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주론 O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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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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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수필 하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수필 말이다. 물론 독자들에게 나에 대해 읽게 하는 것이 지금까지 나의 문학관과는 반대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내가 비단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말할 수 있는, 말하자면 그저 내가 써야 할 것을 쓸 뿐이며 나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과는 무관하고 무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나는 자기 연민에 과하게 빠진 글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 읽어보기를 권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내 문학의 한쪽 면을 보기에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개인적인 수필로 그대 독자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내 사상이 크게 달라졌다거나 발작적인 것은 아니다.
우선 첫째로, 내가 이전 비평들 중에서 후에 쓰겠다고 약속한 것들을 최대한 빨리, 독자들에게서 잊히기 전에 쓰기 위함이며, 둘째로는 내가 계속 생각하고 있지만 비평으로 쓰기에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단상들을 소개해보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내가 이렇게 자기 증언적인 글을 씀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되지 못한다. 다만 누가 알겠는가. 이런 글이 나의 초반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 될지 말이다. 별 재미도 없는 변명은 이제 집어치우자.
나는 4개의 초등학교, 2개의 중학교, 1개의 고등학교를 다녔고 또 하나의 고등학교를 졸업할 예정이다. 나는 오케스트라와 야구, 영재고 준비를 했으며 모두 실패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문학가는 쉽사리 "실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실패를 확신하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린다. 죽어서 유명해지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내 목적은 아니다. 아마 문학을 시작한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살아서 유명해지는 것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젊어서 유명해지는 것을 상상은 한다. 그럴 일은 요원하지만 말이다.
또 나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하자면, 나는 굉장한 부자다. 모든 면에서 말이다. 나는 거의 모든 교육의 기회를 누렸고 지금도 누리고 있으며 아마 후에도 누릴 것이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전혀 불행하지 않으며 나는 나름대로 행복한 인생을 살 자신이 충분히 있다. 물론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노라면 depression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우울이라 한다면 나는 부정할 것이다. 나는 흥분과 차분을 모두 즐길 줄 안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화 내는 것과 멍 때리는 것 모두를 좋아한다. 그것들이 나에게 대단한 기쁨이나, 출처 모를 말을 인용하자면, '삶을 살 만하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그런 부분에 있어 이원론적인 행복과 불행에 대한 관념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런 접근의 연장선에서, 나는 나의 친구들에게(물론 링구아 프랑카로 대화한다) 이따금씩 자살을 해야 할 때면 펜타닐 과다 복용으로 죽고 싶다고 말한다.
각설하고, 그런 점에서 나는 어쩌면 금욕주의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할 생각은 없다.
나는 굉장히 많은 것에 관심이 있다. 어떨 땐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을 가져서 뭘 하든 항상 실패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한 가지를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며, 어쩌면 그저 싫어하는 걸 넘어 원초적인 두려움이 있다. 그것은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바로 내가 영재고를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모를 사람들이 있을까 봐 잠시 내가 지원했던 학교에 대해 일러두자면, 그 학교는 한 기수에 120명이 입학하는데, 그중 일흔 명 정도가 서울대나 카이스트로 진학한다. 설명은 그만하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 년 반을 들이부어 준비를 하고도 실패한 것이다. 그때 실패를 하고서야 깨달은 것이, 그 일 년 반 동안 단 한 권도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중1 때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음을 생각하면 나는 말 그대로 '퇴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는데, 내가 책을 읽었던 거의 유일한 이유인 선민의식도 진짜 영재들을 만나며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저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필요한 과정이긴 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엘리트들을 보면서 선민의식을 고쳤다는 거 자체가 내가 아직 엘리트주의 프레임 속에 스스로를 설정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박학은 아니더라도 다식한 사람이 되었다.
영재고를 준비하며 얻은 또 다른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가 있는데, 첫째는 결정론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문학적 취향이 너무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현대 문학 대부분을 잘 읽지 못한다. 물론 각각의 문체가 다른 것을 이렇게 일반화하는 게 절대 옳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가 있기는 하다. 각론이 길어질 것 같은데 양해 바란다. 애초에 그것들을 비평으로 쓸 생각이었고 이후에 다시 비평으로 정리할 것이다. 우선 재미없는 사랑 얘기들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사랑 얘기를 비판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이 사랑을 신성시하면서 그것이 내재한 폭력성은 완전히 외면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미화를 하면 좋겠으나, 그런 것조차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런 사랑 얘기를 다루는 책들은 특별히 다른 장르가 아닌 이상에야 리얼리즘을 추구하려 하는데, 이미 어느 감정에 대하여 비판할 의지가 없으면서 리얼리즘의 틀 안에 있으려 하는 점에서 나는 그런 사랑 이야기들을 혐오한다.
사랑이라는 감정, 그리고 그것의 무분별하고, 아니, 분별력을 잃게 조장된 그 감정의 표현에 의해 생기는 그 관계에 대해서 잠시 담백하게 논해보겠다. 데이트 폭력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이견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그 데이트 폭력이 사랑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개념이 더해졌기 때문에 두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하며 동시에 그 둘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때, 인간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가장 합리적이고 명쾌한 폭력의 정의 하에서 사랑은 그의 폭력적인 동위체와 단일 선상에서, 연속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선 예시를 들며 설명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대부분의 사례에서 연인 간의 관계는 어떤 규칙을 설정하지 않는다. 나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독자라면 내가 전에 연인 간의 헌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기억을 할 수 있을 텐데, 같은 원리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보이는 이런 '아나키' 상태의 두 사람은 서로가 내재한 감정 중 가장 강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한 감정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이런 감정의 위험성은 비단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이 표출되며, 심지어는 관계 이전에 전제되기도 한다. 어떤 연인을 생각해보자. 여자가 남사친이 많아서, 자기 남사친과 단둘이 밥을 먹으러 갔다. 그러나 남자 친구는 '모종의' 이유로 여자 친구에게 화를 내었다. 이 화는 정당한가? 혹자는 정당하다고 말할 것이고 혹자는 정당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또 다른 예시다. 만약 그 여자 친구가 몰래 남자 친구를 만들었다면 어쩔 텐가? 그래도 남자 친구는 참거나, 혹은 화를 내야 하는가? 후자에 대해서 먼저 말해보겠다. 화를 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다른 이유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연인 간의 의무'일 것이다. 내가 아까 말한 '모종의' 이유도 또한 연인 간의 의무이다. 나는 이쯤 되어서 독자들이 이상함을 느끼길 바라지만, 더 말을 이어보겠다.
연인 간의 의무라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함에도 그것이 준수되리라고 기대된다면 최소한 규칙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 규칙에 대하여 내가 전혀 들어보지 못했음은 차치하고서도(물론 계약 결혼에 대한 유명한 예시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과 완전히 일치하는지도 의문이며 하술할 설명이 충분한 대답이 될 것 같다) 만약 헌장이나 규범을 전제한 사랑이 존재한다면, 비폭력성을 위해 우리는 수많은 감정의 표출에 관하여서도 제한을 걸어야 한다. 가령 스킨십이나 키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경직화된 규칙들의 필요성이 널리 인정되고 공감된다면 인간은 한층 더 자유로워지고, 관계는 더 폭력성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에까지 온다면,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과연 인간 개개인이 어느 관계에 대하여 완전히 평등하고 동일한 위치에 설 수 있냐는 것이다. 규칙들(이하 계약이라 한다)이 상호의 동의를 받고 성립되어야 하는데, 과연 완전히 평등한 조건이 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비폭력적인 사랑이 반드시 계약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광의의 매춘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잠시 거북한 단어를 몇 개 썼다. 혹자는 이것을 레드필이라거나 성 인지 감수성이 떨어진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많이 할 말은 없다. 다만 이것이 '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 그리고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느 감정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다.
변명은 그 정도로 하겠다. 하여튼 이러한 이유로 나는 사랑의 폭력성을 외면하는 사랑 이야기들을 싫어하는 것이다. (이 비판은 나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나는 나를 리얼리스트가 되기엔 실력이 부족한 젊은 작가 정도로 비호해주고 있다.) 그러나 사랑 이야기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시장주의 원칙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주류인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이쯤에서 '후에 글로 쓰겠다고 약속한' 한 가지를 더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은 글쓰는 이의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나의 사견이다. 사견이라 함은 그리 길게 쓸 것도 없고, 힘주어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창작에 대하여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는 창작의 능력이 기술이나 기능으로서, 일종의 전문직과 같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창작으로서는 어찌해도 시장 가치의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다. 내가 어려서 하는 배부른 소리이긴 하지만, 여전히 나는 창작에 대해 카피레프트를 지향한다. 최소한 문예에 대해서는 말이다. 만약 문학 작품에 대해 그 작가가 배타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도대체 문학이 무엇인지부터 알아가야만 한다. 나는 문학이 인문학적 역사 기록의 한 형태라고 믿는다. 문학은 인간에 대한 증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 작품에 대한 권리를 과학 논문이나 아티클처럼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공개 재판과 같은 것이다. 어떤 주장이든 어떤 사실이든 무언갈 호소하고 싶거나 무언갈 써서 남기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지 더 이상의 과정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그리고 문학은 작가와 독자의, 인간과 인간의 끊임없는 대화인데, 굳이 수신자 부담 요금제를 강제할 필요가 있는가? 윤석열 탄핵을 선고 결정문 전문을 책으로 사서 읽고 알게 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학인의 책임감이 그보다 크게 가볍지는 않으리라 본다.
각설하고, 내가 현대 문학을 잘 읽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간단히 말하자면 짧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도전 정신을 자극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소설이 짧다는 것, 소설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리얼리즘에 반대된다고 느낀다. 이런 성향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쟁과 평화』를 읽고 나서야 이런 성향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리얼리즘에 있어 역사적 가치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모든 문학 작품은 인간에 대한 증언으로서 남아야지 이세계에서 드래곤을 잡다가 현실에 돌아온 어느 상상 속 고등학생에 대한 증언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플롯이 존재하고, 플롯이 시작되고 플롯이 끝나는 모든 부분이 핍진성이 있다 한들 연속적인 역사 속 인간의 포착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기준이 높은 것에 불과하고, 만약 그게 옳다 해도 같은 관점에서 내가 왜 소설을 쓰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들을 나는 모두 실패작이라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부분은 완전히 쓰레기고, 일부는 내가 쓰고 있는 어느 거대한 한 작품의 단편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말이다. 그 말인즉슨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이 있다는 소리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을 원래는 비밀에 부칠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 마음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에 대해 이야기함에 있어, 그리고 내가 도달한 몇 가지 개념들을 설명함에 있어 필요할 것 같아 잠시 말해보겠다.
내가 구상 중인(쓰고야 있지만 여러모로 지금까지는 너무 불만족스러워 쓰고 있다고 말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소설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종교에 관한 이야기다. 리얼리즘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미숙한 판타지 장르에 가까우려나. 운이 좋다면 그중 일부를 먼저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나는 한 지점에서 막혀 있다. 캐릭터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더욱 고뇌하게 하는 점은, 그것이 내 지식이 부족하거나 모티브를 충분히 찾지 않아서가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예수를 재구성하려 한다. 그것도 여러 번, 서로 완전히 다른 예수를 말이다.
이제는 내가 젊어서는 못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내가 비평을 요즘 많이 올리는 것도, 그렇게 막혀서 쓸 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예수를 재구성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예수에 대해 남아있는 사료라 해봤자 그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에 대해 남긴 에세이와 편지, 그리고 수십 년 후에 쓰여진 복음서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전태일을 생각해보자. 전태일에 대한 아무런 이전 기록을 참조하지 않고, 나 혼자서 전태일의 연대기를 쓸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또한, 복음서의 작가들은 그들의 창작물 앞이나 끝에나 그것이 창작되었음은 적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에 대하여서는 아주 단편적이고 건조한 몇 가지 정보들을 제외하고는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고로 예수의 재구성은 말하자면 술을 빚음의 창작과 비슷한데, 어떻게 보면 종국에 알코올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극히 어렵기도 하면서, 동시에 과정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일종의 여지를 충분히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만, 내게 예수에 대한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한때 도그마가 되었다가 힘을 잃은 후에 살아남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스스로를 정상성의 틀 안에 욱여넣었다. 얼핏 보면 정상화라 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작위적인 작용이기 때문에 그 모순과 문제점들은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잘못된 점은 기독교가 예수에게 정상인 코스프레를 시켰다는 점이다. 그들은 사회와 예수를 타협시키려 했고, 자기들만의 예수 해석을 내놓으며 예수가 마치 기성 가치의 수호자인 것마냥 설교를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으로 그들을 논파해보자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들이 예수가 베드로에게 건설하라 명령한 그 교회라는 증거가 없다. 신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에까지 가게 되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가장 지엽적인 것에 해괴한 관심을 가지고 주장하며 종교의 자유 뒤에 숨어서 그들의 애매모호함과 모순을 무시한다. 일례로 그들은, 아니, 그들의 교리는 예수의 재림을 믿으라고 가르치는데, 일단 성서 속에서 재림이 2000년 넘게 지연될 것이라는 맥락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게다가 예수가 물리적으로 재림한다 믿을 때에 "정상적"인 기독교는 불가능해진다. 당신이 지나치는 수많은 각각의 사람들은 당장 내일 재림이 일어나면 지옥불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아야 하는 것이다. 양심적인 기독교인이 어찌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나?(물론 천주교에서는 레오 14세가 동정적인 사람이길 기도하면 된다.)
또한 예수의 부활을 안 믿으면 이단 취급을 하는데, 당연하겠지만 히틀러가 부활한다면 나치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고로 부활 신앙은 (그렇게도 강조되었음에도) 지엽적이고 잉여적이며 올바른 신앙과는 하등 상관도 없을 뿐더러 신앙인의 사유를 방해한다.
많은 사람들이 일부 기독교의 행태만 빼면 기독교는 좋다고 보는 경우가 있는데, 본질적으로 기독교 자체(그러니까, 기독교 교리)가 문제이고, 모든 '일부 기독교의 행태'는 그저 그 교리들에 대한 합리적인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했다시피, 사실 길거리에서 전도하시는 모든 분들은 독자를 확정된 영원한 파멸로부터 구원해주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나는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이미 몇몇 사람들은 다양한 어조로 이를 강조해온 바가 있지만, 나는 나대로 증언해보겠다.
성서가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나는 그것이 대체로 그냥 이단 낙인을 피하려는 완곡 어법이라 본다. 풀어 쓰자면 그 말은 그냥 성서가 다 구라라는 뜻이다. 부분적으로 구라가 아니고 다 구라다. 홍수도 출애굽도 승천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할 것이다. 그것의 물리적 의미를 말하자면 차라리 바다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몬스터의 면을 끓이고 남은 물이라 믿는 것이 낫다.
혹자는 또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성서가 다 창작이고, 저자가 수천 년 동안 수십 명인데다 언어도 다 달랐는데 어느 통합적인 이해가 가능하다고 보는 걸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가끔 모세 오경 어느 구절에 대해 모세가 왜 이런 부분을 썼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데 그거 모세가 안 썼다. 애초에 교회가 가르쳐주는 성서의 저자들은 대부분 구라다. 게다가, 성경은 같이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니다! 다 다른 맥락에서, 다른 작가가, 다른 것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을, 열심히 읽어서 뭔가 공통적이거나 꿰뚫는 메시지가 있다 한들 그게 신에 대한 증명이나 믿음의 기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로 나는 무신론자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 아니 크리스천이다. 크리스천의 역어는 기독교인보다는 기독주의자가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나는 모든 크리스천은 무신론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휴머니스트인 크리스천들 말이다(인간이 본성적으로 휴머니스트인지는 또 다뤄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 무어라 하기에는 내 지식도 부족하고, 함부로 일반화할 것도 아닌 듯하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신념을 밖으로 내어 외칠 때 다원주의나 상대주의의 방패 아래 숨으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교회 참칭자들의 교리는 휴머니스트로서 모욕하고 파괴하고 끌어내려야 마땅하다. 그 교리들은 제노사이드를 옹호하고(예리코를 보라) 거짓을 퍼뜨리며(창조 과학까지 갈 것도 없이 불가지론을 퍼뜨리는 것 자체부터 그 교리의 거짓말의 파괴력을 볼 수 있다), 온건하든 과격하든 그 거짓말이 어떤 과학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옳다고 가르친다.
정리하자면, 예수는 한때 유명했던 목수(한국의 전통적인 표현에 따르면 그런 짓거리는 백수 짓이라 불리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신의 아들이기는커녕 그저 로마법 체계 내에서 살해된(유대인 고위층이 큰 역할을 맡기긴 했으나 사형은 어디까지나 총독의 권한이었으므로) 한 사형수였으며 수많은 문화적 아이콘 중 하나다.
기타 세세한 사항은 굳이 예수를 예시로 들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가 신이 아니라면 굳이 어느 절대적인 진리의 표현형일 필요는 딱히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저 극단적이고 분별없는 휴머니스트라 봄이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극단성을 대변해 줄 예시들을 굳이 들어야 한다면 몇 가지가 있다.
마태복음 8장 21절과 22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예수를 따르려던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예수에게 와서 물었다. 자기 아버지가 죽었는데 자기 아버지 시신을 묻고 예수를 따라도 되냐는 것이다. 예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를 묻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오라.”
극단적인가? 오, 좋다. 나는 그것이 휴머니즘의 극단성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고 생각한다. 죽은 것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외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생명 중심주의의 극단으로 간다면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는 베드로에게 대답한다. 예수가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말한 직후다. 베드로는 예수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꾸짖지만, 예수는 되레 화를 내며(성격이 괴팍하긴 했나보다) 대답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내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은 도대체 뭘 의미하는가? 자기 부인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이해하더라도 그리스어 원문에는 자기 자신을 재귀 대명사로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자아의 어느 한 부분을 부인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 온전한 자아의 부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까지도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은 바로 이것이다. 자아 부인의 휴머니즘에 대해 구상하는 것 말이다. 우선 자아가 작위적인 개념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우선 자아는 여러 가지 다른 접근 방식이 있다. 우선 권리의 주체로서 이해되는 자아, 자유 의지로서의 결정론 이전의 자아, 각 개인이 신경학적 계 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자극과 생각의 총체로서의 자아, 그리고 재귀 대명사의 자아 등등이 있다. 이에 대한 심리 이론은 많이 있겠으나 이 정도만 생각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모든 접근들은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 종합된다. 구심적인 신경 작용과 원심적인 신경 작용이 수렴되는 어느 한 물리적이면서 동시에 인문학적인 특이점, 바로 그것이다.
이 자아라는 개념에 대하여서는 특기하여 볼 만한 것이 굉장히 많다. 자아 부인의 개론은 그를 위해 조금 미루도록 하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아는 자극을 인지하고 생각을 창출해내며 신경계를 통하여 명령을 송신하는 주체이다. 그것은 직관적으로 전제하기 너무나 쉬워서 언어에 있어서도 그것은 필수불가결하다(1인칭의 보편성을 보라). 그러나 자아를 다룰 때에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이를 타아에 대한 이해와 동일시하여서는 안 된다. 이는 타아에 대하여서는 확신할 수 없는 특이점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자아와 타아는 어찌하여 다른가? 타아에 있어 타아에 대한 이해는 환원론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타아는 Artificial Intelligence와 같이 그저 Human Intelligence로 이해할 수 있다. 타아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타아에게 있어(후술 하겠지만 자아에게도 있어) 뇌로 가는 모든 자극은 데이터로 변환된다. 그 변환된 데이터가 뇌의 신경학적인 기존 상태와 맞물려 작용하여 다시 출력값을 내놓게 된다. 그런 환원론적 이해가 타아에게 있어서는 전부이다. 세상의 수많은 자아들은 역지사지를 당연히 정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각 자아에게 있어 타아의 환원론적 이해를 방해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타아는 자아와 같지 않고, 또 자아와 같음을 증명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자아는 무엇인가? 자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과학적으로, 환원론적으로 옳지만 아직 과학이 신경계의 작용을 모두 규명해내는 데 있어서의 진보는 굉장히 초보적인 수준이다(척삭동물은커녕 1mm짜리 예쁜꼬마선충조차도 겨우 재현해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하여서, 비록 그 전부를 규명하진 못하더라도, 뉴턴주의(이곳에서의 뉴턴주의는 현대 물리학적 결정론을 의미한다)의 반례를 그곳에서 찾아낸 것은 아니다. 고로 현실 물리 세계를 이해하는 한 가지 명확한 접근에 대하여 인간은 어떠한 성역도 설정할 수 없다. 고로 자유 의지가 착각임은 양보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아가 생각할 때에 자아의 생각을 해체하고 환원시켜 이해할 능력이 아직 없기 때문이지, 멀쩡한 사실을 중화시키거나 타협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사유하다 보면, 자아(자기 지칭이 이상하게 된 것 같은데, 지금의 주제에 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그냥 자아는 필자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는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그렇다면 자아와 타아를 구분 짓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모든 감각을 시각으로 대표하여 보자면,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시각 세포가 변환한 데이터를 시신경이 받아서 뇌로 전송하고, 그것을 뇌로 처리하는 과정이다. 뇌 내에서는 자명하게 그 데이터를 다시 어느 부분에서 재구성을 해야 하는데, 이는 뇌가 스스로 보정을 하기 때문이다. 맹점이나 환각이나 공감각 같은 특징들은 이러한 재구성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아는 그렇게 '처리된' 데이터를 보는 것일까?
또한, 왜 그 자체로서의 시각 데이터는 무의식이 되고, 처리된, 혹은 처리되는 과정 중의 어느 특정한 데이터만 의식 안으로 포함되는 것일까? 어쩌면 신경계 내부에 어떤 표식이 있어 어느 특정 부분만 "자아" 혹은 의식이고 다른 부분은 무의식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데이터로 변환된 시각 정보를 우리는 본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객관적인 인식으로서 그것은 그저 극히 복잡한 뉴런 간의 작용에 불과함에도,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어떤 컴퓨터와 완전히 동치라는 것을 자아의 경우에선 쉽사리 이해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다. 더 부연해보자면, 파란색과 초록색을 구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 데이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록색을 왜 초록색으로, 왜 절대적인 관점에서 초록색으로 보는 것이냐고 물으면 쉽사리 대답할 수 없다. 또한, 매 순간마다 자아가 인지하는 이 시각적인 화면은 어떤 데이터가 해석된 것인데, 그 해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차치하고서 해석이라 해봤자 그것은 데이터가 데이터로 변환되는 것이므로 여전히 이 화면이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를 타아에 대하여 실험하여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컴퓨터와 비교하여 설명하자면, 컴퓨터가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은 어떤 시각 데이터를 모니터에 전송하여 그 모니터가 그 시각 데이터에 대한 해석을 출력하는 것인데, 뇌 속에선 데이터 이외의 형태로 무언가 존재할 수가 없다.
그 정도가 지금까지 자아의 개념에 대해 생각하던 대부분일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유하게 되었는지도 까먹어버렸다. 그러나 이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이 끝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인문학의 열적 사멸이 있다는 것이다. 그냥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 반드시 이 우주가 죽는 것 같이 죽을 것이다. 문학을 할 필요도, 문학을 공부ㅏㄹ 필요도 문학을 가르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다 보면 잠시 무덤덤해지지만 곧 웃어버리게 된다. 슬프지는 않다. 내가 사랑할 것이 어디 가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이 생각보다 많이 늦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언젠가는 반드시 완성할 것 같다. 그다지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내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제 글을 마쳐야 할 것 같은데, 짧게 몇 가지만 더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요즈음 들어 괴상한, 적어도 비정상적인 글들을 자주 쓰는데, 발작적이거나 충동적인 일은 아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는다. 누군가 설명을 요구한다면 나는 톨스토이라 대답할 것 같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톨스토이에 대한 인식을 종합해서 보자면, 톨스토이는 무지막지하게 긴 글을 쓰는 옛날 작가, 지루한 작가임이 분명하다. 후기에는 종교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종교인임을 감안해도 그는 극히(힘주어 말하겠다), 극히 지루한 사람이다. 섹스를 하면 안 되고 현대적인 삶을 버려야 하며 농업에 종사해야 하고 온갖 화려한 옷 대신 낡은 루바시카를 입고 살며 뭐가 다 폭력적이라며 하지 말라던 사람이다. 나 또한 금욕주의를 정당화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톨스토이가 그렇게도 중요했던 이유는 아마 내가 본 첫, 다 죽어가는 인간의 전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말년의 사상이 유명하기도 했지만, 원래 (요즘 말로 하자면) 개씹상남자였다. 세상에 어느 35살이 자기가 사생아 만든 과정을 일기로 적어다가 18살 애한테 들이밀고는 청혼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원체 '비정상'적인 인간이었던 만큼 선한 인간으로 사는 것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독자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전쟁과 평화』에서 피에르가 발전하는 과정을 생각한다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굳이 홍보를 더 하자면, 개인적으로는 톨스토이의 사상보다 왼쪽에 있는, 혹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는 분명 너무 '러시아적'이라 하겠지만 말이다. 마침 페미니즘에 대하여 말을 했기 때문에 관련하여 부연해보자면, 물론 톨스토이에게 페미니즘은 중심적인 의제는 아니었으나,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말을 꺼내기는 했었다. 부록에 아주 짧게 나와 있는데, 농담 반쯤 섞어서 말하자면 여성들에게 어머니로 돌아가라는 취지의 말이었다. 사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나로서는 심히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만의 매력적인 해체주의를 발전시키기 전이고, 또한 맥락적으로 읽어보았을 때에는, 어쩌면 톨스토이는 성 역할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그저 어머니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신념이 있었던 듯싶다(대충 남자 또한 모성적인 감정을 가지고 모성애를 수행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다만 그 이후로 페미니즘에 대하여 특별히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어딘가 편지나 무언가 있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는 국가에 대한 비판을 점차 강하게 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양심에 굴복했다고밖에는 말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극단적으로 변한다. 그때가 아마 모스크바 인구 조사에 참여했던 시점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 집필 중이었는데, 이후로 그는 완전히 종교인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몇몇 사람들은 혹여 싫어할 수도 있다. 몇몇 제목들은 현대적인 문장형 제목이 되려다 만 종교 서적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해야 할 말을 한다. 또한 그는 일종의 무신론적 기독교인이었는데(나와 다르게 정교회 쪽이긴 하지만) 지금 기준으론 함부로 해선 안 될 말들이 많은 책들을 썼다.
그런 점에서 후기 저작에서 드러나는 톨스토이의 광기는 내게 꽤나 큰 영감으로 다가왔다. 아니, 영감 정도가 아니지, 나는 오랫동안 차고 있던 재갈을 풀어버렸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럴 것이다.
읽어보기를 권한다. 원래 독서는 영감을 발견하는 것보다도, 영감을 재확인하고 확신하는 데 있다. 나의 이해가 옳다면 필히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만 긴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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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에게 착하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럴 때마다, 나를 떠나가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갈망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나는 그 알 수 없는 강박에 의해, 일상을 불편으로 소화한다. 차라리 누군가 내게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해 주면, 이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다시 말해, 나를 나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노력 따위는 의미를 잃는다. 따라서 나는 떠나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깨달을 것이다. 사막에서 비가 내린다 한들 다시 뙤약볕이 드리우듯, 나를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이들이 생긴다 해도 다른 이들은 또 나를 떠나간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같다. 난 그 해결책으로 '갈증 없애기'를 택했다. 다만 조건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의 '갈증'이 '의미가 없다'라고 증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주변의 인물들은 좋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거의 아무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 갈증을 놓지 않은 이유이자, 내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원인이다. 아무래도 나는 그것을 위선 혹은 연민으로 생각하나 보다. 다시 돌아가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갈망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는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첫째, 천성 나쁜 사람이라서, 모두가 지향하고 있는 좋은 사람을 표방하는 것이다. 이 주장이 옳다면, 세상에는 완벽히 좋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좋은 동시에 나쁜 사람이다.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좋음과 나쁨의 정도는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인기(人氣)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차이가 있다. 대부분이 싫어하는 사람이 존재하지만, 다수가 착하다고 예찬하는 사람도 존재하며, 이것은 각 개인의 좋은과 나쁨의 비율이 다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둘째, 처음부터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꽤나 극단적으로 보이는 주장이다. 하지만, 위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인기(人氣)라는 속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에게는 각각 불공평 삶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나쁜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좋은 사람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몇몇은 후자의 말에 반발할 것이다. 피나는 노력 끝에 인기(人氣) 얻은 이들, 예컨대 아이돌이나 연예인 말이다. 나는 그런 피나는 노력을 해서, 잘 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 노력이 그대를 무대로 이끌어주었다면, 그대는 속되게 말해 '될놈될'이었던 것이다.
- 박해랑
- 2026-07-09
- 유율
- 2026-07-04
기말고사거든요 두 과목을 치고 도서관에 조금 있다가 왔죠 집에 두 과목은 화법과 작문이랑 사회문화였어요 도서관에서는 뭘 했더라 월간지를 읽었는데 여러 개를 읽었어요 집에 왔어요 빵이 식탁 위에 있어서요 먹었어요 하나를 먹었는데 제가 조금 예전과 달라졌어요 젤리가 먹고 싶어서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가서 무인 아이스크림점으로 갔어요 거기 젤리가 있거든요 근데 저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애들 3명이 들어오길래 제가 뭘 사는지 볼까봐 그냥 나왔어요 앞에 있는 이마트24로 갔어요 거기서요 뭘 먹고는 싶은데 그리고 그게 몸에 별로 좋지 않다는 것도 아닌데 영양정보를 확인했어요 짱셔요가 당류 함량이 30g이었어요 당알코올 2g이었는데 먹으면 취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걸 사고 고개 숙이고 꾸벅 나왔어요 오르막길을 오르며 먹었어요 하나 둘 그런 기분만 좋게 만드는 것을 왜 먹나 싶었어요 할 게 없어서 이런 것도 먹어요 저는 집에 왔더니 허기가 진 건지 중독이 된 건지 모르겠어요 빵을 하나 더 먹고 예감이라는 과자를 뜯어 먹고 사과 주스를 마셨어요 저는 왜 이러는 거죠 너무 무책임한 듯했어요 그거 아세요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먹고 울면서 먹어요 먹기 싫어서 근데 뱉기는 싫어요 완전 어린왕자의 술꾼 같았어요 그 책을 중학생 때 읽었는데 이제야 그 뜻을 깨달으면 어떡하죠? 그래도 알고 있어 다행이에요 술꾼은 중독성이 있는 물질에 내성이 생겨 끊지 못하는 고착 상태를 표현한 인물이었어요 절 닮았어요 하하 빵을 먹기 싫은데도 입에 넣는 모습을 보면 어린왕자가 물을 거예요, 왜 빵을 드세요? 전 답하겠죠. 먹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거든. 왜 나빠지는데요? 빵을 먹지 않으니까! 이것도 잘 모르겠네요 제가 맞게 쓴 건가요? 그걸 굳이 따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저는 지금 정확하지도 않고 말하자면 흐물거리는 상태예요 보기 싫죠 그리고 허영쟁이도 절 닮았어요 아니 모든 사람이 그럴지도 모르지만요 허영쟁이는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슬프지만 옆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타인을 찾고 있었던 거예요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요 별만 반짝이죠 위에서 그것은 아름답지만 그것만으로는 외로움을 떨쳐낼 수 없어요 왕도 저 같아요 저는 꼭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하니까요 머릿속에서 은연중에 명령을 하죠.. 상대방은 절 신경쓰지 않는데 저는 저를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별을 소유하는 사업가는 대부분 사람들 같아요 놓아 주면 좋겠어요 나도요 가로등을 켜는 사람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사람이에요 하나 그게 그에게는 더 행복할지도 몰라요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무목적의 우주 속에 떨어진 것보다는 보람 있는 (혹은 그렇게 믿는) 일을 하는 게 자신을 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줄 테니까요 (그게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각해 보면 주위를 둘러싼 것 중 완벽하게 설명된 것은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칸트를 꽤 좋아하나 봐요 사람은 너무 자주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니까요 칸트는 애초에 믿기로 한 거죠 흔들리고 싶지 않아서 마치 제사장처럼 지리학자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있
- 드시코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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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사님 안녕하세요. 방금 다 읽어봤는데 방대한 양의 생각임에도 이렇게 읽기 쉽고 세련되게 표현한다는 점이 정말로 대단하신 것 같아요. 특히 언제나 문장력이 부족한 저에게는 자신의 신념이나 주장을 이렇게 멋진 문장들로 표현한다는 것이 부럽게 느껴지네요. 다만 몇 가지 의문점이 남는 것 같아 이렇게 나마 남겨보고자 합니다. 먼저 글에서 기독교 뿐 아니라 예수 자체를 부정하셨는데, 물론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문장이긴 하지만 그 유명한 니체도 부정하지 않은 예수를 부정한다는 것이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네요. 또한 영적인 주장을 물질적으로 확대하는 것에 대한 비판에는 저도 동의하지만 이 물질적 면에 대한 비판을 크리스트교의 정신적 주장에 대한 부정까지 과도하게 확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리고 제 부족한 이해에 따르자면 크리스트교에 대한 반론의 주된 근거가 역사학적 근거인 듯 한데 종교에 대한 이런 유물론적 반론은 결국 종교적 의미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라기 보단 본질로 둔갑한 표상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설령 종교의 진리가 단지 우연적일 지라도 그 우연성이 진리의 의미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 되진 못하니까요) 생각이 드네요. 두번째로 자아에 대해 결국엔 과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하실 것이라 하셨는데 자아를 뇌과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분명 가능하겠지만 자아가 언어에서 '필수불가결한 1인칭' 주어로서 논리적 의미를 지닐 때는 이런 물질적 해석을 적용하기 보다 이 논리적 자아 자체를 물질적 자아와 구분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제 어설픈 해석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이렇게 나마 의견을 남겨보았어요. 사실 기능사님의 대부분의 주장에는 동의하기도 하고, 또 색다른 관점이라 놀라웠던 부분(언제나 느끼는 것인데 기능사님의 톨스토이에 대한 깊은 사고에 감탄하게 되고, 무엇보다 존경하고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임에도 그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는 점이 그렇지 못한 저에게는 놀랍게 다가왔네요)도 많아서 언제나 기능사님의 글을 애독하는 독자로서 남긴 글이니 이 부족한 이해와 사고에서 나온 몇 가지 의문을 너무 부정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으시길 바라요.
@Ted 아니 테드는 왜 나한테 듣기 좋은 말만하는 거야... 데카당할 것만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