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 작성자 카무스
- 작성일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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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럴까?" 그레이브는 혼잣말로 조용하게 자기 자신에게 질문했다. 그는 방금 깜빡 졸아 원고 전체 109페이지 중 36페이지를 수정하다 커피를 문장 위로 쏟은 참이었다.
"어떻게 치우지"
그레이브는 필사적으로 옆에 있던 휴지 한 장을 뽑아 닦아봤지만, 종이는 더 짙은 갈색으로 물들다 못해 중앙 부분이 찢어져버렸다. 그레이브는 손으로 얼굴을 몇 대 쳤다. 별로 아프진 않았다.
"36 페이지는 다시 쓰면 되겠지..."
그는 찢어진 원고를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작업하던 것을 잠시 멈춘 채 잠을 청했다. 팍,눈이 떠졌다. 밤 9시에 잠들었는데 아침 11시였다 편지가 현관 아래로 두 통 들어와 있었는데, 전부 원고 독촉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레이브 작가님에게. 작가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원고 빨리 보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지금 보내시기로 한지 일주일이 넘으셨습니다. 오늘 저녁까지 카사비안 출판사로 직접 전달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편지를 자신의 테이블에 툭 던졌다. 그의 테이블은 온갖 종이로 빽빽했다. 19쪽까지 쓰다만 패륜아를 다룬 소설, 아직 치우지 못해 탑이 되어버린 편지들, 그리고 세금 고지서 등등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모습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눈더미 같았다.
“뭘 좀 먹어야겠어”
그는 냉장고 손잡이를 바깥으로 세게 잡아당겼다. 하지만 당연히 느껴져야했을 그 시린 냉기가 느껴지지 않고, 미적지근한 공기만 느껴졌다. 전기가 끊겨 내용물이 다 썩어버린 것이다.
원고는 다행히 음식을 넣어두지 않았던 상단 칸에 있었다.그는 개의치 않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레이브는 일일이 안에 있던 사과, 음료수 등을 손으로 만졌다.
“상태가 안좋네”
3cm 즈음, 온몸에 솜털이 숭숭 달린 벌레 3마리가 사과를 파먹고 있었다. 음료도 피해갈 수 없었다. 원래 오렌지색이었을 음료는 검붉은 액체로 변해있었다.
그레이브는 냉장고 더 깊숙히 있는 심연들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음료수를 다시 넣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세숫대야에 남아 있던 물을 사과 위로 쏟아부어 벌레를 씻어냈다.
벌레 세 마리, 아니 네 마리는 물에 씻겨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졌다. 벌레가 떨어질때마다 그레이브는 발로 벌레를 밟아죽였다. 갈색 액체가 벌레 몸속에서 터져나왔다. 그러고서는 그는 사과를 4조각으로 잘랐다.
벌레 때문에 검은색으로 파여진 부분은 깔끔하게 제거하고, 비교적 괜찮은 부분은 점심에 먹으려고 접시에 담았다. 접시 아랫편과 옆면에는 빨간색 땟자국으로 오염되어있었다. 그는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꽤나 역겨운 맛이었지만 토할 정돈 아니였다.
“전기가 끊겨버렸네. 그래서 뭐, 어떡하지?”
그레이브는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먹으며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몇 초간 곰곰히 생각했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눈앞에 펼쳐지진 않았다. 그는 일단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바닥 작은 틈새마다 갈색 때가 있었다. 그레이브는 화장실 변기 오른쪽의 작은 빨간 세숫대야를 들었다. 플라스틱 재질이었다.
쏴아아.
그는 물을 틀었다. 꼭 넘치지 않게 담아야했다. 세숫대야의 높이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키며 바라봤다. 다행히 물은 넘치기 전에 채워졌다. 그레이브는 얼굴을 물속에 깊숙히 묻어다가 빼기를 세 번 반복했다. 그 다음, 물기로 빡빡 문질렀다. 세면대 위에 올려놓은 투명한 초록색 칫솔을 집고 치약을 조금 짜낸 다음 이를 닦았다. 4분 즈음 닦아야했다. 뱉고 싶을 땐, 입을 세숫대야에 댄 다음 강하게 흡입해 뱉어야했다. 단 한 번에 뱉어내야 했다.
그는 강하게 뱉었지만 입 안쪽에 약간의 치약 덩어리가 좀 남아있어 손으로 살짝 떼어낸 다음 세면대에 닦아냈다. 그는 전보다 더 홀가분해졌다. 집의 구조는 단순해서 작업실, 부엌, 그리고 안방으로만 이뤄져있었다. 그레이브는 밖을 보고 싶었지만 지하의 칙칙한 회색 벽밖에 보이지 않았다.
“돈이 필요해”
전기세도, 수도세도 낼 돈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레이브는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는 안방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형광등 불빛은 작업실에만 켜두어서 안방은 꽤 어두웠다. 정면에 놓인 소박한 브라운관 TV를 쳐다봤다.
3주 전에 번인 현상이 일어나더니 일주일 전엔 아예 켜지지도 않았다.
“고쳐야 하나, 말아야하나”
그레이브는 TV의 검은화면을 보고 있자니, 어둠이 눈앞을 그대로 뒤덮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부엌이 보일 때 쯤, 현관에서 몸을 반쯤 밀어넣은 뭉개진 검은색 형체가 보였다. 그레이브가 그것을 보자마자 거짓말같이 사라져있었다.
“하아..”
그레이브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배가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갔다. 때마침 식탁에 사과 3조각이 있었다. 하나 더 먹어서 2조각이 되었다. 첫번째 조각은 참을 만 했지만, 이번 것은 정말 역겨웠다. 아기가 토해낸 으깬 과일 죽을 씹는 듯한 식감이었다. 그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음.
“윽, 도저히 못 먹겠어”
그는 싱크대에 그것을 일부 뱉었다. 입안에 있던 나머지 것들은 억지로 삼켰다. 다시 플라스틱 세숫대야를 가져와 물을 너무 많이 쓰지 않게 적당히 부었다. 물, 그리고 으깨진 사과 덩어리가 함께 쪼르륵 하며 구멍으로 들어갔다.
“맛없어?”
그레이브의 혼잣말이 아니였다.
목소리가 그레이브보다 훨씬 굵고 낮은 남자의 말이었다. 그레이브는 곧바로 뒤를 돌아봤지만 그 남자는 없었다. 사과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있던 모습과 접시에 담겨있는 모습이 번갈아가며 보이기 시작했다. 그레이브는 숨을 빠르게 내쉬었다.
눈을 몇십초 동안 꽉 감았다. 오로지 검은 세상밖에 보이지 않았을 때, 그레이브는 다시 눈을 떴다. 사과는 그대로였다. 그레이브는 작업실로 빠르게 달려갔다. 여전히 지저분한 책상위를 해집으며 약통을 찾으려했다.
종이를 구기고 찢어가며 뒤진 끝에 하얀 약통을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라벨에는 [항정신병제]라는 단어가 쓰여있었다.
그는 뚜껑 아랫부분을 강하게 위로 잡아당겨 뚜껑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레이브는 약통도, 약도 흰색이라 보이지 않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아니였다. 약은 들어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
아까 그 남자의 목소리. 어깻죽지가 뻐근해오고, 등골의 차가운 땀이 흘렀다. 그레이브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뚜벅. 뚜벅.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너무 오만해, 자기 객관화를 좀 하는 게 좋아, 그레이브.”
그레이브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봤는데 역시나 예상했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발 주변을 자세히 봤는데 한쪽 발을 들고 또 다시 내릴때마다 선명한 삐걱거림이 들렸다. 그는 애써 무시한 채 원고를 챙기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걸음을 내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동반되었다. 어제는 그러지 않았었다. 식탁이 보였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아니 그가 의식했을 땐 보이지 않았다.
사과 2조각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과는 갈색으로 변질되어있어 조금 음식물 쓰레기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음식물 쓰레기조차도 먹었다. 1조각을 더 먹었을 때, 위산의 따끔거림과 시큼한 맛이 목을 찔렀다. 그는 그것을 먹을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그냥 버렸다.
물은 아까워서 같이 버리지 않았다. 이미 물은 이미 세숫대야의 절반 가까이 떨어진 상태였다. 냉장고를 열었다. 아까보다 더한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그레이브는 가래가 섞인 기침을 했다..
윗쪽 부분을 봤고, 그 부분에는 36페이지 원고지가 덩그라니 놓여있었다. 그는 원고지를 챙겨 어깨 사이에 집어넣은 후 목이 말라 음료를 넣는 칸을 보았다. 아까 넣은 검붉은 오렌지 음료. 또 아래쪽 음료 칸에 놓인, 정체모를 보라색 액체가 담긴 페트병을 목격했다.
곧장 그 페트병을 꺼냈지만 라벨이 떼어져있었다. 열어보려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너무 부풀어져있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크기였다.
그는 다시 제자리에 되돌려두었다. 그레이브는 36페이지 원고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커피의 얼룩은 그대로였지만 쭈글쭈글하던 종이는 어느정도 펼쳐져 있었다. 작업실로 계속 걸어갔다. 걸어갈때마다 옆에서 그 형체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레이브는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상태라면, 출판사에서도 봐주겠지..”
그는 작업실에 있던 원고지와 합쳐 스테이플러로 꽉 찝었다. 편지와 함께 꺼끌꺼끌한 황토색 봉투에 넣었다. “이제야 보여?” 뒤를 돌아본 그레이브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남자는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현관에 서있었다.
“너,누구야?”
“너야”
그 남자, 아니 또 다른 그레이브는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넌 밖으로 못 나가”
그는 거대한 덩치를 앞세워 현관을 막고 있었다. 그레이브는 조금 주춤했다.
“아니, 나는 나가야돼. 원고지도 챙겼고 약속도 있어.빨리가면 좋잖아.” 시계는 12시를 가리켰다. 그 말을 들은 그 남자는 쇠를 긁는듯한 끼이익 거리는 큰 웃음소리를 냈다.
“네가?”
그 남자는 봉투 속 편지와 원고를 훑어보았다.
“역시 오만해. 정말 오만해서 칭찬하고 싶을 정도야”
“넌 내가 아니야. 비켜!” 그레이브는 발을 조금씩 내디뎠다.
“넌 여기서 죽어야 해. 여기가 네 무덤이야!”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무시하며 신발장까지 갔다. 왼쪽 팔에서 저릿한 느낌이 들고, 머리가 아래로 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레이브는 신발을 신었다. 신발 밑창이 다 낡고, 신발끈이 너무 꽉 조여져있어서 신는 데 시간이 걸렸다.
“넌 아무것도 아니야, 실패작일 뿐이지.” 남자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머저리 같은 놈, 상황 파악이 안 돼? 네가 날 죽인거야, 날!”
빨갛게 달아오른 그 남자의 얼굴을 밀쳤다. 그 남자의 몸이 잿가루가 되어 흩날려졌다.
“네가 누구인지 상관 없어. 난 반드시 성공할거니까”
그레이브는 손에 힘을 불끈 쥐고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뒤에서 미세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편지를..어떻게..한 거지..”
도어락이 띠릭 소리를 하며 잠겼고, 그 남자의 목소리도 더이상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며, 가슴에 품은 원고지를 끌어안았다.
“도착하면 직원 분들에게 사과해야겠어. 용서해주지 않으셔도 달게 받겠어.”
그레이브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온몸을 따스하게 해주는 햇살, 구름이 한 점 밖에 없는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택시를 기다릴 때, 오랫동안 괴롭히던 지독한 두통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분을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12시 30분.
배기음과 함께 다가온 택시에 올라타 원고지를 뒷자석에 던져두었다. 문을 닫자 택시 기사가 말했다.
“어디로 모셔다드릴까요?”
그는 편지 내용을 다시 보았다. 맨 마지막 줄, [카사비안 출판사].
“카사비안 출판사로 가주세요.”
“네? 다시 말해주시겠어요.”
“카사비안 출판사요.”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말했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이 근처에 그런 출판사가 없습니다..”
“아니에요, 있어요! 제 원고지를 받아줄 출판사라니까요.”
“정 그러시다면 우선 중앙 공원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출판사 일 수도 있으니까요.”
자동차는 배기음과 함께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복잡한 시내와 거대한 나무들이 무성한 길을 지나쳤다.
택시에서 그레이브가 내렸다. 책 표시가 쓰여져있는 것을 보고, 문을 박차고 들어갔지만 그곳은 서점일 뿐, 카사비안 출판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브는 지나가는 사람 한 명을 붙잡아서 물어봤다.
“카사비안 출판사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그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다음 사람도 동네에서 30년을 살았지만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 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두번째 편지는 검은색 점박이 무늬에 흰 바탕이 새겨져있었다. 아무것도, 그 어떤 얼룩조차도 있지 않았다.
“편지 따위는 없었어. 네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지.” 귓가에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레이브는 무릎을 꿇었다. “그렇다면 네가 들고 있는 저 원고는 뭘까?”
그레이브는 떨리는 손으로 109페이지의 원고를 확인했다. 모든 페이지에 커피로 얼룩져 있었고, 모든 장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빼곡히 반복되어 있었다.
[왜 그랬니,아들아. 도대체 이게 뭐니. 아버지로서 넌 아들 자격이 없는 것 같구나]
“넌 실패작이야, 그레이브”
“너에게 주어진 자격 따위는 없어” 그 남자가 바로 옆에서 속삭였다.
그레이브는 땅바닥에 팔을 계속 내리꽂았다.
주먹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제발…제발 절 죽여주세요!”
“네?”
그 사람은 그레이브를 살짝 밀쳤다
“제발요! 저는..”
그는 아이처럼 오열했다. 당황한 행인이 도움을 요청하자 근처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레이브에게 쏠렸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훗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레이브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
사인은 자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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