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버튼
- 작성자 드시코
- 작성일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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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인류의 핸드폰, 컴퓨터 등 모든 전자기기에 붉은 버튼이 나타났다. 붉은 버튼은, 아무런 꾸밈 없는 검정 바탕에, 오래된 게임기에서나 볼 듯한 저조한 그래픽 이미지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2042년 3월 19일.. 아닌가, 20일이었던가?
나는 지금 내 핸드폰을 쓸 수가 없다. 너가 어디야? 라고 물으려면, 나에게 직접 찾아와, 내 앞에서 어디야? 라고 물어야 한다.
왜 핸드폰을 쓸 수가 없는데? 라고 너는 물을 것이다. 나는 말할 것이다. 화면에 이상한 게 떠. 너는 그럼, 어디 봐. 라고 말하며 몸을 돌려 나와 나란히 설 것이다. 나는 가방에서 뒤집힌 핸드폰을 꺼내어 그것의 우측에 달린 전원 버튼, 오오, 그 섬세한 감각, 매우 익숙한 감각으로 가비얍게 누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붉은 버튼을 볼 것이다.
2
너는 이게 뭔데? 라고 물었다. 나는 답했다. 나도 몰라. 너는 얼굴을 들어 나를 한 번 보았다. 내 얼굴을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았다. 버튼이잖아? 너는 물었다. 그래. 나는 말했다. 이게 뭔데? 너는 또 물었다. 나는 말했다. 핸드폰을 켜 보니까, 이게 떠 있는 거야. 너는 답했다. 어. 나는 말했다. 보다시피 버튼이잖아? 어. 너는 답했다. 그게 다야.
이것은 버튼이었다. 버튼은 눌러짐으로써 전류를 통하게 해 어떤 변화, 명령의 신호를 조달할 수 있는 장치이다. 그러나, 어떤 명령이란 말인가? 어떤 변화가 나타날 것인가? 나의 버튼은 스크린 속에 있다. 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방금 이것을 보았을 때, 어떤 의심도 없이, 손가락으로 밀어 넘기려 했다. 다행히 나는 평소와 다른 이질적 상황임을 눈치채, 다행히 손을 제자리에 놓았다. 하지만 정말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버튼을 누르라는 말조차 없다. 버튼은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어떤 소리조차 없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화면은 꺼진다. 다시 누르면, 버튼과 재회한다. 우리는 길 위에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가 커졌다. 둘러보니, 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코트를 많은 사람들이 입고 있었다. 곧 겨울인가? 겨울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늙어 보이는, 인상이 너그러워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상대적으로 젊어 보였던 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웃으며 네게 당신의 핸드폰도 이런 모양이냐고, 물었다. 너는 공손하지만 차가운 어투였다. 네, 근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답을 들은 아주머니는 조금 두리번대며, 또 웃으며, 별일이 다 있다고 말하며 사라졌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뉴스를 보면 되지 않을까? 너는 나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뉴스 또한 핸드폰으로, 나는 보아왔다. 아, 은행 같은 곳에 가, 커다란 텔레비전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나는 은행을 찾으려고 지도 앱을 위해 무심코 핸드폰을 들었지만 이내 다시 가방에 넣고 걸음을 빨리했다. 너는 두리번댔다. 사람들도 두리번댔다. 너는 사람들이었다.
은행에 들어서자, 텔레비전 속의 버튼은 더 커다란 몸집으로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에게 무언의 응수로, 따라 응시하고 있었다. 한 걸음 딛기도 버거울 만큼 북적댔다. 사람들은 꽤 큰 목소리로 뭐라 말하고 있었다. 시비가 붙은 듯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니까 리모컨으로 이 버튼을 눌러, 그래, 당연히 그 위의 고무로 된 OK 버튼을 누르면 되겠지. 나는 생각한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거니까. 인파 속에서, 한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것이다. 뉴스를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누군가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그 반대편에서 고함을 치던 사람은 리모컨을 손에 꼭 쥐고 놓을 기색이 없어 보였다. 리모컨을 마치 신성한 물건처럼 높게 쳐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웅성댔다. 야 이 자식아, 당장 내려와, 조용히 좀 해라, 엉망이잖아, 그들의 말 하나하나, 호소력이 없고, 작게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는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넓은 은행과 시간의 일부로서 존재했다. 그들의 눈은 그 싸움과 팽팽히 당겨진 공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들의 대변인들과 눈이라도 마주칠 듯하면 고개를 떨궜다.
3
너는 집에 가겠다고 했다. 너는 갔다. 나는 걸었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내 손에 쥐어진 핸드폰이 그동안에 나의 어떤 목적을 대변하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집에 가려면, 집에 가는 길은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지하철역에 들어가자. 나는 생각했다.
무심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려 했으나 먼젓번의 버튼을 다시 보았을 뿐이었다. 고대의 동굴 같은 계단을 내려가 개찰구에 가까이 왔지만 카드가 없었다. 현금이 있을까? 나는 작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보았다. 천 원 세 장이 있었다. 십 원 두어 개가 맨 아래쪽에 있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꺼내지 않았다. 현금으로 일회용 교통카드를 샀다. 그렇게 탔다.
차내는 쾌적했다. 에어컨은 언제나 승객들의 표정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시원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많았다. 은행보다는 못했지만 옅은 웅성거림이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람이 적었다.
이것은 재난일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있고, 나 또한 그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아늑한 기분을 준다. 비가 오는 것이 지금과 닮았다. 모두는 비를 맞게 되는 것이다. 누구와도 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빈자리는 두세 칸 정도 있었다, 한 곳에 앉았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옆 사람은 보란 듯 핸드폰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안경을 쓴 그의 눈빛은 심연 같았고, 동작이 재빨랐다. 그는 가끔 삐져나온 코털이 불편한 듯 검지로 그것들을 잽싸게 정리했다. 그는 정말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쇼츠를 보고 있었다. 그의 화면 속에서, 수많은 인간상과 편집되고 가공된 영상들이 엘리베이터처럼 쓸려 내려갔다. 나는, 평소라면 말도 하지 않았겠지만, 모두가 이 버튼이란 공통된 의식적 세계 안에서 찰나라도 머무는, 일종의 축제 같은 분위기였기에, 용기가 생겨 그에게 물었다. 저기요,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눈꺼풀을 조금 올려, 반응했다. 나는 그 행동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지만 질문한 쪽은 나였다. 나는 물었다. 혹시 버튼 못 보셨어요? 최대한 이해하기 쉽고 명료하게 말하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지금 쓰고 계시나요? 나는 물었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는 나를 보고, 꽂고 있던 이어폰을 잠깐 빼며 웃으며 답했다. 도수 높은 안경알을 치켜올릴 때 눈이 보여 여러 개로 보여 그는 마치 거미 같았다. 버튼을 눌렀지요.
나는 물었다. 조금 웃었다. 어떤 판단도 나는 아직 내릴 수 없었다. 하나 나는 그의 성급한 태도를 내심 탐탁지 않게 여겼다. 버튼을 눌렀다고요? 나는 재차 확인했다. 그는 귀찮은 듯이, 이어폰을 꽂고 내게 고개를 돌리고는 잠깐 눈을 치켜뜨며, 나를 파악하려는 듯이 흘겨보았다. 네. 그가 답했다. 나는 물었다. 누르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핸드폰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아무것도요. 나는 말했다. 아무것도요? 그는 나를 위협적인 인물로 가장한 듯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출입문 가까이 가 몸을 기대는 것이었다. 나를 힐끔 보더니 이제는 아무 말 없이 핸드폰에 집중했다. 나 또한 침묵하며, 차바퀴가 깊은 동굴에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그 마찰력에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무엇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처음 보는 생소한 역에 열차가 멈추어 섰다. 그 사람은 고개를 들더니 급하게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그가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 후 열차는 집 부근의 역에서 내렸다. 정확하고, 또 정확했다. 출입문 위에는 비타민 광고가 붙어 있었다. 인간은 돈을 주면, 처음 보는 유리병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며 웃는, 공허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역 밖으로 나가, 주위를 보았다. 사람들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었다. 익숙한 감각의 부드러운 곡선, 촉감. 핸드폰은 언제나 이곳에 있다. 이것은 어떤 의식으로서, 나에게 심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타인의 손을 만지기보다는 타인의 손을 이미지로 보았고, 또 떨리는 목소리를 이어폰을 끼고 듣곤 했다. 이 핸드폰은 나의 세상이었다. 내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곳이다. 나는 금단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초조를 느꼈다. 그렇게 되니 갑자기 이 붉은 버튼이라는 알 수 없는 현상이 미워 보이고, 또 아기처럼 울음을 놓고 싶었다. 왜 이런대? 차라리 눌러 버려?
4
핸드폰 매장에 가면 되겠다. 나는 생각했다. 길을 알고 있었다. 보증금 오백 원을 돌려받았다. 동전이 심하게 녹슬어 있었다. 나는 걸으며, 거울 속의 비친 내 모습과, 지나가는 타인들을 보았다. 개중 핸드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버튼을 누른 것인가?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런 일도 없나? 나도 눌러볼까? 전화가 오지 않았을까? 어떤 확인해야 하는 위급한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누가 내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까?
나는 보도블록 위를 걸었다. 보도블록은 항상 어긋나지 않고 아귀가 꼭 맞는다. 나는 그것을 보고 걸었다. 순간 무료한 느낌이 들어, 가방에서 이어폰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핸드폰을 쓸 수 없단 것을 깨닫고는 손을 멈추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새 소리가 들렸다. 새는 울었다. 새는 지저귀었다. 새는 또한, 날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았다. 나무는 이제 다시 푸르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고쳐야 한다. 혹시나 해서 다시 전원 버튼을 눌러 보았다. 여전히 붉은 버튼이 있었다. 한쪽 눈을 감고 보면 원근감을 느끼지 못해 그것이 눈앞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평면으로서만 존재했다.
매장 앞 줄이 길었다. 사람들이 역시나, 모여든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삼십여 명, 아니, 세어 볼까. 하나, 둘, 세, 삼십삼 명, 서른세 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가까이에 서 있었지만 서로의 몸이 스치거나 눈이 닿기 전까지는 그저 존재함을 인지할 뿐인 타인이었다. 그들도 방금의 나처럼 무료한 듯 보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들의 표정과 얼굴, 행동과 몸짓을 보느라 따분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장치의 수리이자, 이 끔찍한 권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되찾는 것이라고까지 여겨지는 어떤 잠금에의 해제였다. 그들은 수감자였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아직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존재하고 있었으나, 완전한 무엇이 아니었다. 결여를 느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들은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나무와, 하늘과, 풀과, 네발 동물과, 꽃이었다. 그들은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피로로 누적되어 마음 안에 쌓인, 토사물을 받칠 대야를 빼앗긴 셈이었다.
한 사람이 줄에서 이탈했다. 나는, 멀리 떨어져 그들을 멍하니 보다가, 의식을 되찾아 천천히 걸어가 맨 뒤에 섰다.
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햇볕이 뜨거웠지만 땀이 나진 않았다.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떤 소리? 음악 소리였다. 줄에서 이탈한 소녀였다. 소녀는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물통을 가방 옆 주머니에 끼워 넣으려고 했는데, 잘 안되는 듯 자꾸만 삐져나왔다. 그때 가방의 가장 커다란 구멍이 열렸고 온갖 책들과 필기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보았다. 소녀가 무릎을 굽혀 차근차근 모든 것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나의 뒤로 서너 명이 더 왔다. 나는 유연한 몸짓으로 줄을 빠져나와 그녀에게 걸어갔다. 나는 조금 주저했다. 하지만, 왠지 정신이 맑았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힐끔 보았다. 감사합니다. 인지, 감삼다. 인지, 갬슴다. 인지, 어떤 말이 들렸으나 난 개의치 않았다. 소년의 연필은 노란색이었다. 그 위에, 어떤 눈알이 거대한, 사자 인형이 있었다. 그것은 고무로 만들어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만지작대다 힘껏 눌렀다. 사자의 눈이 지구만큼 커졌다 작아졌다. 나는 그것을 소녀에게 건네었다. 소녀는 필통에 지우개와 샤프심 통을 담고 있었다. 이제 대부분이 정리되었다. 나는 무안해져서 소녀가 지퍼를 잠그는 것을 보다 먼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나는 크게 미소 짓지도 않고, 아주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인사를 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새 더 길어진 줄 뒤에 다시 섰다. 소녀는 돌아가며, 헤드폰으로 귀를 감싸려고 했다. 나는 소녀에게 달려가 물었다. 버튼을 눌렀니? 그 앤 말했다. 놀란 듯이 보였다. 네. 나는 숨을 고르고, 별일 아니라는 듯 차분히 물었다. 어떻게 되던? 그 앤 말했다. 아무것도요. 소녀는 갔다.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나는 땅거미라는 말을 생각하다가 거미 같던 그 남자의 눈을 기억했다. 그 남자도 아무것도요, 라고 했던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천천히 흐르는, 마치 파도같이, 그 잔잔한 수면같이 빛을 발하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운 걸까? 나는 사진을 찍으려고 헀지만 붉은 버튼을 다시 상기했을 뿐이었다. 다만 눈을 부릅떴다. 눈이 아렸다. 변색된 내 피부가 노을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차츰 매장 안으로 들어갔고 나 차례가 되었다. 문이 열렸다. 시원했다. 또한 추웠다. 자동문. 자동문은 자동으로 열리는 것 같지만, 사실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령이 전달되는 것이다. 열어라. 그럼 열린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면 자동이 맞다. 나는 나의 의심을 의심했다.
직원은 초췌한 얼굴로 종이컵에 든 냉수를 홀짝 마셨다. 그는 내게 어떤 노트의 한 쪽을 펼쳐 보였다. 그러고는 작은 볼펜을 주었다. 그는 말했다. 성함과 전화번호를 남겨 주세요. 나는 말했다. 붉은 버튼을 아세요? 그는 이미 여러 번 말한 듯한 어투로 답했다. 저희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요. 나는 대강 짐작했다. 이것은 초유의 해킹일지도 모른다! 거미 남자와, 헤드셋 소녀는, 이제 곧 피해를 입을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구불구불한 글씨로 쓰라는 대로 썼다. 그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나는 물러났다. 그가 내 뒷사람에게,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 행동, 냉수 한 컵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가 로봇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소음이 없었다. 그에겐 인상이 없었다. 그에겐 불필요한 행동이 없었다. 그는 웃어야 할 때 웃었다. 그의 웃음은 명료했다. 그는 적당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다. 주어진 일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했다. 그는 그 자신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다 밖으로 갔다. 여전히 핸드폰을 쓸 수 없었다. 세상은 어두웠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귀뚜라미 소리라. 나는 그 소리를 따라 걸었다. 어디로 걸었을까? 나의 손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나는 밝은 빛을 좋아한다. 그런 뜻에서 나는 마치 나방을 닮았다. 날개가 달린 벌레 중 몇몇은 빛을 달빛인 줄 알고 착각한다. 아침이 되면 그들은 사라져 버린다. 그때는 세상 모든 것이 밝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밤의 달이다. 그들은 어두울 때 밝은 것을 좋아한다. 밝을 때의 밝은 것은 어떤 의미도 없다.
5
번화가에 다다랐다. 그곳은 마치 낮처럼 환했다. 나는 물을 수 있다. 왜 내가 이곳에 있지? 또한 나는 답할 수 있다. 나는 나방이다. 나는 나방이기에 그렇다. 나는 빛을 쫓는다. 나는, 어떤 세상과의 단절이라는 무의식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에, 초라한 상태였음에도 이곳에 걸음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시끄러웠다. 열린 창문을 통해 내부가 그 내부가 훤히 보였다. 술집의 직원은, 노트북에 스피커를 연결해, 노래를 틀고 있었다. 그 노랫소리는 정말 컸다. 나는, 돼지가 엄지를 척 내밀고 있는 그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사실 돼지는 엄지를 척 내밀 수가 없다. 저런 그림은 말도 안 된다. 돼지의 눈엔 기괴한 속눈썹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억지로 웃기려는 듯해 안쓰러운, 엽기적인 캐릭터였다. 돼지고기를 파는 식당에서 돼지 그림을 붙이는 것. 이것은 범죄다. 나는 생각했다. 엄지를 필 수 있는 건 인간이었다. 그 누구도 엄지를 척,하며 죽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6
나는 한 가게로 들어갔다. 작은 커튼을 치자, 밝은 조명과, 부연 연기와 왁자지껄한 분위기, 나는 숨을 쉬려고 하지 않았다. 노래가 나오는 노트북 근처에 서 있다가, 사이다를 나르는, 창을 통해 본 그 직원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눌러쓴 그 사람은 내가 당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잠시 멈추더니 내게로 걸어왔다. 가게가 작아, 몇 걸음도 채 되지 않았다. 가까이 오자, 내가 먼저 물었다. 혹시 말이죠, 나는 목소리가 작았다. 나는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그 사람은 매장 앞에서 본 소녀였다. 소녀의 눈을 날 보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노트북 어떻게 키셨나요? 소녀는 네? 하고 물었다. 시끄러운 고기 굽는 소리에, 그 치이이이, 하는 소리에 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노트북에, 그, 버튼이 뜨지 않았나요. 나는 ‘뜨지’가 아닌 다른 말을 찾으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또 이것이 가장 간단했다. 그런데 소녀는 나를 알아보고 있나? 소녀가 말했다. 내 이마에 땀이 맺혔다. 빨간색 버튼이요? 그거 그냥 누르시면 돼요. 나는 물었다. 네? 그녀가 말했다. 누르시면 된다고요. 구석의 테이블에서 중년의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그녀는 나를 조금 보더니 마늘과 된장을 나르러 자리를 떴다. 주방의 직원이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곳은 시끄러웠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높은 전광판의 분홍빛 조명이 그 거리와, 움직이는 사람들의 긴 그림자와, 시끄러운 군중의 소리와, 밝은 옷 가게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백화점 건물에 달린 전광판에 붉은 버튼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사람들이 어떤 해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보며 걸었다. 또 사진을 찍기도 했다. 길 가운데에 놓인 하트 모양의 장식물 우측으로 짧은 줄이 차츰 생기고 있었다. 줄이란 것은 일종의 필요이자, 욕망의 증명이었다. 나는 한눈에, 사람들의 표정을 읽으며 그들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왜 하필 그 구조물 옆에서일까? 구조물은, 잔디를 하트 모양으로 깎아 놓은 것 위에, 와이어로, 사랑, 이라고 휘어놓은 것이었다. 그 모양으로 곳곳에 달린 조명이 반짝였다. 정말로 아름다운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가자고, 그들의 부모님을 보챘다. 부모님은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고 했다. 정말 그렇지는 않았다. 입김이 나왔다.
붉은 버튼이 저 위에 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저 거대한 것과 나의 작은 것을 비교해 보았다. 정확히 같은 모습이었다. 전광판 또한 그 배경이 검은색이라, 붉은 버튼이 허공에 떠 있는 듯했다. 그것은 아주 높은 곳에 있었다.
소녀는 내게 말했었다. 아무것도요. 버튼을 누르면 된다고 했다. 거미 남자는 내게 말했다. 거미 남자도 내게 똑같은 말을 했다. 아무것도요. 나는 자동으로 꺼진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눌러 그 버튼의, 변함없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붉었다.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나는 답답했다. 원하는 느낌이 오지 않았다. 나의 홈 화면, 그 알록달록한 배열과 모습, 총체적인 상. 그 여운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되니 갈증 비슷한 무엇마저 느껴졌다. 버튼은 여전히 있었다. 버튼은 붉었다. 나는 눈을 찡그리고, 버튼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버튼이다.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버튼이라는 사실이다. 천천히 본다는 게 과연 무엇인가? 나는 정말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게 맞는가? 나는 정말로 버튼을 누를지 말지 고심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단지, 얇은 유리 화면에 나의 손가락이 닿게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사소한 일이 아닌가? 그것을 한다면, 나의 마음은 편안해질 것이다. 나는 이 타는 듯한 갈망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인터넷에,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검색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앱의 귀퉁이에는, 붉은 원에 흰 글씨로, 오, 그 강렬한 모습이란! 문자가 얼마나 왔는지, 그것이 드러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매일 보았다. 나는 확인이자, 나는 터치였고, 나는 움직임이었다. 나는 전화번호였다. 나는 숫자였다. 나는 클릭이었다. 나는 X였다. 나는 사진이었다. 나는 검색이었다. 나는 이미지였다. 나는 엔터였다. 나는 1이였다.
나는 분명히 살아있었다.
길 위의 사람들에게 시간을 물었다. 한 사람은 내게 시간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째서죠? 라고 나는 묻지 않았다. 그 사람은 빠르게 사라졌다. 몇 걸음 가자, 다시 느린 속도로 걸었다. 갔다. 나는 그 식당으로 다시 갔다. 음악을 트는 노트북이 켜져 있으리라. 허리를 숙여, 그래 우측 하단을 보면 시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왜 시간을 알려고 하지? 하지만 나는 시간을 알고 싶었다. 엄지를 올린 돼지고깃집에 다시 걸음하는 것은 그녀를 보기 위한, 또 눈을 마주치기 위한 속셈이라는 걸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면, 나는 비참해지기도 했다. 나는 움직임에 불과했다.
다시 커튼을 쳤다. 연기가 자욱했다. 사람들이 이제는 모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이 없었다. 그것은 내게, 어떤 엽기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고기가 타는 냄새가 났다. 연기가 점점 짙어졌다. 소녀는 카운터에 몸을 기댄 채, 나를 보았다. 소녀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소녀에게 걸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지?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소녀가 말했다. 왜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라면, 지금 이 순간에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만으로 소녀와 내가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짐작이었다. 붉은 버튼이 해킹일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그녀가 돌연히 말했다. 그녀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 얼굴 바로 아래에 두었다. 케이스에 보석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소녀와 핸드폰에서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나는 화면을 응시했다. 오, 이 작은 화면, 얼마나 그리웠던가! 나는 몸이 이완되는 것을 느꼈다. 조금 거만해졌다. 화면의 인간은 말했다. 그 사람은 외국인이었다. 다르지 않은 인간이었다. 아래에 자막이 있었다. 그 사람은, 세계적인 해킹의 가능성을 염려한다며 우려의 뜻을 표명했다. 나는 뉴스의 사람들이 정말로 마음에 있는 말을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었다. 특파원이 등장해 마무리했다.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고기 타는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영상이 끝나자, 그녀는 갑자기 손님들에게 고기가 탄다며 다가갔다. 나는 멍하니 다시, 그녀의 움직임을 보았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었다. 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탄 고기는 먹을 수가 없다.
해킹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별안간 시간을 보러 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고개를 숙여,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현재 시각이 있어야 할 귀퉁이에 광고 창이 작게 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광고가 아니라, 업데이트 알림이었다. 나는 X를 눌렀다. 그러더니, 화면 중앙에 팝업 창이 떴다. 언제 다시 알려 드릴까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하루 뒤 알림과 일주일 뒤 알림. 나는 하루 뒤 알림을 클릭하고 시각을 보았다. 열한 시 오십구 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난 나의 머리 바로 오른쪽에 벽시계가 있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날카로운 분침이 시침과 거의 겹쳤다. 나는 그제야 왜 금방 전 업데이트에서, 알리지 않음이라는 선택지는 없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는 카운터에 왔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욕을 했던 그 사람이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기계적인 어투로 그들의 영수증을 뽑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개중 한 사람은,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카드 리더기 옆 박하사탕을 집게로 집어 자신의 손에 하나씩 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소녀는 그것을 보고 네, 가져가셔도 됩니다,라고 했다. 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 바깥의 사람들과 합류했다.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를 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그 주위 사람들에게 사탕을 하나씩 주는 것을 보았다. 누구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여전히 그 위에 붉은 버튼이 있을까?
소녀가 물었다. 주문하시곘어요? 내가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이든 오래 하고 싶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버튼을 눌러도 된다는 건가요? 나는 이렇게 물었다. 소녀는 털썩 주저앉고는 말했다. 뉴스를 보니까 조금 후회되네요. 그리고서 나를 보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고기 굽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그녀는 일어났다. 나는 반걸음 다가갔다.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전원 버튼을 눌러, 그녀에게 붉은 버튼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말했다. 아직 안 누르셨나요. 와우, 대박. 제 주변 친구들은 다 눌렀는데. 그리고서 그녀는 웃었다. 나는 그녀가 사교성이 좋다는,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소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녀는 단지 그러했다. 말이란 것은 의심을 수반한다. 눌러도 되는 건가요? 나는 물었다. 그녀는 말했다. 안 누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조금 어깨를 움직이며, 아, 핸드폰을 쓸 수가 없어서. 그녀는 나를 안타깝게 보았다. 그것은 어떤 이지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단순히, 공감과 동정이었다. 그것은 그러나 동정을 받을 만한 행동도 아니었다. 내가 말을 멈추자 그녀는 뒷짐을 지고 조금씩 물러섰다. 그러고는 갔다. 그녀는 사이다를 옮겨야 했다. 나는 소녀에게 동정을 구하고 또 교태를 부린 나의 본성을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비참했다. 순간 너무 큰 민폐를 끼친 것 같았다. 고기 굽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움직였다. 소녀는 밑반찬이 셀프라고, 어떤 사람에게 말했다. 소녀는 새로 들어온 손님에게 몇 분이냐고 물었고, 연기 소리와 금세 떠들썩해진 사람들 사이를 지나 셀프 코너에서 마늘과 된장을 작은 접시에 잽싸게 담았다. 나는 시선을 옮겼다. 사라져 버릴까, 생각했는데 카운터 서랍에 작은 책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집이었다. 시집이라고? 나는 그것이, 사랑에 관한 시임을, 그런 연정과 관련된 것임을 내심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떤 힘을 얻고, 그녀에게 더 말을 걸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저했다. 나는 도둑이 아닌가? 정신병자가 아닌가?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누가 시를 읽는단 말인가? 나는 잽싸게 그 작은 책을, 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분실물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마늘과 된장이 담긴 접시를 새 테이블 위에 올린 후 내게 걸어왔다. 나는 참회의 마음이 들어 책을 꺼내 제자리에 놓을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면 들통이 날 것이다. 그녀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안녕히, 라고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켰다. 붉은 버튼의 상이 눈에 맺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눈치채고 쫓아올 수도 있다. 식당에서 나온 뒤 뛰었다. 전광판은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7
집에 돌아오자 식탁에서 아버지가 물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나는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했다. 한동안 적막했다. 나는 식탁 근처에서 컵에 담긴 물을 천천히 마셨다. 나는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향기가 조금 배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버지가 태도를 바꾸어 내게 물었다. 네 핸드폰도 그러니? 나는 경계하듯이 물었다. 뭐요? 나는 버튼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버튼 말이다. 이거, 아버지는 핸드폰으로 붉은 버튼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컵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버튼이 아니었다. 인터넷의 이미지였다. 나무위키였다. 붉은 버튼 사건,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물었다. 버튼 눌렀어요? 나는 눌렀다는 표현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 버튼을 과연 실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새우깡과 술을 천천히 먹고 마시며 말했다. 아니, 쓸 수가 있어야지. 한 번 누르니까 사라지더라. 아버지는 핸드폰을 돌려 아버지 혼자만 보았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나는 말했다. 그게 뭔지 알고 눌러요. 해킹일지도 모른다는데.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여전한 나의 붉은 버튼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투로 내게 말했다. 지 혼자 눌렸어. 그래도 핸드폰을 써야지. 그건 눌린 게 아니라 아버지가 누른 거예요. 하지만 난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이것의 정체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붉은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 소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허탈감과 무료감에 휩싸여 홧김에 버튼을 눌렀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아 소녀와 대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에, 여전히 누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내일,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그곳에, 소녀와 다시 이야기 나눌 수 있으리라. 밤새 더 많은 사람이 버튼을 누르고, 나는 특별해질 것이다. 그녀는 나를 신기하게 볼 것이다. 나는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난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었다. 아버지를 나는 보았다. 아버지는 핸드폰을 보다가,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몇 시야? 자문하며, 시간이 늦었다고, 내게 자라고 일렀다. 나는 예, 건성으로 답하고, 양치를 하며 옷깃을 잡아 코끝에 대었다. 여전히 향기가 났다. 그 향을 맡으며 눈을 감으니 소녀가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붉은 버튼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무심코 켰다. 붉은 버튼이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라서 침대 아래로 던졌다. 평소에는, 노래를 들으며 잤다. 지금은 귀뚜라미 소리만 난다. 이따금 그치면 적막하다. 밖은 어둡다. 이곳도 어둡다.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어둠은 확실히 두려운 것이었다. 귀뚜라미 소리가 커졌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며, 귀뚜라미와 인간의 유대 관계에 대해 생각하며, 귀뚜라미가 나를, 이 포악한 어둠으로부터, 또한 미지의 존재로부터 지켜주는 느낌을 받으려 애썼지만 무의해졌고, 헛수고였다. 나는 뒤척였다. 눈을 떠 윤곽이 흐려진 사물들을 쳐다봤다. 그것들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내 목과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는 몸을 왼쪽으로 돌리고, 옷소매를 당겨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 이 방에 존재하지도 않는 그녀에게 말을 걸며, 아침이 오기를, 또한 잠에 들기를 바랐다.
8
눈을 떴다. 몇 시인가? 나는 벽시계를, 고개를 들어 보았다. 목이 뻐근하였다. 열한 시 이십이 분에서 이십삼 분 정도였다. 늦게 일어난 셈이다, 내가 깬 것은 창밖의 새가 시끄럽게 울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생각했다. 새는 정말로 지저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물을 천천히 마셨다.
옷의 향기는 거의 가셨다. 이것은 내게 아쉬움을 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어떤 필요의 욕구를 느끼며, 다시 내 옷에 그 향기가 배면 좋겠다. 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여느 날과 다르게 집에서 나갈 때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책상 위의 핸드폰을 무의식적으로 확인했다. 여전히 붉은 버튼이 있었다.
거리를 걸었다. 조용히 걸었다. 햇살이 따듯했다. 사람들이 많았다. 늦게 일어났다. 역시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핸드폰을 쓰고 있었다. 이곳에서 돌면 지하철역이 나온다.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보기도 했다. 나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제 그 고깃집에 가 보니, 오후 세 시부터 영업한다고 쓰여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돼지는 여전히 엄지를 척, 내밀고 있었다. 돼지는 왜 엄지를 내밀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해선 안 된다. 저것은 돼지가 아니다. 돼지는 이 주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고기 말고도, 저것은 그림일 뿐이다. 저것은 돼지가 아니다. 돼지는 네 발로 걷는다. 돼지는 옷을 입지 않는다. 저것을 돼지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착각할 순 없다. 어떤 돼지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웃으며 엄지를 세우지 않는다. 돼지는 우리가 자신을 먹는 것을 칭찬하지 않는다. 도살 앞에서 사유(思惟)를 얼버무리기 위한 것이다. 평면에의 돼지는 돼지가 아니다. 나는 정말이지 실재하는 돼지를 본 적이 없다.
이제 뭘 하지? 나는 생각했다. 그래, 앉아 있을까. 나는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 켜지지 않은 조명들이 가득한 어제의 그 거리를 벗어나 근처에 있던, 커다란 역사(驛舍) 안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다. 거대한 인파의 흐름은 왔다 가고, 또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했다.
나는 그곳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가 없었고, 또 딱딱했다. 역에는 커다란 시계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분침과 시침이 무거워 보였다. 큰 창문으로 하얀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달렸다. 또 걸었고, 핸드폰을 보았다. 나는 갑자기, 이 붉은 버튼이라는 것이, 나만의 착각이라는 기분이 들어,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하나 붉은 버튼은 여전히 있었다. 다만 어제의 그, 작은 두려움과 미지의 것에 대한 생소함은 사라져 있었다. 그것은 어쨌거나 여전히 존재했다. 전원 버튼을 여러 번 눌러 보았다. 점멸하는 암흑 위로 버튼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다만 나의 등 뒤로 따뜻한 햇살이 비추고 있어서인지, 붉은 버튼은 어떤 장난처럼 보였다.
잠깐 졸았다. 나는 너를 보았다. 너가 먼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높은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내게 다가왔다. 너는 내게 말했다. 뭐해? 나는 말했다, 그냥 있어, 여기에 있지. 너는 내 옆에 앉았다. 너는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니? 나는 물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껐다. 아무것도. 너는 말했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너가 나를 보았다. 눈을 감았다 떴다. 상황을 무마하려 하는 듯했다. 응. 나는 생각했다. 그럼 너의 손가락은 왜 움직였지? 너는 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아무것도. 라고 말했다. 너는 분명 버튼을 눌렀다. 나와 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만든 풍경이 계속 변했다. 어느 하나 멈추어 있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그들을 옮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초침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다. 어떤 사람이라도 한순간에 이 모든 움직임들이 멈추어 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른해져, 눈을 감았다.
눈을 떠 시계를 보았다. 커다란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잎사귀 같은 모양으로 그 테두리가 장식돼 있었다. 좋지 않은 음질로, 안내 방송이 울렸다. 무엇이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두 시 사십일 분에서 사십삼 분 사이였다. 나는 앉아 있었다. 나는 물었다. 붉은 버튼을 눌렀니? 너는 못 들었나 보다. 응? 이라고 너는 답했다. 아까의 캐물음을 여전히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말했다. 붉은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되니? 너는 답했다. 아무것도. 너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킹 같은 게 아녔어? 너는 답했다. 나를 쳐다보며, 입가에 이상한 웃음기가 떠돌았다. 응. 문제 없다니까. 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었다. 왜 눌렀어? 나는 너를 보았다. 너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창문에 비친 햇살이 내 손을 밝게 달궈, 나는 그것을 조금 뒤로 뺐다. 그냥, 나 확인할 거 많은데. 너는 말했다. 전화 오면 어떡해.
9
사람들이 지나간다. 저기 사람들이 지나간다. 핸드폰을 들고 간다. 핸드폰은 그들에게 중요하다. 그것이 없어선 안 된다.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안 된다.
나는 순간, 시집이 나의 주머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오, 그것을 읽으면 적어도, 현재보다는 무료하지 않게 되리라. 나는 생각했다. 또한, 나는 소녀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리라.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그 시집이 정말 소녀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시집을 꺼내자 너가 나를 의아하게 보았다. 너는 언제부터인지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나는 몸을 반대쪽으로 조금 돌렸다. 나는 몇 장을 넘겨, 어떤 시들이 담겨 있는지 파악하려 했다.
그것들은 초등학생들이 만든, 동시집이었다. 이게 뭐야? 1학년 2반 서예지는 자신의 화장실에 대해 노래했고, 5학년 1반 신예준은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악어의 입을 닮았다는 점을 이용했으나, 결말이 어영부영하게 흘러갔다. 시계는 악어라는 말로 시작하더니, 악어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 면 한 면을 넘기었다. 너는 내 어깨에 턱을 기댔다. 너는 물었다. 뭐 읽냐? 무거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조금 흔들었다. 너는 턱을 뺐다. 내가 어떤 아이스크림을 먹을까,에 대한 고뇌를 진 아이의 시를 읽으려는 찰나. 너는 일어섰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너는 말했다. 나 간다, 나 또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시를 읽으려고 했으나,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손을 더 힘차게 흔들었다. 너를 보느라 든 얼굴에 바라본 시계는 두 시 오십 분에서 오십일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깃집에 가려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지금 나가면 소녀를 볼 수 있다. 이제 소녀를 볼 수 있다. 곧바로 일어서 시집을 주머니에 넣고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한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나는 몸을 숙여 과장된 사과를 건네고 밖으로 달렸다.
10
나는 뛰었다. 기분이 몹시 좋았다. 나는 이제 소녀를 볼 수 있다. 나는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했다. 그 적절한 두 속도의 절묘한 조화를 인지하고, 재미있다고 느꼈다.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멈추어 섰다. 그리곤, 미처 읽지 못한 아이스크림에 관한 시를 마저 읽어 보았다. 3학년 3반 왕지수, 일곱 살 먹은 그 시인은, 집요한 자아 성찰을 보이고 있었다. “무슨 맛을 먹을까/내가 좋아하는 맛//무슨 맛이 난 좋지/ 내가 알지 내가//많이 먹지 말아요/이가 모두 썩어요”라는 교훈적인 주제마저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손 글씨는 그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줄일 것을 권고했다. 달리기를 잘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집을 덮었다. 온몸이 오싹했다.
내 바로 옆에서, 거미 남자가 몸을 비틀고 있었다.
붉은 버튼의 영향일까? 바이러스가 퍼진 것일까? 인류가 모두 죽게 되는 것일까?
그는 횡단보도 앞에 쓰러져 있었다. 왜? 그의 몸이 발작적으로 떨렸다. 사람들이 웅성댔다. 주위가 어수선했다. 사방에서 간헐적으로 솟는 비명 소리와 거미 남자의 신음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였다. 그의 안경이 발에 차였다. 그 앞에 자동차가 서 있었다. 운전자가 차에서 내렸다. 손으로 입을 감쌌다. 그것이 내가 본 전부이다. 소리 지르는 거미 남자는, 운동화가 신겨진 자신의 오른발을 향해 양팔을 뻗고 있었다. 그의 몸이 계속 떨렸다. 난 누운 그의 옆에 어정쩡하게 앉아, 말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의 손을 나는 잡았다.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신음하며 내 얼굴을 오직 두 눈으로 보곤 발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오른발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신발 끈을 천천히 풀고 벗겼다. 그의 발은 형편없이 짓이겨져 있었다. 그의 회색 양말이 피로 젖어, 얼룩이 어둡게 변한 채였다.
나는 찰칵, 소리가 들린 귀가 간지럽다고 느꼈다.
나는 잽싸게 그 핸드폰을 꺼내었다. 그러나 붉은 버튼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주저했다. 나는 내 뒤쪽에 있던 한 노인에게 신고를 부탁했다. 노인은 이미 그러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말하며, 구급차가 오고 있다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에게 말했다. 그는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핸드폰을 더 꽉 쥐었다.
11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음식점들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거미 남자가 누운 채로 구급차에 들어가고, 사라지자,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들은 모두 어디서 왔는가.
나는, 보도블록 위로 움직이는 나의 발과, 나무에서 잎사귀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무는 그의 비명을 기억할까?
가게의 문을 열었다. 익숙한 커튼을 가볍게 치고 들어섰다. 그러나 마음은 떨렸다. 몇 안 되는 식탁을, 그녀는 닦고 있었다. 시계는 세 시 십구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일찍 온 것인가? 나는 무안했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능숙한 동작으로 그녀는 카운터 기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나는 그녀가 나를 아직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말했다, 한 분이세요. 나는 말했다. 저기, 그녀는 저 끝 쪽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걸었다. 식탁에 앉았다.
나는 콩나물국밥을 시켰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나는 애수에 잠겼으나, 음식이 나왔다. 나는 내가 몹시 배가 고픈 상태였음을 알았고, 먹기 시작했다. 그녀가 주방 직원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던 책, 못 보셨어요, 나는 흠칫했다. 직원은 당연히 못 봤다고 하겠지. 나는 생각했다. 직원이 말했다. 못 봤어, 그녀가 잠깐 나를 보았다. 나는 땀을 흘렸다.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듯싶더니 열린 수저통의 뚜껑을 닫았다. 나는 밥을 다 먹고, 종이컵에 물을 따라 마시며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어떤 반발심이 생겨, 식탁 아래로 시집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시인의 명시를 지나, 다른 것도 읽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의 것을 읽고 있는데, 소녀가 말하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선 소녀는 말했다. 뭐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거 어디에서 나셨어요? 소녀가 물었다. 나는 말했다. 아니, 말했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저기. 라고 말했다. 네? 그녀는 물었다. 나는 시집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나를 보았다. 어제 가져가셨어요?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말이 없다. 나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말했다. 예. 소녀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시집을 펼쳐 보았다. 나는 말했다. 아이스크림 시인을 아십니까?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말했다. 네? 내가 말했다. 아주 좋은 시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어디에.. 나는 일어서서, 그녀가 들고 있는 시집을 조심스럽게 넘기며, 그 시가 있는 지면을 펼쳤다. 초겨울의 바람이 창문을 따라 내게로 닿는다. 그녀는 천천히 눈으로 읽는 듯했다. 그녀가 말했다. 예, 그렇네요. 나는 다시 앉았다. 나는 앉아 있다. 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녜요. 제 것도 아닌걸요. 그러고는 카운터로 가, 눈이 커다란 사자 인형이 달린 펜을 꺼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익숙한 모습이 보이자, 어떤 용기가 샘솟는 듯했다. 나는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햇볕이 조금 들어와 내 발끝을 적셨다.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던 소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주방 직원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나를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왜요? 다 먹었으면 가세요. 나는 하려던 말을 하지 않고 순간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돌이켜 보니 내 자신이 너무 끔찍했고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잊고 있던 윤리라는 단어가 다시 떠올랐다.
12
나는 이틀 후 붉은 버튼을 눌렀다. 그전의 이틀 동안은 하늘과 바람, 사람들의 걸음 소리를 듣고 지냈다.
그날, 찬 바람이 길가에 쭈그려 앉아 있는 한가한 오후에, 내 방 창문에 참새가 날아든 것이었다. 아주 조용했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조심히 일어섰다. 이불의 바스락, 소리조차 컸다. 그 생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응시하며, 작은 눈에 담긴 어떤 심연 그리고 그 의미를 알아채려 했다. 그 조류의 마음을 알아내려 했다. 고개를 이따금 까딱거렸다. 나는 무심코 핸드폰을 꺼내, 조금은 이질적인 그 곡선을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전원 버튼을 눌렀다. 붉은 버튼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손가락에 버튼이 닿았다. 열렸다. 그리하여 나는 오랜만에, 카메라 앱에 들어가 참새를 부동의 픽셀로 박제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차, 싶었던 건, 카메라로 참새를 찍었을 무렵이었다. 찰칵 소리가 들리자, 참새는 날아가 버렸다.
나는, 참새가 날아가 버린 창틀을 바라보며, 그것이 날아간 까닭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에는, 인간만이 남았다.
13
붉은 버튼을 누른 날, 나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사흘 전처럼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았고, 여전히 붉은 버튼의 정체와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에 놀랐다. 또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음과 불빛, 인간이 담긴 엘리베이터를 탔으며,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은 자유 낙하했다. 점점 속도가 붙었다. 추락하며, 나는 홀로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았다. 내 눈은 가만히 있었다. 또한 나는, 잠시 존재하지 않다가, 또 존재하게 되었다. 창으로 비치는 햇살 때문에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나는 점차 흐릿해지는 나의 방에서 멀어지고, 알 수 없는 흐름에 내 몸을 맡겼다.
어떤 악몽을 꾸었다.
그것은 어쩌면 생각의 불규칙한 흐름일지도 모른다. 내 방이 아닌, 그러나 텅 빈 해 질 녘의 놀이터에서, 나는 알 수 없는 꺼림칙함과, 멀쩡히 작동되는 핸드폰의 홈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나의 친구들, 나는 생각했다. 배경 화면과 앱들이 이루는 조화는 하나의 가족처럼 보였다. 그것도 찰나였다.
내가 본 것은, 끝없는 복도였다. 나는 넘어졌다. 나에게 손과 발이 모두 사라지고, 끝없는 복도를 기어야만 했던 것이다. 복도에는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고급스러운 샹들리에는 반짝이며 불그스름한 빛을 발했다. 다만 천장이 너무 높았고, 나는 끝없이 기어야만 했다.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나는 기어야만 했다. 기고 싶지 않아도 기어야만 했다. 고개를 들어 천장에 달린 거울을 보자, 카펫 위에 놓인 어떤 머리만이 보였다. 그것은 기어가는 나였다. 나는 기어야만 했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더 빠르게 기었다. 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떤 얼굴이 보였다. 거미 남자가 벽에 걸린 액자 속에서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그의 눈이 수백 개가 되었다. 손과 발은 보이지 않고 그는 심해어처럼, 오직 눈과 빛만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있었다. 커다란 머리가 무거워 그는 꼬꾸라진다. 눈 몇 개가 굴러떨어진다. 움직이지 않는다.
더 기어가자 소녀의 뒷모습이 액자에 걸려 있다. 소녀는 가만히 서 있다. 소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소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소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느낌마저 흐릿해지자, 나는 무엇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소녀의 뒷모습이 액자에 걸려 있다.
복도 끝에 커다란 문이 있었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기었다. 팔과 다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다. 분명, 내게는 머리밖에 없다. 다시,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만 같아 나는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시 긴다. 복도의 카펫에 습기가 찬 것만 같다. 뒤에서 무언가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만 같다. 문이 가까워진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본다. 텅 빈 복도만이 놓여있다. 나는 문에 다가선다. 머리가 홀로 굴러 문에 쿵, 부딪힌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내 얼굴을 완전히 적신다. 뒤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다. 오고 있다니까, 바로 뒤에 무언가가 있다. 난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괴성은 언어로 들리지 않고, 아우성처럼, 울음소리로 찢어진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공기가 막혀 흐,하,하,흐, 소리만 난다. 입은 가장 크게 벌리고 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난 후, 땀으로 흥건한 얼굴을 닦으며, 내가 처음으로 인간이 아니라고 느꼈다. 나는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된 것이다. 나는 선택할 수 없었다. 나는 선택권을 잃었다. 그것이 소녀의 부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선택권이 더 이상 없음을 느꼈다. 나는 내 책상 위의 그것을 필요로 했다. 나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밤은 어두웠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지 않고, 진동 소리가 들린다.
홀로 책상에 놓인 적막의 화면이 떠는 모습, 나는 기괴스럽게마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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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김남조, <편지> 중 1“다 나가요 나가 이제 보여줄 게 없어요.”광대는 대기실 거울 옆에 앉아, 케이크 색깔의 장갑을 벗어 던진다.“조희 씨, 이러면 어떻게 해. 우리 서커스를 기다리는 관객들이 지금.. 광대, 광대, 광대, 저글링을 보여 주어요. 저 환호 소리 안 들려요? 어제까지 잘했으면서 왜 그래요?”광대는 흐느낀다. 입술 언저리에 칠해진 붉은 입꼬리 그림이 원망스럽네, 붉은 손바닥을 눈물로 촉촉하게 만들고, 입이 떨어져 나갈 듯 격하게 문지른다. 입에서 보드마카 맛이 난다.단장이 놀라서 몸을 앞으로 젖힌 채, 안타까운 표정으로 광대에게 다가간다. 서커스 초기부터 입었던 옷이라, 치수가 작아서, 어정쩡한 자세로, 광대에게 손을 내민다. 광대는, 별안간 몸을 뒤틀며 단숨에 일어난다. 얼굴의 분장이 반쯤 벗겨져 있고..“조희 씨 피곤하고, 마음이 무거운 건 알겠지만.. 어쨌든 일은 해야 할 것 아닙니까.”그 말을 들은 광대는 단장의 거무스름한 눈 아랫부분과 두툼한 손을 쳐다본다. 키는 광대가 더 크지만, 무척 깡말라서, 토이푸들과 싸워도 질 것 같다. 다리는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어서 제 옷을 주세요. 열쇠를 받아야겠습니다.”“조희 씨, 그러니까, 평소에 하던 대로 말이죠, 저글링 세 번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할 마음이 없어요.”광대가 말한다. 고무 코를 달고 있어서 숨 쉴 때마다 크응, 크응 소리가 난다.“보여 줄 게 없기는. 저글링을 하라니까.”광대는, 이런 대답을 기대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논리적인 문답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십구 년간 저글링을 하고 바람을 불어 풍선을 만들었다. 단장은 자신을 위로하지 않는다. 단장이 광대에게 관심을 보일 때는 언제나 공연 가능 유무나 앵콜 무대에 관한 것이었다. 조희 씨의 몸이 안 좋다는 건, 조희 씨가 아니라 그 자신과 서커스에 대한 금전적 걱정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광대, 광대, 광대 2사람들 진짜 많아. 박수 치더라, 크크크, 진짜 웃음은 뭐. 악, 악, 악, 악 같은 듣기에 흉한 울음소리 같은 것. 그걸 들으면, 옆 사람도 웃고, 점점 퍼져 나가는 거야. 광대는 웃으면 안 돼. 어처구니없어. 그것 때문에, 얼굴이 울상이 되어도, 도리어 더 웃음소리가 커진다고. 여전히 연기하는 줄 알고. 3광대의 신발은 다섯 사이즈 크게 신기고.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어지러운 조명 아래에 그를 세운다. 상의와 하의가 하나로 연결된 노란 줄무늬 옷에 얼굴은 하얗게, 머리는 꼬불꼬불 우습게.흰색, 노란색, 자홍색, 초록색 오색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빛은 광대의 코에, 다리에, 눈에 떨어진다.우스꽝스럽다고 할 수 있는 음악, 첼로도 신이 나서 그 근엄함을 잃고, 바이올린도 두 발 다 들고 몸을 흔들면서 소리를 내는 듯, 흥겹게 흐트러지는 음색이 높은 천장 양 끝에 달린 스피커에서 터져 나온다. 실제로 우스꽝스럽지는 않지만, 재미라는 낱말을 머릿속에 이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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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할머니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좋다고 했다. 난 기뻤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할머니는 눈을 감고 있었다. 너무 시끄럽다는 듯, 나는 금방이라도 일어나 영사기를 꺼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기엔 나는 너무 작았다. 할머니의 얼굴은 시든 과일 껍질의 결을 따라 흐르는 빗방울의 무늬처럼 주름으로 가득했고, 어둠을 머금은 양 볼엔 얼룩덜룩한 반점이 불투명하게 퍼져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막연한 두려움에 가슴속 깊은 곳 선반에 쭈글쭈글한 얼굴을 경계할 것, 이라고 적은 종이를 끼워 놓았다. 나는 몹시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이라는 영화였다. 난 주인공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출 때 우스워서 웃기도 했는데, 할머니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작은 가슴이 끓는 물에 넣어진 것 같았다. 난 잠자코 영화를 보았다. 할머니는 이따금 눈을 감은 채 자리가 불편한 듯 뒤척였다.다른 사람의 화사한 미소에 감화될수록 인간의 어두운 면을 보려는 시도는 제지당한다. 자신이 자신의 손목을 붙잡아, 그래선 안 돼, 라고 경고를 준다.삶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큼 자신의 정신도 굳어진다. 흔들리는 머리에 세 개가 된 눈동자에 대해 쓸 수 없다. 꿈에 죽은 고모가 버스 옆자리에 앉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는 이야기도, 말할 수 없다. 누구와도 말하지 못한 날, 입술이 하루 종일 닫혀 있던 날, 그래서 유독 입 냄새가 많이 나던 날, 비참한 기분으로 내키지 않는 잠에 들어, 발끝을 공중에 조심히 띄워 낮의 풍경을 거닐며 어디서 나타났다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를 얼굴들의 행렬에 다가가 입을 맞추려고 고개를 숙인 것도 말할 수 없다.빛나는 삶과 함께하는 순간, 이라고 수식당하는 추억, 같은 것은 아무래도 기분을 맑게 해 주지만, 그것만이 전부라고 여기고, 밝게 웃지 않으면 언제나 끔찍한 상태다, ‘조금 그런’ 요즘이다, 라고 한다면 인간을 정사면체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신은 언어의 억압을 조심히 피하며, 몸을 낮추어 모든 가능성에 몸을 누이고 손을 대 보고, 거닐어 본다. 인간은, 그런 와중에 그중 어떤 것이 별안간 언어화되어 정신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번쩍, 나타나면, 이게 뭐야, 라고 놀란다.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없다고 자신을 힐난한다. 마음에서 삐져나온 긴 철사로 자신을 손수 찌른다. 손이 점점 거칠어진다. 1겐지 팟지는 그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왜 비디오로 된 것은 고체화될 수 없을까, 아쉬워했다.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잘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한 걸음 다가오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했다.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행여 그런 경우에는, 상대방이 물러서면, 모욕당했다고 느끼고, 금세 우울해졌다.그는 말수가 적었다. 입을 닫고 귀를 열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차라리, 목소리를 잃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는 데에 큰 지장이 없겠다고, 때때로 확신했다.그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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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2025년 8월에 쓴 것을, 분량을 줄이고 숫자로 나누고 겹치는 문장들과 등장인물의 행동을 수정하였습니다. 등장인물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