈이는 나를 보며 이야기한다.
“우와.. 이쁜데? 난 너가 무대를 아예 쳐다도 안 볼 줄 알았는데.. 좋다.”
“뭐가?”
“그냥 너가 무대를 아직 안 잊은 게 좋네. 그때 행복했었잖아.”
스포트라이트의 불빛을 보며 반짝이는 애빈이의 눈을 지긋히 바라본다. 나는 무대 뒷쪽으로 가 호두까기인형의 전곡을 튼다. 첫 음을 들은 애빈이는 단번에 “호두까기 인형이네?” 라며 웃는다.
“중학교 때 클라라 했던 거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 선배들이랑 너무 재밌었는데. 기억나?”
“그래? 오랜만에.. 클라라…. 해볼래?”
애빈이는 방긋 웃고 노래에 맞춰 클라라를 연기해 춤을 춘다. 토슈즈를 신지 않아 어정쩡했지만, 모든 동작이 완벽했다. “너무 오랜만에 해서 기억이 잘 안나네.”라고 하며 춤을 멈춘다. 나는 애빈이에게 “토슈즈 줄까?”라고 묻는다. 애빈이는 자신이 신던 게 아니라 불편할 것 같다며 거절한다. 나는 애빈이에게 “간만에 나도 있는데?”라고 말한 뒤, 지긋히 쳐다본다. 애빈이는 나의 눈빛을 보고 마지못해 “알겠어.”라는 확답을 내놓는다. 나는 토슈즈를 들고 애빈이에게 다가간다. 애빈이가 무대에 걸터앉아 토슈즈를 신는다. 다른 한쪽은 내가 신겨준다. 내가 묶는 손길을 바라보던 애빈이는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스포트라이트의 불빛을 감상한다.
나는 그 틈을 타, 애빈이의 종아리에 메스를 꽂아 넣는다. 애빈이는 소리를 지르며 나를 밀치고, 나에게서 도망친다. 쩔뚝이는 다리를 끌고 문쪽으로 기어간다. 나는 애빈이의 손을 잡는다. 애빈이는 나를 보며 이야기한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대체.. 뭐 하는 거냐고! 미친 거야? 드디어?”
“드디어.. 라니?”
“난 너가 아무리 미쳤어도 이런 일 까진..”
애빈이는 신음을 내고는 일어나려 한다. 나는 그런 애빈이의 팔에 또 한번 메스를 꽂는다.
“하지 마.. 살려주세요!!”
애빈이의 외침이 창고에서 울린다. 애빈이는 쓰러져 손목을 감싸고 있다. 핸드폰을 꺼내 신고하려 하는 애빈이를 가만히 쳐다본다. 손이 떨려 핸드폰이 자꾸만 떨어진다. 애빈이는 숨을 가다듬고 옅은 신음을 내며 핸드폰을 킨다. 나는 그런 애빈이의 폰을 손으로 뺏어 멀리 던져 버린다.
“너.. 이러는 거 후회할 거야.”
“내가 뭘 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도대체 뭘 했다고..”
“호두까기인형의 노래를 듣고도.. 너가 무슨 잘 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하..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미안해. 내가 잘 못 했어. 그래.. 그땐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애빈이는 나에게 달려들어 메스를 뺏으려 노력한다. 나는 애빈이의 무게에 넘어가 메스를 손목에서 떨어트린다. 서로가 메스를 집으려 노력한다.
많은 순간들을 지나갔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애빈이와 나에겐 너무나 많은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던져져 있던 핸드폰을 다시 주워, 애빈이의 지문으로 핸드폰을 연다. 경찰에게 전화를 건다. 입을 꿈뻑거리는 애빈이를 바라본다. 전화를 받은 경찰에게 창고의 주소를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끊은 핸드폰에 전원을 끄고, 핸드폰을 애빈이의 머리맡에 둔다.
희미하게 숨을 쉬며 풀린 눈의 애빈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나는 애빈이의 얼굴 앞으로 다가가 앉아, 이야기한다.
“안녕 클라라? 지난밤 즐거운 꿈은 잘 즐겼어? 이제 너의 클라라역을 내가 가져가려 해. 원래도 내 거였으니까.”
애빈이는 나를 쳐다본다. 나에게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다가, 침을 삼키고는 나를 다시 노려본다. 그러다, 그 희미한 눈의 불빛이 탁- 하고 꺼진다. 나는 다시 메스를 잡고, 애빈이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
“어때? 내 그동안의 삶. 아름다워 클라라? 아니, 하애빈? 숨을 안 쉬네. 그래도 나름 세계에서 손꼽히는 무용수를 내가 죽여버린 거네. 내 어린 시절의 아이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 시절의 클라라가.”
눈을 감고 공기를 느낀다. 피 비린내가 올라와 토가 쏠리지만 참는다. 눈을 뜨면 난, 널 죽인 사람으로 알려지겠지. 그런 식으로라도 관심을 받아서. 좋아, 좋은 거 같아. 내 어린 시절의 꿈 이였으니까. 조금 후련한 거 같기도 하고. 멈추지 않는 눈물이 왜 이럴까 생각한다. 나는 마음속에 가려두고 있던 마음을 다시 꺼내본다. 그 마음을 꺼내니 죄책감과 많은 말들이 내 머릿속을 스친다. ‘정말 죽일 정도였어?’ , ‘하애빈이 정말 없어져서 속이 편한 거야?’ 나는 작고 소심해진 말로 혼자 말해본다.
“그러게. 속이 편할 줄 알았지 나는.”
옅은 웃음을 지어본다. 정면을 응시하며 누워 있는 애빈이를 등져, 옆으로 돌려 눕는다.
난 너가 죽으며 너 자체가 슬프길 바랬는데. 내 기억 속에서도,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빛나게 남겠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타까운 무용수. 친구의 배신으로 죽은 무용수.
너가 죽어서 공허하기도 해, 또 후련하기도. 내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은 게 화가 나. 슬퍼. 난 너가 항상 내 옆에서 없어지길 바랬는데. 진짜 없어져 버리니까 또 섭섭하기도 하고, 친구로써 안타깝기도 해. 너의 게시물이 멈춘 게, 너가 멈춘다는 게. 너를 멈춰버리게 해 버렸다는 게.
이 감정은 어떤 감정일까. 슬픈데도 후련해, 너의 따뜻한 온기를 만지고 싶기도 하고, 차가워진 너의 모습이 좋기도 해. 너를 대하며 항상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졌지. 그게 너 자체인 것 같기도 해. 이 감정의 제대로 된 이름을 계속해 생각하다가 모르겠어서 한숨을 쉰다. 이 감정을 계속해 기억해야만 할 것 같고, 너와 함께 했던 그 순간들에 겪었던 감정들을 잊으면 안 될 것만 같다.
“이 감정들의 이름을.. 애빈이라고 지어도 될까?”
대답 없는 애빈이를 바라본다. 나는 떨어진 메스를 주워서 곰곰히 생각 한 뒤, 내 손에다가 적는다.
‘슬플 哀 (애)’ , ‘빛날 彬 (빈)’
너가 슬프길 바랬고 내가 빛나길 바랬던 그 세월이. 난 또 너로 인해서 슬프고, 넌 여전히 빛나는구나.
나는 애빈이의 차가운 몸을 손으로 만지고, 또 안아서 운다. 항상 빛에 가려진 내가 이제는 너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모르겠어.
몸에 힘을 빼고 애빈이의 한기를 느낀다. 눈을 감고 혼미해진 기분을 곱씹으며 잠에 든다. 나도 이번 꿈에선 클라라 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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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입니다. 산속, 한 폐창고에서 기이할 정도로 훼손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이 시신을 실종신고가 들어온 프랑스의 탕드레스발레단 소속 하애빈씨로 추청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력 용의자인 시신과 함께 누워 있던 한 여성을 긴급체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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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빛에 눈이 떠진다. 오늘도 밝은 블라인드 커튼이 왜 인지 싫증 난다. 이건 질투인가, 지침인가. 하품을 한번 하고, 배게 옆을 손으로 더듬더듬 거리며 핸드폰을 찾는다. 핸드폰을 들어 올리며 밤새 온 알람들을 훑어본다. 친구의 메세지, 구독했던 영상의 알람이 와 있다. 그 위로 남자친구의 부재중 전화. 그걸 보니 나도 모르게 마른 한숨이 나온다. 기지개를 피며 몸을 일으킨다. 피로에 사로잡힌 어깨가 나를 다시 침대로 짓누른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후, 그에게 전화를 건다. "오늘 만날래?"2주 전, 내가 먼저 그에게 만나자고 한 약속. 우리가 살던 지역과 2시간이 걸리는 지역에 대학을 간 그이는 자신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한다. "아- 응. 알겠어. 근데 나 시험 얼마 안 남아서 같이 오래 못 있을 수도 있어." "알지. 카페 갈까? 난 너 옆에서 책 읽거나 공부 도와줄게." "..그래 알겠어. 나중에 봐." "응. 놀이터에서 봐."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자신의 시험기간은 중요하고 내 시험기간은 아무렇지 않다는 건가. 시계를 보고 더 자고 싶어 몸부림친다. 아니, 사실은 귀찮아서 일지도 모른다. 1시까지는 딱 1시간 하고도 30분 남짓이 남았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에 한탄하며 침대에 머리를 파묻는다. 현실을 부정하려 배게에 얼굴을 비벼보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전엔 만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언제부터 이런 감정이 들기 시작했을까. 고등학교에 처음 간 날, 키도 나보다 훨씬 크고, 얼굴도 완전 오목조목 잘생긴 학교 선배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선배는 나에게 반과 이름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 모습이 눈에 계속해 아른거려, 내가 그와 계속해 얽히게 될 것만 같았다.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그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이가 있는 동아리에 대한 작은 질문들로. 나와 그이의 대화는 5분 만에 끝나버렸고, 그 대화창을 계속해 다시 읽으며 설레하였다. 동아리방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하였고, 그날 이후로 우린 계속해 마주하려 노력했다.동아리가 끝난 늦은 밤. 그는 나에게 난데없는 산책을 하자고 했으며, 나에게 사귀자는 말을 했다.추운 겨울,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세찬 바람과 불빛들이 우리를 감쌌다. 그의 차갑지만 아늑한 손길이 내 손을 잡았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 굳센 추위도 잊을 만큼.대학으로 떠나기 전, 우리는 서로를 보며 훌쩍였다. 축축한 눈물이 마르기를 원하며 서로의 얼굴을 덮은 눈물을 닦아내었다. 서로를 끌어안고, 그 온기를 온전히 느꼈다. 슬픈 순간을 잊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대학에 가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며. 나와 그이는 서로에게 소홀해졌다. 나를 보러 오지 않는다며 토라지기를, 오지 않는 연락을 한 없이 기다리며 화를 내기를, 나만 바라는 것 같아 서운했던 나날들을. 나는 그렇게 그에게 무한히 펼쳐져 있던 마음을 조심스럽게, 조금씩 접고 있었다. 놀이터 땅을 발로 살짝 민다. 그네가 나를 끌고 앞, 뒤로 움직인다. 멀
- 문휘
- 2026-07-30
우리 가족. 아동학대나 불행한 가정의 형태는 우리 가족과는 너무나 먼 이야기 같았다. 그러한 가정의 모습은 엄마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가정’과는 너무나 대비되고,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난 걱정이 없었다. 행복한 가정, 금전적 안정. 이 두 가지는 나의 어린 시절이 완벽했다는 증거였다.초등학교 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공개 수업이 열렸다. 그때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스케치북을 넘기며 이야기했다. “제가 소개할 사람은 우리 엄마입니다.”우리 엄마는 화가라고, 유명한 화가. 사람들이 우리 엄마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또 우리 집은 궁궐처럼 하얗고 크다고. 이 모든 것은 엄마가 만들어 낸 거라고. 엄마 처럼 되고 싶다고. 공개수업이 끝나고 엄마의 손을 잡고 동생과 함께 엄마의 화실로 갔다. 엄마는 화실 창고에서 나와 동생의 몸 보다 훨씬 큰 캔버스를 꺼냈다. 캔버스엔 또 다른 커다란 달이 그려져 있었다. 엄마가 캔버스를 고정시킬 동안 우리는 거대한 화실을 구경하며 꺄르륵 웃었다.잠시 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불렀다. 나와 동생은 서로를 피해 도망 다니는 걸 멈추고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는 우리를 작은 의자에 앉히고 물감의 뚜껑을 열었다. 나에게는 샛 노랗지만 조금의 흰 끼가 도는 노란색. 동생에게는 밝으면서도 어두운 초록색을 짜주었다. 그리곤 엄마는 우리에게 말하였다. “엄마가 너네를 들어 올리면 너네는 이 달에다가 손바닥을 찍는 거야. 알겠지?”우리는 짧고 밝은 대답을 남겼다.엄마는 나를 들어 올려 내 시선 바로 앞에 달이 보이도록 해주었다. 그 달에 손바닥을 힘 껏 찍었다. 엄마는 잘했다며 웃어준 뒤, 나를 내려놓고 동생을 들어 올렸다. 동생도 달에 손바닥을 힘껏 찍었다. 몇 달 뒤 휑한 거실에 익숙한 그림이 걸렸다. 그림의 상단에는 나와 동생의 손자국이 새겨진 달, 그림의 하단에는 그 달을 비추는 탁상용 조명이 있었다. 왼쪽 가장 아래쪽엔 나와 동생, 엄마, 아빠의 싸인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엄마의 다리에, 동생은 아빠의 다리에 앉아 엄마의 설명을 들었다. “너네는 엄마, 아빠에게 달이야. 그리고 엄마 아빠는 이 탁상용 조명이지. 우린 언제나 너흴 바라보며 비춰줄 거야. 환하게.”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거실에 걸린 그 그림이 우리 가족이 영원할 거라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날은 비바람이 불었다. 아빠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며, 식탁에는 차갑게 식은 밥과 반찬이 있었고, 나와 동생은 떨었다. 비바람이 창문을 두들겼다. 규칙적이지 않게, 툭 - 투두툭 - - 툭. 비바람을 무서워하는 동생이 두려움에 떨며 운다. 그와 동시에 엄마방에선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와 동생은 깜짝 놀라며 떤다. 두려움에 우는 동생을 달래 재운 뒤 방을 나온다. 하얀 대리석 타일이 무거운 한기를 뿜어낸다. 엄마의 방 앞에서 옅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 뒤로 무언가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떨어진다. 그 뒤로 툭 - 투두툭 - - 툭 하며 묽은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 문휘
- 2026-05-13
-"우리 행복할 수 있을까?"후는 항상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은 뒤 난 후를 향해 옅은 웃음을 짓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후는 내가 조금 슬퍼 보였다고 했다.+ 이틀 뒤면 장마가 찾아온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뉴스가 나오는 텔레비전을 지나 베란다로 향한다. 베란다로 들어가 양말과 교복을 잡는다. 덜 마른 교복 때문에 짜증 섞인 말투로 엄마에게 화를 낸다. 빨래 좀 제때 돌리면 얼마나 좋을까? 마르지 않은 교복을 보며 한숨을 푹 쉰 뒤 옷장에서 아무 반팔이나 꺼내 입곤 겉옷 지퍼를 쭉 올린다. 우리 집과 학교는 조금 멀어 30분 일찍 나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마르지 않은 교복 때문에 조금 늦게 나왔다. 평소보다 빨리 걸으며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익숙한 멜로디는 나의 생각을 멈춰주는 유일한 방안이다. 그렇지 않으면 빨래를 제때 돌리지 않은 엄마와 교복을 입지 않은 탓에 선생님께 혼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내 머릿속을 장악해 끝없는 늪에 빠지게 될게 뻔하기 때문이다. 복도에 나가 오늘 처음 민을 봤다. 민은 4반 여자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날 보더니 이야기를 멈추고 나에게 왔다. 민은 나에게 방과 후에 있을 동아리 활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민과 나는 소소한 독서동아리를 한다. 동아리부원이 나와 민 뿐임에도 선생님은 흔쾌히 만드는 걸 허락해 주셨다. 열심히 부원을 구하려 노력했지만 고리타분한 독서 동아리라며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은 민과 내가 사귄다는 소문 때문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 동아리 활동을 둘이서 한다는 이유만으로 사귄다는 소문을 만들다니. 화 내는 나를 민이 진정시키느라 애를 좀 먹었을 것이다. 뭐 동아리 활동이 아니어도 같이 다니긴 하지만. 학교에 기정사실화처럼 퍼진 소문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사실 나와 민은 연인 사이가 아니다. 사실 연인 사이보다 더 안정적인 사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더욱더 가까운 존재 일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아주 어릴 때 내가 민과 처음 만 날때부터 나와 민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읽고 그에 맞는 행동을 취했다. 세면대에 있는 비누가 아닌 세면대에서 나오는 물 같은 존재랄까? 사실 이런 비유를 할 때면 민은 이해 못 한 표정을 짓지만. 동아리실로 걸어가는 날 발견하고 민은 자연스럽게 내 옆에서 걸었다. 민은 내 키에 머리 하나 더 올린 정도로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내가 작은 거지만) 얼굴도 나름 반반하게 생겨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물론 민은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다. 이런 민 때문에 같이 다니는 내가 억울하게 욕을 먹는다. 성별이 여성인 동물은 다 그러는지 아니면 인간 여성만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대체 여자 아이들은 왜 그렇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험담을 나누며 이상한 소문을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말에 깎이고 깎여 형체도 남지 않았지만 이런 날 민은 다르게 바라보지 않는다. 가끔씩 힘들어하는 날 보며 민이 내가 다 미안할 정도로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를 해 위로가 되어야 하
- 문휘
- 2026-01-06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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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첫 올린 10일날 [애빈]이 심의를 걸려버려서, 8월 끝 물에 다시 올리게 되었습니다. 수정본은 어떨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