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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의 성

  • 작성자 구포대교
  • 작성일 2026-09-01
  • 조회수 74

 시간은 너무 빠르다. 10개월 만에 온 도훈의 전화를 받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올해 새해 인사가 마지막이었다반년이 훌쩍 넘은 10스피커 너머의 그는 술이라도 먹었는지 잔뜩 들뜬 목소리였다우리 초등학교 폐교한 거 아냐그럼 인마내 말 못 믿냐?

 당연하지속으로 중얼거렸다하지만 요즈음 학교가 폐교하는 것은 흔한 일이고 지방의 우리 모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말인데다음에 한 번 가보자고그의 말에 응굳이언젠가 시간 날 때 가 봐도 괜찮긴 하겠지만......내가 말꼬리를 끌자 도훈은 감춰뒀던 비밀을 하나 더 풀었다너 민성이 기억하냐?

 갑작스런 이름에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무시무시한 부잣집의 도련님이시자 알아주는 동네 바보 김민성아이들에게 곧잘 먹을 것들을 사주고 짓궂은 장난도 잘 받아주던 녀석을 난 기어이 떠올렸다뒤따르는 도훈의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우리 학교 이제 민성이 거란다.

 뭐?

 민성이가 샀다고그 땅을대박이지 않냐말하자 나는 속으로대박이잖아외쳤다. ‘폐교를 구매해 집으로 개조 했어요’ 같은 영상들은 몇 번 봤으나 나의 동창이나의 모교를 사버릴 줄은 감히 예상 못했다내 무음의 흥분이 전해졌는지 도훈은 신이 나서 말해댔다그니깐다음 달에 한 번 놀러가자고딴 애들도 몇 명 모아서나도 누구한테 들은 거야일단 다음에 날짜 맞춰보자.

 

 그리하여 다음 달, 11월 말토요일 아침부터 도훈의 승합차에 올랐다다른 두 친구들과 함께였다그 두 친구가 뒷자리에 타고 내가 조수석에 탔다두 사람 모두 평소 연락하지 않는그저 고향으로 묶여있는 친구들이었다분위기가 무척 어색했고그것은 창문을 열어도 쉽게 환기되지 않았다.

 차 안의 구세주는 도훈이었다모두와 두루두루 친한 그가 대화를 주도하며 분위기를 풀었다대화의 주제는 아무래도 고향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나로서는 5년 만의 귀향이었고 다른 이들도 아무튼 오래간만이었다함께 뛰놀았던 어렸을 적의 친구들과 낙서로 가득했던 좁은 골목들과 학교의 뒤뜰-같은 것들을 입에 올리며 그들과 나 사이의 투명한 벽은 금세 허물어졌다동향과 동창은그런 것이었다그렇게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예진의 이름이 대화의 장에 올랐다내게선 무르익다 못해 썩어 사라지기 직전까지 가버린 이름간신히 기억해낸 그 이름은 다소 충격적인 내용으로 등장했다.

 민성이랑 예진이랑 사귀잖아한 사람의 말에 다들 알고 있던 듯 맞장구쳤고 나 혼자만 큰 충격에 휩싸였다이제야 소식을 들었다는 소외감 같은 건 차치하고그 내용 자체가 얼얼했다예진이란 이름을 기억한 시점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들이 무수하게 떠올랐다단정한 단발의 머리칼과새하얀 피부와 갸름한 눈매그 예쁜 미모그래서 더 괜히 장난을 당하곤 했던 날들아마 그녀를 괜히 건드리던 남자 애들은 모두 일말의 연정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파릇했던 나 역시도 그랬다날 쫓아오는 그녀에게서 달아나던달리며 웃던 기억까지 선명했다그리고그리고 그녀는......민성이를 싫어했잖아나머지 세 명이 고갤 끄덕였다맞아그랬지그랬던 그녀가 민성과 교제하게 된 경과는 다른 세 사람도 알지 못했다.

 뭐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누군가의 말에 모두 고갤 끄덕였다초등학교로부터 지금까지 정말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느껴지는 체감도 체감이지만 실질적인 시간도 그러했다초등학교 졸업 이후몇 명의 대통령을 지나왔나 생각해보면 계산이 쉬웠다그리고 문을 닫아버린 학교도지금 와서야 무섭게 실감났다비록 지나버린 세월들은 인지하면서도 폐교는 인정하기 어려웠다시간은 그렇게 흘렀다아인슈타인이 말했듯 상대적으로빠르게.

 차는 3시간을 내리 달려 고향에 도착했다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봤던 것들이 농경지였는데도 고향 인근의 밭들은 다가오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가을이었지만 겨울에 가까워 샛노란 논밭은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창백했다.

 시내로 들어서자 곳곳에서 익숙한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오랜 곰팡이처럼 눌어붙어 있는 옛것들친구와 회고가 겹칠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아닌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우린 많은 기억을 공유했구나시내의 구석진 곳으로 향할수록 더 많은 옛것들이 발견되었다추억의 삼거리추억의 식당추억의 노래방같은 그다지 애용하지도 않던 것들이 외려 눈에 밟혀왔다낡고 바래버린 간판들이름만큼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차는 모교 근처도훈의 본가가 있는 골목에 세워졌다언덕의 경사면에 세워진 주택단지는 새 아스팔트가 깔렸지만 넝쿨이 내린 담벼락과 개 짖는 소리하수구에서 비롯된 역겨운 냄새만큼은 여전했다빼먹으면 아쉬울 담배꽁초들까지도.

 우린 모교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민성이 마중 나올 예정이었다성인이 된 그의 모습은 어떨까생각하면 그럴듯한 상상이 안 됐다아닌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게 초등학교 졸업식 때였다그 뒤로 몇 번 소식만 들었지 만남은 전무했다그래도 같이 온 두 사람만큼 어색할 것 같지는 않으리라 생각한 것은민성이 어눌한 발음으로도 곧잘 말을 걸던 기억 덕이었다담벼락의 넝쿨처럼민성의 그런 친화력도 여전할 것만 같았다골목길 어귀에서 민성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난 그가 민성이라 확신했다큰 키와 마른 몸은 둘째 치고저 흐물흐물 흘러내릴 듯한 미소가 민성임을 입증했다혼자 나타난 그는 우리를 발견하자 미소를 크게 부풀리고는손을 흔들며 달려왔다하는 행동마저 초등학생의 민성과 똑 닮았다.

 반가웠다비록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렸을 적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잘생기진 않지만 순박한 인상의 얼굴그가 흰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었다누군가 물었다.

 예진이는?

 으응학교에 이있어.

 민성은 모교를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말했다그는 그간 쌓아둔 말이 많았는지 이야기를 쏟아냈다특유의 성급함과 어설픈 발음은 여전했고 그 틈새 사이사이마다 흥분이 서려 있었다매일 아침 걷곤 했던 학교로의 골목과 나란히 선 친구들시야 한 폭에 담긴 풍경은 유년의 장면들을 연상시켰다.

 모교의 정문 앞도 여전한 풍경이었다문방구와 분식집이 아직 운영한단 사실엔 적잖이 놀랐다폐교한지 꽤 지난 시점에서 문을 열어도 손님이 없을 텐데 말이다민성은 초등학생 때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분식집으로 이끌고 갔다꽤 많이 변했지만 예전의 흔적들이 있었고 정확히 짚을 수 없는 기시감도 느껴졌다예전의 아주머니 대신 초면의 젊은 남자가 떡볶이를 볶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아직도 분식집이 남아 있다니.

 누군가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확실히 신기하고이상했다민성이 말했다별말 아니라는 듯내가 분식집을 사샀거든할 말 다 했다는 투로 떡볶이를 씹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모두의 눈동자에 얼토당토않다는 황당함이 깃들었다학교로 모자라 분식집을 사버리다니내가 혹여나 싶어 물었다.

 옆에 문방구도?

 응민성이가 덧붙였다없어진다길래아빠아빠한테 사달라고 했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난 한계 없는 그의 발상과 실행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어렸을 적엔 몰랐는데 민성의 아버지는 상상이상의 부자구나물론 그 아버지를 직접 본적은 없었지만아무렴지금은 모두 금전적인 감각이 민감해진지라 반응들이 볼만했다도훈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한 표정을 지었다민성이 해놓은 짓을 생각해보자면 마냥 과한 것도 아니었다다른 한 친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비상식적인 민성을 나무랐는데 그러자 민성 역시 표정이 굳었다너희들은 여기가 없어없어져도 좋다는 거야말하는 그의 표정이 무척 슬퍼보였던 탓에 아무도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우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분식집을 나섰고 바로 옆의 문방구로 시선을 기울였다어렸을 때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자연스러운 일련의 과정이었다문방구 앞에선 파스텔 톤의 솜사탕이 팽창하고 있었다내가 사줄게어렸을 때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민성이 우리에게 솜사탕을 한 꼬지씩 사다줬다그 머리를 한 뭉치 베어 먹자 단맛이 입 안 가득 고였다솜사탕은 크기에 반비례하여 빠르게 사라졌다입 안 구석구석 잔여물이 남았다달고끈적이는설탕의 여운을 느끼며 모교로 향했다.

 정문은 새 것 같긴 했지만 모양새는 과거의 그것과 같았다문을 넘자 모래가 휘날리는 운동장이 펼쳐졌다구석에 자리 잡은 놀이기구들과 벤치들까지 속속히 눈에 밟혔다잊었던 사물들을 기억해낼 때그와 얽힌 기억들도 함께 부활했다비록 지금의 벤치는 그때의 것과 다르지만그것은 그때의 벤치였다다른 것들도 그랬다옛 것은 많지 않고 새 것들이 다수 학교를 채웠다모여서학교를 구성했다.

 테세우스의 배는 모든 판자조각이 새 것으로 교체된 후에도 테세우스의 배라 불릴 수 있는가유명한 난제가 떠올랐다적어도 배가 같은 곳에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한 같은 배가 아닐까생각했다.

 

 우린 운동장을 한 바퀴 돌다가 실내로 들어갔다가장 앞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복도였다갈라진 틈 사이서 자주 가시를 찔러오던 나무판자들이제는 필요 없는 교직원용 신발장과 내빈용 신발장까지 그대로였다민성의 오더에 따라 신발을 벗지 않고 복도에 올랐다익숙한 듯 낯선 교실들이 펼쳐져 있었다한때의 나도 이곳에서 생활했었지지금은 어색하기만 했다있으면 안 될 곳에 있는 양.

 1층 중앙에서 다들 어수선하게 서성이는 사이예진이 계단에서 나타났다낡은 나무 층계를 밟고 내려오는 그 모습에 모두 일순간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곧장 시끄러워지긴 했지만난 헛숨을 들이켰다그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예진이었고어렸을 적의 얼굴을 고이 간직한 어른이었다척 봐도 비싸 보이는 롱코트를 입은 그녀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반갑다진짜 오랜만이네더 예뻐진 거 아냐?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와중에도 예진은 민성의 옆에 다가가 섰다반가운 옛 친구들이지만 남자친구가 우선이라는 걸까왠지 그녀가 그렇게주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정말로 민성이를 사랑할까다들 그저 반가워하고 있는 와중에 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부끄러운 사실이었다나는 아직 그녀를 좋아했다아니라고 믿었는데얼굴을 보는 순간 세뇌는 깨졌다예진은 환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었다아무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난 필사적으로 얼굴을 감췄다그 사실이 예진의 눈길을 끈 모양이었다예진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나를 호명했다이수혁수혁이 맞지커다란 눈동자가 성큼 코앞으로 다가왔다그 적극성에 잠시 당황했지만그녀가 내 이름을 아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나를 뺀 모든 이와 인사를 나눈 후였으니 남은 이름은 나의 것인 게 당연했다.......그래도 가까이 다가선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을 지울 수 없다얼굴로도 다 드러나는지 도훈이 옆에서 깔깔 웃어댔다자식괜히 자기 약혼자라고 거리 두는 거냐?

 사실은 아니었지만 합당한 말이었므로 난 그에 따르기로 했다스스로를 향한 일침이기도 했다당장 내년에 결혼 예정인 여자친구가 떡하니 있는데 다른 여자에게 연심을 품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인사하는 동시에 속으로 뇌까렸다.

 그나저나 너희는 결혼 안 하냐친구 하나가 예진혹은 민성을 향해 질문했다예진은 곤란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답했다아직 거기까진 생각 안 하고 있어시간이 지나면 뭐든 되겠지.

 아무렴상관없지같은 반응들로 대화의 화두는 넘어갔다우리는 복도를 거닐며 떠들었다지나버린 세월과 그 간극에 대한 주제들로 복도는 법석였다한 층을 오를 때마다 새로운 교실들이 나타나고 새로운 추억들이 부상했다민성과 예진은 꼭대기 층, 3층의 가장 구석진 방에서 살았다한땐 6학년 1반이라는 이름이었던 공간은 이제 그들의 주거공간으로 기능했다한땐 친구들과 함께 웃고 울고 떠들고 하던 공간기분이 영 이상했다.

 우린 민성을 따라 운동장으로 나갔다모래가 날리는 벌판사각형의 구석으로 민성이 뛰쳐나갔다바람에 떨고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곳에 있었다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나무였다그 아래서 손을 흔들고 있는 민성도예나 지금이나 같은 동작으로나무에 머리를 묻은 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다들 어이없이 웃으면서도 재깍재깍 움직였다 멈췄다어이가 없든 즐겁든 간 웃음이 났다예진은 먼발치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한 시간 정도우린 뛰어 놀았다찬 가을공기가 한류처럼 흘렀고 햇살이 난류처럼 쏟아졌다느티나무 아래 공간은 지금의 우리에겐 좁았다우리의 체력으론 더 놀기 힘들었다평소에 운동이라도 해둘 걸 그랬나새삼스레 노화를 체감했다.

 

 이후로는 다들 어디론가 흩어졌다도훈은 본가로 간다했고 다른 친구 두 명은 둘이서 시내에 놀러갔다내게도 제안이 왔지만 거절했다. 1시간 동안의 운동이 많이 벅찼던 관계로 좀 쉬고 싶었다.

 어쩌다보니 나와 민성과 예진 셋이서 나란히 걸었다많이어색했다바로 옆에 예진이 있었다어째서 내가 이 둘 사이에 끼어있단 말인가난 혹여나 닿을지 모를 예진의 흰 손을그 살갗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노력할수록 그녀를 의식했다민성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줬기 망정이지 그녀와 단 둘이었다면 어색함에 죽어버릴지도 몰랐다첫 인사 때 이후로 예진은 도통 말이 없었다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멍을 때리거나그랬다.

 수혁아 내년에 결혼 한한다고?

 응이미 식장까지 잡아뒀지꼭 와줘라.

 결혼식 날짜를 잡을 때까지만 해도 민성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건만 어느새 함께 걷고 있었다부끄럽지만 그가 낼 축의금을 상상해보면 마음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예진과 민성은 결혼 생각이 아직 없어 보이니 내가 내게 될 축의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마음은 이내 도리질했다이런 식으로 득과 실을 계산하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추했다.

 수혁이 여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

 와중에예진이 갑작스레 질문해왔다갑작스레그렇게 얼굴을 들이대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시선의 초점을 그녀의 이마 언저리에 맞춰놓은 뒤 겨우겨우 대답했다내가 이토록 당황했던 것은 단순 예진의 돌발 때문만은 아니고 먼 곳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내 약혼자민지가 생각난 탓이기도 했다예진을 앞에 둔 채로 민지를 떠올리기란 정말이지 신기한 기분이었다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가 만나는 생경한 광경이었다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의식은 엄연히 분리된 관계였던 것이다두 개의 은하가 충돌한 것 마냥 생각들의 궤도가 질서를 잃고 날뛰었다민지민지......그녀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의 직장 동기지지방의 국립대를 졸업했고 고향은 부산이랬다억양에서 그 바다의 향기를 맡을 수 있지그래난 그 사투리에 반했다먼저 고백해온 건 그녀였지만 말이야나도 분명 민지를 좋아하게 됐다사투리 뿐만은 아니야작은 키와 고운까만 머리칼과예쁘장한 그 용모가 큰 역할을 했음은 부정하지 못한다난 사전을 읊조리듯 생각했다예진의 앞에서 민지는 먼 곳의 존재였다예진에게는 최소한의 정보만 설명했다설명하며힐끗 본 예진의 얼굴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예진의 얼굴은 민지를 닮았다민지의 얼굴은 예진을 닮았다.

 한 번 보고 싶네설명을 들은 예진이 말했다왜지그녀가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난 당황의 연속이었다결혼식 꼭 와줘다음에 청첩장 보내줄게그렇게나와 예진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얼결에 이뤄진 거래였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연결고리가 하나 생겼다.

 

 민성과 예진 두 사람을 들여보낸 후 따로 혼자 걸었다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일차적으로예진과의 단절이 필요했다운동장의 둘레를 따라 걸으며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혀갔다.

 내일이면 떠날 곳이라 생각했는데전화번호를 교환한 이상 예진은 돌아가서도 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다낭패였다기껏 가라앉힌 마음이 다시 부산해지려하자 다시 교정에 시선을 기울였다이 분수는 그때 그대로일까저 세종대왕님은 그때와 같은 책을 펴고 있는 걸까많은 것들이 어색했다몇 시간 전처음 왔을 땐 안 그랬건만 지금 바뀐 것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새로 설치된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결론은 결국 한곳으로 귀결됐다예진의 탓이었다예진을 마주하는 순간난 과거의 한복판으로 내동댕이쳐졌다현재와는 먼 세상새로 바뀐 것들이 눈에 거슬렸고민지의 존재가 생경해졌다과거가 순식간에 엎질러졌다.

 테세우스의 배는 테세우스가 죽어버린 이상테세우스의 배가 아니었다모교는 그때의 학교라고 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시내로 놀러갔던 인원들이 하나둘 복귀했다바비큐 파티를 한다며 한아름 장을 봐왔다민성이 신나며 방방 뛰었고 예진은.......잘 모르겠다좀처럼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외면할수록 의식한다의식할수록 외면한다교묘한 덫이었다.

 불이다!

  불이 비추는 민성의 얼굴이 한껏 웃고 있었다운동장의 한 귀퉁이에서 장작에 불을 붙였다도훈의 전문분야였다. 1년에 적어도 세 번 이상은 캠핑을 다니는 그였다관련 용어와 경험들을 미주알고주알 풀어내는 건 피곤하지만 유용하기는 했다.

 가을 저녁의 한기가 스미는 와중 적절한 온기였다조금 뒤 그릴 위로 삼겹살이 올랐다한 명이 술병을 땄다.

 벤치에혹은 캠핑의자에 앉으며 다들 식사했고떠들었다간만에 술을 좀 마셨다보통은 잘 즐기지 않지만오늘만큼은 꽤 많이 들이켰다점점 속이 달궈지자 점점 불안이 휘발됐다이제는 예진이 바로 옆에 있어도 아무렇지 않았다외려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정말 내가 알던 예진이 맞나과거의 예진과 현재의 예진은 같은 존재인가그녀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자 도훈이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너 아직도 예진이 좋아하냐?

 무슨 소리야내가 예진이를 언제 좋아했다고하하웃으며 말하자 도훈도 웃으며 답했다진짜잖아너 예진이 좋아했던 거 기억 안 나물론 기억했다그러나 죽어도 수긍하기는 싫었다비밀로 안고 죽고 싶었다.

 벌떡 일어서서 그에게로 다가갔다거리는 좁아졌다가 길어졌다가도훈의 앞이었다왼편에서 일렁이는 불꽃이 화끈화끈했다팔을 뻗었다어느덧 두 손아귀에 도훈의 멱살이 잡혀 있었다.

 시발놈아 좋아한 적 없다고.

 아니없으면 없는 거지 왜 지랄이야 갑자기?

 주변에서 다급하게 몰려들었다에헤이취했네이거화로에서 멀리 떨어진 벤치에 가 앉았다불꽃과친구들과예진의 뒷모습이 시야의 외곽에서 꿈틀댔다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왜 나 혼자만 여기 있는 거지억울하고추웠다그리고 부끄러웠다문득예진이 내게로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많이 취했어?

 ......그런 것 같다미안.

 아냐그럴 수 있지.

 그녀는 어린 아이를 위로해주는 것 마냥 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나는 얼어버렸다무슨일이지예진의 얼굴은 은은한 미소를 품었다은밀한 연정을 품었다마음으로 이어지는 눈길에서어렴풋이 확신할 수 있었다혹 취기가 날조한 망상일까그래서 더 불안해졌다떨렸다민성의 웃음소리가 들렸다민지의 얼굴이 어렴풋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따라 상승하는 예진의 시선은 아리송했다사실 눈빛같은 것으로 마음을 읽어낸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 아닌가춥다저기로 가자내 말에 예진은 대답 없이 일어섰다난 언제 다퉜냐는 둥 도훈의 옆에 착석했다.

 바비큐 파티......일까술판은 끝날 생각을 안 했다밤이 깊어질수록 흥미로운 게 술자리였다보이지 않던 벽이 허물어지고본의 아니게 진솔해지는 시간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는 시간분위기를 탄 누군가 민성에게 질문했다그래서 학교는 왜 산 건데이유를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거 같은데.

 새빨간 얼굴의 민성은평상시보다 더 어설픈 발음으로 말했다나는 우리 학교가 억수로 그리웠웠다나는 너네들이랑 놀 때가 가장가장 행복했다옛날처럼 뛰어 노니까 참

재밌지 않았나내일도 오늘처럼 놀자.

 

 그러나 내일 민성과 노는 일은 없었다어쩔 수 없었다친구 두 명은 아침까지도 지독한 숙취에 시달렸으며 도훈은 저녁에 용무가 있다며 일찍 출발하길 원했다그리고 나는나는 무척이나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따라서 우리 네 사람은 이른 오전도훈의 차에 올라탔다민성은 슬픈 표정이었지만 우린 그의 감정을 고려해줄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예진은 떠날 때까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나로서는 다행이었다차는 빠르게 고향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렸다시시콜콜한도훈과의 잡담으로 메워진 시간이었다다른 두 친구는 생사가 의심될 정도의 기세로 쓰러져 있었으므로.

 도훈은 술을 마시다 내가 잠든 후의 대화에 관하여 들려주었다민성이가 울었다는 내용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도훈은 간결하게 말했다민성이중학교에서 참 힘들었단다돈도 많이 빼앗기고그랬대초등학교가 참 그리웠을 거야나는 그제야 민성이 모교에 집착했던 이유를 이해했다그것은 행복했던 시절의 증거였다그렇기에 그는그 성을 견고히 다지고 살게 된 것이었다.

 조금 뒤도훈이 추가적으로 말했다그리고 예진이가 민성이한테 먼저 고백했다네의외였어.

 나는 빠르게 지나치는 창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던졌다민성의 성은 견고하기가 불가능했다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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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건너다

0 여기서 포기한다면 결국 쓰레기인 것이다. 지난 시간, 지난 수고들이 쓰레기가 돼버리는 것이다. 스스로를 그렇게 쓰레기통에 쳐넣고 싶은 거냐. 문틈은 빛과 소리를 허용한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독백처럼 방 안으로 스며든다. 커튼을 친 방은 칠흑처럼 어둡고, 방문의 윤곽만 누런빛이 선명하다. 나는 관뚜껑처럼 보이는 그것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다. 형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가만히, 밤을 샌다. 가만히, 영원한 것만 같은 밤. 아버지의 말. 내가 지금껏 쓰레기를 키워왔다는 거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1 눈을 뜨자 한강이었다. 창에 비치는 옥색 철교 위로 꿈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누런빛이 흐르는 관뚜껑 모양의 문. 곧 서울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오고, 부스럭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하나둘씩 선명해졌다. 깜빡 잠든 사이에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역 가까이서, 기차가 감속하는 만큼 상쾌한 긴장감이 온몸을 조여왔다. 몇 분 전에 온 정현의 문자를 확인하며 기차에서 내렸다. 기차 안과는 질감부터가 다른 더운 공기가 훅 끼쳐왔다. 부산보다는 시원할 거라더니, 순 거짓말이었나. 대합실로 올라가자 금방 정현을 만났다. 그는 예전보다 살이 더 붙은 모습으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반가움과 어색함이 뒤섞인 감정으로 인사를 했다. 정현은 어색함이란 게 없는지 천진하게 웃었다. 어색한 게 나 혼자인 듯한 무안함과 함께, 나란히 서울역을 빠져 나왔다. 정현과는 중학교 1학년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4년을 훨씬 넘어서의 재회였다. 그는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직전에 서울로 전학을 갔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엄마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정현은 나에게만 말했다. 당시의 난 이혼이란 두 글자가 굉장히 무겁고 잔인하게 느껴져 정현을 많이 걱정했으나, 그는 아무렴 잘 사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원룸을 구해 자취 중이라고 했다. 학교를 자퇴하고 혼자 수능 준비 중이라고, 그의 자취방으로 향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할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여느 19살처럼 대학을 앞둔 고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다였다. 공부를 하고, 아직 연애는 못 하고 있다고, 학원은 따로 안 다닌다고, 무언가 커다란 것을 생략하며 말했다. 정현은 먼저 형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그는 이유도 잘 대지 못하는 내게 기꺼이 잠자리를 내어준 것이었다. 그의 집까지는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40분가량을 이동해야 했다. 지하철에서 내리고도 20분가량 비탈길을 걸어야만 정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택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의 구석, 창문의 절반을 시멘트 담장으로 채운 원룸. 1층에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세 들어 살고 있었고 2층에 집주인 할머니가 사신다고 했다. 정현은 아까 전부터 혼자 사는 삶의 장단점을 가지고 떠드는 중이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혼자 살기에는 꽤 쾌적해 보이는 원룸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정현이 말했다. 막 열두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난 그가 자주 식사를 해결한다는 분식집으로 인도되었다. 우린

  • 구포대교
  • 2026-08-31
미래의 모습

택시는 밤을 달린다. 휴대폰으로 틀어놓은 뉴스에서는 아나운서가 쫑알댄다. 인공지능 발전의 현황이 어떠하니...전망은 어떠하고...이러이러해서 택시기사가 대체될 날도 머지않았으며...뻔하디 뻔한 말들. 분명 5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밤을 달리는 미터기는 빠르게 올라간다. 운전이 너무 빨랐던 걸까. 뒷자리의 손님은 몇 번 유리창에 머리를 박더니, 우웩, 토를 한다. 이젠 익숙해진 상황에 튀어나오는 익숙해진 욕설. 인공지능에게 토사물을 닦을 능력이나 있을까? 택시를 몬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때는 택시 운전사란 참 좋은 직업이라 생각했다. 운전이야 원래 좋아하는 편이었으니. 돈을 받고 드라이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손님들과 대화도 하면 무료하지도 않을 테고. 희망찬 몽상이었다. 첫날부터 늦었으니 빨리 좀 달리라고 재촉하는 인간, 자꾸만 뭘 씹으면서 부스러기를 흘려대는 인간, 하차하며 차가 부서져라 문을 쾅 닫아버리는 인간. 지갑 사정이 나빠짐에 따라 야간 택시로 노선을 바꾸며 골치 아픈 상황들은 늘어났다. 이 정도 일이야, 뭐. 유별나지 않다. 한강의 공원 주차장에다 잠시 차를 세운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거리가 꽤 남은 지점. 운전석을 박차고 나오니 겨울의 밤공기가 시리다. 날숨마다 허연 입김이 베여있다. 택시 트렁크를 열어 걸레를 꺼낸다. 해진 걸레다. 토는...나름 흔한 상황이니까. 아무래도, 야간의 택시였으므로. 공중화장실에서 걸레를 한 번 적신 다음에 진득한 토를 닦기 시작한다. 걸레질이 수월하도록 몸을 움직여 준 손님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연신 사과한다. 자신이 걸레질을 하고 싶다는 듯 팔을 어정쩡하게 움직이기도 한다. 결국 내가 다 닦았지만. 공중화장실에서 걸레를 빨고 나오니 손님이 택시 바깥에 나와 서 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하얀 와이셔츠만 입고 있는데도 추운 기색이 없다. 다가가니 그가 왠지 모르게 조급한 어투로 내게 말을 건다. 그, 죄송한데 잠시 몸 좀 식히고 가도 될까요? 영 좋지 않은 것 같아서...흐려지는 말꼬리. 이후에 세탁비를 지급하겠단 말을 덧붙인다. 사내는 나름 멀쩡해 보인다. 그렇게까지 취한 건 아닌 걸까. 그렇다기엔 그의 얼굴이 너무도 창백하다. 물이라도 좀 드릴까요? 아, 너무 감사하죠. 입이라도 헹궈야 될 것 같아 물병을 건넨다. 그는 입 안에 물을 머금다, 뱉는다. 퉤. 사회생활이란 게 참, 쉽지 않네요. 그가 웃으며 말한다. 아직 입사한지 1년도 안 됐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이런 걸 60대까지 하라니, 영혼이 남아나지 않겠죠. 하하. 그는 웃는다. 시원한 허심탄회라도 할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눈시울은 점점 더 뜨거워져 간다. 같이 입사했던 동기들도 다 퇴사하고, 술은 잘하지도 못하는데, 하필 요즘 또 대리님한테 존나 까이고......그래서 회식을 빠지기도 힘들고, 그리고, 어머니는 아프시고......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미끄러진다. 코끝에 콧물이 맺혀있다. 그는 울음을 토하기 시작한다. 난 말 없이 그의 어깨를 토닥인다. 번듯한 직장인

  • 구포대교
  • 2026-08-10
선에서 길, 길에서 길길길

개학식. 여름방학이 끝났단 서러움은 금세 새 학기의 설렘으로 잊혔다. 오래간만인 친구들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다. 학교는 오기 싫으면서도 오고나면 재밌는 곳이었다. 조용히 앉아 있는 친구들도 있지만 교실 뒤편에 모여 떠드는 친구들이 많았다. 종이 치고도 떠들던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자 느긋이 자리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익숙한 자세로 교탁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방학 잘 지냈냐, 놀기만 한 건 아니겠지, 하는 상투적인 인사들 뒤로, 중요한 공지가 있다 말했다. 그는 전학생이 있다며 열려있는 문 너머의 복도에 손짓했다. 한 여자아이가 뻣뻣한 걸음걸이로 교실에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뻣뻣이 굳어버렸다. 안녕하세요. 뒷자리에는 닿지도 않을 자그마한 목소리. 시선을 내리깐 그녀의 얼굴은 이틀 전의 오전으로 날 호출했다. 볕이 들지 않는 복도였다. 낙후된 복도식 아파트는 하나의 복도에 다섯 개의 문이 나란히 있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옆집으로 이사 온 가족이 초인종을 눌렀다. 우리 가족 모두 집에 있던 참이었고 우리는 복도로 나가 그들과 대면했다. 그들은 거구의 흑인 남자와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딸로 보이는 여자아이 세 사람이었다. 남자는 두터운 입술로 어설픈 한국어를 구사하며 인사했다. 엄마와 아빠는 어엿한 한국인이면서 괜히 아, 예, 안녕하세요, 우물쭈물 인사를 받았다. 난 반대편에 선 그들의 딸을 보았다. 키는 나보다 작지만 또래로 보이는 외모였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 얼굴을 들여다보다 괜히 시선을 돌렸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다. 엄마아빠는 상대 부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내게 일을 떠맡겼다. “따님이 참 예쁘네요. 우리 애랑 또래로 보이는데.” 그러고는 인사를 시키는 것이었다. 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의도치 않은 작은 목소리로 안녕, 하니 메아리처럼 안녕, 이 돌아왔다. 엄마에 의해 강제적으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자신의 아빠만큼은 아니지만 어두운 피부였고 이목구비도 신비로운 느낌이 맴돌았다. 그녀와 나는 동갑이었다. 그녀가 이름을 유진이라고 소개할 때, 난 그것이 본명일까에 대한 의구심을 잠시간 품었다. 불편한 이웃이 교실로까지 들어오자 꽤나 당황했다. 다만 오래지 않아 사라질 당황이었다. 유진은 조용한 아이였고 쉬는 시간에도 홀로 책상에 앉아 노트에다 뭔가를 끄적이는 데만 열중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교실의 누구와도 쉽게 말을 섞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지목 당할 때나 겨우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친구들과의 대화는 의무적으로만 성립됐다. 난 아직 한 번도 대화해보지 못했다. 나 또한 친화력이 좋지 않아 본래 어울리던 친구들과만 어울렸다. 같은 교실이 아니었다면, 같은 아파트가 아니었다면 아예 모르는 사이였을 터다. 우연한 배경으로 서로를 인지하는, 그 정도의 사이였다. 유진이 1학년 2학기에 전학을 온 후 나와 그녀는 3학년까지 같은 교실을 썼다. 이웃이라고 선생님들이 반 배정에 수작을 부렸나 의심하기도 했다. 나도 유진도

  • 구포대교
  • 202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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