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生長
- 작성자 유진선
- 작성일 202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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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장生長
연은 준을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녀에게 밤은 너무도 길었다. 해질 무렵, 준은 연에게 좀 나아졌느냐 물으며 쓰고있던 털모자를 벗어서 그녀의 머리에 덮어주었다. 연은 답하지 않았다. 붉은 황혼빛이 창으로 새어들어왔다.
멈춘 열차칸 객실은 살아있는 것을 끌어안고 있지 않는다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 예전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지만 겨울이 되고 얼어죽었다. 선로 옆 깊은 땅에 묻어주었는데 장마철에 비가 오며 흘러내린 흙더미에 파묻힌채 그대로 땅이 얼어서 봄이 되어야만 파낼 수 있을 듯했다.
준은 쌓여있는 박스 사이에서 참치캔을 꺼내 땄다. 기름은 병에 부어 놓고 참치를 손으로 집어선 새 모이를 손바닥에 얹어 입에 갖다대주듯 조심스럽게 연에게 먹였다. 연은 시내에서 굶주린 들개들에게 습격을 받았고, 녹슨 파이프를 휘두르다가 손을 베여 한달가량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번주에 들어 상태가 약간은 호전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다. 또, 그날 아무 것도 챙겨나오지 못했으니 다시 도심으로 나가야 했다. 가지고있던 항생제며 연고, 옥수수 통조림까지 모두 바닥났고 참치캔으로 몇 끼니째 때우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상자 모서리에 걸려있는 헝겊에 손을 닦은 뒤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끌어올리고 온기가 전해지도록 연을 껴안았다. 아직 미열이 나고 두통에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중이었다. 낮에 물을 많이 먹였지만 토를 계속 해대서 준은 내일 따뜻한 물을 만들어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올 겨울은 특히나 추우니까, 그녀가 없으면 버틸 수 없다.
준은 일어나자마자 열차창 밖으로 비가 오는 것을 확인했다. 이불 밖으로 나와서 물이 새지 않도록 천장 다락을 꽉 틀어막았지만 몇 방울씩 계속 떨어져내렸다. 이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연은 깨워보아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표정이 편해보였고 좋은 꿈에 든 듯했다. 준은 조심스레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선로가 깔린 길은 까만 소나무 침엽수림 가운데에 있는 곳이었다. 준은 곧장 우물로 향했다. 열차 왼쪽길 언덕을 비스듬히 오르면 있는 마을 인근에 우물이 있다. 오래전에 생긴 우물이지만 물이 깊고 깨끗해서 둘이서는 몇 년을 더 써도 마르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준은 우물에 다다라서 물을 긷고 눈이 들어가지 않도록 덮개를 덮었다. 그리곤 물양동이를 이고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깔아놓은 덫을 확인해봤지만 마구잡이로 파놓은 구덩이는 버려진 여우굴보다도 허술해서 무엇도 걸려있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준은 양동이를 들쳐매고선 반대쪽 빈 손으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웠다. 내리는 눈에 땅이 덮여가서 점점 나뭇가지를 찾는 것이 오래걸렸다. 그래도 한참을 주우니 적당히 한 손 꽉 채울 정도로는 모을 수 있었다. 준은 이제 돌아가려 했으나 눈에 길이 파묻혀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깊은 숲 한가운데긴 했지만 햇빛이 쌓인 눈에 반사되어서 평소보다 밝았다. 나무들이 기둥처럼 흰 바닥 위에 박혀있는 모습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했다. 눈이 계속 내렸고 준은 앞을 보며 걸었다. 멀리서 흰 물체가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흰색 토끼 한 마리가 스라소니에게 쫓기고 있었다. 준은 짐을 바닥에 놓은 뒤 그쪽으로 다가갔다. 스라소니는 왼쪽 뒷다리를 절뚝였지만 토끼가 어려서 둘이 속도가 비슷했다. 토끼는 발이 닳도록 뛰며 도망쳤고 스라소니은 혀를 내밀고 숨을 헐떡대며 쫓았다. 준은 주먹보다 두 배 정도 큰 뭉툭한 돌덩이를 들어서 편한 자세로 고쳐잡았다. 다섯 걸음 정도 되는 거리였다. 준은 그쪽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팔을 크게 휘둘러 스라소니의 머리를 내리쳤다.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한 방에 쓰러졌지만 아직 살아있었고 한 대 더 내리치니 두개골이 쪼개져 피가 뿜어져 나왔다. 흰 눈에 피가 울컥 쏟아졌고 준은 튀긴 피에 윗옷이 반쯤 젖어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토끼를 쫓아가 잡았다. 목을 꽉 잡은채로 놓아둔 짐을 향해 걷고있으니 발버둥치는 느낌이 멎었다. 토끼는 아직 성체가 아니었지만 요깃거리 정도는 될 듯했다. 오른손에 물양동이를 들고 왼손에 나뭇가지를 잡았다. 토끼는 어깨춤에 올려놓고 열차로 향했다. 밝았던 길도 차츰 흐려져서 준은 걸음을 서둘렀다.
아직 오후 두 시 정도였다. 계속 눈이 내리는 탓에 날은 좀 어두웠지만 세상은 온통 하얬다. 준은 온 길에 발자국이 찍혀있지 않아 길을 좀 헤매다가 우물이 있는 마을 인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피로 점철된 겉옷을 벗어던지고 물양동이로 얼굴을 씼었다. 핏자국은 대충 가려진 듯했다. 쓴 물을 모두 버린 뒤 양동이에 물을 다시 채우고 집으로 향했다.
낙오된 단칸 열차는 그대로 고요했다. 지난 여름 장마철에 주변 언덕이 조금만 더 내려앉았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열차 안에 갇혀서 죽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완전히 잠긴 것은 아니라 출입이 가능했다. 흙더미는 오히려 곰이나 늑대같은 덩치있는 짐승들의 침입에 대한 걱정을 덜어줬다.
준은 연이 일어났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깨지 않고 푹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양동이에 받아온 물을 열차 밖 물통에 채워넣고 토끼는 까마귀가 채가지 않도록 장작 더미 가운데 나무를 빼서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넣어둔 뒤 마른 가지도 그 옆에 놓았다. 열차칸 안에 들어가니 연이 소리 없이 훌쩍이고 있던 탓에 준은 적잖이 당황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연은 양팔로 준의 어깨를 밀쳐냈다. 그리고 코를 틀어막았다.
“피 냄새나.” 연이 말했다. 창문에 빗방울이 엉기듯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미안.”
“대체 어디 갔던거야? 응? 또 나만 내버려두고.” 그녀가 평소에 말하던 톤이었다. 그보다 살짝 흥분한 것 같긴 했다.
“잠깐 나갔다온 것뿐이야, 평소처럼. 같이 못있어줘서 미안.” 준은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연은 대답 대신에 깊고 센 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그리고 힘든 듯 숨을 몰아쉬다 이내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불을 끌어 머리까지 덮고 그 안에 웅크렸다.
잠시 침묵이 공회전했다. 준은 그대로 그곳에 있어도 괜찮을까 고민했다.
“...뭘 잡은거야?” 연이 물었다.
“토끼.”
“토끼가 피가 그렇게 많이 났어? 역겨워…냄새 진짜 짜증나.”
“......어쩔 수 없는 거 알잖아.”
준은 그녀가 좀 많이 피곤하고 위태로울 뿐이라고 생각했다. 준의 키가 그새 좀 큰 탓도 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에게 너무도 작고 연약해 보였다.
토끼를 구우니 계란 두어 개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마른 가지에 불을 떼우니 어둑한 밤에도 주변은 좀 흐리멍텅하게 밝고 불길 주변 눈은 좀 녹아서 주위에 앉아있으니 따뜻했다. 그래도 찬바람이 불어올 때면 볼을 칼로 긋는 느낌이 나서, 둘이 가까이 붙어앉아 끼니를 때웠다. 밥알과 양파쫑, 소금을 넣은 죽을 끓이고 계란 한 알 만해진 어린 토끼 반쪽을 얹어 먹었다. 연은 두통이 좀 가신듯 간간히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그릇을 모두 비운 연은 피곤한듯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눈이 모닥불에 희미하게 비쳐 그녀의 얼굴 위로 낙하했다.
“들어가서 자야지.” 준이 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귀찮아.”
“아직 다 안나았어.”
“알겠어…알겠다구.” 하며 그녀는 바닥을 한 바퀴 뒹굴었다. 그러다 준의 목에 팔을 감싸고 기대며 말했다.
“부축해줘…”
“참…” 준은 연과 체구가 비슷해 버거워 하면서도 그녀의 양 어깨를 붙잡아 들어 그대로 열차칸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연이 오래 씻지 않은 탓인지 몸에서 개 냄새가 났다.
연이 잠에 들자 준은 바깥으로 나와 모닥불을 끄고 재를 눈으로 덮었다. 하늘이 짙고 어두워 상자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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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산을 한참 거닐었지만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가지 뿐이었다. 눈이 살살 내려 땅을 죄다 뒤덮으니 같은 곳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준은 오늘 당장 도시로 나갈까 하는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날이 가혹하니 날씨가 좀 풀렸을 때 도시로 가서 뭘 좀 구해보자고 그녀와 얘길 나눴다. 오늘은 산책도 할겸 둘이서 물을 길러 가는 길이었다. 연은 입을 벌린 듯 만 듯 한 모양으로 하고 노래를 불러댔다.
“그제 토끼 맛있었지.”
“응, 와안전, 뎁힌 바나나 먹는 것 같았어. 잠도 잘 왔구.”
“음…오늘은 있는 걸 먹어야 될 것 같은데.”
“아쉽다. 옥수수만 계속 먹다간 혀까지 얼어버릴 것 같아”
추운 날이었다. 준은 얼어서 단단해진 눈을 두드려보며 입김을 내쉬었다. 나무는 껍질을 보이며 꼿꼿이 있었다. 바로 앞 산 위에서 검은 형체의 무언가가 휙 지나갔다. 잘못 본건가 싶었지만 다시 그 마르고 검은 형체는 정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그들을 발견한 듯했다. 그리고 나는 새보다도 빠른 속도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어…”
준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며 허옇게 질린 새에 연은 이십 미터 가량 앞까지 다가온 그것과 눈을 마주치며 총을 빼들었다. 놈은 연을 노리고 달려왔다. 준이 나이프를 얼굴에 던쳤지만 튕겨나왔다. 눈에 한 발, 하지만 격추하진 못했다. 그것이 팔을 휘둘러 공격하려 들었다.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팔 공격을 막았지만 그것은 입을 벌려서 연의 총을 든 오른 손을 삼키려 들었다. 허나 두꺼운 옷을 전부 뚫진 못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 옅은 비명을 내질렀다. 입 속에서 다시 한 발, 그것은 그제야 숨을 멎었다.
준이 사체의 입을 벌려서 연의 손을 빼냈다. 겉옷을 벗기니 팔목 뒷부분이 피범벅이었고 팔뼈 한 쪽이 드러난 채 부러져 있었다. 준은 왜 곰이 한겨울에, 그것도 굶주린 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건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곧 깨달았다. 뭘 할 수 있을까, 피가 계곡수처럼 흘러내렸다. 옷을 묶어 지혈을 하는 새에 연은 쓰러져 버렸다.
이전보다 상태가 훨씬 안좋았다. 의식이 있는 때가 거의 없고 머리가 이렇게까지 뜨거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닳아올라 정말 이대로면 연이 죽어버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식량은 부족하지 않았다. 곰 고기는 냄새가 심하고 질기지만 그것밖에 먹을 게 없다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살집 없는 곰이었지만 내장이나 근육을 먹을 수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니 그녀는 의식이 있는 때가 더 많았고 준은 말동무정도를 곁에서 해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시 일주일, 그녀는 거의 이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라졌다.
겨울도 겨울인 것이 잊혀질 정도로 기운이 죽은 시기였다. 바람은 거의 불지 않고, 눈은 더이상 쌓이지 않아 조금씩 녹아내렸다. 연은 코트와 장갑만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아직 완전히 낫지도 않았는데, 이제 겨울도 무사히 끝나가는데, 왜?
날은 계속됐다. 봄이 오고 먹을 수 있는 게 많아졌고 준은 사냥에도 능숙해졌다. 새총을 하나 만들어 작은 동물들도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가을이 되고 다시 겨울, 또 계절이 변하고 삼 년이 흘렀다. 점점 혼자인 것이 무뎌졌다. 원래도 겨우 둘이었으니, 머릿수로는 하나 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 그런 걸까. 어느 날엔 먼 곳에 갔는데 거기서 사과 나무를 하나 발견했다. 사과 두어개를 챙겨와 씨앗을 심으니 자라났다. 다시 봄, 산은 꽃들로 뒤덮이고, 열차칸 주위엔 처음 보는 꽃이 폈다. 피같이 엄청 붉고 모양은 수수한 그런 꽃이었다. 무슨 꽃이었을까, 준은 꽃이 진 뒤에야 그 꽃의 이름이 궁금했다. 준은 앞으로도 혼자 살것이라면 알 필요도 없을 꽃의 이름이 계속 궁금했다. 도감이나 사전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알 길이 없으니 막막했지만 그 꽃은 내년에 또 피어오를 테니, 그 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숨을 내뱉으니 아직은 허옇게 올라오는 김이 보일 정도의 추위였다. 어느덧 내린 눈은 자신의 무게에 눌려 압축되어 단단해친 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준은 새삼 특히나 매서웠던 이번 겨울도 무사히 넘겼다는 것을 실감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손 밖에 떠서 헛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제도 내일도, 생각할수록 지금에 충실해지지 못하게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까만 연기를 쉬이 내뿜으며 타오르는 캠프파이어 가운데를 마른 나뭇가지로 휘적이다가 던져넣었다.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내 펼치니 텅 비어있었다. 짜증 섞인 한숨을 뱉으니 허연 김이 떠올라 공중으로 흩어졌다. 불의 열기가 직사되는 무릎과 손등이 뜨거운 게 느껴졌다. 고개를 치들어 별을 봤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니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눈을 떴다. 앞자리엔 연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미세하게 까딱인 채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연이 떠난 직후에는 환영이 종종 보이곤 했다. 흐릿해진 기억탓에 요근래 들어서는 본 적 없지만,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고 여전히 귀여운 모습이다. 초점이 잡힐수록 선명해져가는 그 모습을 계속 응시했다.
“뭐하냐”
“어?”
“안녕.”
“...안녕.”
연의 등 뒤에서 웬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올라 그녀의 어깨에 앉았다.
“계속 여기 살고있었네.”
“갈 곳도 없으니까.”
“저 열차가 멈춘 이후로, 쭉 여기에 정차된 채였네.”
“응. 잠깐씩 어디론가 갔다가도 늘 이곳으로 되돌아왔어. 이곳에서 나는 성장하지 못한채로 공회전하고 있었던 걸까.”
“덩치는 엄청 커졌으면서, 여전히 애처럼 말하는구나? 바보야, 정말.”
“......어디 갔었어?”
“음…나를 찾으러.”
“너를 찾은거야?”
“아무래도, 돌아왔으니까.”
“또 어디론가 떠나버릴까, 나는 너가 떠나고 나서야 그걸 알게되고.”
“글쎄,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
“알겠어.”
“응. 난 들어갈래.”
“불 끌게 그럼.”
연은 차안으로 들어갔고 준은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곧장 따라들어갔다.
그녀가 돌아오고 며칠,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됐다. 쌓인 눈은 녹아가고 날은 개어서 구름이 파란 캔버스 위를 휘적거리는 날씨였다. 연은 잠을 많이 잤다. 늦지 않은 밤에 잠에 들어서 점심 가까이에야 깨아나고는 했다. 그녀가 데려온 고양이는 어딜 그렇게 떠돌아 다니는지, 연과 잠을 잘 때 빼곤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연은 이제 아픈 몸이 아니라 그가 돌봐줄 필요도 없었고 따지자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관계였다. 어느 날엔 땅이 녹아 삽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되자 그녀와 몇년 전에 키우던 고양이를 묻어주었던 곳을 파내어 묘지를 옮겨줬다. 준은 고양이를 완전히 잊고있었지만 그녀는 그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아직 쌓여있어 흰 배경이었지만 그 나무에서는 준이 이름을 모르는 그 꽃이 이른 때에 개화했다. 빨간 꽃잎이 눈밭을 배경에 두고 활짝 피어올라 선연했다. 준은 연과 그 꽃을 보고 어떤 꽃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동백이잖아, 바보야—동백도 몰라?”
“동백…이게 동백이구나.”
“정말…다음에 책이라도 좀 구해서 읽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눈이 완전히 녹고 말랐던 숲이 우거져가고 어떤 꽃은 피고 어떤 꽃은 저물었다. 어느덧 봄이었다. 봄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여름 비라도 된 듯, 세차게 내리는 비는 천둥번개를 동반했다. 굵은 빗줄기가 창을 두드리고, 바람은 덜컥 거리는 소릴 만들었다. 준은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 깨어있는 채였다. 점점 비가 잠잠해져 가더니 어느덧 정적이 감돌았다. 그때 번개가 열차칸 위에 직격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잠깐은 잠잠했다. 그러나 바깥에서 어딘가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은 온통 젖어있어 대체 어디가 타오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연의 고양이를 데리고 연을 깨웠다.
“일어나봐…불 났어, 불.”
“...불?”
중요한 물건이랄 것도 없기에 몸만 보존해서 바깥으로 빠져나오니 불은 금새 여기저기로 옮겨붙고 열차칸 바깥을 애워쌌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만보고 있었다. 결국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안쪽이 타버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은 거셌다.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어떤 짐승보다 거대한 몸체를 가진 불꽃은 주변을 환하게 만들고 탄내를 내뿜었다. 이젠 어디서 살아야 하는 걸까. 앞길이 막막했지만 연도 준도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어쩌지?”
“살아가야지.”
불길은 끝을 모르고 활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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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쏠 땐 입술을 깨문다.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때문에 입술엔 항상 흉터가 져 있고 더러운 인상으로 기억되곤 한다. 갱에서는 항상 궂은 일을 도맡아 했었다. 요즘은 사람이 많아지고 험한 일이 줄었지만, 나이도 그리 많지 않으니 아직 한창이다. 그러나 요즘 갱은 내가 있을 때마다 몇몇이 내 눈치를 보며 어수선한 분위기다. 전부 다 토니 우드, 저 놈의 탓이었다. 그는 계속 역마차나 열차 강도 같은 털이를 하자고 보스 로저 타운젠드에게 제안했다. 그리고 처음 몇 번을 연달아 크게 성공했다. 그러면서 그 놈의 입김이 세지기 시작했다. 놈에게 들러붙은 놈들은 이제 내 말을 더는 듣지도 않았다. 마치 다른 갱단이 된 것처럼 그들은 아무 사람이나 막 죽여대며 갱단의 악명을 키웠다. 원래 같으면 보스인 로저 타운젠드나 이인자 키미 라이코넨, 둘 중 한 사람이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그를 제지했을 것이다. 허나 로저는 토니 우드에게 동조하는 듯했다. 키미는 말수가 줄고 행동이 둔해져 늙은 나귀처럼 되었고, 갱단의 일에서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반면 로저 타운젠드는 여전히 강경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속내는 알 수 없다. 몇 번의 성공에 그는 어딘가 달라졌다. 우리는 서서히 옛 모습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타운젠드 갱단은 몇 년 새 주 자금원이었던 밀주업이 몰락하며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갱단원 전원의 목에 현상금이 걸렸고, 활동 반경이 넓어진 마피아들과 대립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부에서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행동대의 데이비드 레예스는 토니 우드를 데려오며, 자신의 오랜 친구이며 전쟁 때 남부군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억양이 드세고 얼굴이 험했다. 수염은 늘상 지저분했고 옷도 더러운 옷만 골라입는 것처럼 항상 누렜다. 또한 상당한 아첨꾼이라 로저의 옆에 붙어 듣기 좋은 말만 해댔다. 로저가 틀릴 때마다 항상 그의 오랜 동료 키미 라이코넨이 그의 생각을 바로잡아 줬었지만 이제 로저는 키미와 별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결국 토니 우드의 말에 현혹된 로저 J. 타운젠드는 열차나 역마차 강도같은 큰 위험을 안는 건수보다는 지속적으로 리스크 적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체형 자금원을 선호하던 과거의 자신을 통째로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저는 또다시 서부 횡단 열차를 털 것을 제안했다. 토니 우드가 물어온 건수였다. 열차 털이는 의외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쓰러뜨린 나무로 열차를 멈춰 세우고 토니 우드와 데이비드가 화물칸 문을 터뜨렸다. 객실 칸이 없는 화물 열차였다. 행동대 인원들이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키미는 그 뒤를 보는 중이었고 따라온 매킨토시 부인은 말을 지켰다. 나와 로저는 근처 언덕 위에 엎드려 망을 보는 중이었다. 갱의 주요 인원이 모두 참여한 큰 임무였다. 그러나 한참 금고를 터뜨렸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거기 다음 칸도, 빨리 열어 봐!” 토니 우드는 열차 안에 들어간 젊은 갱단원들의 기강을 잡고있었다. 어느정도 필요한 일이긴 하니 저런 면에서 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아니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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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선
- 2026-03-13
나는 영원히 미룰 수 있을것만 같은 새벽이 익숙해, 이 밤을 지새우기를 진작에 결심하였다. 가족들은 이미 잠에 들었고, 이 밤의 비는 아주 세차지도 않게 그저 밍밍히 낙하한다. 하늘은 어죽 희미하다. 그 색은 꼭 플로트 유리 몇 장을 덧대고 다린 물망초를 펴 바른 듯하다. 공기의 눅눅함에 천정은 녹아 흐를 듯하고, 내가 앉은 자리 마주보는 작은 창엔 한창 만개 중인 밤나무 가지가 천칭 위에 오른 듯 일정한 박자로 부딪혀온다. 나는 방문을 걸어잠그고 자리로 돌아와 화학 문제집을 펼친 뒤 인터넷 강의를 틀었다. 하얀 보드에 1.4배속으로 선을 긋는 강사를 보고있으니 환멸심도 들고, 눈 안쪽이 가려워 안구에 점안액을 떨어뜨렸다. 백 일쯤 남은 수능과 점점 세차게 몰아치는 비는 나를 피로하게 만들었고, 신경 쇠약이 무엇인지 깨달은지도 며칠 안되었으니 그만 잠에 들까도 생각해보았다. 핑 돌아가는 머릿속은 날개가 달려 이상한 중력을 받는 듯했다. 버릇처럼 돌리는 볼펜은 책상위로 툭 떨어졌고, 봄 비는 점점더 거세게 내리쳤다. 나는 먹먹한 기분에 딴 생각을 하다 졸음이 몰려와 집중을 잃어버렸다. 더욱 거세진 비와 함께 번개가 내리쳤고 하늘을 찢는 굉음에 나는 단잠을 깼다. 문제지엔 침이 고여있었다. 소매로 대충 닦아낸 뒤 환기된 분위기를 달래고자 창문을 열었더니 눈살이 찌푸지며 피곤도 살짝 달아날 만큼 심한 밤꽃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매웠다. 청명한 봄날의 냄새를 웃돌만큼 냄새는 지독했다. 방충망엔 빗물이 거미줄 이슬처럼 고였고, 아까부터 창문 앞에서 살랑거리던 밤나무 가지가 방충망을 때려 물방울이 툭 떨어져 창틀에 묻어났다. 빗속의 시원한 공기가 조금씩 밤꽃 냄새와 함께 방안으로 스며서, 왜인지 가슴이 떨리며 더욱 후덥지근해진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고 왠지 모를 수치심이 들었지만 다리를 간드러지게 스쳐가는 바람에 오묘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처음 키스를 했던 때의 느낌처럼, 충만함이 감돌았다. 노래방을 가는 취미는 없지만, 첫 연애의 모호성은 나에게 조금 특이한 감각을 느끼게 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둘이서 좁디 좁은 밀실에 갇혀 한 시간 가량을 보낸다는 것은, 방 안을 비추는 카메라가 있음에도 프라이빗함에 대한 망상과 흥분감을 고취시키기엔 충분했다. 초여름 비오는 날 에어컨이 아주 차갑게 틀어져 있는 방에 들어가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 지 몰라 차트를 순회하던 중 흐름이 끊겼고, 달라붙어 앉아있던 우린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대화도 없었다. 학교를 마친 직후라 우린 둘 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애는 내가 치마만 입고있는 것보단 교복 치마속에 체육복 반바지를 입는 것을 굳이 더 좋아했고, 난 그게 일상복이었던 터라 굳이 체육복을 벗지도 않고 그렇게 계속 입고있었다. 다리를 붙이고 딱 붙어 앉아있으니 에어컨의 추위는 부분만 가셨다. 그는 나에게 더 달라붙어 앉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안추워?” “조금, 시원해.” 그리고 허그를 했다. 투명 문 때문에 바깥이 신경쓰였지만 시험 막일 점심때
- 유진선
- 202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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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요 밎장굴친 유진선 씨
@강완 멀리안간다~
소설
@구포대교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