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 작성자 김희수
- 작성일 202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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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643
실내인데 안개가 껴 있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였다.
지하철역에는 사람이 바글거린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사이로 안개가 미세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몇 년 되었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된 안개였다.
그것은 시간이나 기온에 따라 옅어지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기만 했다.
나는 출근을 해야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지각하기로 했다. 몇 개 있지 않은 의자에 앉아서 멍을 때렸다.
사람들이 밀고 당기고 하면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곧 도착한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고 어딘가로 일을 하러 떠났다.
가공할 워커홀릭이다.
때로 저 안개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뤄진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가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 섞인 피, 땀, 눈물. 고전적인 세 매질은 안개가 되어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 같다.
사실 삼위일체가 뭔지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다.
지하철역에 가끔 어린아이들이나 학생들이 오면 안개는 조금 옅어지는 듯하지만, 그들이 어딘가로 가 버리면 안개는 다시 몰려온다. 그리고 지금, 출근 시간의 지하철은 최악이다. 안개가 너무 짙어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3호선이 들어옵니다, 하는 안내 방송마저 먹먹하게 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건 그 방송뿐이라서 사람들은 저마다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지하철에는 안개를 극복한 사람들도 있다.
정확한 시점에 잠이 들어서 정확히 내릴 때 깰 수 있는, 반은 알림시계인 하이브리드 인간.
폰만 보고 있어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네비게이션 인간.
이어폰을 끼고 안내방송따위 무시하는 고독한 음악가.
그 외 지하철에서 난동을 부리는 광인들. 그들이 광인인 건 안개를 극복하고자 정신을 놓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공주를 구하러 가는 용사들처럼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다함께 정신병원 앰뷸런스에 탄 것처럼 지하철에 의해 실려간다.
서커스가 따로없다.
그 위대한 용자들이 어딘가로 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영화가 생각난다. 회색 철덩어리 컨테이너에 사람들을 빽빽하게 채워 어딘가로 보내 버리는 광경. 솔직히 꽤나 오싹하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마저도 많다는 말을 피할 수 없는 숫자였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개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줄을 서서 지하철을 기다렸다. 내 앞 승객들은 하나같이 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하철이 들어온다.
사람들이 열 명가량 내리고 또 탔다. 나는 줄 맨 뒤에서 아슬아슬하게 지하철에 탈 수 있었다.
지하철 내부를 보니 여기도 안개가 빽빽하다.
안개는 사람들을 분리하고 있었다. 너무 짙은 안개에 그들은 어깨의 감각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수십 명이 몸을 움츠리고 붙어 있는데도 그렇다.
누군가 나서서 안개를 없애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선녀의 날개옷마냥 두르고 나타나는 것이다. 그개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고 믿는 듯이, 힘없는 안개를 갑옷처럼 짙게 뿜어낸다. 그런 게 모이고 모여서 지하철역을 뒤덮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안개는 멍청함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저기 앉아 있는 덩치 큰 남자가 심심해서 주먹이라도 휘두른다면 안개는 맥없이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연쇄반응으로 다른 안개들까지 흩어져서 사람들은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날 것이다.
나는 안개를 두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의미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걸 알아도 안개를 내뿜고 다니는-그리고 그것이 제법 멋지다고 생각하는-병신같은 종자들과 나는 거리가 멀다고 자신한다.
나는 지하철의 의자를 내려다봤다.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장애인이나 노인이 와도 절대 비켜주지 않을 기세다. 오로지 자기 손 안의 작은 기계만 보거나 그냥 처 잔다. 자기 머리 밖의 일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아마 내가 여기서 고성방가를 내질러도 잠시 시선을 주고 말 것이다.
아마 이어폰 음량을 높이겠지.
나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려고 손을 넣었다. 잡아 빼는데 손가락이 옷에 걸렸다.
“어.”
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관성에 버티고 선 다리들 사이로 쭉 미끄러져 갔다.
“아, 진짜….”
폰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그때 지하철이 멈췄다.
사람들이 한 명씩 내린다.
그것은 한 명 한 명 몇 걸음이 되지 않았지만 합쳐져서 흐름이 되었다. 폰은 걸음들 사이로 채여 제멋대로 멀어진다.
그리고 치마를 입은 여자 두 명이 지하철로 들어왔다. 나는 일단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주워야 하는데….’
저 멀리 폰이 살짝 보였지만 금방 사람들 사이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승객들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폰이 있을 방향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멀찍이 서 있던 여학생 한 명이 고개를 숙이더니 내 폰을 집어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어색한 눈맞춤.
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일부러 눈을 살짝 피했다.
여학생은 말없이 폰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네.”
그때 안내방송이 울린다.
-다음 역은 혜화, 혜화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여학생은 그걸 듣고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옆에 있던 손잡이를 잡았다.
곧 지하철이 멈추고 문이 열렸다. 나는 내리는 여학생의 뒤통수를 잠시 보다가 폰을 내려다봤다.
SNS에서 시간을 낭비하려던 때였다.
“저기, 이거….”
누군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내렸던 여학생이 서 있었다.
손에는 폰에 거는 고양이 모양 장식이 들려 있었다.
“아…저씨 꺼 맞죠?”
그녀가 어색하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긴 해요.”
“네?”
당황한 눈빛이 보인다. 그때 지하철의 문이 닫혔다.
“어, 어!”
그녀는 내려야 했던 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살짝 웃음이 지어졌다.
여학생은 장식이 내 것인 줄 알고 돌려주려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심지어 내려야 했던 역도 놓쳤다.
호의가 기꺼웠다.
나는 어느새 나와 그녀의 주변 안개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고 샴푸 냄새도 희미하게 났다.
지하철 전체에서 안개가 없는 곳은 이쪽이 유일했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안개 속 갇혀 서로를 보지 못했다. 당연히 우리의 모습도 보지 못했다.
나는 웃으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슬픈 요즘 애들한테는 금융치료가 최고라고 들었다.
“학생, 그래도 고맙네. 이거 받아요. 그, 마라탕? 그런 맛있는 거 사 먹고.”
그녀는 어색하게 내 쪽을 보다가 내 손에 쥐여진 지폐를 보고 살짝 놀란 것 같았다.
“괘, 괜찮은데….”
고개를 젓는 모습에 거짓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계속 들고 있자 그녀는 결국 받았다.
“어, 이거 신사임당….”
“가져요.”
“가, 감사합니다….”
낭패했다는 듯한 표정이 신난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금이라도 거절할까 하는 마음도 엿보였지만 나는 다시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내 주변으로 다시 안개가 모여든다.
나는 곧 다시 안개에 휩싸였다. 오늘 있었던 일은 곧 머릿속에서 희미해질 것이다. 내 머리에까지 안개가 낄 것이기 때문에.
선의를 보았고 안개가 잠시 걷혔어도 변하는 건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난 잠시 웃을 수는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것만으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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