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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과 단두대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4-02-06
  • 조회수 688

 나는 어쩐지 소슬한 바람에 잠을 깼다. 몸 아래로 기어가듯 나를 타고 올라오는 날카로운 한기, 고요 속에 울부짖는 쇳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이윽고 눈을 가늘게 떠 여전히 어떤 보이지 읺는 바다이자 무한히 멀리 있어 걷을 수 없는 장막인 어둠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아직 온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희망의 표시가 아니었다. 

 희망과 절망은 사실 같은 것이다. 어느 때는 희망이 곧 절망이고, 절망이 곧 희망이다. 상황이 불러오는 희망은 곧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말한다. 절망은 곧 자신이 희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말한다. 같은 상황에 느껴지는 양가적인 감정은 그저 어디에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희망과 절망은 어떠한 감정의 발출이 아니라 감정의 근원이자 상황 그 자체이다. 나는 그걸 이곳에서 배웠다.

썩은 붕대를 풀고 구더기가 들끓는 상처를 내려보았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죽은 구더기를 움켜쥐고 입에 넣었다. 구더기의 시체에서는 씁쓸한 절망의 맛이 났다. 

그러나 말했듯이 절망은 곧 희망이라서, 구더기의 시체는 나에게 생존의 희망이 되었다. 적어도 하루를 더 살아갈 수 있도록, 나의 절망은 나의 양분이 되어 나의 희망이 되고 나의 내일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잠시 앞뒤를 더듬었다. 들어온지 한참 되었건만, 아직도 이곳의 구조는 익숙치 않다. 가장 오른쪽의 돌로 된 까슬까슬한 벽에 닿았다. 한 손을 짚고 벽에 최대한 붙어 걸었다. 그대로 한참을 걸으면 삼각형으로 툭 튀어나온 벽이 있는데, 그 곳을 돌아 이번엔 왼쪽으로 알 수 없는 거리를  걷다 보면 화장실이 있다. 이상하게도 왼쪽으로 돌았을 때는 화장실에 닿지 못했다. 이 기이한 구조는 나에게 온갖 상상을 하게 했지만 결국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다만 이것을 알아보며 이곳이 무지막지하게 넓다는 것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배에서 배설물을 밀어내며 이곳을 나가는 생각을 했다. 이곳은 한 명의 수감자에게 주어질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그 사실은 나를 불안하게 했고, 어떠한 알 수 없는 강렬한 감정에 나를 들끓게 했다. 아마 그것은 갇혀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갑갑함과 지나치게 넓은 감방에서 오는 두려움이 혼합되어 혼란스러움과 함께 배출되는, 어떤 공포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감정이란 것은 오묘하고 기이해서, 감정은 행복, 놀라움, 기쁨, 두려움 따위로 이름 붙일 수 없으며 순간적인 그 상태에 따라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며 그것은 일순간에도 수없이 운동해 제 모습을 바꾼다.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내부에서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비현실적이며 파괴할 수 없는 물체일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발산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배설이다. 그것은 제멋대로 만들어져 나를 더럽히고 사라진다.

 화장실을 떠나 같은 길을 지나며 나는 그 방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다. 나에게 있어 이 구조는 분명히 어떤 의미가 있었다.


...



이곳에 오기 전, 나는 혁명을 이끌었다.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역인 그것은 그야말로 모순적이었고, 나와 나의 사람들은 그런 사회에 반하고자 했다. 우리는 모순을 알리고자 나섰고, 실패했다. 썩은 사회의 개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가려고 했다. 뻔한 이야기였다.

나의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사상을 믿어 주었다. 언제나 농담을 던지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던 일등 항해사와 허허롭게 웃던 농부,  든든한 얼굴로 우리를 보던 소방관, 자애롭게 모든 이들을 보듬던 집행관... 그들이 나의 사람들이었고 또한 그 일부였다. 나의 사람 중 일등 항해사는 그 직업처럼 모두의 항해를 이끌었다. 어떤 어려운 파도도 그는 웃으며 넘겨 버렸다.

한 번은 궁에 불을 지르고도 도망친 적이 있다. 궁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사흘이 흐르고, 또 잠입해 숨는 데도 사 일, 마침내 불을 제루고 도망가는 데에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우리는 웃음울 잃지 않았고 여타의 혁명처럼 엄숙하지 않았다. 절대 웃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우리는 푸른 모자를 쓴 일등 항해사의 농담을 들으며 웃었다. 마치 불장난을 치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혁명에 웃음을 더했고 모든 것에서 순수함을 추구했다. 우리의 길은 어두웠지만 밝았고 먼 길의 끝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웃울 수 있었다.

혁명에 실패해 반역도가 된 뒤, 나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이 잘 도망쳤기를 바랐다. 나는 방이 갇혀 모든 것을 불라며 고문을 당했다. 쉼 없이. 

손톱이 뽑힐 땐 나의 손톱처럼 사라져간 무수한 동포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잃었을 때 우리는 멈추지 않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고통도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쇠가 몸을 지질 때, 나는 고문을 버티던 동포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위대했던 뜻은 이렇게 나로써 사라져 버렸다.

고문을 받으며 나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무엇을 이루었는지, 나의 고문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우리의 노력을 무엇을 해 내었는지. 나느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한 번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과 이곳에 있다는 절망이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 둘은 하나였고 다른 방향만을 가지고 있었다. 내 희망과 절망은 그때부터 서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곳에 처넣어질 때, 나는 사실 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른다. 기절한 상태에서 포대를 쓴 채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식량은 계속 배급되었는데, 그것 또한 내게 알 수 없는 점이었다. 내 추측으로는 나를 일시적으로 기절시킨 뒤에 음식을 넣거나, 아니면 정말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분명했다. 천장은 아무리 돌을 던져도 닿지 않을 정도로 높았기에 가능성이 적었다. 한 명의 수감자를 위해 밧줄을 수백 미터 타고 내려오는 노력을 들일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원래의 자리에 돌아와 이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깔린 어둠에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제자리에만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바뀌는 것은 없었고, 짜증스러울 정도로 변화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어둠에 질려 나는 이곳을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일주일 전부터 말이다.

내게 시간을 알 방법따윈 없었다. 다만 내가 자는 시간을 고려해 대략적으로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일주일 전이라고 생각한 그 날은 삼 일 전일 수도 있었고 이틀 전일 수도 있었다.

몇 번이나 오름쪽으로 진출해 아무것도 찾지 못한 뒤, 나는 이번엔 왼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앙은 너무도 광활해서 내가 제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이 적었다. 방향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내 자리에 작은 돌멩이들을 모아 놓았고, 그곳에서 나는 움직이지 않으며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다시금 왼쪽으로 긴 길을 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화장실 뿐만 아니라 익숙한 이끼도 없었다.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그것은 왼쪽 길로 갔을 땨 그려지는 사각형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길 표시용 돌멩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부턴 구상했던 이 계획은 중앙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헨젤과 그레텔의 동화처럼 돌을 길 삼아 중앙에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돌 모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리에 돌아와 마법처럼 놓여 있는 음식을 먹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딱딱한 빵이었다. 배가 고팠던 나는 순식간에 빵을 먹어 치웠다. 그리고는 잠을 청하기 위해 누웠다.

이곳은 언제나 잠을 자라는 듯이 새카맣게 어두웠고 시간도 알 수 없어서, 나는 내키는 때마다 잤다. 하루의 대부분을 걷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피로감도 컸다. 화장실로 가는 길은 그만큼이나 길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아무데서나 변을 보곤 했다. 내가 점점 인간 이하의 어떤 것으로 퇴화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언제나 회의감과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이것에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를 인간 이하의 무엇으로 퇴화시키기 위해, 화장실이라는 수단이 있어도 쓰지 못하게 만들어 나를 조롱한 것이지 않을까?

다음 날이 되어 나는 중앙으로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십 미터 정도마다 돌울 하나씩 던졌고, 가는 길에 널부러진 돌들은 일부러 치우거나 손에 들었다. 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길은 직선적이었고 어느 때보다 나의 발걸음은 빨랐다. 드디어 이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새로운 자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이 길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몇 달의 감방 생활 중 내게 다가온 몇 안 되는 자극일 뿐더러 언제나 나에게 공포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늘 벌레와 쥐들이 기어 나왔고 고약한 악취가 났다. 분명 나뿐일 텐데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해 준비된 함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게 위협은 없었고, 내가 중앙으로 향하게 할 어떤 수단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설령 함정일지라도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마침내 어딘가에 도달했을 때, 나는 무언가에 쿵 부딪혔다. 처음 느꼈을 때 나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나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약한 악취가 풍겨 왔지만, 그런 사실을 내가 무시하게 만들 정도로 얼기설기 쌓여 장작 같은 형태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둥그런 무언가를 만지기 전까지였다. 그 장작에서는 소름돋는 감각이 전해져 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질척거리는 덩어리와 진흙 같은 것들이 묻어 있었고 표면에만 물기를 가지고 있었다. 

순간 든 생각에 나는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함정이었던가? 나에게 호기심과 답답함울 부여해 어디로든 나아가게 하려고 만든 의도였던가? 이것이 반역자에 주어진 마지막 말로인 것인가? 아니라면 어떤 분노의 발로일 것인가?

다시 일어나 만져 보니 그것은 단단하고 길쭉하며 끝은 동그랗고 여러 개가 뭉쳐 있어서 마치..... 마치... 뼈처럼 느껴졌다. 손울 뻗어 보니 그런 뼈들이 높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높게, 그리고 넓은 반경에 걸쳐 놓여 있었다. 

순간 내 몸이 굳었다. 거대한 뼈무덤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하늘이 그대로 열려 버린 것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빛이 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나의 약해진 눈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생각했다. 

저 빛은 뭐지? 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인가? 아니라면 나에게 공포를 주려는 어떤 의도인가? 그렇다면 하늘은 왜 이제서야 열리는가? 설마...

눈이 보이기 시작하고서야 뼈무덤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뼈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훑기 시작했다. 나의 예측이 틀리도록.

거대한 뼈무덤을 이루는 해골들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파란색 모자를 쓰고 있는...그 뼈는 일등 항해사의 것이었다.

순간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눈으로 모든 뼈를 훑었다. 나를 위하던 농부, 집행관, 일등 항해사, 선원.... 모두 내 사람이었다. 내 사람들이 죽어 내 수감처를 떠받치고 있었다.

슬픔을 넘어선 어떤 감정의 폭발과 함께 토가 쏟아져 나왔다. 스스로 머리가 바닥을 향하고 팔다리가 무력하게 꿈틀거렸다. 눈이 또다시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느리게 느껴졌다. 몸의 괴로움을 떨쳐 내려는 움찔거림이 수백 초 동안 이어졌다. 눈 앞을 가리는 눈물이 모든 것을 가리고 마치 나뿐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그것에는 깊은 슬픔과 고통과 답답함과 공포의 집합체가 있을 뿐이었다.

시뻘개진 눈에 군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묶어 이 김방에 던진 그들이었다.그들은 분명히 저 하늘에서 내려왔다. 정말로 모든 사회의 산물들이 내 위에 있었단 말인가?

군화들은 나를 이끌었다. 내거 어떻게 옮겨졌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생각했다. 이 감방은 나를 위해 준비한 엄벌의 표상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감방과 고체처럼 방을 꽉 메워 오든 것에 얽매이는 어둠. 알 수 없는 구조와 형태와 존재가 나를 구속하고, 모든 것들이 나의 자유를 막았다. 그들은 나를 퇴화시키며 나의 혁명은 퇴화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그 탐험의 마지막 결과는 죽음이었다. 고문을 당한 듯 피투성이던 일등 항해사의 모자와 뼈가 기억났다. 내가 거기 있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지금, 나는 처형대에 목을 올리고 있었다. 사회에 대항해 나아가고자 한 자들위 이상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느끼며. 다시없을 후회가 내 몸을 덮쳐 이미 온 사지를 잠식하고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무거운 감정이 나를 짓눌렀다.

사형 집행인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로 구를 바라보았다. 그가 마치 어떤 무기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어떤 덩어리처럼, 거기엔 의도와 감정 따윈 없었다. 

문득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모든 것에 의도가 있었다. 내 감방의 형태와 뼈무덤, 화장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내려오는 빵.. 그렇다면 우리가 의도를 가지지 못할 것은 없었다.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일등 항해서의 손 모양. 그는.. 엄지를 올리고 있었다.

처형인이 그제야 단두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미소가 사라지고, 이윽고 천천히, 또 천천히.

칼날이 내려왔다.

...


그리고 빛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다시 깨달았다. 일등 항해사가 나에게 알리고 있었다. 우리가 이겼노라고.

그들은 나를 위해,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수많은 반역도들을 위해 거대한 감방을 지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우리는 이끈 것은 위대한 사상이었고, 우리는 움직인 것은 빵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현실을 제한했을 뿐 나의 사상은 전혀 막지 못했다. 사회의 강대한 힘조차도 우리를 멋대로 바꾸지 못했다. 그저 그들의 범위에서 배제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를 결코 무시하고 짓밟을 수 없었고, 그저 밀어내어 닿지 못하게 할 힘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사회보다도 강했다. 그랬지만 사회는 어떤 뜻도 이해하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우리의 위대한 뜻은 사라지지 않았음을. 언제까지나 남아 이 사회를 결국 변화시킬 것임을. 

그들은 우매했고 이 거악에 대항해 마침내 고결한 죽음을 맞은 우리는.

승리했다. 그들에게 지워지지 못할 상처를 남김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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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수
  • 2025-11-04
모래의 바다

내게는 바다가 보인다.모래의 바다가 보인다. * 오른팔이 전부 사라졌다. 이제는 완전히 외팔이가 되었다.왼쪽 눈도 없다. 오래전에 사라졌다.나의 정확한 병명은 아무도 모른다. 몸이 천천히 말라붙어서, 모래처럼 버석거리다가 결국엔 흩어지는 병이다. 이 오른팔이 사라지는 데엔 삼 년이 걸렸다.이 정체 모를 병에 걸리면 몸의 어떤 부위에서 천천히 모든 수분이 증발하고, 남은 뼈와 살은 굳었다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충분히 마르면 모래로 부서지기 시작한다. 아프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나의 왼눈. 초등학생 때 모래가 되어버린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유리로 된 의안이 단단하게 굳은 채로 초점 없는 응시를 지속할 뿐이며 그다지 예쁘지도 않다. 낭랑 18세의 여고생 입장에서는 꽤나 속상한 일이었다.하지만 오른쪽 눈을 감으면 왼쪽 눈은, 혹은 그 눈이 있던 비어버린 자리는 내게 무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창백하지만 뜨거운 모래가 멈추지 않는 어떤 풍경. 끝도 없는 모래의 바다가 보인다.한때 그 광경은 날 수렁에 빠뜨리고 악마와 신벌의 존재를 믿게 했으나, 이제 더 이상 그곳은 지옥으로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다만 알 수 없는 호기심만은 이따금씩 나타났다.-나는 모래로 흩어지고 말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 진행 속도는 더 이상 빨라지지 않잖아요.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보겠습니다.의사는 형식적인 말을 중얼거렸다. 그도 아는 것이다. 이 병은 낫는 종류가 아닐 거다.-갈게요.의사는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문을 열고 익숙한 길로 걸어 나가는 과정은 다소 습관적이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신경질적일 정도로 반복적이고 사무적인 복도, 그 사이에서 조금 추워진 날씨를 느끼며 나는 병원을 나왔다. 그러고는 삼 년이 지났음에도 익숙해지지 않은 왼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저장된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냈다.-[남은 팔뚝이 전부 떨어져 나갔어.]답장이 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으아…빨리 와. 지금 병원이지?]-[응.]-[내가 갈까?]-[아니.]F는 가까이 산다. 대중교통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기에 나는 항상 두 다리를 이용하기를 선택했다.유일한 친구에게 향하는 이 길마저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고 오래되고 의미 없는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다. 나는 언제나 정해진 경로 위에서만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고 비교적으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이 아까운 순간을 나의 보잘것없고 천박한 소리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어깨에 붙여 놓은 비닐봉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바람이 스칠 때마다 그 시커멓고 보기 싫은 물건이 말을 하는 듯했다. 나는 비밀봉지가 할 법한 말을 떠올려 보았다.(나는 여기에 있어. 언제나 아직도 여기에 있다고. 잊지 마.)-...나 드디어 미쳤나 봐.너무도 어이없는 생각에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비밀봉지가 그딴 말을 한다니. 집착 심한 전남친 같잖아.바스락바스락. 비밀봉지는 계속 말을 했

  • 김희수
  • 202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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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산은 별로 모범적인 삶을 사는 놈은 아니다. 저걸 좀 보라."쒸발!!"보라. 담배를 물고 실수로 밟은 껌에 욕부터 뱉는 모습을 보라. 아무래도 모범적이진 않다.매 순간순간 멀어져야 내 인생일 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놈이지만 정작 멀어지긴 쉽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함께해 버렸기 때문이다."씹...야, 피방 가자."준산은 지금이 시험 기간이고 그것도 시험 이틀 전이란 걸 모르지 않는다. 그냥 알 바가 아니라서 저러는 것이다."미쳤냐. 이틀 뒤에 시험이야.""그걸 내가 모를 것 같아?"담배를 탁탁 털면서 싱글거리는 모습이 얄미웠다. 한 대 칠까 고민하다가 말았다."피방! 피방!""나 돈 없어.""내가 내준다니까. 그것도 못할 거 같냐?"고준산은 그 이후로도 약 삼십 분 간 피씨방을 외쳤다. 나는 오늘 내가 학원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보고 있던 학원 교재를 집어던졌다."그래, 가자. 망할 놈아.""그래!! 그거지! 렛츠 고!!"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사악하게 웃었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인간의 욕망을 사람 모양으로 빚어 놓으면 저런 모습이 될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나쁘기만 했다면 나는 진작에 그와 멀어졌을 것이다. 그에게 나름 따뜻한 부분이 있어서 나는 그를 친구로 남겨두었다.흔쾌히 피씨방 비용을 계산한다거나 피씨방 주인한테는 깍듯하다거나. 주로 그가 하고 싶은 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기는 했지만 그는 일진 같은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다.피씨방에 도착하자 준산은 마치 집에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게임을 켰다. 나는 시험을 걱정하면서도 게임을 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시험 생각은 곧 머릿속에서 사라졌다."저거 잡아!! 잡아! 죽여!!"고준산이 내 화면을 보면서 외쳤다. 나는 게임 속에서 총을 발사했고 총알은 날아서 바닥과 벽에 맞았다. 그리고 내 캐릭터는 나를 눈치챈 적에 의해 죽었다."오! 오오!! 이게 인간이야? 넌 벽이 적 대가리로 보이나 봐?"고준산이 미친놈처럼 웃으면서 내 어깨를 두들겼다. 어쨌든 못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시선을 슬쩍 돌렸다.한두 판이 끝난 뒤 고준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나 잠깐 화장실 좀. 좀 걸려."한 대 피고 온다는 뜻이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피씨방을 나갔다. 컴퓨터에는 게임 화면에서 자동 사냥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게임을 한 판 더 하려다 밥을 먼저 주문했다.그런 식으로 내 시험 전 이틀은 날아갔다.*"이것이 인간의 성적...?"당연히 시험이 끝난 뒤 내가 받은 성적은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고 나는 내 이전 성적들을 떠올렸다. 아주 급격한 우하향 곡선이었다. 나는 이 성적의 원인을 찾아 헤매다가 피씨방을 떠올리고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인생을 버리라니까?"내 성적을 본 고준산이 진지하게 조언했다. 이미 몇 번 들은 이야기라서 나는 그러려니 했다. 저놈은 애초에 돈이 많아서 저렇게 살아도 되지만 난 딱히 그렇지 않았다.슬쩍 본 고준산의 성적은 7등급대를 달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오히려 우상향 곡선일지도 모르는 성적이

  • 김희수
  • 202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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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서련

    김희수님 안녕하세요. 소설 게시판에서도 인사드립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투지를 잃지 않은 혁명가가 감옥에서도 어떻게든 투쟁을 이어가려 하는 모습(일단 이곳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부터)이 인상 깊었어요. 그런데 무엇에 저항하는 혁명이었을까요? ‘썩은 사회’는 어떤 식으로 썩어있었나요? ‘혁명’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만을 가지고 쓴 글이 아닌가 싶어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감옥 내부를 탐사하는 과정이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세세한 한편 왜 이렇게 되었는지가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어서 분명 막판에 엄청난 반전이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처형 이후에도 꺾이지 않은 마음이 반전이라면 반전… 일까요. 보다 자기에게 가까운 이야기, 달리 말하면 자신있게 조금도 모호하지 않게 쓸 수 있는 이야기에 도전해 보셨으면 합니다.

    • 2024-03-15 10:45:39
    박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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