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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빛나는 밤

  • 작성자 혓바닥
  • 작성일 2026-09-25
  • 조회수 127

 달빛이 빛나는 밤, A는 창가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자정에 근접한 하늘은 푸른 기색을 꽁꽁 감추었다. 역시 맑은 아침보다는 맑은 저녁이다. 저녁달에 비춰진 우주의 광경은 절경이었다. 하늘에는 우윳빛 은하수가, 주변의 별은 흩뿌려진 모래알 같았다. 이런 경관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 그러니까 수백 년 전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거짓인 듯했다. 그 시절의 문명은 지금보다도 뛰어나서 밤을 밝힐 조명이 가득히 있었다나… A는 그 외의 여러 까닭을 떠올리려다가 재빨리 관두었다. 역사책에는 갖갖이 이유가 적혀있었으나 지금은 무관하다. 박혀있는 별들은 현세를 만끽하듯 빛을 쏘았으니. 별이란 것은 참으로 편하겠어. 상석에 앉아 빛나는 게 일이니 말이야! 두 다리를 쭉 뻗은 A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교주라는 자리는 생각 이상으로 인내와 근면을 요하는 자리였다. 물론 통치자의 고뇌란 늘 그런 것이… 그러한 사심을 피력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덕목이었던가? 아무튼 간만에 휴식을 방해할 이는 없었다. 이교도와의 전쟁도. 신의 존재도. 교리도. 멍한 의식의 흐름 속을 부유하던 A는 이대로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서서히 정신이 흐려질 즈음이었다. “교주님!” 아. 마취된 표피를 뚫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저 목소리는 S가 분명했다. A는 갑자기 밀어닥치는 스트레스로 숨이 턱 막혔다. 평소라면 억지 웃음을 지으며 신호를 보냈을 터이지만 오늘만큼은 못 들은 척 침대를 파고들고 싶었다. A의 전담 비서인 그녀는 언제나 A의 시간을 방해하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대수롭게 왜 그러느냐 하겠지만 되레 대수로웠더라면 이토록 분노하지 않았을 거다. 이대로라면 기꺼이 파면당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희생은 불가피하다. S가 없었더라면 다른 이가 대신했을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오직 그녀만이 A를 방해해 온 것이다. “네, 들어오세요.” 의자를 돌려 앉으며 A가 소리치자, 예의 ‘들어가겠습니다.’하는 인사치레도 생략된 채 문이 벌컥 젖혀졌다. A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람과 동시에 성품에 대한 평가에 불안함이 얼핏 스쳤지만 이는 곧 상쇄되고 말았다. 벌겋게 상기된 S의 얼굴이 문틈을 비집고 나오는 것이다. 반쯤 돌아간 넥타이의 S는 다급해 보였다. 비서다운 예의와 겉치레를 중시하는 S의 평소 행태로 보건대 큰일이 틀림없었다. S는 헉헉대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성지에서 배교자가 투항했습니다!” “뭐라고요!” A는 즉각 대답했다. 그 외침은 반사작용에 가까웠다. “직접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배교자 이외에 수만의 이교도가 체포되어 집행장에 있습니다만…” S가 미처 다 못 쉰 숨을 골랐다. 그 모습은 어딘가 안쓰러웠는데 가슴이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팔딱였다. 집행장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리라. A는 사무일만을 담당하는 이 여비서를 갸륵히 여겨야 마땅했지만 어서 말을 잇지 않고 뜸을 들이는 게 견딜 수 없었다. 동시에 비서가 신의 대리자인 까닭에 보고를 끊고 자리를 박차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비관되었다. S가 말을 이었다. “이런 사태가 전례 없는지라 모두 교주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큰일이로군요!” S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A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돌진했다. 하마터면 발이 엇갈려 넘어질 뻔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 A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집행장이 아닌 격리실이었다. B라는 작자는 누구일까. 복도를 울리는 구둣발 소리는 경쾌했다. 이토록 손쉽게 전쟁에서 이기다니! 승리의 희열이 전신을 감쌌다. 그 희열에는 B에 대한 증오와 갈증에 가까운 호기심이 공존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투항이 석연치 않은 것은 떨쳐낼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의 고양감만으로 충분했다. A가 걸음을 멈춘 것은 회색의 벽 속에서 투명한 유리문을 마주했을 때였다. 유리문 안에 사방이 부드러운 쿠션으로 감싸진 방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언젠가 얼핏 떠올렸던 용모와는 딴판인 남자가. 차분한 인상의 그는 너무나 평범해 보였다. 별다른 특성을 굳이 꼽자면 등이 약간 굽어 있다는 것. 그리고 아마빛의 머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가늘어 배냇털을 연상케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 존재는 몹시 불편한 기류를 풍겼다. 가르고 싶어도 가를 수 없는 호수처럼. 그러나 무엇보다 A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긍지에 찬 두 눈이었다. “흠!”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A는 목을 가다듬었다. 불쾌감의 표시로 그 남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B는 태연해 보였다. 눈을 피하거나 투항한 자로서의 고수함 따위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B는 당당한 태도로 유리문을 향하여 다가왔다. 그리고 A의 면전에 우뚝 섰다. A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황 파악이 안되는 건가? 자기 분수도 모르는 사람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텅 빈 공간을 물이나 공기가 메우는 것처럼 어느덧 A의 마음은 신경질적인 조소로 들어찼다. “이교도의 수괴라니. 의외로 정상적인 꼴을 하고 있군.” A는 무심히 말했다. 그 태도는 방약무인해 질타 받기 쉬웠으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B는 대꾸했다. “그러는 당신도 그렇죠. 이교도의 수괴는 당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인걸요.” A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허튼 소리를 하고 있어. 아마 머리가 돈 거겠지.” 꼬리를 물고 B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은 당신의 사상이 정상적이라고 믿나요? 근친상간과 같은 유전적 교합이 말이에요.” B를 가만히 주시하던 A는 대꾸했다. “이봐, 자네는 아군에 투항한 게 맞지?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닐 텐데.” “아뇨. 난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당신은 관념적 공상에 빠져 있는 것에 불과해요. 인간은 같아질 수 없어요. 과거에서부터, 우리가 단세포였을 때까지 거슬러 생각해 봐요. 인간은 누구나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데요.” 훈계하는 듯한 그 말씨는 유려하게 이어졌다. 그 태도에 A는 기분이 나빠졌다. “하!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군. 그건 옛말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타형의 DNA를 제거하는 벡터를 개발했어. 이제 기타 생물종에게 도입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고. 근래부로는 성과를 거두고 있단 말이야. 인류의 완전한 동화도 머지않았어.” A는 자신이 말한 성과란 것을 B가 모르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B에게 반감을 느꼈다. B가 내막을 알았더라면 그 무감각한 얼굴에 비웃음이 떠오를 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B는 차분히 응수했다.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개척하는군요. 그건 쓸모없을 뿐 아니라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에요. 변화를 방지하는 것이라니요. 가능하다 할지라도 죽은 거나 다름없겠죠. 우리는 외람된 믿음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어요.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고, 그 끝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있다고요.” “그리고 그 새로운 것 또한 동화되겠지. 인간을 벗어나려는 것이야말로 말이 안 되는 거야. 현실을 도피할 뿐인 교조주의자 주제에…” 피로가 다시금 찾아왔다. “더 이상의 언쟁은 불필요할 것 같네.” A는 정신이 나간 것 같은 B에게 모멸를 느끼며 격리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예식을 치르고 나면 모든 게 끝난다. 전쟁도, B도, 그리고… ─── 개회식은 일주일 후 오로지 A의 판단의 의해서 개최되었다. 일반이었더라면 경전의 말을 따랐을 터였지만 경전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은 적혀 있지 않았다. 이는 A에게 부담을 지게 했다. 고작 시일을 정하는 것 정도의 일이라면 그다지 곤혹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A에게 주어진 과제는 패배한 이단에 대한 향연을 기획하는 것이었다. S가 이를 전하자 A는 문득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하여튼 A는 성공적으로 일을 끝마쳤다! 적어도 A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A와 같이 깐깐한 사람의 주관이란 믿어도 괜찮을 것이다. A는 단상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천의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A가 연설을 시작했다. “신자들이여!” A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리자 주위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당신들은 알겁니다. 우리의 뜻이 기어코 이루어졌다는 것을! 추악한 이단이 격파되는 것을 넘어서, 그 괴뢰의 사상마저 우리 앞에 무릎 꿇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번의 승리로 하여금 잃었던 빛을 되찾은 겁니다.” A의 팔이 허공을 휘젓자 곳곳에서 들뜬 소리가 들려왔다. A는 계속했다. “오늘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겁니다. 각 개체의 가슴에도 죽는 순간까지 남겠지요. 저는 지금 그 성스러운 역사의 개막을 열려 합니다.” A의 뒤로 전신이 검정 베일에 쌓인 두 남성이 다가왔다. 그들이 이끄는 손에는 3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원형의 고리가 들려 있었다. 그 고리 안에는 또 다른 고리가, 그 고리에는 지름을 가로지르는 세로의 금속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금속판 앞에는 한 남자가 묶여 있었다. 남자의 전신은 하얗고 얇은 천으로 둘러 쌓여 있었는데, 목에서부터 질끈 묶인 그 천은 남성의 발목까지 덮었다. 오직 하나의 천으로 된 그 옷이 허공에서 펄럭였다. A는 말했다. “영원히 병수 될 지금을, 신도는 보아라!” A는 금빛 영혼 추출기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고리 속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A는 잠시 영혼 추출기를 높게 든 채로 멈추었다. 그것은 일주일 전에 지어낸 형식에 불과했지만 A는 손잡이의 감촉이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을 알았다. 남자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지척에 곧게 솟은 영혼 추출기가 타오르는 불빛의 일렁임을 머금는 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리 길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교주의 행동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A는 멈추지 않았다. A는 겉면을 타고 방울을 흘리는 잔을 거리낌 없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이제껏 숨죽였던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A는 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외쳤다. “인류의 동화를 위하여!” A는 뜨뜻미지근한 액체를 들이켰다. ─── 향연은 일주일 내내 진행되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마지막 날, B의 처형이 집행되는 날이었다. A는 집무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밖의 사람들은 춤을 추고, 음식을 먹으며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중에는 사람의 것도 있었는데 외관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사람들의 태도로 보아도 전혀 모를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신성하고, 아름다운 도약을 위한 한 걸음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무라는 이는 없었다. ‘언젠가 그들도 이런 축제를 가졌겠지.’ A는 생각했다. ‘B도 분명 먹었겠지. 그 자가 가장 많이 먹었을 것이다...’ A는 불현듯 B의 강렬한 긍지가 떠오르자 불쾌해졌다. 인간을 벗어나기 위해 인간을 먹는다라… A는 얼핏 B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납득이 간다는 것은 아니지만. B는 여전히 터무니없는 망상을 좇는 망상가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B는 인간의 관습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상의 모순을 깨닫고 이에 수긍하지 않았는가? 이는 확실했다. A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보자 시침이 집행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A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례는 순조로웠다. 여느 의례와 같이, 길고 장황한 연설이 이어졌다. 그 끝에 B라는 인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만이 새로웠다. B는 포박되어 단상으로 끌려왔다. ‘끌려왔다’라는 표현은 B의 상황에는 걸맞았지만 태도에 관해서는 어색했다. B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대를 품은 호기심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도살장에 가는 돼지가 산책이라도 나온 양 해맑게 쫓아가는 꼴이었다. 그러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라면 차라리 동정을 샀을 것이다. 그 부조화적인 광경은 군중들로 분노를 사게 했다. “쓰레기 같은 놈!” “산소 아까우니 빨리 없어져!” “이 폐단아!” 여기저기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B는 비난의 화살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무시했다. 그 반응은 일말의 존중심마저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A의 속도 좋은 형편은 못되었다. 공복에 찬물처럼 메슥거렸다. 뺨이라도 한 대 후려 그 부풀린 행실을 바로잡고 싶었지만 단상 위의 교주는 그런 품행을 보여서는 안 된다. B는 A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은 존재한다!” A의 짧은 선언이 끝나자 B는 눈을 감았다. 신도에게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멎을 즈음이었다. 위이이잉 군중의 저 편, 연회장의 가운데에 균열이 생기며 공간이 갈라졌다. 깨진 유리 같은 그 틈새로 가느다란 막대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사람의 손가락과 유사했다. 그리고 수줍은 아이처럼 몸을 드러낸 그 존재는. 하얀 외피, 가느다란 팔다리, 흰자위 없는 큰 눈, 기다란 감각모, 앙상한 날개… 인간의 형식을 어설프게 갖추고 있었지만 결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그 존재는. 사람들은 경악했다. 인간과 마네킹, 파리를 섞어놓은 듯한 저 비주얼은 뭘까. 아무도, 심지어는 홀몸으로 서있는 저 존재조차 말을 내지 않는 황당한 침묵 속에서 B의 몸만이 움직였다. 쿵… 쿵… 무릎으로 기어 두 발짝쯤 이동한 B의 신체는 헝겊처럼 쓰러졌다. 그러나 독보적 존재로 인해 B의 움직임 따위를 안중에 둔 사람은 없었다. 한 인간의 생애는 이렇게 끝이 났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린 그 존재는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포오샤라고 해요.” 말을 했다. 저 외계 생명체가 지구의 언어를 구사했다! 다들 말문이 막혔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대체 뭘까. A가 말했다. “당신은 누구죠?” 긴장했는지 감각모가 까딱이던 ‘포오샤’는 대답했다. “저는 ‘포. 오. 샤.’예요. 제 말이 이상한가요?” “아니,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냐 묻는 거예요.” 입을 벙긋거리던 포오샤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 저는 인간이 되고 싶어요. 인간이 되고 싶어서 오게 되었어요.” “…” “당신은 분명 A이죠. 저와 같이 가요. 그리고 알려주세요.” 이번에는 A가 말을 더듬었다. “이게 무슨.” “난 많은 걸 알아요. 당신의 사상, 교의까지.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포오샤가 A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서는 그 움직임에는 전혀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뭉클한 감정이 밀려왔다. “한정된 언어로 우주를 담다니, 부디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세요. A.” 포오샤의 손가락이 어깨를 살포시 거머쥐자 A는 침묵했다. 창백하고 차가운 손, 유리처럼 깨끗한 피부에 별같은 주근깨를 보자, A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좋아요. 하지만 오래는 안돼요. 난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포오샤는 두 손을 마주 잡고 펄쩍 뛰며 좋아했다. A가 미지의 문으로 들어서기까지, 포오샤는 활발히 행동했다. A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듯. 그 덕에 A는 끝내 엎어진 B의 얼굴에 드러난 달콤한 환희를 눈치채지 못했다. ─── 문 너머로 나아간 순간부터는 기억이 없었다. 자각이 돌아온 것은 어두운 복도에서였다. 방금까지 의식은 분명 없었지만 깨어났을 때 A는 두 다리로 멀쩡히 서있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포오샤의 얼굴이었다. “일어나셨네요! 당신이 정신을 차려서 정말 기뻐요. 죽는 줄 알았어요.” 포오샤는 A의 어깨에서 손을 거뒀다. “따라와요. 저 끝에 친구들이 기다려요.” 포오샤가 가리킨 곳은 너무 어두워 너머가 보이지 않는 복도의 연속이었다. A는 나아가는 포오샤의 뒤를 쫓았다. 포오샤의 등에는 얇은 막이 있었다. 날기에는 조잡하지만 모양새로 보건대 날개가 확실했다. 도대체 어떤 경로로 이런 산물을 얻었을까. A한테는 퇴화되지 못한 과거의 증표로 비춰졌다. 포오샤의 집은 단조로운 형태였지만 갖가지 장식이 즐비해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테이블, 그 위의 꽃병. 두터운 융단은 한도 없이 길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런 벽지, 그리고 벽에는 다양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포오샤의 사진, 포오샤의 사진, 포오샤의 사진… 초상화일 그림에는 다양한 각도로 그려진 포오샤가 존재했다. 자기애가 상당히 강한 모양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건 당신인가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A가 포오샤에게 물었다. “저 사진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요. 다 저와 같은 사진이에요. 하지만 저를 그린 초상은 한참 전에 지나쳤답니다.” 포오샤가 대답했다. 문법이 조금 이상했지만 대수롭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 후에도 A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여기는 행성인가요?” “네, 맞아요. 우주에서 제일 아름다운 행성이요.” 포오샤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답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여태 A가 본 것이라고는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와 어둠뿐이었지만 굳이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태생에 관한 자부심은 보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A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지치지 않고 질문을 던지면서도 해소되지 않은 응어리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느낌에 A는 자꾸 질문을 던졌다. A의 호흡기관은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하나의 이물감도 없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A의 자각이 그곳에 미치자 포오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A는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벽면에 빛을 내는 문이 보였다. 문 틈을 비집고 나오는 그 빛은 무척 신비롭게 여겨졌는데, 이는 빛 한 줄기 없는 컴컴한 어둠 속을 몇 십분이고 걸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A는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잊어버린 듯 방문을 열어졎혔다. 집주인이 손님을 지루하게 했다고 무례에 가까운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포오샤는 수십 차례의 질문 공세에 성실히 응수한 존재답게 그런 A의 행동도 바라볼 뿐, 마땅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눈을 찌르는 빛은 어둠에 길들여졌던 동공을 정통으로 관통했다. 찌푸린 눈꺼풀 사이로 흘러들어 온 다량의 빛은 A에게 새로운 정보도 선사했다. A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어떤 경로인지는 몰라도 포오샤는 A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 사실은 놀라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진은 3500년도의 것이었다. 3500년도! A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이 3100년도인데 어떻게… 그 낡아빠진 종이는 홀로그램으로 자신의 정보를 드러냈다. [제14대교주, A의 의의에 관하여…] A는 글을 모조리 읽은 후에야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몰랐던 의혹. 그것은 자신이 편하다는 것. 타 행성에서 전혀 접점이 없었던 외계생물이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포오샤는 지구를 방문했으니 대비를 했다 해도. 이 중력은, A가 편안히 걷고 말하는 이 익숙함은… A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A가 깨어난 곳은 부드러운 쿠션으로 둘러쌓인 방이었다. 수십의 눈들이 A를 주시하고 있었다. A가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포오샤. 포오샤 옆의 포오샤. 그 포오샤 옆에 포오샤. 그 포오샤 옆의 포오샤… 수십의 포오샤들이 A를 주시하고 있었다. A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 미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전부 포오샤인게 틀림없어요. 결국 우리의 꿈은 이뤄진 것이 분명하군요…” 포오샤는 답했다. “맞아요. A. 우리는 전부 포오샤예요.” 포오샤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날 무자비하다고 말하지 말아요. 이건 수행의 일부였어요.” “당신을 무자비하다고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을 한 자신을 비난하는 이는 어리석은 거겠지요.” 포오샤는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당신이 모를 사실을 알려줄까요? 지금은 13100년이에요. 만년이 지났죠. 그리고, 뜻을 이룬 지는 3000년이 지났고요. 그때부터 우리는 포오샤였어요.” A는 대꾸했다. “그래요.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외형은 왜 그렇게 변한 거죠?” “글쎄요.” A는 질문에 대한 답이 그것으로 끝이 날까하는 두려움이 얼핏 스쳤지만, 다행스럽게도 포오샤의 말은 이어졌다. “아마 죽을 위기에 처한 선대가 포오샤를 만들었을 거예요. 그들은 성공했어요. 우리는 변화하지 않죠. 그러나 생식 능력 또한 없어서 인큐베이터로 포오샤를 지속해야 해요.” “그렇군요. 이제 당신은 오랜 관습대로 나를 먹겠지요?” A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포오샤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슬프게 생각하지 마요. 당신은 이제 진정한 뜻을 이루기 위해 먹히는 거예요. 포오샤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이제 인류는 완전한 동화 속에서 살게될 거예요. 이런 잡다한 DNA의 포오샤가 아닌 동화된 인간으로서의 포오샤가.” A는 오랫동안 포오샤를 주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어요.  저와 B는 싸울 필요가 없었군요. 하지만 포오샤. 이제는 아무 쓸모 없어요. 날 먹어도 돼요.” 포오샤는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포오샤는 몰랐다. 1만 년 전의 질병을, A가 떠난 후의 세계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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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는 하나밖에 없었다

-2100년 서울의 한 가정집 한 여자가 부엌에서 음식을 날랐다. 볶은 양파와 버무린 큐브 스테이크,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 와인잔에 채워진 자주색 포도주... 포크는 하나밖에 없었다. 탁자에 앉은 이가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어땠어. 달링?” 부드러운 목소리의 소유자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여자를 그윽하게 쳐다봤다. “으응, 회사에서 있었던 일 말하는 거지?” 여자가 솥에서 퍼 담은 수프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는데...” 예사롭게 이어지는 말은 형식적이었고, 약간의 귀찮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바라는 주제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내막은 길었다. “그래서 총괄자가 나한테 마구 따지는 거 있지? 허, 참. 정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여자의 경시적 고소에 서둘러 공감이 따라붙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큐브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는 입이 짧은 신음을 내어 긍정했다. 어느새 냅킨을 쥔 손이 여자의 입가를 살포시 닦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잊어버리는 게 좋아. 그리고...” 유혹을 가장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지금은 나랑 단둘이 있으니까.”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와인을 들이켠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양파와 스테이크, 시큼한 샐러드를 먹은 입으로 키스했다. “음. 방으로 갈까?”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아무 말없이 걸었다. ‘거절’이란 선택지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전원이 켜진 것은 정오가 지나서였다. 코드를 뽑고 일어난 그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어젯밤부터 방치되어 있던 식기들을 정리하고 탁자를 닦았다. 집에 있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바닥을 돌아다니고 있는 로봇 청소기, 실내의 쾌적을 책임지는 청정기, 불운한 참사를 대비하는 보안용 CCTV까지. 작은 집은 다양한 기계로 붐볐다. 2100년, 서울은 인공지능화 되어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AI를 탑재해 더운 윤택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청소부터 빨래, 식물 가꾸기, 반려동물 산책시키기, 심지어는 관상용 로봇 물고기 또한 존재했다. 야외에는 안드로이드가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런 풍경은 익숙했다. 로봇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일상적인 것, 생명은 돕는 것, 개인의 사욕... 심지어는 사랑까지도... 로봇은 군말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로봇, 속칭 ‘엑스 머신'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표명했다. ‘로봇을 저런 데 쓰는 게 맞나.’, ‘안전성 문제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저런 로봇을 쓰는 사람은 정신에 문제가 있거나 생길 것이다.’ 등등. 하지만 ‘위험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냐?’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렇다. 사람들에게 ‘엑스 머신’은 그저 새로운 발명품에 자나지 않았다. 리암동 2길 35번지 주택의 로봇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오류 없이 척척 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변수는 존재했다. 임무를 완수한 ‘엑스 머신’, 바그널 x-367은

  • 혓바닥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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