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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정말 괜찮습니다

  • 작성자 아기호랑이
  • 작성일 2026-09-29
  • 조회수 101

끝없이 소나기가 내리지만 결코 장마는 아닙니다 거리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흩어집니다 마른 의자가 축축해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단짝과의 약속을 복기하면 됩니다 우리는 수능 끝나고 만나기로 했습니다 녹은 눈이 내리지만 아직 봄비는 아닙니다 겨울에도 무지개를 기다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서두르지 않습니다 어차피 무지개는 곁을 내어주지 않을 겁니다 달려가면 사라지던 옛 친구의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친구는 아마 내 우산을 영원히 돌려주지 못합니다 노란 우산은 새로 살 수 있지만 젖은 어깨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축축한 치마가 차갑게 말려듭니다 중학교 졸업식 날 단짝이 건넨 검정치마는 이제 해졌습니다 구멍 사이로 노을이 비쳐 보입니다 나와 얼굴을 마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입니다 혼자 걸을 때는 몰랐지만 어느 날 치맛자락에 드리운 단짝의 손바닥을 보고 알았습니다 우리는 우산을 나누어 쓰고 단짝의 집으로 향합니다 앉아 있어도 우리의 어깨는 나란합니다 치마를 벗느라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균형은 잠깐 흐트러지지만 나는 어깨너머로 골무 끼운 단짝의 손가락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옷감을 덧대어 꿰매는 바느질 솜씨로 검정치마를 단짝이 직접 만들었단 걸 깨닫습니다 소나기가 영원한 저녁입니다 너 이제 우산도 만들 줄 아니 옛 친구는 미래의 물음에 답하는 법을 모릅니다 대신 눈이 내린다고 중얼거리던 단짝은 처음으로 내게 사랑을 말합니다 나는 미소를 숨기고 어렵게 입을 엽니다 나 혼자 사는데 괜찮겠냐고 묻습니다 단짝은 나를 매일 만날 수 있는 거냐며 애써 웃어보입니다 나는 그런 표정에 익숙합니다 거짓말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믿어봅니다 친구는 수능 접수를 핑계로 전화해서 부모님 입으로 고아와 동성애를 말하게 합니다 친구는 수능 끝나고 만나자 합니다 성인이 되어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나의 방문을 두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넥스트의 도시인을 듣다 보면 그날 노란 우산을 어디에 두고 나왔는지 잊게 되어 좋습니다 혼자여도 어깨는 젖습니다 치맛자락이 나처럼 글썽입니다 같은 원단이라 겹쳐도 짙어지지 않던 검정이 구름의 눈물을 가둔 채 자꾸만 깊어집니다 감정만으로 음영을 묘사하는 방법을 나는 아직 모릅니다 단짝은 검정치마 입은 나를 의자에 앉혀둔 채 소묘를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한 재료로 그린 그림에는 빛과 어둠이 이어져 있다고 말하면서 밝은 얼굴은 쉽게 더렵혀집니다 치맛주름 사이에 드리운 그림자의 표정은 꼭 나를 닮았습니다 고시원 창가에 앉지만 이번에도 나무 그늘 아래입니다 비가 그치자 아이들이 다시 모여 둥글게 뛰어다닙니다 무지개는 사실 원형이고 그건 반대편 단짝과 손을 맞잡았기 때문입니다 무지개는 함께라서 잘 굴러갑니다 그렇게 내게서 멀어집니다 나는 반쪽짜리 친구와 다시 손잡는 법을 모릅니다 다가서면 도망치던 무지개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갈수록 작아지는 치마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현달이 고개 숙인 밤입니다 검정치마 틈새를 비집고 들어올 햇빛은 이제 낮에도 없습니다 흰 교복을 말갛게 물들이던 단짝의 젖은 어깨가 그립습니다 나는 투명함으로 깊이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물의 밑바닥에서 내 가장 맑은 것을 끌어올리거나 게워 낼 수 있습니다 나의 눈물도 무지개 일부가 됩니까 습도 높은 빛도 산란합니까 그렇다면 나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나는 자라서 무지개가 됩니다




PS 소설이 된 산문시 화자의 삶에는 마침표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단절되지 않았기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한 줄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합니다











추천 콘텐츠

작가의 손

한강 공원에서 『희랍어 시간』을 읽는다. 바람이 불어 책장이 넘어가지만 그것을 붙잡아 둘 손이 내게는 없다. 너도 나와 같은 것을 읽고 있다. 그렇다고 믿었는데 너는 자꾸만 아니라고 한다. 나는 『디 에센셜: 한강』에 수록된 「희랍어 시간」을 읽고 있잖아. 그래서 뭐가 다른 건데. 빠르게 넘어가는 책장을 저지하고 있던 내 팔을 너는 옆으로 치운다. 하얗게 물든 두 책을 동시에 뒤집으며 너는 말한다. 네 책은 작가의 말로 끝나지만, 내 책은 작가의 손으로 끝나잖아. 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책의 뒤표지에는 정말로 한강 작가의 손이 자리하고 있었다. 희랍어 강사가 백묵을 잡듯이 그녀는 굳게 연필을 쥐고 있었다. 글이 나오지 않을수록 연필을 세게 쥐어야 한다. 연필이 부서질 때 나오는 흑연 가루로는 원하는 문장을 써낼 수 없다고. 미리 알았더라면 방황하지 않았을 텐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내겐 연필을 부러뜨릴 악력이 전무하다. 근래 누가 원고지와 만년필로 문학을 하냐고 너는 묻는다. 내가 채 답하기도 전에 『채식주의자』를 수기로 적었다는 작가의 말이 선회한다. 십여 년간 글을 써온 작가에게 자판을 두드릴 수 없게 된 손은 어떤 의미였을까. 더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문학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비애감. 그런 감각이 내게도 있었나. 돌이켜보면 존재하지 않는 손가락 마디의 저릿한 통증만이 허공을 맴돌고.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두 손으로 쓴 단편으로 등단해서 한동안 단편만 써오며 크고 작은 상을 받던 때. 이상하게 내가 동경하던 작가들은 꼭 장편도 잘 썼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왠지 모를 무력감이 쌓여가는 이유가 어쩌면 장편의 부재에 있을지도 몰라. 점차 늘어가는 청탁 중 일부만 응하던 것을 아예 받지 않기로 결심한다. 마감으로부터의 해방. 마지막 단편을 송고하고 이제 마음껏 장편을 구상할 수 있다. 오래전에 써둔 단편을 다시 읽는다. 언젠가는 긴 호흡으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 인물들의 과거사를 진득하게 파헤치면서도 결국에는 나를 담아내길 바랐다. 여러 이야기를 꿰매지 말고 하나의 서사로 한 권의 책을 장악할 수 있다면. 인물의 발화를 담은 수필로 작가의 말을 대신하고자 했다. 허구와 진실이 서로를 반쯤 지탱하는 실험적인 소설을 계획한다. 미처 소설이 되지 못한 단상들을 끌어모은다. 장면을 잇고 간단한 필기를 덧붙이기 위해 수첩을 구매한다. 오랜만에 연필을 든다. 핸드폰보다 수첩을 자주 꺼내보는 삶. 그런 생활을 동경해 왔다. 남들이 화면을 볼 때 나는 문학을 구상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자부심. 그래도 활자에 코를 박고 횡단보도 건너는 건 똑같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글자에 종속된 세상의 작가와 가수를 작품의 소재로 삼기로 마음먹는다. 아이디어가 휘발되기 전에 필기해 둬야 한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는데 손에 힘이 빠진다. 초라한 낙하. 낱장이 너덜너덜해진 종이의 단면은 꼭 소유자의 신체 나이를 증명하는 듯하다. 글만 썼더니 운동 부족인가. 허리를 숙이니 디스크

  • 아기호랑이
  • 2026-07-05
오리는 슬퍼하고 싶다

우리가 연필로 키운 오리를 기억하니. 이차원의 깃털은 부드럽게 깊었고. 오리는 날개를 수평으로 펼치는 법을 몰랐지만 수면에 납작하게 떠오르는 근성이 있었다. 교실에는 납작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선생님께 잊힌 수업은 우리의 추억이 되었다. 너는 그날 내 옆자리를 자처했잖아. 우리는 앞줄에 나란히 앉아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했다. 여름 에어컨 아래서 너는 몸을 둥글게 말고. 그러면 공부가 더 잘 된다는 듯이 추위에 떨며 영어 문장을 외웠다. 나는 국어 문제를 풀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높임법은 쓸데없이 정확했다. 유치원 교사가 아이들에게 여기 오리가 몇 마리 있죠, 물을 때 오리는 높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선회한다. 오리가 몇 마리인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알 수도 없었다. 가볍게 선지를 지운다. 그로부터 몇 문제를 더 풀었을 때쯤 네 손이 책상 위로 넘어왔다. 우리는 각자의 공부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나는 그 사실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손이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왠지 모르게 난처해졌다. 내가 문제를 잘못 풀어서 네가 첨삭해 주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너는 내신에서 나보다 한 문제를 더 맞혔으므로 너에게는 그럴 역량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네가 손을 거두고 흰 종이 위에 남은 건 겨우 오리 한 마리. 오리는 이차원에서도 부피감이 느껴질 만큼 귀엽게 통통했다. 날개는 제 기능을 못 할 정도로 하찮았지만 귀여웠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랬다. 그랬는데 갑자기 귀여운 오리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작가의 기질이 발동했고 하필이면 나는 그때만 재밌어지는 사람이었다. 교사: 여기 오리가 몇 마리 있죠아이들: 0마리요교사: 왜요아이들: 얘는 그림이잖아요교사: 동심이 없군요아이들: ㅠㅠ아이들이 모두 울고 나서 너는 오리를 울렸다. 오리의 눈가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너는 오리의 눈앞에 단모음 체계 표 오른쪽 위에 자리한 음성모음 두 개를 추가했다. 오리는 혀를 뒤에 두고 부리를 작게 벌려서 둥근 발음을 냈다. 정말 그랬다. 정말 그랬을까. 어찌 됐든 납작한 오리는 말을 하고 싶어 했는데. 한 마리 해줘…ㅜ너는 문제집의 모서리를 빌려 오리의 심정을 대필했다. ‘한 마리 해줘’가 ‘한 마디 해줘’로 읽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너는 오리의 눈을 하고 있었다. 오리와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만한 동심이 없었다. 나의 문학은 으레 동심을 추구하지만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만 나는 글을 쓸 때만 웃는 사람이었다. 나는 오리 한 마리를 더 그렸다. #2교사: 여기 오리가 몇 마리 있죠아이들: 1마리요교사: 아닌데요아이들: 왜요교사: 내가 한 마리 더 그렸거든요오리: ㅜㅜ글을 쓰면서 자지러지게 웃었다. 너는 재밌어하는 동안에도 오리의 처지를 대변했다. 그렇게 오리는 태어나고부터 평생을 울며 지냈다. 나의 서사는 잔인했고 너는 오리와 함께 울다가 끝내 웃었다. 두 창작가의 손이 겹쳤고 너는 그동안 몸을 말지 않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교실에서 우리는 시시덕거렸고 나는 그런

  • 아기호랑이
  • 2026-05-31
흰들레

1“저기 진주가 있어.”선희는 추상적인 말도 간단하게 했다. 희고 둥글다 해서 모두 진주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은혜의 논리도 소용없었다. “그럼, 눈송이라고 하자.”그렇게 그들은 오지도 않은 겨울을 맞았다. 새하얀 민들레밭을 지나 구 형상의 카페 안으로 들어가면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청결을 위해 꽃씨를 날리지 않는 노란 민들레만 들여놓았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민들레 꽃씨를 보고 싶었던 은혜는 선희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에 진주 목걸이가 나부끼자, 선희는 목에 손을 짚었다.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은 은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였다. 선희는 바람에 추위를 타는지 소매를 포갰다. 은혜가 그녀를 안아 주었다. 꽃씨를 흩뿌리고 초라해진 노란 꽃대를 흰민들레가 감싸는 것처럼 선희도 은혜를 안았다. 몸의 중심을 잃을 정도로 따스하게. 심장이 흔들렸다. 선희는 언젠가 함박눈을 따뜻한 존재로 조명했다. 이를 부정하는 은혜에게 그녀가 말했다. “온도는 상대적인 거야.”그녀는 함박눈이 온기를 품는다면, 누군가 그것을 믿는다면, 콘크리트 건축물 역시 무언가를 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매끈한 표면의 카페 외벽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손을 가져다 대니 먼저 느껴지는 것은 온기보다는 빛의 촉감. 산란하는 것은 적어도 제 열기에 녹을 일은 없었다. 둥근 경계 안에 얼마의 민들레가 피어 있고, 밖에서는 그보다 많은 꽃씨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 두 형상은 언뜻 상이한 것 같다가도 때로는 사뭇 닮아 보였다. 거센 바람과 함께 비가 내렸다. 우산을 챙기지 않아 산책을 마쳐야 했다. 앞서 걷던 은혜가 주저앉은 선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선희는 꽃씨를 모두 잃고 이파리마저 내비친 민들레밭을 응시하고 있었다. 빗방울이 그녀의 머릿결을 타고 흘러 콧잔등에 맺혔다. 물에 젖어 뭉쳐버린 머리카락처럼 어딘가 비어 있는 공간에는 무상감이 깃들어 있었다. 은혜는 언젠가 저 자리에 다른 꽃씨들이 날아들 것이라고 선희를 위로했다. 그들은 비에 젖어 수척해진 마음을 차로 녹였다. 은혜의 노란 민들레차와 선희의 흰 민들레차는 색감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은혜가 보기에 선희의 찻잔은 생기가 없었다. 노란 찻물이 깊게 우러나는 동안 모든 기력을 소진한 흰 꽃을 보는 듯했다. 주변을 물들이며 스스로 옅어지는 소멸의 과정이었다. 은혜는 화병에 담긴 꽃이 함박눈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녹지 않는 눈에 대해 말했다. “그건 눈이 아니야.”그러면 뭐냐는 은혜의 물음에 선희는 작은 목소리로, “흰들레.”했다. 2고등학생으로서 첫눈이 온 날, 교실에는 은혜뿐이었다. 보건실에 갔다는 선희가 돌아오지 않았다. 은혜는 걱정스레 선희를 기다리다 책상에 놓인 편지를 발견했다. 너무 늦은 것 같아. 선희의 목소리로 시작한 편지는 어느덧 그녀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처음 보는 단어가 반복되었다. 흰들레, 그것은 선희의 첫 소설이었다. 아이가 홀로 살던 섬에는 민들레가 우후죽순 피어있었다. 민들레를 불며 놀던 아이는 병에 걸린 이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 아기호랑이
  • 202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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