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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 작성자 허영심많은소설가J씨
  • 작성일 2026-09-30
  • 조회수 108

제목:<도덕>

“도덕은 도덕적이기에, 매우 도덕적이어서, 마땅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법이란다.” 선생님이 칠판에다 자신의 이름을 긁으면서 말했다. 준은 그 명제가 낯설었다. 

“응, 뒤에 있는 애. 옆에 있는 문 닫아.” 한 아이가 손잡이를 당겼다. 너무 세게 닫혀 반동으로 다시 조금 열렸다. 선생님은 “제대로 닫아”라 주의를 줬다. 문은 밀폐되었다.


“얘들아, 있잖아.”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비밀이란다.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아주 중요한 정보지.” 교사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준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의 색깔은 남들과 같은 검은색이었다.


“너희 반만 알려주는 사실이야.”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고마워요’, ‘감사해요’라고 중얼거렸다. 책상 위로 펼쳐진 교과서의 인쇄 잉크의 인공적인 풋내가 준의 코를 찔렀다. 


준은 도덕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사실에 대해 질문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리되지는 않았기에 결국 손을 드는 것을 포기했다. 어머니가 말하길, 이 선생님은 진학을 잘 시키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하얀 공책을 펴고 연장자의 말을 받아 적었다. 빨간색 볼펜으로 기록하고, 형광색 볼펜으로 강조했다.


 선생님은 자신만의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자, 이제 시작. 번호대로 앉았지?” 아이들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선생님은 너희가 최고의 반이 될 것 같아. 아니, 뭐 아닐 수도 있는데, 그냥 느낌이 그래. 잘 해보자!” 그의 노련하고 약간은 버벅이는 말에 아이들이 웃었다. 준도 어딘가 따뜻함이 느껴져서 같이 웃었다. 동시에, 준의 손이 왼쪽 볼로 가려다 내려갔다. 만져보니 얇은 유리처럼 바삭하고 잘게 부스러질 듯한 둥근 돌기가 부풀어 있었다.


준은 자신의 얼굴을 즐기는 자신을 사랑했다. 하지만 오늘은 즐길 수 없었다. 종이 울리자, 그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로 비친 자신이 보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평평하게 펴진 윤곽이 입을 다물고, 그를 고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에는 투명하던 살결이 지금은 침침했다. 피부는 어둡고, 낯빛도 어두웠다.


윤곽을 더 자세히 보려 거울로 다가갔다. 윤곽의 모양이 타원이 아닌 완벽한 원으로 보이도록, 얼굴을 왼쪽으로 슬그머니 돌렸다.  이제서야 실체가 보였다. 그것은 돌기라고 하기에는 각각의 면이 납작했는데, 전체적인 형상은 그런 납작한 단면들이 모여서 동그래졌다. 내부의 우유 같은 하얀 액체가 비칠듯 표면이 얇았다.  


손톱 끝으로 가장자리를 슬쩍 건드렸다. 마른 겉면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제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지문의 중앙을 그 중심에 정확히 맞추었다. 지문의 중앙이 물질의 중심에 닿았다. 더 깊숙이 압박하자 내부를 덮고 있던 얇은 막이 찢어지며 하얀 액체가 내비쳤다.


앞에다 시선을 고정한채, 검지손가락을 뺨 아래로 끌어내렸다. 닳아진 케라틴 끝이 팽팽한 살결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그 순간, 둘 사이에서 반작용이 일어나며 손가락이 튕겨나갔다. 그 내부 물질은 거칠고 차가웠다. 맞닿았던 양쪽 피부에 아픔이 잠시 남다, 가볍게 사라졌다.


흐르는 물에 씻어냈다. 투명한 물방울이 파란 핏줄 위에 동그랗게 맺혔다. 별생각 없이 그것을 보던 눈이 다시 비춰진 공간 속 얼굴로 올라갔다. 얼굴 근육이 수축하지 않았다. 


 철 사포에다 벽에 굳은 페인트를 벗겨 내듯이, 두 손으로 긁어내듯 세수했다. 그러다 밖의 웅성거림을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래들이 몇초에 서너명꼴로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문지르는 태도를 우아하고 느릿하게 바꿨다. 자신은 뺨에 돋아난, 돌기 하나를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 실소가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그 질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혀를 조금이라도 움직여 볼 안쪽 살가죽에 대면, 묘하게 어긋나며 그 좁은 틈새로 신경을 짓누르는 압박이 번졌다.. 그런데 또 구체적으로 어디가 통각점인지는 몰라서, 건들지 않으려고 하는것도 불가능했다. 걷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턱 끝에서 맴도는 자극이 자꾸만 준의 흐트러진 생각을 즐기는 나름대로의 집중이자 유희를 뻇어갔다는 사실뿐이었다. 발설하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주머니 속 손가락을 집요하게 짓이겼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직육면체 회색 기둥들을 지나갔다. 도어락이 열렸다. 주방에 계신 어머니의 실루엣을 마주했다. 준은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짓눌린 낮은 목소리에 없던 기력까지 쥐어 짜내어 ‘비밀이 있다”, 라고 뱉어내려했다. 소리가 새어나오는 곳인 폐가 작동하지 않았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짜증에 준은 혀를 찼다. 어머니는 그런 준의 소리를 배경의 음악처럼 느낀뒤 입을 뗐다. 

"준아, 손 씻고 밥 먹어. 가방은 책상 옆에다 놔두고, 교복도 옷걸이에 걸어."

"어디라고?"

"책상 옆." 준은 명령과 제안 중간쯤의 경계를 따랐다. 어머니는 그 사이 접은 옷을 준의 책상에다 놓으려다 멈칫했다 .가로와 세로를 네등분하여 한 칸만을 차지한 공책이 공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손은 스프링과 종이 뭉치들을 치웠다.

“비밀이 있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뱉었다. 어머니는 수건의 모서리와 모서리가 맞닿게 잡으며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준은 본론을 꺼내기 전, 잠시 알려줘도 되나 한번 더 머뭇했다. 그녀는 아들을 딱히 마주하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귀로 상황을 알아듣고는 있었다.

“그래.”

“사실, 음······. 말해도 되려나. 담임 선생님 아시지?”

“응.”

“그 선생님이 도덕에 대해 알려주더라고. 그런데, 좀, 뭐랄까······너무 훈계처럼 들리는것 같아. 내 착각일까? 물론 그 선생님의 말을 맞긴 한데······.” 한숨을 잠시 쉬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해?”
“으음, 좋은 생각이야. 선생님도 완벽한 어른이 아니기에 틀릴수 있어. 네 말도 그럭저럭 맞아.”
“엄마, 그니까,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게 내가 이상하다는 증거는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그런데 준아, 어른들이 말할때는 보통 이유가 있어.”
“아이가 멍청하게 자라서 몸만 큰 아이가 되면?“ 어머니는 입술을 오므렸다. 그러다 다시 벌렸다. 어머니는 개켜둔 수건을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선생님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훌륭한 어른일 가능성이 높아보여.”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면직물에 밀착시켰다. 준은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 그럼 선생님의 말이 맞다는거네.” 

“당연하지. 그 분은 완벽하진 않아도, 애들한테 아무 말이나 던지는 사람은 아니지.” 어머니는 서랍을 닫고 다음 옷을 집었다. 준은 고개를 무의식적으로 끄덕였다. 

"근데 준아, 원래 도덕이라는 게 그래. 도덕이 도덕적인 이유는, 그게 도덕적이라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매우 도덕적이니까, 마땅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거지." 어머니는 접은 옷의 모서리를 한 번 더 다듬었다.

준은 그 문장이 어쩐지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 문장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피부 내 팽팽하던 압력이 그 순간 사라졌다. 기억의 흐름을 놓친 준은 뺨을 어루만졌다. 텅 비어있었다. 매끈했다. 
“어디 아파? 왜 가만히 있어?” 어머니가 물었다.

“아니.” 준이 답했다. 온 피부에 구멍이 송 송 뚫린듯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마지막 옷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방을 나섰다. 준은 방금 들었던 문장이 도대체 누구의 입에서, 어떻게 튀어나온 문장과 비슷한지 잠깐 생각 해보려 했지만, 이미 배가 고팠다.

식사를 마친뒤, 그는 방 안에 기어갔던 벌레의 시체를 툭 툭 건드렸다. 등껍질은 광택이 났지만, 다리는 죽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할까? 움직여야 한다.

“도덕적이어서.” 준이 되뇌었다. 맞는것 같기도 하고, 틀린거 같기도 한 말. ‘맞다’라는 쪽에 가능성이 좀 더 쏠렸다. 도덕적으로 살아야할까? 도덕적으로 살아야할것 같다. 누가 말했더라.

아, 그래. 도덕 선생님과 어머니였다. 준은 아침의 일어난 시간 7시 30분부터 현재 오후 4시 12분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되짚었다.

“도덕은 ······이기에, 매우 ······, 마땅히······훌륭한······.” 

“ ······이 도덕적인 이유는,······도덕적이라서 ······. 그러니까······도덕적이니까, ······.” 준은 두 문장에서 기억나는 말들만 끄집어냈다. 칼슘이 부족한 뼈만 남은 문장 같았다. 그는 그 단어를 대조했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오차 없이 말하고 있었다. 말의 호흡과 말투가 달랐지만 내용만 보자면 틀림없었다. 그건 맞는 말일수도 있었다. 준은 선생님의 문장을 처음부터 되짚었다. 도덕은 도덕적이기에. 그다음은 기억났다. 매우 도덕적이어서. 그 뒤에 무슨 말이 있던가. 문을 닫으라고 하다, 다시 열리니, 닫으라고 했다. 이것도 당연히 기억났다. 아이들이 고맙다고 했다. 어디서 고마운걸까. 자신도 웃었다. 그때 물었으면 됐을텐데. 선생님이 비밀이라고 하셨다. 너희 반만 알려주는 사실이라고. 그런데 엄마는 어떻게 알았지. 엄마도 중학생이었으니까. 그때도 선생님은 있었겠지. 그러면 우리 반만 아는건 아니었다. 우리반만. 우리반에도. 어느 쪽이었더라. 준은 두 말을 입에서 번갈아 움직였다. 우리반에도 알려주는 사실이야.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선생님은 ‘만’이라고 했다. 그 말 때문에 아이들이 고맙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거짓······. 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짓말이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좋은 학교로 보내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녀가 그 말을 한 사람이었다. 아무나 할수 없는 일이었다. 준은 책상 위에 벌어진 교과서를 바라봤다. 빨간색으로 쓰고 그 위에 형광색이 덧칠해 놓여있었다. 자신이 쓴 글씨였다. 틀린 말인데 왜 강조를 했을까. 틀렸다고 한적은 없었다. 이상하다고만 했지. 뜻을 잘 몰라서, 뜻도 모르면서 이상하다고 했다. 어머니에게는 훈계 같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냥 아이들이랑 잘 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준은 수치심에 입술을 다물었다. 괜찮았다. 다시 물으면 될 일이었다. 아까는 말을 잘못했다고 먼저 말하고, 그때 선생님이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정정하면, 그런데 어머니가 무슨 뜻이냐 물으면 뭐라고 말할까. 손이 뺨으로 올라갔다. 손끝에서 거친 면이 걸렸다. 준은 손가락을 옮겨 다시 만졌다. 어머니에게 한번 더 묻고 싶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문의 틈 사이로 스쳐지나갔다. 준은 그 형상을 보고, ‘아까 그 이야기’라는 구절을 머릿속에서 만들어냈고, 입 밖으로도 꺼내기로 결정했다.

“아까 그거 다시 물어봐도 돼?” 아니. 어머니는 그가 그렇게 말하면, “같은 말을 반복했잖아” 라고 말하며 그의 의문을 거절할게 분명했다. 결국 그 생각을 폐기했다. 

“선생님이랑 엄마랑, 아니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었나면…" 알맹이가 없었다.

준은 몸뚱이를 일으켜 방문을 열고, 그대로 펼쳐진 복도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물방울이 그릇을 튕기는, 폭포수 같은 소리가 났다. 왼쪽으로 방향을 꺾다보니 소리가 선명해졌다.

문고리에 손을 대려던 순간, 귓가에 "가방, 책상 옆"이 스쳤다. 그때도 그랬다. 한 번 물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바뀌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쇠붙이를 스치다가 말았다.

결국 발자국은 오래 남지 못했고, 발은 가던 길을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다시 왔다. 준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까 그 검은색 덩어리를 볼펜으로 꾹 꾹 찔렀다. 붉은 점액이 흘러나오고, 준에게는 점처럼 보이는 무언가들이 파열되었다. 책상 구석에 있던 청색 공책을 펼쳤다. 

20XX년 2월 11일

[오늘 학교에서.]

[오늘 학교에서.] 

[오늘 학교에서.]

'오늘 학교에서'까지 쓰고 펜이 멈췄다. 선생님 얘기부터 써야하나, 엄마 얘기부터 써야하나, 아님 둘을 교차하면서 써야하나? 아니면 어제 있던 학교의 얘기? 아니,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중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기의 형식은 오늘부터가 맞는데, 오늘 중에서도 어디부터.

[선생님이 이상했다.] 왜? 이상하다고 말하려면 뭐가 이상한지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그건 아직 준도 몰랐다. 그의 손이 연필을 끄적이는걸 멈췄다.

[한 아이가 있었다. 그는 중학교에 다니던, 몰개성한 아이였다.] 다음 문장이 저절로 따라왔다.

[그의 이름은 준이었다. 첫날에 도덕을 맡는 담임을 만났다. 선생님의 눈은 온 우주의 어둠을 깎아만든듯 깊었고, 입술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말만 흘러나왔다. 그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아주 중요한 비밀을 우리 반에게만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감사했다. 실질적으로 받은건 없었지만, 그건 아마도 보이지 않아서일거다. 무엇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감사할수 있었다. 준도 그랬다.] 

준은 마지막 문장에 빗금을 그었다. [준만은 무엇을 받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쓰니 준의 지능이 낮아보였다. 그는 펜 끝을 종이에서 떼지 않은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약간 벌어져 있던 검지손가락을 바닥에다 두드렸다. 탁, 타닥, 탁, 타닥, 탁탁탁.


[다정하던 선생님은 도덕적이셔서, 생각보다 더욱 더 가식적이었다. 준은 ‘가식적’이라는 글자를 들여다봤다.

[다만 그것은 준의 생각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해 말했고, 준은 그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였다.]  볼에 있던 그 물건을 무심하게 건드렸다. 손이 다시 펜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준이 고의적으로 잘못 받아들인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준을 이해할수 없다. 선생님은 친절했다는걸 준은 알았다. 나도 알았다. 웃을때는 아무런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말만은.] 펜이 멎었다. 준은 마지막 구절 앞에 몇 글자를 끼워 넣었다. [준은 생각했다. 그런데 왜 그 말만은.] 이제 다음 문장을 쓰면 됐다. [그는 선생님을 싫어하던게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을뿐이었다.] 볼펜의 단단한 끝을 만져봤다. 잉크가 피부에 줄을 그리면서 묻었다.

[집에 온 준은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다. 어머니는 선생님이 훌륭한 분이라고 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는 끄덕이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우리 엄마가 더 설명해줄지도 몰라. 아니, 준의 어머니가.] 볼을 안의 어금니로 깨물었다. 바깥에서 만지던 돌기가 안에도 느껴졌다. [그녀는 준이 알아들은 줄 알았을 것이다. 준이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하지만 엄마, 나는.] 준은 ‘엄마’라는 단어를 지우개로 지웠다. 뒤의 두 글자를 남겨 두었다.

[아, 알겠다. 준은 고민하고 있다. 그 둘은 왜 같은 말을 했을까. 도덕이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왜 도덕적이라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건네지 않았을까. 나는 그 이유를 알것 같다.]

준은 쓰던 문장에 빗금을 긋고 다시 적었다. [엄마가 말하길, 선생님은 훌륭하다고 했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이유는 훌륭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점 여섯개 뒤에서 펜 끝이 종이를 오랫동안 짓눌렀다. 준은 앞에 적힌 ‘훌륭’이라는 글자들을 다시 읽었다.

준은 고쳐 쓰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준의 도덕이 도덕적인 이유는 도덕적인 이유로 인해 훌륭히 도덕적이어서······] 거기다 마지막 점 하나를 찍었다.

[준의 도덕이 도덕적인 이유는 도덕적인 이유로 인해 훌륭히 도덕적이어서······.] 완결되었다. 준은 펜을 점에서 떼어냈다. 펜이 가볍게 느껴졌다.

통증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글을 끝낸 준은 손을 내려놓았다. 펼쳤던 공책을 덮고, 옆에 있던 문제집 아래 놓았다. 책상 위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한쪽으로 정리했다. 준은 그 광경이 마음에 들어서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준은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평소처럼 세수를 하러갔다. 습관처럼 얼굴을 들여다보는 걸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문을 닫았다. 물을 틀고 손에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

어제까지도 남아 있던 불편한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평평했다. 준은 손바닥으로 뺨을 한번 더 문지르고 나서야, 아침 준비를 계속했다.

준은 필통, 문제집, 교과서, 소설책, 빨간색 필기 공책, 그리고 핸드폰 하나를 가방에다 넣었다. 어머니가 가방을 쳐다보다 갑자기 물었다.

"학원 가방도 챙겼어?"

"오늘 학원 없는 날이잖아."

"아, 맞다." 준은 이후 따뜻한 아침 식사를 먹고, 양치를 하며, 교복을 입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가 현관에 서있기 전,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 학교 잘 다녀와. 알겠지?”

“응.”
“그래, 잘 다녀와.”

준은 어제와 같은 수업을 다시 시작하고, 필기 노트를 펼쳤다. 지루해서 볼펜을 찍 그었다. 소용돌이를 그렸다. 지그재그 모양을 그렸다. 교차로 빗금을 그렸다. 줄 위에다가 선분을 그었다. 어제 쓴 공책의 줄이 떠올랐다. 아, 그랬구나. 그 공책은 아직 책상 위, 문제집 아래에 있었다.

“얘들아, 이거 공책에다 옮겨라.”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칠판에다 글자를 적었다. 집에는 문제집이 있었고, 청색 공책이 그 아래 깔려있었다. 그 문제집은 손가락 두 마디도 안 되는 두께를 지녔다. 그 위에 어머니가 손을 뻗던 모습이 떠올랐다.

준의 펜이 멎었다. 교사는 하던 수업을 이어서 했고, 준은 다시 필기를 하려고 했다. 어느줄 까지 썼는지를 찾지 못해서 순간 혼란스러웠다.

어제와 똑같은 음정으로 종이 치고, 쉬는 시간이 분 단위로 같게 찾아왔다. 그때쯤 준은 폰을 열어서 어머니와의 대화창으로 갔다.

[엄마, 책상 보지 마세요]라고 쓰다가, 지웠다. 만약 이러면 어머니가 왜냐고 물을게 분명했다.

[엄마 내 책상 위에 있는 공책 치워주세요]라고 다시 썼다. 이번에는 더 나빴다. 구체적으로 어떤 공책인지, 왜 치워야하는지 전부 설명해야할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안의 내용물을 보면······. 준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빛을 띈채 살아있던 핸드폰이 죽었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고, 같은 노트를 한번 더 펼쳤다.

‘일찍 집에 가면 되지 않을까.’ 조퇴를 하면 이유를 대야했다. 준은 그 적절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을뿐더러, 만약 어떻게 찾아서 댄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올거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보건실을 가려면 몸이 아프다고 해야 하고, 그럼 학교에서 집으로 확인 전화가 갈 수도 있었다. 어쩌지. 

교사가 방금 몇 페이지를 넘기라고 했다. 준은 그 소리가 순간적으로 웅웅거렸다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었다. 옆의 학생의 문제집 쪽수를 훑어봤다. 135페이지였다. 그는 책장을 넘겼다. 교재내 있던 문단을 묵묵히 읽기 시작했다. 

이건 그냥 지어낸 이야기야. 그렇잖아. 준은 숨을 길게 내쉬고 다시 종이에 펜을 댔다. 어머니가 읽으면 뭐라고 해야할까. 소설 속 인물 ‘준’이 한 생각이라고 하면 될 터였다. 현실의 준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준은 준이 쓴 것이라고 하면 되었다.


아니, 잠시만. ……아. 준이라는 이름이 그대로 공책에 삽입되어 있었다. 준이라는 이름은 한 글자였고, 딱딱한 두 글자 이름도 아니었다. 허구의 인물이라 변명할수 없었다. 어머니와의 대화 내용이 어렴풋이 섞여들어가있었고, 선생님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적던 말의 뒷부분을 놓쳤다. 어머니가 공책을 읽으면 뭐라고 할까. 준은 어머니의 평온한 얼굴을 떠올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빈칸을 남기고 다음 줄부터 썼다. 그 하얀 여백을 검게 채워버리고 싶었다.

준은 무심코 볼에 손을 가져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손을 내렸다. 그러나 이름은, 그 글자는,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연락할 수도, 먼저 갈 수도 없었다. 남은 건 하나였다. 집에 가면 곧바로 방에 들어가서, 공책을 치운다. 다른 건 없었다.

하교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준은 적던 줄을 마저 끝내려했다. 멈칫했다. 상태를 유지했다. 멈췄다. 그는 집에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책을 덮었다. 

가벼운 실내화를 무거운 운동화로 갈아신었지만, 전보다 속도가 조금 빨랐다. 공책을 어떻게 치우나면, 그냥 그 기록이 적혀진 종이들을 갈기갈기 조각내서 집안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었다. 아니, 그러면 엄마가 눈치채고 조각을 맞출 수 있었다.  책들이 가득 있던 자리에 다시 그걸 놓으면 충분했다. 

어머니가 말을 걸면 먼저 무엇을 해야할까. 그냥 평소처럼 답하고, 움직이며, 깜빡이면 됐다. 준은 ‘학교 다녀왔어’라는 말을 입 안에서 해봤다. 소설 속의 준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아파트의 현관문 앞으로 도착했다. 번호를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속도도 느리다 생각해 그냥 계단을 탔다. 느슨해진 신발끈 때문에 발이 신발 내에서 조금 움직였다. 올라가면서도 허리를 숙여 신발끈을 신발 아래로 쑤셔넣었다. 현관에 도착하면 거실 복도를 통해 방으로 들어가면 끝이다. 어머니를 직접 마주할 생각에 속도가 느려졌지만, 다시 빨라졌다.

현관 문 앞에 도착했다. 집 안의 온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준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번호판을 내리쳤다. 1. 1. 0. 7. 그의 생일. 열었다. 집 안에서는 면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수건을 개는게 분명했다. 

어머니가 수건을 개고 있었다. 다섯 초쯤마다 하나씩 쌓였다.. 집 안 물건들의 배치도, 어머니의 몸짓도 평소와 같았다. 방에 들어가 공책만 치우면 됐다. 준은 숨을 내뱉었다.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듣고 수건을 내려놓았다. 옆으로 손을 뻗더니 준에게 걸어왔다. 맨발과 바닥이 분명 닿았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준은 그녀의 얼굴을 봤다. 팔을 봤다. 손을 봤다. 공책이 있었다. 파랬다. 어머니의 손가락이 표지에 끼워져 있었다.

준은 느슨한 끈을 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양손으로 끈을 교차시키고 고리를 만들어 그 사이로 밀어 넣었다. 단단히 묶였는데도 검지와 엄지는 매듭의 중심을 놓지 않았다. 올을 다시 풀었다가, 같은 자리에 고리를 만들고 끈을 감아 돌리는 동작. 준은 그 행동을 여섯번 반복했다. 시선은 바닥과 어머니의 맨발 중간에 묶여 있었다.

발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 발의 그림자가 신발 위로 드리웠다. 준은 고개를 더 숙였다. 바닥만 보였다. 숨이 파르르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이 된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덕적이지 못해.” 


허영심많은소설가J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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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광(死煌).

어느 한 사람이 있었다.그는 걷고 있었다.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마치 운해 속을 걷는 것처럼,마치 나의 심상 속을 헤매는 것처럼,마치 나와 타인과의 실에 엉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처럼,그는, 유랑하고 있었다.------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순백 속을 그저 멍하니, 반달눈을 치켜뜬 채 걷고 있었다.그렇게 하염없이 걷던 와중, 사람의 윤곽이 슬그머니 그 모습을 드러낸다.당신이었다.당신은 언제나와 같이 손을 흔들며 내게로 뛰어왔다.마치 토끼처럼.마치, 사냥꾼처럼.난 잡힐 수 밖에 없었다.당신의 손에 내 손이 포개어진 그 순간을 난 잊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당신은 그까짓거 별 것 아니라는 듯 나를 등진 채, 마치 이어진 손과 손이 독립된 존재마냥 당신은 그저 달려간다.사막의 사구를 관통해나가고, 삼림을 주파해나가며, 당신이 나를 이끌어 도착한 곳은 어느 오두막.그 오두막이 나와 당신의 새로운 집이다.이 곳에서 새로운 살림을 차리고, 나와 당신의 새까만 머리가 새하얗게 바랠 그 때까지 이 오두막 앞의 의자에 앉아있겠지.당신은, 천진난만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드디어, 드디어 왔어. 우리들의 돌아올 곳이."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언젠가는 멀리 떠난다는걸까.난 비탄에 빠져 당신에게 말한다."나로선 고작 오두막 앞 나무에서 벌목 후에 돌아올 곳이 될 뿐이야."그러자 당신은 말했다."하지만 난 아닌걸, 난 머나먼 곳에서 이 곳으로 돌아올거야."난 물었다."어째서?"그러자 당신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에 힘을 주며 입술을 꾹 닫았다.그러곤 오두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난 그 문을 여는 당신의 뒷모습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만보고 있었다.당신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심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당신의 몸이 눈에 뒤덮여간다.당신은 괜찮은걸까.난 외쳤다."무슨 일이야! 거기서, 그 오두막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그러자 당신은 나지막히, 담담하게, 서리가 내려앉은 그 입술을 조심스레 움직이며 내게 말한다."당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내가 머나먼 곳에서 돌아올 때 당신은 어쩔거야? 날 기쁘게 반길거야? 아니면 문전박대하려나? 어느 쪽이든 난 당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하지만, 난 다가갈 수 있어. 당신이 눈보라 속에 있든, 모래 폭풍 속 한 가운데 있든, 난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어. 봐, 이것 봐."난 한 걸음 씩 발을 내딛었다.하지만 발을 그렇게 내딛을 때마다 오두막과 나와의 거리가 점점, 마치 요술이라도 쓴 것처럼 확장되어갔다."난, 난 널 구할 수 있어. 다리 너머에서 널 바라볼 수 있고, 높디 높은 빌딩 위에서 너만을 찾아 낼 수 있다고!"이 말을 마지막으로, 난 홧김에 눈을 꾹 감고 힘껏 달렸다.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달리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녹음이 만연한 지평선이 아름답게 비추는 평원이 보였다.오두막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었다.내 발치 주변, 수많은 쥐들이 죽어있다.하늘에서 죽은 새들이 비처럼 쏟아진다.이윽고 저 녹음의 지평선을 차츰차츰 가리며 안개가, 높

  • dls
  • 2026-10-07
초목, 사람, 무희

나는, 초목(草木)이다.두꺼운 뿌리로 이 땅에 선 채, 때로는 두툼한, 때로는 얄팍한 가지를 이리저리 뻗으며 나 자신을 표명한다.그 가지에서부터 돋아난 풀빛으로 햇빛을 가리며 색다른 아름다움을 그대의 눈에 선사한다. 만연한 녹빛 사이 새어나오는 햇빛은 또 다른 요기가 된다.아, 그대여. 그대는 평원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뿐만이 아닌 이런 녹빛이 만연한 곳에서조차 녹빛이 아닌 햇빛을 찾는구나.벤치에 앉은 그대에게, 난 말한다."그대여, 그대는 여기 앉아 대체 무얼 누리고 있는거요?"그러자 발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여기 있으면 햇빛이 더 잘 보이기 때문이요.""정녕 일광욕을 영위하고 싶다면 이 만연한 초목을 벗어나, 저기 저 넓디 넓은 평원에 가면 될 것 아니요?""...."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으니, 아무래도 내가 정곡을 찌른 걸까?괜히 자부심에 빠져있다보니 주변을 잠시 잊고 있었다.벤치를 다시 확인해보니 그대는 없었다.그대는 이미 울창한 초목들 사이를 거리낌없이 주파해가며 평원으로 나가는 모습, 그 윤곽만이 보일 뿐이었다.하지만 윤곽이 보인 것도 잠시, 수많은 초목들 사이로 새빨간, 바람 하나 불지 않는데도 혼자 일렁이는 무언가가 보인다.그대는 햇빛 아래에서 장렬히 타들어가며 내게 외친다."이게 나요. 이 모습이 초목들 사이에서 벗어난 나란 말일세! 아!"난 그대가 재가 될 때까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나는, 초목이기 때문에.------나는, 사람이다.두꺼운, 불룩 튀어나온 배와 두툼한 다리로 이 땅에 선채 얄팍한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나 자신을 표명한다.그 팔에서부터 돋아난 손가락 한 마디 한 마디마다 각기 다른 나 자신을 표명하며, 색다른 자신을 그대의 눈에 선사한다.만연한 군중들 속 새어나오는 견해 하나 하나는 또 다른 고통이 되어 파도처럼 모두에게 덮쳐온다.아, 그대여. 그대는 평원에서 빌딩의 높고 좁은 마천루 너머로 보이는 햇빛을 누리는 것뿐만이 아닌 이런 풍진이 만연한 곳에서조차 햇빛 아래의 인간을 찾는구나.회사에서 자기 자리를 찾은 그대에게, 난 말한다."그대여, 그대는 여기 앉아 대체 무얼 누리고 있는거요?"그러자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그대는 답한다."여기 있으면 나 또한 풍진의 먼지가 되어 타인을 타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지요.""정녕 타인의 눈을 갖고 싶다면 그대의 현안(賢眼)과 바꿔 끼우면 되는 일 아니요?""...."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으니, 아무래도 내가 정곡을 찌른 걸까?괜히 초조함에 안절부절 못하다보니 주변을 신경쓰지 못했다.자리를 보니 그저 빙빙 돌아가는 의자만이 있을 뿐이었다.그대는 보이지 않았다.그대는 수많은 회사 자리를 거리낌없이 주파해나가며 창문을 깨곤 그대로 뛰어내렸다.난 이상할정도로 천천히, 하지만 왠지 모를 죽음의 예감이 맴도는 그대를 바라보았다.그대는 구름 위, 탁 트인 파란 하늘 아래에서 몰락해가며 내게 외친다."이게 나요. 이 몰락은 결국 세상의 상승기류에 의해 하늘에서 떨어져 진정한 내가 되는 몰락과 전락의 나란 말일세! 아!"난 그대가 흙으로 돌

  • dls
  • 2026-10-06
업 앤 다운

어두운 구석에서 작은 백열 전구가 깜박거렸다. 다운은 의자에 앉아 천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라디에이터가 진동하며 검은색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고인 액체가 끈적하게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방 한가운데에 있는 모니터가 조용히 오래전에 방영됐던 영화를 재생하고 또 재생했다. 화면 속 어린 소년은 파란 요정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애절한 목소리가 스피커 사이로 새어나왔다. 다운은 고개를 돌렸다. 저 장면을 본 지 며칠째였다. 모니터는 고장 난 듯 같은 부분만 계속 반복했다. 소년이 간절히 빌고, 요정이 침묵하고, 다시 소년이 빌고… 화면이 번쩍이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가 금세 다시 되돌아왔다. 창문 너머로 회색 연기가 끝없이 피어올랐다. 공장 굴뚝들이 하늘을 더럽히고 있었다. 거리에는 줄 선 사람들의 그림자만 보일 뿐이었다. 꺼질 듯 말듯 하던 전구가 꺼지며 어둠을 몰고왔다. 다운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현관문을 열고 소포를 들여왔다. 3개월 동안 잊고 있던 청구서였다. “청구서가 밀렸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다운은 세금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되는지 알고 있었다. 다시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다운은 조용히 주먹을 쥐며 외투를 챙겼다. 구겨진 주름 사이사이에서 먼지가 풀풀 풍겨 나왔다. 머리가 아파왔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화악 달아올랐다. 일을 구한다는 것은 큐에게 다시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큐는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눈앞으로 큐의 차가운 미소가 스쳐지나 갔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문은 손톱으로 칠판 긁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콧속으로 지겨운 흙먼지가 몰려 들었다. 다운이 녹슨 철제 계단을 밟고 내려가자 층층이 쌓여진 컨테이너 건물들에서 붉게 달아오른 얼굴들이 튀어나왔다. "다운! 정말 오랜만이네. 어디 숨어 있었어?" 미라가 전자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그냥... 집에 있었어." "집에만? 몇 달 동안? 미쳤나?" 미라는 고개를 저었다. "요즘 일자리가 얼마나 귀한데. 로봇들이 다 가져가서." "그래서 나왔잖아." "큐한테 가는 거지? 조심해. 요즘 큐 성격이 더 나빠졌어. 로봇들이랑 일하는 게 많아져서 그런가." 다운은 발을 동동 굴렀다. "다른 선택이 있어?" "글쎄... 공장에서 일할 수도 있고. 물론 로봇들이랑 경쟁해야 하지만." "그건 더 싫어." 미라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긴 해. 예전엔 그래도 사람이 우위에 있었는데." 다운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하늘을 흘깃 쳐다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높은 빌딩과 컨테이너들에 가려져 사이로 드문드문 회색 구름만 보였다. 굴착기와 중장비의 비명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거대한 드릴이 콘크리트를 뚫을 때마다 네온사인들이 번쩍였다. 파란색과 분홍색 홀로그램 광고들이 먼지구름 사이로 일렁거렸다. 위대한 도시는 공사를 끝낸 적이 없었고, 멈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작업복을 입은 인간들이 무거운 철판을 옮기고 있었다. 이마 위로 땀이 줄줄 흘렀지만 그

  • 비보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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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보

    엄청 흥미롭네요! 특히 문은 밀폐되었다. 라는 표현과 연장자의 말을 받아 적었다. 라는 표현이 독특해서 집중하고 읽을 수 있었어요

    • 2026-10-03 00:32:03
    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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