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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의 산물

  • 작성자 추구
  • 작성일 2025-07-26
  • 조회수 446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찰나의 순간들에 매몰되어 후회의 산물로 전락하는 것만큼 미련한 일은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러한 미련은 나의 삶의 조타수가 되었고, 나는 그저 후회라는 길 위에서 전진인지 후진인지, 혹은 정체일지도 모를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회, 그것은 불확실성만큼이나 추상적이고 흐릿해서 미래를 향한 하나의 지표가 될 수도, ‘과거’라는 미련 속 무한의 굴레에 빠져드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이상은 명백히 전자를 갈망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의 후회의 근원은 어디일까. 도대체 언제부터 무한의 굴레에 빠져들어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일까. 감히 예상해보자면… ‘나’의 삶과 이 삐뚤어진 한국 사회 속 모순을 자각해버린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의 현실에서 안타까운 사실 중 하나는, 대부분의 삶의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의 원초적 근원이 ‘유년기 속 가정’ 에 있다는 점이다. 분명하고 인지 가능한 결핍으로 인해 그들의 증오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나에게 그러한 결핍은 없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경제적 어려움, 폭력, 착취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은 나의 유년기와는 거리가 멀다. 사랑받으며 자라왔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나 스스로조차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결핍은 무엇인가? 결과적으로, 내 삶의 환멸의 근원은 ‘나 자신’이 되어버린 셈이다. ‘돌연변이’, ‘부적응자’, 나는 나를 이렇게 정의 내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질 수 있기에, 어찌 보면 타인에게는 장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과도한 생각 자체는 나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때, 나는 나의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 즉 우울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았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현실과의 괴리가 큰… 그저 비유적 허상에 불과했다. 마치 한국의 주입식 교육처럼, 나는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한 키워드식 논술만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그저 흐리멍텅한, 공허한 눈을 가진 채로도 써 내려갈 수 있는 그런 말들. “내 삶의 고통은 한순간이고, 이 순간만 지나면 현재의 기억이 미래의 나에게는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다.”, “삶은 아름답고,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오듯 나의 삶도 언젠간 개화할 것이다” … 마치 사이비에 푹 빠져버린 독실한 신자가 할 법한, 그저 허례허식에 불과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말들 말이다. 아무리 삶을 푸른 하늘과 빛나는 별, 만개하는 꽃들에 비유해봤자, 나의 현실과 그러한 이상은 괴리가 크기에 내게는 크게 와닿지 못했다.

 현실이라는 뻔하고 지루한 소설 속, 죽음으로의 도피는 나름대로의 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흥미를 위해 나는 우선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물리적 현상에 국한된, 나의 몸 그 자체에 남겨두고 또 하나의 나는 몸속의 내가 떠올리거나 바라보는, 죽음에 가장 가까운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또 하나의 나’ 는 ‘몸속의 나’ 의 생각에 의해 수십 번이든 수백 번이든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죽음이든 간에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공상 속에서 많은 시간을 영위하기에, 어쩌면 남들은 나를 ‘현실의 문제에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극단적인 사람’으로 정의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선 나는, 나의 공상에 방해가 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기에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러한 생각들을 소거해버린다. 그게 사람이든, 관계든, 모두. 그래서일까. 나 역시 내가 인간관계에 있어 조금은 극단적인 사람이라는 정도의 자의식은 가지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공상은 나에게 흥미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기에 큰 문제도 함께 야기한다. 그건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무뎌진다는 것이다. 이미 ‘또 다른 나’는 수백 번 죽음을 경험했고, ‘몸속의 나’조차 그러한 죽음을 수백 번 목도했기에 ‘실재’의 죽음은 더 이상 나에게 날카롭거나 명징한 공포로 다가오지 않는다. 옥상의 난간에 서 있을 때도, 칼로 상처를 낼 때도, 새벽에 홀로 마포대교를 지날 때도, 목에 줄을 건 채 서 있을 때조차 쉽사리 긴장감을 느끼기 어렵다. 그저 한 발자국, 조금의 노력만 있다면 나는 이 모든 걸 끝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끝’ 이라는 결말에 나는 이미 너무도 무뎌져있다.

 이제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욕망은 단지 인식 속의 죽음이 아닌, ‘실재하는’ 죽음의 체험이다.

 그럼에도 나의 삶이 아직 끝맺어지지 못한 까닭은 미련 때문일 것이다. 어떤 미련인지, 이러한 미련이 언제까지 나를 붙잡아둘 수 있을지는 나조차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앞으로, 나의 죽음을 정당화할 이야기들을 적어나갈 것이다.

 완벽한 결말이 도래할 그날까지—. 나는 이로써 후회의 종결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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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구
  • 202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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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구
  • 202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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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귤
    감동했어요

    문장이 너무 예뻐요

    • 2025-07-29 21:47:12
    감귤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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