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미안해서
- 작성자 비보
- 작성일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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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안사랑해.”
싸구려, 삼류에다가 유치하기까지한 연애소설에나 나올 법한 말이야. 하지만 결국 내 입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고작 그거야. 그 말을 내가 할 용기가 있었는지도 몰랐고, 또 그럴 자격이 있는지조차 확신이 없었어. 그런데 결국 내가 해냈다는 건 정말 해야되는 일이기 때문이겠지.
“그냥… 네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을 뿐이야.”
걔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심장이 딱 세번 뛰는 동안 보고 있었던 것 같아. 고개를 휙 돌리고 문을 빠져나갈때 흩날리는 눈물방울도 언듯 본 것 같고.
눈 앞에서 핑핑 돌고 있는 의자가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보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금새 눈가가 붉어졌어. 나는 하릴 없이 눈물이 달아오른 뺨 위로 흐르도록 내버려두었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이미 입밖으로 나간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는 거. 내가 방금 그런 말을 한 거 같아. 난 천장을 올려다보며 금을 세기 시작했어.
금 하나를 발견하면 눈물 한방울. 발견하지 못해도 한방울.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규칙은 금세 나를 잠식해버렸어. 내 옷은 금새 눈물자국으로 가득해졌지.
창틀에 기대어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오히려 더 향수에 젖어들고 있지 뭐야? 우리가 같이 했던 모든 즐거웠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길 시작했어. 나쁜 기억들은 누군가 일부로 쏙 빼놓은 것처럼 말이야.
수업 종이 치고 나서야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있었어. 복도 쪽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슬프게 들려오더라.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으니 엉덩이 밑에서 무언가가 느껴졌어. 구겨진 편지였지. 내가 깜박하고 전해주지 않은 건가봐. 입구에 붙은 하트 스티커를 뜯어보니 눈물자국으로 가득한 종이가 딸려나왔어.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미뤄왔던, 차마 보지 못했던 기억들.
삐뚤한 글씨와 풋내나는 스티커까지 완벽했어.
그 편지를 가져온건, 난 걔가 나와의 어릴 적 시절을 잊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나봐. 내 욕심이었을까? 잘모르겠지만 편지는 전해주는 것을 잊어버렸으니 우리의 추억 역시 잊히게 맞는거겠지.
정말 그럴거야.
내가 한 일이 옳아.
우리 둘은 여기서 끝인거야.
난 고개를 무릎팍 사이에 파묻은 채로 시간이 나를 못본 척하고 지나가기를 기다렸어.
누군가가 문을 열어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나서야 난 고개를 들었어.
연호는 나와 젖어있는 내 옷,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보고 멋대로 판단해버린 듯 했어. 그는 주춤거리며 내 눈을 피했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거 아니야.”
연호는 힘겹게 입을 열었지.
“뭔지 물어보진 않을게. 그 누나가 무슨 짓을 했을지 알 것 같으니까.”
내 눈물에 젖은 얼굴을 빤히 보고 있는 그도 나만큼이나 당황스러워 했을거야. 습관처럼 그는 발을 질질 끌며 눈을 내리깔았어.
“걔가 날…그렇게 한게 아니야. 내가 끝냈어.”
연호의 눈이 반짝거렸어. 그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앉았지. 그는 평상시와 같은 나를 보며 날 번쩍 들어올렸어. 하고 싶은 말들이 혀에 맴돌았지만, 차마 행복해 보이는 그의 앞에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을 할 순 없었어.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어.
“그냥, 그렇게 됐어. 딴 건 없고.”
난 편지를 든 손에 힘을 주었어. 이미 구겨진 종이는 글씨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져 있었어. 나 역시 그만큼 구겨져서 작아졌지.
“괜찮아? 내가 선생님한테는 형이 좀 아팠다고 얘기해 둘게.”
“멍청아. 우리 쌤한테 가서 말하겠다고? 지금 수업 중이잖아.”
내 말에 연호는 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어.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었으면 연호에게 엄청 좋은 일이 일어난 줄 알았을거야. 내 기분은 그 반대인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알아?”
그의 목소리는 역시 조심스러웠지. 내가 슬픈 것처럼 보여서였을까? 아닐거야.
“아니. 아무도 몰라.”
내 말에 연호는 고개를 끄덕였어.
난 연호 몰래 편지지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문을 열었어. 역시나 복도는 조용하기 그지 없었지.
“이제 가. 너 또 땡땡이 치려고 그랬지? 지윤이가 걱정하겠다.”
연호는 말없이 나를 지긋이 돌아본 후 이학년이 수업중인 교실로 돌아갔어. 연호가 활기차게 “늦어서 죄송합니다!”라고 외치는 소리와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소리, 그리고 선생님의 웃음기어린 호통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어.
난 최대한 느린 발걸음으로 하얀색 페인트칠이 되어있는 복도를 걸었어. 발에 모래주머니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지만 그래도 견딜만 했어. 이제는 덜 힘들 거 같았거든. 이제는 덜 피곤할거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 전부 다 무시하고 살 수 있을 거 같았으니까.
이미 끝난거야.
되돌릴 수 없어,
오히려 개운하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걔가 날 빨리 잊어주도록 바라지도 않기로 했지. 편지도 이제 존재하지 않아. 우리 둘 사이를 이어줄 마지막 밧줄도 남김없이 끊어진거야.
우리 교실에서는 이미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어. 나는 숨을 크게 들리쉰 후 문고리를 돌렸어. 심장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쿵쾅거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교실 안으로 들어갔지. 내가 들어간 순간 누군가가 형광팬 무더기를 떨어트렸고, 그덕분에 나는 아이들의 시선을 피해 자리에 앉을 수 있었어. 나를 쳐다보는 원망 어린 눈초리도, 속닥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도 없었어.
선생님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교과서를 넘기며 소리쳤지. 힘없이 휘두른 자는 교탁을 때리며 교실을 울렸어.
“또 늦었냐?”
나는 영혼없이 교과서를 집어들어 옆자리 친구가 불러준 대로 본문을 읽었어. 내 눈은 걔의 자리로 가있었지만 걔의 자리는 텅비어있었지. 보건실에 간 모양이야. 물론 진짜 아픈건 아니겠지만.
하지만 걔의 가방과 책상 위에 올려진 담요는 그대로였어. 가방에는 내가 준 키링과 인형이 매달려있었지. 나는 순간적으로 그걸 때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어. 과거에서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탓일까? 더이상 걔의 물건들을, 흔적들을 볼 낯이 없어.
나는 내 가방에 달린 것들을 전부 떼어 내 앞자리에 앉은 석현이에게 건내주었어. 그는 영문도 모른채 인형을 받고 좋아했지. 찝찝한 기분은 그대로였어. 하지만 이것도 그냥그러려니 했지. 연호가 그 새끼랑 헤어질 때 그랬거든. 한순간일 뿐이라고.
그런데 그 한순간이 어느때 보다 아픈 것 같아.
난 하루가 지나가도록 그냥 내버려 뒀어. 누가 소문을 퍼트린 건진 몰라도 금세 우리가 깨졌다는 사실이 알려졌어. 내 곁을 스쳐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날 위로하기만 했지 날 이해하려고 하진 않았지. 딱히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어. 그냥 날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했지.
“괜찮아?”
연호는 그저 나에게 이렇게 물었어.
그래. 난 괜찮아.
“그럴 줄 알았다.”
민호는 그저 딱 한마디 하고 눈길을 돌렸어.
“축하한다. 솔로로 돌아온 걸 축하해.”
석현.
“역시 넌 연애는 아니야.”
지우.
“...”
모두들.
그냥 그런 말들.
지껄이는 걸 듣기가 싫어. 난 어느때보다 진심이었는데. 누구는 장난으로 치부하고 누구는 놀릴 흑역사로 생각하지. 하나의 관계를 이루는 무언가가 사라졌는데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는걸 깨닫는건 정말 무서운 일이야. 내가 얼마나 작은지 알게 되지.
어쩌면 난 성장한 걸지도 몰라. 아니, 그냥 다른 아이들처럼 의미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지도.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모르겠거든.
난 육교를 걷는 동안 손톱을 물어뜯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어.
“가냐?”
난 뒤를 돌아보기 전 눈을 꼭 감았어. 정말 익숙한 목소리였거든. 수십번도 들어온 목소리 말이야.
“야. 나 좀 보자.”
공기의 밀도가 낮아진 것 같았어.
“응.”
“그냥 그렇게 끝난거야? 우린?”
“응.”
“알겠어. 걱정하지 마.”
“고마워.”
“연호한테 말했어?”
“응.”
“이제 다알겠네?”
“그렇지.”
“괜찮아?”
“내가 미안해.”
“그럴 것 없어. 나도 네가 나 안좋아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으니까.”
“응?”
“넌 그냥 날 친구로 생각했던거잖아.”
“응.”
“알았어. 잘가.”
아, 내가 무슨 말을 했던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하지만 걔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흘렸던 눈물은 기억해. 그런데, 거기엔 내 것도 조금 섞여 있었던 것 같아.
젠장.
이제 끝났으니 가봐.
나 울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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